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綱】 한漢나라 세조 광무황제世祖 光武皇帝건무建武 5년이다. 봄 정월에 황제가 환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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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내흡來歙을 보내 농우隴右로 돌아가는 마원馬援을 전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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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외효隗囂가 마원馬援과 함께 기거起居하면서 동방東方(낙양)의 일을 묻자, 마원이 대답하기를 “지난번 한漢나라 조정에 갔을 적에 상上이 수십 차례 인견引見하였고 매양 접견하여 편안히 말씀할 적에 저녁부터 새벽까지 이어졌는데,
재주와 총명, 용맹과 지략은 평범한 사람이 대적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또 마음을 열어 진실을 보여서 숨기는 바가 없었으니, 활달하여 큰 절개를 중시하는 것은 대략 고제高帝와 같고注+약略은 아래 구句로 속하여 읽으니, 일설에는 위 구에 속한다고 한다.,
경학經學과 박람博覽, 정사政事와 문변文辯은 전대에 비할 자가 없었습니다.”注+문변文辯은 문장과 변별을 이른다. 하였다. 외효가 묻기를 “경卿은 고제高帝와 비교하여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하자,
마원이 말하기를 “고제高帝만은 못합니다. 고제高帝는 가可함도 없고 불가不可함도 없지만, 금상今上은 정사政事를 처리하기 좋아하고 모든 일을 절도대로 하며 또 술 마시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니,
외효가 속으로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경卿의 말과 같다면 도리어 고제高帝보다 더 낫단 말인가.”注+부復(다시, 더)는 부우扶又의 절切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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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2월에 소무蘇茂가 수혜垂惠를 구원하자, 마무馬武와 왕패王霸가 소무를 격파하니, 유우劉紆가 교강佼彊(교강)에게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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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소무蘇茂가 오교五校의 군대를 거느리고 수혜垂惠에서 주건周建을 구원하니, 마무馬武가 소무와 주건에게 패하고 달아나다가 왕패王霸의 진영을 지나면서 큰 소리로 구원을 청하였다.
왕패가 말하기를 “적의 군대가 강성하여 우리가 출동하면 반드시 우리 양쪽이 모두 패할 것이니, 각자 노력할 뿐이다.” 하고는 진영의 문을 닫고 성벽을 견고히 지켰다.
군리軍吏들이 모두 이에 대해 간쟁하자注+쟁爭(간쟁하다)은 거성去聲이다., 왕패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무의 군대가 정예롭고 또 그 무리가 많아 우리 관리와 군사들이 마음에 두려워하고 있으며, 포로장군捕虜將軍(마무馬武)은 우리를 믿고 있으니,
두 군대가 통일되지 못하면 이것은 패하는 방도이다.注+이때에 마무馬武가 포로장군捕虜將軍이었다. 이제 우리가 진영의 문을 닫고 굳게 지켜서 구원해주지 않을 것임을 보이면 적은 반드시 승세를 타고 가볍게 전진할 것이요,
포로장군捕虜將軍은 구원해주는 이가 없으면 전투할 때에 절로 사력을 배가倍加할 것이다.注+〈“기전자배其戰自倍”는〉 사람이 각각 사력을 다하면 한 사람이 두 사람의 전투력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소무의 무리가 피로할 것이니, 그때 우리가 그들이 피폐한 틈을 타면 비로소 이길 수 있다.”
소무와 주건이 과연 병력을 모두 출동하여 마무를 공격하였는데, 교전한 지 한참 만에注+“실출공悉出攻”은 군대를 총동원하여 나가 공격함을 이른다. 왕패의 무리 중에 장사壯士 수십 명이 머리털을 자르고 나가 싸울 것을 청하였다.注+머리털을 자른 것은 용감하게 결사적으로 싸우려는 뜻을 보인 것이다.
왕패가 마침내 진영의 후문을 열어 정예기병을 출동시켜서 적의 배후를 습격하니注+“영후營後”는 영루營壘의 뒷문이다., 소무와 주건은 앞뒤로 왕패와 마무의 공격을 받고는 패주하였다. 이에 왕패와 마무가 각각 진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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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소무蘇茂와 주건周建이 다시 병력을 모아 도전하였으나, 왕패王霸는 꼼짝 않고 누워 나가지 않고 군사들에게 연향을 베풀며 광대들의 연기를 시작하게 하였다.注+“창악倡樂”은 음이 창악昌岳이다.
