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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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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戌年(302)
太安元年이라 河間王顒 遣兵討李特이러니 不克하다
河間王顒 遣督護衙博하여 討李特軍于梓潼注+衙博, 姓名.하고 朝廷 復以張微爲廣漢太守하여 軍于德陽이러니
使其子蕩等으로 敗博兵하니 博走하고 衆降이라 自稱大將軍, 益州牧하다
立淸河王覃爲皇太子하다
齊王冏 欲久專政한대 以帝子孫俱盡注+太子遹死, 帝無子矣, 虨‧臧‧尙死, 帝無孫矣.이요 大將軍穎 有次立之勢注+穎於帝諸弟之次當及.하며 淸河王覃 武帝孫也注+覃, 遐之子也. 方八歲
乃上表請立爲皇太子하니 以冏爲太子太師하고 東海王越爲司空하여 領中書監注+越, 隴西王泰之子也, 元康元年, 受封. 泰, 宣帝弟馗之子也. 馗, 渠龜切.하다
秋八月 廣漢太守張微 討李特이러니 敗死하고 羅尙 擊之러니 亦敗하다
張微擊破特兵하고 進攻其營한대 李蕩 引兵救之하여 遂破微兵하여 殺之하고
李驤軍毗橋注+胡三省曰 “今懷安軍西北有中江, 源從漢州, 彌牟‧雒水‧毗橋水三水, 會爲一江. 懷安軍, 漢廣漢新都縣之地.”어늘 羅尙 遣軍擊之러니 屢爲所敗하다
遂進攻成都하고 李流軍成都之北이어늘 遣精勇萬人攻驤이러니
驤與流合擊하여 大破之하니 還者什一二러라
齊王冏 驕奢擅權하여 起府第 與西宮等하니 中外失望이라
侍中嵇紹上疏曰 存不忘亡 易之善戒也注+易大傳曰 君子安而不忘危, 存而不忘亡, 治而不忘亂. 臣願陛下無忘金墉하시고
大司馬無忘潁上하고 大將軍無忘黃橋하면 則禍亂之萌 無由而兆矣리이다
耽於宴樂하여 不入朝見하고 坐拜百官하며 符勅三臺하여 選擧不均하고 嬖寵用事注+坐拜百官, 謂坐受百官之拜也. 一說 “天子用三公‧九卿‧諸將軍, 猶引而拜之, 今冏安坐府第, 拜授百官也.” 案漢制, 以尙書爲中臺, 御史爲憲臺, 謁者爲外臺, 是爲三臺. 以私意選用, 符勅三臺, 使奉行, 不均之大者也.러라
南陽處士鄭方 上書諫曰 大王 安不慮危하여 燕樂過度하시니 一失也
宗室骨肉 互相疑貳하니 二失也 蠻夷不靜이어늘 不以爲意하니 三失也注+蠻夷不靜, 謂李特等寇亂梁‧益也.
百姓困窮이로되 不聞振救하니 四失也注+此一失, 蓋指成都王穎運米, 以收河南人心, 而不敢察察言之耳. 義兵有功이로되 久未論賞하니 五失也注+此言潁上之功, 猶有未敍者.니이다
孫惠亦上書曰 天下 有五難, 四不可어늘 而明公 皆居之하니 冒犯鋒刃 一難也
聚致英豪 二難也 與將士均勞苦 三難也 以弱勝彊 四難也 興復皇業 五難也
大名不可久荷 大功不可久任이요 大權不可久執이요 大威不可久居
大王 行其難而不以爲難注+謂在潁上時也.하고 處其不可而謂之可하시니 惠竊所不安也로소이다
明公 宜思功成身退之道하여 委重二王하고 長揖歸藩이면 則太伯, 子臧 不專美於前矣注+老子曰 “功成名遂身退, 天之道.” 二王, 長沙‧成都二王也. 吳太伯以天下讓, 曹子臧以國讓.리이다 不能用하니 恵辭疾去하다
