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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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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永明五年이요 魏太和十一年이라
春正月 魏定樂章하다
凡非雅者除之하다
齊南陽降魏하다
齊荒人桓天生據南陽故城 請兵於魏하여 以冦齊境注+荒, 荒服也.이어늘 齊遣將軍陳顯達討之하다
魏光祿大夫咸陽公高允卒하다
歴事五帝하여 出入三省 五十餘年 未嘗有譴하니 馮太后及魏主甚重之注+太武․景穆․文成․獻文及高祖爲五帝. 三省, 尙書省․中書省․祕書省也.러라
仁恕簡靜하여 雖處貴重이나 情同寒素하고 執書吟覽하여 晝夜不去手하고 誨人以善하여 恂恂不倦하고 篤親念故 無所遺棄注+恂恂, 信實之貌.
顯祖徙靑徐望族於代하니 其人多允婚媾 流離飢寒이어늘 傾家賑施하여 咸得其所하고 又隨其才行하여 薦之於朝하니
議者 多以初附間之한대 允曰 任賢使能 何有新舊리오 必若有用이면 豈可以此抑之리오
至是卒하니 年九十八이라 贈司空하고 諡曰文이요 賻襚甚厚 魏初以來 存亡蒙賚 皆莫及也注+貨財曰賻, 衣服曰襚.
二月 齊敗魏師하고 取舞陽하다
桓天生引魏兵至沘陽注+沘, 音比. 沘陽, 縣名, 漢屬南陽郡, 沘水出焉.이어늘 陳顯達遣戴僧靜等與戰於深橋하여 大破之注+深橋, 距沘陽四十里.하니 天生退保沘陽이어늘 僧靜圍之라가 不克而還하니
齊以顯達爲雍州刺史하니 進據舞陽城注+舞陽, 潁川郡邑, 舞水出焉.하다
夏五月 魏詔宗戚有服者 復勿事하다
魏詔復七廟子孫及外戚緦麻服已上하여 賦役 無所與注+復, 方目切. 與, 讀曰預.하다
魏大旱하니 秋七月 詔有司賑貸하다
魏春夏大旱하니 代地尤甚이라 牛疫民死어늘 齊州刺史韓麒麟上表曰
京師民庶 不田者多하여 遊食之口 參分居二注+參, 音三. 豐稔積年 矜夸成俗하여 貴富之家 童妾袨服하고 工商之旅 僕隷玉食이로되 而農夫闕糟糠하고 蠶婦乏短褐注+稔, 歲熟也. 袨, 音縣. 袨服, 美衣也. 玉食, 珍食也.이라 故令耕者日少하여 田有荒蕪하니 飢寒之本 實在於斯
愚謂凡侈異之物 皆宜禁斷하고 吉凶之禮 備爲格式하고 勸課農桑하며 嚴加賞罰이면 數年之中 必有盈贍이라
往年校比戶貫하니 租賦輕少注+貫, 鄕籍也.하여 臣所統齊州租粟纔可給俸이요 略無入倉하니 雖於民爲利라도 而不可長久
脫有하고 或遭天災 恐供給之方 無所取濟 可減絹布하고 增榖租하여 年豐多積하여 歳儉出賑注+歲入約少爲儉.이면 所謂私民之榖 寄積於官이니 官有宿積이면 則民無荒年矣注+宿積, 子智切.리라
於是 詔有司하여 開倉賑貸하고 聽民出關就食注+魏都平城, 郊畿之外, 置關於要路以譏征.호되 遣使造籍하여 以分去留하고 所過 給糧하고 所至 三長贍養之하다
八月 柔然侵魏어늘 魏人擊敗之하니 高車阿伏至羅自立爲王하다
柔然伏名敦可汗殘暴하니 部衆離心이러라 八月 冦魏邊이어늘 魏以尙書陸叡爲都督하여 擊破之注+叡, 麗之子也.하다
