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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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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年(315)
三年이라
漢建元元年이라
春正月 左丞相睿 以周札爲吳興太守하다
周勰 以其父遺言이라하여 因吳人之怨하여 謀作亂하여
使吳興功曹徐馥으로 矯稱叔札之命하고 收合徒衆하여 以討王導, 刁協하니 豪傑 翕然附之러라
是月 殺吳興太守袁琇하고 欲奉札爲主러니 聞之하고 大驚하여 以告義興太守孔侃하니
知札意不同하고 不敢發하니 馥黨하여 攻馥殺之하다
札子續 亦聚衆應馥이어늘 左丞相睿 議發兵討之한대
王導曰 今少發兵이면 則不足以平寇 多發兵이면 則根本空虛
續族弟黃門侍郞莚 忠果有謀注+莚, 夷然切.하니 請獨使莚往이면 足以誅續이리이다 睿從之하다
兼行至郡하여 將入할새 遇續於門하여 逼與俱詣侃하다
坐定 謂侃曰 府君 何以置賊在坐오하니 卽出衣中刀하여 逼莚이어늘
叱郡傳敎하여 格殺之하고 因欲誅勰注+傳敎, 郡吏也, 宣傳敎令者也.이러니
不聽하고 委罪於從兄邵而誅之하니 不歸家省母하고 遂長驅而去러라
睿以札爲吳興太守하고 莚爲太子右衛率하고 以周氏吳之豪望이라 故不窮治하고 撫勰如舊러라
二月 以左丞相睿爲丞相, 都督中外諸軍事하고 南陽王保爲相國하고 劉琨爲司空하다
詔進猗盧爵爲代王하고 置官屬하고 食代, 常山二郡注+常山已爲石勒所有. 拓跋氏建國曰代, 始此.하다 猗盧請幷州從事莫於劉琨注+, 與含同. 莫含, 姓名.한대 不欲行이어늘
琨曰 以幷州單弱하고 吾之不材 而能自存於胡, 羯之間者 代王之力也注+胡, 謂劉淵. 羯, 謂石勒.
吾傾身竭貲하고 以長子爲質而奉之者 庶幾爲朝廷雪大恥也注+琨以長子遵質於猗盧.
欲爲忠臣인댄 奈何惜共事之小誠하여 而亡徇國之大節乎注+亡, 通鑑作忘.
往事代王하여 爲之腹心이면 乃一州之所賴也니라 遂行하니 猗盧甚重之하여 常與參大計러라
猗盧用法嚴하여 國人犯法者 或擧部就誅로되 老幼相携而行이어늘
人問何之 曰 往就死라하고 無一人敢逃匿者러라
三月 杜弢將張彦 陷豫章하니 尋陽太守周訪 擊斬之하다
王敦 遣陶侃等하여 討杜弢하여 前後數十戰하니 弢將士多死 乃請降이어늘 丞相睿以爲巴東監軍하다
弢旣受命 諸將 猶攻之不已하니 弢不勝憤怒하여 復反하고 遣其將張彦하여 陷豫章이어늘 周訪 擊斬之하다
漢太子太傅崔瑋 少保許遐伏誅하다
雨血於漢東宮延明殿하니 太弟义惡之어늘 崔瑋, 許遐說义曰 今相國威重 踰於東宮注+相國, 聰子粲.하니
殿下非徒不得立也 朝夕 且有不測之危하리니 不如早爲之計니이다 义弗從이러니
舍人 告之注+舍人, 謂東宮舍人.한대 漢主聰 殺瑋, 遐하고 使將軍卜抽 將兵하여 監守東宮注+監守, 監察主守也.하다
义上表하여 乞爲庶人하고 且請以粲爲嗣러니 抽弗爲通하다
漢曹嶷 據臨淄하다
漢靑州刺史曹嶷 盡得齊, 魯間郡縣하고 自鎭臨淄하니 有衆十餘萬하여 臨河置戍하다
石勒 表稱嶷有專據東方之志라하여 請討之한대 漢主聰 恐勒滅嶷하면 不可復制하여 弗許하다
漢主聰 納中護軍靳準二女月光, 月華하여 立月光하여 爲上皇后하고 劉貴妃與月華 爲左, 右皇后하니
陳元達 極諫하여 以爲竝立三后 非禮也니이다 不悅이러니
元達 又奏月光有穢行이라하니 不得已廢之하다 月光 慙恚自殺하니 以是恨元達이러라
注+霸陵, 文帝陵. 杜陵, 宣帝陵.하다
盜發二陵及薄太后陵하여 得金帛甚多注+薄太后葬南陵, 在霸陵之南.
