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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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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年(219)
二十四年이라 春正月 劉備擊夏侯淵하여 破斬之하다
夏侯淵 戰雖數勝이나 魏王操常戒之曰 爲將 當有怯弱時 不可但恃勇也
當以勇爲本이요 行之以智計 若但任勇이면 則一匹夫敵耳라하니라 及與劉備 相拒踰年
備自陽平으로 南渡沔水하여 緣山稍前하여 營於定軍山注+華陽國志 “漢中沔陽縣, 有定軍山, 北臨沔水.”하니 引兵爭之어늘
法正曰 可擊矣니이다 備使討虜將軍黃忠으로 乘高鼓譟攻之하니 淵軍 大敗 遂斬之하다
張郃 引兵還이어늘 督軍杜襲 收斂散卒하여 推郃爲軍主하니 衆心 乃定注+初操東還, 留襲督漢中軍事.하다
二月晦 日食하다
◑三月 魏王操出斜谷이어늘 劉備將趙雲 擊其軍敗之하다 夏五月 操引還하니 備遂取漢中하다
操自長安出斜谷하여 軍遮要以臨漢中注+斜谷道險, 操恐爲備所邀截, 先以軍遮要害之處, 乃進臨漢中. 或云 “遮要, 地名.”하니 劉備曰 曹公雖來 無能爲也 我必有漢川矣라하고 乃斂衆拒險하고 終不交鋒이러라
操運米北山下어늘 黃忠 引兵欲取之러니 過期不還이라 趙雲 將數十騎하여 出營視之할새 値操揚兵大出하다
遂前突其陣하여 且鬪且却하니 魏兵 散而復合하여 追至營下하다 入營開門하고 偃旗息鼓하니 魏兵 疑雲有伏하여 引去어늘
以勁弩射魏兵하니 魏兵 驚駭하여 自相蹂踐하여 墮水死者 甚多하고 相守積月 魏軍士 多亡注+亡, 逃亡也.이러라
五月 操引兵還長安하니 備遂有漢中하다 操恐備北取武都氐以逼關中하여 問雍州刺史張旣한대
旣曰 可勸使北出就穀以避賊호되 前至者 厚其寵賞이면 則先者知利하여 後必慕之하리이다
操從之하여 徙氐五萬餘落하여 出居扶風, 天水界하다 備遣將軍孟達하여 攻房陵하여 殺其太守注+房陵縣, 本屬漢中郡. 此郡, 疑劉表所置.하고
又遣養子中郞將封하여 與達會하여 攻上庸하니 太守申耽 擧郡降注+備養寇氏子名封, 爲中郞將. 上庸縣, 屬漢中郡. 魏略曰 “申耽初在西城‧上庸間, 聚衆數千家, 與張魯通, 又遣使詣曹公, 公加其號爲將軍, 使領上庸都尉.”하다
秋七月 하다
備設壇場於沔陽하여 陳兵列衆하니 群臣陪位注+沔陽縣, 屬漢中郡. 陪, 隨也, 伴也.러니 奏以備爲漢中王하니
讀訖 備拜受璽綬하고 御王冠注+王冠, 遠遊冠也.하고 立子禪爲王太子하고 拔牙門將魏延하여 領漢中太守하여 以鎭漢川注+牙門將軍, 備所創置.하다
備還治成都하여 以許靖爲太傅하고 法正爲尙書令하고 關羽, 張飛, 馬超, 黃忠 皆進位有差注+羽爲前將軍, 飛爲右將軍, 超爲左將軍, 忠爲後將軍, 前‧後‧左‧右將軍, 皆漢官.하다
遣司馬費詩하여 卽授羽印綬注+卽, 就也.한대 羽聞黃忠位與己竝하고 怒曰 大丈夫終不與老兵同列이라하고 不肯受拜
詩謂羽曰 夫立王業者 所用非一이라 蕭, 曹與高祖 少小親舊 而陳, 韓 亡命後至로되
論其班列하면 韓最居上이나 未聞蕭, 曹以此爲怨注+陳平‧韓信自楚而來, 韓信王而蕭‧曹侯, 故曰韓最居上.이니이다 今王 以一時之功으로 隆崇漢이나 然意之輕重 寧當與君侯齊乎注+言備以一時使忠與羽班, 而意之輕重, 則不在此. 曹操嘗表羽爲漢壽亭侯, 故稱之爲君侯.
