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淵은 豹之子也라 幼而雋異하고 師事上黨崔遊하여 博習經史러니
嘗謂同門生曰 吾常恥隨陸無武
하고 絳灌無文
注+隨‧陸, 隨何‧陸賈. 絳‧灌, 絳侯周勃‧灌將軍嬰.하노니 隨陸遇高帝而不能建封侯之業
하고
絳灌遇文帝而不能興庠序之敎하니 豈不惜哉리오 於是兼學武事러니 乃長에 猿臂善射하고 膂力過人하고 姿貌魁偉하니
爲任子在洛陽에 王渾及其子濟皆重之하여 屢薦於晉主하니 晉主召與語悅之러라
濟曰 淵有文武長才하니 陛下任以東南之事하시면 吳不足平也리이다
孔恂楊珧曰 非我族類이니 其心必異니 淵才器誠少比나 然不可重任也이니이다
及涼州覆沒에 晉主問將於李憙한대 對曰 陛下誠能發匈奴五部之衆하여 假淵一將軍之號하사 使將之而西하면
樹機能之首를 可指日而梟也리이다 恂曰 淵果梟樹機能하면 則涼州之患方更深耳리이다하니 晉主乃止하다
目
杜預上表曰 賊之窮計하고 力不兩完이라 必保夏口以東하여 以延視息이니
無緣多兵西上
하니 而陛下過聽
하여 便用委棄大計
하시니 縱敵患生
이 誠可惜也
注+延, 引也. 人目不能視氣, 不復息則死矣.로소이다
向使擧而有敗면 勿擧可也어니와 今有萬安之擧하고 無傾敗之慮하니
臣心實了
라 不敢以曖昧之見
으로 自取後累
니 惟陛下察之
注+了, 決也. 累, 事相緣及也.하소서
旬月未報어늘 預復表言 羊祜不博謀하고 而與陛計故로 令朝臣多異同之議하니
凡事當以利害相校니 今若此擧之利十有八九요 而其害止於無功耳라
必使朝臣으로 言破敗之形하면 亦不可得이니 直是以計不出己하고 功不在身하니
亦由恃恩不慮後患
하여 而輕相同異耳
注+直, 猶言但也.라 自秋已來
로 討賊之形頗露
하니
今若又中止하면 孫皓怖而生計하여 徙都武昌하고 完修江南諸城하며 遠其居民하면
城不可攻이요 野無所掠이면 則明年之計가 亦無及矣니이다
目
詔問朝臣以政之損益
한대 司徒長史傅咸上書
注+晉志 “司徒加置左右長史各一人.” 咸, 玄之子也.以爲 公私不足
이 由設官太多
라
當今之急이 在幷官省役務農而已라한대 遂議省州郡縣半吏以赴農功이러니
中書監荀勖以爲호되 省吏不如省官이요 省官不如省事요 省事不如淸心이니
抑浮說簡文案하고 略細苛하며 宥小失하고 變常以徼利者를 必誅가 所謂省事也요
以九寺併尙書
하고 蘭臺付三府
가 所謂省官也
注+九寺, 謂九卿寺也. 漢初九卿各有所掌, 東都以後, 尙書諸曹分掌衆事, 九卿殆爲具官, 故欲併之尙書. 蘭臺, 御史臺也. 三府, 三公府也. 漢丞相有長史‧司直, 御史大夫有中丞‧侍御史, 掌察擧非法, 故勖欲以蘭臺付之三府.라
若直作大例하여 天下之吏를 悉省其半이면 恐郡國職業이 劇易不同하니 不可以一槪施之라
若有曠闕이면 皆須更復이요 或激而滋繁이니 亦不可不重也니이다
目
[目] 예전에 禿髮樹機能이 오랫동안 변방의 근심거리였는데, 僕射 李憙가 병사를 출동시켜 토벌하기를 청하니, 조정의 의논이 모두 병사를 출동시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오랑캐는 근심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독발수기능이〉
涼州를 함락시키자,
注+涼州는 武威에 治所를 두었다. 晉主가 조회에 나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누가 나를 위해 이 오랑캐를 토벌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司馬督 馬隆이 나가서 말하기를 “폐하께서
臣에게 맡겨주신다면
臣이 이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注+晉나라 제도에 의하면 는 처음에 前驅, 由基, 彊弩를 三部司馬로 삼고 각각 督史를 두었다.라고 하였다.
