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를 근거해보면 公卿, 列侯의 婦人은 감색 비단의 幗을 사용하였으니, 이는 婦人의 머리 꾸밈의 칭호요 喪冠만을 칭하는 것이 아니다.
사마의가 노하여 表文을 올려서 출전할 것을 청하자, 魏主曹叡가 衛尉辛毗로 하여금 節을 가지고 軍師가 되어 제재하게 하였다.
姜維가 제갈량에게 이르기를 “賊이 다시는 출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제갈량이 말하기를 “저 사마의가 원래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도 굳이 싸움을 청한 이유는, 자기 武勇을 병사들에게 보여주고자 했을 뿐이다.
將帥가 군중에 있을 때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만일 능히 나를 제재할 수 있다면 어찌 천리 멀리 떨어져 있는 임금에게 출전할 것을 청하겠는가.” 하였다.
目
【目】 諸葛亮이 使者를 司馬懿의 軍中으로 보내니, 사마의는 제갈량의 자고 먹는 것과 일의 번거롭고 간략함을 묻고, 군대의 일에는 언급하지 않았다.注+司馬懿가 두려워한 것은 諸葛亮이니, 그는 제갈량의 자고 먹는 것과 일의 번거롭고 간략함을 물어서 수명의 오래고 짧음을 엿본 것이다.
使者가 말하기를 “諸葛公은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笞罰 20대 이상의 안건을 모두 직접 살펴보고, 먹는 음식은 하루에 몇 되에 이르지 못합니다.”注+噉(먹다)은 또한 啖으로도 되어 있다. 옛날 되가 작았기 때문에 하루에 몇 되라고 한 것이다. 하니, 사마의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孔明이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번거로우니, 어찌 능히 오래 살겠는가.” 하였다.
目
【目】 諸葛亮이 병이 위독하자, 황제가 僕射李福으로 하여금 병을 살펴보고 모시면서 인하여 큰 계책을 묻게 하였는데, 이복은 제갈량과 말을 마치자 작별하고 떠나갔다가注+已는 끝남이니, 〈“語已別去”는〉 말을 끝내고 작별한 것이다. 며칠 뒤에 다시 돌아왔다.
제갈량이 말하기를 “내 그대가 돌아온 뜻을 알겠다. 公이 묻고자 하는 것은 公琰(蔣琬)이 그 적임자이다.” 하였다. 이복이 사례하기를 “사실은 전에 公의 100년 뒤(死後)에 누가 큰일을 맡을 만한 자인가를 놓치고 자문하지 않았으므로 곧바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그 다음이 누구인지를 묻자, 제갈량이 말하기를 “文偉(費褘)가 可하다.”注+文偉는 費褘의 자이다. 하였다. 또다시 묻자, 제갈량이 대답하지 않았다.注+諸葛亮이 費褘를 이을 사람을 대답하지 않은 것은,
라는 뜻이 아니요, 또한 蜀漢의 人士 중에 비위를 이을 만한 자가 없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目
【目】 8월에 諸葛亮이 薨하자, 長史楊儀가 군대를 정돈하여 출발하였는데, 백성들이 달려가 司馬懿에게 고하니, 사마의가 추격하였다. 姜維가 양의로 하여금 깃발을 되돌리고 북을 울려서 장차 사마의에게 향할 것처럼 하게 하니,注+〈“懿不敢偪”은〉 司馬懿가 諸葛亮이 아직 죽지 않았나 하여 두려워한 것이다. 사마의가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五丈原에 부는 가을바람
이에 양의가 진영을 결집하여 떠나서 斜谷에 들어간 뒤에야 喪을 발표하였다.注+陳(진영)은 陣으로 읽는다. “入谷”은 斜谷으로 들어간 것이다.後主는 策書를 내려 제갈량에게 추증한 印綬를 내리고 諡號를 忠武라 하였다.