소무가 왕패王霸의 진영으로 화살을 비 오듯이 쏘아서 왕패의 앞에 있는 술동이를 맞혔으나 왕패는 편안히 앉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注+
“우석雨射”은 화살을 비 오듯이 많이 쏨을 이른다. 아래의 중中(맞추다)은 거성去聲이다.군리軍吏들이 모두 말하기를 “소무가 전일에 이미 격파되었으니, 이제 공격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패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소무의 객병客兵(외지에서 와서 공격하는 군대)은 멀리 와서 식량이 부족하므로 자주 도전하여 한때의 승리를 바란다.注+요徼는 요구함이다.
이제 내가 진영의 문을 닫고 군사들을 휴식시키는 것은 이른바 ‘싸우지 않고서 적의 군대를 굴복시킨다.’라는 것이다.”注+〈“부전이굴인병不戰而屈人兵”은〉 ≪손자孫子≫의 말이다. 하였다. 소무와 주건은 싸울 수 없게 되자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갔다.
이날 밤 주건의 형의 아들 주송周誦이 반란을 일으켜서 성문을 닫고 주건 등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니, 주건은 도중에 죽었고, 소무는 하비下邳(하비)로 달아나 동헌董憲과 연합하고, 유우劉紆는 교강佼彊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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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황제가 위군魏郡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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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팽총彭寵의 노복이 팽총을 참수하고 와서 항복하자, 팽총의 삼족을 멸하고 그 노복을 봉하여 불의후不義侯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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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팽총彭寵의 아내가 자주 악몽을 꾸고 또 괴이한 변고가 많이 나타났다.注+≪동관한기東觀漢記≫에 말하기를 “팽총의 아내가 꿈을 꾸었는데, 팽총이 웃통을 벗고 관책冠幘을 쓰고 성城을 넘어오자, 복역수服役囚[곤도髡徒]가 밀쳐내었다. 또 팽총이 당堂 위에서 화로 아래의 하마蝦蟇(두꺼비)의 소리를 듣고는 땅을 파고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하였다.복서卜筮하는 자와 구름을 바라보고 점을 치는 자가 모두 말하기를 “병란이 마땅히 중앙에서 일어날 것이다.” 하니,
팽총은 자후란경子后蘭卿이 일찍이 한漢나라에 인질로 갔다가 돌아왔다 하여 그를 믿지 못하고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밖에서 지내게 하여 중앙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注+자후란경子后蘭卿은 팽총彭寵의 종제從弟이다. 질質(인질)은 음이 치致이니, “치한귀質漢歸”는 한漢나라에 인질이 되었다가 돌아옴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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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팽총彭寵이 재계하느라 편실便室에 있었는데, 창두蒼頭(노복)인 자밀子密 등 세 명이 팽총이 누워 잠자는 틈을 타 함께 팽총을 결박해서 침상에 붙잡아 매었다.注+편실便室은 편히 앉아 쉬는 별실이니 정전正殿[정실正室]이 아니다. 한漢나라는 노복을 이름하여 창두蒼頭라 하였다. 착著(놓다)은 직략直略의 절切이다.
그러고는 밖에 있는 관리에게 고하기를 “대왕大王이 재계하여 외인을 금하시니, 모든 관리를 휴가 보내라.”注+〈“개사리휴皆使吏休”는〉 밖에 있는 관리들로 하여금 각각 돌아가 휴가를 보내게 한 것이다. 하고는 팽총의 명을 사칭하여 노복들을 잡아 포박하였다.
또 팽총의 명으로 그 아내를 불렀는데, 아내가 들어와서 놀라며 말하기를 “노복이 배반했다.” 하니, 노복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뺨을 때렸다.
팽총이 급히 소리치기를 “여러 장군을 위하여 빨리 행장을 챙기라.”注+촉趣(빨리)은 촉促으로 읽는다. 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노복을 장군將軍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자기를 놓아주기를 바라서 높인 것이다. “판장辦裝”은 짐을 꾸림을 이른다. 하니, 이에 두 노복은 아내를 데리고 들어가 보물寶物을 취하고 한 명의 노복을 남겨두어 팽총을 지키게 하였다.
노복이 금金과 옥玉, 의복과 물건을 거두어 팽총이 있는 곳으로 와서 짐을 꾸려 여섯 필匹의 말에 멍에하여 싣고서注+피被는 피의皮義의 절切이니, 말에 안장과 굴레를 가하는 것을 “피마被馬”라 한다. 팽총의 아내로 하여금 비단주머니 두 개를 만들게 하였다.
