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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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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丙子年(316)
四年이라
漢麟嘉元年이라
漢中常侍王沈, 郭猗等 寵幸用事 漢主聰 遊宴後宮하여 或百日不出하고 政事 一委相國粲하여
惟殺生除拜 乃使沈等入白하니 沈等 多自以其私意決之러라
猗有怨於太弟義하여 謂粲曰 聞太弟與大將軍謀하여 因上巳大宴하여 作亂注+粲弟勃海王敷, 時爲大將軍.이라하니
今禍期甚迫하니 宜早圖之니이다 殿下儻不信臣言인댄
可召大將軍從事王皮 司馬劉惇하여 許其歸首以問之하시면 必可知也리이다 許之注+通鑑 “衛軍司馬劉惇.” 粲弟齊王 時爲衛大將軍.하다
猗密謂皮, 惇曰 二王逆狀 主上及相國 具知之矣 卿同之乎 二人驚하여 曰 無之로라
猗曰 茲事已決하니 吾憐卿親舊幷見族耳라하고 因歔欷流涕한대
二人 大懼하여 叩頭求哀 猗曰 相國 問卿이어든 卿但云有之라하니 皮, 惇 許諾하다
問之 二人 至不同時로되 而其辭若一하니 粲以爲信然이러라
靳準 復說粲曰 人告太弟爲變이면 主上 必不信하시리니 宜緩東宮之禁하여 使賓客得往來하면
太弟雅好待士하여 必不以此爲嫌이니 輕薄小人 不能無迎合爲之謀者
然後 下官 爲殿下하여 露表其罪하고 收其賓客하여 考問之하여 獄辭旣具하면 則主上 無不信之理也注+下官, 準自稱.리이다
乃命卜抽하여 引兵去東宮注+去年, 聰令卜抽將兵監守東宮.하다
少府陳休 將軍卜崇 爲人淸直하니 沈等 深疾之
侍中卜幹 謂休, 崇曰 沈等勢力 足以囘天地하니 卿輩自料親賢 孰與竇武, 陳蕃注+言陳蕃之賢, 竇武之親, 且爲宦官所困, 況休‧崇等乎.
休, 崇曰 吾輩年踰五十하고 職位已崇하니 唯欠一死耳 死於忠義 乃爲得所 安能俛首低眉以事閹豎乎
至是하여 命收休, 崇及特進綦毋達等七人하여 誅之하니 皆宦官所惡也注+綦毋, 音其無, 複姓也. 七人, 陳休‧卜崇‧綦毋達‧公師彧‧王琰‧田歆‧朱諧.
卜幹 泣諫이어늘 王沈 叱之하고하여 免幹爲庶人하다
河間王易及陳元達等 諫曰注+易, 聰之子也. 今遺晉未殄하고 巴, 蜀不賓하며
石勒 謀據趙, 魏하고 曹嶷 欲王全齊하니 陛下心腹四支 何處無患이니잇고 乃復以沈等助亂하여 誅巫咸하고 戮扁鵲하니
臣恐遂成膏肓之疾하여 後雖救之 不可及已注+巫咸, 殷巫也. 扁鵲, 古良醫也. 膏, 音高, 心下爲膏. 肓, 音荒, 鬲也. 左傳成十年 “晉侯疾病, 求醫于秦, 秦伯使醫緩爲之. 醫至, 曰 ‘疾不可爲也. 在肓之上, 膏之下. 攻之不可, 達之不及, 藥不至焉, 不可爲也.’”니이다 請免沈等官하고 付有司治罪하노이다
以表示沈等하고 笑曰 群兒爲元達所引하여 遂成癡兒로다
問沈等於粲한대 盛稱其忠淸하니하여 封沈等爲列侯하다
易 又上疏極諫한대 大怒하여 手壞其疏하니 易 忿恚而卒하다
易 素忠直이라 元達 倚之爲援하여 得盡諫爭이러니
及卒 元達 哭之慟하여 曰 人之云亡 邦國殄悴라하니 吾旣不復能言하니 安用默默苟生乎아하고 歸而自殺하다
旣而 宴群臣할새 引見太弟義하여 見其憔悴하고 涕泣陳謝어늘 聰亦慟哭하여 待之如初러라
代六脩弑其君猗盧어늘 普根 討之而立이러니 尋卒하니 鬱律하다
代王猗盧 愛其少子比延하여 欲以爲嗣하여 使長子六脩 出居新平城하고 而黜其母하다
六脩來朝 猗盧使拜比延한대 六脩不從而去하니 猗盧大怒하여 帥衆討之라가 兵敗하여 遂爲所弑하다
猗㐌子普根 攻六脩하여 滅之하고 代立하니 國中 大亂이라
將軍衛雄, 箕澹 與劉琨質子遵으로 帥晉人及烏桓三萬家 馬, 牛, 羊十萬頭하여 歸于琨하니 琨兵 由是復振이러라
普根 尋卒하니 國人 立鬱律하다
張寔 下令所部吏民하여 有能擧其過者 賞以布, 帛, 羊, 米라한대
賊曹佐隗瑾曰注+自漢以來, 公府‧方州‧郡國諸曹, 有掾, 有屬, 有佐史. 賊曹佐職, 主盜賊事. 明公 爲政 事無巨細 皆自決之하니 群下畏威하여 受成而已
如此 雖賞之千金이라도 終不敢言也리이다 謂宜少損聰明하고 延訪群下하여 使各盡所懷
然後 采而行之하면 則嘉言自至하리니 何必賞也잇가하여 從之하고 增瑾位三等하다
遣將軍王該하여 帥步騎五千하여 入援長安하고 且送諸郡貢計注+貢, 土物也. 計, 計帳也.어늘 詔拜寔都督陝西諸軍事하다
石勒 寇廩丘하여 陷之하다
劉演 奔段氏하다
夏六月朔 日食하다
◑秋七月 漢劉曜陷北地하고 進至涇陽하다
曜圍北地하니 麴允 救之注+晉北地郡, 領泥陽‧富平二縣耳.러니 曜使反間紿允하여 曰 郡城 已陷하니 往無及也라하다
衆懼而潰하니 曜追敗允하고 遂取北地하다 允性仁厚하여 無威斷하고 喜以爵位悅人이라
諸郡太守皆領征, 鎭하고 村塢主帥小者 猶假銀靑將軍之號注+征鎭, 四征‧‧‧四鎭將軍號也. 銀靑將軍, 加將軍號而假以銀印靑綬.
