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綱] 3월에 해 가운데에 검은 점이 생겼다.注+① 〈“有黑子”는〉 陰이 陽을 침범하여 양을 갉아먹은 것이다. 이때 王敦의 교만과 패악이 더욱 심해졌으므로, 하늘에 象(징조)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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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저작좌랑著作佐郎注+① ≪晉書≫ 〈職官志〉에 “著作郞 한 사람을 大著作이라 이르니, 오로지 史官의 책임을 맡았다. 또 佐著作郞 8명을 두었다.” 하였다.곽박郭璞이 상소上疏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음陰과 양陽이 잘못된 것은 모두 번거로운 형벌 때문에 생긴 것이니, 하늘이 사면을 너무 자주하기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산子産이 정鼎에 형법의 조문을 새겨 주조한 것[형정刑鼎]은 좋은 정사政事가 아닌 줄을 알면서도 이것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모름지기 병폐를 구원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注+② ≪春秋左氏傳≫에 “鄭나라가 鼎에 형법의 조문을 새겨 주조하자, 叔向이 子産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나라가 장차 망하려 할 때는 반드시 제도가 많다.’ 하니, 子産이 답장에 이르기를 ‘나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다.’ 했다.” 하였다. 須는 ‘하려 하다’의 뜻이다. 지금 마땅히 사면해야 하는 것 또한 이치가 이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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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후조後趙가 유주幽州와 기주冀州, 병주并州를 함락시키니, 무군장군撫軍將軍유주자사幽州刺史단필제段匹磾가 이 싸움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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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후조後趙가 석호石虎로 하여금 염차厭次에서注+① 厭次는 본래 前漢 때 平原郡의 富平縣이었는데, 後漢 때 明帝가 厭次라고 이름을 바꾸었고, 晉나라 때에 나누어 樂陵(악릉)에 소속시켜 治所로 삼았다.단필제段匹磾를 공격하게 하고 공장孔萇으로 하여금 단필제의 관내에 여러 성城을 공격하게 하여 모두 함락시키니, 단문앙段文鴦이 나와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사로잡혀서도 적을 꾸짖기를 그치지 않았다.
단필제가 한 필의 말을 타고 조정으로 돌아오고자 하였는데, 소속邵續의 아우 소계邵洎(소계)가 병력을 무장하고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다시 대사臺使를注+② 臺使는 晉나라 조정에서 보낸 使者이다. 붙잡아 석호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단필제가 정색을 하고 소계를 꾸짖기를 “경卿이 형(소속)의 뜻을 따르지 않고 나를 핍박하여 조정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지나친데, 게다가 천자의 사자使者를 붙잡고자 하니, 내 비록 오랑캐 사람이나 일찍이 이런 일은 들어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소계가 소집邵緝, 소축邵竺 등과 함께 나가 후조後趙에 항복하였다. 단필제가 석호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진晉나라의 은혜를 받아서 너희들을 멸망시키는데 뜻을 두고 있었는데 불행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에게 공경의 예를 갖출 수가 없다.” 하였다.
그러나 석호는 평소 단필제와 의형제義兄弟를 맺었으므로 즉시 일어나 그에게 절하였다. 이에 유주幽州, 기주冀州, 병주并州 세 주가 모두 후조後趙에 편입되었다.