어두운 밤이 되자 팽총의 손을 풀어서 그로 하여금 성문장군城門將軍에게 성문을 열라고 통고하는 글을 쓰게 하였다.
글이 이루어지자, 팽총과 팽총의 아내의 머리를 베어 주머니 속에 넣고 곧바로 팽총이 쓴 글을 가지고 달려 성城을 나가서 곧장 대궐로 나왔다.注+궐闕은 천자天子의 대궐 아래이다.
다음 날 아침 합문閤門이 열리지 않으므로 관속官屬들이 담을 넘어 들어갔다가 팽총의 시신을 보고는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상서 한립尙書 韓立 등이 함께 팽총의 아들 팽오彭午를 세워 왕王으로 삼았는데, 국사 한리國師 韓利가 팽오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채준祭遵(채준)에게 와서 항복하니, 그들의 종족宗族을 멸하였다. 이에 황제가 자밀을 봉하여 불의후不義侯로 삼았다.注+국사國師는 팽총彭寵이 설치한 부서이니, 아마도 왕망王莽의 제도를 따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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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권덕여權德輿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注+권덕여權德輿는 당唐나라 헌종憲宗 때의 재상宰相이니, 일찍이 한漢나라가 망한 이유를 논변하는 글을 지었다. “백통伯通(팽총彭寵)이 황제의 명령을 배반한 것과 자밀子密이 주군을 해친 것은 똑같이 난亂으로 귀결되어 죄가 서로 가릴 수가 없으니注+백통伯通은 팽총彭寵의 자이다. 장戕은 재량在良의 절切이니 죽임이다.,
마땅히 각각 법에 따라 처형해서 왕의 법도를 밝게 보여야 하는데注+“왕도王度”는 왕의 법도라는 말과 같다., 도리어
또 불의不義한 일을 행하였으면 후侯로 삼아서는 안 되니, ≪춘추春秋≫에 제표齊豹를 도盜라 하고 배반한 세 사람의 이름을 쓴 의의는 이와 다르지 않겠는가.”注+≪춘추春秋≫ 소공昭公 20년에 “자객이 위후衛侯의 형 집縶(집)을 죽였다.” 하였고, 양공襄公 21년에 “주서기邾庶其가 칠려구漆閭丘의 땅을 가지고 노魯나라로 도망 왔다.” 하였고, 소공昭公 5년에 “거모이莒牟夷가 모루牟婁와 방자防玆 땅을 가지고 왔다.” 하였고, 31년에 “주흑굉邾黑肱이 남읍濫邑을 가지고 노魯나라로 도망 왔다.” 하였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준례에 명경命卿이 아니면 그 이름을 써주지 않는다. 제표齊豹는 위衛나라의 경卿이니, 위후衛侯의 형의 나쁜 행실에 분노하여 그를 죽인 것은 자기가 강포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명성을 얻고자 해서였는데, ≪춘추春秋≫에서는 그를 억제하여 다만 ‘도盜’라고 썼으니, 이른바 ‘명성을 구하였으나 얻지 못했다.’라는 것이요, 또 주서기와 거모이, 주흑굉 세 사람은 모두 명경命卿이 아니니, 읍邑을 가지고 노魯나라로 도망 온 것은 먹을 것을 얻으려고 한 것일 뿐, 자신의 이름이 ≪춘추春秋≫에 기록되기를 바라지 않았는데, ≪춘추春秋≫에서는 일부러 그 이름을 썼으니, 이른바 ‘이름을 감추고자 해도 이름이 드러났다.’라는 것이니, 이는 모두 불의不義를 징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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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사자使者를 보내 상곡태수 경황上谷太守 耿況을 맞이하여 경사京師로 돌아오게 해서 모평후牟平侯로 봉하였다.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모평현牟平縣은 동래군東萊郡에 속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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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오한吳漢과 경감耿弇이 평원平原에서 부평富平과 획색獲索을 공격하여 대파하니, 경감은 마침내 나아가 장보張步를 토벌하였다.注+부평富平의 적수賊帥는 서소徐少이고, 획색獲索의 적수는 고사랑古師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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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장군 방맹將軍 龎萌과 갑연蓋延을 보내 동헌董憲을 공격하였는데, 방맹이 배반하자,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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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방맹龎萌의 인품이 공손하고 양순하니, 황제가 그를 믿고 사랑하여 항상 칭찬하기를 “
혜惠가 나와서 구경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도참의 글이 잘못되지 않았으니, 유수劉秀가 참으로 너희의 군주이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근래에 밝게 드러난 일입니다.
