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目] 송宋나라가 정월 초하루에 조하朝賀의 의식을 거행할 눈이 태재太宰유의공劉義恭의 옷에 떨어져서 육각형 꽃잎처럼 쌓였다. 유의공이 아뢰어 길조라고 하니 송주宋主(효무제孝武帝)가 기뻐하였다.
유의공은 송주宋主가 시기하며 포악했기 때문에 자신이 포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늘 말을 겸손히 하고 안색을 공손히 하여 뜻을 굽혀 공경히 받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송주宋主의 시대 동안에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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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여름에 송宋나라가 명당明堂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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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명당明堂을 짓기 시작하여 곧바로 대전大殿을 병기丙己(남쪽 중앙)의 터에 지었다. 규모가 태묘太廟와 같았는데 오직 12칸으로 한 것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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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송宋나라 옹주자사雍州刺史해릉왕海陵王유휴무劉休茂가 양양襄陽에서 반란했다가 그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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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옹주자사雍州刺史해릉왕海陵王유휴무劉休茂는注+① 劉休茂는 宋主(孝武帝)의 아우이다. 나이가 17세였으므로 사마司馬유심지庾深之가 해릉왕부海陵王府의 일을 대행하였다. 유휴무가 독단으로 처결하려 하였으나 유심지와 주수主帥가注+② 主帥는 典籤이고, 또 齋 안에도 主帥가 있는데,
라고 한다. 늘 금지시켰고, 측근 장백초張伯超는 총애를 받았으나 악행이 많아서 주수主帥가 누차 질책하였다.
장백초는 유휴무를 설득하여 행사行事(유심지)와注+③ 行事는 庾深之를 말하니 江左(南朝)에서는 대부분 長史․司馬로서 府․州의 일을 대행하는 이를 行事라고 하였다.주수主帥를 죽이고 군사를 일으키자고 하였는데 유휴무가 그 말을 따랐다. 그리하여 전첨典籖양경楊慶을 죽이고 군사들을 징집하여 아기牙旗(대장기)를 세우고 격문檄文을 급히 돌리자 박사博士순선荀詵이 간언하였는데 그를 죽였다.
유휴무가 성을 나가서 군영을 순행하자注+④ 行은 순찰함이다.참군參軍심창지沈暢之 등이 군사를 이끌어 성문을 막고 대항하였다. 유휴무는 말을 달려 돌아와 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참군參軍윤현경尹玄慶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서 유휴무를 공격하여 생포하고 참수하였다. 유휴무의 모친과 아내는 모두 자살하고 그의 당여들은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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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송주宋主(효무제孝武帝)는 즉위即位한 이래로 여러 아우들을 내쫓았다. 광릉廣陵에서 승리하고 나서 더욱 그 조항을 엄격하게 하려 하였다.
을注+① 周 成王이 管叔을 주살하고 蔡叔을 가둔 뒤에 叔虞를 唐에 봉하고, 康叔을 衛에 봉하여 周 王室의 울타리로 삼았다. 높이 행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양양襄陽이 평정되자 태재太宰유의공劉義恭은 송주宋主의 뜻에 영합하여 다시 여러 왕들을 제재하여 변방의 주州를 맡지 못하게 하고 무기와 갑옷을 모두 서울로 수송하게 하고 빈객들의 교유를 금지하도록 청하였는데, 심회문이 굳게 간언하여 마침내 중지되었다.
송주宋主는 사냥과 유람을 하는 데 절도가 없었다. 일찍이 성을 나갔다가 밤에 돌아와서 성문을 열라고 명하자 성에 남아서 지키고 있던 시중侍中사장謝莊이 계신棨信(나무 부절)이 혹은 거짓일까 여겨서 고집하여 명을 받들지 않고 송주宋主가 쓴 칙서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열었다.注+② 棨는 음이 啓이니, 전한다는 뜻이니, 나무를 깎아 부절을 만든 것이다. “墨勅”은 손수 쓴 칙서이다.
