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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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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四年이라
秦建元五 燕建熙十年이라
夏四月 大司馬溫 帥師伐燕이어늘 秦人 救之하다
桓溫 請與徐, 兗刺史郗愔 江州刺史桓沖 豫州刺史袁眞等으로 伐燕注+① 沖, 溫之弟也.하다
在北府러니 常云 京口 酒可飲 兵可用이라하여 深不欲愔居之注+② 晉都建康, 以京口爲北府, 歷陽爲西府, 姑孰爲南州.러라
遺溫牋하여 欲共奨王室하여 請督所部出河上하니
愔子超爲溫參軍이라가 取視毁之하고 更作愔牋하여 自陳非將帥才 加以老病하여 乞閑地自養하고 勸溫幷領己所統한대
大喜하여 卽以愔爲會稽内史하고 而自領徐兗注+③ 會稽爲王國, 改太守爲內史.하다
帥歩騎五萬하고 發姑孰하여 將自兗州伐燕할새 郗超曰 道遠汴淺하여 漕運難通이라호되 不從注+① 兵亂之餘, 汴水塡淤, 未嘗有人浚治, 故淺.하다
六月 至金鄉하니 天旱水絶注+① 金鄕縣, 後漢屬山陽郡, 晉屬高平郡.이라 使將軍毛虎生으로 鑿鉅野三百里注+② 虎生, 寶之子也. 班固地理志 “汶水出泰山萊蕪縣西南, 入濟.” 水經註 “濟水東北入鉅野北, 故瀆又北, 右合洪水, 洪水上承鉅野薛訓渚, 謂之桓公瀆, 濟自是北注.” 杜佑曰 “濟水因王莽末渠涸, 不復截河過. 今東平․濟南․淄川․北海界中, 有水流入海, 謂之淸河, 實菏澤․汶水合流, 亦曰濟河, 蓋因舊名, 非濟水也.”하여 引汶하여 會于清하고 引舟하여 自清入河하니 舳艫数百里
超曰 清水入河 難以通運注+③ 自淸水入河, 皆是泝流, 又道里回遠, 故言難以通運.이니
若寇不戰이면 運道又絶이요 因敵爲資라가 復無所得이면 此危道也 不若擧衆趨鄴이니
彼必望風逃潰하여 北歸遼碣이요 若能出戰이면 則事可立決이니이다
若恐勝負難必하여 務欲持重이면 則莫若頓兵河濟하여 控引漕運하여 俟資儲充備하여 來夏乃進注+④ 河水過成皐縣北, 濟水自北來注之. 濟與河合流, 至敖山北, 而溢爲滎澤, 東出于陶丘北, 又東至乘氏縣, 分爲二, 南爲菏水, 北爲濟瀆. 濟瀆又東北合于河.이라
捨此二策하고 而連軍北上하면 進不速決이요 退必愆乏注+⑤ 上, 時掌切. 愆, 差爽也. 乏, 匱竭也. 此言糧運.이라 賊因此勢하여 以日月相引하여 漸及秋冬이면 水更澁滯하고
北土早寒이어늘 三軍裘褐者少하니 恐於時所憂 非獨無食而已니이다
又不從하고 遣攻胡陸拔之注+① 湖陸縣, 前漢曰湖陵, 屬山陽郡, 章帝更名湖陸, 晉分屬高平郡.하다
燕主暐使下邳王厲 逆戰敗還하고 前鋒鄧遐, 朱序 亦敗燕兵於林渚注+② 水經註 “華水東逕棐城北, 卽北林亭也.”하다
七月 至枋頭하니 暐及太傅評 大懼하여 謀犇和龍이러니 吴王垂曰 臣請擊之하리니 若其不捷이면 走未晚也니이다
暐乃使垂 帥衆五萬以拒溫한대 垂表申胤, 封孚, 悉羅騰從軍注+① 胤, 鍾之子. 孚, 放之子也. 放, 奕之從弟. 悉羅, 虜複姓, 騰, 其名也.이러라
暐又遣樂嵩하여 請救于秦호되 許賂虎牢以西之地注+① 虎牢, 關名, 卽武牢也.한대
秦群臣 議曰 昔桓溫伐我 燕不我救하니 今溫伐燕 我何救焉이리오
王猛曰 燕雖彊大 慕容評 非溫敵也
若溫擧山東하여 進屯洛邑하여 收幽冀之兵하고 引幷豫之粟하여 觀兵崤澠이면 則陛下大事去矣 不如與燕合兵以退溫이니
溫退 燕亦病矣리니 然後 我承其弊而取之하면 不亦善乎잇가
從之하여 遣苟池, 鄧羌하여 帥歩騎二萬以救燕하다
封孚問於申胤曰 事將何如 胤曰
以溫聲勢 似能有爲 然吾觀之호니 必無成功이라 何則
晉室衰弱하여 專制其國하니 晉之朝臣 未必皆與之同心하여 必將乖阻以敗其事注+① 乖, 異也. 阻, 隔也.