단필제는 석륵石勒에게 예를 갖추지 않고 항상 조복朝服을 입고 진晉나라의 부절符節을 잡고 지냈는데, 오랜 뒤에 단문앙段文鴦, 소속邵續과 함께 모두 살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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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여름 5월에 양주揚州의 노복奴僕들을 해방시켜 정역征役에 대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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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령詔令을 내려서 중주中州(중원)의 양민良民으로 전란을 만나 피하는 도중에 양주揚州의 여러 군郡에서 노복이 된 자들을 해방시켜 〈양민으로 삼아〉 정역征役에 충당하게 하니, 이는 조협刁協의 계책이었다. 이 때문에
[강綱] 종남산終南山이 무너졌다.注+① 終南山은 長安의 南山이다. 이때 劉曜가 關中을 점거하고 있었으니, 나라가 멸망할 조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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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 7월에 대연戴淵을 도독사都督司․예제군사豫諸軍事로 삼고, 유외劉隗를 도독청都督青․서제군사徐諸軍事로 삼고, 왕도王導를 사공司空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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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대연戴淵을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삼아 6주州를注+① 6州는 司州, 兗州, 豫州, 幷州, 雍州, 冀州이다. 감독하면서 합비合肥에 진주하게 하고, 유외劉隗를 진북장군鎮北將軍으로 삼아 4주州를注+② 4州는 靑州, 徐州, 幽州, 平州이다. 감독하면서 회음淮陰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모두 부절符節을 빌려주어 군대를 통솔하게 하니, 명목상으로는 오랑캐를 토벌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왕돈王敦의 반역을 대비한 것이었다.注+③ 符節은 바로 大將이 가지고 있는 것이니, 戴淵 등은 大將이 아니었으므로 이것을 빌려주어 그들의 권위를 무겁게 한 것이다.
유외가 비록 밖에 있었으나, 조정의 중요한 정사와 사대부들을 등용하고 물리치는 일에 대해서는 황제(진晉원제元帝)가 모두 그와 은밀히 상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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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왕돈王敦이 유외劉隗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대와 함께 왕실王室을 위하여 힘을 다해서 함께 해내海内를 안정시키고자 한다.” 하였다.
이에 유외가 답하기를 “물고기는 강호江湖에서 서로 잊고 사람은 도술道術에서 서로 잊으니,注+① ≪莊子≫ 〈大宗師〉에 “물고기는 江湖에서 서로 잊고, 사람은 道術에서 서로 잊는다.” 하였는데, 郭象의 註에 “〈물고기는〉 깊은 물에서 헤엄치면 각자 충분히 서로 잊을 수 있고, 〈사람은〉 道術이 가슴속에 충만하면 편벽된 사랑이 끊어진다. 그러므로 서로 능히 잊고 〈유유자적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사지四肢의 힘을 다하여 충정忠貞을 바치는 것이 나의 뜻이다.” 하니, 왕돈이 노여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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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황제는 왕도王導를 사공司空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았으나, 왕돈王敦 때문에 실제로는 그를 소원히 하고 꺼렸다.
어사중승御史中丞주숭周嵩이 상소上疏하여 아뢰기를 “고루한 신하의 말을 따라 오랜 공덕이 있는 사람을 추방해서 옛날의 은혜를 훼손하고 장래의 환란을 불러서는 안 됩니다.”注+① 전에는 王導를 친애하고 의지하였는데 지금 소원히 하고 꺼리니, 이는 지나간 은혜를 훼손하는 것이요, 왕도가 혹시라도 스스로 의심해서 밖으로 王敦과 함께하면 이는 장래의 환란을 부르는 것이다. 하니, 황제가 크게 감동하고 깨달았다. 왕도가 이 때문에 온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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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8월에 상산常山이注+① 常山은 常山郡 上曲陽縣 서북쪽에 있으니, 이 지역은 이때 石勒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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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9월에 예주자사豫州刺史조적祖逖이 졸卒하니, 그 아우 조약祖約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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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적祖逖은 대연戴淵이 오吳 지역의 인사로서注+① 戴淵은 廣陵 사람이니, 廣陵은 옛 吳王 劉濞의 도읍이었다. 비록 재주와 명망이 있으나 원대한 지취志趣와 식견이 없다고 여겼고, 또 자기가 이미 온갖 고난을 헤치고서 하남河南 지역을 수복하였는데 대연이 편안히 있다가 하루아침에 와서 군대를 통솔한다 하여 내심 앙앙불락怏怏不樂하였다.
게다가 또 왕돈王敦이 유외劉隗, 조협刁協과 틈이 있어서 장차 내란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큰 공功이 이루어지지 못할 줄을 알고 격분한 나머지 병이 나서 옹구雍丘에서 졸卒하였다.