의 字이다. 본받으려 하는 것인가?”라고 하니, 사장이 대답하기를 “신臣은 들으니 ‘왕자王者는 제사祭祀하고 사냥하고 유람할 적에 출입出入에 절도가 있다.’라고 합니다. 지금 폐하陛下께서는 새벽에 나가셨다가 밤에 돌아오시니 신은 못된 무리들이 망령되게 명령을 속일까 두렵습니다. 이 때문에 폐하의 친필을 기다려 보고서야 감히 문을 열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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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 9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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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송宋나라 사공司空심경지沈慶之가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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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심경지沈慶之는 글자를 알지 못하고 집이 평소 부유하여 가지고 있는 재산이 만금萬金이었다. 어느 날 저녁에 누호婁湖로注+① 婁湖는 新林과 東府 사이에 있을 것이다. 이사하여 살던 집을 관청에 헌납하였다.
조하朝賀를 하는 경우가 아니면 문을 나가지 않았고 수레와 말도 간소하여 따르는 사람은 불과 3, 5명이었다. 그리하여 심경지를 만나는 사람들이 그가 삼공三公인지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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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겨울 10월에 송宋나라가 신안왕新安王유자란劉子鸞을 남서주자사南徐州刺史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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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유자란劉子鸞의 모친인 은숙의殷淑儀의注+① 淑儀는 後宮의 女宮이다. 총애가 후궁後宮에 진동하니, 유자란의 총애도 여러 아들 중에서 으뜸이었다. 무릇 상上(효무제孝武帝)의 눈에 든 물건 중에 유자란의 관부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예전에 파릉왕巴陵王유휴약劉休若이 북서주자사北徐州刺史가 되어 장대張岱를 참군參軍을 삼아 왕부王府와 주州․국國의 일을 대리代理하게 하였다.注+② 劉休若은 宋主(孝武帝)의 아우이고, 張岱는 張永의 아우이다. 여러 어린 왕들이 州에 가서 대부분 府와 州의 일을 대행하는 行事를 두었는데, 여기서 〈行府州國事에서 國은〉 장대에게 명하여 巴陵國의 일을 아울러 행하게 한 것이다. 뒤에 장대가 두루 임해왕臨海王, 예장왕豫章王, 진안왕晉安王의 3부府의 〈행사行事의 직책을〉 역임하면서 왕들의 전첨典籖․주수主帥와 일을 함께하니 일이 거행되면서도 서로의 감정이 상하지 않았다.注+③ ≪資治通鑑≫에는 “뒤에 臨海王 劉子頊을 廣州刺史, 豫章王 劉子尙을 揚州刺史, 晉安王 劉子勛을 南兗州刺史로 삼았는데, 張岱는 3府(廣州府, 揚州府, 南兗州府)의
’라고 하였다. 내가 정치를 하는 데에 바르고 공평하며 남을 대하기를 예법으로 하니 후회하거나 애석할 일이 나에게 미칠 길이 없다. 개인의 총명과 어리석음, 장점과 단점은 또한 재능의 다소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와서 유자란은 다시 장대를 별가别駕로 삼아서 일을 대리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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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12월에 송宋나라가 백성에게 제명制命을 내려 해마다 1호户당 포布 4필匹을 납부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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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송宋나라는 사족士族들이 잡호雜戶와 혼인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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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령詔令을 내려 사족士族 중에 잡호雜戶와 혼인한注+① “雜婚”은 工人․商人의 雜戶와 혼인함을 말한다. 자를 모두 무관武官으로 임명하니 사족들이 대부분 부역을 피해 도망하였다. 마침내 엄격하게 규정을 만들어서 체포해 즉시 참수하도록 하니 이따금 도망쳐서 호수나 산에 숨어서 도적盗賊이 되었다.注+② 물가의 사람들은 호수로 들어가고 육지의 사람들은 산에 의지하니, 모두 험준함에 의지하여 盜賊이 된 것이다.심회문沈懐文이 간언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역주
역주1春正月雪 :
“무릇 ‘雪(눈)’을 기록한 것은 제때에 맞지 않음을 기록한 것이다. ‘正月雪’을 기록한 적이 없었는데 여기에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아첨함을 나무란 것이다. 이때에 눈이 유의공의 옷에 쌓여 육각형 꽃잎처럼 되고 유의공이 아뢰어 길조라고 하자 宋主(孝武帝)가 기뻐하였으므로 기록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을 마칠 때까지 ‘正月雪’을 기록한 것은 1번뿐이다.[凡書雪 書不時也 未有書正月雪者 此其書 何 譏好諛也 於是雪集義恭衣爲六出 奏以爲瑞 宋主悅之 故書 終綱目書正月雪一而已]” ≪書法≫
역주3漢 明帝는……하였으니 :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9권 하 後漢 明帝 永平 13년(70) 조에 明帝가 여러 皇子들을 봉하였는데, 그 封地가 光武帝의 아들인 楚王 劉英과 淮陽王 劉延의 봉지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였다. 馬后가 이를 묻자 명제가 내 아들을 어찌 先帝(光武帝)의 아드님들과 똑같이 할 수 있겠는가. 해마다 2천만 錢을 주면 충분하다.” 하였다.