謂曹攄曰 或勸吾委權還國하니 何如
攄曰 物禁太盛하니 大王 誠能居高慮危하여 褰裳去之하시면 斯善之善者也니이다 不聽하다
張翰, 顧榮 皆慮及禍러니 因秋風起하여 思菰菜, 蓴羮, 鱸魚鱠하여 歎曰 人生貴適志耳 富貴何爲리오하고 卽引去注+菰, 古胡切, 雕苽也. 一名蔣, 又謂之茭. 歲久, 中心生白臺, 謂之菰米, 其臺中有黑者, 謂之茭, 至後結實, 乃雕胡黑米也. 蓴, 水葵也, 生水中, 葉似鳧茨, 春夏細長肥滑, 採莖可噉. 三月至八月爲絲蓴, 九月至十一月爲猪蓴. 鱸魚, 巨口細鱗, 出吳松江者佳, 吳人以爲鱠, 甚美.하다
故酣飮하여 不省府事하니 以廢職으로 徙爲中書侍郞하다
潁川處士庾袞 聞冏期年不朝하고 歎曰 晉室卑矣 禍亂將興이라하고 帥妻子하여 逃於林慮山中하다
王豹致牋於冏曰 河間, 成都, 新野三王 以方剛之年으로 竝典戎馬하여 處要害之地어늘
而明公 挾震主之威하고 獨據京都하여 專執大權하시니 未見其福也니이다
請悉遣王侯之國하고 依周, 召之法하여 以成都王爲北州伯하여 治鄴하고
王自爲南州伯하여 治宛하여 分河爲界하여 各統王侯하여 以夾輔天子注+周之時, 周‧召分陝而治, 爲二伯, 以夾輔王室, 故豹欲依以爲法.하라
長沙王乂見豹牋하고 謂冏曰 小子離間骨肉하니 何不銅駝下打殺이니잇고
乃鞭殺之하니 豹將死 曰 縣吾頭大司馬門하여 見兵之攻齊也注+縣, 讀曰懸. 昔伍子胥爲吳王夫差所殺, 將死, 曰 “縣吾目於吳東門, 見越之入吳也.” 豹倣此語.라하다
冏以河間王顒 本附趙王倫이라하여 恨之러니
顒長史李含 因說顒曰 成都王 至親有大功이어늘 推讓還藩하니 甚得衆心이요
齊王 越親而專政하니 朝廷側目이라 今檄長沙王하여 使討齊하면 齊王 必誅長沙하리니
吾因以爲齊罪而討之하여 去齊立成都하여 除逼建親하여 以安社稷이면 大勳也리이다 從之하다
表陳冏罪하고 請長沙王乂廢冏하고 以穎輔政이라하고 遂擧兵하여 遣李含, 張方等하여 趨洛陽하다
十二月 顒表至하니 大懼하여 會百官議之할새
尙書令王戎曰 二王兵盛하니 不可當也注+二王, 謂河間王顒‧成都王穎. 若以王就第하고 委權崇讓이면 庶可求安이리이다
從事中郞葛旟怒曰 漢, 魏以來 王侯就第 寧有得保妻子者邪 議者可斬이라하니
百官震悚이러라 僞藥發墮厠하여 得免하다
李含 屯陰盤하고 張方 軍新安注+唐涇州良原縣, 隋陰盤縣, 是卽漢安定之陰盤縣. 新安縣, 漢屬弘農郡, 晉屬河南郡.하여 檄乂使討冏하니 遣董艾襲之하다
乂將左右百餘人하고 馳入宮하여 閉諸門하고 奉天子하여 攻大司馬府하여 城內大戰하다
帝幸上東門注+此上東門, 非洛城之上東門, 宮城之上東門也.하니 矢集御前하여 群臣死者相枕이라 連戰三日 冏衆 大敗어늘
執冏斬之하고 同黨 皆夷三族하니 含等 引兵還長安하다 乂雖在朝廷이나 事無巨細 皆就鄴諮穎이러라
◯鮮卑宇文部 圍棘城이어늘 慕容廆擊破之하다
廆以其臣慕輿句 勤恪廉靖이라하여 使掌府庫注+慕輿, 蓋亦鮮卑之種, 別爲一姓.하니 句心計黙識하여 不案簿書호되 終始無漏注+識音志, 記也.하고
以慕輿河明敏精審이라하여 使典獄訟하니 覆訊淸允이러라


壬戌年(302)
[] 나라 孝惠皇帝 太安 원년이다. 여름에 河間王 司馬顒이 군대를 보내어 李特을 토벌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였다.