朝廷 以用度不足이라하여 詔收其餘하여 以實內府하다
陶侃 擊杜弢하여 破之하니 弢走死 湘州平하니 丞相睿 加王敦都督江, 揚等州軍事하다
陶侃 與杜弢相攻할새 弢使王貢出挑戰하니 遙謂之曰 弢爲益州小吏하여 盜用庫錢하고 父死 不犇喪이라
本佳人이어늘 何爲隨之 天下寧有白頭賊邪注+言爲賊者不得至老. 遂降하니
弢衆潰하여 遁走道死어늘 進克長沙하니 湘州悉平注+長沙, 弢之巢穴也.하다
丞相睿 進王敦鎭東大將軍하여 都督江, 揚, 荊, 湘, 交, 廣六州諸軍事 江州刺史하니 始自選置刺史以下하여 寖益驕橫이러라
王如之降也 敦從弟稜 愛如驍勇하여 請敦하여 配己麾下하고 甚加寵遇하다
如數與敦諸將으로 角射爭鬪어늘 杖之한대 如深以爲恥러니
及敦潛畜異志 每諫之하니하여 密使人激如殺稜이라가 聞之하고 陽驚하고 亦捕如誅之하다
朝廷 以第五猗爲荊州刺史하니 杜曾 迎猗於襄陽하고 聚兵萬人하여 與猗分據漢, 沔이러니
旣破杜弢하고 乘勝進擊曾할새 有輕曾之志라가 反爲所敗하니 死者數百人이러라
荀崧 都督荊州하여 屯宛하니 引兵圍之
兵少食盡하여 欲求援於故吏襄城太守石覽하다 小女灌 年十三이라
帥勇士數十人하고 踰城突圍하고 夜出하여 且戰且前하여 遂達覽所하고 又爲崧書하여 求救於周訪하다
遣子撫하여 帥兵하여 與覽共救崧하니 乃遁去하다
復致牋於崧하여 求自效한대 許之注+通鑑 “求討丹水賊以自效.”하다
遺崧書曰 杜曾 凶狡하니 所謂䲭梟食母之物이라 此人不死 州土未寧이니 足下當識吾言注+識, 音誌.하라
崧以兵少라하여 藉爲外援하여 不從이러니 復帥流亡二千餘人하여 圍襄陽이라가 不克而還하다
王敦 嬖人錢鳳 疾侃之功하여 屢毁之하니 詣敦自陳한대
留不遣하고 左轉廣州刺史하고 以其從弟廙 刺荊州注+左轉, 猶言左遷也.하다
將吏鄭攀等 詣敦留侃호되 不許하니 衆情憤惋하여 遂迎杜曾, 第五猗하여 以拒廙하다
意攀等承侃風旨注+風, 如字.하여 被甲持矛하고 將殺侃 出而復還者 數四注+復, 扶又切.
