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時에 曹爽司馬懿가 各領兵三千人하여 更宿殿內하니 爽以懿年位素高라하여 常父事之하여 每事咨訪하고 不敢專行이러라
初
에 畢軌鄧颺李勝何晏丁謐
이 皆有才名
이로되 而急於富貴
하여 趨時附勢
注+畢, 姓也. 晏, 進之孫. 謐, 斐之子也. 謐, 音密.하니
明帝惡其浮華하여 抑而不用호되 曹爽素與親善이러니 及輔政에 驟加引擢하여 以爲腹心하니
晏等이 爲爽謀曰 重權을 不可委之於人이니 可白天子轉懿爲太傅하니 外以名號尊之하고
內欲令尙書奏事에 先來由己하여 得制其輕重이라한대 爽從之하다
以懿爲太傅
하고 自以其弟羲訓等
으로 皆爲將軍侍從
하여 出入禁闥
注+從, 才用切.하고
徙吏部尙書盧毓爲僕射하여 而以晏代之하고 以颺謐爲尙書하고 軌爲司隷하니
晏等이 依勢用事하여 附會者를 升進하고 違忤者를 罷退하니 內外望風하여 莫敢忤旨러라
目
東曹掾楊戲가 素簡略이라 琬與言論에 戲時不應하니 或謂琬曰 戲慢公矣로라
琬曰 人心不同
이 各如其面
注+左傳, 鄭子産之言.하니 面從後言
은 古人所誡
注+書 “汝無面從, 退有後言.”라
戲欲賛吾是邪는 則非其本心이요 欲反吾言은 則顯吾之非라 是以黙然耳라하니라
督農楊敏嘗毁琬曰 作事憒憒
하여 誠不及前人
注+督農, 猶魏吳之典農也. 憒憒, 心亂也.이로다
主者가 請推治之한대 琬曰 吾實不及前人하니 無可推니라
主者가 請問憒憒之狀한대 琬曰 苟其不如하면 則事不理하고 事不理하면 則憒憒矣라하니라
後敏坐事繫獄하니 衆猶懼其必死로대 琬心無適莫이라 敏得免重罪하다
目
[目] 司馬懿가 洛陽에 이르러 〈魏主를〉 알현하자 魏主 曹叡가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가 뒷일을 그대에게 부탁한다.
그대는 曹爽과 함께 어린 아들을 보필하라. 죽음을 겨우 참고 있었노라. 내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그대를 기다려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여한이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齊王(
曹芳)과
秦王(
曹恂)을 불러서 사마의에게 보이고
注+두 왕은 齊王과 秦王이다. 따로 제왕 조방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아이이다. 그대가 잘 살펴 어긋나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제왕 조방에게 앞으로 나가서 사마의의 목을 껴안게 하니, 사마의가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렸다.
이때 조방의 나이가 8세였는데, 그날로 太子로 삼았다. 조예가 곧이어 卒하였다.
조방이 황위를 계승하여
皇后를 높여
皇太后로 삼고 조상과 사마의에게 아울러
侍中 錄尙書事를 더해주고
注+〈曹爽과 司馬懿가〉 이미 都督中外諸軍을 삼았는데 또 錄尙書事를 삼으니, 文武의 큰 권력이 모두 그들에게 돌아간 것이다. 여러 곳의 건축공사를 모두
遺詔로 정지하였다.
注+以라 한 것은 遺詔에 정말 이런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目
[目] 이때에 曹爽과 司馬懿가 각각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번갈아 궁중 안을 숙위하였다. 조상은 사마의의 나이와 지위가 본래 높다고 여겨 평상시 아버지처럼 섬겨서 매사를 묻고 감히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예전에
畢軌‧
鄧颺,
李勝‧
何晏‧
丁謐이 모두 재주와 명망이 있었지만, 부귀에 급급하여 시세에 영합하고 권세에 아부하였다.
注+畢은 姓이다. 何晏은 何進의 손자이며, 丁謐은 丁斐의 아들이다. 謐은 음이 密이다.
明帝는 〈실제에 힘쓰지 않고〉 겉만 화려한 것을 싫어하여 물리치고 등용하지 않았는데, 조상이 평소 그들과 친밀하여 사이가 좋았다. 정사를 보좌하게 되자, 대번에 그들을 발탁하여 심복으로 삼았다.
하안 등이 조상을 위하여 계책을 내기를 “중대한 권력을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천자께 아뢰어 사마의를 승진시켜 太傅로 삼아야 하니 이렇게 하면 밖으로는 名號로써 그를 높이고,
안으로는 尙書로 하여금 일을 아뢸 적에 먼저 자신(조상)을 경유하게 하여 그 경중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조상이 그 말을 따랐다.
사마의를 태부로 삼고 자신의 동생
曹羲‧
曹訓 등을 모두
將軍으로 삼아 천자를 시종하게 하여 궁중을 출입하게 하였으며,
注+從(뒤따르다)은 才用의 切이다.
吏部尙書 盧毓을 옮겨 僕射(복야)로 삼아 하안에게 이부상서를 대신하게 하고, 등양‧정밀을 尙書로 삼고, 필궤를 司隷로 삼았다.
하안 등이 권세에 의지하여 執政하여 牽強附會하는 자를 승진시키고 자기들의 뜻에 어긋나는 자들을 파직시켜 물리치니, 조정의 안팎에서는 그 기색만을 살피고서 감히 뜻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目
[目] 東曹掾 楊戲는 평소에 간소하고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張琬이 그와 논의할 적에 양희가 때때로 응대를 하지 않으니, 어떤 사람이 장완에게 말하기를 “양희는 공에게 오만합니다.”라고 하자,
장완이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이 같지 않은 것은 각각 그 얼굴이 다른 것과 같으니,
注+〈“人心不同 各如其面”은〉 ≪春秋左氏傳≫ 襄公 31년에, 鄭나라 子産의 말이다. 앞에서는 따르다가 뒷말을 하는 것은 옛사람이 경계를 하였다.
注+≪書經≫ 〈虞書 益稷〉에 “너는 눈앞에서만 순종하고 물러나선 뒷말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양희가 나의 말에 찬동하려고 하면 이는 본심이 아니고, 나의 말에 반대하려고 하면 나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묵묵히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督農 楊敏이 일찍이 장완을 헐뜯기를 “일을 처리하는 것이 용렬하여 진실로 전임자에게 미치지 못한다.”
注+督農은 魏‧吳의 과 같다. “憒憒”는 마음이 어지럽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주관하는 자가 양민을 추궁하여 다스릴 것을 청하자, 장완이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전임자에게 미치지 못하니, 추궁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주관하는 자가 용렬한 점을 묻자 장완이 말하기를 “만약 전임자만 못하면 일이 다스려지지 않고, 일이 다스려지지 않으면 용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양민이 어떤 일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니, 많은 사람들은 그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염려하였으나, 장완은
양민은 중죄를 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