又溫 驕而恃衆하고 怯於應變이라
大衆深入 値可乘之會로되 反更逍遥中流하여 不出赴利하고 欲望持久하여 坐取全勝하니
若糧廩愆懸하여 情見勢屈하면 必不戰自敗하리니 此自然之数也注+② 愆, 謂糧運失期不至. 懸, 絶也. 見, 賢遍切.니라
使袁眞으로 注+① 譙․梁, 謂譙郡及梁國也, 皆屬豫州.이러니 九月 燕范陽王德 帥騎屯石門하고 李邽帥兵하여 斷溫糧道하다
使慕容宙 帥騎一千爲前鋒하여 與晉兵遇注+② 宙, 慕容垂弟子.러니
宙曰 晉人輕剽하여 怯於陷敵하고 勇於乘退하니 宜設餌以釣之라하고 乃使二百騎挑戰하고 分餘騎爲三伏하다
挑戰者 兵未交而走하니 晉兵 追之어늘 宙帥伏撃之하니 晉兵死者甚衆이러라
戰數不利하고 糧儲復竭이러니 又聞秦兵將至하고 焚舟棄輜重鎧仗하고 自陸道犇還할새 自東燕出倉垣하여 鑿井而飲하고 行七百餘里注+① 東燕, 郡名. 汴水․濟瀆, 皆自北而南, 恐追兵毒其上流, 故鑿井而飮.하다
燕將 争欲追之어늘 吳王垂曰 溫初退 必嚴設警備하고 簡精銳爲後拒리니 不如緩之
彼幸吾未至하여 晝夜疾趨하리니 俟其氣衰하여 撃之 無不克矣리라하고 乃帥八千騎하고 行躡其後하다
果兼道而進이어늘 數日 垂曰 可矣라하고
乃急追之하여 及於襄邑注+① 襄邑縣, 自漢以來屬陳留郡.하여 先帥勁騎하고 伏於東澗中이라가 與垂夾擊溫大破之하여 斬首三萬級하고 秦苟池 邀擊溫於譙하여 又破之하다
收散卒하여 屯于山陽注+② 山陽, 漢射陽縣地, 晉置山陽郡, 改爲山陽縣.하여 深恥喪敗하고 乃歸罪袁眞하여 奏免爲庶人注+③ 以石門不開糧運不繼爲眞罪.하다
不伏하고 表溫罪狀한대 朝廷 不報하니 遂據壽春하여 叛降燕하다
遣郝晷, 梁琛하여 如秦하다
秦燕 旣結好 燕使郝晷梁琛으로 相繼如秦하니 晷與王猛有舊러니 接以平生하고 問晷東方之事한대
晷知燕將亡하고 陰欲自託하여 頗泄其實이러라
至長安 秦王堅 方畋於萬年이라가 欲引見琛注+① 萬年, 秦之櫟陽, 漢高帝更名屬馮翊, 晉屬京兆.이어늘 琛曰 秦使至燕 燕之君臣 朝服備禮하여 灑掃宮廷然後 敢見이어늘 今秦王 欲野見之하시니 使臣 不敢聞命이니이다
尙書郞辛勁 謂琛曰 天子稱乘輿하고 所至曰行在所 何常居之有리오 又春秋 亦有遇禮하니 何爲不可乎注+② 春秋隱四年 “公及宋公遇于淸.” 杜預曰 “遇者, 草次之期, 二國各簡其禮, 若道路相逢遇也.”리오
琛曰 桓溫 闚我王略注+① 略, 界也.하니 燕危秦孤
是以 秦主恤患結好하여 交聘方始하니 謂宜崇禮篤義하여 以固二國之歡이라 若忽慢使臣이면 卑燕也 豈修好之義乎리오
夫天子以四海爲家故 行曰乘輿 止曰行在
今海縣瓜裂하여 天光 分曜하니 安得以是爲言哉注+② 騶衍曰 “中國有赤縣神州, 赤縣神州內有九州, 禹所敍九州是也. 其外有裨海, 環之.” 海縣之說, 蓋本諸此. 不期而見曰遇 蓋因事權行하여 其禮簡略이라
豈平居容與之所爲哉注+③ 與, 讀曰豫. 容與, 容暇而安豫也.리오 客使單行 誠勢屈於主人이나 然苟不以禮 亦不敢從也로라
乃爲設行宮하고 百僚陪位然後 延之注+④ 爲, 去聲, 下爲吳同.하다
從兄奕 爲秦尙書郞이러니 使典客으로 館琛於奕舍注+① 漢有典客之官, 後改爲大鴻臚. 此特臨時使之典客耳.한대
琛曰 昔 諸葛瑾 爲吳聘蜀 與諸葛亮으로 惟公朝相見하고 退無私面이러니 今使之卽安私室 所不敢也로라
數問琛東事한대 琛曰 兄弟本心 各有所在하니 欲言國美인대 恐非所欲聞이요 欲言其惡이면 又非使臣之所得論也니이다
使太子 延琛相見하니 秦人 欲使琛拜하여 先諷之曰 隣國之君 猶其君也 隣國之儲君 亦何以異乎리오
琛曰 天子之子 尙不敢臣其父之臣이어든 況它國之臣乎 禮有往來하니 情豈忘恭이리오 但恐降屈爲煩耳注+① 言當答拜也.라하고 乃不果拜하다
王猛 勸堅留琛한대 不許하다
冬十一月 燕慕容垂 出奔秦이어늘 秦以爲冠軍將軍하다
吳王垂 自襄邑還鄴하니 威名 益振이라 太傅評 愈忌之하여 垂奏將士功賞 皆抑而不行하고
太后可足渾氏 素惡垂 與評謀誅之注+① 惡垂事, 見穆帝升平二年.러니
太宰恪之子楷及垂舅蘭建 知之하고 以告曰 先發이면 制人이니 但除評及樂安王臧이면 餘無能爲矣注+② 兵法曰 “先發制人, 後發者人制之.”리이다
垂曰 骨肉相殘而首亂於國 吾不忍爲也 寧避之於外耳로라
世子令曰 主上 闇弱하여 委任太傅하니 一旦禍發이면 疾於駭機注+① 機, 弩牙也. 譬之彀弩, 不虞而機先發, 使人震駭, 故曰駭機.리니
今欲保族全身하여 不失大義 莫若逃之龍城하고 遜辭謝罪하여 以待主上之察이라
感寤得還이면 幸之大者 如其不然이면 則内撫燕代하고 外懷群夷하여 守肥如之險以自保 亦其次也注+② 燕․代, 二郡名. 肥如之險, 卽盧龍之塞也.니이다
垂曰 善타하고 十一月 請畋於大陸注+③ 正義 “大陸澤在邢州及趙州界, 一名廣阿澤, 一名鉅鹿澤”.하여 하여 將趨龍城하여 至邯鄲注+④ 邯鄲縣, 漢屬趙國, 晉屬廣平郡.이러니 少子麟 素不爲垂所愛 逃還告狀하니
燕主暐 遣精騎追之어늘 垂散騎滅迹得免하다
世子令 請給數騎襲鄴한대 垂曰 不可라하고 乃與段夫人及令, 寶, 農, 隆, 楷, 建及郞中令高弼 俱犇秦注+⑤ 段夫人, 垂前妃之女弟. 高弼, 垂之國卿.하다
秦王堅 聞恪卒하고 陰有圖燕之志호되 憚垂不敢發이러니
及聞垂至하고 大喜하여 郊迎執手曰
天生賢傑 必相與共成大功이니 此自然之數也 要當與卿共定天下하여 告成岱宗하고
然後 還卿本邦하여 世封幽州하여 使卿去國 不失爲子之孝하고 歸朕 不失事君之忠 不亦美乎
復愛令及楷之才하여 皆厚禮之하다
王猛曰 垂父子 譬如龍虎하여 非可馴之物이라 若借以風雲이면 將不可復制 不如早除之니이다
堅曰 吾方收攬英雄하여 以清四海하니 奈何殺之리오 且其始來 吾已推誠納之矣 匹夫 猶不棄言이어든 況萬乘乎아하고 乃以垂爲冠軍將軍하다
梁琛 歸言於評曰 秦人 日閲軍旅하고 聚糧陝東하니 和必不久 今吳王 又往하니 宜爲之備니이다
評曰 秦主 何如人 琛曰 明而善斷이니이다
問王猛한대 曰 名不虛得이니이다
旣又以告燕主暐하니 皆不然之호되
唯皇甫眞 深以爲憂하여 上疏請選將益兵하여 以防未然호되 不聽하다
秦石越 聘於燕하니 太傅評 示之以奢어늘
尙書郞高泰曰注+① 泰, 瞻之從子也. 言誕而視遠하니 乃觀釁也注+② 誕, 大言也. 宜耀兵以折其謀어늘 今乃示之以奢하니 益爲所輕矣리이다 不從하니 泰遂謝病歸하다
太后侵擾國政하고 貪昧無厭하여 貨賂上流하고 官非才擧하니 群下怨憤注+③ 貪昧者, 貪財昧利, 不顧其害也. 流, 水行也. 水行就下, 無逆而上流之理. 貨賂上行, 謂之上流, 言其逆於常理也.이라
尙書左丞申紹上疏注+④ 紹, 胤之兄也.하여 以爲宜精擇守宰하고 倂官省職하여 存恤兵家하여 使公私兩遂하며
節抑浮靡하고 愛惜用度하며 賞必當功하고 罰必當罪注+⑤ 當, 丁浪切.