目
【目】 백성들이 속담을 만들어 司馬懿를 놀리기를 “죽은 諸葛亮이 산 仲達(사마의)을 달아나게 했다.”注+仲達은 司馬懿의 字이다 하니, 사마의는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그가 살아 있는 것만 헤아리고 죽은 것은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天地의 前衝은 虎翼風이 되고 蛇蟠이 되니, 兵家는 陰을 먼저하여 오른쪽을 앞으로 삼으며, 또 風은 虎를 따르니 虎와 蛇는 모두 陰의 종류여서 함께 서북쪽에 위치한다. 天地의 後衝은 飛龍雲이 되고 鳥翔이 되니, 兵家는 陽을 뒤로하여 왼쪽을 뒤로 삼으며 또 雲은 龍을 따르니 龍과 鳥는 모두 陽의 종류여서 함께 동남쪽에 위치한다. 天, 地, 風, 雲을 四正으로 삼고 龍, 虎, 鳥, 蛇를 四奇로 삼으니, 이것이 이른바 八陣이다. 매번 두 陣끼리 서로 따르게 하고, 한 陣 가운데 또 두 陣이 있어서 하나는 싸우고 하나는 수비함에 中外에는 輕重의 권세가 있고, 陰陽에는 剛柔의 節度가 있고, 彼此에는 虛實의 땅이 있고, 主客은 先後의 數가 있다. 이때에 사마의가 그 陣營과 堡壘를 순행하여 살펴보고 감탄하기를 “천하에 기이한 재주이다.” 하였다. 사마의는 추격하여 赤岸에 이르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갔다.注+≪水經注≫에 “褒水는 서북쪽으로 衙嶺山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大石門을 지나 옛 棧道 아래 골짝을 지나가니 世俗에서는 千梁無柱(棧道의 가로댄 나무가 천 개인데 밑을 받쳐주는 기둥이 없다.)라고 칭한다.” 하였다. 諸葛亮이 형 諸葛瑾에게 준 편지에 “예전에 趙子龍이 군대를 후퇴시킬 적에 赤崖의 골짝에 붙어 있는 1백여 리의 閣道를 불태워 파괴하였는바, 閣梁(잔도의 橫木)의 한쪽 끝은 산 중앙으로 들어가고 한쪽 끝은 물 가운데에 기둥을 세웠는데, 지금 강물이 크게 불어나고 급히 흘러서 기둥을 편안히 할 수 없다.” 하였다. 赤崖는 바로 赤岸이다.
八陣圖
目
【目】 처음에 前軍師魏延이 보통 사람보다 용맹이 뛰어나고 士卒들을 잘 길렀는데,注+蜀漢은 中軍師와 前軍師, 後軍師를 설치하였다. 매번 만 명의 병력을 청해서 諸葛亮과 길을 달리하여 潼關에서 만나기를 韓信이 군대를 청한 故事와 같이 하고자 하였으나,注+
제갈량이 허락하지 않으니, 위연은 항상 제갈량이 겁이 많아서 자신의 재주를 다 쓰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楊儀는 사람됨이 일을 잘 처리하고 민첩하였다. 그리하여 제갈량이 출정할 때마다 양의가 부서를 나누는 일을 계획하고 군량의 조달을 헤아려서, 모두 그에게서 결정을 취하였다.注+分(나누다)은 扶問의 切이다. 度(헤아리다)은 徒洛의 切이다.
魏延은 성품이 교만하고 높은 체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몸을 낮추었으나 양의가 홀로 굽히지 않으니, 위연은 몹시 분하게 여겼다.注+“不假借”는 따뜻한 말과 기뻐하는 얼굴빛으로 상대방을 예우하고 자신을 낮추지 않음을 이른다. 제갈량은 두 사람의 재주를 매우 아까워하여 차마 한 사람도 버리지 못하였다.
目
【目】 費褘가 吳나라에 사신으로 가자, 吳主孫權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楊儀와 魏延은 목동과 같은 小人이다. 비록 일찍이
처럼 제압하기 어려운 마음은 없습니다.注+“黥, 韓”은 黥布와 韓信이다. 지금 막강한 賊(魏나라)을 깨끗이 청소하여 華夏(중화)를 통일해야 하니,
功은 재주로 이루어지고 業은 재주로 말미암아 넓혀지는 것입니다.注+“混一函夏”는 混一中原이란 말과 같다. 函은 函谷關을 이르니, 函谷關 동쪽은 中夏가 되므로 函夏라 한 것이다. 일설에 “函은 용납함이요 夏는 큼이니, 中原의 지역은 포용하는 것이 큼을 말한다.” 하였다. 만약 그 후환을 방비하기 위하여 이들을 버리고 쓰지 않는다면, 이는 풍파를 대비하여 배와 노를 미리 버리는 것과 같으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注+檝(노)은 楫과 같다.