晉主가 말하기를 “반드시
賊을 평정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임무를 맡기지 않겠는가마는,
方略이 어떤 것인지를 살필 뿐이다.”라고 하니,
마륭이 말하기를 “신이 바라건대
勇士 3천 명을 모집하여 출신을 묻지 않고 이들을 인솔하여 서쪽으로 간다면 오랑캐는 평정할 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注+응모하는 자들은 혹은 농사꾼 출신이고, 혹은 병사 출신이고, 혹은 도망자 출신이고, 혹은 노예 출신인데, 모두 그 출신을 따지지 않은 것이다. 帥(거느리다)은 率로 읽는다.라고 하니,
晉主가 허락하여
討虜將軍 武威太守로 삼았다.
마륭이 4
鈞의 활을 당길 수 있는 사람과 9
石의 쇠뇌[
弩]를 당길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하여 선발할 적에
注+30근이 鈞이고, 4鈞이 1石이다. 표지를 세우고 시험을 치러서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3,500명을 뽑았다.
注+標는 표시한다는 뜻이다.
마륭이 말하기를 “충분하다.”라고 하고, 또 자신이 武庫에 가서 병장기를 고를 것을 청하자 御史가 그를 탄핵하였는데, 晉主가 명을 내려 오직 마륭이 취하고 싶은 것을 갖도록 하고 이어 3년간 먹을 수 있는 군량을 주어 보냈다.
目
[目] 劉淵은 劉豹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준수하고 남달랐으며 上黨 사람 崔遊를 스승으로 섬기며 經史를 두루 익혔다.
일찍이 동문수학하던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늘
隨何와
陸賈는
武功이 없고,
絳侯와
灌嬰은
文才가 없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注+“隨陸”은 隨何와 陸賈이다. “絳灌”은 絳侯 周勃과 將軍 灌嬰이다. 수하와 육가는
高帝를 만났으나
侯에 봉해지는
功業을 세우지 못하였고,
絳侯와 灌嬰은 文帝를 만났으나 庠序의 교육을 진흥시킬 수 없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에 겸하여 무예를 익혔다. 장성하자 원숭이처럼 긴 팔로 활을 잘 쏘았으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세었고, 모습이 훤칠하였다.
인질이 되어 洛陽에 있을 때 王渾과 그의 아들 王濟가 모두 소중하게 여겨 여러 차례 晉主(司馬炎)에게 천거하니, 晉主가 불러서 함께 이야기하고는 기뻐하였다.
왕제가 말하기를 “유연은 문무의 재주가 모두 출중하니, 폐하께서 東南의 일을 맡기시면 吳나라는 평정할 거리도 못 됩니다.”라고 하였다.
孔恂과 楊珧가 말하기를 “우리 종족과 같지 않으니 필시 그 마음이 다를 것입니다. 유연의 재주와 기량이 진실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적으나 중요한 임무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涼州가 함락되자 晉主가 李憙에게 장수를 시킬 만한 사람을 묻자,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진실로 匈奴 5部의 무리를 징발하여 유연에게 하나의 장군의 명칭을 빌려주어서 그에게 병사들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게 한다면
禿髮樹機能의 머리는 머지않아 효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순이 말하기를 “유연이 과연 독발수기능을 효수하면 양주의 근심거리는 더욱 깊어질 뿐입니다.”라고 하니, 晉主가 이를 중지하였다.
目
[目] 吳主(孫皓)가 매번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열 때마다 모두 아주 취하게 하고, 또 黃門郞 10명을 두어 司過(신하의 과실을 규찰하는 관리)로 삼았는데,
연회가 파한 뒤에 각기 그들이 저지른 실수를 상주하여 혹 얼굴의 가죽을 벗기거나 눈알을 파내니, 이로 말미암아
上下가 마음이 떠나서 힘을 다하는 자가 없었다.