역주4管叔과……일 :
周 武王이 죽고 아들 成王이 즉위하였으나, 성왕이 어리므로 周公이 그를 도와 攝政을 하자, 주공의 아우인 管叔․蔡叔이 紂의 아들 武庚과 함께 모반을 하고 또 나라에 유언비어를 퍼뜨려 “周公이 成王에게 불리할 것이다.”라고 하므로, 周公이 그들을 정벌하러 동쪽으로 나가 2년 동안 있으면서 그들을 모두 베어 죽이고 인심을 진정시킨 사실을 말한다.(≪史記≫ 〈魯周公世家〉)
역주5<주석명/> :
叔虞를……일 : 周 成王이 어릴 때 아우 叔虞와 놀다가, 오동나무 잎을 잘라 珪의 모양을 만들어 숙우에게 주면서 “너를 封한다.”라고 했는데 이를 전해들은 周公이 王에게는 戲言이 있을 수 없다며 실제로 숙우를 堯임금의 옛터인 唐 지역에 봉하였으므로 唐叔虞라고 하고 康叔은 周 武王의 아우로서 이름은 封이다. 처음 康에 봉하였으므로 康叔이라고 한다. 周公이 武庚을 베고 나서 殷나라의 遺民을 강숙에게 맡겨서 衛君으로 삼으니, 강숙이 능히 그 백성을 화합시켰다.(≪史記≫ 〈晉世家〉․〈衛康叔世家〉)
역주6郅惲 :
後漢 光武帝가 사냥을 나갔다가 밤이 되어서야 성문에 도착했는데, 上東門監으로 있던 질운이 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자 광무제는 마침내 돌아서 中東門으로 들어왔다. 다음 날 질운이 글을 올려 간언하자, 광무제가 그의 말을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이고 상으로 布 100필을 하사하였다.(≪後漢書≫ 권29 〈郅惲列傳〉)
역주7諮議參軍 :
諮議參軍事라고도 한다. 西晉 公府에 모두 두었으며, 軍事의 모의와 자문을 담당하였으며, 지위는 參軍의 위에 있었다. 南朝와 北魏, 北齊에도 설치되었다.
역주8한 마음으로……있다 :
≪晏子春秋≫ 권4 〈問下〉에 “梁邱據가 晏子에게 묻기를, ‘그대는 세 임금을 섬겼는데 임금이 뜻이 똑같지 않은데도 그대는 모두 따랐습니다. 어진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 임금을 섬겼습니까?’ 하니, ‘한 마음으로는 백 명의 임금을 섬길 수 있으나, 백 가지 마음으로는 한 임금도 섬길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梁邱據問晏子曰 子事三君 君不同心而子俱從焉 仁人故多君乎 對曰 一心可以事百君 百心不可事一君]”라고 하였다.
역주9宋制民歲輸布户四匹 :
“重斂(무겁게 징수함)을 나무란 것이다. 晉나라에는 ‘民稅米口五石(백성에게 戶口마다 쌀 5石을 조세로 내게 하였다.)’이라고 기록하였고(晉 孝武帝 太元 8년(272)에 자세하다.) 宋나라에서는 ‘民輸布戸四匹’라고 기록하였으니(이해(461)) 모두 나무란 것이다.[譏重歛也 晉書民稅米口五石(詳晉孝武帝太元八年) 宋書民輸布戸四匹(是年) 皆譏之也]” ≪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