目
【目】 諸葛亮은 병이 위독해지자, 군대를 후퇴할 節度를 만들어서 魏延으로 하여금 뒤를 차단하게 하고 姜維가 그 다음이 되게 하되, 위연이 혹 따르지 않으면 군대가 즉시 따로 출발하게 하였다.注+〈“延或不從軍卽自發”은〉 諸葛亮이 魏延은 楊儀가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잘 안 것이다.
제갈량이 薨하자 楊儀가 費褘로 하여금 위연에게 가서 그의 뜻을 헤아리게 하였는데, 위연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丞相이 비록 별세하였으나 나는 현재 살아 있으니,注+〈“丞相雖亡吾自見在”는〉 이는 魏延이 자랑하고 높은 체한 말이다. 見(현재)은 賢遍의 切이다.丞相府의 직속 관리들은 곧 喪(시신)을 모시고 돌아가서 장례해야 할 것이요,注+“府親官屬”은 〈丞相府의〉 長史 이하를 이른다. 나는 마땅히 諸軍들을 인솔하여 賊을 공격할 것이다.
어찌 한 사람이 죽었다 하여 天下의 일을 폐기하겠는가. 또 이 위연이 어떤 사람이기에 양의를 위해 뒤를 차단하는 장수가 되겠는가.”
目
【目】 楊儀 등이 마침내 諸葛亮이 정해놓은 규정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니, 魏延이 과연 크게 노하여 양의가 출발하기에 앞서서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 棧道를 불태워 끊었다.注+攙은 初銜의 切이니, 뒤에서 앞을 다투는 것을 攙이라 한다.
양의와 위연이 서로 表文을 올려 상대방이 반역을 한다고 아뢰니, 하루 안에 두 檄文이 도착하였다. 황제가 이 일을 董允과 蔣琬에게 물으니, 모두 양의를 보증하고 위연을 의심하였다.
目
【目】 楊儀 등이 산에 나무를 베어 길을 통하여 밤낮으로 행군해서 속도를 倍加하여 魏延의 뒤를 바짝 뒤따르니,注+槎는 仕下의 切이니, 나무를 비스듬하게 베는 것이다. 위연이 南谷의 어귀를 점거하고서 양의 등을 맞아 공격하였다.注+南谷은 바로 褒谷이다. 남쪽 골짝을 褒라 하고 북쪽 골짝을 斜라 하니, 길이가 470리인데 함께 한 골짝이 되었다.
將軍何平이 먼저 南谷의 어귀로 올라간 병사들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諸葛公이 별세하시어 몸이 아직도 식지 않았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행동하는가.”注+何平은 바로 王平인데, 본래 외갓집인 何氏에게서 길러져 〈何氏라고 하다가〉 뒤에 王氏姓을 회복하였는바, 여기서는 처음 姓을 따른 것이다. 하니, 士卒들은 잘못이 위연에게 있음을 알고는 모두 흩어졌다.
위연이 도망하여 漢中으로 달아나자, 양의가 장수를 보내어 참수하고 위연의 三族을 멸하였다. 처음 魏延이 楊儀 등을 죽이고자 하였지만, 時論이 자기를 諸葛亮을 대신하여 정사를 보좌할 사람으로 여겨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북쪽으로 魏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남쪽으로 양의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실로 배반할 뜻은 없었다.
目
【目】 처음에 諸葛亮이 황제에게 表文을 올리기를 “臣은 成都에 뽕나무 800株와 척박한 토지 15頃이 있으니, 자제들의 衣食이 자연 여유가 있습니다.
〈녹봉 이외에〉 별도로 생업을 다스려서 한 자와 한 치의 재산을 불리지 않았으니,注+長(키우다)은 知兩의 切이다.臣이 죽는 날에 안에는 남은 비단이 있고 밖에는 남은 재물이 있어서 폐하를 저버리는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注+贏은 남음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끝내 그의 말과 같았다.
目
【目】 長史張裔가 항상 諸葛亮을 칭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公은 賞을 줄 때에는 소원한 사람을 버리지 않고 벌을 내릴 때에는 가까운 사람을 두둔하지 않았으며, 官爵은 功이 없이 취할 수 없고 형벌은 귀하고 세력이 있다 하여 면할 수 없었으니, 이 때문에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가 모두 분발하여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고 報國할 수 있었던 것이다.”注+〈“賢愚所以僉忘其身”은〉 사람들이 모두 분발하여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음을 이른다.