더구나 지금 황제를 칭한 몇 명 중에 낙양洛陽(광무제光武帝)이 영토가 가장 넓고 병력이 가장 강하고 호령이 가장 분명하니, 부명符命을 보고 인사人事를 살펴보건대 타성他姓은 거의 필적하지 못할 것입니다.”
두융은 마침내 동쪽으로 향할 계책을 정하고서 장사 유균長史 劉鈞 등을 보내 글을 받들어 낙양에 가게 하였다.注+이때에 여러 사람들이 두융竇融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추대하였으므로 장사長史를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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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보다 앞서 황제 또한 사신을 내어 두융竇融에게 편지를 보내서 불렀는데, 사신은 길에서 유균劉鈞을 만나자 즉시 함께 돌아와 황제를 뵈었다.
황제가 두융에게 다음과 같이 친서를 하사하였다. “지금 익주益州에는 공손자양公孫子陽이 있고, 천수天水에는 외장군隗將軍이 있어, 촉蜀과 한漢이 서로 공격함에 저울추가 장군에게 달려 있다.
발을 왼쪽으로 두느냐 오른쪽으로 두느냐에 곧 저울추의 경중이 있으니注+왼쪽으로 발을 두면 촉蜀(공손술公孫述)이 무거워지고 오른쪽으로 발을 두면 한漢(광무제光武帝)이 무거워짐을 말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면 촉蜀과 한漢이 장군과 서로 친하고자 함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注+양量(한량)은 음이 양良이다.
약소한 주왕실周王室을 도와서 패업霸業을 이룬 제 환공齊 桓公과 진 문공晉 文公처럼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힘써 공업功業(패업霸業)을 이루어야 할 것이요,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솥발처럼 서서 합종연횡하고자 한다면 또한 마땅히 제때에 정해야 할 것이니注+두 설을 제시하여 두융竇融의 거취를 관망한 것이다.,
을 내는 자가 있을 것이다.注+7군郡은 남해南海, 울림鬱林, 창오蒼梧, 합포合浦, 교지交趾, 구진九眞, 일남日南이다. 위타尉佗의 때에는 아직 7군郡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이는 황제가 후래後來에 군郡을 설치한 것을 근거하여 말한 것이다.
왕자王者는 땅을 나누어주기만 하고, 백성을 나누어주지는 않으니, 스스로 자기 일에 알맞게 할 뿐이다.”注+왕王(임금)은 본음대로 읽는다. 분分(나누어주다)은 부문扶問의 절切이다. “유분토有分土”는 국경을 세움을 이르고, “무분민無分民”은 왕래만 할 뿐 항상 그곳에 살지는 않음을 이른다. “자적기사自適己事”는 오직 자기 일에 편리하고 맞게 하고자 할 뿐임을 말한 것이다. 황제는 인하여 두융에게 양주목涼州牧을 제수하였는데,
새서璽書가 하서河西에 이르니 하서河西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만 리 밖을 밝게 본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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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6월에 진풍秦豐이 항복하니, 그를 참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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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동헌董憲과 유우劉紆가 소무蘇茂와 교강佼彊으로 하여금 방맹龎萌을 구원하게 하자,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이들을 격파하였다.
가을 7월에 교강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니, 소무는 장보張步에게로 달아나고 동헌과 방맹은 구현朐縣으로 달아났다. 양梁 사람이 유우를 참수하고서 항복하였다.注+구胊는 음이 구劬이니 구현胊縣은 동해군東海郡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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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겨울 10월에 황제가 노魯나라에 갔다.注+노魯나라는 본래 서주徐州에 속하였는데, 황제가 고쳐 예주豫州에 소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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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경감耿弇이 축아祝阿와 제남濟南, 임치臨菑(임치)를 함락하고 장보張步와 싸워서 대파하니, 황제가 경감의 군대를 위로하였다. 장보가 소무蘇茂를 참수하고서 항복하니, 제齊 지역이 모두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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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장보張步는 경감耿弇이 곧 공격해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그의 대장군 비읍大將軍 費邑으로 하여금 역하歷下에 군대를 주둔하게 하고 또 군대를 축아祝阿에 주둔하게 하였으며注+비읍費邑은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이현李賢이 말하기를 “역하성歷下城은 지금의 제주 역성현齊州 歷城縣에 있었다.” 하였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축아현祝阿縣은 평원군平原郡에 속했다.” 하였다., 별도로 태산泰山과 종성鍾城에 수십 개의 진영을 나열하여 대기하게 하였다.
