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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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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戌年(278)
晉咸寧四年이요 吳天紀二年이라
春正月朔 日食하다
◑夏六月 晉羊祜入朝하다
祜以病求入朝하니 旣至 晉主命乘輦入殿하여 不拜而坐러니 祜面陳伐吳之計하니
晉主善之하고 以祜病不宜數入이라하여 更遣張華就問籌策한대 祜曰 孫皓暴虐已甚하니 於今可不戰而克이어니와
若皓沒 更立令主 雖有百萬之衆이라도 長江 未可窺也라하여늘 華深然之하니 祜曰 成吾志者 子也라하더라
晉主欲使祜 臥護諸將한대 祜曰 取吳不必臣行이어니와 但旣平之後 當勞聖慮耳
功名之際 臣不敢居 若事了 當有所付授 願審擇其人也注+以東南壤界闊遠, 當得人以鎭撫之.하노이다
詔以水災 問主者 何以佐百姓注+主者, 謂左民及度支二曹也.고하니 杜預上疏以爲호되 今者 水災東南尤劇하니
宜勅兗豫等州하여 留漢氏舊陂以蓄水하고 餘皆決瀝하여 令饑者 得魚菜螺蜯之饒하면 此目下日給之益也注+螺, 盧戈切, 蜯屬. 蜯, 步項切, 與蚌同, 蜃屬.
水去之後 塡淤之田 畒收數鍾하면 此又明年之益也注+淤, 依據切, 濁泥也.
典牧種牛有四萬五千餘頭하니 可給民하여 使耕種하여 責其租稅하면 此又數年以後之益也注+晉志 “典牧令, 屬太僕.” 種, 朱用切, 如種植之種.라한대
晉主從之하니 民賴其利러라 預在尙書七年 損益庶政 不可勝數注+泰始六年, 預拜度支尙書, 至是七年矣. 時人謂之杜武庫라하니 言其無所不有也
吳主忌勝己者하니 尙爲人辯捷하여 談論每出其表注+尙, 紘之孫也.하니 吳主積以致恨이러니
後問호되 孤飮酒 可以方誰注+方, 比也.오하니 尙曰 陛下有百觚之量이니이다하니
吳主曰 尙知孔丘不王而以孤方之라하고 因發怒殺之注+孔叢子曰 “趙平原君與孔子高飮, 強子高酒曰 ‘諺云 「堯飮千鍾, 孔子百觚, 子路嗑嗑, 尙飮十榼.」 古之聖賢, 無不能飮, 子何辭焉.’” 觚, 飮器也, 受二升. 王, 于況切.하다
晉以衛瓘爲尙書令하다
是時 朝野咸知太子昏愚하여 不堪爲嗣하니 瓘欲啓而不敢이러니
會侍宴凌雲臺注+凌雲臺, 魏文帝所築.할새 瓘陽醉跪晉主前하여 欲言而止者三이어늘
因以手撫床曰 此座可惜이로이다 晉主意悟하여 因謬曰 公眞大醉邪아하고
遂悉召東宮官宴하여 而密封尙書疑事하여 令太子決之하니 賈妃大懼하여 倩外人代對하여 多引古義注+倩, 七正切. 假手於人也.러니
給使張泓曰注+給使, 給東宮使令. 泓, 烏宏切. 太子不學 陛下所知 不如直以意對니이다하니
妃喜하여 謂泓曰 便與我好答하면 富貴與汝共之注+與我, 通鑑作爲我.호리라 泓卽具草하여 令太子自寫하니
晉主省之甚悅하여 先以示瓘하니 瓘大踧踖이라 衆人乃知瓘嘗有是言注+踧踖, 不自安貌.이러라
賈充密遣人語妃云 衛瓘老奴 幾破汝家라하더라
吳人大佃皖城이어늘 晉人 攻破之하다
吳人大佃皖城하고 謀寇晉邊注+佃, 亭年切, 治田也.이어늘 晉都督揚州軍事王渾 遣兵攻破之하니
斬首五千級하고 焚其積穀百八十餘萬斛하며 踐稻苗四千餘頃하고 毁船六百餘艘하다
十一月 晉詔毋得獻奇技異服하다
晉太醫司馬程據 獻雉頭裘注+晉志 “太醫屬宗正.” 雉頭毛采炫燿, 集以爲裘.한대 晉主焚之於殿前하고 因有是詔하다
晉以杜預爲鎭南大將軍 督荊州諸軍事하다 鉅平侯羊祜卒하다