正色曰 使君 雄斷하여 當裁天下하니 何此不決乎아하고 因起如厠이러니
參軍梅陶言於敦曰 周訪 與侃親姻하여 如左右手注+訪與侃結友, 以女妻侃子瞻.하니 安有斷人左手而右手不應者乎잇가
意解하여 乃設盛饌以餞之하니 便夜發하다
王機盜據廣州 至始興하니 州人 皆言宜觀察形勢注+吳孫皓甘露元年, 分桂陽南部都尉, 立始興郡, 治漢曲江縣.라호되
不聽하고 直至廣州하여 遣督護討機하여 走之하니 廣州遂平하다
在州無事 輒朝運百甓於齋外하고 暮運於齋內注+甓, 蒲歷切, 瓴甋也.어늘
問其故한대 答曰 吾方致力中原하니 過爾優逸이면 恐不堪事 故習勞耳라하니라
冬十月 寇馮翊하여 陷之하다
劉曜寇北地하고 進拔馮翊이어늘 麴允 軍于靈武로되 以兵弱하여 不敢進注+靈武, 漢北地郡之靈武縣也.이라
帝屢徵兵於相國保하니 保左右皆曰 蝮蛇螫手 壯士斷腕注+蝮, 音福, 毒蛇也. 螫, 音釋, 或作蠚. 漢書 “齊王曰 ‘蝮蠚手則斬手.’” 蓋以謂不如此, 則流毒於一身, 至於死也.하나니 今胡寇方盛하니 且宜斷隴道하여 以觀其變이니이다
從事中郞裴詵曰 今蛇已螫頭하니 頭可斷乎아하니 保乃以胡崧으로 行前鋒都督하여 須諸軍集하여 乃發하다
欲奉帝往就保러니 索綝曰 保得天子 必逞其私志라하니 乃止하다
於是 自長安以西 不復貢奉하니 百官 饑乏하여 採稆以自存注+稆, 音呂. 禾自生曰稆.이러라
張寔 得璽獻之하다
涼州軍士得璽하니 文曰皇帝行璽 獻於張寔한대 僚屬 皆賀하니 寔曰 是非人臣所得留라하고 歸之長安하다


乙亥年(315)
[] 나라 孝愍皇帝 建興 3년이다.
[] 나라(前趙) 烈宗 劉聰 建元 원년이다.
[] 봄 정월에 左丞相 司馬睿周札吳興太守로 삼았다.
[] 周勰은 자기 아버지의 유언이라 하여 지방 사람들이 원망하는 틈을 타서 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吳興功曹徐馥으로 하여금 숙부인 周札이라고 사칭하고 무리들을 거두어 모으게 하여 王導刁協을 토벌하려 하니, 豪傑들이 크게 따랐다.
이달에 서복이 吳興太守 袁琇(원수)를 죽이고 주찰을 받들어 君主로 삼고자 하였는데, 주찰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서 義興太守 孔侃에게 통고하였다.
주협은 주찰의 뜻이 자기와 같지 않음을 알고서 감히 을 일으키지 못하니, 서복의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서복을 공격하여 죽였다.
[] 周札의 아들 周續 또한 병력을 모아 徐馥에게 응하였는데, 左丞相 司馬睿가 군대를 일으켜 이들을 토벌할 것을 논하자,
王導가 말하기를 “지금 군대를 조금 출동하면 적을 평정할 수 없고, 많이 출동하면 근본인 도성(建康)이 텅 비게 됩니다.
주속의 族弟黃門侍郞 周莚(주연)은 충성스럽고 과감하고 지모가 있으니,注+夷然이다. 청컨대 주연 한 사람을 파견하면 충분히 주속을 주벌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사마예가 그의 말을 따랐다.
[] 周莚이 길을 서둘러 하루에 이틀 길을 가서 郡府에 도착하여 막 들어가려 할 적에, 문에서 周續을 만나 협박하여 함께 孔侃에게 나아갔다.
자리에 앉은 뒤에 주연이 공간에게 이르기를 “府君께서는 어찌하여 역적을 이 자리에 두십니까.” 하니, 주속이 즉시 옷 속에서 칼을 꺼내어 주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주연이 傳敎에게 큰소리로 명령하여 주속을 쳐서 죽이게 하고, 이어서 周勰을 주살하려고 하였는데,注+傳敎의 관리이니, 敎令을 선전하는 자이다.
周札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죄를 從兄周邵에게 전가하여 그를 주살하니, 주연은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문안도 하지 않고 마침내 먼 길을 떠나갔다.
司馬睿는 주찰을 吳興太守로 삼고 주연을 太子右衛率로 삼았으며, 周氏나라의 호걸이고 명망 있는 집안이므로 끝까지 죄를 다스리지 않고 주협을 예전과 같이 慰撫하였다.
[] 2월에 左丞相 司馬睿丞相 都督中外諸軍事로 삼고, 南陽王 司馬保相國으로 삼고, 劉琨司空으로 삼았다.
[] 代公 拓跋猗盧의 관작을 높여 代王으로 삼았다.