[] 河間王 司馬顒督護 衙博을 보내어 李特의 군대를 梓潼에서 토벌하게 하였고,注+衙博은 사람의 성명이다. 조정에서는 다시 張微廣漢太守로 삼아 德陽에 주둔시켰는데,
이특이 그의 아들 李蕩 등으로 하여금 아박의 군대를 패퇴시키니, 아박이 달아나고 군사들이 항복하였다. 이특이 스스로 大將軍 益州牧이라 칭하였다.
[] 淸河王 司馬覃을 세워 皇太子로 삼았다.
[] 齊王 司馬冏은 오랫동안 정권을 전횡하고자 하였는데, 황제의 아들과 손자가 다 죽었고,注+太子 司馬遹이 죽자 황제가 아들이 없게 되었고, 태자의 아들 司馬虨, 司馬臧, 司馬尙이 죽자 황제가 손자가 없게 되었다. 大將軍 司馬穎이 차례에 따라 즉위할 상황에 있었으며,注+司馬穎은 황제의 여러 아우 중에 마땅히 즉위할 차례가 되었다. 淸河王 司馬覃武帝의 손자로注+司馬覃司馬遐의 아들이다. 나이가 이제 8살이었다.
이에 표문을 올려 그를 황태자로 세울 것을 청하니, 사마경을 太子太師로 삼고 東海王 司馬越司空으로 삼아서 中書監을 겸하게 하였다.注+司馬越隴西王 司馬泰의 아들이니, 元康 원년(291)에 封地를 받았다. 司馬泰宣帝의 아우 司馬馗(사마규)의 아들이다. 渠龜이다.
[] 가을 8월에 廣漢太守 張微李特을 토벌하였는데 패하여 죽고, 羅尙이 이특을 공격하였는데 역시 패하였다.
[] 張微李特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특의 진영으로 진격하였는데, 李蕩이 병력을 인솔하고 이특을 구원하여 마침내 장미의 군대를 격파하여 그를 죽였으며,
李驤毗橋(비교)에 주둔해 있었는데注+胡三省이 말하였다. “지금 懷安軍 西北中江이 있는데 漢州에서 발원하니, 彌牟, 雒水(낙수), 毗橋水 세 물이 합하여 하나의 강이 된다. 懷安軍나라 廣漢 新都縣 지역이다.” 羅尙이 군대를 보내어 공격하였으나 여러 번 패하였다.
이양이 마침내 成都로 진격하고 李流成都의 북쪽에 주둔하였는데, 나상이 날래고 용감한 병사 만 명을 보내어 이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양이 이류와 병력을 합하여 공격해서 대파하니, 살아 돌아온 자가 열에 한두 명이었다.
[] 겨울 12월에 河間王 司馬顒長沙王 司馬乂로 하여금 齊王 司馬冏을 죽이게 하였다.
[] 齊王 司馬冏이 교만하고 사치하고 권력을 독단하여 저택을 지을 적에 西宮과 똑같게 하니, 中外의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侍中 嵇紹(혜소)가 상소하기를 “‘보존하여도 망함을 잊지 않음’은 ≪周易≫의 훌륭한 경계입니다.注+周易≫ 〈大傳(繫辭傳)〉에 “君子는 편안하여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보존되어도 망함을 잊지 않고, 다스려져도 어지러움을 잊지 않는다.” 하였다. 신은 원컨대 폐하께서는 金墉에 유폐되어 있었던 것을 잊지 마시고
大司馬(사마경)는 潁水(영수) 가의 곤궁함을 잊지 말고 大將軍(司馬穎)은 黃橋에서의 패전을 잊지 않으면 禍亂의 싹이 생길 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마경이 놀이와 향락에 빠져서 조회하여 황제를 뵙지 않고 앉아서 백관들에게 절을 받았으며, 符節三臺에 칙령을 내려 관리를 선발하고 등용함이 공평하지 못하였고 총애한 자들이 권력을 행사하였다.注+坐拜百官”은 앉아서 백관의 절을 받음을 이른다. 一說에 “天子三公九卿과 여러 將軍을 임용할 때에 오히려 사람을 시켜서 데리고 와서 除拜하는데, 지금 司馬冏은 저택에 편안히 앉아서 百官을 제배한 것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나라 제도에는 尙書中臺라 하고 御史憲臺라 하고 謁者外臺라 하니, 이것이 三臺이다.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으로 사람을 선발하여 등용해서 符節三臺에 칙령을 내려 자기 뜻을 받들어 행하게 함은 크게 공평하지 못한 것이다.