注+爲(위하다)는 去聲이다.
王濬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손호가 荒淫無道하고 흉악하며 패역하니, 마땅히 속히 정벌해야 합니다. 만일 갑자기 손호가 죽어 다시 어진 군주를 세우면 강한 적이 될 것이고,
신이 배를 만든 지가 7년이 되어 배가 날로 썩고 부서지며, 신의 나이가 칠십이어서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세 가지 중에 하나만 어그러져도 도모하기가 어려우니, 진실로 폐하께서는 事機를 놓치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晉主(司馬炎)가 이에 吳나라를 정벌할 것을 결심하였는데, 마침 王渾이 말하기를 “손호가 북쪽으로 올라오려고 하여 변방의 수비를 모두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다시 이듬해에 출병할 것을 의논하였다.
目
[
目]
杜預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적들이 계책이 곤궁하고 병력이
을 완전히 지키지 못할 것이니, 반드시
夏口의 동쪽을 보존하여 연명하려고 할 것인데,
이유 없이 많은 병사들이 서쪽으로 올라오니 폐하께서 보고를 지나치게 들어 큰 계책을 버리시니, 적을 놓아주어 걱정거리를 만드는 것이 참으로 애석합니다.
注+延은 이끈다는 뜻이다. 사람의 눈으로는 기운을 볼 수 없고, 다시 숨을 쉬지 못하면 죽는다.
가령 군사를 일으켜 실패한다고 하면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옳지만, 지금은 편안한 거동만이 있고 실패할 염려가 없습니다.
신의 마음은 분명하기에 감히 애매한 의견으로
後患을 자초할 수 없으니, 폐하께서는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注+了는 결정하는 뜻이다. 累는 일이 서로 연결되어 미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 달이 지나도 아무런 回報가 없자, 두예가 다시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羊祜는 널리 계책을 구하지 않고 폐하와 계책을 도모했기 때문에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대부분 다른 의론이 많아지게 한 것입니다.
무릇 일이란 마땅히 이로움과 해로움을 가지고 비교해야 하는데, 지금 이 거병은 이익이 열에 여덟아홉이고, 해가 되는 것은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하는 것에 그칠 뿐입니다.
조정의 신하들에게 적을 격파할 형세를 말하게 하면 역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는 계책이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고, 공이 자신에게 있지 않으니,
은혜를 믿고 나라의 후환을 염려하지 않기 때문에 가벼이 다른 의견을 내세우는 것뿐입니다.
注+直(다만)는 但과 같다. 가을부터 적을 토벌하겠다는 모습이 제법 드러났으니,
지금 또 중지하면 孫皓가 두려워하여 계책을 내어 도읍을 武昌으로 옮기고 江南에 있는 여러 성들을 완전하게 수리하고 백성들을 먼 곳으로 옮기면
성을 공격할 수 없을 것이며 들에는 약탈할 것이 없게 될 것이니, 다음 해에 정벌하겠다는 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目
[
目] 11월에
將軍 琅邪王 司馬伷를 파견하여
涂中(도중)으로 출동하게 하고,
注+胡三省이 말하기를 “涂는 滁로 읽는다. 吳主 孫權이 堂邑을 만들었는데, 涂塘이 그 지역이니, 지금의 滁州에서 眞州路로 향하는 길을 취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王渾은
江西로 출동하게 하고,
注+胡三省이 말하기를 “지금의 和州에서 橫江의 건너는 길로 나간 것이다.”라고 하였다. 王戎은
武昌으로 출동하게 하고,
胡奮은
夏口로 출동하게 하고,
杜預는 江陵으로 출동하게 하고, 王濬과 巴東監軍 唐彬은 巴蜀에서 내려가게 하였으니, 東西가 모두 20여만이었다.
賈充을 명하여
使持節로
黃鉞을 주어
大都督으로 삼고
冠軍將軍 楊濟를
副將으로 삼았다.
注+使(사신)는 疏吏의 切이다.