[] 詔令을 내려서 拓跋猗盧의 관작을 높여 代王으로 삼고 官屬을 두고 代郡常山郡食邑으로 삼게 하였다.注+常山은 이미 石勒의 소유가 되었다. 拓跋氏가 나라를 세우고 ‘’라고 한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탁발의로가 劉琨에게 幷州從事 莫含을 청하자,注+과 같으니, 莫含은 사람의 성명이다. 막함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유곤이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우리 幷州는 의지할 곳이 없어 외롭고 세력이 약한데다가 또 나는 재주가 없는데도 (劉淵)와 (石勒)의 사이에서 스스로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代王의 힘(덕분)이다.注+劉淵을 이르고, 石勒을 이른다.
내가 공손히 몸을 낮추고 힘을 다해 물자를 마련하며 長子를 인질로 삼아서 대왕을 받드는 이유는, 행여 우리 조정을 위해서 큰 치욕을 설욕할 수 있을까 해서이다.注+劉琨長子 劉遵拓跋猗盧에게 인질로 보내었다.
忠臣이 되고자 한다면, 어찌하여 나와 함께 일하는 작은 정성을 아까워하여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큰 절개를 잊는단 말인가.注+은 ≪資治通鑑≫에 으로 되어 있다.
이 가서 代王을 잘 섬겨서 그의 심복이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우리 한 가 크게 의뢰할 수 있는 것이다.” 막함이 마침내 탁발의로에게 가니, 탁발의로는 그를 매우 소중히 여겨서 큰 계책을 의논할 때마다 항상 참여하게 하였다.
[] 拓跋猗盧가 법을 엄격히 적용하여, 나라 사람 중에 법을 범한 자는 간혹 온 部族이 다 죽임을 당하였는데도, 늙은이와 어린이가 서로 손을 잡고 길을 가자,
사람들이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죽으러 간다.” 하고는 한 사람도 감히 도망하여 숨는 자가 없었다.
[] 3월에 杜弢의 장수 張彦豫章을 함락시키니, 尋陽太守 周訪이 그를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 王敦杜弢를 토벌하기 위해 陶侃 등을 보내어 前後에 걸쳐 수십 번 싸우니, 두도의 장수와 병사들 중에 죽은 자가 많았다. 두도가 마침내 항복을 청하자, 丞相 司馬睿는 두도를 巴東監軍으로 삼았다.
두도가 이미 명을 받았으나 여러 장수들이 여전히 계속하여 공격하니, 두도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다시 배반하고 장수 張彦을 보내어 豫章을 함락시켰다. 이에 周訪이 그를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 나라(前趙) 太子太傅 崔瑋少保 許遐伏誅되었다.
[] 나라 東宮延明殿에 피가 섞인 비가 내리니, 太弟 劉义가 이것을 꺼려하였다. 崔瑋許遐가 유차를 설득하기를 “지금 相國(劉粲)의 위엄과 권세가 東宮보다 더하니,注+相國劉聰의 아들 劉粲이다.
殿下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朝夕 간에 장차 헤아릴 수 없는 위험이 있을 것이니, 조속히 계책을 세우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였으나, 유차가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동궁의 舍人이 이 일을 고발하자注+舍人東宮舍人을 이른다. 漢主 劉聰이 최위와 허하를 죽이고, 將軍 卜抽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동궁을 監守하게 하였다.注+監守”는 감독하고 수비하는 것이다.
유차가 표문을 올려서 庶人이 되기를 청하고 또 유찬을 후사로 삼을 것을 청하였는데, 복추가 이것을 통고하지 않았다.
[] 나라(前趙) 曹嶷臨淄를 점거하였다.
[] 나라(前趙) 靑州刺史 曹嶷 지역의 郡縣을 모두 차지하고 스스로 臨淄鎭守하였는데, 10여 만의 병력을 보유하고서 황하 가에 수자리를 설치하였다.
石勒이 표문을 올려서, 조억이 제멋대로 東方을 점거할 뜻을 갖고 있다 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漢主 劉聰은 석륵이 조억을 멸망시키면 더 이상 그를 통제할 수 없게 될까 염려해서 허락하지 않았다.
[] 나라(前趙)가 세 명의 를 세웠다.
[] 漢主 劉聰中護軍靳準의 두 딸인 月光月華를 들여 월광을 세워 上皇后으로 삼고 劉貴妃左皇后, 월화를 右皇后로 삼았다.