[] 南陽 處士 鄭方이 글을 올려 司馬冏에게 다음과 같이 하였다. “大王이 편안하면서 위태로울 때를 생각하지 아니하여 편안하고 즐거움이 에 지나치시니 이것이 첫 번째 잘못이요,
宗室骨肉들이 서로 의심하고 배반하니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요, 蠻夷(오랑캐)들이 안정되지 못하였는데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으니 이것이 세 번째 잘못이요,注+蠻夷不靜”은 李特 등이 梁州益州 지역을 침략하고 어지럽힘을 말한 것이다.
백성들이 곤궁한데도 창고를 열어 구휼한다는 말이 들리지 않으니 이것이 네 번째 잘못이요,注+이 한 잘못(네 번째 잘못)은 아마도 成都王 司馬穎이 쌀을 운반하여 河南人心을 수합한 것을 가리킨 것이나 〈司馬冏에게〉 이를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義兵을 세웠는데 오랫동안 論功行賞을 하지 않으니 이것이 다섯 번째 잘못입니다.”注+義兵有功 久未論賞”은 潁水 가의 에 대해 아직도 상을 내려주지 않은 것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孫惠 또한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하에 다섯 가지 어려움과 네 가지 不可함이 있는데, 明公이 모두 이것을 차지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國家를 위해〉 칼날을 무릅쓰고 죽는 것이 첫 번째 어려움이요,
영웅호걸을 불러 모음이 두 번째 어려움이요, 장병들과 노고를 똑같이 함이 세 번째 어려움이요, 약한 군대로 강한 군대를 이기는 것이 네 번째 어려움이요, 황제의 기업을 회복함이 다섯 번째 어려움입니다.
큰 명성은 오랫동안 간직해서는 안 되고, 큰 은 오랫동안 차지해서는 안 되고, 큰 권력은 오랫동안 잡아서는 안 되고, 큰 위엄은 오랫동안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大王이 그 어려움을 행하시면서도 어렵게 여기지 않고注+〈“行其難而不以爲難”은〉 潁水 가에 있을 때를 이른다. 不可함에 처하여서도 이것을 하다고 생각하시니, 저는 삼가 불안하게 여깁니다.
明公은 마땅히 이 이루어지면 몸이 물러가는 방도를 생각해서 조정의 막중한 권세를 두 에게 맡기고는 길게 읍하고 藩國으로 돌아가시면 太伯子臧이 옛날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注+老子≫에 이르기를 “이 이루어지고 이름이 이루어지면 몸이 물러남은 하늘의 도이다.” 하였다. 두 長沙王(司馬乂)과 成都王(司馬穎)이다. 사마경이 그 말을 따르지 못하니, 손혜는 병으로 사양하고 떠나갔다.
[] 司馬冏曹攄(조터)에게 이르기를 “혹자가 나에게 권력을 내놓고 封國으로 돌아가라고 권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조터가 말하기를 “어떤 일이든 너무 심한 것을 하니, 大王이 진실로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위태로움을 염려해서 옷을 걷어 올리고 지금 자리에서 떠나시면 이는 잘하는 것 중에 잘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사마경은 듣지 않았다.
[] 張翰顧榮은 모두 가 자기 몸에 미칠까 염려하였는데, 장한은 가을바람이 일자, 고향의 菰菜蓴菜(순채) 국과 농어회를 그리워하여 탄식하기를 “인생은 뜻에 맞음을 귀하게 여길 뿐이니, 부귀를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는 즉시 사직하고 떠나갔다.注+古胡이니, 雕苽(조고)이다. 일명 이라고도 하고, 또 라고도 한다. 세월이 오래되면 중심에서 흰 가 생기니, 이것을 菰米라 하며, 가운데 검은 것을 라 한다. 뒤에 열매를 맺으니, 이것이 雕胡黑米이다. 水葵(순채)이니, 물 가운데서 자라는데 잎은 鳧茨(부자)와 같으며, 봄과 여름에는 가늘게 자라 살지고 매끄러워 그 줄기를 채취해 먹을 수 있다. 3월부터 8월까지를 絲蓴이라 하고, 9월부터 11월까지를 猪蓴(저순)이라 한다. 농어는 입이 크고 비늘이 가느니, 지역의 松江에서 나오는 것이 맛이 좋다. 지역 사람들이 이것을 회로 먹는데, 맛이 매우 좋다.