경감이 하수河水를 건너가 먼저 축아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는데, 일부러 포위망의 한쪽을 열어주어 그 무리들이 종성으로 달아날 수 있게 하였다.
종성 사람들은 축아가 이미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성벽을 비우고 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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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비읍費邑이 아우 비감費敢에게 병력을 나누어 보내서 거리巨里를 지키게 하니注+≪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제남濟南의 역성歷城에 거리巨里의 취락이 있다.” 하였다., 경감耿弇이 진군하여 먼저 거리를 위협하였는데,
군중에 엄명을 내리기를 “공격하는 도구를 빨리 수리하라. 3일 후에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거리성巨里城을 공격할 것이다.”注+촉趣(재촉하다)는 촉促으로 읽는다. 하고는, 은밀히 포로에 대한 방비를 느슨하게 하여 도망가서 경감이 공격할 시기를 비읍에게 알리게 하였다.注+“생구生口”는 사로잡은 사람을 이른다. “음완陰緩”은 은밀히 포로들에 대한 방비를 느슨하게 해서 도망하여 돌아가게 함을 이른다.
그날이 되자, 비읍이 과연 직접 정예병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오니, 경감이 기뻐하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공격하는 도구를 빨리 수리하게 한 이유는 적을 유인하여 오게 하려는 것이었다.
들에 있는 적군을 공격하지 않고 어찌 성을 공격하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즉시 3천 명을 나누어 거리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정예병을 이끌고서 강판岡阪으로 올라가서
높은 곳을 이용하여 적과 교전해서 대파하고 적진에서 비읍을 참수하였다.注+산등성이를 강岡이라 하고 산비탈을 반阪이라 한다. 진陳(진을 치다)은 진陣으로 읽으니, 아래의 “분진分陳”과 “보진步陳”도 같다. 이윽고 비읍의 수급을 거두어 성안에 보이자 성안이 두려워하니, 이에 비감은 병력을 모두 거두어 도망하여 장보張步에게 돌아갔다.注+흉兇은 호용呼勇의 절切이니 두려워하는 소리이다.
경감은 다시 군대를 풀어서 아직 항복하지 않은 자들을 공격하여 40여 개의 진영을 평정하고 마침내 제남濟南을 평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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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때에 장보張步가 극劇에 도읍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우인 장람張藍으로 하여금 정예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서안西安을 지키게 하고, 여러 군郡의 태수太守가 거느린 도합 만여 명으로 하여금 임치臨菑를 지키게 하니, 서로의 거리가 40리였다.注+서안西安은 현縣의 이름이니 제군齊郡에 속하였다.
경감耿弇은 진군하여 서안西安과 임치臨菑 두 성城의 사이에 있었는데, 경감이 보니 서안은 성城이 작으나 견고하고 또 장람의 군대가 정예병이며, 임치는 이름은 비록 큰 성城이라 하나 실제로는 공격하기 쉬웠다.
이에 제교諸校(군대의 각 부部)에게 5일 후에 모여서 서안西安을 공격한다고 통고하니注+회會(모이다)는 집集과 같다., 장람이 이 말을 듣고는 밤낮으로 경계하여 수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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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군대가 모이기로 한 날짜가 되자, 한밤중에 경감耿弇이 장수들에게 모두 침상에서 일찍 밥을 먹고 날이 밝을 때에 임치臨菑에 이르라고 명하였다.注+“욕식蓐食”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침상과 요에서 밥을 먹는 것이다. 욕蓐은 마땅히 욕褥이 되어야 하니, 요이다. 일설에 “욕蓐은 잘 때 까는 풀이다.” 하였다.
호군 순량護軍 荀梁 등이 간쟁하여 말하기를 “임치를 공격하면 서안西安이 반드시 구원할 것이요, 서안을 공격하면 임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니, 서안을 공격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다.
경감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서안에서는 내가 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대비하면서 지금 한창 근심하고 있으니, 어느 겨를에 남을 구원하겠는가.
임치에서는 우리가 뜻밖에 출동하여 이르면 반드시 놀라 소요할 것이니, 내 공격하면 하루 만에 반드시 함락할 것이다.