陳元達이 지극히 하기를 “세 명의 를 동시에 세우는 것은 가 아닙니다.” 하니, 유총이 좋아하지 않았다.
진원달이 또다시 월광에게 부정한 행실이 있다고 아뢰자, 유총이 부득이하여 그녀를 폐하였다. 월광이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자살하니, 유총이 이 때문에 진원달을 원망하였다.
[] 여름 6월에 도둑이 나라의 霸陵杜陵을 도굴하였다.注+霸陵나라 文帝이고, 杜陵나라 宣帝이다.
[] 도둑이 霸陵, 杜陵薄太后(나라 文帝의 모친)의 을 도굴하여 금과 비단을 매우 많이 얻었다.注+薄太后南陵에 장례하였으니, 霸陵의 남쪽에 있다.
조정에서는 재정이 부족하다 하여, 詔令을 내려 남아 있는 금과 비단을 거두어서 內帑庫(내탕고)를 채웠다.
[] 陶侃杜弢를 공격하여 격파하니, 두도가 달아나다가 길에서 죽었다. 湘州가 평정되니, 丞相 司馬睿王敦에게 都督江揚等州軍事하였다.
[] 陶侃杜弢와 서로 공격할 적에 두도가 王貢으로 하여금 나아가 도전하게 하니, 도간이 멀리서 그에게 이르기를 “두도는 益州의 낮은 관리로 있으면서 국고의 돈을 盜用하였고,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에 달려가지 않았다.
은 본래 훌륭한 사람인데 무슨 연고로 두도를 따르는가. 천하에 어찌 백발이 된 이 있겠는가.”注+〈“寧有白頭賊邪”는〉 이 된 자는 제대로 늙지 못함을 이른 것이다. 하니, 왕공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두도의 무리가 궤멸하여 두도가 도망가다가 길에서 죽자, 도간이 나아가 長沙를 함락시키니, 湘州가 완전히 평정되었다.注+長沙杜弢의 소굴이다.
丞相 司馬睿王敦鎭東大將軍으로 승진시키고 都督江揚荊湘交廣六州諸軍事江州刺史로 삼으니, 왕돈이 처음으로 刺史 이하를 직접 선발하여 두고서는 점점 더 교만해지고 전횡하였다.
[] 처음에 王如가 항복할 적에 王敦의 종제인 王稜이 왕여의 날래고 용맹함을 사랑하여 왕돈에게 청해서 자기의 휘하로 배속시키고 매우 총애하고 후대하였다.
왕여가 왕돈의 장수들과 활쏘기를 하면서 자주 싸우므로 왕릉이 곤장을 치니, 왕여가 이 일을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왕돈이 남몰래 나라에 대해 딴마음을 품자 왕릉이 매번 하니, 왕돈이 노하여 은밀히 사람을 시켜서 왕여를 격노하게 하여 왕릉을 죽이게 하였다. 왕돈이 이 일을 듣고 거짓으로 놀라는 체 하고는, 왕여도 체포하여 주살하였다.
[] 王敦陶侃을 옮겨 廣州刺史로 삼았다.
[] 처음에 조정에서 第五猗荊州刺史로 삼으니, 杜曾襄陽에서 제오의를 맞이하고 만 명의 병력을 모아서 漢水沔水를 제오의와 나누어 점거하였다.
陶侃杜弢를 격파하고서 승세를 타고 전진하여 공격할 적에 두증을 경시하는 마음을 두었다가 도리어 그에게 패하니, 죽은 자가 수백 명이었다.
[] 이때에 荀崧(순숭)이 荊州都督으로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杜曾이 병력을 이끌고 가서 그를 포위하였다.
순숭은 병력이 적고 식량이 다하여 옛 관리인 襄城太守 石覽에게 구원을 청하고자 하였다. 순숭의 작은 딸 荀灌은 이때 나이가 13세였는데,
수십 명의 용사를 거느리고 밤중에 성을 넘어 포위망을 뚫고 나가서 싸우면서 전진하여 마침내 석람의 처소에 도달하고, 또 순숭을 대신하여 편지를 써서 周訪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주방이 아들 周撫를 보내어 병력을 인솔하고 석람과 함께 순숭을 구원하게 하니, 두증이 마침내 도망하였다.
