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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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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5권 하
蜀漢 後主 延熙 2년(239)~蜀漢 後主 延熙 15년(252)
己未年(239)
二年이라
魏景初三年이요 吳赤烏二年이라
春正月
魏司馬懿 至洛陽하여 與爽受遺輔政하고 魏主叡卒注+陳壽曰 “年三十六.” 裴松之曰 “按魏武以建安九年八月定鄴, 文帝始納甄后, 明帝應以十年生, 計至此年正月, 整三十四年耳. 時改正朔, 以故年十二月爲今年正月, 可彊名三十五年, 不得三十六也.”하니 太子芳立
하다
司馬懿 至洛陽하여 入見한대 魏主叡 執其手曰 吾以後事 屬君하노니
君與曹爽으로 輔小子하라 死乃可忍이로다 吾忍死待君하여 得相見하니 無恨矣라하고
乃召二王示懿注+二王, 齊‧秦二王.하고 別指齊王芳曰 此是也 君諦視之하여 勿誤也하라 又敎芳前抱懿項하니 懿頓首流涕러라
於是 芳年八歲 卽日 立爲太子하다 叡尋卒하니
芳嗣位하여 尊皇后爲皇太后하고 爽懿竝加侍中都督中外諸軍錄尙書事注+旣督中外諸軍, 又錄尙書事, 則文武大權盡歸之矣.하고 諸所興作 皆以遺詔罷之注+曰以者, 非遺詔眞有此指也.하다
○明帝沈毅明敏하여 任心而行하고 簡功能하고 屏浮僞하며 行師動衆하고 論決大事 謀臣將相 咸服之하다
左右小臣이라도 官簿性行 名跡所履 及其父兄子弟 一經耳目 終不遺忘注+忘, 巫放切.이러라
孫盛曰 魏明帝 天姿秀出하고 少言好斷하다 諸公受遺輔導者 皆以方任處之하여 政自己出하다
優禮大臣하여 雖犯顔極諫이나 無所摧戮하니 其君人之量 偉矣注+方任, 方面之任也. 謂使曹休鎭淮南, 曹眞鎭關中, 司馬懿屯宛也. 偉, 雄也, 大也.
然不思建德垂風하여 以固維城之基하고 至使大權偏據하고 社稷無衛하니 悲夫注+詩曰 “宗子維城.” 此言帝猜忌宗室, 以亡魏.로다
二月 魏以司馬懿爲太傅하고 何晏爲尙書하다
曹爽司馬懿 各領兵三千人하여 更宿殿內하니 爽以懿年位素高라하여 常父事之하여 每事咨訪하고 不敢專行이러라
畢軌鄧颺李勝何晏丁謐 皆有才名이로되 而急於富貴하여 趨時附勢注+畢, 姓也. 晏, 進之孫. 謐, 斐之子也. 謐, 音密.하니
明帝惡其浮華하여 抑而不用호되 曹爽素與親善이러니 及輔政 驟加引擢하여 以爲腹心하니
晏等 爲爽謀曰 重權 不可委之於人이니 可白天子轉懿爲太傅하니 外以名號尊之하고
內欲令尙書奏事 先來由己하여 得制其輕重이라한대 爽從之하다
以懿爲太傅하고 自以其弟羲訓等으로 皆爲將軍侍從하여 出入禁闥注+從, 才用切.하고
徙吏部尙書盧毓爲僕射하여 而以晏代之하고 以颺謐爲尙書하고 軌爲司隷하니
晏等 依勢用事하여 附會者 升進하고 違忤者 罷退하니 內外望風하여 莫敢忤旨러라
傅嘏謂羲曰 何平叔 外靜內躁하고 銛巧好利하니 必先惑子兄弟 仁人將遠하고 而朝政廢矣注+平叔, 晏字. 銛, 思㢘切, 利也.리라하다
晏等 遂因事免嘏官하고 孫禮亮直不撓 爽出之하여 爲揚州刺史하다
以蔣琬爲大司馬하다
東曹掾楊戲 素簡略이라 琬與言論 戲時不應하니 或謂琬曰 戲慢公矣로라
琬曰 人心不同 各如其面注+左傳, 鄭子産之言.하니 面從後言 古人所誡注+書 “汝無面從, 退有後言.”