이나 恩不及下 諸將軍驕恣하여 而士卒離怨이러라
曜遂至涇陽하니 渭北諸城 悉潰注+涇陽, 涇水之陽, 非安定之涇陽縣也. 曜獲將軍魯充, 梁緯하여 飮之酒하고 曰 吾得子하니 天下 不足定也로라
充曰 身爲晉將하여 國家喪敗하니 不敢求生이라 若蒙公恩이면 速死爲幸이니라 曜曰 義士也라하고 與之劍하여 令自殺하다
緯妻辛氏 美色이라 曜將妻之注+妻, 如字.러니 辛氏大哭曰 妾夫已死하니 義不獨生이요 且一婦人而事二夫 明公 又安用之리오하니
曜曰 貞女也라하고 亦聽自殺하고 皆以禮葬之하다
樊氏 故張后侍婢也 立爲上皇后하니 三后之外 佩皇后璽綬者復七人注+三后, 靳氏‧劉氏及樊氏.이라 嬖寵用事하여 刑賞紊亂이라
大將軍敷 數涕泣切諫하니하여 曰 汝欲乃公速死邪 何以朝夕生來哭人고하니 敷憂憤而卒하다
大蝗하다
河東, 平陽 大蝗하니 民流殍者 什五六注+殍, 被表切. 散而之他方者曰流, 餓死於中野者曰殍.이라
石勒 遣將屯幷州하여 招納流民하니 歸之者二十萬戶 遣使讓之호되 不受命이러라
曜逼長安하니 安定太守焦嵩 新平太守竺恢 引兵來救로되 皆畏漢兵彊하여 不敢進이라
相國保 遣胡崧入援하니 擊曜於靈臺하여 破之注+三輔黃圖 “周文王靈臺, 在長安西四十里, 高二丈, 周回百二十步.”하다
恐國威復振이면 則麴, 索勢盛하여 乃還槐里注+槐里縣, 漢屬扶風, 晉屬始平郡.하다
曜攻陷長安外城한대 麴允, 索綝 退守小城하니 內外斷絶하여 城中 饑甚하여 亡逃 不可制로되
唯涼州義衆千人 守死不移注+涼州義衆, 張軌父子所兵也.러라 太倉 有麴數十䴵이어늘 屑之하여 爲粥以進注+䴵, 必郢切.하다
至是하여 帝泣謂允曰 今窮厄如此하고 外無救援하니
當忍恥出降하여 以活士民이라하고 因歎曰 誤我事者 麴, 索二公也라하다
使侍中宗敞으로 送降牋於曜하니 潛留敞하고 使其子說曜曰 若許綝以車騎, 儀同, 萬戸郡公者 請以城降하리라하니
曜斬而送之하고 曰 帝王之師 以義行也 孤將兵十五年 未嘗以詭計敗人하고 必窮兵極勢然後 取之러니
今綝所言如此하니 天下之惡 一也 輒相爲戮之注+爲, 去聲.호리라
帝乘羊車하고 肉袒出降할새 群臣 號泣攀車하니 帝亦悲不自勝이라
御史中丞吉朗 歎曰 吾智不能謀하고 勇不能死하니 何忍君臣相隨하여 北面事賊虜乎아하고 乃自殺하다
曜送帝於平陽한대 漢主聰 臨光極殿하니 帝稽首於前이라 伏地慟哭하니하여 囚之한대 自殺하다
聰以帝爲光祿大夫하여 封懷安侯하고 以曜爲太宰하여 假黃鉞하여 督陝西하고 封秦王하며
贈允車騎將軍하고 諡節愍侯하고 斬綝于市하다
干寶曰注+寶, 新蔡人, 爲東晉散騎常侍, 領國史, 撰晉紀, 自宣帝至愍帝, 凡二十卷. 晉之亡也 樹立失權하고 託付非才하여 四維不張하여 而苟且之政 多也注+賈誼策曰 “禮義廉恥, 是謂四維, 四維不張, 國乃滅亡.”일새라
夫基廣則難傾하고 根深則難拔하고 理節則不亂하고 膠結則不遷注+理節, 謂政敎有條理節度也. 膠, 固也. 言君布仁惠之根基深廣, 又不失理節, 則人心固結而不可遷也.하나니 昔之有天下者 所以能長久 用此道也
今晉之興也 其基本 固異於先代矣 加以朝寡純德之人하고 鄕乏不貳之老하여 風俗淫僻하여 恥尙失所注+周官有鄕 不貳, 謂不貳過者. 恥尙失所, 言所恥者非所恥, 所尙者非所尙也.
學者以莊老爲宗而黜六經하고 談者以虛蕩爲辯而賤名檢注+檢, 謂檢飭也. 名檢, 禮法之士.하며 行身者以放濁爲通而狹節信하며
進仕者以苟得爲貴而鄙居正하며 當官者以望空爲高而笑勤恪注+望空, 謂不識是非, 但望空署名而已.이라
是以 劉頌 屢言治道하고 傅咸 毎糾邪正 皆謂之俗吏하고 而倚杖虛曠하고 依阿無心者 名重海內
由是 毁譽亂於善惡之實하고 情慝犇於貨欲之途하여 選者爲人擇官하고 官者爲身擇利注+爲, 去聲. 言選者不復爲官擇賢, 爲官者但擇所利而趨.
其婦女不知女工하고 任情而動하여 逆舅姑하고 殺妾媵注+二事, 皆賈后爲之倡.호되 父兄 弗之罪也하고 天下莫之非也
禮法刑政 於此大壞하니 國之將亡 本必先顚 其此之謂乎注+左傳曰 “國將亡, 本必先顚, 而後枝葉從之.”인저
觀阮籍之行이면 而覺禮敎崩弛之所由注+事見漢後主景耀五年. 察庾純, 賈充之爭이면 而見師尹之多僻注+事見武帝泰始八年.이로되
考平吳之功이면 而知將帥之不讓注+平吳爭功, 見武帝太康元年.이요 思郭欽之謀 而寤戎狄之有釁注+郭欽疏, 見太康二年.이며
覽傅玄, 劉毅之言이면 而得百官之邪注+玄‧毅, 武帝時爲司隷, 前後糾核, 不避貴遊, 因其所言而得百官之邪也. 核傅咸之奏, 錢神之論이면 而覩寵賂之彰注+咸奏, 見惠帝元康四年. 錢神論, 見元康九年.이라
民風, 國勢 旣已如此하니 雖以中庸之才 守文之主治之라도 猶懼致亂이어든 況惠帝以放蕩之德으로 臨之哉注+中庸, 謂非賢非愚之才. 守文, 謂守常平治世之主也.
懷帝 承亂得位하여 羈以彊臣하고 愍帝 犇播之後 徒守虛名하여 天下之勢 旣去하니 非命世之雄才 不能復取之矣니라
石勒 寇樂平이어늘 劉琨 救之라가 大敗하니 樂平 遂陷하다
石勒 圍樂平하니 太守韓據 請救於劉琨注+武帝泰始中, 分上黨‧太原, 置樂平郡, 治縣.한대 新得猗盧之衆하고 欲因其銳氣以討勒이어늘
箕澹 諫曰 此雖晉民이나 久淪異域하여 未習明公恩信하니 恐其難用이라 不若閉關守險하고 務農息兵이니이다
不從하고 命澹帥騎二萬하여 爲前驅하고 屯廣牧하여 爲之聲援注+廣牧縣, 漢屬朔方郡, 漢末省朔方, 置廣牧縣於陘南, 屬新興郡, 非廣牧縣故地也.하다
據險要하여 設疑兵於山上하고 前設二伏하고 出輕騎하여 與澹戰이라가 陽爲不勝而走하니
縱兵追之하여 入伏中이어늘 前後夾擊하여 大破之하다 犇代郡하고 棄城走하니 幷土震駭注+幷土, 幷州境土也.러라
十二月朔 日食하다
◑劉琨長史以幷州叛하여 降石勒하니 犇薊하다
司空長史李弘 以幷州降勒注+劉琨爲司空, 以弘爲長史, 幷州時治陽曲.하니 進退失據
段匹磾遣信邀之한대 帥衆犇薊하니 匹磾見琨 甚相親重하여 與結婚하고 約爲兄弟러라
石勒 以李囘爲高陽守하다
遣孔萇하여 攻賊帥馮䐗로되 久而不克注+䐗, 張如切. 䐗蓋爲盜於幽‧冀之間.이라 流民數萬戶 在遼西러니 迭相招引하니 民不安業이어늘
問計於張賓한대 賓曰 馮䐗 本非公仇 流民 亦皆戀本하니
今班師振旅하고 選良牧守하여 使招懷之하면 則幽, 冀之寇 可不日而淸이요 遼西流民 將相帥而至矣리이다
乃召萇歸하고 以李囘爲高陽太守注+高陽縣, 前漢屬涿郡, 後漢屬河間國, 武帝泰始元年, 分置高陽國, 在高河之陽.하니 䐗帥其衆降하고 流民歸者 相繼於道러라
睿聞長安不守라하고 出師露次하여 躬擐甲冑하고 移檄四方하여 刻日北征注+露次者, 出宿于野, 上無屋宇.이러니
以漕運稽期라하여 斬督運令史淳于伯하다 刑者以刀拭柱한대 血流上하여 至柱末二丈餘而下하니 觀者咸以爲冤注+拭柱, 謂拭刷於柱上.이러라
司直劉隗上言호되 罪不至死하니 請免從事中郞周莚等官하노이다
於是 王導等 引咎請解職한대 睿曰 刑政失中 皆吾闇塞所致라하고 一無所問하다
隗性剛訐하니 當時名士 多被彈劾이러니 睿率皆容貸하니 由是 衆怨 歸之러라
南中郞將王含 敦之兄也 以族彊位顯이라하여 驕傲自恣러니
隗奏含호되 文致甚苦注+文致, 謂深文以致其罪.하니 事雖被寢이나 而王氏深忌疾之러라
丞相睿以邵續爲冀州刺史하고 劉遐爲平原內史하다
續女壻也 聚衆河, 濟之間이러라


丙子年(316)
[] 나라 孝愍皇帝 建興 4년이다.