두증이 다시 순숭에게 편지를 보내어 직접 을 세워 속죄할 것을 청하자, 순숭이 이를 허락하였다.注+資治通鑑≫에는 “丹水賊을 토벌하여 을 세워 속죄할 것을 청하였다.” 하였다.
陶侃이 순숭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두증은 흉악하고 교활하니, 이른바 제 어미를 잡아먹는 솔개와 올빼미 같은 자입니다. 이 사람이 죽지 않으면 荊州 지역이 편안하지 못할 것이니, 足下는 마땅히 내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注+(기억하다)는 이다. 하였다.
그러나 순숭은 병력이 적다는 이유로 두증의 힘을 빌려 외부의 원조로 삼으려 해서 도간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두증은 다시 유민 2천여 명을 거느리고서 襄陽을 포위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王敦이 총애하는 사람 錢鳳陶侃을 시기하여 여러 번 도간을 헐뜯었다. 도간이 왕돈에게 가서 직접 해명하자,
왕돈은 荊州로 보내지 않고 廣州刺史로 좌천시키고는, 자신의 從弟 王廙荊州刺史로 삼았다.注+左轉(좌천시키다)”은 左遷이라는 말과 같다.
형주의 將吏鄭攀 등이 왕돈에게 찾아가 도간의 유임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여러 사람들이 내심 원망하고 분개하여 마침내 杜曾第五猗를 맞이하여 왕이를 막았다.
왕돈은 정반 등이 도간의 뜻을 받들었다고 생각하여,注+(의지)은 본음대로 읽는다. 갑옷을 입고 창을 잡고는 장차 도간을 죽이려 하였는데, 이때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를 서너 차례 하였다.注+(다시)는 扶又이다.
王敦이 속으로 陶侃을 해치려고 하다王敦이 속으로 陶侃을 해치려고 하다
도간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使君은 영명하게 결단하여 응당 천하를 제재해야 하는데, 어찌 이처럼 결단하지 못합니까.” 하고는 바로 일어나서 측간에 갔다.
參軍 梅陶가 왕돈에게 말하기를 “周訪은 도간과 친하고 또 인척관계여서 마치 왼손과 오른손처럼 가깝습니다.注+周訪陶侃과 친구이고, 또 도간의 아들 陶瞻에게 딸을 시집보내었다. 남의 왼손을 잘랐는데, 오른손이 응하지 않는 경우가 어찌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돈의 마음이 풀려서 마침내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도간을 전송하니, 도간이 곧바로 그날 밤에 출발하였다.
[] 이때 王機廣州를 몰래 점거하고 있었는데 陶侃始興에 도착하니, 광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형세를 관찰하여야 한다.”注+나라 甘露 원년(265)에 桂陽南部都尉를 나누어 始興郡을 세우고 나라 曲江縣을 치소로 하였다. 하였다.
그러나 도간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곧바로 광주로 가서 督護를 보내어 왕기를 토벌하여 패주시키니, 광주가 마침내 평정되었다.
도간은 광주에 있을 적에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매일 아침마다 벽돌 백 장을 집 밖으로 옮겼다가 저녁이 되면 집 안으로 옮겨왔다.注+蒲歷이니, 벽돌이다.
官齋運甓(官舍에서 벽돌을 나르다)官齋運甓(官舍에서 벽돌을 나르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도간이 대답하기를 “내 막 中原을 회복하기 위해 힘을 다하고 있는데, 지나치게 한가하고 편안하면 장차 큰일을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되므로 수고로움을 익히는 것이다.” 하였다.
[] 겨울 10월에 나라(前趙)가 馮翊을 침략하여 함락시켰다.
[] 劉曜北地郡을 침략하고 진군하여 馮翊을 함락시키자, 麴允靈武縣에 군대를 주둔하였으나 병력이 약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注+靈武나라 北地郡靈武縣이다.