如此則溫猛可梟 二方可取注+⑥ 溫․猛, 謂桓溫․王猛. 豈特保境安民而已리오 疏奏 不省하다
燕人 許割虎牢以西賂秦이러니 晉兵旣退 燕人 謂曰 行人失辭로다 有國有家者 分災救患 理之常也注+① 行人失辭, 謂使者許割地爲失辭也.니라
秦王堅 大怒하여 遣猛及將軍梁成, 鄧羌하여 帥歩騎三萬伐之하여 攻洛陽하니 洛陽하다
大司馬溫 徙鎭廣陵하다
發徐兗州民하여 築廣陵城하여 徙鎭之하니 征役旣頻하고 加之疫癘하여 死者十四五하니 百姓 嗟怨이러라
秘書監孫盛 作晉春秋 直書時事注+① 漢桓帝置秘書監, 晉武帝以秘書倂中書省, 惠帝復置秘書監. 其屬有丞有郞, 幷統著作省.러니 見之하고하여 謂盛子曰 枋頭誠爲失利어니와 何至乃如尊君所言注+② 晉人於人子之前, 稱其父爲尊君․尊公.이리오 若此史遂行이면 自是關君門戶事注+③ 言欲滅其門也.니라
其子遽拜謝하고 請改之注+④ 遽, 急疾也. 戰, 慄也.하다
年老家居할새 性方嚴有軌度하여 子孫 雖班白이나 待之愈峻이러니
至是하여 諸子號泣稽顙하여 請爲百口計한대 大怒不許어늘 諸子遂私改之하다
先已寫别本하여 傳之外國이러니 及孝武帝 購求異書하여 得之於遼東人하니 與見本不同이라
遂兩存之注+⑤ 見, 賢遍切.하니라


【綱】 晉나라(東晉) 帝 司馬奕 太和 4년이다.
【目】 秦나라(前秦) 符堅 建元 5년이고 燕나라(前燕) 幽帝 慕容暐 建熙 10년이다.
【綱】 여름 4월에 〈晉나라(東晉)〉 大司馬 桓溫이 군대를 거느리고 燕나라(前燕)를 공격하자, 秦나라 사람이 연나라를 구원하였다.
가을 9월에 환온이 연나라 사람과 枋頭에서 싸우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오니, 袁眞이 壽春을 점거하고 배반하여 연나라에 항복하였다.
【目】 桓溫이 徐州․兗州刺史 郗愔과 江州刺史 桓沖과 豫州刺史 袁眞 등과 함께 燕나라를 공격하였다.注+① 桓沖은 桓溫의 아우이다.
처음에 치음이 北府에 있었는데, 환온은 항상 말하기를 “京口는 〈그곳의 술이 좋아〉 술을 마실 만하고 〈그곳의 군대가 잘 훈련되어〉 군대를 동원할 만한 곳이다.” 하여 〈자기와 뜻을 같이하지 않는〉 치음이 이곳에 있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注+② 晉나라는 建康에 도읍하면서 京口를 北府로 삼고 歷陽을 西府로 삼고 姑孰을 南州로 삼았다.
치음이 환온에게 편지를 보내어 함께 王室을 돕고자 하여 부하 병사들을 거느리고 河水 가로 北進할 것을 청하였다.
치음의 아들 郗超가 환온의 參軍이었는데, 이 내용을 보고는 편지를 찢어버리고서 치음의 편지를 다시 작성하여 자신은 將帥의 재주가 아닌데다가 늙고 병들었으니, 한가로운 지역을 하사받아 자신의 병을 요양하고, 환온에게 자기가 통솔하고 있는 지역(徐州와 兗州)을 겸하여 맡아줄 것을 권하는 것으로 서술하였다.
그러자 환온은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즉시 치음을 會稽内史로 삼고 자신이 서주와 연주의 자사를 겸하였다.注+③ 會稽郡은 제후왕의 봉국이 되자, 太守를 고쳐 內史라 하였다.
【目】 여름에 〈桓溫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거느리고 姑孰을 출발하여 장차 兗州에서 燕나라(前燕)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郗超가 말하기를 “길이 멀고 汴水의 물이 얕아서 漕運이 통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으나, 환온은 따르지 않았다.注+① 兵亂을 겪은 뒤에 汴水가 진흙 벌로 채워졌는데, 일찍이 이것을 준설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물이 얕아진 것이다.
【目】 6월에 桓溫이 金鄉에 이르니, 날씨가 가물어 물이 고갈되었다.注+① 金鄕縣은 後漢 때에는 山陽郡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高平郡에 속하였다. 그리하여 將軍 毛虎生으로 하여금 鉅野 300리의 물길을 파서注+② 毛虎生은 毛寶의 아들이다. 班固의 ≪漢書≫ 〈地理志〉에 “汶水는 泰山 萊蕪縣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濟水로 들어간다.” 하였다. ≪水經註≫에 “濟水는 동북쪽으로 흘러 鉅野의 북쪽으로 들어간다. 濟水의 옛 물길은 또 북쪽으로 흘러 오른쪽 연안에서 洪水와 합류하고 홍수의 上口(어귀)는 鉅野의 薛訓渚와 이어지는데, 이곳을 ‘桓公瀆’이라 이른다. 濟水가 여기에서부터는 북쪽으로 주입된다.” 하였다. 杜佑가 말하였다. “濟水는 王莽의 말년에 개천이 마름으로 인하여 황하와 끊겨서 다시는 황하를 지나가지 않는다. 지금의 東平, 濟南, 淄川, 北海의 경계 가운데에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물을 ‘淸河’라 하고, 실로 菏澤과 汶水가 合流하는 곳도 ‘濟河’라 하는데, 이는 옛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고, 汶水를 끌어다가 清水로 모이게 하고 배를 끌고 清水에서 黃河로 들어가니, 배의 머리와 꼬리가 100리에 이어졌다.