[] 나라(前趙) 烈宗 劉聰 麟嘉 원년이다.
[] 봄 2월에 나라(前趙)가 少府 陳休 등 7명을 죽였다.
[] 나라(前趙) 中常侍 王沈郭猗 등이 총애를 믿고 권력을 행사하였다. 漢主 劉聰後宮에서 놀며 잔치를 하느라 혹 100일 동안 후궁에서 나오지 않고 모든 政事相國劉粲에게 맡겨두고서,
오직 살리고 죽이는 일과 관직을 제수하는 일만 왕침 등으로 하여금 들어와 아뢰게 하니, 왕침 등은 대부분 자기의 사사로운 생각으로 결정하였다.
곽의가 太弟 劉义에게 원한이 있어 유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듣자하니 태제가 大將軍(劉敷)과 상의하여 上巳日(음력 3월 3일)에 여는 큰 잔치를 틈타 을 일으키려 한다고 합니다.注+劉粲의 아우 勃海王 劉敷가 이때 大將軍이었다.
지금 가 닥칠 시기가 매우 임박하였으니, 빨리 도모하여야 합니다. 전하께서 혹시라도 신의 말을 믿지 못하시겠으면,
大將軍(유부)의 從事인 〈衛軍大將軍의〉 王皮司馬劉惇을 불러서 그들이 귀순하여 자수하기를 허락한 다음 물으시면, 반드시 실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유찬이 이를 허락하였다.注+資治通鑑≫에는 “衛軍大將軍司馬劉惇이다.” 하였으니, 유찬의 아우 齊王 劉勸이 이때 衛軍大將軍이었다.
[] 郭猗가 은밀히 王皮劉惇에게 이르기를 “두 왕(勃海王 劉敷齊王 劉勱)의 반역하는 내용을 主上相國이 자세히 알고 있다. 들도 이 일에 함께 참여하였는가.” 하니, 두 사람이 놀라며 말하기를 “그런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곽의가 말하기를 “이 일은 이미 결정되었다. 나는 들의 친척과 벗들 모두 족멸하게 되는 것을 가엾게 여긴다.” 하고는,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이 크게 두려워하여 머리를 땅에 두드리면서 살려줄 것을 애걸하자, 곽의가 말하기를 “相國(劉粲)이 에게 물으시면, 들은 그런 일이 있었다고만 대답하라.” 하니, 왕피와 유돈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유찬이 물었는데, 동시에 오지 않았는데도 두 사람의 말이 한결같으니, 유찬은 두 왕이 참으로 모반한 것이라고 믿었다.
[] 靳準이 또 劉粲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사람들이 太弟가 변고를 일으킨다고 아뢰면, 主上은 반드시 믿지 않을 것이니, 마땅히 東宮禁令을 느슨히 해서 賓客들로 하여금 왕래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태제가 평소 선비들을 대하기를 좋아하여 반드시 이것을 혐의하지 않을 것이니, 경박한 小人들 중에는 태제에게 영합하여 도모하는 자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이 下官殿下를 위해서 태제의 죄를 드러내 밝히고 그의 빈객들을 체포하여 고문해서 獄辭(供招)가 갖추어지고 나면, 主上께서도 믿지 않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注+下官靳準이 자기를 칭한 것이다.
유찬이 마침내 卜抽에게 명해서 군대를 이끌고 東宮을 떠나게 하였다.注+지난해에 劉聰卜抽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東宮監守하게 하였다.
[] 少府 陳休將軍 卜崇은 인품이 청렴하고 정직하니, 王沈 등이 몹시 이들을 미워하였다.
侍中 卜幹이 진휴와 복숭에게 이르기를 “왕침 등의 세력이 대단하여 하늘과 땅을 뒤바꿀 수 있을 정도이니, 들은 스스로 황제와의 친분과 자신의 어짊을 헤아려보건대, 과 비교하여 누가 낫다고 여기는가?”注+〈“自料親賢 孰與竇武, 陳蕃”은〉 “陳蕃은 어질고 竇武는 황제의 친척인데도 宦官에게 곤궁을 당하였는데, 하물며 陳休卜崇 등이랴.”라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진휴와 복숭이 말하기를 “우리는 나이가 50이 넘었고 지위가 이미 높으니, 오직 한 번의 죽음만 남았을 뿐이다. 忠義에 죽는다면 죽을 곳을 얻는 것이니, 어찌 머리를 숙이고 눈썹을 낮게 드리우고서 환관을 섬기겠는가.” 하였다.
[] 이때에 劉聰이 명하여 陳休卜崇, 綦毋達 등 7명을 체포하여 주살하니, 이들은 모두 환관들이 미워한 자들이었다.注+綦毋其無이니, 複姓이다. 7명은 陳休, 卜崇, 綦毋達, 公師彧, 王琰, 田歆, 朱諧이다.
卜幹이 울며 하자 왕침이 그를 질타하니, 유총은 노하여 복간의 관직을 파면하여 庶人으로 삼았다.
河間王 劉易(유이)와 陳元達 등이 다음과 같이 하였다.注+劉易劉聰의 아들이다. “지금 남아 있는 왕조의 무리가 아직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고, 지역도 귀순하지 않았으며,
石勒 지역을 점거할 것을 도모하고, 曹嶷 지역 전체를 차지하여 왕이 되고자 하니, 陛下心腹四肢에 어느 곳인들 병통이 없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다시 왕침 등으로 하여금 을 조장하게 해서 巫咸을 죽이고 扁鵲을 죽이시니,
신은 마침내 膏肓(고황)의 병이 되어서 뒤에 치료하려고 해도 미칠 수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注+巫咸나라의 유명한 무당이고, 扁鵲은 옛날의 훌륭한 의원이다. 이니, 심장 아래를 라 한다. 이니, 명치이다. ≪春秋左氏傳成公 10년 조에 “晉侯가 병이 위독하여 나라에 의원을 요구하자, 秦伯이 의원 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의원이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병은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의 위, 의 아래에 있어서 약쑥으로 떠도 병을 공격할 수 없고 침을 놓아도 도달하지 못하고 약을 마셔도 약이 도달하지 못해서 치료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하였다. 청컨대 왕침 등의 관직을 파면하고 有司에게 맡겨서 죄를 다스리기를 바랍니다.”
유총은 이 표문을 왕침 등에게 보여주고는 웃으며 말하기를 “여러 아이들이 진원달에게 유인되어 마침내 바보가 되었다.” 하였다.
[] 劉聰劉粲에게 王沈 등에 대하여 묻자, 유찬이 그들이 충성스럽고 청백하다고 크게 칭찬하니, 유총은 기뻐하여 왕침 등을 봉하여 列侯로 삼았다.
劉易(유이)가 또다시 상소하여 지극히 하자, 유총이 크게 노하여 손수 그 상소문을 찢으니, 유이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하였다.
유이는 평소 충직하였기 때문에 陳元達이 그의 도움에 의지하여 지극히 간쟁을 할 수 있었다.