황제( 愍帝)가 相國司馬保에게서 여러 번 군대를 징발하니, 사마보의 좌우들이 모두 말하기를 “독사가 손을 물면 장사가 팔뚝을 자르는 법입니다.注+이니, 독사이다. 이니, 으로도 쓴다. ≪漢書≫ 〈田儋傳〉에 “齊王이 말하기를 ‘독사가 손을 물면 손을 자른다.’라고 했다.”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온 몸에 독이 퍼져서 죽음에 이르게 됨을 말한 것이다. 지금 오랑캐가 한창 강성하니 우선 지역의 길을 차단하고서 사태의 변화를 관찰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從事中郞 裴詵이 말하기를 “지금 독사가 이미 머리를 물었으니, 그렇다면 머리를 잘라야 하겠는가.” 하니, 사마보가 마침내 胡崧行前鋒都督으로 삼고서 여러 군대가 모이기를 기다려 함께 출발하기로 하였다.
[] 麴允이 황제를 받들어 모시고 司馬保에게 가려고 하였는데, 索綝이 말하기를 “사마보가 天子를 얻으면 반드시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을 펼 것입니다.”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
이에 長安의 서쪽 지역이 더 이상 공물을 바치지 않으니, 백관이 굶주리고 궁핍하여 자생하는 벼를 채취해서 먹으면서 목숨을 보존하였다.注+이니, 벼가 자생하는 것을 라 한다.
[] 張寔이 옥새를 얻어 조정에 바쳤다.
[] 涼州軍士가 옥새를 얻었는데, ‘皇帝行璽’라고 쓰여 있었다. 이것을 張寔에게 바치자 관속들이 모두 축하하니, 장식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하가 보관해둘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하고는 長安으로 올려 보냈다.


역주
역주1 (又)[父] : 저본에는 ‘又’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父’로 바로잡았다.
역주2 進代公猗盧爵爲王 : “‘아무개의 작위를 높여주었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명령이 황제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니, ‘魏公 曹操가 작위를 높여 왕이 되었다.’라고 쓴 것과는 다르다.(漢 獻帝 建安 21년(216))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아무개의 작위를 높여 왕으로 삼았다.’라고 쓴 것이 7번이요(拓跋猗盧, 朱全忠 2번, 李克用, 錢鏐, 王建, 羅紹威), ‘詔令을 내려서 아무개의 작위를 높여 왕으로 삼았다’라고 쓴 것이 3번이다.(北周 齊公 宇文憲, 李晟, 朱全忠)[書進某爵 何 命自上出也 與書魏公操進爵爲王者異矣(漢獻帝建安二十一年) 終綱目 書進某爵爲王七(猗盧 朱全忠 再書 李克用 錢鏐 王建 羅紹威) 詔某進爵爲王三(周齊公憲 李晟 朱全忠)]” ≪書法≫
역주3 漢立三后 : “이것을 쓴 것은 비난한 것이다. 漢나라(前趙)가 세 명의 后를 세운 뒤로부터 그 뒤에 北周에서는 네 명의 后를 세우고, 다섯 명의 后를 세웠으니, 더욱 말할 가치도 없다.[書 譏也 自漢立三后 其後也 周立四后 立五后 益無謂矣]” ≪書法≫
역주4 盜發漢霸, 杜二陵 : “≪資治通鑑綱目≫에 ‘도둑이 두 陵을 도굴했다.’라고 썼는데, 分注(目)에서는 ‘금과 비단을 매우 많이 얻었다.’라고 썼으니, 이 또한 厚葬하는 자의 경계로 삼을 만하다.[綱目書盜發二陵 分注載得金帛甚多 此亦可爲厚葬者之戒]” ≪書法≫
역주5 王敦徙陶侃爲廣州刺史 : “곧바로 ‘王敦이 옮겼다.’라고 쓴 것은 왕돈의 전횡을 미워한 것이다.(앞(313)에서 陶侃을 荊州刺史로 삼을 적에 ‘왕돈이 표문을 올렸다.’라고 쓴 것에 의거한 것이다.)[直書敦徙 惡(오)專也(據前爲荊州書敦表)]” ≪書法≫
역주6 孫皓 : 삼국시대 吳나라 孫權의 손자로, 景帝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으나 酒色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무고한 자들을 살육하면서 사람의 눈을 뽑고 얼굴 가죽을 벗기는 등 포악하게 굴다가 晉나라에 사로잡혀 洛陽에서 죽었다.(≪三國志≫ 권48 〈吳書 孫皓傳〉)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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