예주豫州의 선비와 여자들은 부모를 잃은 듯이 슬퍼하였고, 초譙와 양梁 지역에서는 모두 그를 위하여注+②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사당을 세웠다. 왕돈王敦이 이로부터 더욱 거리끼는 바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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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약祖約은 아랫사람들을 어루만지고 통솔하는 재주가 없어서 사졸士卒들이 그를 따르지 않았다. 범양范陽 사람 이산李産이 피난하여 조적祖逖에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조약의 지취志趣가 상도常度와 다른 것을 보고는 마침내 자제子弟 10여 명을 거느리고서 샛길로 향리鄉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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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후조後趙가 이양李陽을 도위都尉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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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후조왕後趙王석륵石勒이 무향武鄉의 명망이 높은 노인들을 모두 불러 양국襄國(후조後趙의 도읍)으로 와서 즐겁게 술을 마시게 하였다. 석륵이 미천할 때에 이양李陽과 이웃에 살면서 마麻를 담가 마전摩湔하는注+① 漚는 於候의 切이니, 오래도록 물에 담가 세척하는 것이다. 못을 다투다가 자주 서로 주먹다짐을 하곤 하였는데, 이양이 이 때문에 홀로 감히 오지 못하고 있었다.
석륵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막 천하를 두루 포용하니, 어찌 한 필부匹夫를 원수로 여기겠는가.” 하고는, 급히 불러 함께 술을 마시고 이양의 팔뚝을 잡아당기며 말하기를 “내 지난날에 경卿의 노련한 주먹을 실컷 맛보았고, 경卿 또한 나의 독한 손맛을 많이 보았다.” 하였다. 이어서 이양에게 도위都尉를 제수하고, 무향武鄉을
[목目] 석륵石勒은 백성들이 막 생업을 회복한 까닭에 비축된 물자가 풍족하지 못하다 하여, 이에 술 빚는 것을 금하고 교사郊祀와 종묘宗廟의 제사에 모두 단술을注+① 하룻밤 동안에 빚어 익히는 술을 醴(단술)라고 한다. 사용하니, 이렇게 한 지 수년 만에 더 이상 술을 빚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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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모용외慕容廆를 거기장군車騎將軍평주목平州牧요동공遼東公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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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령詔令을 내려서 모용외慕容廆에게 제명制命을 받들어 관직을 제수하는 것을 허락하니, 모용외가 이에 관속들을 골고루 배치하고 아들 모용황慕容皝(모용황)을 세워 세자世子로 삼았다. 동횡東横을注+① 橫은 黌(학교)과 같으니, 學舍이다. 만들어 모용황과 여러 생도들로 하여금 함께 수업하게 하였으며, 모용외도 여가가 생기면 친히 가서 청강聽講하였다.
모용황은 용맹스럽고 굳세며 권모와 지략이 많고 경학經學을 좋아하니, 국인國人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모용외가 모용한慕容翰을 옮겨 요동遼東에 진주시키고 모용인慕容仁을 옮겨 평곽平郭에注+② 平郭縣은 漢나라 때에는 遼東郡에 속하였는데, 晉나라 때에 없앴다. 진주시켰는데, 모용한은 백성과 오랑캐를 어루만져 편히 살게 해서 위엄과 은혜가 크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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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대代나라가 그 군주 탁발울률拓跋鬱律(탁발울률)을 시해하니, 아들 탁발하녹拓跋賀傉(탁발하녹)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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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탁발의타拓跋猗㐌(탁발의타)의 아내 유씨惟氏가 대왕代王탁발울률拓跋鬱律의 강성함을 시기하였는데, 자기의 아들에게 불리할까 염려해서 마침내 탁발울률을 시해하고 자기의 아들 탁발하녹拓跋賀傉을注+① 傉은 內沃의 切이다. 세웠다.
탁발울률의 아들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이 이때 나이가 어려서 포대기 안에 있었다. 그 어머니 왕씨王氏가 탁발십익건을 바지 속에 숨기고 축원하기를 “하늘이 만약 너를 살려주려 한다면, 네가 울지 않아야 한다.” 하였는데, 아이가 오랫동안 울지 않아서 마침내 죽음을 면하였다.