유이가 죽자, 진원달이 슬피 통곡하며 말하기를 “‘훌륭한 사람이 죽음에 나라가 병든다.’라고 하였는데, 내 이미 더 이상 직언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침묵을 지키며 구차히 살겠는가.” 하고는 돌아가 자살하였다.
얼마 후 유총이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 적에, 太弟 劉义引見하고서 그가 초췌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는 것을 보고는, 유총도 함께 통곡하고 그를 처음과 같이 대우하였다.
[] 나라 拓跋六脩가 그 君主 拓跋猗盧를 시해하니 拓跋普根이 그를 토벌하고 즉위하였는데, 얼마 후 탁발보근이 하자 拓跋鬱律이 즉위하였다.
[] 처음에 代王 拓跋猗盧가 작은아들 拓跋比延을 사랑하여 그를 후사로 삼고자 해서 長子拓跋六脩新平城에 나가 살게 하고 그의 어미를 내쳤다.
탁발육수가 조회 왔을 적에, 탁발의로가 그로 하여금 탁발비연에게 절하게 하자, 탁발육수가 따르지 않고 떠나갔다. 이에 탁발의로가 크게 노해서 군사를 거느리고 탁발육수를 토벌하다가 군대가 패하여 마침내 시해를 당하였다.
拓跋猗㐌의 아들 拓跋普根이 탁발육수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를 대신하여 즉위하니, 나라 안이 크게 혼란하였다.
將軍 衛雄箕澹이 인질로 온 劉琨의 아들 劉遵과 함께 나라 사람과 烏桓의 3만 가호와 말, 소, 양 10만 마리를 거느리고 유곤에게 귀의하니, 유곤의 세력이 이로 말미암아 다시 크게 떨쳐졌다.
얼마 되지 않아 탁발보근이 하니, 나라 사람들은 拓跋鬱律을 왕으로 세웠다.
[] 張寔이 군대를 들여보내 구원하였다.
[] 張寔이 자기가 통솔하고 있는 관리와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자가 있으면 삼베와 명주와 양고기와 쌀을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隗瑾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나라 이래로 公府方州(州郡)와 郡國의 여러 이 있고 이 있고 佐史가 있었으니, 賊曹佐職盜賊을 잡는 일을 주관하였다.明公이 정사를 함에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스스로 결단하시니, 아랫사람들은 위엄을 두려워해서 明公이 내린 명령을 받을 뿐입니다.
이와 같으면 비록 천금의 상을 주더라도 그들은 감히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명공께서 빼어난 지혜와 타고난 총명을 다소 감추시고 아랫사람들을 불러 의견을 물어서 각각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다 말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채택하여 행하시면 아름다운 말이 저절로 이를 것입니다. 어찌 굳이 상을 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장식이 기뻐하여 그의 말을 따르고, 외근에게 세 등급의 지위를 더 올려주었다.
장식이 將軍 王該를 보내어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들어가서 長安을 구원하게 하고, 또 여러 貢物로 바칠 토산품의 장부를 보내자,注+은 토산물이고, 計吏의 장부이다. 詔令을 내려서 장식을 都督陝西諸軍事로 제수하였다.
[] 石勒廩丘를 침략하여 함락시켰다.
[] 劉演段氏에게로 달아났다.
[] 여름 6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가을 7월에 나라(前趙) 劉曜北地를 함락시키고 진군하여 涇陽에 이르렀다.
[] 劉曜北地를 포위하니 麴允이 이를 구원하려 하였는데,注+나라 北地郡泥陽富平만 거느렸다. 유요가 反間을 하는 첩자를 보내어 국윤을 속이기를 “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이제 가도 이미 늦었다.”라고 하였다.
국윤의 군대가 두려워하여 궤멸하니, 유요가 추격하여 국윤을 패퇴시키고 마침내 北地를 점령하였다. 국윤은 성품이 지나치게 인자하고 후덕하여 위엄과 과단성이 없었고, 작위를 가지고 남의 환심을 사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太守가 모두 , 의 장군을 겸하고 촌락의 우두머리 중 작은 자들도 銀靑將軍의 칭호를 갖고 있었으나,注+, ”은 四征四鎭將軍의 칭호이다. 銀靑將軍에게는 將軍의 칭호를 주고 銀印과 푸른 인끈을 주었다.
은혜가 아래 사졸들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여러 장군들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사졸들이 원망하고 離反하는 마음을 품었다.
[] 劉曜가 마침내 涇陽에 이르니 渭水 북쪽에 있는 여러 이 모두 궤멸하였다.注+涇陽涇水의 북쪽으로, 安定涇陽縣이 아니다. 유요가 장군 魯充梁緯를 사로잡아 술을 마시게 하며 말하기를 “내 그대들을 얻었으니, 천하를 굳이 평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노충이 말하기를 “이 몸이 나라의 장수가 되어서 국가가 패망하였으니, 이 몸이 감히 살기를 바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면, 속히 죽는 것이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유요가 말하기를 “義士이다.” 하고, 검을 주어서 자살하도록 허락하였다.
양위의 아내 辛氏는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다. 유요가 그녀를 아내로 삼으려고 하자,注+(아내로 삼다)는 본음대로 읽는다. 辛氏가 크게 통곡하며 말하기를 “첩의 남편이 이미 죽었으니, 의리상 첩이 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한 부인이 두 남편을 섬기면, 明公이 이런 저를 또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하였다.
유요가 말하기를 “정숙한 여인이다.” 하고 그녀에게도 자살하도록 허락하고는, 모두 를 갖춰 장례하였다.
[] 漢主 劉聰이 계집종인 樊氏를 세워 황후로 삼았다.
[] 樊氏 張后를 모시던 계집종이었는데, 劉聰이 그녀를 세워 上皇后로 삼았다. 세 명의 외에 皇后의 옥새와 인끈을 찬 자가 또 7명이 있었는데,注+세 명의 靳氏劉氏樊氏이다. 이들이 총애를 믿고 권력을 행사하여 형벌과 상이 문란하였다.
大將軍 劉敷가 여러 번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하니, 유총이 노여워하며 말하기를 “너는 내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가? 어찌하여 내가 살아 있는데도 아침저녁으로 와서 곡하는가.” 하니, 유부가 근심하다가 울분에 쌓여 하였다.
[] 나라(前趙)에 蝗蟲이 크게 발생하였다.
[] 河東平陽蝗蟲이 크게 발생하였다. 백성들 중에 流離하거나 굶어 죽은 자가 10명 중에 5, 6명이었다.注+被表이다. 흩어져서 다른 지역으로 간 자를 라 하고, 들 가운데에서 굶어 죽은 자를 라 한다.
石勒이 장수를 보내어 幷州에 주둔시켜 유민들을 불러 모으니, 그에게 귀의한 자가 20만 호였다. 劉聰이 사자를 보내어 석륵을 책망하였으나, 석륵은 명령을 받지 않았다.
[] 겨울 11월에 나라(前趙) 劉曜長安을 함락시키니, 황제( 愍帝)가 나와 항복할 적에 御史中丞 吉朗이 죽었다. 나라가 황제를 봉하여 懷安侯로 삼았다.
[] 劉曜長安을 압박하니, 安定太守 焦嵩新平太守 竺恢(축회)가 구원하려고 군대를 이끌고 왔으나, 모두 나라(前趙) 군대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相國司馬保胡崧을 보내어 들어가 구원하게 하니, 호숭이 靈臺에서 유요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注+에 “나라 文王靈臺長安의 서쪽 40리 지점에 있었는데, 높이가 2길이고 둘레가 120보이다.” 하였다.
호숭은 나라의 위세가 다시 진작되면 麴允索綝의 세력이 강성해질까 염려해서 마침내 槐里로 돌아갔다.注+槐里縣나라 때에는 扶風에 속하였고, 나라 때에는 始平郡에 속하였다.