賈充이 吳나라를 정벌하는 것이 이롭지 못함을 굳게 진술하고 또 자신이 노쇠하다고 말을 하여 元帥의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출병하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갈 것이다.”라고 하니,
가충이 명을 받고 中軍을 거느리고 襄陽에 주둔하면서 諸軍을 통제하였다.
目
[
目]
馬隆이 서쪽으로 가서
溫水를 건너니,
注+武威의 동쪽에 溫圍水가 있다. 禿髮樹機能 등이 수만 명을 데리고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그들을 막았다.
마륭이 산길이 좁은 것으로 인해 마침내
扁箱車(좁은 길을 가는 수레)를 만들고 나무 지붕을 만들어 수레 위에 얹어서
注+扁(협소하다)은 補典의 切이다. 수레의 몸통이 좁으면 좁은 길을 갈 수 있다. 나무 지붕은 비바람을 막고 화살과 돌을 막는 것이다. 돌아다니며 전투하면서 전진하니, 1천여 리를 나아가자 죽이거나 다치게 한 자들이 매우 많았다.
마륭이 서쪽으로 나아가고 나서 소식이 끊기자 조정에서 걱정하였고, 어떤 자는 이미 죽었다고 말을 하였는데, 마륭의 使者가 도착하였다.
晉主가 손바닥을 치며 즐겁게 웃으며 여러 신하들을 불러 말하기를 “만약 여러 卿들의 말을 따랐다면 涼州를 잃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륭이 武威에 이르자 鮮卑族의 大人이 1만여 부락을 인솔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마륭이 독발수기능과 크게 전투를 벌여 그를 참수하자 양주가 이윽고 평정되었다.
目
[
目] 조서를 내려 조정의 신하들에게 정사의 고칠 점을 물었는데,
司徒左長史 傅咸이 상서하기를
注+≪晉書≫ 〈職官志〉에 “司徒에 左長史와 右長史 각각 1인을 더 두었다.” 하였다. 傅咸은 傅玄의 아들이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재화가〉 부족한 것은 관직을 너무 많이 설치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급한 일이 관직을 합병하고 요역을 줄이며 농사에 힘쓰게 하는 데 있습니다.”라고 하니, 이윽고 州‧郡‧縣의 관리를 반으로 줄여서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논의하였다.
그러자 中書監 荀勖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리를 줄이는 것은 관직을 줄이는 것만 못하고, 관직을 줄이는 것은 사무를 줄이는 것만 못하며, 사무를 줄이는 것은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만 못합니다.
옛날에 蕭何와 曹參이 漢나라의 재상을 맡았을 때 조참이 소하의 청정한 정치를 계승하여 백성들이 한결같이 편안하였으니, 이른바 마음을 깨끗이 한 것입니다.
부화하는 말을 억누르고, 문건을 간단히 하며, 자잘하고 번잡한 규정을 간략히 하며, 작은 실수를 용서하고, 상규를 바꾸어서 이익을 취하려 하는 자는 주벌하는 것이 이른바 일을 줄이는 것입니다.
九寺를
尙書臺에 병합하고
蘭臺를
三府에 붙이는 것이 이른바 관직을 줄이는 것입니다.
注+九寺는 九卿寺를 말한다. 漢나라 초기에 九卿은 각각 관장하는 일이 있었는데, 東都(東漢) 이후로 尙書의 諸曹에서 여러 가지 일을 관장하여 九卿은 거의 자릿수만 채우는 관직이 되기 때문에 尙書臺로 병합하려고 한 것이다. 蘭臺는 御史臺이고, 三府는 三公府이다. 漢나라 丞相은 長史와 司直을 거느리고 御史大夫는 中丞과 侍御史를 거느려서 법에 어긋나는 일을 적발하였다. 그러므로 荀勖이 蘭臺를 三府에 붙이려고 한 것이다.
만약 곧바로 大例를 만들어서 천하 관리의 절반을 모두 줄이면 郡國의 직무에 어렵고 쉬움의 차이가 있으니, 이를 일률적으로 시행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만약 정사가 황폐해지면 모두 다시 회복시켜야 하고, 혹 요동쳐서 번다해질 것이니, 또한 신중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