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關羽使麋芳守江陵하고 傅士仁守公安하고 羽自率衆하여 攻曹仁於樊하니
仁이 使于禁, 龐德等으로 屯樊北이러니 八月에 大霖雨하여 漢水溢하니 平地數丈이라
禁이 與諸將으로 登高避水어늘 羽乘大船하여 就攻之하니 禁等이 窮迫遂降하다
龐德이 力戰하여 矢盡에 戰益怒하고 氣益壯이로되 而水浸盛하니 吏士盡降이라
德이 乘小船하여 欲還仁營이라가 船覆하여 爲羽所得하니 立而不跪라 羽謂曰 何不早降고 德이 罵羽한대 羽殺之하다
目
【
目】
曹操가
長安에서
斜谷으로 진출하여 군대를 내어 요해처를 막고서
漢中에 접근하니,
注+〈“軍遮要以臨漢中”은〉 斜谷의 길이 험하므로 曹操는 劉備가 길을 막고 습격할까 염려해서 미리 군대를 이끌고 요해처를 막고서야 비로소 漢中으로 접근한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遮要는 지명이다.” 하였다. 劉備가 말하기를 “
曹公이 비록 오더라도 능히 무슨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내 반드시
漢川(
漢中)을 소유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병력을 거두어 험한 곳을 막고 끝내
交戰하지 않았다.
曹操가 北山 아래로 쌀을 운반해오자, 黃忠이 그 쌀을 탈취하고자 하여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였는데, 돌아올 시기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趙雲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서 진영을 나가 순찰하였는데, 위세를 드날리며 크게 출동하는 조조의 군대를 만났다.
조운은 마침내 적진으로 돌진하여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퇴각하니, 魏나라 병사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서 조운의 진영 아래에까지 추격하였다. 조운이 진영에 들어가 성문을 열고서 깃발을 눕히고 북소리를 그치니, 魏나라 병사들은 조운이 伏兵을 설치했는가 의심하여 군대를 이끌고 떠나갔다.
조운이 〈
弓弩部隊로 하여금〉 강한 쇠뇌로
魏나라 군대를 향해 쏘게 하니,
魏나라 병사들이 놀라 자기들끼리 서로 밟혀서 물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兩軍이 서로 대치한 지 한 달이 넘자
魏나라 병사들 중에 도망간 자가 많았다.
注+亡은 도망하는 것이다.
目
【目】 5월에 曹操가 군대를 이끌고 長安으로 돌아가니, 劉備가 마침내 漢中을 소유하였다. 조조는 유비가 북쪽으로 武都의 氐族을 취하여 關中을 핍박할까 염려해서 雍州刺史 張旣에게 물으니,
장기가 대답하기를 “무도의 저족으로 하여금 북쪽으로 진출하여 곡식이 있는 곳으로 가서 적(유비)을 피하도록 권하되, 앞서 이동한 자에게 후한 상을 내리면, 먼저 이동한 자들이 이익을 얻어서 뒤에 오는 자들이 반드시 이를 사모할 것입니다.” 하였다.
조조가 그의 말을 따라 저족의 5만여
部落을 옮겨서
扶風과
天水의 경계로 나와 살게 하였다. 유비가 장군
孟達을 보내어
房陵을 공격해서 방릉태수를 죽이게 하였다.
注+房陵縣은 본래 漢中郡에 속하였으니, 이 郡은 아마도 劉表가 설치한 듯하다.
또
養子인
中郞將 劉封을 보내어 맹달과 회합하여
上庸을 공격하게 하니, 상용태수
申耽(신탐)이
郡을 들어 항복하였다.
注+劉備가 寇氏의 아들로 이름이 封인 자를 양자로 들여 中郞將으로 삼았다. 上庸縣은 漢中郡에 속하였다. ≪魏略≫에 “申耽이 먼저 西城과 上庸 사이에 있으면서 수천 가호의 무리를 모아 張魯와 통하였으며, 또 曹公에게 사신을 보내었다. 이에 조공이 그에게 將軍이라는 칭호를 가하고 그로 하여금 上庸都尉를 겸하게 했다.” 하였다.
目
【目】 關羽가 麋芳으로 하여금 江陵을 지키게 하고 傅士仁으로 하여금 公安을 지키게 하고는, 자신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樊城에서 曹仁을 공격하였다.
조인은 于禁과 龐德 등으로 하여금 번성의 북쪽에 군대를 주둔하게 하였는데, 8월에 큰 장맛비가 내려 漢水가 범람하니, 평지에도 물이 몇 길이 되었다.
우금이 장수들과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가 물을 피하였는데, 관우가 큰 배를 타고 가서 공격하니, 우금 등이 곤궁하고 급박하여 항복하였다.
龐德은 힘을 다해 싸워서 화살이 다 떨어졌는데도 싸움이 더욱 맹렬해지고 기세가 더욱 강성하였다. 그러나 물이 더욱 점점 불어나니, 관리와 병사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방덕이 작은 배를 타고 조인의 진영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배가 뒤집혀 관우에게 사로잡혔는데, 꼿꼿하게 서서 무릎을 꿇지 않았다. 관우가 “어째서 빨리 항복하지 않는가?” 하니, 방덕이 관우를 꾸짖었다. 이에 관우가 그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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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許攸가 병력을 보유하고서 曹操에게 귀의하지 않고 게다가 교만한 말까지 하자, 조조가 노하여 그를 공격하고자 하니, 신하들 중에 諫하는 자가 많았다. 조조는 무릎에 칼을 비껴 세우고 怒氣를 띠면서 간언을 듣지 않았다.
長史 杜襲이 들어가서 간하고자 하였는데, 조조가 미리 그에게 이르기를 “내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卿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두습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殿下의 계책이 옳다면 신이 바로 전하를 도와 계책을 이루어야 하겠지만, 만약 전하의 계책이 옳지 않다면 비록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마땅히 바꾸어야 합니다.
전하께서 미리 신에게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니, 어찌 아랫사람을 대하심이 이처럼 좁고 분명하지 못하십니까.”
注+闡은 큼이고, 개방함이고, 분명함이다. 조조가 말하기를 “허유가 나를 무시하니, 어찌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注+置는 捨와 같으니, 버려두고 묻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