유요가 長安外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국윤과 삭침이 작은 성으로 후퇴하여 수비하였는데, 성의 안팎이 단절된 까닭에 성안의 기근이 너무 심하여 도망하는 자들을 제재할 수 없었다.
오직 涼州義兵 천 명은 죽음을 불사하고 지키며 떠나지 않았다.注+涼州義兵張軌 父子가 보낸 군대이다. 太倉에 수십 개의 떡이 있었는데, 국윤이 이 떡을 찧어 가루로 내어서 죽을 쑤어 황제( 愍帝)에게 올렸다.注+(떡)은 必郢이다.
[] 이때에 황제가 울면서 麴允에게 이르기를 “지금 곤궁함이 이와 같고 밖에는 구원하는 세력이 없으니,
마땅히 치욕을 참고 나가 항복해서 선비와 백성들을 살리겠다.” 하고는 인하여 탄식하기를 “나의 일을 그르친 자는 바로 麴公(麴允)과 索公(索綝)이다.” 하였다.
侍中 宗敞을 보내서 劉曜에게 항복하는 글을 전달하려 하였는데, 삭침이 은밀히 종창을 붙들어두고 자기 아들을 보내어 유요를 설득하기를 “만약 나에게 車騎將軍儀同三司萬戸郡公을 허락해준다면, 을 가지고 항복하겠다.” 하였다.
유요가 사자를 참수하고서 그 시신을 보내며 말하기를 “제왕의 군대는 로써 일을 행하는 것이다. 내가 군대를 통솔한 지 15년에 일찍이 속임수로써 남을 패망하게 한 적이 없고, 반드시 상대로 하여금 무력을 다 쓰고 세력을 다하게 한 뒤에야 취하였다.
그런데 지금 삭침이 말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천하에서 악한 짓을 하는 자는 똑같으므로, 내가 그대들을 위해 대신하여 삭침을 죽이겠다.”注+(위하다)는 去聲이다. 하였다.
[] 황제가 이 끄는 수레를 타고 웃통을 벗고 도성을 나와 항복할 적에 여러 신하들이 흐느껴 울며 수레를 부여잡으니, 황제 또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愍帝가 나와 劉曜에게 항복하다愍帝가 나와 劉曜에게 항복하다
御史中丞 吉朗이 탄식하기를 “나는 지혜가 국가를 위해 도모하지 못하고 용맹이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지 못하였으니, 어찌 차마 군주와 신하가 함께 북향하고서 오랑캐를 섬기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자살하였다.
劉曜가 황제를 平陽으로 보내자 漢主 劉聰光極殿에 나오니 황제가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麴允이 땅에 엎드려 슬피 통곡하자, 유총이 노하여 그를 가두니, 국윤이 자살하였다.
유총은 황제를 光祿大夫로 삼아서 懷安侯를 봉하고, 유요를 太宰로 삼아 黃鉞을 주어 陝西 지역을 도독하게 하고 秦王으로 봉하였으며,
국윤에게는 車騎將軍을 추증하고 시호를 節愍侯로 하였으며, 삭침은 시장에서 참수하였다.
[] 干寶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注+干寶新蔡 사람으로 東晉散騎常侍가 되어 國史를 겸하고 ≪晉紀≫를 하였는데, 宣帝로부터 愍帝에 이르기까지 모두 20권이다.나라(西晉)가 망한 것은 후계자를 세움에 권도를 잃었고 정사를 부탁한 사람이 훌륭한 재주가 아니어서 四維가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여 〈目前의 편의만을 도모하는〉 구차한 정사가 많았기 때문이다.注+賈誼의 대책에 이르기를 “를 일러 四維라 하니, 四維가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가 마침내 멸망한다.” 하였다.
터전이 넓으면 기울게 하기 어렵고, 뿌리가 깊으면 뽑기 어렵고, 조리와 절도가 있으면 어지럽지 않고, 굳게 뭉치면 옮기지 못하는 것이니,注+理節”은 政敎에 조리와 절도가 있음을 이른다. 는 견고함이다. 君主가 인자하고 은혜로운 정사를 펼칠 적에 뿌리와 기반이 깊고 넓고 또 조리와 절도를 잃지 않으면 인심이 굳게 단결하여 옮길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옛날 천하를 소유한 자가 長久하게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방도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라가 일어난 것은 그 터전과 근본이 진실로 先代와 달랐고, 게다가 조정에는 순수한 덕행이 있는 사람이 적고 시골에는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는 노인이 없어서, 풍속이 음탕하고 괴벽하여 제대로 부끄러워하거나 숭상할 줄을 몰랐다.注+周官≫에 鄕老가 있다. “不貳”는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는 것을 이른다. “恥尙失所”는 부끄러워하는 것이 부끄러워해야 할 바가 아니고, 숭상하는 것이 숭상해야 할 바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배우는 자들은 老莊宗主로 삼아 六經을 내쳤으며, 담론하는 자들은 허탕한 것을 변론의 자료로 삼고 名檢(禮儀法度)을 지키는 선비를 천시하였으며,注+檢飭(단속하고 삼가다)을 이르니, “名檢”은 禮儀法度을 지키는 선비이다. 行身(修身)하는 자들은 방종하고 혼탁한 것을 達通한 것으로 여기고 절조와 신의를 하찮게 여겼으며,
나아가 벼슬하는 자들은 구차히 벼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正道에 거처하는 것을 비루하게 여겼으며, 관직을 담당하는 자는 정사의 시비를 묻지 않고 문서에 서명만 하는 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기고 부지런하고 근신하는 것을 비웃었다.注+望空”은 정사의 시비를 따지지 않고 서명만 하는 것을 이른다.
이 때문에 劉頌이 여러 번 정치하는 를 말하고 傅咸이 매번 간사함과 바름을 규찰하자, 모두 이들을 俗吏라고 하였고, 허황함을 의지하고 줏대가 없이 뜻을 굽혀 순종하는 자들의 이름이 海內에서 重望을 얻었다.
[] 이로 말미암아 비방과 칭찬이 선악의 실제에서 혼란하고, 실정과 거짓이 재화와 욕심의 길에서 분주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자는 〈국가를 위하지 않고〉 사람을 위하여 관직을 가려주고, 벼슬하는 자는 자신을 위하여 이익을 택하였다.注+(위하다)는 去聲이니, 〈“選者爲人擇官 官者爲身擇利”는〉 관리를 선발하는 자는 더 이상 나라를 위하여 어진 사람을 가려 쓰지 않고, 벼슬살이하는 자는 다만 이로운 바를 가려 달려감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부녀자들은 여자가 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서 시부모를 거스르고 侍妾을 죽였는데도,注+〈시부모를 거스르고 侍妾을 죽이는〉 두 가지 일은 모두 賈后(惠帝)가 倡導하였다. 父兄들은 이들을 죄책하지 않고 천하 사람들은 이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禮法刑政이 이에 크게 무너지니, 나라가 망하려 할 적에 반드시 뿌리가 먼저 쓰러진다는 것은 이것을 말함일 것이다.注+春秋左氏傳≫에 “나라가 망하려 할 적에는 반드시 뿌리가 먼저 쓰러지니, 그런 뒤에 가지와 잎이 따라 쓰러진다.” 하였다.
[] 그러므로 阮籍의 행실을 보면 禮敎가 무너지고 해이해진 이유를 깨달을 수 있고,注+阮籍의 행실은〉 일이 蜀漢 後主 景耀 5년(262)에 보인다. 庾純賈充의 논쟁을 살펴보면 師尹(執政大臣)이 편벽됨이 많음을 볼 수 있으며,注+〈“庾純賈充의 논쟁”은〉 일이 武帝 泰始 8년(272)에 보인다.