目
【目】 陳壽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諸葛亮이 相國으로 있을 적에 백성을 어루만지고 儀軌(법도)를 보였으며, 관직을 축소시키고 權道의 제도를 따랐으며, 誠心을 열어 보이고 공정한 道를 펼쳤다.注+儀는 法度이고, 軌는 法이다.
그리하여 충성을 다하고 세상에 유익한 자는 비록 원수라 해도 반드시 상을 내리고, 법을 범하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으며, 죄를 자백하여 실정을 바치는 자는 비록 죄가 무겁더라도 반드시 풀어주었고, 말을 이리저리 돌려 공교하게 꾸미는 자는 죄가 비록 가볍더라도 반드시 죽였다.
善은 아무리 작아도 상을 주지 않음이 없고 惡은 아무리 작아도 폄하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여러 일을 정밀하게 익혀서 사물마다 그 근본을 다스렸고,注+〈“物理其本”은〉 모든 事物이 반드시 그 根本을 따라 다스려짐을 말한 것이다. 명칭을 따라 실제를 책망하여 허위가 끼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끝내는 나라 안에서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刑政이 비록 준엄하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그의 마음 씀이 공평하고 권면과 경계가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참으로 정치하는 방도를 아는 훌륭한 재주요,
【目】 처음에 長水校尉廖立이 자신의 재주와 명성이 마땅히 諸葛亮의 副(다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怏怏하여 제갈량을 원망하고 비방하자,注+廖는 力弔의 切이니, 姓이다. 제갈량이 요립을 폐출시켜 평민으로 삼아서 汶山(민산)으로 귀양 보냈다.注+汶은 음이 岷이니, 汶山은 본래 冉駹國(염방국)이었는데 漢나라 武帝가 개척하여 汶山郡을 설치하였는바, 三國時代蜀漢에 속하였다.
제갈량이 薨하자, 요립은 눈물을 떨구며 말하기를 “나는 끝내 옷깃을 왼쪽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겠구나.” 하였다. 李平 또한 제갈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병이 나서 죽으니, 이평은 항상 제갈량이 다시 자기를 등용하여 자신의 잘못을 補塡(보전)하여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後人들은 이렇게 하지 못할 줄을 헤아렸기 때문이었다.注+策은 헤아림과 같다.
諸葛亮이 廖立으로 하여금 눈물을 떨구게 하고 李嚴으로 하여금 실망하여 죽게 하였으니, 어찌 다만 원망하는 말이 없었을 뿐이겠는가. 물이 지극히 평평한데 기울어진 자가 법을 취하고, 거울이 지극히 밝은데 추한 자가 노여워하지 않는 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大人君子가 남을 살려주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남을 가엾게 여기고 용서하는 德을 펴서, 法은 시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행하고 형벌은 스스로 범한 죄에만 加하며, 官爵을 내리되 사사로이 한 것이 아니고 誅罰을 가하되 노여워하는 감정으로 하지 않았으니, 천하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綱
【綱】 吳懿를 車騎將軍으로 삼아 漢中을 감독하게 하고 蔣琬을 尙書令으로 삼아 國事를 總統하게 하였다.
目
【目】 이때에 蜀漢은 막 元帥를 잃어서 遠近이 위태롭고 두려워하였으나注+喪(잃다)은 息浪의 切이다.蔣琬이 여러 관료의 위로 발탁되어서 슬퍼하는 모습도 없고 또 기뻐하는 기색도 없어서 정신과 행동거지가 평소와 같으니, 이 때문에 衆望이 점점 복종하였다.
綱
【綱】 中郞將宗預를 吳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目
【目】 吳나라 사람들은 諸葛亮이 卒하였다는 말을 듣고 魏나라가 蜀漢의 허약한 틈을 타고 蜀漢을 점령할까 염려해서 巴丘에 수비병 만 명을 증가하여注+여기의 巴丘는 바로 巴陵이다. 첫 번째로는 蜀漢을 구원하고자 하고 두 번째로는 蜀漢 지역을 分割 점거하려고 하였다.注+〈“欲以事分割”은〉 魏나라와 함께 蜀漢을 분할 점령하고자 함을 이른다.
