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정월에 흉노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조회하러 왔다가 돌아가 사막의 남쪽 변방 아래에 거주하였다.
目
[目] 상上이 감천甘泉에 행차하여 태치泰畤에 교제郊祭를 지낼 적에 흉노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조회하러 오자, 관대冠帶와 의상衣裳(예복), 금새金璽(황금 인장)와 여수盭綬(초록빛 인끈), 옥구검패玉具劍佩(옥으로 장식한 패도佩刀)와 궁시弓矢, 계극棨戟(의장용 창), 안거安車와 안마鞍馬, 금전金錢과 의피衣被(의복과 이불, 요), 금수錦繡(꽃무늬가 있는 고급 비단)와 곡백縠帛(일반 비단), 옷에 두는 솜을 하사하였다.注+여盭는 여戾의 고자古字로 여綟와 통하니, 풀이름이다. 여戾라는 풀을 가지고 인끈을 물들이니, 또한 제후왕諸侯王의 제도이다. “옥구검패玉具劍佩”는 《칠제七制》에 “옥구심위패도玉具鐔衛佩刀”로 되어 있으니, 해설에 “검劍의 끝과 자루, 날밑[심鐔]과 코를 모두 옥玉을 사용하여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심鐔(칼코등이)은 음이 음淫이니, 검의 입 옆에 가로로 튀어나온 것이요, 위衛는 검의 코이다. 패도佩刀는 차는 칼이다. 계棨는 음이 계啓이니, 계극棨戟은 앞에서 선도하는 기물(창)인데, 나무로 만들고 검붉은 비단으로 집을 만들었다.
예禮가 끝나자 사자使者에게 선우單于를 인도하여 먼저 길을 떠나서 장평판長平阪에 가서 유숙하게 하였다.注+도道(인도하다)는 도導로 읽는다. 장평長平은 판阪(산비탈)의 이름이니, 지양池陽 남쪽 상원上原의 산비탈에 있다. 여기에 장평관長平觀이 있으니, 장안長安과의 거리가 50리里이다.
상上은 돌아와 장평판에 올라가 선우에게 배알拜謁하지 말도록 명하고,注+〈“조선우무알詔單于毋謁”는〉 선우單于로 하여금 절하지 않게 한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나열하여 구경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만이蠻夷의 군장君長 수만 명이 모두 마중 나와 위교渭橋 아래 양쪽 길가에 진열하여 있다가,注+진陳(진열하다)은 본음本音대로 읽으니, “협도진夾道陳”은 길을 끼고 있는 양 곁에 진열陳列하는 것을 말한다. 일설에 “진陳은 길이다.” 하였다. 상上이 위교에 오르면 모두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선우가 장안長安의 저택으로 가 있었는데 건장궁建章宮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연향을 베풀어주고 물건을 하사하였다.
目
[目] 2월에 선우單于를 본국으로 돌려보낼 적에 변방 고을의 병사와 말을 징발해서 전송하여 변경을 나가게 하였고, 또 변방의 곡식과 쌀과 마른 양식 등을 수송하여 전후 34,000곡斛을 주었다.
선우가 광록새光祿塞 아래에 거주하여 위급한 일이 있으면 수항성受降城에서 스스로 지킬 것을 청하니,注+무제武帝가 광록훈光祿勳서자위徐自爲를 보내어 오원새五原塞로 나가 정장亭障(보루)과 여러 성城을 축조하게 하였는데, 후대의 사람들이 인하여 이곳을 광록새光祿塞라 칭하였다. 보保는 지킨다는 뜻이니, 질지선우郅支單于가 공격해올까 염려되었으므로 위급한 일이 있으면 이 성城에 들어가 스스로 지킬 것을 청함을 이른다. 이로부터 오손烏孫 서쪽에서 안식安息까지 흉노에 가까운 여러 나라들이 모두 한漢나라를 높였다.
綱
[綱] 공신功臣들의 화상畫像을 기린각麒麟閣에 그렸다.