郗超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청수에서 황하로 들어가면 조운을 통하기가 어렵습니다.注+③ 淸水에서 황하로 들어가는 것은 모두 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또 길이 멀리 돌아가기 때문에 조운을 통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적이 싸우지 않고 굳게 수비하면 우리의 조운하는 길이 또한 끊길 것이요, 우리가 적진에서 군량을 얻으려고 하다가 다시 얻을 곳이 없게 되면 이는 위태로운 방법입니다. 보유한 병력을 총동원하여 鄴城으로 곧장 쳐들어가는 것만 못합니다.
이렇게 하면 저들은 반드시 소문만 듣고도 궤멸하여 도망해서 북쪽으로 그들의 고향인 遼東과 碣石 일대로 돌아갈 것이요, 저들이 만약 나와 싸운다면 〈우리는〉 이 전쟁을 당장 결판낼 수 있습니다.
만약 필승을 장담할 수 없음을 염려해서 신중히 持久戰을 하고자 한다면 군대를 황하와 濟水 일대에 주둔시켜 조운을 통하게 해서 물자와 저축이 충분히 갖추어지기를 기다려 내년 여름에 진격하는 것만 못합니다.注+④ 河水(황하)는 成皐縣 북쪽을 지나가는데, 濟水가 북쪽에서 흘러와 황하로 주입된다. 제수와 하수가 合流하였다가 敖山 북쪽에 이르러 넘쳐 滎澤이 되고, 동쪽으로 陶丘의 북쪽으로 나온다. 이것이 또다시 동쪽으로 乘氏縣에 이르러 두 줄기로 갈라져 남쪽은 菏水가 되고, 북쪽은 濟瀆이 된다. 濟瀆은 또다시 동북쪽으로 하수와 합류한다.
이 두 계책을 버리고 군대를 연이어 북상시킬 경우, 전진하더라도 속전속결하지 못하고 후퇴하더라도 틀림없이 〈군량의 수송에〉 차질이 생겨 곤궁할 것입니다.注+⑤ 上(올리다)은 時掌의 切이다. 愆은 잘못됨이요 乏은 고갈됨이니, 이는 군량의 수송을 말한 것이다. 적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시일을 끌어 점점 가을과 겨울에 이르게 되면 수로의 물이 더욱 줄어들어 뱃길이 막힐 것입니다.
북쪽 땅은 추위가 일찍 찾아오는데 3군의 군사들이 갖옷과 솜옷을 입은 자가 적으니, 이때에는 군사들의 군량이 없는 것만 근심거리가 되지 않을 듯합니다.”
【目】 桓溫은 또다시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병력을 보내어 胡陸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注+① 湖陸縣은 前漢 때에는 ‘湖陵’이라 하여 山陽郡에 소속시켰는데, 後漢 章帝때에 湖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晉나라 때에는 高平郡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燕主 慕容暐가 下邳王 慕容厲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전하고 돌아왔으며, 晉나라(東晉)의 선봉인 鄧遐와 朱序 또한 燕나라(前燕) 군대를 林渚에서 패퇴시켰다.注+② ≪水經註≫에 “華水는 동쪽으로 棐城의 북쪽을 지나가니, 바로 北林亭이다.” 하였다.
【目】 7월에 桓溫이 枋頭에 이르니, 燕主 慕容暐와 太傅 慕容評이 크게 두려워하여 和龍으로 달아날 것을 도모하였는데, 吴王 慕容垂가 말하기를 “신이 한번 공격해볼 것이니, 만약 승리하지 못하면 그때 달아나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모용위는 마침내 모용수로 하여금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환온을 막게 하였는데, 모용수는 표문을 올려 申胤과 封孚, 悉羅騰을 從軍하게 하였다.注+① 申胤은 申鍾의 아들이고, 封孚는 封放의 아들이고, 봉방은 封奕의 從弟이다. 悉羅는 오랑캐의 複姓이니, 騰이 이름이다.
【目】 慕容暐는 또 樂嵩(악숭)을 보내어 秦나라(前秦)에 구원을 청하게 하였는데, 虎牢 서쪽의 땅을 떼어주기로 허락하였다.注+① 虎牢는 關門의 이름이니, 바로 武牢關이다.
진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옛날 桓溫이 우리 나라를 공격할 적에 燕나라(前燕)가 우리 나라를 구원하지 않았으니, 지금 환온이 연나라를 공격하는데 우리가 어찌하여 구원합니까.” 하였다.
이에 王猛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연나라가 비록 강하고 크나 慕容評은 환온의 적수가 아닙니다.
만약 환온이 山東 지방을 점령하고 전진해서 洛邑에 주둔하여 幽州와 冀州의 병력을 거두어 모으고 幷州와 豫州의 곡식을 끌어와서 崤谷과 澠池에서 군대를 열병하면, 폐하의 大業이 잘못될 것입니다. 연나라와 군대를 연합하여 환온을 물리치는 것만 못합니다.
환온이 물러가고 나면 연나라 또한 피폐해질 것이니, 그런 뒤에 우리가 피폐한 틈을 타 연나라를 점령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부견이 그의 말을 따라서 苟池와 鄧羌을 보내어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가서 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目】 封孚가 申胤에게 묻기를 “이번 일이 장차 어찌 되겠는가?” 하자, 신윤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桓溫의 명성과 기세로 무슨 일인들 할 수 있을 듯하나, 내가 살펴보건대 환온은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晉나라(東晉) 황실이 쇠약하여 환온이 그 나라를 제 마음대로 다스리니, 진나라 조정의 신하들이 반드시 모두 그와 마음을 함께하지 아니하여 뜻을 달리하고 방해하여 환온의 일을 망치려고 할 것이다.注+① 乖는 달리함이요, 阻는 막힘이다.
또 환온은 교만하여 많은 병력을 믿고 임기응변의 상황에 〈결단을〉 주저한다.
대군이 적진으로 깊이 쳐들어가서 승리를 취할 만한 기회를 만났는데, 도리어 황하의 中流에서 배회하기만 하고 승리를 취하려 출동하지 않고 지구전을 하여 가만히 앉아 全勝을 취하기를 바란다.
