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河間王顒이 初用李含計하여 欲俟齊王冏殺長沙王乂而討之하고
遂廢帝하고 立成都王穎하고 以己爲相이러니 旣而요 不如所謀라
穎亦恃功驕奢하여 百度廢弛하고 嫌乂在內하여 不得逞其欲하여 欲與顒共攻乂라
盧志諫曰 公
이 委權辭寵
하니 時望美矣
라 今宜頓軍關外
하고 文服入朝
니 此
는 伯主之事也
注+關外, 謂郊關之外.니이다
參軍邵續이 諫曰 人有兄弟는 如左右手어늘 今公이 欲當天下之敵이로되 而先去其一手 可乎아
穎이 皆不聽하고 與顒共表乂論功不平하며 與僕射羊玄之와 將軍皇甫商으로 專擅朝政하니 請遣乂還國하고 誅玄之等이니이다
詔曰 顒, 穎이 敢擧兵向闕하니 吾將親帥六軍以討之라 其以乂爲太尉, 都督中外諸軍事하라
目
穎이 又收雲及拯하여 下獄하니 記室江統, 蔡克等이 流涕固請한대 穎이 惻然有宥雲之色이러니
玖扶穎入
하여 催令殺雲
하고 夷三族
하다 獄吏掠拯數百
하여 兩踝骨見
호되 終言機冤
注+腿兩傍曰內外踝. 見, 賢遍切.이라
吏知拯義烈하고 謂曰 二陸之枉을 誰不知之리오마는 君可不愛身乎아
拯이 仰天歎曰 陸君兄弟는 世之奇才라 吾蒙知愛하니 今旣不能救其死나 忍復從而誣之乎아
玖等
이 令獄吏詐爲拯辭
하여 亦夷三族
하다 拯門人費慈, 宰意 詣獄明拯冤
注+費慈‧宰意, 二人也.한대
拯
이 譬遣之
하여 曰 吾義不負二陸
이니 死自吾分
이어니와 卿何爲爾邪
注+譬, 喩也. 分, 扶問切.오한대
曰 君旣不負二陸하시니 僕又安可負君이리오하고 固言拯冤한대 玖又殺之하다
目
[
目]
李特이 남몰래 강을 건너가서
羅尙을 공격하니,
郫水(비수) 가에 주둔해 있던 군대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注+“水上軍”은 郫水(비수) 가에 있는 군대이다.
蜀郡太守가 少城을 가지고 항복하자, 이특이 들어가 점거하였으나 오직 말을 취하여 군수물자에 보탤 뿐이었고 나머지는 침략하지 않았으며,
境內에 사면령을 내리고
建初라고
改元하니,
蜀 지역 백성들로서 서로 모여
를 만든 자가 모두 이특에게 정성을 바쳤다. 이특이 유민들을 여러
塢에 나누어 그곳에 가서 먹게 하였다.
李流가 이특에게 말하기를 “여러 塢가 새로 귀부하였으니, 마땅히 그 大姓의 子弟들을 인질로 삼고 병력을 모아 스스로 지켜서 비상사태에 대비하여야 합니다.” 하니,
이특이 怒하며 말하기를 “大事가 이미 정해졌다. 다만 백성들을 편안히 해야 하니, 어찌하여 다시금 의심과 시기를 미리 해서 離叛하게 하느냐.” 하였다.
目
[目] 朝廷에서 荊州刺史 宗岱 등을 보내어 水軍 3만을 거느리고 가서 羅尙을 구원하게 하여 軍勢가 더욱 강성해지니, 여러 塢에서 모두 두 마음을 품었다.
任叡(임예)가 나상에게 말하기를 “李特이 병력을 분산하여 〈塢에〉 나아가 먹게 하고 교만하고 태만하여 방비가 없으니, 이는 하늘이 그를 망하게 하는 때입니다.
마땅히 여러 塢와 은밀히 약속해서 날짜를 잡아 동시에 출발하여 안팎으로 공격하면 틀림없이 격파할 것입니다.” 하였다.
目
[目] 2월에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어 李特의 진영을 습격하니, 여러 塢가 모두 호응하였다. 이특의 군대가 크게 패하자, 이특을 참수하여 파발마로 그 머리를 洛陽으로 보내었다.
李流와
李蕩과
李雄이 남은 무리를 수합하여 돌아가
赤祖를 지켰는데,
注+祖는 子邪의 切이다. 赤祖는 地名이니, 마땅히 綿竹의 동쪽에 있을 것이다. 이류는
益州牧이라 자칭하여 동쪽 진영을 지키고 이탕과 이웅은 북쪽 진영을 지켰다.
羅尙이
督護인
何沖을 보내어 이류를 공격하자, 이류가 그를 대파하고
乘勢를 타고 전진하여
成都에 이르니, 나상이 다시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이때에 이탕이 창을 맞아 죽었다.
注+中(맞다)은 去聲이다.