張翰張翰
[] 顧榮은 일부러 술에 취해 의 일을 살펴보지 않으니, 직무를 폐했다 하여 中書侍郞으로 轉職되었다.
顧榮이 거짓으로 술에 취해 齊王을 멀리하다顧榮이 거짓으로 술에 취해 齊王을 멀리하다
潁川處士庾袞(유곤)은 司馬冏이 1년 동안 황제에게 조회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는 탄식하기를 “나라 황실의 권위가 쇠하였다. 禍亂이 장차 일어날 것이다.” 하고는 妻子를 거느리고 林慮山 속에 은둔하였다.
王豹는 사마경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었다. “河間王(司馬顒)과 成都王(司馬穎)과 新野王(司馬歆)이 모두 한창 젊은 나이로 함께 군대를 주관하여 要害地에 주둔해 있는데,
明公은 군주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위엄을 가지고 홀로 京都를 점거하여 큰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이것이 복인 줄을 모르겠습니다.
王侯들을 모두 封國으로 돌려보내고 周公召公의 법을 따라 成都王北州伯으로 삼아 治所를 두게 하고,
은 스스로 南州伯이 되어서 에 치소를 두어서 황하를 나누어 경계를 삼아서 각각 王侯를 통솔하여 天子를 좌우에서 보필하십시오.”注+나라 때에 周公召公(섬) 지역을 나누어 다스려서 두 이 되어 왕실을 좌우에서 보필하였다. 그러므로 王豹가 이것을 따라 법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 長沙王 司馬乂王豹의 편지를 보고 司馬冏에게 이르기를 “小子骨肉 간을 이간질하니, 어찌 구리로 만든 낙타 아래에서 그를 쳐 죽이지 않습니까.” 하였다.
사마경이 마침내 채찍으로 매질하여 그를 죽였는데, 왕표는 장차 죽을 적에 말하기를 “내 머리를 大司馬門에 매달아서 적병이 齊王(사마경)을 공격하는 것을 보게 하라.”注+(매달다)은 으로 읽는다. 옛날 王豹가 이 말을 모방한 것이다. 하였다.
사마경은 河間王 司馬顒이 본래 趙王 司馬倫에게 붙었다 하여 그에게 원한을 품었는데,
사마옹의 長史李含이 이로 인하여 사마옹을 설득하기를 “成都王(司馬穎)이 황제의 至親으로 큰 이 있는데, 자리를 사양하여 藩鎭으로 돌아가니 여러 사람의 마음을 크게 얻었고,
제왕이 소원한 친족인데도 정권을 독점하니 조정의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곁눈질하고 있습니다. 이제 장사왕에게 격문을 보내어 제왕을 토벌하게 하면 제왕이 틀림없이 장사왕을 誅殺할 것이니,
우리가 이것을 이용하여 제왕의 죄로 삼아 토벌해서 제왕을 제거하고 성도왕을 세워, 핍박하는 자를 제거하고 황제의 至親을 세워 社稷을 평안히 한다면 이는 큰 功勳입니다.” 하니, 사마옹이 그의 말을 따랐다.
사마옹이 표문을 올려 사마경의 죄를 아뢰고, 장사왕 사마예에게 사마경을 폐하고 사마영으로 정사를 보필할 것을 청하고는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서 李含張方 등을 보내어 洛陽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 12월에 司馬顒의 표문이 이르니, 司馬冏이 크게 두려워해서 백관을 모아 의논할 적에
尙書令 王戎이 말하기를 “두 왕의 군대가 강성하니 당할 수가 없습니다.注+두 왕은 河間王 司馬顒成都王 司馬穎을 이른다. 만약 왕께서 사저로 나가고 권력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 크게 사양한다면 거의 편안함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마경의 從事中郞葛旟(갈여)가 하며 말하기를 “나라와 나라 이래로 王侯가 사저로 나감에 어찌 처자식을 보존한 자가 있습니까. 의논한 자를 참형에 처해야 합니다.” 하니,
백관들이 놀라 두려워하였다. 왕융은 거짓으로 약독이 발작하여 측간에 빠져서 죽음을 면하였다.