임치를 함락하면 바로 서안이 고립되어 극劇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반드시 다시 도망할 것이니, 이른바 ‘하나를 공격하여 둘을 얻는다.’라는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임치를 공격하여 한나절 만에 함락하고 들어가 성城을 점거하였다.
장람張藍은 이 말을 듣고는 병력을 거느리고서 도망하여 극劇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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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경감耿弇은 군중軍中에게 명하여 노략질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장보張步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잡아야 한다고 호언장담하여 장보를 격노하게 하였다.
장보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우래尤來와 대동大彤(대동)의 10여만 군대도 내 모두 그 진영에 나아가 격파하였는데, 지금 대경大耿의 병력은 저들보다 적고 또 모두 피로하니, 어찌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注+〈“금대경今大耿”은〉 경감耿弇이 경황耿況의 장자이므로 대경大耿이라고 부른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세 아우인 장람張藍, 장홍張弘, 장수張壽와 옛 대동大彤의 수괴인 중이重異 등과 함께 20만 군대라고 이름하고, 임치臨菑의 큰 성城 동쪽으로 와서 경감을 공격하였다.注+중重은 직룡直龍의 절切이니 성姓이고, 이異는 이름이다.
이때 경감이 먼저 치수菑水 가로 나아가 중이와 교전하였는데, 경감은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여 적병의 기운을 왕성하게 하고는 마침내 병력을 이끌고 작은 성으로 돌아와 성안에 군대를 진열하고,
도위 유흠都尉 劉歆과 태산태수 진준泰山太守 陳俊으로 하여금 성 아래에 나누어 진을 치게 하였다. 장보는 사기가 충천하자 곧바로 경감의 진영을 공격하여 유흠 등과 교전을 하였다.
경감은 유흠 등이 적과 칼날을 맞대고 싸우는 것을 보고는, 직접 정예병을 인솔하고 동쪽 성 아래에 있는 장보의 진영으로 돌진해서 대파하였다. 날이 저물자 싸움을 중지하였는데, 경감은 다음 날 다시 군대를 무장하여 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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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때에 황제가 노魯나라에 있다가 경감耿弇이 장보張步에게 공격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는 직접 가서 구원하려 하였다.
황제가 도착하기 전에 진준陳俊이 경감에게 이르기를 “극로劇虜의 군대가 강성하니, 우선 영문營門을 닫고 군사들을 휴식시키고서 상上이 오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注+이때에 장보張步가 극劇에 도읍하였으므로 극로劇虜라 부른 것이다. 하였다.
경감이 말하기를 “황제의 승여乘輿가 장차 이를 것이니, 신자臣子된 도리에 마땅히 소를 잡고 술을 걸러 백관百官을 기다려야 하는데, 도리어 오랑캐를 군부君父에게 넘겨드린단 말인가.”注+시釃(거르다)는 음이 사師이고 또 소기所寄의 절切이니, “시주釃酒”는 광주리를 사용하거나 혹은 풀을 사용하여 술을 걸러 술지게미를 제거하는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군대를 출동하여 크게 싸워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싸워 다시 적을 대파하였다. 경감은 장보가 곤궁하여 장차 후퇴할 줄을 알고는 미리 좌익左翼과 우익右翼을 설치하여 매복하고 기다리게 하였는데,
초저녁[인정人定]에 장보가 과연 병력을 이끌고 떠나갔다.注+날이 저물면 여러 동물들이 쉰다. 그러므로
를 인정人定이라 한다. 이에 복병들이 일어나 맹렬히 공격하고 추격하여 거말수鉅昩水(거말수) 가에 이르니, 쓰러진 시체가 서로 이어져 있었다.注+말昩은 막갈莫曷의 절切이다. 이현李賢이 말하기를 “거말拒昩은 물 이름이니, 일명 거양수巨洋水로 지금의 청주 수광현靑州 壽光縣 서쪽에 있다.” 하였다. 장보가 극劇으로 돌아오니, 형제들이 각각 군대를 나누어 흩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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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수일 뒤에 황제의 거가車駕가 임치臨菑에 이르러 직접 군사들을 위로하니, 신하들이 크게 모였다.
지금 장군將軍이 축아祝阿를 공격하여 훌륭한 자취를 열었다. 이는 모두 제齊의 서쪽 경계에 있는 지역이니, 공功이 충분히 서로 견줄 만하다.