蜀漢 사람들도 이 소식을 듣고 永安에 병력을 증가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하였다. 宗預가 吳나라에 이르자, 이에 대해 吳主孫權이 물으니,
대답하기를 “동쪽 吳나라가 파구의 수비병을 증가하고, 서쪽 蜀漢이 白帝城(영안)의 수비를 강화하는 것은 事勢에 당연한 것이니, 모두 따질 것이 못 됩니다.” 하였다. 손권은 그의 말이 강직함을 가상히 여겨 그에 대한 예우를 鄧芝 다음으로 하였다.
綱
【綱】 吳나라가 諸葛恪을 丹陽太守로 삼았다.
目
【目】 諸葛恪은 丹陽의 山이 험하고 백성들이 용감하고 강한 자가 많다 하여 스스로 官(국가)을 위해 이곳의 外職으로 나갈 것을 청하고는 “3년이면 甲士 4만 명을 얻을 수 있다.”注+爲(위하다)는 去聲이다. 官은 國家를 이른다. 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의논하기를 “단양은 지세가 험하고 吳郡, 會稽, 新都, 番陽(파양) 네 郡과 인접하여 둘레가 수천 리이고, 산에서는 銅과 鐵이 생산되어 스스로 갑옷과 병기를 주조하며,
풍속이 무용을 좋아하고 힘을 숭상하여 병기를 가지고 들에서 놀며, 수시로 틈을 보고 나와서 도적질을 한다. 그리하여 싸우게 되면 벌 떼처럼 몰려오고 敗하면 새처럼 숨으니, 前代로부터 단속하지 못한 바이다.”注+蠭(벌)은 사람을 쏘는 나는 벌레이다. 羈는 管束하는 뜻이다. 하여 모두 제갈각의 계책을 어렵게 여겼다.
제갈각의 아버지 諸葛瑾도 이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제갈각이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키지 못하고, 장차 우리 집안을 붉은 피로 물들이겠구나.”注+誅殺를 당한 者는 반드시 피를 흘리므로 “赤族”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
제갈각이 자신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음을 강력히 아뢰자, 吳主孫權은 마침내 그를 丹陽太守로 임명하여 그 계책을 시행하게 하였다.
綱
【綱】 겨울 11월에 魏나라 洛陽에 地震이 있었다.
綱
【綱】 吳나라 潘濬이 武陵蠻을 평정하였다.
역주
역주1魏葬漢孝獻皇帝于禪陵 :
“魏나라가 장례했다고 쓴 것은 厚德함을 보존함을 인정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멸망한 나라의 군주를 장례했다고 쓴 것이 5번인데(山陽公과 晉나라의 陳留王, 宋나라의 晉 恭帝, 陳나라의 梁 孝元帝, 石晉(後晉)의 故唐主), 오직 晉 恭帝는 弑害를 당했는데 장례했다고 썼으므로 비난한 것이다.[書魏葬 予存厚也 終綱目 滅國之君書葬五(山陽公 晉陳留王 宋晉恭帝 陳梁孝元帝 石晉故唐主) 惟晉恭帝弑書葬 故譏之]” ≪書法≫
역주2丞相武鄕侯諸葛亮……引軍還 :
“무릇 ‘軍中에서 卒했다.’라고 쓴 것은 國事를 위해 죽은 것을 가상히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官職과 爵位와 姓을 갖춰 쓴 것이다. ‘諸葛亮이 나가 漢中에 주둔하여 中原을 도모하였다.’라고 쓴 뒤로부터 이때까지 모두 5번 ‘魏나라를 정벌했다.’라고 썼는데, 첫 번째는 ‘街亭에서 싸워 敗績했다.’라고 썼고, 두 번째는 ‘陳倉을 포위하여 그 장수를 참수했다.’라고 썼고, 세 번째는 ‘武都와 陰平을 함락했다.’라고 썼고, 네 번째는 ‘司馬懿를 패퇴시키고 張郃을 죽였다.’라고 썼고, 여기에서는(이해 4월) ‘進軍했다’라고 쓰고 ‘屯田했다’라고 썼으니, 모두 기록할 만한 것인데, 오직 가정에서 1번 패한 것은 馬謖의 죄이다. 제갈량은 막 양식을 풍족히 할 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군중에서 卒했다.’라고 썼다. ≪資治通鑑綱目≫에서 ‘군중에서 卒했다.’고 쓴 것이 8번인데, 丞相이라고 쓴 경우는 일찍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丞相 武鄕侯 諸葛亮이 군중에서 卒했다.’