그러다가 만약 군량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고 끊겨서 불리한 정황이 탄로 나서 형세가 역전되면 틀림없이 싸우지도 못하고 패배할 것이니, 이는 자연의 운수이다.”注+② 愆은 군량 수송이 시한이 넘도록 도착하지 않는 것이다. 懸은 양식이 끊김이다. 見(나타나다)은 賢遍의 切이다.
【目】 처음에 桓溫이 袁眞으로 하여금 譙郡과 梁國을 공격하여 石門을 열어 水運을 통하게 하려다가 석문을 열지 못했는데,注+① 譙와 梁은 譙郡과 梁國을 이르니, 모두 豫州에 속하였다. 9월에 燕나라 范陽王 慕容德이 기병을 거느리고 석문에 주둔하였고 李邽가 군대를 거느리고 환온의 군량 수송로를 끊었다.
모용덕이 慕容宙로 하여금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晉나라(東晉) 군대와 맞서 싸우게 하였는데,注+② 慕容宙는 慕容垂의 아우의 아들이다.
모용주가 말하기를 “진나라 사람들은 경솔하고 조급하여 적진을 공격하여 함락하는 것을 회피하고 후퇴하는 적을 공격하는 것에 용맹하니, 마땅히 미끼를 만들어 저들을 낚아야 한다.” 하고는 마침내 기병 2백을 적진으로 출전시키고 나머지 기병을 세 곳에 나누어 매복시켰다.
출전한 기병들이 병기를 부딪기도 전에 달아나니, 진나라 군사들이 이를 추격해왔다. 모용주가 복병을 거느려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니, 전사한 진나라 군사가 매우 많았다.
【目】 桓溫은 여러 번 싸워 승리하지 못하고, 비축한 군량도 다시 고갈되었다. 또 秦나라(前秦) 군대가 장차 쳐들어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배를 불태우고 輜重과 갑옷, 병장기를 버리고 육로를 통해 달아나 돌아왔는데, 東燕에서 倉垣으로 나와 우물을 파서 마시고 700여 리를 행군하였다.注+① 東燕은 郡의 이름이다. 汴水와 濟瀆이 모두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니, 추격해오는 燕나라 군대가 그 상류에 독약을 풀까 염려하였으므로 우물을 파서 마신 것이다.
燕나라(前燕) 장수들이 앞다투어 추격하려 하자, 吳王 慕容垂가 말하기를 “환온이 처음 후퇴할 적에 필시 警備를 빈틈없이 설치하고 정예병을 뽑아 후미를 방어할 것이니, 추격 시기를 늦추는 것만 못하다.
저들은 우리가 추격해오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밤낮을 쉬지 않고 급히 달아날 것이니, 그들의 기운이 쇠진하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면 승리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8천 기병을 거느리고서 그들을 뒤쫓았다.
桓溫伐燕大敗還桓溫伐燕大敗還
【目】 桓溫이 과연 행군 속도를 배가하여 후퇴하였다. 며칠이 지나 慕容垂가 말하기를 “이제 공격할 시기가 됐다.” 하고는
마침내 급히 추격하여 襄邑에서 따라잡아注+① 襄邑縣은 漢나라 이래로 陳留郡에 속하였다. 慕容德이 먼저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東澗 가운데에 매복해 있다가 모용수와 함께 환온을 협공하여 대파하여 3만여 명의 수급을 베었고, 秦나라(前秦) 苟池가 譙郡에서 환온을 요격하여 또다시 격파하였다.
환온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山陽에 주둔하고는注+② 山陽은 漢나라 射陽縣의 땅이니, 晉나라는 山陽郡을 설치하고 이름을 山陽縣으로 고쳤다. 실패한 것을 깊이 부끄러워하였다. 마침내 袁眞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上奏해서 그를 庶人으로 내치게 하였다.注+③ 石門을 열지 않아 군량의 수송을 이어지지 못하게 한 것을 가지고 袁眞의 罪를 삼은 것이다.
원진은 굴복하지 않고 표문을 올려 환온의 罪狀을 나열하였는데, 조정에서 이에 대한 답을 내리지 않으니, 원진은 마침내 壽春을 점거하고 배반하여 燕나라(前燕)에 항복하였다.
【綱】 燕나라(前燕)가 郝晷(학구)와 梁琛(양침)을 보내어 秦나라(前秦)에 가게 하였다.
【目】 秦나라와 燕나라가 우호를 맺은 뒤에 연나라가 郝晷와 梁琛으로 하여금 연이어 진나라에 가게 하였다. 학구는 王猛과 구면이었는데, 왕맹은 그를 평소와 같이 잘 접대하고 학구에게 東方(연나라)의 일을 물었다.
학구는 연나라가 장차 망할 줄을 알고, 은근히 왕맹에게 의탁하고자 하여 연나라의 실정을 많이 누설하였다.
【目】 梁琛이 長安에 이르자, 秦王 符堅은 막 萬年에서 사냥하다가 양침을 인견하고자 하였는데,注+① 萬年은 秦나라의 櫟陽縣이니, 漢나라 高帝 때에 이름을 萬年으로 바꾸어 馮翊에 소속시켰고, 晉나라 때에는 京兆에 소속시켰다. 양침이 말하기를 “秦나라(前秦) 사신이 燕나라(前燕)에 왔을 적에 연나라의 군주와 신하가 朝服을 입고 禮를 갖추어 宮廷을 깨끗이 청소한 뒤에 감히 만나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진왕이 들에서 사신을 만나고자 하시니, 사신은 감히 명령을 따를 수 없습니다.” 하였다.
尙書郞 辛勁이 양침에게 이르기를 “天子를 乘輿라 칭하고 승여가 가는 곳을 行在所라 하니, 천자가 어찌 일정한 거처가 있겠는가. 또 ≪春秋≫에 또한 ‘길에서 우연히 만나는 禮’가 있으니, 어찌 不可하겠는가.” 하였다.注+② ≪春秋≫ 隱公 4년에 “隱公이 宋公과 淸에서 만났다.” 하였는데, 杜預의 주에 “遇라는 것은 갑자기 만나는 것이니, 두 나라가 예를 간략히 하여 道路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한 것이다.” 하였다.
【目】 이에 梁琛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桓溫이 우리 왕의 국경 지역을 엿보니,注+① 略은 경계이다. 燕나라(前燕)가 위태롭고 秦나라(前秦)가 고립무원의 상태이다.
이 때문에 진나라 왕이 환란을 근심하여 우리 나라와 우호를 맺어 두 나라 사이에 聘問이 막 시작되었으니, 마땅히 禮를 높이고 의리를 돈독히 지켜 두 나라의 우호를 견고히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연나라의 使臣을 소홀히 하면 이는 연나라를 깔보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우호를 닦는 뜻이겠는가.