且王與君侯 譬猶一體 同休等戚하여 禍福共之하니 謂君侯不宜計官號之高下 爵祿之多少爲意也니이다
一介之使 銜命之人이니 君侯不受拜하면 於是便還이어니와 但相爲惜此擧動 恐有後悔耳注+爲, 去聲.로이다 羽大感悟하여 遽卽受拜하다
◑八月 漢中將關羽 取襄陽하다
關羽使麋芳守江陵하고 傅士仁守公安하고 羽自率衆하여 攻曹仁於樊하니
使于禁, 龐德等으로 屯樊北이러니 八月 大霖雨하여 漢水溢하니 平地數丈이라
與諸將으로 登高避水어늘 羽乘大船하여 就攻之하니 禁等 窮迫遂降하다
龐德 力戰하여 矢盡 戰益怒하고 氣益壯이로되 而水浸盛하니 吏士盡降이라
乘小船하여 欲還仁營이라가 船覆하여 爲羽所得하니 立而不跪 羽謂曰 何不早降 罵羽한대 羽殺之하다
急攻樊城하니 城多崩懷 衆皆恟懼러니 或曰 可及圍未合하여 乘輕船夜走니라
滿寵曰注+寵爲汝南太守, 操令助曹仁, 屯樊城. 山水速疾하니 冀其不久 聞羽遣別將하여 已在郟下注+郟縣, 屬川郡. 郟下者, 猶言許曰許下也.라하니 自許以南으로 百姓 擾擾로되 羽所以不敢遂進者 恐吾軍掎其後耳
今若遁去하면 洪河以南 非復國家有也리니 君宜待之注+洪河, 大河也.니이다 仁曰 善타하고 乃沈白馬하여 與軍人盟誓하고 同心固守하니
城不沒者 數板이라 羽乘船臨城하니 外內斷絶이러라
羽又遣別將하여 圍襄陽하니 刺史胡脩 太守傅方 皆降注+脩荊州刺史, 方南鄕太守.하다
操聞龐德死하고 流涕曰 吾知于禁三十年이러니 何意臨危 反不及龐德邪注+操收兵兗州, 禁卽爲將.아하니라
魏王操殺丞相主簿楊脩하다
楊脩, 丁儀 謀立曹植爲魏嗣하니 丕患之하여 以車載廢簏하고 內吳質하여 與之謀注+簏, 音鹿, 竹高篋也. 內, 讀曰納.러니
脩以白操한대 丕懼하여 告質이어늘 質曰 無害也니이다 明日 復以簏載絹入이러니 脩復白之하니 推驗 無人이라 操由是疑注+推, 案也.러라
以驕縱見疏注+植乘車行馳道中, 私開司馬門出, 旣得罪矣. 曹仁爲關羽所圍, 操欲遣植救仁, 而植醉, 不能受命, 於是益見疏.로되 脩亦不敢自絶이라 每當就植 慮事有闕하여 忖度操意하여 豫作答敎十餘條하여 勅門下하여 隨問答之하니
於是 敎裁出 答已入注+裁, 與纔同.이라 操恠其捷하여 推問 始泄하니 遂收殺之하다
關中營帥許攸降注+此又一許攸, 非自袁紹來奔之許攸也.하다
攸擁衆不附而有慢言이어늘 操怒하여 欲伐之하니 群臣 多諫이라 操橫刀於膝하고 作色不聽이어늘
長史杜襲 入欲諫이러니 操逆謂之曰 吾計已定하니 卿勿復言하라
襲曰 若殿下計是邪인댄 臣方助殿下成之어니와 若殿下計非邪인댄 雖成이나 宜改之니이다
殿下逆臣令勿言하시니 何待下之不闡乎注+闡, 大也, 開也, 明也.잇가 操曰 許攸慢吾하니 如何可置注+置, 猶捨也, 捨而不問也.리오
襲曰 今 豺狼當路어늘 而狐狸是先하시니 人將謂殿下避彊攻弱이라 進不爲勇이요 退不爲仁이니이다
聞千鈞之弩 不爲鼷鼠發機注+三十斤爲鈞. 千鈞之弩, 言其重也. 鼷, 音奚. 鼷鼠, 小鼠也, 極細, 不可卒見, 囓人及鳥獸, 皆不痛.하고 萬石之鍾 不以莛撞起音注+四鈞爲 莛, 音庭, 草莖也. 撞, 擣擊也.이라하니 今區區之許攸 何足以勞神武哉잇가 操曰 善타하고 遂厚撫攸하니 攸卽歸服하다


己亥年(219)
나라 孝獻皇帝 建安 24년이다. 봄 정월에 劉備夏侯淵을 격파하여 참수하였다.