[] 李含陰盤에 군대를 주둔하고 張方新安에 군대를 주둔하고서注+나라 涇州 良原縣나라의 陰盤縣이니, 이곳이 바로 나라 安定郡陰盤縣이다. 新安縣나라 때에는 弘農郡에 속하였고, 나라 때에는 河南郡에 속하였다. 司馬乂에게 격문을 보내어 司馬冏을 토벌하게 하니, 사마경이 董艾를 보내어 기습하게 하였다.
사마예가 左右 측근 백여 명을 거느리고 궁중으로 달려 들어가서 여러 문을 폐쇄한 다음 天子를 받들고 大司馬府를 공격해서 성안에서 크게 싸웠다.
황제가 上東門으로 행차하니,注+上東門洛陽城上東門이 아니고, 宮城의 상동문이다. 화살이 임금 앞에 집중적으로 날아와 신하 중에 죽은 자가 서로 이어졌다. 연달아 3일을 싸워 사마경의 병력이 크게 패하였다.
사마경을 잡아 참수하고 그 도당을 모두 三族을 멸하니, 이함 등이 병력을 이끌고 長安으로 돌아갔다. 사마예가 비록 조정에 있었으나,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지역에 가서 司馬穎에게 자문하였다.
[] 陳留王 曹奐하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장례하고 諡號魏元皇帝라 하였다.
[] 鮮卑宇文部棘城을 포위하자, 慕容廆(모용외)가 그들을 격파하였다.
[] 慕容廆는 자기 신하 慕輿句가 부지런하고 조심하고 청렴하고 안정되다 하여 府庫를 맡게 하니,注+慕輿는 또한 鮮卑族의 한 종족인데, 따로 한 이 된 것이다. 모여구가 마음속으로 계산하고 묵묵히 기억해서 문서를 대조하지 않았으나 始終 빠트림이 없었다.注+이니, 기억함이다.
慕輿河明敏하고 정밀하게 살핀다 하여 모여하에게 獄訟을 주관하게 하니, 조사하고 심문함에 깨끗하고 정당하였다.


역주
역주1 河間王顒……殺齊王冏 : “司馬冏이 교만하고 사치하여 조회를 폐했다면 죄가 있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것을 〈‘討’나 ‘誅’를 쓰지 않고〉 ‘殺’이라고 썼는가. 司馬顒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죽였기 때문이다. 사마경은 사마옹의 뜻이 처음에 司馬倫에게 붙고자 했다 하여 그를 恨했으니, 이것은 바른 것이요, 사마옹이 마침내 핍박함을 두려워해서 司馬乂를 시켜 사마경을 죽인 것은 사사로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殺’이라고 쓴 것은 骨肉 간에 서로 도륙한 禍를 드러낸 것이다.[冏驕奢廢朝 則有罪矣 其書殺 何 顒私也 冏以顒意初欲附倫 恨之 正也 顒遂懼偪 使乂殺冏 則私矣 綱目書殺 所以著骨肉相屠之禍也]” ≪書法≫
“齊王은 교만하고 사치하여 권력을 독단해서 멸망을 자초하였고, 司馬顒은 藩國(제후국)을 지키지 않고 군대를 일으켜 禍를 즐거워하였고, 司馬乂는 남의 사주를 받아 보필하는 신하를 살육하였다. 이것을 곧바로 책에 썼으니, 이는 세 사람을 모두 비난한 것이다.[齊王驕奢擅權 自取亡滅 顒不守藩國 稱兵樂禍 乂爲人所使 殺戮輔臣 直書于冊 擧皆罪也]” ≪發明≫
역주2 吳나라……사양하였다 : 吳나라 太伯은 周나라 太王의 장자로, 태왕이 막내아들 季歷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함을 알고는 아우 仲雍과 함께 荊蠻으로 도망가서 斷髮文身하여 스스로 후사가 될 수 없음을 보였다. 太伯은 ‘泰伯’으로도 표기하는바, ≪論語≫ 〈泰伯〉에 “泰伯은 지극한 덕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 세 번이나 천하를 가지고 사양하였는데, 백성들이 칭찬할 수 없게 하였다.[泰伯 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라고 하신 孔子의 말씀이 보이며, ≪史記≫ 〈吳太伯世家〉에도 이 내용이 보인다. 曹나라 子臧은 춘추시대 曹나라 公子의 이름으로, 宣公이 죽은 뒤에 제후들과 曹나라 사람들이 새로 즉위한 임금 負芻를 의롭지 못하게 여기고는 자장을 군주로 삼으려 하자, 자장이 이를 사양하고 나라를 떠나 부추가 그대로 임금 노릇을 하게 한 것을 이른다.(≪春秋左氏傳≫ 襄公 14년)