天子는 四海를 집안으로 삼기 때문에 가는 것을 乘輿라 하고 멈추는 곳을 行在所라 한다.
지금 海縣(中國․海內)이 오이 조각처럼 갈라져 하늘의 빛이 여러 나라에 나뉘어 비치니, 어찌 이것(乘輿․行在所)을 가지고 말하겠는가.注+ ‘海縣’이라는 말은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禮에 기약하지 않고 서로 만나보는 것을 遇라 하였으니, 이는 일에 따라 權道를 행하여 그 예가 간략하다.
어찌 평소 한가롭고 편안할 때에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注+③ 與는 豫로 읽으니, ‘容與’는 한가하고 안락함이다. 사신이 單身으로 왔으므로 참으로 主人보다 열세인 상황이나, 만일 禮를 갖추어 상대하지 않으면 나 또한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다.”
符堅은 마침내 그를 위해 行宮을 설치하고 백관들을 배석하게 한 뒤에 그를 맞이하여 相見하였다.注+④ 爲(위하다)는 去聲이니, 아래의 ‘爲吳’의 爲도 같다.
【目】 梁琛의 從兄인 梁奕이 秦나라(前秦)의 尙書郞이 되었었는데, 符堅이 典客으로 하여금 양침을 양혁의 집에 머물게 하자,注+① 漢나라에는 〈외국 손님의 접대를 주관하는〉 典客이 있었는데, 뒤에 이름을 고쳐 大鴻臚라 하였다. 여기서는 다만 임시로 사람을 보내 典客으로 삼은 것이다.
양침이 말하기를 “옛날 이 吳나라를 위하여 사신으로 蜀漢에 빙문 갔을 적에 아우인 諸葛亮을 오직 公朝에서만 만나보았고, 물러나서는 사사로이 대면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로 하여금 형의 사사로운 방에 편안히 있게 하니, 감히 할 수 없다.” 하였다.
양혁이 양침에게 동쪽 燕나라(前燕)의 일을 자주 묻자, 양침이 말하기를 “형제의 본심이 각각 다른 데 있으니, 연나라의 좋은 점을 말하고자 한다면 형이 듣고자 하시는 바가 아닐까 염려되고, 나쁜 점을 말하고자 한다면 또 사신이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目】 符堅이 太子로 하여금 梁琛을 맞이하여 서로 만나보게 하니, 秦나라(前秦) 사람이 양침으로 하여금 태자에게 절을 하게 하려고 미리 넌지시 말하기를 “이웃 나라의 군주는 자기 나라의 군주와 같으니, 이웃 나라의 儲君(태자)도 어찌 다르겠는가.” 하였다.
양침이 말하기를 “天子의 아들도 오히려 그 아버지의 신하를 신하로 대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다른 나라의 신하이겠는가. 禮는 오고 감이 있으니, 내 마음에 어찌 공손함을 잊을 수 있겠는가마는 억지로 낮추고 굽혀서 태자를 번거롭게 할까 두렵다.” 하고는注+① 〈‘降屈爲煩’은〉 태자가 마땅히 答拜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끝내 〈태자에게〉 절하지 않았다.
王猛은 부견에게 양침을 억류할 것을 권했으나, 부견이 허락하지 않았다.
【綱】 겨울 11월에 燕나라(前燕) 慕容垂가 秦나라(前秦)로 도망하였는데, 진나라에서 그를 冠軍將軍으로 삼았다.
【目】 吳王 慕容垂가 襄邑에서 鄴城으로 돌아온 뒤에 위엄과 명성이 더욱더 떨쳐졌다. 太傅 慕容評이 그를 더욱더 시기하여 모용수가 奏請한 장병들의 공에 대한 賞을 모두 저지하여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太后 可足渾氏(합족혼씨)가 평소 모용수를 미워하였는데, 모용평과 함께 모용수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注+① 〈太后 可足渾氏가〉 慕容垂를 미워한 일은 晉 穆帝 升平 2년(358)에 보인다.
太宰 慕容恪의 아들 慕容楷와 모용수의 외숙인 蘭建이 이것을 알고 모용수에게 고하기를 “먼저 움직이면 남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모용평과 樂安王 慕容臧만 제거하면 다른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注+② 兵法에 말하기를 하였다.
【目】 慕容垂가 말하기를 “骨肉 간에 서로 殘殺하여 나라에서 먼저 난을 일으키는 것은 내 차마 할 수 없으니, 차라리 국외로 나가 그들을 피하겠다.” 하였다.
世子 慕容令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主上(慕容暐)이 어리석고 나약하여 太傅 慕容評에게 모든 정사를 위임하니, 하루아침에 禍가 일어나면 駭機보다 더 빠를 것입니다.注+① 機는 쇠뇌의 이다. 쇠뇌에 비유하면 적이 예측하지 못했을 때 기아를 먼저 발사하여 적으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駭機’라 한 것이다.
이제 집안을 보존하고 몸을 온전히 하면서 大義를 잃지 않고자 하신다면 龍城으로 도망하고 겸손한 말로 사죄하여 主上이 밝게 살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만약 주상이 감동하여 깨닫고 조정으로 돌아오게 한다면 큰 다행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안으로는 燕․代 지방을 어루만지고 밖으로는 여러 오랑캐들을 회유하여 險固한 肥如의 땅을 지켜 스스로 보호하는 것이 또한 그 다음으로 좋은 방법입니다.”注+② 燕․代는 두 郡의 이름이다. 肥如의 險固함은 바로 盧龍의 요새이다.
모용수는 “좋다.” 하고는 11월에 大陸에서 사냥할 것을 청하고서注+③ ≪史記正義≫에 “大陸澤은 邢州와 趙州의 경계에 있으니, 一名은 廣阿澤이고 一名은 鉅鹿澤이다.” 하였다. 이를 통해 微服 차림을 하고 〈鄴城을 빠져나와〉 龍城으로 가서 邯鄲에 가려고 하였는데,注+④ 邯鄲縣은 漢나라 때에는 趙國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廣平郡에 속하였다. 작은아들 慕容麟이 평소 모용수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도망하여 업성으로 돌아가 실상을 고발하였다.
燕主 모용위가 정예 기병을 보내어 추격하게 하였으나, 모용수가 기병을 분산시켜 일행의 흔적을 없애 잡히지 않았다.