】 처음에 夏侯淵이 전투에서 비록 여러 번 승리하였으나 魏王 曹操는 항상 그에게 경계하기를 “장수가 되어서는 마땅히 두려운 마음을 품고 약해져야 할 때가 있으니, 오직 용맹만을 믿어서는 안 된다.
장수는 마땅히 용맹을 근본으로 삼고 지모와 계책으로 행해야 하니, 만약 단지 용맹에 맡기면 일개 匹夫의 적수일 뿐이다.” 하였다. 이때 하후연이 劉備와 1년이 넘도록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유비가 陽平關에서 남쪽으로 沔水(면수)를 건너 산을 따라 점점 전진하여 定軍山에 진영을 설치하니,注+華陽國志≫에 “漢中郡 沔陽縣定軍山이 있으니, 북쪽으로 沔水에 임했다.” 하였다. 하후연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정군산을 다투었다.
法正이 아뢰기를 “공격할 만합니다.” 하니, 유비가 討虜將軍 黃忠으로 하여금 높은 곳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게 하였다. 하후연의 군대가 크게 패하니, 마침내 하후연을 참수하였다.
黃忠이 夏侯淵을 베다黃忠이 夏侯淵을 베다
張郃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자 督軍 杜襲이 흩어진 병졸들을 수습해서 장합을 추대하여 군대의 주장으로 삼으니, 병사들의 마음이 비로소 진정되었다.注+처음에 曹操가 동쪽으로 돌아갈 적에 杜襲을 남겨두어 漢中의 군대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 2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 3월에 魏王 曹操斜谷으로 진출하자, 劉備의 장수 趙雲이 조조의 군대를 공격하여 敗退시켰다. 여름 5월에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니, 유비가 마침내 漢中을 점령하였다.
曹操長安에서 斜谷으로 진출하여 군대를 내어 요해처를 막고서 漢中에 접근하니,注+〈“軍遮要以臨漢中”은〉 斜谷의 길이 험하므로 曹操劉備가 길을 막고 습격할까 염려해서 미리 군대를 이끌고 요해처를 막고서야 비로소 漢中으로 접근한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遮要는 지명이다.” 하였다. 劉備가 말하기를 “曹公이 비록 오더라도 능히 무슨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내 반드시 漢川(漢中)을 소유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병력을 거두어 험한 곳을 막고 끝내 交戰하지 않았다.
曹操北山 아래로 쌀을 운반해오자, 黃忠이 그 쌀을 탈취하고자 하여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였는데, 돌아올 시기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趙雲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서 진영을 나가 순찰하였는데, 위세를 드날리며 크게 출동하는 조조의 군대를 만났다.
조운은 마침내 적진으로 돌진하여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퇴각하니, 나라 병사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서 조운의 진영 아래에까지 추격하였다. 조운이 진영에 들어가 성문을 열고서 깃발을 눕히고 북소리를 그치니, 나라 병사들은 조운이 伏兵을 설치했는가 의심하여 군대를 이끌고 떠나갔다.
조운이 〈弓弩部隊로 하여금〉 강한 쇠뇌로 나라 군대를 향해 쏘게 하니, 나라 병사들이 놀라 자기들끼리 서로 밟혀서 물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兩軍이 서로 대치한 지 한 달이 넘자 나라 병사들 중에 도망간 자가 많았다.注+은 도망하는 것이다.
】 5월에 曹操가 군대를 이끌고 長安으로 돌아가니, 劉備가 마침내 漢中을 소유하였다. 조조는 유비가 북쪽으로 武都氐族을 취하여 關中을 핍박할까 염려해서 雍州刺史 張旣에게 물으니,
장기가 대답하기를 “무도의 저족으로 하여금 북쪽으로 진출하여 곡식이 있는 곳으로 가서 적(유비)을 피하도록 권하되, 앞서 이동한 자에게 후한 상을 내리면, 먼저 이동한 자들이 이익을 얻어서 뒤에 오는 자들이 반드시 이를 사모할 것입니다.” 하였다.
조조가 그의 말을 따라 저족의 5만여 部落을 옮겨서 扶風天水의 경계로 나와 살게 하였다. 유비가 장군 孟達을 보내어 房陵을 공격해서 방릉태수를 죽이게 하였다.注+房陵縣은 본래 漢中郡에 속하였으니, 이 은 아마도 劉表가 설치한 듯하다.
