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綱】 한漢나라 세조 광무황제世祖 光武皇帝건무建武 8년이다. 봄에 중랑장 내흡中郞將 來歙을 보내 외효隗囂를 정벌해서 약양略陽을 점령하고, 이곳을 지키던 외효의 장수를 참수하였다.
여름 윤4월에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외효를 정벌할 적에, 두융竇融 등이 5개 군郡의 병력을 인솔하고 수행하였다. 외효의 무리가 모두 항복하니 외효가 서성西城으로 도망하였는데, 오한吳漢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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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내흡來歙이 2천여 명을 인솔하여 산의 나무를 베고 길을 내어 반수番須(반수)와 회중回中을 따라 곧바로 약양略陽을 습격하고 이곳을 지키던 외효隗囂의 장수 금양金梁을 참수하자注+반番은 음이 반盤이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반수番須는 골짜기의 이름이니 부풍 견현扶風 汧縣에 있다.” 하였다. 송백宋白이 말하기를 “약양도略陽道는 농성현隴城縣 동쪽 60리 지점에 있으니, 바로 옛 기성冀城이다.” 하였다.,
외효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어쩌면 이리도 신속한가.” 하였다. 황제는 약양을 점령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말하기를 “약양은 외효가 의지하여 믿는 곳이다. 심복心腹이 이미 무너졌으니, 그 지체支體를 제어하기가 쉬울 것이다.” 하였다.
오한吳漢 등의 여러 장수는 내흡이 약양을 점거했다는 말을 듣고는 다투어 말을 달려 약양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상上은 ‘외효가 믿던 곳을 잃고 중요한 성城을 잃었으니, 형편상 반드시 정예병을 총동원하여 와서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날 오랫동안 포위하여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적의 사졸들이 피곤하고 피폐할 것이니, 그때에야 비로소 위태로운 틈을 타서 전진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오한 등을 쫓아가서 돌아오게 하였다.注+“돈폐頓敝”는 피곤하고 피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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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외효隗囂가 과연 왕원王元은 농저隴坻(농隴의 산판)에서 막게 하고 행순行巡은 반수番須의 입구를 지키게 하고 왕맹王孟은 계두산鷄頭山의 길을 차단하게 하고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계두도鷄頭道는〉 계두산鷄頭山의 길이다. 계鷄자는 혹 계笄자로 되어 있는바, 일명 공동산崆峒山이니, 지금의 원주原州 서쪽에 있다.” 하였다.우한牛邯은 와정瓦亭에 군을 주둔하게 하고는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안정 오씨현安定 烏氏縣에 와정瓦亭의 옛 관문이 있고 와정의 냇물이 있으니, 지금 원주原州 남쪽에 있다.” 하였다.,
자신은 큰 병력 수만 명을 직접 인솔하여 약양略陽을 포위하니, 공손술公孫述이 장수 이육李育과 전감田弇을 보내 외효를 도왔다.
그들이 산을 깎아 제방을 쌓고 물을 격류시켜 성안에 주입하자, 내흡은 장병들과 사력을 다해 굳게 지켰으며, 화살이 다 떨어지자 지붕을 헐고 나무를 잘라 병기로 삼았다. 외효가 정예병을 다하여 공격하였으나 여러 달이 되어도 함락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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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여름 윤4월에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외효隗囂를 정벌하려고 하니, 광록훈 곽헌光祿勳 郭憲이 간하기를 “동방이 이제 겨우 안정되었으니, 거가車駕가 멀리 행차하여 정벌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는, 수레를 가로막고 패도佩刀를 꺼내 수레의 고삐를 끊었다.注+윤靷은 음이 윤胤이니, 가죽으로 말의 가슴을 묶어 수레 축을 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황제가 따르지 않고 서쪽으로 칠漆에 이르니, 장수들이 대부분 귀중한 천자天子의 군대가 멀리 험한 곳에 들어가면 안 된다 하기에 주저하며 계책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황제가 마원馬援을 불러 물으니, 마원이 인하여 외효의 장수들이 무너져 수습할 수 없는 형세(배반하고 와해될 형세)에 있으니, 우리 군대가 진격하면 반드시 적을 깨뜨릴 정황이 있다고 말하였다.注+설說(말하다)은 본음대로 읽는다.