高車阿伏至羅有部落十餘萬하여 役屬柔然이러니 伏名敦之侵魏也 阿伏至羅諫不聽이어늘 怒與從弟窮奇 帥部落西走하여 自立爲王이라
二人甚親睦이라 分部而立이어늘 伏名敦擊之라가 屢爲所敗하여 乃引衆東徙하다
魏詔罷起部無益之作하고 出宮人不執機杼者하고 又罷尙方錦繡綾羅之工하고 民欲造者 任之注+通鑑 “任之無禁.”하다
是時 魏久無事하니 府藏盈積이라 詔盡出御府衣服珍寳 太官雜器 太僕乗具 内庫弓矢刀鈐十分之八注+鈐, 其廉切, 刃也.하고
外府衣物繒布絲纊非供國用者 以其太半으로 班賚百司하여 下至工商皁隷하여 逮于六鎭邊戍 畿内孤寡貧癃有差하고
後又出宮人하여 以賜北鎭人貧無妻者注+北鎭, 六鎭也. 一曰 “懷朔鎭.” 直平城北.하다
冬十二月 魏以高祐 爲西兗州刺史하다
魏主問祕書令高祐曰 何以止盜注+祐, 允之從祖弟也. 對曰 昔 宋均立德 猛虎渡河하고 卓茂行化 蝗不入境注+宋均, 事見漢明帝永平七年. 卓茂爲密令, 敎化大行, 漢平帝時, 天下大蝗, 獨不入密縣界.하니 況盜賊 人也 苟守宰得人하여 治化有方이면 止之易矣리이다
又言今之選擧 不採識治之優劣하고 專簡年勞之多少하니 非所以盡人才也 若停薄藝棄朽勞하고 唯才是擧 則官方穆矣注+方, 道也. 穆, 和也, 淸也.리이다
又勲舊之臣 才非撫民者 可加以爵賞이로되 不宜委以方任이니 所謂王者可私人以財 不私人以官者也注+王者不私人以官, 前漢書佞幸傳贊之辭.니이다 魏主善之
祐出鎭滑臺하여 命縣立講學하고 黨立小學하다


나라 세조世祖 무제武帝 소색蕭賾 영명永明 5년이고, 북위北魏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태화太和 11년이다.
[] 봄 정월 초하루에 북위北魏악장樂章을 정하였다.
[] 아악雅樂이 아닌 것은 없애버렸다.
[] 나라 남양南陽북위北魏에 항복하였다.
[] 나라의 변방注+① 荒은 변방 지역이다. 사람 환천생桓天生남양南陽의 옛 성을 점거하여 북위北魏에 병사를 요청하여 나라 국경을 침략하니, 나라가 장군 진현달陳顯達을 보내어 토벌하였다.
[] 북위北魏광록대부光祿大夫 함양공咸陽公 고윤高允하였다.
[] 고윤高允이 다섯 황제를 섬기면서 삼성三省에 출입한 50여 년 동안 문책을 받은 적이 없었으니注+① 太武․景穆․文成․獻文․高祖가 다섯 황제이다. 三省은 尙書省․中書省․祕書省이다., 풍태후馮太后위주魏主(소색蕭賾)가 그를 매우 중하게 여겼다.
고윤은 인자하고 간략하며 조용하여 비록 귀중한 지위에 있었지만 마음은 한산하고 소박한 듯이 하였고, 책을 지니고 읽고 보면서 밤낮으로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남을 으로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여 정성을 다하여注+② “恂恂”은 미덥고 진실한 모양이다. 게으른 적이 없었고, 친척에게 돈독하게 대하고 옛 친구를 생각하여 버린 적이 없었다.