戲欲賛吾是邪 則非其本心이요 欲反吾言 則顯吾之非 是以黙然耳라하니라
督農楊敏嘗毁琬曰 作事憒憒하여 誠不及前人注+督農, 猶魏吳之典農也. 憒憒, 心亂也.이로다
主者 請推治之한대 琬曰 吾實不及前人하니 無可推니라
主者 請問憒憒之狀한대 琬曰 苟其不如하면 則事不理하고 事不理하면 則憒憒矣라하니라
後敏坐事繫獄하니 衆猶懼其必死로대 琬心無適莫이라 敏得免重罪하다
冬十月 吳遣將軍呂岱屯武昌하다
岱時年八十이라 躬親王事하여 與陸遜으로 共領荊州文書하여 同心協規하고 有善相讓하니 南土稱之하더라
吳將周胤有罪하여 廢徙廬陵하다
吳都鄕侯周胤 將兵千人하고 屯公安이러니 以罪廢徙하니 諸葛瑾步騭 爲之請注+爲, 去聲, 下同.한대
吳主權曰 胤年少無功호되 爵以侯將注+謂旣受侯爵, 而又將兵也. 蓋念公瑾故也어늘
而胤恃此하여 酗淫無悛하니 且欲苦之하여 使自知耳注+酗, 香苟切, 醉怒也.
以公瑾之子 而二君居間하니 苟使能改 亦何患乎注+二君, 指瑾‧隲也.
瑜兄子偏將軍峻이어늘 全琮 請使峻子護 領其兵한대
權曰 聞護性行危險하니 用之適爲作禍耳 孤念公瑾 豈有已哉리오하더라
十二月 魏復以建寅之月爲正하다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5권 하
蜀漢 後主 延熙 2년(239)~蜀漢 後主 延熙 15년(252)
己未年(239)
[] 나라(蜀漢) 後主 延熙 2년이다.
[] 나라 明帝 曹叡 景初 3년이고, 나라 大帝 孫權 赤烏 2년이다.
[] 봄 정월에 나라 司馬懿洛陽에 이르러서 曹爽과 함께 遺詔를 받아 정사를 보좌하였다. 魏主 曹叡하니注+陳壽가 말하기를 “향년이 36세이다.” 하였다. 裴松之가 말하기를 “살펴보건대 武帝(曹操)가 明帝는 응당 建安 10년(205)에 출생하였을 것이다. 이해 정월에 이르기까지 연수를 헤아려보면 바로 34세이다. 이때에 36세가 될 수는 없다.” 하였다. 太子 曹芳이 즉위하였다.
[] 司馬懿洛陽에 이르러 〈魏主를〉 알현하자 魏主 曹叡가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가 뒷일을 그대에게 부탁한다.
그대는 曹爽과 함께 어린 아들을 보필하라. 죽음을 겨우 참고 있었노라. 내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그대를 기다려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여한이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齊王(曹芳)과 秦王(曹恂)을 불러서 사마의에게 보이고注+두 왕은 齊王秦王이다. 따로 제왕 조방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아이이다. 그대가 잘 살펴 어긋나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제왕 조방에게 앞으로 나가서 사마의의 목을 껴안게 하니, 사마의가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렸다.
이때 조방의 나이가 8세였는데, 그날로 太子로 삼았다. 조예가 곧이어 하였다.
조방이 황위를 계승하여 皇后를 높여 皇太后로 삼고 조상과 사마의에게 아울러 侍中 錄尙書事를 더해주고注+曹爽司馬懿가〉 이미 都督中外諸軍을 삼았는데 또 錄尙書事를 삼으니, 文武의 큰 권력이 모두 그들에게 돌아간 것이다. 여러 곳의 건축공사를 모두 遺詔로 정지하였다.注+라 한 것은 遺詔에 정말 이런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明帝는 침착하고 굳세며 총명하고 민첩하여 〈정사를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하고 공을 세우고 능력이 있는 인물을 선발하고 거짓을 배척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출동시키고 큰일을 논의해 결정할 적에 謀臣將相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좌우 지위가 낮은 신하라도 관청의 장부에 기록된 품성과 행실, 성명과 행적 등의 이력, 그리고 그의 부형과 자제 등을 한 번 보고 들을 적에 이를 기억하고 끝까지 잊지 않았다.注+(잊다)은 巫放이다.
[] 孫盛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나라 明帝는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고 말수가 적었으며 결정을 잘하였다. 〈曹丕의〉 遺命을 받아 보좌한 여러 공들을 모두 한 방면의 지방을 다스리게 하여 정사가 자기에게서 나왔다.