나라를 평정한 을 살펴보면 장수들이 사양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注+나라를 평정하고 을 다툰 일은 武帝 太康 원년(280)에 보인다. 郭欽의 계책을 생각하면 戎狄이 전쟁을 도발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며,注+郭欽의 상소는 太康 2년(281)에 보인다.
傅玄劉毅의 말을 살펴보면 백관들의 간사함을 알 수 있고,注+傅玄劉毅 武帝 때에 司隷가 되었는데, 前後로 규찰하고 탄핵할 적에 현달하고 귀한 사람들을 피하지 않았으니, 이 두 사람이 말한 것을 통해서 백관들의 간사함을 알 수 있다. 傅咸上奏文魯褒을 살펴보면 사사로운 총애와 뇌물이 치성했음을 볼 수 있다.注+傅咸上奏文 惠帝 元康 4년(294)에 보인다. ≪錢神論≫은 元康 9년(299)에 보이다.
백성들의 풍속과 나라의 형세가 이미 이와 같았으니, 비록 中庸(보통)의 재주와 守文의 군주가 다스리더라도 을 불러올까 두려운데, 더구나 惠帝가 방탕한 덕으로 군림함에 있어서랴.注+中庸”은 어질지도 않고 어리석지 않은 보통의 재주를 이르며, “守文”은 常法을 지키는 治世의 군주를 이른다.
懷帝는 혼란을 뒤이어 황제에 즉위한 탓에 강성한 신하들에게 속박을 당하였고, 愍帝는 이리저리 播遷한 뒤에 한갓 빈이름만을 지켜서 천하의 대세가 이미 떠나갔으니, 당세에 이름난 걸출한 인재가 아니면 다시 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 石勒樂平(낙평)을 침략하였는데 劉琨이 구원하다가 대패하니, 낙평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 石勒樂平을 포위하니, 太守 韓據劉琨에게 구원을 청하였다.注+ 武帝 泰始 연간(265~274)에 上黨太原을 나누어 樂平郡을 설치하고 沾縣治所를 두었다. 유곤은 막 拓跋猗盧의 병력을 얻고는 그 銳氣를 이용하여 石勒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이에 箕澹이 다음과 같이 하였다. “이들은 비록 나라 백성이지만 오랫동안 異域(오랑캐)에 빠져 있어서 明公의 은혜와 신의를 잘 알지 못하니, 이들을 사용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관문을 닫고 험한 요새를 지키고 농사에 힘쓰게 하면서 병사들을 쉬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유곤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기담에게 명해서 2만 명의 기병을 거느려 선봉이 되게 하고, 유곤 자신은 廣牧縣에 주둔하고서 기담의 군대를 멀리서 지원하였다.注+廣牧縣나라 때에는 朔方郡에 속하였는데, 나라 말기에 삭방군을 없애고 陘南에 광목현을 설치하여 新興郡에 소속시켰으니, 광목현의 옛 지역이 아니다.
석륵은 험한 요새를 점거하고서 산 위에 疑兵을 설치하고 앞의 두 곳에 매복을 진설하고는, 날랜 기병을 출동하여 기담과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한 것처럼 하고 달아났다.
기담이 군대를 풀어 추격해서 매복한 가운데 들어오자, 석륵이 전후에서 협공하여 대파하였다. 기담은 代郡으로 달아나고 韓據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니, 幷州 지역이 놀라 진동하였다.注+幷土”는 幷州 경내의 지역이다.
[] 12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劉琨長史幷州를 가지고 배반하여 石勒에게 항복하니, 유곤이 薊城으로 달아났다.
[] 司空長史李弘幷州를 가지고 石勒에게 항복하니,注+劉琨司空이 되어서 李弘長史로 삼았다. 幷州는 이때 陽曲治所를 두었다. 劉琨이 나아가고 물러감에 의거할 곳이 없었다.
段匹磾가 서신을 보내어 불러들이자, 유곤이 무리를 거느리고 薊城으로 달려갔다. 단필제는 유곤을 보고 매우 친애하고 소중히 아껴서 그와 혼인을 맺고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다.
[] 石勒李囘高陽太守로 삼았다.
[] 石勒孔萇을 보내어 도적의 우두머리인 馮䐗(풍저)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오랫동안 이기지 못하였다.注+張如이다. 馮䐗는 아마도 幽州冀州 사이에서 도둑질을 한 듯하다. 流民 수만 호가 遼西에 있었는데 여러 곳에서 번갈아 서로 불러들이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였다.
석륵이 張賓에게 계책을 묻자, 장빈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풍저는 본래 의 원수가 아니고 流民들도 모두 본토를 그리워하니,
지금 회군하여 군대를 정돈하고서 훌륭한 牧使와 수령을 선발해서 그들로 하여금 유민들을 불러 회유하게 하면, 幽州冀州의 도적을 며칠이 못 되어 깨끗이 소탕할 수 있을 것이고, 요서의 유민들은 장차 서로 거느리고 항복해올 것입니다.”
석륵이 이에 공장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李囘高陽太守로 삼으니,注+高陽縣前漢 때에는 涿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河間國에 속하였는데, 武帝 泰始 원년(265)에 高陽國을 나누어 설치하였으니, 高河의 북쪽에 있었다. 풍저는 병력을 거느리고 항복해왔고 귀의하는 유민이 길에 줄을 지어 이어졌다.
[] 丞相 司馬睿가 군대를 출동하여 야외에서 노숙하면서 격문을 돌려 북쪽을 정벌하려 하였다.
[] 司馬睿長安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군대를 출동하여 야외에서 노숙하면서 몸소 갑옷과 투구를 쓰고 사방에 격문을 돌려서 날짜를 정해 북쪽을 정벌하기로 하였다.注+露次”는 야외에 나가 유숙해서 위에 지붕이 없는 것이다.
漕運이 기일보다 지체된다 하여 督運令史淳于伯을 참수하였는데, 형을 집행하는 자가 칼의 피를 기둥에 닦자 피가 역류하여 기둥 끝 2 남짓 올라갔다가 내려오니, 이것을 지켜본 자들이 모두 순우백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겼다.注+拭柱”는 칼의 피를 기둥에 씻음을 이른다.
司直 劉隗上言하기를 “순우백의 죄가 죽음에 처해질 정도는 아니니, 從事中郞周莚 등의 관직을 면직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王導 등이 책임을 지고 해임을 청하자, 사마예가 말하기를 “형벌이 지나쳐 중도를 잃은 것은, 모두 내가 우매하고 옹색한 탓이다.” 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묻지 않았다.
[] 劉隗는 성품이 강직하고 바른말을 잘하니, 당시의 유명한 선비들이 대부분 그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司馬睿가 모두 용서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의 원망이 모두 유외에게 돌아갔다.
南中郞將 王含王敦의 형으로, 宗族이 강성하고 지위가 현달하다 하여 오만 방자하였다.
유외가 왕함을 탄핵하여 아뢸 적에 매우 까다롭게 법을 적용하여 죄를 엮으니,注+文致”는 법조문을 까다롭게 하여 그 죄를 엮는 것을 이른다. 일이 비록 중지되었으나 王氏들이 유외를 몹시 미워하였다.
[] 丞相 司馬睿邵續冀州刺史로 삼고, 劉遐平原內史로 삼았다.
[] 劉遐邵續의 사위이니, 河水濟水 사이에서 병력을 모아 보유하고 있었다.


역주
역주1 漢殺其少府陳休等七人 : “陳休 등은 忠直함으로 군주를 섬겨 스스로 충절을 다하고서 죽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랑캐의 추장(劉聰)에게 지조를 잃었으니, 올바른 자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는 다만 ‘진휴 등 7명을 죽였다.’라고 쓰고 그 이름을 일일이 들어 쓰지 않았으니, 이는 생략한 것이다. 생략한 것은 천하게 여긴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君主를 가리는 데에 신중함을 기하는 것이다.[陳休等皆以忠直事人 自以爲盡節而死 然失身酋虜 則非其地矣 故綱目止書殺休等七人 而不列敍其名者 略之也 略之者 賤之也 是以君子謹於擇主]” ≪發明≫
역주2 (勸)[勱] : 저본에는 ‘勸’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勱’로 바로잡았다.