현조顯祖(탁발홍拓跋弘)가 청주靑州서주徐州의 명망 있는 집안을 모두 대도代都로 이주시켰을 때, 그들 대부분이 고윤과 혼인으로 맺어진 인척이었는데, 그들이 떠돌고 굶주리며 추위에 떨자 고윤은 집안이 기울어질 정도로 재물을 풀고 구제하여 그들 모두가 살 방도를 얻게 해주었으며, 또 재주와 품행에 따라 조정에 천거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대부분 그들이 막 귀부한 것을 가지고 이간질하였는데, 고윤이 말하기를 “어진 사람을 임용하고 능력 있는 자를 등용하면서 어찌 새로운 사람과 오래된 사람을 차별하겠는가. 반드시 쓸모가 있다면 어찌 이런 이유로 억압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 이르러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98세였다. 사공司空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이라 하였으며, 재물과 의복을注+③ 재물을 ‘賻’라고 하고, 의복을 ‘襚’라고 한다. 후하게 하사하였다. 북위北魏 초기 이래로 살아서나 죽어서나 황제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 모두가 고윤에게 미치지 못했다.
[] 2월에 나라가 북위北魏 군대를 격파하고 무양舞陽을 취하였다.
[] 환천생桓天生북위北魏의 군대를 이끌고 비양沘陽注+① 沘(고을이름)는 음이 比이다. 沘陽은 縣의 명칭으로, 漢나라 때에는 南陽郡에 속하였으며, 沘水가 발원하는 곳이다. 이르자, 진현달陳顯達대승정戴僧靜 등을 파견하여 심교深橋에서注+② 深橋는 沘陽과의 거리가 40리이다. 전투를 치러 크게 격파하니, 환천생이 비양으로 물러나 수비하였는데, 대승정이 포위를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나라가 진현달을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삼으니, 진격하여 무양성舞陽城注+③ 舞陽은 潁川郡의 고을로 舞水가 발원하는 곳이다. 점거하였다.
[] 여름 5월에 북위北魏가 조서를 내려 종척宗戚 중에 상복을 입는 사람을 복호復戶로 삼아서 부역을 하지 않게 하였다.
[] 북위北魏가 조서를 내려 7의 자손과 외척으로 시마복緦麻服을 입는 사람 이상은 복호復戶로 삼아서 부역에 참여하지 않게 하였다.注+① 復(부역을 면제하다)은 方目의 切이다. 與(참여하다)는 預(예)로 읽는다.
[] 북위北魏가 크게 가뭄이 들자 가을 7월에 유사有司에게 조서를 내려 진대賑貸하도록(곡식을 나누어주거나 빌려줌) 하였다.
[] 북위北魏가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대도代都가 더욱 심하였다. 소가 역질에 걸리고 백성들이 죽자 제주자사齊州刺史 한기린韓麒麟이 표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경사京師의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이 많아 놀고먹는 입이 세 사람注+① 參(셋)은 음이 三이다. 가운데 둘이나 됩니다. 해를 거듭해 풍년이 들어 잘난 체하고 자랑하는 것이 풍속이 되어, 귀하고 부유한 집안에서는 어린아이와 첩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공상工商의 집안에서는 하인들이 진귀한 음식을 먹는데注+② 稔은 풍년이다. 袨(고운 옷)은 음이 縣이니, “袨服”은 화려한 옷이다. “玉食”은 진귀한 음식이다., 농부들은 술지게미나 쌀겨도 모자라고 잠부蠶婦들은 짧은 옷도 모자랍니다. 이 때문에 농사를 짓는 사람이 날마다 줄어들어 전지田地가 황폐해지니, 굶주림과 추위의 근본이 실제 여기에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사치스럽고 진귀한 물건들은 모두 마땅히 금지시키고, 길사吉事흉사凶事에는 격식만 갖추며, 농사와 뽕나무 심기를 권하고, 상과 벌을 엄격히 하면 몇 년 안에 반드시 넉넉해질 것입니다.
지난해에 호적과 관향貫鄕注+③ 貫은 鄕籍이다. 조사해보니 조세와 부세가 가볍고 줄어 신이 다스리는 제주齊州는 세금으로 받은 곡식으로 겨우 봉록을 줄 수 있고, 대략 창고에 들일 것이 없으니, 비록 백성들에게 이익이 있더라도 오래 갈 수는 없습니다.