역주3 伍子胥가……하였으니 : 자서는 伍員의 자이다. 吳王 闔廬를 이어 왕이 된 夫差가 伯嚭(백비)를 太宰로 삼고 신임하자, 오자서가 부차에게 누차 간언하였으나 오왕은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屬鏤라는 검을 내려 자결하게 하였는데, 오자서가 백비의 참언을 듣는 부차를 원망하면서 舍人에게 당부하기를 “내 무덤에 나무를 심도록 하라. 그 나무로 만든 그릇에 내 눈알을 담아 吳나라 東門에 매달아서 越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라고 하고는 자결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부차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越王 句踐은 이후에 오자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오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史記≫ 권66 〈伍子胥列傳〉)
역주4 陳留王曹奐……諡曰魏元皇帝 : “‘卒’이라고 씀은 어째서인가. 厚德함을 보존함을 인정한 것이다. 陳留王이 폐위된 때부터 이때까지 38년이었다. ≪資治通鑑綱目≫에서 멸망한 나라의 군주를 ‘卒’이라고 쓴 것이 일곱 번이니(山陽公과 安樂公 劉禪, 歸命侯 孫皓, 陳留王, 陳叔寶, 楊溥, 〈酅公(휴공)〉, 오직 酅公은 ‘薨’이라고 썼다. 오랜 뒤에 죽은 자는 陳留王보다 더한 사람이 없다. 魏나라가 漢나라 孝獻皇帝를 장례하였을 적에 ‘魏’라고 쓴 것은 漢나라 篇이었고, 이것은 晉나라 篇인데 다시 ‘晉나라 사람이 장례하였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晉나라 사람의 厚德함을 인정한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에서는 후덕함을 보존함을 인정하여 만일 先代(지난 王朝)에 禮가 있으면 반드시 그 나라를 써주었다. 그러므로 魏나라가 漢 獻帝를 장례했을 적에 ‘魏’라고 썼고, 晉나라가 陳留王을 장례했을 적에 ‘晉’이라고 썼고, 陳나라가 梁 孝元帝를 장례했을 적에 ‘陳’이라고 썼고, 石晉이 故唐主를 장례했을 적에 ‘晉’이라고 썼으니, 이는 모두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孝獻皇帝는 ‘諡曰’이라고 쓰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諡曰’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晉나라를 거듭 인정한 것이다. 세상의 道가 날로 나빠져서 晉나라 이후에 멸망한 나라의 군주는 시해되지 않은 자가 없고 심하면 滅族까지 당하였는데, 오직 唐나라가 酅公에 대해서만 거의 인정한 것이다.[書卒 何 予存厚也 自廢至是三十八年矣 綱目卒國滅之主七(山陽公 安樂公劉禪 歸命侯孫皓 陳留王 陳叔寶 楊溥) 惟酅公書薨 久而後卒者 無如陳留也 魏葬漢孝獻皇帝書魏 漢篇也 此晉篇也 復書晉人葬之 何 予晉人也 綱目予存厚 苟有禮於先代 必以國書之 故魏葬漢獻帝 書魏 晉葬陳留 書晉 陳葬梁孝元 書陳 石晉葬故唐主 書晉 皆予之也 然則孝獻皇帝不書諡曰 此其書諡曰 何 所以重予晉也 世道日降 晉以後 國滅之主 無不弑者 甚則至滅其族矣 唯唐於酅公 其庶乎]” ≪書法≫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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