역주3 竇武, 陳蕃 : 竇武는 後漢 桓帝의 황후인 竇太后의 아버지로 환제가 죽은 뒤에 靈帝를 옹립하였다. 陳蕃은 자가 仲擧로, 국정을 보필하고 名賢을 임용하였으며, 사람됨이 방정하고 준엄하여 漢末의 士風이 그로 인해 氣節을 숭상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환관 曹節 등을 제거하려다가 일이 누설되어 도리어 죽임을 당하였다.
역주4 特進 : 前漢 말기에 설치된 관직으로, 列侯 중에 특수한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수여하였는데, 三公의 아래에 자리하였다. 後漢부터는 겨우 명칭만 있을 뿐 實職이 없었다.
역주5 張寔遣兵入援 : “앞에서는 ‘張軌가 督護를 들여보내 호위했다.’라고 썼고, 또 ‘장궤가 군대를 長安으로 들여보냈다.’라고 썼고, 또다시 ‘張寔이 군대를 들여보내 구원하였다.’라고 썼으니, 張氏의 父子는 君主를 잘 섬겼다고 이를 만하다. 빠짐없이 모두 쓴 것은 그들 부자를 인정한 것이다. ‘入援’이라고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으니,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入援’이라고 쓴 것이 15번이다.(이해(316), 梁나라 戊辰年(548) 湘東王 蕭繹‧邵陵王 蕭綸‧鄱陽王 蕭範 등과 韋粲 등, 庚午年(550) 武陵王 蕭紀, 唐나라 玄宗 天寶 15년(756) 囘紇‧于窴王, 肅宗 寶應 원년(762) 回紇, 德宗 建中 4년(783) 靈武諸道‧李晟, 僖宗 廣明 원년(880) 王處存‧王重榮, 昭宗 乾寧 2년(895) 王建과 3년 李克用)[前書張軌遣督護入衛矣 又書張軌遣兵詣長安矣 於是復書張寔遣兵入援 張氏父子 可謂能事君矣 備書 予之 書入援始此 終綱目 書入援十有五(是年 梁戊辰年湘東王繹 邵陵王綸 鄱陽王範等 韋粲等 庚午年武陵王紀 唐玄宗天寶十五載囘紇于窴王 肅宗寶應元年回紇 德宗建中四年靈武諸道李晟 僖宗廣明元年王處存王重榮 昭宗乾寧二年王建 三年李克用)]” ≪書法≫
“春秋의 법에 무릇 ‘구원했다’라고 쓴 것은 좋게 여기지 않은 것이 없으나, 구원하는 가운데에도 또 똑같이 논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왕실을 구원하였으면 제후를 죄책한 것이니 鄭나라 子突이 衛나라를 구원한 경우가 이에 해당하고, 먼 나라를 구원하였으면 사방의 이웃나라를 죄책한 것이니 晉나라 陽處父가 江나라를 구원한 경우가 이에 해당하고, 夷狄을 구원하였으면 중원을 죄책한 것이니 狄이 齊나라를 구원하고 吳나라가 陳나라를 구원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때 오랑캐의 기세가 하늘을 뒤덮어서 晉나라 황실이 累卵처럼 위태로운데도, 四方의 征, 鎭들은 병력을 보유하고 스스로 견고히 할 뿐, 勤王하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張寔은 멀리 河西 지역에 있으면서도 마침내 군대를 들여보내 구원하였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사실에 근거하여 이것을 썼으니, 가까운 지역에 있는 여러 鎭이 부끄럽지 않겠는가. 먼 곳에 있는 자를 아름답게 여긴 것은 가까이 있는 자를 죄책한 것이니, 이것이 진실로 書法의 깊은 뜻이다. 아! 슬프다.[春秋之法 凡書救 未有不善者 然於救之中 又有不得而槪論焉 救在王室 則罪諸侯 子突救衛是也 救在遠國 則罪四隣 晉陽處父救江是也 救在夷狄 則罪中國 狄救齊 吳救陳是也 是時虜寇滔天 晉室危如累卵 四方征鎭 擁兵自固 未聞有勤王之擧 張寔遠在河西 乃能遣兵入援 綱目據事書之 近地諸鎭 得無愧乎 美在遠者 則責在近者 此固書法之深意也 吁]” ≪發明≫
역주6 賊曹佐 : 賊曹는 관서의 명칭으로 前漢 때 三公府에 소속된 諸曹의 하나로 도적에 관련된 일을 주관하였다. 佐는 參佐의 의미이다. 後漢 때에는 秩 三百石의 掾이 이를 주관하였으며, 郡縣에도 설치하였는데 掾이 秩 百石이었다. 삼국시대 曹魏의 大將軍府에도 설치되었다. 晉代에도 이어서 설치하였으며 公府, 大將軍府에 증치되었다.
역주7 漢主聰立婢樊氏爲后 : “漢나라(前趙)에게는 ‘세 명의 后를 세웠다.’라고 썼고, 이때 또 계집종을 后로 삼아서 높은 지위에 올렸으니, 이들이 어떻게 國母로서 한 나라의 儀表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 곧바로 ‘계집종을 세웠다.’라고 쓰고 劉聰의 이름을 직접 가리켰으니, 이는 깊이 이 일을 미워한 것이다. 계집종을 세운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고, 그 아비의 계집종을 세운 것은 더 심한 치욕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계집종을 세워서 황후로 삼았다.’라고 쓴 것이 3번인데(漢主 劉聰의 계집종, 乙未年(935) 閩主 王璘의 계집종과 丙申年(936) 閩主 王昶의 계집종은 모두 아비의 계집종이었다.) 그 이름을 직접 가리켜 밝히지 않은 적이 없다.[漢書立三后矣 於是又以婢爲后而位之上 是何以母儀一國乎 故綱目直書立婢而斥名聰 所以深惡(오)之也 立婢恥矣 立其父婢 又甚哉 終綱目 書立婢爲后三(漢主聰婢 乙未年閩主璘 丙申年閩主昶 竝父婢) 未有不斥其名者也]” ≪書法≫
“劉聰은 오랑캐이니 본래 굳이 책망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중국 지역을 점거하여 황제의 존호를 참칭하였으므로, 그 행한 바를 또한 다 생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는 ‘세 명의 后를 세웠다.’라고 쓰고 여기에서는 ‘계집종 樊氏를 后로 세웠다.’라고 썼으니, 모두 그 난잡한 醜行을 드러낸 것이다. 두 황후가 나란히 있게 하는 것도 亂의 시작이 되는데, 하물며 세 명의 后가 있음에랴. 媵妾도 황후로 삼을 수가 없는데, 하물며 천한 계집종이랴. 사실에 근거하여 곧바로 썼으니, 악이 저절로 드러나게 되었다.[聰夷狄也 本無足責 然據有中土 僭號稱尊 故其所爲 亦不容盡略 是以前書立三后 此書立婢樊氏 皆以著其雜亂之醜也 夫竝后且爲亂階 況三后乎 妾媵且不可爲主 況賤婢乎 據事直書 惡自見矣]” ≪發明≫
역주8 漢劉曜陷長安……死之 : “‘황제가 나와 항복했다.’라고 쓴 것은 황제를 옮긴 것과는 다르다. 平陽에 도착한 뒤에 황제가 머리를 조아리자, 麴允이 통곡하였다. 劉聰이 노하여 그를 가두니, 국윤이 자살하였다. 庾珉과 王儁에 비하면 사정이 똑같은데 어찌하여 그 사실을 쓰지 않았는가. 국윤이 통곡한 것은 의로웠으나, 갇혀서 자살한 것이 부득이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진실로 吉朗이 자살한 것과 똑같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유민과 왕준에게는 관직을 쓰지 않았는데, 길랑에게는 어찌하여 관직을 썼는가. 길랑이 말하기를 “차마 북향하여 적을 섬길 수 없다.” 하였으니, 그는 진실로 晉나라 조정의 신하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관직을 쓰고 ‘死之’라고 쓴 것이다.[書帝出降 與遷異矣 旣至平陽 帝稽首 麴允慟哭 聰怒 囚之 允自殺 其視庾珉王儁 等耳 則何以不書 允之慟哭 義也 囚而自殺 則安知其非有不得已者乎 固不可與朗之自殺同矣 珉儁不書官 朗何以書 朗稱不忍北面事賊 則固晉廷之臣也 故特書官 書死之]” ≪書法≫