目
[目] 상上은 융적戎狄이 와서 복종한다 하여, 고굉股肱(대신大臣)의 아름다움을 생각해서 마침내 이들의 화상畫像을 기린각麒麟閣에 그리고 그 관작과 성명을 열거하였다.注+기린각麒麟閣은 미앙궁未央宮 가운데 있으니, 무제武帝가 기린을 잡았을 적에 이 각閣을 지었는데, 기린의 모습을 각閣에 그리고 마침내 기린각으로 이름하였다. 일설에 “소하蕭何가 만든 것이다.” 하였다. 서署는 표출하고 쓰는 것이다. 공신功臣의 화상畫像을 그린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오직 곽광霍光은 이름을 쓰지 않고 ‘대사마大司馬대장군大將軍박륙후博陸侯성姓곽씨霍氏’라 하였고, 차례로 장안세張安世, 한증韓增, 조충국趙充國, 위상魏相, 병길丙吉, 두연년杜延年, 유덕劉德, 양구하梁丘賀, 소망지蕭望之, 소무蘇武 등 모두 열 한 사람이었으니, 이들은 모두 공덕功德이 있어서 당세에 이름이 알려진 자들이었다.注+양구梁丘는 복성複姓이고, 하賀는 이름이다.
[綱] 여러 유자儒者들에게 명하여 오경五經의 이동異同을 석거각石渠閣에서 강講하게 하였다.注+석거각石渠閣은 소하蕭何가 만든 것으로 미앙전未央殿 북쪽에 있는데, 이곳에 비서秘書(궁중의 도서)를 보관하였다. 그 아래에 돌을 곱게 다듬고 개천을 만들어서 물을 끌어들이고는 석거각石渠閣이라고 이름하였다.
目
[目] 여러 유자儒者들에게 명하여 오경五經의 이동異同을 논하게 하였다.注+시수施讐는 《주역周易》을 논하고, 주감周堪과 공패孔霸는 《상서尙書》를 논하고, 설광덕薛廣德은 《시경詩經》을 논하고, 대성戴聖은 《예경禮經》을 논하였으며, 《공양전公羊傳》은 엄팽조嚴彭祖이고, 《곡량전穀梁傳》은 윤경시尹更始였다. 이동異同이란 경經의 뜻과 부합하는가의 여부를 이른다.
그리하여 소망지蕭望之 등이 논평해서 아뢰면 상上이 직접 제왈制曰을 칭하고 임석臨席하여 결정하였으며,注+평平(논평)은 평評과 같다.
이해에 그녀가 성제成帝(유오劉驁)를 갑관甲館의 화당畫堂에서 낳으니, 세적황손世適皇孫이라 칭하였다.
황제가 그를 매우 사랑하여 직접 이름을 오驁라 하고 자字를 태손太孫이라 하여, 항상 곁에 두었다.注+갑관甲館은 관館의 이름이니, 관館은 대개 갑甲ㆍ을乙ㆍ병丙ㆍ정丁으로 차례를 정하고 인하여 이름하였다. 화당畫堂은 채색彩色으로 장식한 당堂이다. 적適은 적嫡으로 읽으니, “세적世適”이라고 한 것은 정통正統으로 대를 잇는 것의 중함을 말한 것이다. 오驁는 오도五到의 절切이다.
綱
[綱] 오손공주烏孫公主(초주楚主)가 돌아왔다.
目
[目] 공주公主가 글을 올려 “나이가 늙어 고향이 그리우니, 한漢나라 땅으로 돌아가 죽기를 원한다.”注+“토사土思”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다.고 말하므로, 천자天子가 가엾이 여기고 그를 맞이하여 공주의 제도와 똑같이 대우하였는데, 2년 뒤에 죽었다.注+초주楚主는 본래 종실宗室의 딸로 오손烏孫에게 시집갔었는데, 지금 그를 공주公主의 제도와 똑같이 대우하여 의식을 황녀皇女에 견준 것이다.
