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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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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昇明二年이요 魏太和二年이라
春正月 宋沈攸之軍潰走死하니 蕭道成自爲太尉都督十六州諸軍事하다
攸之 盡銳攻郢城이어늘 柳世隆 乘間屢破之하니 攸之 素失人情이라 但劫以威力이러니 及城久不拔 逃者稍多어늘 攸之 日夕乘馬하여 歷營撫慰로되 而去者不息이라
攸之大怒하여 令軍中曰 軍有叛者 軍主任其罪하리라 於是 咸有異計하니 劉攘兵 射書入城請降한대 世隆納之어늘 攘兵 燒營而去하니
攸之軍遂大散하여 諸將皆走러니 臧寅曰 幸其成而棄其敗 吾不忍爲也라하고 乃投水死하다 散軍更相聚結하니 可二萬人이라 隨攸之하여 還江陵이러라
張敬兒 旣斬攸之使者하고 即勒兵하여 偵攸之下하여 遂襲江陵하고 誅其子孫하니 攸之將至 聞敬兒已據城하고 士卒皆散하니 乃縊而死하다
荊州參軍邊榮 爲府錄事所辱이어늘 攸之爲榮하여 鞭殺錄事러니 及敬兒將至 榮爲留府司馬
或說之降한대 榮曰 受沈公厚恩 如此하니 一朝緩急 便易本心 吾不能也라하다 城潰 軍士執以見敬兒한대
敬兒曰 邊公何不早來오하니 榮曰 沈公 見留守城하니 不忍委去 本不祈生하니 何須見問注+祈, 求也.이리오 敬兒曰 死何難得이리오 命斬之하니 榮懽笑而去러라
榮客程邕之抱榮曰 與邊公周遊라가 不忍見其死하노니 乞先見殺하라 兵人以告한대 敬兒曰 求死甚易하니 何爲不許리오하고 乃先殺邕之而後及榮하니 軍人莫不垂泣하더라
蕭道成還鎭東府하여 以其子賾爲江州刺史하고 嶷爲中領軍하고 加道成太尉하고 都督南徐等十六州諸軍事하고 褚淵爲中書監司空注+十六州, 南徐․南兗․徐․兗․靑․冀․司․豫․荊․雍․襄․郢․梁․益․廣․越也.하다
吏部郎王儉 神彩淵曠하고 好學博聞하여 少有宰相之志하니 道成以爲長史하여 待遇隆密하여 事皆委之注+儉, 僧綽之子也.하다
夏四月 宋蕭道成殺南兗州刺史黃回하다
回不樂在郢州하여 固求南兗하여 遂帥部曲輒還이어늘 因改授之러니 蕭道成 以回終爲禍亂이라하여 召入東府殺之하고 以蕭映行南兗州事注+映, 嶷之弟也.하다
五月 魏禁宗戚士族與非類昏偶하여 以違制論하다
◑秋八月 宋禁公私奢侈하다
蕭道成 以大明以來 公私奢侈라하여 奏罷御府省二尙方彫飾器玩注+御府令, 自漢以來有之, 漢屬少府, 晉屬光祿勳. 據宋紀, 世祖大明四年, 改細作署令爲左右御府令.하고 又奏禁民間華僞雜物凡十七條注+按蕭子顯齊書 “表禁 ‘不得以金銀爲箔, 馬乘具不得金銀度, 不得織成繡裙, 道路不得著錦履, 不得用紅色爲幡蓋衣服, 不得剪綵帛爲雜花, 不得以綾作雜服飾, 不得打鹿行錦及局腳檉柏牀, 牙箱籠雜物, 綵帛作屏障, 錦緣薦席, 不得私作器仗, 不得以七寶飾樂器, 又諸雜飾物不得以金銀爲花獸, 不得輒鑄金銅爲像.’ 皆頒墨勅, 凡十七條.”하다
宋以蕭賾爲領軍將軍하고 蕭嶷爲江州刺史하다
◑九月朔 日食하다
◑宋蕭道成自爲太傅楊州牧하고 加殊禮하다
蕭道成 欲傾宋室하여 夜召長史謝朏하여 屏人與語久之러니 朏無言注+朏, 敷尾切.이어늘
道成 慮朏難提燭小兒하여 取燭遣出注+時唯有一兒秉燭侍傍, 道成慮朏難小兒之竊聽, 故不肯言.하니 朏又無言이어늘 道成乃呼左右하니 莊之子也