만일 전쟁이 일어나거나 재해라도 만나면 공급하는 지역에서 가져다 구제할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견포絹布로 받는 것을 줄이고 곡식으로 받는 세금을 더 늘려서 풍년이 드는 해에 많이 비축해놓았다가 수확이 적은注+④ 그해 수확이 적은 것을 ‘儉’이라 한다. 해에 풀어서 빌려주면 이른바 사사로운 백성들의 곡식을 관청에다 맡겨 쌓아두는 것이니, 관청에 오랫동안 쌓아놓게 되면注+⑤ 宿積의 積(저축하다)은 子智의 切이다. 백성들에게 흉년은 없게 될 것입니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조서를 내려 창고를 열어 진대賑貸하도록 하고, 백성들이 관문을注+⑥ 北魏는 平城에 도읍하였는데, 도읍 근방에는 중요한 길목에 관문을 설치하여 왕래하는 사람을 기찰하였고 세금을 징수하였다. 나가 먹을 것을 찾는 것을 허락해주되, 사신을 파견하여 명부名簿를 만들어 떠나는 자와 남는 자를 구분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양식을 주고, 가는 곳마다 삼장三長들이 이들을 넉넉히 먹여주도록 하였다.
[] 8월에 유연柔然북위北魏를 침략하자, 북위北魏 사람들이 유연을 격파하였다. 고차高車아복지라阿伏至羅는 스스로 왕이 되었다.
[] 유연柔然복명돈가한伏名敦可汗이 잔인하고 포악하니 부하들이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었다. 8월에 유연이 북위北魏의 변경을 침략하자 북위北魏상서尙書 육예陸叡注+① 陸叡는 陸麗의 아들이다. 도독都督으로 삼아 그들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애초에 고차高車아복지라阿伏至羅는 부락민 10여만 명을 데리고 있었는데 유연에 예속되어 부림을 받았다. 복명돈가한伏名敦可汗북위北魏를 침략할 때 아복지라가 간언하였으나 듣지 않자 아복지라는 화가 나서 사촌동생 아복궁기阿伏窮奇와 함께 부락 사람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달아나서 스스로 왕이 되었다.
두 사람은 매우 친하고 화목하여 를 나누어 세웠는데, 복명돈가한이 그들을 공격하다가 여러 차례 패배하자,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이주하였다.
[] 9월에 북위北魏궁인宮人을 내보내고 말작末作(무익한 일)을 폐지하였다.
[] 북위北魏가 조서를 내려 기부起部(석공石工의 일을 관장하는 부서)에서 아무런 도움이 없는 직위를 폐지하고 베를 짜지 않는 사람들을 궁인宮人을 내보냈다. 또 상방尙方에서 비단에 수를 놓는다든지 비단에 무늬를 넣는 장인들을 없애고, 백성들 중에 만들고자 하는 자는 그렇게 해주었다.注+① ≪資治通鑑≫에는 “任之無禁(맡겨두고 금지하지 않았다.)”으로 되어 있다.
이때 북위北魏에는 오랫동안 특별한 일이 없어서 의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 있었기에 조서를 내려 어부御府에 있는 의복과 진귀한 보물과 태관太官에 있는 여러 가지 기물과 태복太僕에 있는 수레에 쓰이는 도구와 궁궐 내의 창고에 있는 활과 화살, 칼注+② 鈐은 其廉의 切이니, 칼이다. 중에 10분의 8을 모두 내보내도록 하였고,
궁궐 밖에 있는 창고의 직물과 비단, 베, 솜, 실 가운데 국가의 용도에 쓰이지 않는 것은 절반 이상을 백사百司를 비롯하여 아래로 공인과 상인, 노예에 이르기까지 나누어주고, 육진六鎭의 변경에서 수비를 서는 사람과 경기 지역 내의 외롭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까지 차등 있게 나주어주었다.
뒤에 또 궁인宮人을 내보내어 북진北鎭注+③ 北鎭은 六鎭이다. 일설에 “懷朔鎭이다.” 하니, 바로 平城 북쪽에 있다. 사람 중에 가난하여 아내가 없는 자에게 내려주었다.