장군이 예전 남양南陽에 있을 적에 이 큰 계책을 세우고서注+위(지난) 건무建武 3년(A.D.27) 겨울에 경감耿弇이 황제를 따라 용릉舂陵에 갈 적에 제齊를 평정하겠다고 자청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사람들의 생각과 너무 거리가 멀어 뜻이 부합하기 어렵다.’ 하더니, 뜻이 있는 자는 끝내 일을 성취한다.”注+“낙락落落”은 거리가 멀다는 말과 같다. 하고는, 나아가 극劇으로 행차하였다.
경감이 다시 장보張步를 추격하니 장보가 평수平壽로 달아났는데注+평수平壽는 현縣의 이름이니 북해군北海郡에 속하였다., 소무蘇茂가 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였다.
소무가 장보를 책망하기를 “남양南陽의 정예병과 전쟁을 잘하는 연잠延岑도 경감이 패주시켰습니다. 그런데 대왕大王은 어찌하여 나가 경감의 진영을 공격하고, 나에게 구원을 요청하고서도 기다리지 못하였습니까.”注+“기호무旣呼茂”는 장보張步가 이미 자신에게 구원을 청한 것을 이른다. 하니,
장보가 말하기를 “부끄럽고 부끄러워서 드릴 말씀이 없소이다.”注+부負는 부끄러워함이니, 두 번 말한 것은 몹시 부끄러워한 것이다. 일설에 “부부負負는 몹시 죄를 지었다는 말과 같다.” 하였다. 하였다.
目
【목目】 황제가 사신을 보내 장보張步와 소무蘇茂에게 고하기를 “상대방의 목을 베고 항복하는 자는 열후列侯로 봉하겠다.” 하니, 장보가 마침내 소무를 참수하고 경감耿弇의 군문軍門으로 와서 웃통을 벗고 항복하였다.
경감이 소무의 머리를 행재소行在所에 파발마로 전하고 군대를 무장하여 평수성平壽城에 들어가 점거하고는注+전傳(파발마)은 직련直戀의 절切이다. 성城은 바로 평수성平壽城이다., 장보의 군대를 해산하여 각기 향리로 돌려보냈다.
장보의 세 아우가 소재所在한 감옥에 스스로 갇혀 있었는데, 조령詔令을 내려 모두 용서하고 장보를 안구후安丘侯로 봉하였다.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안구후安丘侯의 나라는 낭야군琅邪郡에 속했다.” 하였고, 또 “북해군北海郡에 안구현安丘縣이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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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때에 낭야琅邪가 아직 평정되지 못하였다. 상上이 진준陳俊을 옮겨 낭사태수琅邪太守로 삼았는데, 진준이 처음 경내에 들어가자 도적들이 모두 흩어졌다.
경감耿弇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성양城陽에 이르러서 오교五校의 잔당들에게 항복을 받으니, 제齊 지역이 모두 평정되었다. 이에 군대를 정돈하여 경사京師(낙양雒陽)로 개선하였다.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성양국城陽國은 거莒에 도읍했다.” 하였다.
경감은 장수가 되어 평정한 군郡이 모두 46개이고, 무찌른 성城이 300개로 일찍이 꺾인 적이 없었다.
綱
【강綱】 처음으로 태학太學을 일으키고, 황제가 돌아오는 길에 태학太學을 시찰하였다.注+육기陸機의 ≪낙양기洛陽記≫에 “태학太學은 낙양성雒陽城 옛 개양문開陽門 밖에 있었으니, 궁宮과의 거리가 8리이다. 강당講堂은 길이가 10장丈이고 너비가 3장丈이다.” 하였다. 선還(돌아오다)은 선旋으로 읽으니, 노魯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것이다. 한漢나라 역사책에는 “태학太學에 행차했다.[행태학幸太學]”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행幸이라고 말하지 않고 시視라고 말한 것은 스승의 도道를 높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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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황제가 태학太學에 행차해서 옛 법을 상고하여 본받고 예악禮樂을 닦고 밝히니, 찬란한 문물文物이 볼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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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11월에 대사도 복담大司徒 伏湛이 면직하니 후패侯霸를 대사도大司徒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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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후패侯霸는 태원太原의 민중숙閔仲叔의 명성을 듣고 그를 불러왔는데, 민중숙이 오자 후패는 정사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노고를 위로할 뿐이었다.注+노勞는 역도力到의 절切이니 그의 노고를 위로함을 이른다.