王儉知其指하고 它日 請間하여 言於道成曰 功高不賞 古今非一이니 以公今日位地 欲終北面可乎
道成 正色裁之 而神采內和어늘 儉因曰 儉蒙公殊眄하니 所以吐所難吐어늘 何賜拒之深也 宋氏失德하니 非公이면 豈復寧濟리오 但人情澆薄하여 不能持久하나니 公若小復推遷이면 則人望去矣 豈唯大業永淪이리오 七尺亦不可得保注+七尺, 謂七尺之軀也.라한대
道成曰 卿言不無理로다 儉曰 公今名位 故是經常宰相이니 宜絕禮群后하여 微示變革이나 然當先令褚公知之注+群后, 諸王公也. 謂比群后儀禮殊絶出乎其類也.라하다
少日 道成自造褚淵하여 款言移晷러니 乃曰 我夢得官호라 淵曰 今授始爾 恐一二年間 未容便移注+今授始爾, 謂方加太尉․都督也.
道成 還以告儉한대 儉曰 褚未達耳라하고 卽唱議加道成太傅하고 假黃鉞하니
道成 謂所親任遐曰 褚公不從하니 柰何 遐曰 彥回 惜身保妻子 非有奇才異節하니 遐能制之라하다
淵果無違異注+彥回, 淵字.어늘 詔進道成假黃鉞大都督中外諸軍事太傅領揚州牧하고 劍履上殿하여 入朝不趨하고 贊拜不名하더라
冬十月 宋以蕭映爲南兗州刺史하고 以蕭晃爲豫州刺史注+晃, 映之弟也.하다
李夫人之父也 馮太后忌之하여 誣以南叛殺之하니 太后以猜嫌所夷滅者十餘家로되 而惠所歷 皆有善政하니 魏人尤冤惜之하더라
宋定音樂하다
尙書令王僧虔奏호되 朝廷以宮縣合和鞞拂하니 節數雖會 慮乖雅體注+縣, 與懸通. 天子宮懸, 謂四面皆懸, 如宮之有墻也. 合音閤. 和, 去聲, 聲相應也. 鞞, 與鼙同. 鞞․拂, 皆舞名也. 晉志曰 “舞未詳所起, 然漢代已施於宴享矣. 拂舞出自江左, 亦陳於殿庭. 今之淸商 實由銅爵하니 中庸和雅 莫近於斯 而情變聽移하여 亡者將半이라 民間競造新聲하여 煩淫無極하니 宜命有司하여 悉加補綴이라하니 從之注+魏太祖起銅爵臺於鄴, 自作樂府, 被於管弦, 後遂置淸商令以掌之, 屬光祿勳.하다
魏以高允爲中書監하다
高允以老疾 告歸鄉里러니 尋復以安車徵至平城하여 拜鎭軍大將軍中書監하니 固辭不許하고 詔乘車入殿하고 朝賀不拜하다


나라 순제順帝 유준劉準 승명昇明 2년이고, 북위北魏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태화太和 2년이다.
[] 봄 정월에 나라 심유지沈攸之의 군대가 궤멸하여 달아나고 죽으니, 소도성蕭道成이 스스로 태위太尉 도독십육주제군사都督十六州諸軍事의 지위에 올랐다.
[] 심유지沈攸之가 정예 군사를 모두 출동시켜 영성郢城을 공격하였는데, 유세륭柳世隆이 기회를 틈타서 여러 차례 그를 격파하였다. 심유지는 평소에 인심을 잃어서 다만 위엄과 힘으로 겁을 주었는데, 성이 오랫동안 함락되지 못하여 도망치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자, 심유지가 매일 저녁에 말을 타고 군영을 돌아다니면서 위무하였지만 떠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심유지가 크게 화를 내면서 군중에 명령하기를 “군대 안에 배반하는 자가 있으면 군주軍主들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배반할 마음을 품게 되었는데, 유양병劉攘兵이 화살에 편지를 묶어 성안으로 쏘아 들여보내 항복을 받아줄 것을 요청하니 유세륭이 그를 맞아들이자, 유양병이 군영을 불태우고 떠나버렸다.