라고 썼으니, 軍國의 애통함이 깊은바, 이는 ≪자치통감강목≫에서 매우 애석히 여긴 것이다. 이로부터 晉나라에 이르기까지 諸臣이 卒했을 때에 관직과 작위를 갖춰 쓴 사람이 12명이다.(諸葛亮, 司馬孚, 司馬攸, 張軌, 溫嶠, 陶侃, 王導, 郗鑑, 何充, 謝安, 袁宏, 桓冲)[凡書卒于軍 嘉死事也 故具官爵姓 亮自書出屯漢中以圖中原 至是凡五書伐魏 一書戰街亭敗績 二書圍陳倉 斬其將 三書拔武都陰平 四書敗司馬懿 殺張郃 於是書進軍 書屯田 皆可紀也 唯街亭一敗 馬謖之罪耳 亮方爲足食計 而以卒于軍書矣 綱目書卒于軍八 未有以丞相書者 書丞相武鄕侯諸葛亮卒于軍 軍國之可痛深矣 此綱目所甚惜也 自是至晉諸臣卒 具官爵者十二人(諸葛亮 司馬孚 司馬攸 張軌 溫嶠 陶侃 王導 郗鑑 何充 謝安 袁宏 桓冲)]” ≪書法≫ “군대가 돌아왔다고 써도 되는데 楊儀를 쓴 것은 어째서인가. 양의를 가상히 여긴 것이다. 이때에 막 元帥를 잃었는데 군대를 온전히 하여 돌아왔으니, 양의는 時宜에 맞게 대처했다고 이를 만하다.[書軍還 可矣 書楊儀 何 嘉儀也 於是新喪元帥 全軍而歸 儀可謂能權矣]” ≪書法≫ “아, 諸葛亮이 中原을 經略한 뒤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겨우 8년인데, ≪資治通鑑綱目≫에서 5번 魏나라를 정벌했다고 썼으니, 한 번은 街亭에서 싸웠고, 한 번은 成固에 주둔하였고, 한 번은 陳倉과 祁山을 포위하였고, 한 번은 武都와 陰平을 함락하였고, 한 번은 王雙을 참수하고 司馬懿을 패퇴시키고 張郃을 죽였으며, 이때에 군대를 동원함에 이르러는 渭水의 남쪽으로 進軍하고 군대를 나누어 屯田했다고 썼으니, 사마의가 비록 군대를 이끌고 와서 항거하여 지켰으나, 머리 수건과 머리쓰개 등 부인의 복식을 달게 받아서 형세가 이미 곤궁하고 위축되었다. 그런데 제갈량이 마침내 죽음을 告하였으니, 하늘이 漢나라를 돕지 아니하여 功業이 성취되지 못한 것을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제갈량은 先主(劉備)로부터 孤(아들 劉禪)를 부탁하는 遺詔를 받을 때에 일찍이 股肱의 힘을 다하여 忠貞의 절개를 바치고 죽음으로써 잇겠다고 告하였고, 출병하면서 유선에게 表文(〈出師表〉)을 올림에 이르러는 또 몸을 굽히고 힘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겠다고 말하였으니, 지금 글을 살펴보면 그 말을 食言하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군중에서 卒하였다.’라고 써서 王事를 위해 죽은 실제를 나타냈으니, 그가 역적을 토벌한 의리가 죽어도 꺾이지 않아서 지금까지도 凜凜하여 여전히 生氣가 있다. 저 曹氏와 司馬氏 등이 고아를 속이고 과부를 무시하여 여우처럼 술수를 써서 남의 집안과 나라를 취한 것을 보면, 저들은 전혀 개돼지만도 못하니, 세상에 어찌 성패를 가지고 인물을 논하겠는가. ≪자치통감강목≫에서 특별히 쓰고 여러 번 써서 표출하지 않았으면 孔明 또한 보통 사람과 같았을 것이니, 아! 슬프다.[嗚呼 亮自經略中原 至是首尾僅八載 綱目五書伐魏 一戰街亭 一次成固 一圍陳倉祁山 一拔武都陰平 一斬王雙 敗司馬懿 殺張郃 至於是擧 書進軍渭南 分兵屯田 懿雖引兵拒守 甘受巾幗婦人之服 勢已窮蹙 而亮乃告終 天不祚漢 使之功業不就 謂之何哉 然亮受遺託孤之際 蓋嘗以竭股肱之力 效忠貞之節 繼之以死爲告 至其出軍上表 又以鞠躬盡力死而後已爲言 由今觀之 可謂不食其言矣 書卒于軍 以見歿於王事之實 其討賊之義 死而不屈 至今凜凜 猶有生氣 其視曹馬輩欺孤弱寡 狐媚以取人家國者 曾犬彘之不若 世豈可以成敗論人物哉 不有綱目特書屢書 表而出之 則孔明亦若而人耳 噫]” ≪發明≫
역주3補輿服志 :
≪輿服志≫는 ≪後漢書≫ 志의 하나로, 范曄이 ≪후한서≫를 저술할 적에 志 부분을 끝마치지 못하고 죽었는데, 뒤에 梁나라의 劉昭가 이것을 보충하였으므로 ≪補輿服志≫라 하며 유소는 또 여기에 註를 달았다. 유소는 高唐 사람으로 字가 宣卿이며 ≪후한서≫의 志에 註를 달았다.