역주
역주1匈奴……南塞下 :
“匈奴는 秦 始皇 32년(B.C. 215)부터 처음 《資治通鑑綱目》에 보이기 시작하여 漢 文帝 3년(B.C. 177)에 처음으로 ‘單于’를 썼고, 宣帝 五鳳 4년(B.C. 54)에 이르러 처음으로 ‘臣이라고 칭했다.’라고 썼고, 금년에 처음 ‘와서 조회했다.’고 썼으니, 이때 165년이 되었다. 오랑캐는 백 년의 운이 없다는 말이 참으로 맞는다. 이로부터 西漢의 세대가 끝날 때까지 선우가 와서 조회한 것을 쓴 것이 4번이다.[匈奴自秦始皇三十二年 始見於綱目 漢文帝三年 始書單于 至宣帝五鳳四年 始書稱臣 今年始書來朝 於是百六十五年矣 信哉 無百年之運也 自是終西漢之世 書單于來朝四]” 《書法》
역주2鳳凰 集新蔡 :
“宣帝의 세대에 ‘鳳皇이 와서 내려앉았다.[鳳皇來集]’고 쓴 것이 모두 6번이다. 漢나라 史書를 살펴보면 이에 그치지 않고 또 이것을 詔令으로 전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資治通鑑綱目》에서는 모두 삭제하여 기록하지 않고, ‘지진이 나서 산이 무너진 것’과 ‘선조의 사당이 파괴된 것’과 ‘宗廟의 화재’와 ‘일식’과 ‘孛星이 나타난 것’과 ‘우박이 내려 사람이 죽은 것’ 등의 이변에 이르러서는 책에 골고루 썼으니, 이는 祥瑞를 억제하고 두려워하라고 경계한 뜻이 엄하다. 군주의 지위에 있는 자가 알지 않으면 안 된다.[宣帝世鳳皇來集 至是凡六書矣 考之漢史 則不止是 而又播之詔令 不一而足 然綱目皆削而不錄 至於地震山崩祖廟壞 宗廟火 日食星孛雨雹殺人之異 則備書於冊 所以抑祥瑞戒恐懼之意嚴矣 居人上者 不可不知]” 《發明》
역주3張敞이……있다 :
鶡雀은 파랑새로, 위 宣帝 五鳳 3년(B.C. 55)에 黃霸가 丞相으로 있었는데, 京兆尹 張敞의 집에 있던 분작이 날아가 丞相府의 관사에 내려앉자, 황패는 이것이 봉황의 일종인 神雀이라 생각하여 황제에게 아뢰고자 하였다. 이에 장창이 황패를 논박하여 아뢴 일이 있었다.
역주4詔諸儒……於石渠閣 :
“이것을 쓴 것은 학문이 하나로 통일됨을 가상히 여긴 것이니, ‘五經을 講했다.’고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書嘉統一也 書講五經始此]” 《書法》
역주6夏侯는……建(夏侯建)이다 :
夏侯勝은 字가 長公으로 어려서 宗族父인 夏侯始昌에게 《尙書》와 《洪範五行傳》을 전수받았는데, 앞의 5권 元平 원년(B.C. 74)조에 昭帝가 崩하고 昌邑王 劉賀가 大統을 이었으나, 방종하여 예법이 없고 자주 놀러 나가자, 하후승이 乘輿 앞을 가로막고 諫한 일이 보인다. 夏侯建은 字가 長卿으로 하후승의 從兄의 아들인데, 역시 《尙書》를 전공하여 博士가 되었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는 하후승을 ‘大夏侯’, 하후건을 ‘小夏侯’라 칭하였다. 이는 동시대에 戴聖이 從子인 戴德과 함께 《禮經》에 밝아 대성을 ‘大戴’, 대덕을 ‘小戴’라 하여 대성이 지은 禮書를 《大戴禮》, 대덕이 지은 禮書를 《小戴禮》 또는 《小戴禮記》라 칭한 것과 같다. 《소대례》는 바로 지금의 《禮記》이다.
역주7皇孫驁生 :
“皇孫이 태어난 것을 쓴 적이 없는데, ‘劉驁가 태어났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유오는 王政君의 소생이니, 뒤에 王氏가 漢나라를 찬탈한 것과 漢나라가 중간에 비색해진 것은 유오의 출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삼가 이것을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皇孫이 태어난 것을 쓴 것은 이번 1번뿐이다.[皇孫生不書 書驁生 何 驁 王政君所生也 王氏之簒 漢之中否 自驁生始矣 故謹書之 終綱目 書皇孫生一而已]” 《書法》
역주8王賀의……아비이다 :
뒤에 成帝가 즉위하여 王政君이 皇太后가 되자, 成帝는 元舅(큰외숙)인 王鳳을 大司馬 大將軍으로 삼고 외숙인 王崇을 安成侯로 봉하였으며, 王譚과 王商ㆍ王立ㆍ王根ㆍ王逢時에게 關內侯의 작위를 하사하였다. 이후로 王氏 一門이 軍權과 政權을 독차지하여, 王鳳이 죽자 王音이 大司馬가 되고, 왕음이 죽자 王商이, 왕상이 죽자 王根이, 왕근이 신병으로 사면되자 王莽이 大司馬가 되었다가 결국 漢나라를 찬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