심유지의 군대가 드디어 크게 흩어져서 장수들이 모두 도주하니, 장인臧寅이 말하기를 “그가 성공하면 다행으로 여기고 그가 패배하면 버리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라고 하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흩어진 군사들이 다시 모여드니, 2만 명 정도 되어 심유지를 따라 강릉江陵으로 돌아왔다.
장경아張敬兒가 이미 심유지가 보낸 사자의 목을 베고 즉시 군대를 정돈하여 심유지가 하류로 내려간 것을 정탐하고는 드디어 강릉을 습격하여 그의 아들과 손자를 죽였는데, 심유지가 강릉에 도착할 적에 장경아가 이미 성을 점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졸들이 모두 흩어지니, 심유지가 목을 매고 죽었다.
[] 예전에 형주참군荊州參軍 변영邊榮녹사錄事에게 모욕을 당하였는데, 심유지沈攸之가 변영을 위하여 녹사를 채찍질하여 죽였다. 장경아張敬兒가 도착할 적에 변영은 유부사마留府司馬였다.
어떤 사람이 장경아에게 항복하라고 설득하니 변영이 말하기를 “심공沈公의 두터운 은혜를 입은 것이 이와 같으니, 하루아침에 위급하다고 하여 곧바로 본심을 바꾸는 일은 내가 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군사들이 변영을 체포하여 장경아에게 보였는데,
장경아가 말하기를 “변공邊公은 어찌하여 일찍 오지 않았는가?”라고 하니, 변영이 말하기를 “심공이 남아서 성을 지키라고 하였기에 차마 버리고 떠나지 못했다. 본래 살기를 바라지注+① 祈는 요구한다는 뜻이다. 않았으니, 어찌 질문을 기다리겠는가.”라고 하였다. 장경아가 말하기를 “죽는 것이야 무엇이 어려울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목을 베라고 명하자 변영이 기쁨의 미소를 지으면서 나갔다.
변영의 문객인 정옹지程邕之가 변영을 껴안고 말하기를 “변공과 두루 종유從遊하였으니, 차마 그대의 죽음을 볼 수가 없소. 먼저 나를 죽이시오.”라고 하였다. 병사가 들어가서 고하니, 장경아가 말하기를 “죽기를 바란다면 아주 쉬운 일이니, 어찌 허락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먼저 정옹지를 죽이고 뒤이어 변영을 죽이니, 군사들 중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소도성이 돌아와 동부東府진수鎭守하고서 그의 아들 소색蕭賾강주자사江州刺史로 삼고, 소억蕭嶷중령군中領軍으로 삼고, 소도성 자신은 태위太尉의 직책을 더하고 도독남서등십육주제군사都督南徐等十六州諸軍事注+② 16州는 南徐州․南兗州․徐州․兗州․靑州․冀州․司州․豫州․荊州․雍州․襄州․郢州․梁州․益州․廣州․越州이다. 되었으며, 저연褚淵중서감中書監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이부랑吏部郎 왕검王儉注+③ 王儉은 王僧綽의 아들이다. 정신과 모습이 고요하고 밝았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견문이 넓어 젊어서 재상이 될 뜻을 지니고 있었는데, 소도성이 왕검을 장사長史로 삼아 융숭하고 친밀하게 대우하여 일을 모두 그에게 맡겼다.
[] 여름 4월에 나라 소도성蕭道成남연주자사南兗州刺史 황회黃回를 죽였다.