大臣들을 로 우대하여 비록 안색을 범하면서 심히 간언을 해도 박해하고 죽이는 일이 없었으니, 군주로서의 도량이 컸다.注+方任은 지방의 한 방면을 맡는 임무이다. 曹休淮南을 수비하게 하고, 曹眞關中을 수비하게 하고, 司馬懿에 주둔하게 한 일을 말한다. 는 뛰어나고, 크다는 뜻이다.
그러나 덕을 세우고 풍도를 남겨 종실의 기틀을 굳건히 할 것을 생각하지 않아서, 심지어 大權을 다른 사람의 수중에 떨어지게 하고 社稷을 보위할 사람이 없게 하였으니, 슬프다.”注+詩經≫ 〈大雅 〉에 “宗子는 나라의 성이다.” 하였다. 이는 황제가 종실을 시기하여 나라를 망하게 한 일을 말한 것이다.
[] 2월에 나라가 司馬懿太傅로 삼고, 何晏尙書로 삼았다.
[] 이때에 曹爽司馬懿가 각각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번갈아 궁중 안을 숙위하였다. 조상은 사마의의 나이와 지위가 본래 높다고 여겨 평상시 아버지처럼 섬겨서 매사를 묻고 감히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예전에 畢軌鄧颺, 李勝何晏丁謐이 모두 재주와 명망이 있었지만, 부귀에 급급하여 시세에 영합하고 권세에 아부하였다.注+이다. 何晏何進의 손자이며, 丁謐丁斐의 아들이다. 은 음이 이다.
明帝는 〈실제에 힘쓰지 않고〉 겉만 화려한 것을 싫어하여 물리치고 등용하지 않았는데, 조상이 평소 그들과 친밀하여 사이가 좋았다. 정사를 보좌하게 되자, 대번에 그들을 발탁하여 심복으로 삼았다.
하안 등이 조상을 위하여 계책을 내기를 “중대한 권력을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천자께 아뢰어 사마의를 승진시켜 太傅로 삼아야 하니 이렇게 하면 밖으로는 名號로써 그를 높이고,
안으로는 尙書로 하여금 일을 아뢸 적에 먼저 자신(조상)을 경유하게 하여 그 경중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조상이 그 말을 따랐다.
사마의를 태부로 삼고 자신의 동생 曹羲曹訓 등을 모두 將軍으로 삼아 천자를 시종하게 하여 궁중을 출입하게 하였으며,注+(뒤따르다)은 才用이다.
吏部尙書 盧毓을 옮겨 僕射(복야)로 삼아 하안에게 이부상서를 대신하게 하고, 등양‧정밀을 尙書로 삼고, 필궤를 司隷로 삼았다.
하안 등이 권세에 의지하여 執政하여 牽強附會하는 자를 승진시키고 자기들의 뜻에 어긋나는 자들을 파직시켜 물리치니, 조정의 안팎에서는 그 기색만을 살피고서 감히 뜻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 傅嘏(부하)가 曹羲에게 말하기를 “何平叔이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속으로는 조급하고 기교를 잘 부리며 이익을 좋아하니, 반드시 먼저 그대 형제들을 미혹시킬 것입니다. 그로 인해 仁人이 멀리 피하게 될 것이고, 조정의 정사가 피폐해질 것입니다.”注+平叔何晏이다. 思㢘이니 예리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하안 등이 마침내 어떤 일을 빌미로 부하의 관직을 파면하였고, 孫禮가 성실하고 정직하여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조상이 孫禮를 외방으로 내보내 揚州刺史로 삼았다.
[] 여름에 蔣琬大司馬로 삼았다.
[] 東曹掾 楊戲는 평소에 간소하고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張琬이 그와 논의할 적에 양희가 때때로 응대를 하지 않으니, 어떤 사람이 장완에게 말하기를 “양희는 공에게 오만합니다.”라고 하자,
장완이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이 같지 않은 것은 각각 그 얼굴이 다른 것과 같으니,注+〈“人心不同 各如其面”은〉 ≪春秋左氏傳襄公 31년에, 나라 子産의 말이다. 앞에서는 따르다가 뒷말을 하는 것은 옛사람이 경계를 하였다.注+書經≫ 〈虞書 益稷〉에 “너는 눈앞에서만 순종하고 물러나선 뒷말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양희가 나의 말에 찬동하려고 하면 이는 본심이 아니고, 나의 말에 반대하려고 하면 나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묵묵히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督農 楊敏이 일찍이 장완을 헐뜯기를 “일을 처리하는 것이 용렬하여 진실로 전임자에게 미치지 못한다.”注+督農과 같다. “憒憒”는 마음이 어지럽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주관하는 자가 양민을 추궁하여 다스릴 것을 청하자, 장완이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전임자에게 미치지 못하니, 추궁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주관하는 자가 용렬한 점을 묻자 장완이 말하기를 “만약 전임자만 못하면 일이 다스려지지 않고, 일이 다스려지지 않으면 용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양민이 어떤 일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니, 많은 사람들은 그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염려하였으나, 장완은 양민은 중죄를 면하였다.