祜疾篤 擧杜預自代而卒하니 晉主哭之甚哀러라 祜遺令不得以南城侯印으로 入柩하니
晉主曰 祜固讓歷年 身沒讓存注+謂身沒而遺令讓侯印也.하니 今聽復本封以彰高美라하고 諡曰成注+祜本封鉅平侯.이라하다
南州民 聞祜卒하고 罷市巷哭注+南州, 謂荊州也.하며 吳守邊將士亦爲之泣이러라
祜好遊峴山注+峴, 胡典切, 山在襄陽城南十里.이라 襄陽人建碑立廟於其地하여 歲時祭祀하고 望其碑者 無不流涕하니 因謂之墮淚碑라하다
預至鎭하여 簡精銳하여 襲吳西陵督張政하여 大破之하니 吳之名將也 恥敗不以實告吳主러니
預欲間之하여 乃表還其所獲한대 吳主果召政還하고 遣留憲代之하다
晉司空何曾卒하다
曾厚自奉養 過於人主하니 司隷劉毅 數劾之호되 晉主不問이러니
及卒 博士秦秀 議曰 曾驕侈過度하고 名被九域注+九域, 九州之域.하니 若生極其情하고 死又無貶이면 公貴人 復何畏哉리오
謹按諡法 名與實爽曰繆 怙亂肆行曰醜 宜諡繆醜公이라하니 晉主策諡曰孝注+策諡者, 不用博士議, 以詔策賜諡.라하다
晉淸泉侯傅玄卒하다
玄性峻急이라 爲司隷하여 每有奏劾 或値日暮 捧白簡하고 整簪帶하며 竦踊不寐하고 坐而待旦注+簡, 略狀也. 古者執笏, 有事則書之, 故常簪筆. 帶, 革帶也, 古之鞶帶.하니
由是 貴遊震懾하니 臺閣生風이라 卒諡曰剛注+周官師氏 “凡國之貴遊子弟學焉.” 註 “貴遊子弟, 王公之子弟. 遊, 無官司者.”이라하다
玄與尙書左丞崔洪善이러니 洪亦淸厲骨鯁하여 好面折人過而退無後言하니 人以是重之러라


戊戌年(278)
나라 世祖 武皇帝 司馬炎 咸寧 4년이고, 吳主 孫皓 天紀 2년이다.
[] 봄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여름 6월에 나라 羊祜入朝하였다.
[] 羊祜가 병이 들어 入朝하기를 청하였는데, 도착하고 나자 晉主가 명하여 을 타고 殿閣에 들어와 절을 하지 말고 앉게 하였다. 양호가 면전에서 나라를 정벌할 계책을 말하니,
晉主가 훌륭하다고 여기고, 양호가 병이 들어 의당 자주 들어올 수 없다고 하여 다시 張華를 파견하여 계책을 물었다. 그러자 양호가 말하기를 “孫皓의 포학함이 이미 심하니, 지금은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손호가 죽어 나라에서 훌륭한 군주를 세우면 비록 백 만의 군대가 있다 하더라도 長江을 넘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화가 깊이 수긍하자, 양호가 말하기를 “내 뜻을 이루어줄 사람은 그대이다.”라고 하였다.
晉主가 양호로 하여금 누워서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게 하자, 양호가 말하기를 “나라를 취하는 일에는 신이 갈 필요가 없거니와 다만 이미 평정한 뒤에는 마땅히 聖慮를 수고롭게 할 뿐입니다.
功名을 논의할 즘에는 은 감히 거처할 수 없을 것이니, 만일 일이 끝나고 나면 마땅히 이 지역을 맡길 사람이 있어야 하니, 적당한 사람을 살펴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注+東南 지역의 경계가 넓고 멀기 때문에 적당한 사람을 얻어 진무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가을에 나라에 홍수가 지고 螟蟲의 재해가 있었다.