[] 겨울 12월에 북위北魏고우高祐서연주자사西兗州刺史로 삼았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비서령祕書令 고우高祐에게注+① 高祐는 高允의 종조 아우이다. 묻기를, “어떻게 하면 도둑질을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옛날에 탁무卓茂가 교화를 시행하니 황충蝗蟲이 경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注+② 宋均의 일은 漢 明帝 永平 7년(64)에 보인다. 卓茂가 密令이 되어 교화가 크게 행해졌는데, 漢 平帝 때에 천하가 蝗蟲의 피해를 입었으나 密縣의 경계 지역만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물며 도적은 사람이라, 만일 훌륭한 수재守宰를 얻어 다스리고 교화하는 데 방법이 있다면 쉽게 그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우가 또 아뢰기를 “지금의 관리 선발은 견식과 치적의 우열로 뽑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근무한 연수와 공적의 많고 적음으로 뽑으니, 이는 사람의 재능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얄팍한 재주를 그치게 하고 더러운 공적을 버리고 오로지 재능 있는 자를 천거하면 관로官路가 깨끗해질 것입니다.注+③ 方(방향)은 道이다. 穆은 화목하다는 뜻이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또 공훈이 있는 오래된 신하 중에 백성을 어루만지는 재주가 없는 사람은 작위와 상금을 더 줄 수는 있으나 한 방면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기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이른바 ‘왕은 다른 사람에게 사적으로 재물을 줄 수는 있지만, 사적으로 관직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다.’注+④ “王者不私人以官”은 ≪漢書≫ 〈佞幸傳〉 贊에 나오는 말이다.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위주魏主가 이를 옳게 여겼다.
고우가 외직으로 나가 활대滑臺진수鎭守하여 명을 내려 에는 강학講學을 세우고 향당鄕黨에는 소학小學을 세우게 하였다.


역주
역주1 (我)[戎] : 저본에는 ‘我’로 되어 있으나, ≪魏書≫ 〈韓麒麟列傳〉에 의거하여 ‘戎’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 魏出宮人 罷末作 : “魏主(拓跋宏)가 한창 왕성한 나이에 이러한 조서가 있었으니, 이때에 남보다 훨씬 뛰어났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出宮人’을 기록한 것은 9번이다(漢 成帝 綏和 2년(B.C.7)에 자세하다.).[魏主以方富之年 而有此詔 於是過人遠矣 終綱目書出宮人九(詳漢成帝綏和二年)]” ≪書法≫“拓跋氏가 中原을 차지한 이래로 胡族의 풍속을 아직 고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魏主가 賢明하였으므로 그 政事와 베푼 일이 모두 볼만하였으니, 예컨대 班祿(등급에 따라 녹봉을 나누어주다.), 均田, 辟雍을 짓는 일, 樂章을 결정하는 일, 賑貸하도록 조서를 내리는 일, 宮人을 내보내는 일, 末作(무익한 일)을 폐지한 일 등은 모두 南朝에서는 없던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특별히 기록하고 누차 기록하여 한 번만 기록에 그치지 않았으니, 어찌 夷狄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그 아름다움을 마침내 덮어두겠는가. 인정해주는 것이 마땅하다.[拓跋氏自有中原以來 胡俗未改 至是魏主賢明 故其政事施設 皆有可觀 如班祿 均田 作辟雍 定樂章 詔賑貸 出宮人 罷末作等事 皆南朝之所無者 綱目特書屢書 不一書而止 豈以其出於夷狄之故 而遂掩其美哉 予之 宜也]” ≪發明≫
역주3 宋均이……건너갔고 : 宋均은 後漢 光武帝 때 九江太守를 역임하였다. 태수로 있을 때 구강 지방에 범이 많은 것을 보고 “범이 산에 있는 것은 자라가 물에 있는 것과 같다. 지금 백성을 해치는 것은 잔혹한 관리이다.”라고 하고는 奸吏를 물리치기에 힘썼더니, 범이 모두 동쪽으로 강을 건너가버렸다 한다.(≪後漢書≫ 권41 〈宋均列傳〉)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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