그러고는 또 황제 앞에서 쌀을 모아 산곡山谷을 만들어 지형을 지적해가면서 군대가 따라갈 큰길과 오솔길을 보여주었는데, 지형을 왔다 갔다 하면서 분석하는 것이 분명하여 밝게 알 수 있었다.
황제는 “오랑캐가 내 눈 안에 있다.” 하고는 다음 날 진군하여 고평高平의 제일성第一城에 이르렀다.注+≪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고평현高平縣에 제일성第一城이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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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두융竇融이 5개 군郡의 태수太守와 강로羌虜, 소월지小月氏 등의 보병과 기병 수만 명과 치중輜重 5천여 대를 거느리고 대군大軍과 회합하였다.
이때에 군대가 막 창건되어서 장수들이 조회할 적에 예용禮容이 엄숙하지 못한 점이 많았다. 두융이 먼저 종사從事를 보내 조회에 황제를 뵙는 의식을 물으니注+한漢나라 제도에 장군부將軍府와 사예司隷, 자사刺史, 군수郡守에게는 모두 종사從事가 있었다. 현見(알현하다)은 현편賢遍의 절切이다.,
황제는 듣고 좋게 여겨서 백관들에게 선포하고 마침내 술자리를 마련하여 성대하게 연회를 베풀고 두융 등을 특별한 예로 대우하였다.注+수殊는 특별함이고 뛰어남이니, 〈“대융등이수예待融等以殊禮”는〉 두융竇融을 대하는 예禮가 뭇 신하들보다 특별하고 뛰어남을 말한 것이다.
마침내 진군하여 여러 길을 따라 농隴으로 올라갈 적에, 왕준王遵으로 하여금 편지를 가지고 가서 우한牛邯을 초유招諭하여 항복시키고 우감을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제수하게 하니,
이에 외효의 대장 13명과 속현屬縣 16개와 10여만의 병사들이 모두 항복하였다.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천수군天水郡은 16개 현縣이다.” 하였다.
외효가 처자를 거느리고 서성西城(서현西縣의 성城)으로 달아나서 양광楊廣을 따르고, 전감田弇과 이육李育은 상규上邽(상규)를 보전하여 지키니, 약양略陽(내흡來歙)의 포위가 풀렸다.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를 근거해보면, 서현西縣은 본래 농서군隴西郡에 속해 있다가 뒤에 바뀌어 한양漢陽에 소속되었다. 서성西城은 서현西縣의 성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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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황제가 내흡來歙을 위로하여 상賞을 내릴 적에, 반열의 자리를 별도로 마련하여 장수들의 상석上席에 있게 하고 내흡의 아내에게 비단 1,000필匹을 하사하였다.注+“반좌절석班坐絶席”은 자리를 별도로 마련하고 장수들의 위에 앉혀서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앉히지 않음을 이른다.
황제가 전진하여 상규上邽에 행차해서 조령詔令을 내려 외효隗囂에게 고하기를 “만약 손을 묶고 스스로 나오면 부자父子(외효隗囂와 외순隗恂)가 서로 만나보아 다른 해로움이 없을 것을 보장하지만, 끝내 경포黥布가 되려 한다면 그 또한 그대의 뜻에 맡겨두겠다.”注+〈“약수욕위경포자 역자임야若遂欲爲黥布者 亦自任也”는〉 반드시 돌아와 항복하지 않을 것임을 말한 것이니, 경포黥布처럼 황제가 되고 싶다고 말하더라도 또한 그의 뜻에 맡겨둔다는 것이다. 하였다.