세자 모용령이 몇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업성을 기습할 것을 청하였으나, 모용수는 “불가하다.” 하고 마침내 段夫人 및 모용령, 慕容寶, 慕容農, 慕容隆, 慕容楷, 慕容建과 郞中令 高弼과 함께 秦나라(前秦)로 달아났다.注+⑤ 段夫人은 慕容垂의 前妃의 여동생이다. 高弼은 모용수 封國의 卿이다.
【目】 처음에 秦王 符堅은 慕容恪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은근히 燕나라(前燕)를 도모할 마음을 품었으나, 慕容垂를 두려워하여 감히 군대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부견은 모용수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여 교외로 나가 맞이하고서 그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이 어진 이와 호걸을 낼 적에 반드시 함께 큰 공을 이루게 하는 것이 자연의 운수이니, 내 마땅히 卿과 함께 天下를 평정하여 泰山에 이르러 성공을 아뢸 것이다.
그런 뒤에 경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어 대대로 幽州 지방에 封하여 경으로 하여금 나라를 떠나서도 자식으로서 해야 할 孝를 잃지 않게 하고 朕에게 귀부해서도 군주를 섬기는 충성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부견은 또 慕容令과 慕容楷의 재주를 아껴 다 후하게 예우하였다.
慕容垂逃降符堅慕容垂逃降符堅
【目】 王猛이 말하기를 “慕容垂 父子는 비유하면 龍이나 범과 같아서 길들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만약 바람이나 구름을 빌려주면 장차 다시 제재하지 못할 것이니, 일찍 제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符堅이 말하기를 “내가 막 영웅을 거두어 四海를 깨끗이 소탕하려 하니, 어찌 그를 죽일 수 있겠는가. 또 그가 처음 왔을 때 내가 이미 정성을 다하여 받아주었으니, 匹夫도 오히려 食言하지 않는데 하물며 萬乘의 천자이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모용수를 冠軍將軍으로 삼았다.
【目】 梁琛이 돌아가서 慕容評에게 말하기를 “秦나라(前秦) 사람들이 매일 군대를 사열하고 陝城 동쪽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고 있으니, 진나라와의 우호가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吳王(慕容垂)이 또다시 진나라로 갔으니, 마땅히 대비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모용평이 말하기를 “진나라 군주는 어떠한 사람인가.” 하자, 양침이 말하기를 “현명하면서도 결단을 잘합니다.” 하였다.
王猛에 대해 묻자, 대답하기를 “그의 명성이 헛되이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양침은 이윽고 또다시 燕主 慕容暐에게 이것을 말하였는데, 모두들 그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았다.
오직 皇甫眞이 이것을 깊이 우려하여 글을 올려 장수를 선발하고 병력을 더해서 未然에 방비할 것을 청했으나, 모용위와 모용평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綱】 秦나라(前秦)가 使臣을 燕나라(前燕)에 보내었다.
【目】 秦나라 石越이 燕나라에 빙문을 갔는데, 연나라 太傅 慕容評이 자기의 사치스러움을 드러내 보였다.
尙書郞 高泰가 말하기를注+① 高泰는 高瞻의 從子이다. “석월이 큰소리를 치지만 보는 눈빛이 심원하니, 바로 우리의 틈을 엿보려는 것입니다.注+② 誕은 큰소리를 치는 것이다. 마땅히 군대의 위세를 드러내어 그의 계책을 꺾어야 하는데, 지금 도리어 사치함을 보여주시니, 더욱 저들에게 경시 받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모용평이 따르지 않으니, 고태는 마침내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연나라 太后 可足渾氏가 國政을 어지럽혔고, 모용평은 탐욕에 눈이 멀어 만족할 줄을 몰라 뇌물이 위로 집권자들에게 유입되고 관리가 재능에 따라 선발되지 않으니, 여러 아랫사람들이 원망하고 분노하였다.注+③ ‘貪昧’는 재물을 탐하고 이익에 눈이 멀어 그 해로움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流는 물이 흘러감이니, 물은 이치상 아래로 흘러가고 위로 거슬러 흐르지 않는다. 그런데 재물이 위로 가는 것을 ‘上流’라고 하였으니, 이는 떳떳한 이치를 거스름을 말한 것이다.
이에 尙書左丞 申紹가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④ 申紹는 申胤의 형이다. “마땅히 守令을 엄정하게 선발하고 관청을 합병하여 직책을 줄여서 군사들의 가족을 구휼하여 公私 간의 일들이 모두 의도한 대로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지출을 억제하고 국가의 경비를 아끼며, 賞을 반드시 功에 합당하게 내리고 형벌을 반드시 罪에 합당하게 내려야 합니다.注+⑤ 當(합당하다)은 丁浪의 切이다.
이와 같이 하면 桓溫과 王猛을 梟首할 수 있고, 秦나라와 晉나라를 취할 수 있으니,注+⑥ 溫․猛은 桓溫과 王猛을 이른다. 어찌 다만 국경을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데에 그치겠습니까.” 慕容暐는 상소문을 살펴보지 않았다.
【綱】 秦나라(前秦)에서 王猛 등을 보내어 燕나라(前燕)를 공격하여 12월에 洛陽을 점령하였다.
【目】 처음에 燕나라 사람이 虎牢關 서쪽의 땅을 떼어 秦나라에 주기로 하였는데, 晉나라(東晉) 군대가 물러간 뒤에 연나라 사람이 진나라에 이르기를 “行人이 말을 잘못하였다. 나라를 소유하고 집안을 소유한 자가 재앙을 분담하고 환란을 구제함은 떳떳한 도리이다.” 하였다.注+① ‘行人失辭’는 使者가 땅을 떼어주기로 허락한 것을 말을 잘못했다고 한 것이다.
秦王 符堅이 크게 怒하여 王猛 및 將軍 梁成, 鄧羌을 보내어 보병과 기병 3만을 거느리고 연나라를 정벌하게 해서 洛陽을 공격하니, 낙양이 항복하였다.
【綱】 〈晉나라(東晉)의〉 大司馬 桓溫이 진영을 廣陵으로 옮겼다.
【目】 桓溫이 徐州와 兗州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廣陵에 城을 쌓고서 진영을 옮기니, 이때에 부역이 잦은 데다가 전염병까지 발생하여 죽은 자가 10에 4, 5명이니, 백성들이 한탄하고 원망하였다.