역주4高帝가……아니다 :
高帝는 劉邦으로 黥布를 토벌하러 갔다가 流矢를 맞고 병이 위독하였다. 呂后가 “陛下께서 돌아가신 뒤에 蕭相國(蕭何)이 죽으면 누구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여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고제는 “曹參이다.” 하였다. 그 다음을 묻자, 대답하기를 “王陵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 우직하니, 陳平이 보좌할 수 있으며, 진평은 지혜는 충분하나 홀로 맡기기는 어렵다. 周勃이 중후하고 文雅가 적으나 우리 劉氏를 편안히 할 자는 필시 주발일 것이다.” 하였다. 여후가 또다시 그 다음을 묻자, 고제는 “이 뒤는 또한 그대가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이 내용은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3권 중 漢 高祖 12년(B.C.195)에 보이는바, 고제가 “이 뒤는 또한 네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그때가 되면 呂后 또한 죽어서 더 이상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때 제갈량이 대답하지 않은 것은 더 이상 천거할 만한 인물이 없어서였던 것이다.
역주6韓信이……보인다 :
漢 高祖 2년(B.C.205)에 “韓信은 魏나라를 평정한 다음 사람을 漢王(高祖)에게 보내어 3만 명의 병력을 얻어 북쪽의 燕과 趙를 점령하고 동쪽으로 齊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楚(項羽)의 군량수송을 차단하고서, 서쪽으로 漢王과 滎陽에서 만날 것을 청하니, 한왕이 이를 허락하였다.”라고 보이는데, 한신은 이 계획대로 하여 천하를 평정하였다.
역주7닭……유익함 :
하찮은 재주로 국가를 유익하게 함을 이른다. 戰國時代 齊나라 孟嘗君(田文)의 食客 중에 닭 울음소리를 잘 흉내 내고 개처럼 도둑질을 잘하는 자가 있었는데, 뒤에 맹상군이 秦나라에 들어가 곤궁했을 때에 이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여기서는 개처럼 도둑질[狗盜]을 잘하는 것을 ‘개가 주인을 위해 짖는 것’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역주9管仲과 蕭何 :
管仲은 춘추시대 齊나라 桓公을 보좌하여 霸者가 되게 한 名相이고, 蕭何는 漢나라 高祖를 보좌하여 開國한 名相이다.
역주10옛날……하셨다 :
管仲은 춘추시대 齊나라의 명재상인바, 이름이 夷吾인데 字인 仲으로 행세하였다. 伯氏는 齊나라의 大夫이고 騈邑은 地名이며, 聖人은 孔子를 가리킨다. ≪論語≫ 〈憲問〉에 “어떤 사람이 孔子에게 관중을 묻자,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이 伯氏의 騈邑 300戶를 빼앗았는데, 伯氏는 (食邑을 빼앗기고) 거친 밥을 먹었으나 죽을 때까지 관중을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人也奪伯氏騈邑三百 飯疏食 沒齒無怨言]’라고 하셨다.”라고 보인다. 이에 대해 朱子의 ≪集註≫에 “齊나라 桓公이 백씨의 식읍을 빼앗아 관중에게 주니, 백씨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알았고 진심으로 관중의 功에 복종하였으므로 곤궁하게 몸을 마치면서도 원망하는 말이 없었던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