외효가 끝내 항복하지 않자, 그의 아들 외순을 주살하고 오한吳漢과 잠팽岑彭으로 하여금 서성西城을 포위하게 하고 경감耿弇과 갑연蓋延은 상규上邽를 포위하게 하였다.
4개의 현縣으로 두융竇融을 봉하여 안풍후安豐侯로 삼고注+두융竇融을 안풍安豐, 양천陽泉, 요蓼, 안풍安風 4개의 현縣에 봉하였으니, 모두 여강군廬江郡에 속하였다. 아우 두우竇友를 현친후顯親侯로 삼았으며注+황제가 현친현顯親縣을 설치하여 두우竇友를 봉해서 두씨竇氏가 효문황후孝文皇后의 친족임을 표창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한양군漢陽郡에 현친현顯親縣이 있다.” 하였다., 5개 군郡의 태수太守를 모두 열후列侯에 봉하여注+축증笁曾은 조의후助義侯, 양통梁統은 성의후成義侯, 사포史苞는 포의후褒義侯, 고균庫鈞은 보의후輔義侯, 신융辛肜은 부의후扶義侯에 봉하였다. 서쪽의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두융은 자신이 오랫동안 한 방면을 통제했다 하여 두려워 스스로 편안하지 못해서 여러 차례 글을 올려 교대해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나와 장군은 양손과 같은데 여러 번 물러날 것을 고집하니, 어찌 이렇게 사람의 뜻을 몰라주는가. 부디 군사와 백성들을 힘써 돌보고, 마음대로 부곡部曲을 떠나지 말라.”注+순循은 어루만지고 돌봄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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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영천潁川에 도적 떼가 일어나자, 가을 9월에 황제가 환궁한 지 6일 만에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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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영천潁川에 도적 떼가 일어나서 속현屬縣을 침입하여 점령하고 하동河東을 지키는 군대가 또한 반란을 일으키니, 경사京師가 소란하였다.注+≪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영천군潁川郡은 낙양雒陽의 동남쪽 500리 지점에 있고, 하동군河東郡은 낙양의 서북쪽 50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는 말하기를 “내 곽자횡郭子橫(곽헌郭憲)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注+자횡子橫은 곽헌郭憲의 자이다. 이보다 앞서 곽헌이 일찍이 간하기를 “동방東方이 이제 막 평정되었으니, 거가車駕가 멀리 행차하여 정벌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하였다.
가을 8월에 황제가 상규上邽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동쪽으로 달려올 적에 잠팽岑彭 등에게 편지를 내리기를 “두 성城이 만약 함락되면 곧바로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촉蜀의 반역자를 공격하리라.注+두 성城은 서성西城과 상규上邽이다.
사람은 만족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병통이다. 이미 농隴을 평정하고 다시 촉蜀을 바라는구나. 한 번 군대를 동원할 때마다 머리털과 수염이 세는구나.”注+〈“두수위백頭須爲白”은〉 군사軍事에 고심함을 말한 것이다. 수須(수염)는 수鬚와 같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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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9월 을묘일乙卯日에 거가車駕가 환궁하였다. 황제가 집금오 구순執金吾 寇恂에게 이르기를 “영천潁川은 경사京師와 매우 가까우니, 마땅히 제때에 평정하여야 한다. 내 생각하건대 오직 경卿만이 평정시킬 수 있으니,
구경九卿에서 다시 외직으로 나가 국가의 일을 걱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注+유惟는 생각함이다. 집금오執金吾는 비록 구경九卿은 아니지만 또한
이다. 하였다. 구순이 대답하기를 “영천 사람들이 폐하께서 농隴과 촉蜀의 전쟁에 종사하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방종하고 교활한 자들이 틈을 타서 서로 잘못을 저질렀을 뿐입니다.
만일 승여乘輿가 남쪽을 향해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적들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사명死命을 바칠 것이니, 신臣은 원컨대 예리한 병기를 잡고 앞에서 선봉이 되고자 합니다.” 하니, 황제가 이 말을 따랐다.