[] 조서를 내려 水災를 주관하는 관리에게 어떻게 하면 백성을 도울 수 있는지 묻자,注+주관하는 관리는 를 말한다. 杜預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지금 수재가 동남 지역에 더욱 극심하니,
마땅히 兗州豫州 등에 칙령을 내려 나라 때 있던 옛 제방을 보존하여 물을 저장하게 하고 나머지는 제방을 모두 터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그곳의 물고기와 수초, 소라나 조개 같은 것을 넉넉히 얻도록 하면 이 방법이 눈앞에 그날의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注+(소라)는 盧戈이니, (방합)의 부류이다. 步項이니, 同字의 부류이다.
홍수가 지나간 다음에 진흙이 메워진 밭에서 이랑당 몇 (부피 단위)의 수확을 얻으면 이것은 또 다음 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注+(진흙)는 依據이니, 진흙이다.
典牧(목축 담당 관리)에게 種牛(종자 소) 4만 5천여 가 있으니, 백성들에게 공급하여 밭을 갈고 씨를 뿌리도록 하여 그 조세를 받게 하면 이는 또 몇 년 뒤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注+晉書≫ 〈職官志〉에 “典牧令太僕에 속한다.” 하였다. (심다)은 朱用이니, 種植(초목을 심다)의 과 같다.
晉主가 그 의견을 따르니, 백성들이 그 이익에 의지하였다. 두예가 7년 동안 尙書로 있으면서 여러 정무를 줄이거나 보탠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注+泰始 6년(270)에 杜預度支尙書에 제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7년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杜武庫’라고 하였으니, 그가 빠짐없이 갖추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杜預杜預
[] 나라가 中書令 張尙을 죽였다.
[] 吳主(孫皓)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꺼려하였는데, 張尙은 사람됨이 말을 잘하고 민첩하여 말할 때마다 그 의표를 드러내니,注+張尙張紘의 손자이다. 吳主가 한스러워하는 감정을 쌓아두었다.
그 후에 묻기를 “가 술을 마시는 것을 누구에게 비할 수 있겠는가?”注+은 비유하다는 뜻이다.라고 하니, 장상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100의 주량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吳主가 말하기를 “장상은 孔丘가 왕 노릇을 못한 것을 알고서도 짐을 그에게 비유하였다.”라고 하고, 그로 인해 화를 내어 그를 죽였다.注+孔叢子≫에 이르기를 “나라 平原君孔子高와 술을 마시면서 공자고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며 말하기를 ‘속담에 이르기를 「 임금은 1,000을 마시고, 孔子는 100를 마셨으며, 子路는 말이 많았지만 오히려 10을 마셨다.」라고 하였다. 옛날의 성현들은 술을 마시지 못한 자가 없었는데, 그대는 어찌 사양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하였다. 는 술잔이니, 2이 들어간다. (왕 노릇 하다)은 于況이다.
[] 겨울에 나라가 衛瓘尙書令으로 삼았다.
[] 이때에 朝野에서는 太子가 우둔하여 後嗣를 감당하지 못할 것을 모두 알고 있었는데, 衛瓘이 아뢰려고 하였으나 감히 못하였다.
마침 凌雲臺에서 武帝를 모시고 잔치할 적에注+凌雲臺 文帝 때 지어진 것이다. 위관이 술 취한 척하며 晉主의 앞에 꿇어앉아 말을 하려고 하다가 그친 것이 세 차례였다.
이어서 손으로 용상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이 자리가 참으로 아깝습니다.”라고 하니, 晉主가 그 의중을 알아차리고는 이어서 거짓으로 말하기를 “공은 정말 크게 취하였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東宮官屬들을 모두 불러 연회를 베풀면서 尙書臺에서 아직 처결하지 못한 안건을 밀봉하여 태자에게 결정하도록 하니, 賈妃가 크게 두려움에 떨며 밖에 있는 사람의 손을 빌어 대신 답을 하게 하면서 대부분 古義(고서의 의리)를 인용하였다.注+(빌리다)은 七正이니, 〈“倩外人”은〉 남에게 손을 빌리는 것이다.