養子中郞將 劉封을 보내어 맹달과 회합하여 上庸을 공격하게 하니, 상용태수 申耽(신탐)이 을 들어 항복하였다.注+劉備寇氏의 아들로 이름이 인 자를 양자로 들여 中郞將으로 삼았다. 上庸縣漢中郡에 속하였다. ≪魏略≫에 “申耽이 먼저 西城上庸 사이에 있으면서 수천 가호의 무리를 모아 張魯와 통하였으며, 또 曹公에게 사신을 보내었다. 이에 조공이 그에게 將軍이라는 칭호를 가하고 그로 하여금 上庸都尉를 겸하게 했다.” 하였다.
】 가을 7월에 劉備가 스스로 서서 漢中王이 되었다.
劉備가 漢中王의 자리에 나아가다劉備가 漢中王의 자리에 나아가다
劉備沔陽祭壇을 설치하고 병력을 진열하니
여러 신하들이 배석하였는데,注+沔陽縣漢中郡에 속하였다. 는 수행함이고 동반함이다. 신하들은 〈황제인 獻帝에게〉 유비를 漢中王으로 삼을 것을 아뢰었다.
아뢰는 글을 다 읽자, 유비가 절하고서 玉璽印綬를 받고 王冠을 쓰고注+王冠遠遊冠이다. 아들 劉禪을 세워 王太子를 삼았다. 또 牙門將軍 魏延을 발탁하여 漢中太守를 겸하게 해서 漢川에 진주하게 하였다.注+牙門將軍劉備가 처음 설치한 것이다.
유비가 돌아와서 成都治所(도읍)를 정하고서 許靖太傅로 삼고 法正尙書令으로 삼았으며, 關羽, 張飛, 馬超, 黃忠은 모두 차등을 두어 승진시켰다.注+關羽前將軍이 되고 張飛右將軍이 되고 馬超左將軍이되고 黃忠後將軍이 되었으니, 전장군‧후장군‧좌장군‧우장군은 모두 나라의 관직이다.
】 〈劉備가〉 司馬 費詩를 보내어 關羽에게 나아가서 印綬를 전해주자,注+은 나아감이다. 관우는 黃忠의 지위가 자기와 똑같다는 말을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大丈夫는 끝내 이 老兵(황충)과 同列이 될 수 없다.” 하고는 제수하는 인수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비시가 관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王業을 세우는 자는 사람을 등용하는 방법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 옛날에 蕭何曹參高祖와 젊었을 때부터 친구 사이였고 陳平韓信亡命하여 뒤에 왔습니다.
그러나 그 班列을 논하면 한신이 가장 위에 있었는데 소하와 조참이 이 때문에 원망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注+陳平韓信나라에서 망명해왔는데, 한신은 이 되고 蕭何曹參諸侯가 되었다. 그러므로 한신이 가장 윗자리에 있었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大王(漢中王)이 한때의 으로 漢升(黃忠)을 높이고 있으나 마음의 輕重이야 어찌 君侯와 똑같겠습니까.注+〈“今王……寧當與君侯齊乎”는〉 劉備가 일시적으로 黃忠關羽와 같은 반열에 놓았으나 마음의 輕重은 여기에 있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曹操가 일찍이 表文을 올려 관우를 漢壽亭侯로 삼았으므로 그를 칭하여 君侯라고 한 것이다.
또 대왕과 군후는 비유하면 한 몸과 같아서 좋은 일과 궂은일을 함께하여 화와 복을 함께하니, 어리석은 저는 군후께서 官號의 높고 낮음과 爵祿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개 使者로 명을 받든 사람입니다. 군후께서 제수하는 인수를 받지 않으면 이에 곧 돌아가서 復命하면 되지만, 다만 장군을 위하여 이 행동을 애석히 여기는 것은 장군께서 후회하게 될까 두려워서입니다.”注+(위하다)는 去聲이다. 관우가 크게 감동하고 깨달아서 즉시 제수하는 인끈을 받았다.
魏王 曹操가 그 夫人을 칭하여 王后라 하였다.
】 8월에 漢中의 장수 關羽襄陽을 점령하였다.
關羽가 華夏에서 위엄을 떨치다關羽가 華夏에서 위엄을 떨치다
關羽麋芳으로 하여금 江陵을 지키게 하고 傅士仁으로 하여금 公安을 지키게 하고는, 자신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樊城에서 曹仁을 공격하였다.
조인은 于禁龐德 등으로 하여금 번성의 북쪽에 군대를 주둔하게 하였는데, 8월에 큰 장맛비가 내려 漢水가 범람하니, 평지에도 물이 몇 길이 되었다.