[] 겨울 10월에 나라가 將軍 呂岱를 파견하여 武昌에 주둔하였다.
[] 呂岱의 당시 나이는 80세였다. 직접 국가 일을 하여 陸遜과 함께 荊州文書를 처리하여 한 마음으로 협력하고 좋은 일은 서로 양보하니, 남쪽 지방 사람들이 그들을 칭찬하였다.
[] 나라 장수 周胤이 죄가 있어서 폐하여 廬陵으로 유배 보냈다.
[] 나라 都鄕侯 周胤(周瑜의 둘째 아들)이 병사 천 명을 거느리고 公安에 주둔하였는데, 그를 죄로 폐하여 유배를 보냈다. 諸葛瑾步騭이 그를 위하여 선처하기를 청하자,注+(위하다)는 去聲이고, 아래에도 동일하다.
吳主 孫權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周胤은 나이가 젊고 공이 없는데 侯爵에 봉하고 병사를 거느리게 한 것은注+이미 侯爵을 받고서, 또 병사를 거느린 것을 말한다. 전부 公瑾(주유)을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주윤이 이를 믿고 술에 취하고 음란한 짓하는 것을 고치지 않으니, 우선 그에게 고통을 주어 스스로 깨우치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注+香苟이니, 술에 취해 성낸다는 뜻이다.
공근의 아들 때문에 두 분이 중재하게 하였으니, 만일 그가 자신의 잘못을 고칠 수 있다면 또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注+二君”은 諸葛瑾步騭을 가리킨다.
周瑜의 형의 아들 偏將軍 周峻하자, 全琮이 주준의 아들 周護로 주준의 병사를 거느리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손권이 말하기를 “주호는 성품과 행실이 위험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를 임용하면 다만 화를 만들 뿐이다. 내가 공근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찌 그친 적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建安……받아들였으니 : 甄后는 魏나라 文帝의 后妃이고 明帝의 母后이다. 본래 袁紹의 아들 遠煕의 아내였는데 曹操가 원소를 격파하자 조조의 아들 曹丕가 그의 아름다움을 탐내어 아내로 삼아 明帝 曹叡를 낳았다. 뒤에 郭后에게 총애를 빼앗기고 원망하다가 사사되었는데, 명제가 제위에 오르자 文昭皇后라는 시호를 올렸다.(≪三國志≫ 〈魏書 明帝叡〉)
역주2 正朔을……있지만 : 魏나라 明帝 靑龍 5년(237) 때 연호를 바꾸어 景初 원년으로 하면서 연도의 시작을 寅月(동지 다음다음 달, 현재 음력 1월)에서 丑月(동지 다음 달, 현재 음력 12월)로 1개월을 당겼던 것이다.(≪三國志≫ 〈魏書 明帝叡〉) 이렇게 하면 나이 계산에 1년이 늘어나 35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주3 魏司馬懿……太子芳立 : “‘遺詔를 받았다.[受遺詔]’고 기록한 것이 많은데 여기에서 유독 ‘受遺’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魏나라가 詔를 쓰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太子 曹芳에게 ‘立’이라 쓰고 ‘卽位’라 쓰지 않은 것이다. 曹叡가 즉위한 것은 쓰지 않았는데 曹芳에게는 어째서 쓴 것인가. 처음을 바로잡은 것이니, 司馬氏가 임금을 폐위한 죄가 드러난다.[書受遺詔多矣 此其獨書受遺何 不與魏之有詔也 故太子書立 不書卽位 叡立不書 芳何以書 正始也 則司馬氏廢主之罪著矣]” ≪書法≫
書法은 ‘筆法’이란 말과 같다. 朱子는 ≪資治通鑑綱目≫을 편찬할 적에 孔子의 ≪春秋≫ 筆法을 따라 綱과 目으로 나누었는바, 綱은 ≪春秋≫의 經文을, 目은 ≪春秋左氏傳≫의 傳文을 따랐다. ≪資治通鑑綱目≫의 筆法을 밝힌 것으로는 劉友益(宋)의 ≪綱目書法≫, 尹起莘(宋)의 ≪綱目發明≫이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두 책은 현재 淸나라 聖祖(康熙帝)가 엮은 ≪御批資治通鑑綱目≫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이 필법은 綱에 주안점이 맞춰져 있는데, 우리나라 학자들이 특별히 이 ≪자치통감강목≫을 愛讀한 이유는 바로 이 필법에 있다. ≪어비자치통감강목≫에는 이외에도 汪克寬(元)의 ≪綱目凡例考異≫ 등 많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나, 본서에서 다 소개하지 못하고 ≪강목서법≫과 ≪강목발명≫의 중요한 것만을 발췌하여 수록하였다. 또한 陳濟(明)의 ≪資治通鑑綱目集覽正誤≫를 인용하여 오류를 바로잡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각각 ≪書法≫, ≪發明≫, ≪正誤≫로 요약하여 표기하였다.