給使 張泓이 말하기를注+給使給東宮使令이다. 烏宏이다. “태자께서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은 폐하께서도 아시는 사실이니, 의견을 그대로 답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賈妃가 크게 기뻐하며 장홍에게 말하기를 “곧 나를 위해 좋은 답을 한다면 부귀를 그대와 함께 할 것이다.”注+與我”는 ≪資治通鑑≫에 “爲我”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홍이 바로 초안을 만들어 태자 자신에게 베껴 쓰도록 하였다.
晉主가 살펴보고는 아주 기뻐하면서 먼저 위관에게 보여주니, 위관이 크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은 그제야 위관이 태자에 관해 말을 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注+踧踖”은 스스로 불안해하는 모양이다.
賈充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賈妃에게 말하기를 “위관 이 늙은이가 네 집안을 망칠 뻔하였다.”라고 하였다.
[] 나라 사람들이 皖城(환성)을 대규모로 개간하자 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 나라 사람들이 皖城을 대규모로 개간하고 나라의 변경을 침입할 것을 모의하였는데,注+(개간하다)은 亭年이니, 밭을 개간한다는 뜻이다. 나라의 都督揚州諸軍事 王渾이 병력을 보내어 공격하여 격파하니,
목을 벤 것이 5천 이고, 저장된 곡식 180여만 곡을 불태웠으며, 稻苗 4천여 을 짓밟았고, 배 600여 척을 부수었다.
[] 11월에 나라가 조서를 내려 기이한 기예와 이상한 의복을 바치지 말게 하였다.
[] 나라 太醫司馬 程據雉頭裘를 바쳤는데,注+晉書≫ 〈職官志〉에 “太醫宗正에 속한다.” 하였다. 꿩의 머리털이 색이 화려하고 찬란하여 모아서 갖옷을 만든 것이다. 晉主(司馬炎)가 이를 궁전 앞에서 태우고 그로 인해 이러한 조서를 내렸다.
晉 武帝가 雉頭裘를 불태워 검소함을 보이다晉 武帝가 雉頭裘를 불태워 검소함을 보이다
[] 나라가 杜預鎭南大將軍 都督荊州諸軍事로 삼았다. 鉅平侯 羊祜하였다.
[] 羊祜가 병이 위독해지자 杜預를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고 하니, 晉主(司馬炎)가 몹시 애달프게 곡을 하였다. 양호가 유언을 남겨
羊祜가 병중에 杜預를 천거하다羊祜가 병중에 杜預를 천거하다
晉主가 말하기를 “양호가 진실로 몇 년간 사양을 하였는데, 몸이 죽어서도 사양함을 보존하였으니,注+〈“身沒讓存”은〉 자신이 죽으면서 유언을 남겨 의 인장을 사양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지금 다시 본래 封爵을 회복시켜서 그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점을 빛나게 하라.”라고 하고, 諡號이라 하였다.注+羊祜는 본래 鉅平侯에 봉해졌다.
南州(荊州) 백성들이 양호가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장을 열지 않고, 골목에서 곡을 하였으며,注+南州荊州를 말한다. 나라의 변방을 지키던 將士들도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양호는 峴山을 유람하기를 좋아하였는데,注+胡典이니, 峴山襄陽城 남쪽 10리에 있다. 襄陽 사람들이 그곳에 비석을 세우고 사당을 건립하고는 歲時에 제사를 올리니, 비석을 바라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으므로, 그로 인하여 이 비를 ‘墮淚碑’라고 하였다.
두예가 진영에 이르러 정예병을 선발하여 나라의 西陵督張政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장정은 나라의 이름난 장수인지라 패배를 부끄러워하여 그 사실을 吳主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두예가 이들을 이간질하려고 晉主에게 표문을 올려 포로로 잡은 사람들을 돌려보내게 하니, 吳主(孫皓)가 과연 장정을 소환하고 留憲을 보내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 나라 司空 何曾하였다.