우금이 장수들과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가 물을 피하였는데, 관우가 큰 배를 타고 가서 공격하니, 우금 등이 곤궁하고 급박하여 항복하였다.
龐德은 힘을 다해 싸워서 화살이 다 떨어졌는데도 싸움이 더욱 맹렬해지고 기세가 더욱 강성하였다. 그러나 물이 더욱 점점 불어나니, 관리와 병사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방덕이 작은 배를 타고 조인의 진영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배가 뒤집혀 관우에게 사로잡혔는데, 꼿꼿하게 서서 무릎을 꿇지 않았다. 관우가 “어째서 빨리 항복하지 않는가?” 하니, 방덕이 관우를 꾸짖었다. 이에 관우가 그를 죽였다.
關羽가 급히 樊城을 공격하니, 성벽에 무너진 곳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관우의 포위망이 아직 완전히 연결되지 않았을 때에 가벼운 배를 타고 밤중에 달아나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滿寵曹仁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滿寵汝南太守로 있었는데, 曹操가 그로 하여금 曹仁을 도와 樊城에 주둔하게 하였다. “산골짝의 물은 유속이 빠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빠질 것입니다. 듣건대 관우가 別將을 보내 이미 郟下에 군대를 주둔시켰다고 합니다.注+郟縣潁川郡에 속하였으니, 郟下許都許下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許都 이남의 백성들이 소요하고 있는데도 관우가 감히 전진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군대가 그 뒤를 공격할까 두려워해서입니다.
지금 만약 우리가 도망하면 洪河 이남이 다시는 국가의 소유가 아닐 것이니, 은 마땅히 기다려야 합니다.”注+洪河大河(黃河)이다. 조인이 “좋다.” 하고는 마침내 白馬를 물에 던지고서 병사들과 맹세하고 한마음으로 굳게 지켰다.
침몰되지 않은 성벽이 겨우 몇 높이였는데, 관우가 배를 타고 성에 접근하니, 성 안팎의 소식이 두절되었다.
關羽는 또 別將을 보내어 襄陽을 포위하게 하니, 刺史 胡脩太守 傅方이 모두 항복하였다.注+胡脩荊州刺史였고 傅方南鄕太守였다.
曹操龐德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于禁을 안 지 30년이 되었는데, 위태로운 일을 당함에 도리어 방덕만도 못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注+曹操가 병력을 兗州에서 수습할 적에 于禁이 곧바로 장수가 되었다. 하였다.
魏王 曹操丞相主簿 楊脩를 죽였다.
】 처음에 楊脩丁儀曹植을 세워 나라의 後嗣를 삼을 것을 모의하자, 曹丕가 이를 근심하여 수레에 낡은 상자를 싣고서 거기에 吳質을 숨겨 들여와서 함께 상의하였다.注+은 음이 鹿이니, 대나무로 만든 높은 상자이다. (들이다)은 으로 읽는다.
양수가 이 사실을 曹操에게 아뢰니 조비가 두려워하여 오질에게 고하자, 오질이 말하기를 “나쁠 것이 없습니다.”注+는 조사함이다. 하였다. 다음 날 조비가 다시 수레에 상자를 실어서 비단을 들여왔는데, 양수가 다시 이 사실을 조조에게 아뢰었다. 조사하여 증험해보았는데 상자 안에 사람이 없으니, 조조가 이로 말미암아 양수를 의심하게 되었다.
】 뒤에 曹植이 교만하고 방종하다 하여 曹操로부터 소외를 당하였으나,注+曹植이 수레를 타고 馳道 가운데로 달려갔고 은밀히 司馬門을 열고 나가서 이미 죄를 얻었으며, 曹仁關羽에게 포위되었을 적에 曹操가 조식을 보내어 조인을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조식이 술에 취하여 명령을 받지 못하니, 조식은 이에 더욱 조조로부터 소외를 당하였다. 楊脩는 감히 그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였다. 양수는 매번 조식에게 나아가게 되면 잘못되는 일이 있을까 염려해서 曹操의 뜻을 헤아려 敎令에 답할 10여 조항을 미리 만들어 조식의 門下에 명령해서 조조의 물음에 따라 답하게 하였다.
이에 조조의 교령이 나오자마자 바로 조식의 답안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注+(하자마자)는 와 같다. 조조는 대답이 빠른 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심문하여 비로소 진상을 알아내고는, 마침내 양수를 체포하여 죽였다.