이류는 宗岱의 병력이 장차 쳐들어오려 한다는 말을 듣고 매우 두려워 항복하고자 하였는데, 李驤과 이특의 아들 이웅이 번갈아 諫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웅은 마침내 流民들을 설득해서 그들과 함께 東軍(荊州의 군대)을 습격하여 대파하였다.
이때 마침 종대가 卒하여 荊州의 군대가 후퇴하니, 이류는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이류가 이로 말미암아 이웅의 재주를 기특히 여겨 군대의 일을 모두 그에게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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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目]
張昌이 마침내
江夏를 점거하고서
山都縣의 관리인
丘沈을 얻어
注+山都縣은 漢나라 때에는 南陽郡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襄陽郡에 속하였다. 그의
姓名을 바꾸어
劉尼라 하고 거짓으로
漢나라
宗室의 후손이라 하였다.
江夏에서는 그를 받들어 主로 삼고 자신은 相國이 되고 연호를 神鳳이라고 하니, 長江과 沔水 사이의 여러 곳에서 군대를 일으켜 그에게 호응해서 열흘 내지 한 달 사이에 무리가 3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모두 붉은 모자를 쓰고 말꼬리로 수염을 만들었다. 장창이 樊城에 이르자, 司馬歆이 출병하여 이들을 막다가 무리가 궤멸하여 장창에게 살해되니,
詔令을 내려 荊州刺史 劉弘으로 사마흠을 대신해서 鎭南將軍을 삼아 荊州의 군대를 도독하게 하였다.
유홍은
南蠻長史인
廬江 사람
陶侃을
大都護로 삼고
衙門將인
皮初를
都戰帥로 삼아서 나아가
襄陽을 점거하니, 장창이 이들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注+南蠻校尉는 長史와 司馬가 있었다. 都戰帥는 관직 이름이다. 杜佑가 말하기를 “襄陽은 漢中의 廬縣이다.” 하였다.
目
[目] 劉弘이 표문을 올려서 皮初로 襄陽太守로 보임하니, 조정에서는 피초가 명망이 낮다 하여 다시 유홍의 사위인 夏侯陟을 등용하였다.
유홍이
敎令을 내리기를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마땅히 한 나라를 마음으로 삼아야 하니, 반드시
姻戚이 된 뒤에야 등용해서는 안 되고,
荊州 열 고을에 내가 어떻게 열 명의 사위를 얻은 뒤에야 정사를 하겠는가.”
注+≪晉書≫ 〈地理志〉를 살펴보건대 荊州는 22개 郡을 통솔하였는데, 이때 이미 桂陽, 武昌, 安成 3개 郡을 나누어 江州로 소속시켜서 여전히 19개 郡을 통솔하였다. 그러다가 또다시 新城과 魏興, 上庸 3개 郡을 나누어 梁州로 소속시켜서 여전히 16개 郡을 통솔하였는데, 懷帝 때에 다시 長沙, 衡陽, 湘東, 零陵, 邵陵, 桂陽의 6개 郡을 나누어 湘州로 소속시켰다. 그리하여 이때 荊州는 아직도 11개 郡을 통솔하고 있었으니, 이는 당시에 수령의 결원이 생긴 곳이 10개 郡임을 말한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표문을 올리기를 “하후척은 저의 인척이니 옛 제도에 따르면 서로 감독해서는 안 되고, 피초의 功勳은 마땅히 보답을 받아야 합니다.” 하자, 詔令을 내려 이를 허락하였다.
유홍이 백성들에게 농사짓고 누에 치는 것을 권장하고, 형벌을 너그럽게 하고 부역을 줄이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재정이 풍족하고 백성들이 사랑하고 좋아하였다.
目
[目] 河間王 司馬顒이 처음에는 李含의 계책을 따라 齊王 司馬冏이 長沙王 司馬乂를 죽이기를 기다려 그를 토벌하고,
마침내 황제를 폐위하고 成都王 司馬穎을 세운 다음 자기가 정승이 되려고 하였는데, 이윽고 계책한 바와 같이 되지 못하였다.
사마영 또한 자신의 功을 믿어 교만하고 사치하여 여러 가지 법도가 모두 해이해졌으며, 사마예가 안에서 권력을 잡고 있어 자기 욕심을 부릴 수 없음을 혐의하여 사마옹과 함께 사마예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盧志가
諫하기를 “
公이 권력을 내놓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사양하시니, 당시 명망이 아름다웠습니다. 이제 마땅히
郊關의 밖에 군대를 주둔하여
文臣의 의복을 입고 들어가 조회하여야 하니, 이는
霸主가 되는 일입니다.”
注+關外는 郊關(城邑의 사방 교외에 세운 관문)의 밖을 이른다. 하였다.
參軍 邵續이 諫하기를 “사람이 형제가 있음은 왼손과 오른손이 있는 것과 같은데, 이제 公이 천하의 적을 상대하고자 하면서 먼저 그 한 손을 제거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사마영은 모두 듣지 않고 사마옹과 함께 표문을 올려서 “사마예가 論功行賞함에 공평하지 못하였으며 僕射 羊玄之와 將軍 皇甫商과 함께 조정의 권력을 전횡하니, 청컨대 사마예를 封國으로 보내고 양현지 등을 誅殺하소서.” 하였다.