“懷帝에게는 ‘옮겼다’라고 쓰고 愍帝에게는 ‘나와 항복했다’라고 썼으니, 이는 각각 그 사실을 쓴 것이다. ≪春秋≫에서는 나라가 멸망하고 군주가 죽었을 때에는 ‘滅’이라고만 썼다. 혹 ≪춘추≫에서 군주가 사로잡히거나 옮겨가거나 죽임을 당했다고 했을 경우에는 모두 자기 나라를 멸망시킨 자(군주)의 죄이고, 혹 데리고 돌아가거나 나가 달아나거나 적군에게 항복했다고 했을 경우에는 모두 그 지위에 죽지 못한 자(군주)의 죄인 것이니, 이것이 진실로 書法이 똑같지 않은 뜻이요, 또한 ≪資治通鑑綱目≫이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晉나라가 세상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오랑캐의 기세가 하늘을 뒤덮어서 사방에 勤王하는 군대가 없고 京邑에 방어할 물자가 없으며, 愍帝가 형세가 곤궁하고 힘이 다하여 몸이 항복한 포로가 되었으니, 비록 치욕을 참고서 선비와 백성들을 살리겠다는 말을 하였으나, 치욕됨이 또한 심하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사실에 근거하여 곧바로 썼으니, 비록 에둘러 숨기려고 해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強暴하고 橫逆한 자는 어찌 홀로 죄가 없단 말인가. 남의 집안과 나라를 멸망시키고 남의 토지를 빼앗고 남의 종묘를 파괴하였으면, 그 죄가 진실로 貶黜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드러난다. 더구나 夷狄이 中華를 어지럽힌 것은 또 기타 나라를 멸망시킨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니, 이것을 책에 쓴 것은 다만 非常한 변고를 드러내어서 중국의 불행을 슬퍼했을 뿐이다.
御史中丞 吉朗이 자살을 했을 때에는 절개를 지키다 죽은 것으로 썼는데 麴允 또한 자살하였는데 어찌하여 쓰지 않았는가. 국윤은 정사를 맡은 대신이었다. 나라가 위태로워졌는데도 유지하지 못하고 나라가 넘어지는데도 부지하지 못하였으니, 이에 죽는 것은 본래 그의 직분일 뿐, 죽음으로써 겨우 조정을 그르친 죄를 보상했을 뿐이다. 劉曜에게 곧바로 ‘長安을 함락시켰다.’라고 써서, 마치 아무도 없는 지역을 쳐들어온 것처럼 하였으니, 여기에서도 또 晉나라의 허약함이 이와 같음을 볼 수 있다. 한탄스러움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아! 슬프다.[懷帝書遷 愍帝書出降 各書其實也 春秋凡國滅君死 則止書滅 或執或遷或殺 則皆滅國者之罪 或以歸或出奔或降于師 則皆不能死於其位者之罪 此固書法不同之意 而亦綱目之所本也 晉氏失馭 虜寇滔天 四方無勤王之衆 京邑無守禦之資 愍帝勢窮力屈 身爲降虜 雖有忍恥以活士民之語 然辱亦甚矣 綱目據事直書 雖欲曲爲隠諱 不可得也 然則強暴橫逆者 獨無罪乎 夫滅人家國 奪人土地 毁人宗廟 其罪固無待於貶黜而後見 況夷狄亂華 又非其他滅國者之比 書之于冊 亦以著非常之變 哀中國之不幸而已 吉中丞自殺 則書死節 麴允亦自殺 何以不書 允任事大臣 危不能持 顚不能扶 死自其分 僅足以償誤朝之罪故耳 劉曜直書陷長安 如入無人之境 又以見晉之虛弱如此 可勝歎哉 吁]” ≪發明≫
역주9 三輔黃圖 : 三輔 지역의 古跡과 풍속을 상세하게 기록한 地理書로, 모두 6권이다. 삼보는 長安의 동쪽인 京兆, 장안의 북쪽인 左馮翊과 渭城의 서쪽인 右扶風을 이른다.
역주10 (遺)[遣] : 저본에는 ‘遺’라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遣’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1 (者)[老] : 저본에는 ‘者’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老’로 바로잡았다.
역주12 錢神論 : 西晉의 南陽 사람 魯褒가 惠帝 元康 연간 이후로 기강이 크게 무너져 뇌물이 성행하자, 세상의 탐욕스런 풍조를 풍자하기 위해 성명을 숨긴 채 저술한 책이다. 錢神은 돈의 힘은 神物과 같다 하여 돈을 일컫는 말이다.
역주13 (沽)[沾] : 저본에는 ‘沽’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沾’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4 丞相睿出師露次 移檄北征 : “정벌할 적에 ‘出師’라고 쓰지 않는데, ‘出師’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시기를 늦췄기 때문이다. 이는 司馬睿가 북벌할 뜻이 없고 다만 군대를 출동하여 야외에서 노숙하면서 격문을 돌려 북쪽을 정벌한다고 한 것을 나타냈을 뿐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사마예가 북벌을 할 뜻이 없으면 ‘군대를 출동하여 야외에서 노숙하면서 격문을 돌려 북쪽을 정벌하려 했다.’라고 썼고(이해), 高騈이 역적을 토벌한 실제가 없으면 ‘격문을 돌려 역적을 토죄하고, 나가서 東塘에 주둔했다.’라고 썼으니(唐 僖宗 中和 원년(881)), 모두 그것이 진실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비난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書移(글을 발송했다.)’라고 쓴 것이 1번이고(漢 獻帝 初平 2년(191)) ‘移檄(격문을 돌렸다.)’이라고 쓴 것이 7번인데(初平 2년에 자세히 보인다.) 오직 사마예와 고변에게는 ‘出次’라고 썼다.[伐不書出師 書出師 何 遷延也 若曰 睿無北伐之志 徒見出師露次 移檄北征而已矣 是故睿無北伐之志 則書曰出師露次 移檄北征(是年) 高騈無討賊之實 則書曰移檄討賊 出屯東塘(唐僖宗中和元年) 皆譏其非誠也 終綱目 書移書一(漢獻帝初平二年) 移檄七(詳初平二年) 唯睿及高騈書出次]” ≪書法≫
“長安이 위축된 즈음에 琅邪王 司馬睿가 애당초 구원할 뜻이 없었는데 장안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군대를 출동하여 야외에서 노숙하면서 격문을 돌려 북쪽을 정벌하려 하였다. 이것을 책에 크게 썼으니, 勤王하는 擧措를 충분히 보인 듯하다. 그러나 끝내 출정하여 토벌한 실제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다만 허장성세하였을 뿐이다. ≪資治通鑑綱目≫은 이에 대하여 비록 다행으로 여긴 것이나 또한 이를 애석히 여긴 것이니, 일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當長安危蹙之際 琅邪初無救援之意 及聞其不守 始出師露次 移檄北征 大書于冊 若足示勤王之擧 然亦卒不聞有征討之實 是特張大虛聲而已 綱目於此 雖曰幸之 蓋亦惜之也 比事觀之 其義自見]” ≪發明≫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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