關中營帥許攸가 항복하였다.注+이는 또 다른 한 명의 許攸이니, 袁紹로부터 도망해온 허유가 아니다.
許攸가 병력을 보유하고서 曹操에게 귀의하지 않고 게다가 교만한 말까지 하자, 조조가 노하여 그를 공격하고자 하니, 신하들 중에 하는 자가 많았다. 조조는 무릎에 칼을 비껴 세우고 怒氣를 띠면서 간언을 듣지 않았다.
長史 杜襲이 들어가서 간하고자 하였는데, 조조가 미리 그에게 이르기를 “내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두습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殿下의 계책이 옳다면 신이 바로 전하를 도와 계책을 이루어야 하겠지만, 만약 전하의 계책이 옳지 않다면 비록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마땅히 바꾸어야 합니다.
전하께서 미리 신에게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니, 어찌 아랫사람을 대하심이 이처럼 좁고 분명하지 못하십니까.”注+은 큼이고, 개방함이고, 분명함이다. 조조가 말하기를 “허유가 나를 무시하니, 어찌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注+와 같으니, 버려두고 묻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杜襲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제 사람들은 장차 殿下께서 강자를 피하고 약자를 공격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진하여도 용맹이 되지 못하고 후퇴하여도 이 되지 못합니다.
신은 듣건대 ‘千鈞의 쇠뇌는 생쥐를 잡기 위하여 발사하지 않고,注+30이라고 한다. “千鈞之弩”는 그 무거움을 말한 것이다. 는 음이 이다. “鼷鼠”는 작은 쥐이니, 매우 작아서 얼핏 보면 볼 수 없고 사람과 새와 짐승을 물어도 모두 아프지 않다. 萬石은 풀줄기로 쳐서 울리지 않는다.’注+4이라고 한다. 은 음이 이니, 풀줄기이다. 은 침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하찮은 許攸가 어찌 족히 대왕의 神武를 수고롭게 할 것이 있겠습니까.” 曹操는 “좋다.” 하고는 마침내 허유를 후하게 어루만지니, 허유는 즉시 歸順하였다.


역주
역주1 劉備自立爲漢中王 : “‘自立’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獻帝를 보존해준 것이다. 헌제가 살아 있으면 비록 劉備라도 〈그의 잘못을 드러내어〉 ‘自立’이라고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에 드러난 君臣의 의리가 엄격하다.[書自立 何 存獻帝也 獻帝在 雖劉備 以自立書之 綱目君臣之義凜凜矣]” ≪書法≫
역주2 여러……아뢰었다 : 이는 직접 獻帝에게 아뢴 것이 아니고, 다만 황제에게 아뢰는 형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뒤에 劉備가 황제에게 절하고 玉璽와 印綬를 받은 것 역시 형식적으로 꾸민 것으로 보인다.
역주3 (室)[升] : 저본에는 ‘室’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升’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魏王操號其夫人 爲王后 : “魏主 曹丕가 夫人 甄氏를 죽인 것을 근거하여 보면 ‘其’라고 쓰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其’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曹操가 夫人이라고 말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남편의 官爵을 따르고 또 魏公에게 夫人이 있는 것은 당연한데, 어째서 굳이 ‘그 夫人’이라고 칭하였는가. 조조가 魏公이 되었을 적에 ‘曹操가 스스로 섰다.’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夫人 또한 그가 스스로 夫人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夫人을 后라고 칭함에 ‘위왕 조조가 칭하였다.’라고 쓴 것이다.[據魏殺夫人甄氏 不書其 其者 何 其所謂夫人云爾也 婦從夫爵 魏公之有夫人 宜矣 曷爲必稱其夫人 魏公書操自立 則夫人亦其所自謂之而已矣 故號之爲后 書曰魏王操號]” ≪書法≫ 여기의 夫人은 제후의 妻에 대한 봉호이다.
역주5 : 고대에 城壁을 계량하던 단위로, 높이가 2尺, 길이가 8尺이다. 그러나 규모는 자세하지 않아서 張守節의 ≪史記正義≫에는 何休의 말을 인용하여 “8尺을 板이라 한다.” 하였고, 또 일설에 의하면 길이가 1丈 또는 6尺이라고도 한다.
역주6 (穎)[潁] : 저본에는 ‘穎’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潁’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 豺狼이……하시니 : 豺狼은 승냥이(늑대)로 강한 劉備의 군대를 비유하고 여우와 살쾡이는 약한 적으로 許攸를 말하는 것이다.
역주8 (百)[石] : 저본에는 ‘百’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石’으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11)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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