역주4 都督中外諸軍 : 都督은 都督某州諸軍事, 또는 都督諸州諸軍事를 줄인 말로. 督은 後漢 光武帝 시기에 督軍御史라는 직명이 보이나 後漢 말기에서 三國時代에 집중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당시 혼란으로 인해 刺史를 중심으로 한 지방통치체제가 한계를 나타내고, 또한 지방에 주둔한 군대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주둔군의 사령관이 그 지방의 민정까지 통할하게 되어 都督諸州諸軍事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吳나라와 蜀나라는 군사적 요지에 督이나 都督을 두어 그 지역의 민정까지 통할하였으며, 魏나라의 경우 文帝 黃初 初期에 정식으로 都督諸軍事를 두었다고 보고 있다. 都督中外諸軍은 黃初 3년에 설치된 都督中外諸軍事의 약칭으로 吳나라의 大都督은 지역의 군사적 통치보다 국가 차원의 중요한 군사적 임무에 있어서 총사령관을 의미한다.
역주5 : 反切音을 표시한 것이다. ‘反(번)’은 뒤집는다(되치다)는 뜻으로 번역을 의미하고, ‘切’은 자른다는 의미이다. 앞 글자의 初聲을 따고 뒷글자의 中聲과 終聲을 따서 읽는다.
역주6 典農 : ≪魏略≫에 의하면 典農校尉를 太祖(曹操)가 설치했는데 祿秩이 比二千石이라고 하였다.(≪三國志補注≫ 권1)
역주7 마음속에……없어서 : 원문의 “無適莫”은 어떤 일을 고집함이 없음을 뜻한다. ≪論語≫ 〈里仁〉에 “군자는 천하의 일에 전적으로 옳은 것도 없고 전적으로 옳지 않은 것도 없어 오직 義만을 따른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역주8 魏나라가……삼았다 : “建寅之月”은 북두칠성의 자루가 초저녁에 寅方(2시 방향)에 서는 달로, 지금의 음력 정월을 가리킨다. 魏나라 明帝 靑龍 5년(237) 때 연호를 바꾸어 景初 원년으로 하면서 定朔(연도의 시작)을 寅月(동지 다음다음 달, 현재 음력 1월)에서 丑月(동지 다음 달, 현재 음력 12월)로 1개월을 당겼던 것인데, 그 이유는 山茌縣에 黃龍이 나타나서 有司가 아뢰기를 “魏나라가 地統(땅의 원리로 통치함)을 얻어 마땅히 建丑(地統에 당하는 달)로 정월을 삼아야 합니다.[山茌縣言黃龍見 於是有司奏以爲魏得地統 宜以建丑之月爲正]”라고 하여 3월에 曆法을 확정하고 연호를 고쳐서 〈3월을〉 孟夏 4월로 하였다. 이렇게 正朔을 바꾸어 사용하다가 지금 해인 景初 3년(239) 정월에 明帝가 崩하여 齊王 曹芳이 즉위하였다. 이해 12월에 詔書를 내려 명제의 忌日이 돌아오는 슬픔을 기억하고 夏曆을 다시 사용하도록 하여 丑月을 夏曆의 12월로 하고 寅月을 하력 정월로 하면서 연호도 바꾸어 正始 원년(240)으로 하였다.(≪三國志≫ 〈魏書 明帝叡〉‧〈魏書 齊王芳〉)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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