[] 何曾이 후하게 자신을 봉양한 것이 임금보다 더하였는데, 司隷 劉毅가 자주 탄핵을 하였지만, 晉主가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가 하자 博士 秦秀가 논의하기를 “하증이 교만하고 사치한 것이 도를 지나쳤으며 이름이 九域을 덮었으니,注+九域九州 지역이다. 만약 살아 있을 때 자신의 마음대로 하고 죽어서도 아무런 폄론이 없다면 王公이나 貴人이 다시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삼가 諡法을 살펴보건대 이름과 실제가 부합하지 않는 것을 ‘’라 하고, 어지러움을 틈타 이익을 취하고 방자한 행동을 하는 것을 ‘’라 하니, 마땅히 諡號繆醜公이라고 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晉主詔策으로 ‘’라는 시호를 내렸다.注+策諡”는 博士의 논의를 쓰지 않고 詔策으로 諡號를 하사한 것이다.
[] 나라 淸泉侯 傅玄하였다.
[] 傅玄은 성격이 엄격하고 급하여 司隷가 되어 매번 탄핵하는 상주문을 올릴 때에 혹 해가 저물고 나면 白簡(관원을 탄핵하는 상주문)을 받들고 의관을 정제하고서 초조해하며 잠을 자지 않고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注+은 간단한 문서이다. 옛날에는 을 잡고 있다가 일이 있으면 기록하였기 때문에 늘 붓을 꽂고 있었다. 革帶이니, 옛날의 鞶帶이다.
이로 말미암아 귀족들이 두려워하니, 臺閣에 새로운 기풍이 생겨났다. 한 뒤에 시호를 이라 하였다.注+周禮≫ 〈地官 師氏〉에 “나라의 貴遊子弟가 그곳에서 배운다.”라고 하였는데, 그 에 “貴遊子弟王公子弟이고, 는 관직이 없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부현은 尙書左丞 崔洪과 잘 지냈는데, 최홍 역시 청렴하고 강직하여 사람의 허물을 면전에서 나무라기를 좋아하고 물러나서는 뒷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존중하였다.


역주
역주1 秋晉大水螟 :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螟蟲을 기록한 것이 다섯 번인데(漢 武帝 元光 5년(B.C.130)에 자세하다.), 이를 제외하고는 기록한 것이 없으니, 이는 史官이 빠뜨린 것이다.[終綱目 書螟五(詳漢武帝元光五年) 舍是無書者矣 史失之也]” ≪書法≫
역주2 左民曹과 度支曹 : 左民曹는 三國時代 魏나라의 民曹를 바꾸어 설치한 것인데 尙書가 長官이었다. 修繕功作, 鹽池, 園苑 등 土木工程을 담당하였다. 度支曹는 魏‧晉 때에 처음 설치하였는데, 全國의 財政 收支를 담당하였다. 長官은 度支尙書였다.
역주3 吳殺其中書令張尙 : “甲申年(264)부터 이해(278)까지 ≪資治通鑑綱目≫에서 ‘殺’이라고 기록한 것이 모두 열한 번인데, 전부 無罪한 사람을 죽인 것으로, 〈그중에〉 孫皓가 열 번을 차지한다. 손호의 음탕하고 포악함이 이와 같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自甲申至是 綱目凡十一書殺 皆殺無罪也 而孫皓居其十 皓之淫虐如此 不亡得乎]” ≪書法≫
역주4 南城侯의……하니 : 羊祜(221~278)는 晉나라 泰山 南城 사람으로, 晉 武帝가 양호에게 태산 남쪽의 5개 縣을 떼어 주어 南城侯에 封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양호가 죽은 뒤에 武帝는 侍中과 太傅를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 征南大將軍 南城侯로 장례를 치르게 하였는데, 양호의 從弟 羊琇가 양호의 유언을 전하여 南城侯의 인장을 靈柩에 넣지 말게 하였다고 하였으나 무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發引을 하고 나서 무제는 大司馬門에서 상여를 전송하였는데 양호의 아내가 侯爵으로 斂襲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양호에 대해 “몸은 죽어도 사양함을 보존하였다.[身沒讓存]”라고 칭찬하고 본래 封爵을 회복시켜서 높고 아름다운 점을 빛나게 하라고 하였다.(≪晉書≫ 〈羊祜列傳〉)
역주5 (主)[王] : 저본에는 ‘主’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9, 上海古籍出版社)에 의거하여 ‘王’으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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