경신일庚申日에 거가車駕가 남쪽을 정벌하니, 영천潁川의 도적 떼가 모두 항복하였다. 구순이 끝내 영천군수潁川郡守에 임명되지 않자, 백성들이 길을 가로막고 말하기를 “폐하께 다시 구군寇君을 1년 동안 빌리기를 원합니다.”注+구순寇恂이 예전에 영천태수潁川太守를 지냈기 때문에 “부차復借(다시 빌리다)”라 한 것이다. 하였다.
이에 구순을 장사長社에 남겨두어 관리와 백성들을 진무鎭撫하고 나머지 항복하는 자들을 받아들이게 하였다.注+장사현長社縣은 영천군潁川郡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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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동군東郡과 제음濟陰에서도 도적 떼가 일어나자注+≪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동군東郡은 낙양雒陽과의 거리가 800여 리이고, 제음군濟陰郡은 낙양 동쪽 80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황제는 이통李通과 왕상王常을 보내 이들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동광후 경순東光侯 耿純이 일찍이 동군태수東郡太守가 되어서 위엄과 신의가 위衛 지역에 드러났다 하여注+동광현東光縣은 발해군勃海郡에 속하였다. 동군東郡은 위衛 지역이다.,
사자使者를 보내 경순을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제수하여 대군大軍과 동군東郡에서 회합하게 하였다. 동군東郡에서는 경순이 경내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적 9천여 명이 모두 경순에게 나와 항복하였다.
대군이 싸우지 않고 돌아오자, 황제는 친서를 내려 다시 경순을 동군태수東郡太守로 삼았다. 무인일戊寅日에 거가車駕가 영천潁川에서 돌아왔다.
綱
【강綱】 겨울에 공손술公孫述이 외효隗囂를 구원하려고 군대를 보내자, 오한吳漢이 병력을 이끌고 농隴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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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양광楊廣이 죽자, 외효隗囂가 매우 곤궁하였다. 처음에 황제는 오한吳漢에게 칙명을 내리기를 “여러 군郡의 병졸들이 가만히 앉아 양식만 허비하고 있다. 만약 이들 중에 도망자가 생기면 사람들의 마음이 좌절될 것이니, 모두 해산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나 오한 등은 힘을 합쳐 외효를 공격하고자 해서 마침내 해산하여 보내지 못하니, 이 때문에 군량이 날로 적어지고 관리와 군사들이 부역에 피로하여 도망하는 자들이 많았다.
잠팽岑彭이 골짝의 물을 막아 서성西城에 주입하니, 성이 수몰되지 않은 것이 겨우 한 길 남짓이었다. 마침 왕원王元, 행순行巡, 주종周宗이 촉蜀의 병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높은 곳에서 갑자기 몰려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크게 소리치기를 “백만의 군대가 몰려온다.” 하였다. 한漢나라 군대가 크게 놀라서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注+진陳(진을 치다)은 진陣으로 읽는다., 왕원 등이 포위를 풀고 결사적으로 싸워 마침내 성에 들어와 외효를 맞이해서 기冀로 돌아갔다.注+≪괄지지括地志≫에 “기현冀縣은 천수군天水郡에 속하였는데, 동한東漢 때에 천수군天水郡을 고쳐 한양군漢陽郡이라 하고 기현冀縣을 치소로 삼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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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오한吳漢의 군대는 식량이 떨어지자 마침내 치중거輜重車를 불태우고 병력을 이끌고 농隴으로 내려갔고, 갑연蓋延과 경감耿弇 또한 서로 따라 후퇴하였다.
외효隗囂가 병력을 출동하여 후미에서 여러 진영을 공격하였는데注+“미격尾擊”은 그 후미를 찾아 공격함을 이른다., 잠팽岑彭이 후미에서 이들을 막으니 여러 장수가 비로소 군대를 온전히 하여 동쪽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채준祭遵만은 견汧에 주둔하고 후퇴하지 않았다.