역주
역주1日中 有黑子 :
“漢나라 景帝 篇에 ‘日赤(해가 붉었다.)’이라고 썼고 또 ‘日如紫(해가 자주색과 같다.)’라고 썼었는데, 이때 ‘해 가운데 검은 점이 생겼다.’라고 썼으니, 모두 큰 이변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각각 한 번씩만 썼다.[漢景之篇 書日赤矣 又書日如紫矣 於是書日中有黒子 皆大異也 終綱目 各一書而已矣]” ≪書法≫
역주2撫軍將軍幽州刺史段匹磾死之 :
“‘死之(죽었다)’라고 쓴 것은 그의 충절을 인정한 것이다. 앞에서는 ‘石勒을 토벌했다.’라고 썼고, 여기서는 ‘死之’라고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은 段氏에 대하여 인정하여 취한 바가 있다.[書死之 予節也 前書討石勒 此書死之 綱目於段氏有取焉]” ≪書法≫ “段匹磾가 劉琨을 살해하여 마침내 인심이 따르지 않게 되어 끝내 羯賊인 石氏에게 포로가 되었으니, 인정하여 취할 만한 것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단필제는 본래 오랑캐 사람으로 晉나라 황실에 충성을 다하고 죽으면서도 지키던 충절을 바꾸지 않았으니, 이 또한 군자가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 그러므로 충절을 온전히 했다고 인정하여 그 관직을 갖추어 쓴 것이다.[匹磾戕害劉琨 遂至人心不附 迄爲羯賊所虜 若無足取 然磾本夷人 竭誠晉室 死不易守 此亦君子之所嘉者 故予以全節而具其官]” ≪發明≫
역주3여러 사람들이……원망하였다 :
≪新譯資治通鑑≫(張大可 等 注釋, 三民書局, 2017)에서는 ‘여러 사람들’을 관료와 귀족 등 노복을 가지고 있던 자들로 보았다.
역주4常山崩 :
“晉나라가 남쪽으로 강을 건너와 江東에 나라를 세웠으니, 常山은 바로 동남쪽의 鎮山이다. 그런데 까닭 없이 무너졌으니, 그 변고가 크다. 이해 봄에 해에 검은 점이 생겼고 이해 여름에 終南山이 무너졌고 이제 또다시 이 災變이 있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과연 왕돈이 모반하여 난을 일으킬 조짐이 있어서 晉나라가 거의 보존되지 못하게 되었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이것을 자세히 쓴 것은 人君에게 조심하고 두려워해서 경계와 두려움을 알지 않으면 안 됨을 경계한 것이다.[晉自南渡 立國江左 常山乃東南之鎮嶽 而無故崩毁 其變大矣 是春 日有黑子 是夏 終南山崩 今又有此變異 未幾 果有逆亂之萌 晉幾不保 綱目備而書之 所以戒人君競競業業 不可不知警懼也歟]” ≪發明≫
역주5漢 高祖의 豐沛 :
豐沛는 沛縣의 豐邑으로, 漢나라를 개국한 劉邦이 패현 풍읍의 陽里 사람이었으므로 帝王의 고향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역주6代弑其君鬱律子賀傉立 :
“아들은 시해한 자의 아들이다. 이때 시해한 자에게 분명한 이름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쓰지 않았는가. 생략한 것이다. 拓跋六脩와 拓跋寔君도 〈父王을 시해한 것은 동일한데〉 생략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탁발육수와 탁발식군은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시해하였으니 큰 죄악이다. 이 경우와 같이 생략한다면 天理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子 弑者之子也 於是 弑者有主名矣 則曷爲不書 略之也 六脩寔君 其不略之 何 六脩寔君 以子弑父 大惡也 此而略之 天理滅矣]” ≪書法≫ 탁발육수와 탁발식군이 부왕을 시해한 사건은 晉 愍帝 建興 4년(316)과 晉 孝武帝 太元 원년(376)에 각각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