황제는 詔令을 내리기를 “사마옹과 사마영이 감히 군대를 일으켜 대궐을 향하니, 내가 장차 친히 六軍을 거느리고서 이들을 토벌하겠다. 사마예를 太尉 都督中外諸軍事로 삼는다.” 하였다.
目
[目] 司馬顒은 張方을 都督으로 삼아 정예병 7만을 거느리고서 동쪽으로 洛陽으로 달려갔고,
司馬穎은 군대를 이끌고
朝歌에 주둔하여
陸機를
前鋒都督으로 삼아서
王粹와
牽秀,
石超 등의 군대 20여 만을 거느리고
洛陽으로 향하게 하였다.
注+石超는 石苞의 손자이다.陸機
육기가 他地 사람으로서 사마영을 섬기다가 하루아침에 여러 장수의 위에 있게 되니, 王粹 등은 마음에 모두 복종하지 않았다.
孫惠가 육기에게 도독 자리를 왕수에게 사양할 것을 권하였으나, 육기가 말하기를 “저들은 장차 내가 쥐가 구멍에서 나올 때처럼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니, 다만 화를 부를 뿐이다.”
注+“首鼠”는 한 번 앞으로 가고 한 번 뒤로 물러나 주저하는 것이다. 쥐는 의심하는 성질이 있어서 구멍에서 나올 적에 과감하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전진과 후퇴 두 가지를 유지하는 것을 首鼠라 한다. 하고 듣지 않았다.
황제가
十三里橋로 가니
注+다리는 洛陽城의 서쪽에 있는데 城과 13리 떨어진 지점에 있으므로 인하여 十三里橋라 한 것이다. 司馬乂가
皇甫商으로 하여금 병력 만여 명을 거느리고서
張方을
宜陽에서 맞이하여 막게 하였는데, 장방이 기습 공격하여 격파하니 황제가
芒山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羊玄之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卒하자, 황제가 마침내 緱氏(구지)로 행차하여 牽秀를 공격해서 패주시키니, 장방이 京城으로 들어와 크게 노략질하여 죽은 자가 만으로 헤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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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司馬穎은 또다시 陸雲과 孫拯을 체포하여 下獄시키니, 記室 江統과 蔡克 등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간청하였다. 사마영은 측은히 여겨서 육운을 용서할 기색을 보였는데,
孟玖가 사마영을 붙들고 들어가서 재촉하여 육운을 죽이고 삼족을 멸하게 하였다.
獄吏가 손증을 수백 번 매질로 고문해서 살이 터져 두 복사뼈가 밖으로 드러났으나 손증은 끝내
陸機의 억울함을 말하였다.
注+大腿의 양옆 부분을 內外踝라 한다. 見(드러남)은 賢遍의 切이다.
옥리는 손증의 義烈함을 알고 말하기를 “두 陸氏의 억울함을 누가 모르겠는가마는 그대는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가?” 하니,
손증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陸君의 형제는 세상에 드문 재주를 가진 사람이다. 육씨가 나를 알아주고 아껴주었으니, 지금 내가 그의 죽음을 구원하지는 못하나 다시 차마 따라서 무함하겠는가.” 하였다.
맹구 등은 옥리로 하여금 손증이 자백한 말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또한 삼족을 멸하게 하였다. 손증의
門人인
費慈와
宰意가 옥에 나와 손증의 억울함을 밝히자,
注+費慈와 宰意는 두 사람이다.
손증이 타일러 보내며 말하기를 “나는 의리상 두 육씨를 저버릴 수 없으니, 죽는 것이 본래 나의 분수이지만,
卿들은 어찌하여 이러는가?”
注+譬는 타이름이다. 分(분수)은 扶問의 切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君께서 이미 두 육씨를 저버리지 않으시니, 저희들이 또 어찌 君을 저버리겠습니까.” 하고는 굳이 손증의 억울함을 말하자, 맹구가 또다시 이들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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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長沙王 司馬乂가 황제를 받들고 張方을 공격하자, 장방의 병사들은 황제가 탄 수레를 바라보고는 모두 물러나 달아났다. 마침내 장방을 대파하니, 여러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밤에 도망하려 하였다.
장방이 말하기를 “한번 이기고 지는 것은 兵家의 常事이니, 용병을 잘하는 자는 능히 패전으로 인하여 성공한다. 지금 우리가 다시 앞으로 가서 보루를 만들고 적이 예상하지 않은 곳으로 출격하면, 이는 기이한 계책이다.” 하고는
마침내 밤중에 몰래 진군하여
洛陽城 7리까지 다가가서 몇 겹의 보루를 쌓고 밖에서 창고의 곡식을 끌어다가 군대의 식량을 충족하였다.
注+重(중첩)은 直龍의 切이다.
사마예는 싸워 승리하고는 “장방은 근심할 것이 못 된다.” 하였는데, 장방이 보루를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그를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