민중숙이 한탄하기를 “처음에는 아름다운 명을 받고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였는데, 이제 명공明公을 보니 기쁨과 두려움이 모두 사라졌다.
나를 물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여겼다면 마땅히 부르지 않았어야 할 것이요, 부르고서 묻지 않으니 이는 사람을 버리는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하직하고 나가서 자신을 탄핵하는 글을 남기고 떠나갔다.注+투投(남기다)는 하下와 같고, 죄를 상고하는 것을 핵劾이라 하니, “투핵投劾”는 자신을 탄핵하는 글을 남기고 떠나감을 이른다. 탄핵하는 글 가운데에 윗글의 ‘한왈恨曰’ 이하의 몇 마디 말이 있었다.
綱
【강綱】 12월에 노방盧芳이 변경을 침입하여 5개의 군郡을 점거하고 노략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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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오원五原 사람 이흥李興과 수욱隨昱(수욱), 삭방朔方 사람 전립田颯(전립), 대군代郡 사람 석유石鮪(석유)와 민감閔堪(민감)이 각각 군대를 일으켜서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였다.注+수욱隨昱은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립颯은 음이 립立이고 또 사합思合의 절切이다.
흉노匈奴의 선우單于가 사신을 보내 이흥 등과 화친하고는 노방盧芳을 한漢나라 땅으로 돌려보내 황제를 삼고자 하니, 이흥 등이 군대를 이끌고 선우의 왕정王庭에 가서 노방을 맞이하였다.
12월에 함께 변경을 침입하여 구원현九原縣에 도읍하고 오원五原과 삭방朔方, 운중雲中과 정양定襄, 안문雁門의 다섯 군郡을 노략질하여 소유하고는, 모두 수령守令을 배치하고 호胡(흉노)와 병력을 연합해서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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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외효隗囂가 아들을 들여보내 황제를 모시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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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외효隗囂가 자신을 서백西伯(문왕文王)에 견주어서 의논하여 왕을 칭하고자 하자注+서백西伯은 문왕文王이다., 정흥鄭興이 말하기를 “옛날
무왕武王은 800명의 제후諸侯가 모의하지 않고 모였는데도 회군하여 때를 기다렸으며注+무왕武王이 맹진孟津에서 열병할 적에 기약하지 않고 모인 제후諸侯가 800명이었는데, 모두들 “주紂를 정벌할 만하다.” 하였으나 무왕은 “너희들이 천명天命을 알지 못한다.” 하고 마침내 회군하였다.,
황제는 외효가 양쪽을 관망하여 천하가 통일되기를 원치 않음을 알고, 이에 차츰 그에 대한 예우를 낮추어 군신君臣 간의 예의를 바로잡았다.注+황제가 외효隗囂에게 준 편지에 처음에는 대등한 나라의 예禮를 사용하였는데, 지금 그 예禮를 낮춘 것이다.
황제는 외효가 마원馬援과 내흡來歙(내흡)과 서로 친하다 하여 여러 번 내흡과 마원으로 하여금 사명을 받들고 왕래하게 해서 외효에게 들어와 조회할 것을 권하고 중한 관작을 내리겠다고 허락하였다.
그러나 외효는, 자신이 공덕이 없으니 사방이 평정되기를 기다려서 여리閭里로 물러나 은둔하겠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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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황제가 다시 내흡來歙을 외효隗囂에게 보내 아들을 들여보내 황제를 모시게 하라고 설득하자, 외효는 유영劉永과 팽총彭寵이 모두 이미 격파되어 멸망했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그의 장자 외순隗恂을 보내 내흡을 따라 대궐에 나아가게 하였는데,
황제는 그를 호기교위胡騎校尉로 삼아 전강후鐫羌侯에 봉하였다.注+호기교위胡騎校尉는 무제武帝가 설치하였으니, 질秩이 이천석二千石이다. 전鐫은 자전子全의 절切로 뚫음이니, 〈“전강후鐫羌侯”는〉 외순이 능히 강족羌族과 융족戎族을 쪼고 뚫을 수 있음으로 봉호封號로 삼은 것이다.정흥鄭興은 외순을 따라 돌아가 부모를 장례하기를 청하고 처자와 함께 동쪽으로 갔으며,
마원馬援 또한 가솔들을 거느리고 외순을 따라 낙양洛陽으로 돌아갔다. 외효의 장수 왕원王元은 천하의 성패를 아직 알 수 없다 해서 한마음으로 한漢나라를 섬기기를 원치 아니하여 외효를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