秘書監 孫盛이 ≪晉春秋≫를 지을 적에 당시의 일을 사실대로 썼는데,注+① 漢나라 桓帝 때에 秘書監을 설치하였다. 晉나라 武帝 때에 비서감을 中書省에 합병하였는데, 惠帝 때에 다시 비서감을 설치하였다. 그의 관속에 丞과 郞이 있고, 아울러 著作省에 통솔되었다. 환온이 이것을 보고 怒하여 손성의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枋頭에서 진실로 승리하지 못했지만 어찌 尊君이 말씀한 바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겠는가.注+② 晉나라 사람은 남의 자식 앞에서 그의 아버지를 칭하기를 ‘尊君’, ‘尊公’이라 하였다. 만약 이 史書가 마침내 세상에 통행한다면 이는 그대 집안의 흥망에 관계될 것이다.注+③ 〈‘關君門戶事’는〉 그 가문을 멸망시키고자 함을 말한다.” 하였다.
손성의 아들이 급히 절하여 사죄하고 아버지에게 이것을 고칠 것을 청하였다.注+④ 遽는 급하고 빠름이요, 戰은 두려워함이다.
이때 손성이 연로하여 집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성품이 방정하고 엄숙하며 매사에 법도가 있으므로 자손들이 비록 半白의 나이였으나, 더욱 정중하게 모셨다.
이때 여러 아들이 울부짖고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려 온 집안 식구를 위한 계책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손성이 크게 노하고 허락하지 않으니, 여러 아들이 마침내 몰래 이것을 고쳤다.
손성은 이전에 이미 별도로 副本을 써서 외국에 전하였는데, 이후 晉나라 孝武帝가 진귀한 책을 현상금을 걸어 구할 적에 遼東 사람에게서 이 책을 얻으니, 현행본과 달랐다.
마침내 두 가지를 모두 보존하였다.注+⑤ 見(현재)은 賢遍의 切이다.


역주
역주1 秋九月……降于燕 : “枋頭에서 패한 것을 孫盛의 ≪春秋≫에서 일찍이 直筆로 썼는데, 여기서는 ‘不利’라고만 쓴 것은 어째서인가. 中國의 체통을 보존한 것이다. 중원을 수복하는 일은 ≪資治通鑑綱目≫에서 항상 허여하였으니, ‘不利’라고 쓴 것은 다시 밖(오랑캐)을 가지고 안(중국)을 침범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枋頭之敗 孫盛春秋嘗直筆書之矣 此其止書不利 何 存中國也 開復之擧 綱目常予之 書曰不利 而還不以外加内也]” ≪書法≫ 여기서의 ≪춘추≫는 晉나라 때 역사가 손성이 편찬한 ≪晉陽秋≫를 이르는데, 내용과 논리가 정당하여 良史로 일컬어졌다.(≪晉書≫ 권82 〈孫盛列傳〉)“桓溫이 이번 출병에 크게 패하고 달아나 돌아와 잃은 士卒이 매우 많아서 당초 灞上의 패전에 견줄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또한 ‘不利’라고만 쓴 것은 王師의 체통을 보인 것이니, 中國의 의리를 보존하여 마침내 이 일을 가지고 저 오랑캐에게 굴복하지 않은 것이다. 또 後人을 위하여 經略을 권면한 것이니, 그 뜻이 깊다.[溫之此擧 大敗奔還 所喪士卒甚多 初非灞上之比 而亦止書不利者 示王師之體 存中國之義 終不以此而屈於彼 且爲後人經略之勸也 其旨深矣]” ≪發明≫ ‘灞上의 패전’은 晉 穆帝 永和 10년(354)에 환온이 관중으로 쳐들어가 前秦의 군대를 격파하고 灞上에 주둔했다가 관중을 평정하지 못하고 후퇴한 일을 가리킨다.
역주2 濟水는……아니다 : 이 내용은 杜佑의 ≪通典≫ 권172 〈州郡2 序目 下〉의 “연주는 옛날에 濟水와 河水의 사이였다.[兗州舊爲濟河之間]”에 대한 주에 보인다.
역주3 (東) : 저본에는 ‘東’으로 되어 있으나, ≪水經註≫에 의거하여 衍字로 처리하였다.
역주4 攻譙梁……不克 : ≪資治通鑑≫에는 “攻譙梁 開石門以通水運 眞克譙梁而不能開石門 水運路塞(譙郡과 梁國을 공격하여 石門을 열어 水運을 통하게 하였는데, 袁眞이 초군과 양국을 함락시켰으나 석문을 열지 못하니, 수운의 길이 막혔다.)”라고 하였다.
역주5 騶衍이……하였으니 : 추연은 전국시대 齊나라 사람이고, 인용한 내용은 ≪史記≫ 권74 〈孟子荀卿列傳〉에 보인다. 추연은 陰陽의 消息을 통해 세상과 동떨어진 괴이한 일이 일어난다는 설을 10여만 글자로 지어 제후들의 존숭을 받았다.
역주6 諸葛瑾 : 174~241. 삼국시대 吳나라에서 벼슬한 사람인데, 친아우인 諸葛亮(181~234)은 蜀漢에서, 사촌 아우인 諸葛誕(?~258)은 魏나라에서 각각 벼슬하여 모두 훌륭한 명성이 있었다.(≪世說新語≫ 〈品藻〉)
역주7 먼저……제압당한다 : ≪漢書≫ 권31 〈項籍傳〉에 보인다.
역주8 因微服 : ≪資治通鑑≫에는 ‘因微服出鄴’으로 되어 있다.
역주9 機牙 : 쇠뇌의 시위를 당겨 살[矢]을 놓는 기관을 이른다.
역주10 秦遣使如燕 : “慕容垂가 燕나라에서 나가자, 나라를 엿보는 자가 이르렀으니, ≪資治通鑑綱目≫에 이것을 이어서 쓴 것은 경계함을 보인 것이다.[垂出而闚國者至矣 綱目聨書之 所以戒也]” ≪書法≫
역주11 秦遣王猛……取洛陽 : “막 慕容垂가 秦나라로 달아났다고 쓰고, 곧바로 진나라가 王猛 등을 보내어 燕나라를 공격했다고 썼다. 진나라가 오랫동안 연나라를 도모할 마음이 있었으나 도모하기를 꺼리던 것은 모용수 때문이었는데, 지금 이미 꺼리던 바가 없어졌으니, 무엇을 꺼려 발동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한 선비가 100만의 군대를 그치게 하고 한 현자가 천 리의 환란을 제재한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다. 연나라에 인재가 있었으나 제대로 등용하지 못하였고, 있던 인재도 버려 적국에 도움이 되게 하였으니, 비록 망하지 않고자 한들 가능하겠는가.[方書慕容垂奔秦 卽書秦遣王猛等伐燕 蓋秦久有謀燕之心 而所忌者垂爾 今旣去其所忌 則何憚而不發哉 然則一士止百萬之師 一賢制千里之難 非虛語也 燕有才 不能用 棄以資敵 雖欲不亡 得乎]” ≪發明≫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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