오한 등이 다시 장안長安에 군대를 주둔하고 잠팽이 진향津鄕으로 돌아오니, 이에 안정安定, 북지北地, 천수天水, 농서隴西가 다시 배반하여 외효의 소속이 되었다.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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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교위校尉인 태원太原 사람 온서溫序가 외효隗囂의 장수 구우苟宇에게 사로잡혔다.注+온溫은 성姓이다. 구우가 그를 항복시키려 하자, 온서가 크게 노하여 구우 등을 꾸짖기를 “반역자가 어찌 감히 한漢나라 장군을 협박하는가.” 하고는 손에 잡고 있던 부절符節로 몇 사람을 때려 죽였다.注+절節은 잡고 있던 부절符節을 이른다. 과撾는 때림이다.
구우의 무리들이 다투어 그를 죽이려 하자, 구우가 만류하며 말하기를 “이는 의사義士가 충절을 지키기 위해 죽으려는 것이니, 검을 주어야 한다.” 하였다.
온서가 검을 받고서 수염을 입에 넣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적에게 살해당하는 몸이니, 수염이 흙을 더럽히지 말게 하라.” 하고는 마침내 검에 엎어져 죽었다.
종사 왕충從事 王忠이 그의 시신을 가지고 낙양雒陽으로 돌아오자, 조령詔令을 내려 장례할 땅을 하사하고 세 아들을 낭관郞官에 임명하였다.
綱
【강綱】 큰 홍수가 있었다.
역주
역주1帝還宮……討平之 :
“이는 특별히 쓴 것이니, 황제가 이에 감히 스스로 한가롭고 태만하게 지내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高帝는 ‘머문 지 4일 만에 다시 廣武로 갔다.’고 썼고, 世祖는 ‘환궁한 지 6일 만에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하여 평정했다.’고 썼으니, 고조와 세조는 행적이 똑같다.[特筆也 帝於是可謂不敢自暇矣 高帝書留四日 復如廣武 世祖書還宮六日 自將討平之 二祖同一轍也]” ≪書法≫ “帝王이 大業을 경영할 적에 진실로 수고로움을 꺼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世祖가 隴坻를 정벌하여 여름부터 가을까지 수개월을 지나서 이때 환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潁川에 도적 떼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자 즉시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하였다. 당시 용맹한 장수가 구름 떼처럼 많았으니, 어찌 맡길 만한 자가 없었겠는가마는 황제가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음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특별히 ‘환궁한 지 6일’이라고 썼으니, 황제가 스스로 한가롭고 편안하게 지내지 않은 것이 어떠한가. 빛나게 中興을 이룬 것이 당연하다.[帝王經營大業 固不可以憚勞 然世祖方征隴坻 自夏迄秋 經歷數月 至是還宮甫爾 一聞潁川盜起 卽自將討之 于時猛將如雲 豈無可任之人 顧乃不遑安處如此 特書六日 則帝之不自暇逸 爲如何哉 光濟中興 宜矣]” ≪發明≫
역주2(維)[雒] :
저본에는 모두 ‘維’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雒’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陪卿 :
보좌관인 陪貳와 卿士를 합하여 가리킨 말이다. ≪詩經≫ 〈大雅 蕩〉에 “네 德이 밝지 못한지라 陪도 없고 卿도 없도다.[爾德不明 以無陪無卿]”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毛亨의 傳에는 “陪貳도 없고 卿士도 없는 것이다.[無陪貳也 無卿士也]”라고 하였으며, 孔穎達의 疏에는 “陪貳는 副貳를 이르니, 왕자의 경우에는 三公이다. 卿士는 六卿을 이른다.[陪貳謂副貳 王者則三公也 卿士謂六卿也]”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朱子의 ≪詩經集傳≫에는 “陪는 貳이니, 前後左右와 公卿의 신하들이 모두 그 관직에 걸맞지 못하여 사람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陪 貳也 言前後左右公卿之臣 皆不稱其官 如無人也]”라고 설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