[] 황회黃回영주郢州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굳이 남연南兗을 달라고 요구하여 드디어 부곡部曲을 이끌고 갑자기 돌아오니, 그로 인해 바꾸어 임명하였는데, 소도성蕭道成이 황회가 끝내 화란禍亂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불러서 동부東府로 들어오게 하여 죽이고, 소영蕭映행남연주사行南兗州事로 삼았다.注+① 蕭映은 蕭嶷의 동생이다.
[] 5월에 북위北魏종척宗戚사족士族이 동류가 아닌 사람과 혼인하는 것을 금지하여 〈어긴 사람은〉 제명制命을 어긴 것으로 논죄하였다.
[] 가을 8월에 나라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사치를 금하였다.
[] 소도성蕭道成 이래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사치가 행해진다 하여 어부御府注+① 御府令은 漢나라 이후로 있었는데, 漢나라 때에는 少府에 소속되었고, 晉나라 때에는 光祿勳에 소속되었다. ≪宋書≫ 〈孝武帝本紀〉에 의거하면 宋 世祖 大明 4년(460)에 細作署令을 바꾸어 左․右御府令으로 삼았다. 폐지하고 두 곳 에서 완호품을 꾸며 만드는 것을 줄이기를 주청하고, 또 민간에서 겉치레하는 잡다한 물건을 금지시킬 것을 모두 17조목으로 주청하였다.注+② 살펴보건대 蕭子顯의 ≪南齊書≫ 〈髙帝本紀〉에 “표문으로 금지하기를, ‘금과 은으로 주렴을 만들 수 없고, 말과 수레의 장식은 금과 은으로 鍍金할 수 없으며, 織物에 비단 옷을 만들 수 없고, 도로에서는 비단 신발을 착용하지 못하며, 홍색으로 깃발과 덮개와 의복을 만들 수 없고, 채색비단을 잘라서 雜花를 만들 수 없으며, 비단으로 잡된 복식을 만들 수 없고, 鹿行錦(채색 비단의 일종), 局腳檉柏牀(다리가 굽은 상의 일종), 상아로 만든 상자와 잡된 물건, 채색 비단으로 만든 가리개, 비단을 두른 좌석을 만들 수 없으며, 사적으로 무기를 만들 수 없고, 七寶로 악기를 장식하지 못하며, 또 여러 장식품은 금과 은으로 꽃과 동물 문양을 만들 수 없고, 금과 동을 녹여 동상을 만들지 못한다.’ 하였는데, 모두 문서로 된 조서로 반포하니 총 17개 조목이었다.” 하였다.
[] 나라가 소색蕭賾영군장군領軍將軍으로 삼고 소억蕭嶷강주자사江州刺史로 삼았다.
[] 9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나라 소도성蕭道成이 스스로 태부太傅 양주목楊州牧에 오르고 수례殊禮를 더하였다.
[] 소도성蕭道成나라 왕실을 무너뜨리려고 밤중에 장사長史 사비謝朏(사비)를注+① 朏는 敷尾의 切이다. 불러 사람을 물리고 함께 오랫동안 이야기하였는데, 사비가 말이 없었다.
소도성이 사비가 촛불을 들고 있는 작은 아이를 어렵게 여긴다고 생각하여 촛불을 빼앗아 아이를 내보냈으나注+② 이때에 한 아이가 촛불을 들고 옆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蕭道成이 謝朏가 아이가 몰래 들을까 어려워하여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사비가 또 말이 없자, 소도성이 마침내 좌우의 사람들을 불렀다. 사비는 사장謝莊의 아들이다.
왕검王儉이 소도성의 뜻을 알아차리고 다른 날에 틈을 청하여 소도성에게 말하기를 “공로가 너무 높아서 그에 상응하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만이 아니니, 공이 지금의 지위를 가지고서 끝내 북면北面하려고 한들 가능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소도성이 정색을 하며 제지했지만, 정신과 모습은 속으로 온화하니, 왕검이 이어서 말하기를 “저는 공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니, 이 때문에 입 밖에 내기 어려운 말을 내었는데 어찌하여 깊이 거절하는 것입니까. 송씨宋氏는 덕을 잃었으니, 공이 아니면 어찌 다시 안정을 이룩하겠습니까. 그러나 인심은 야박하여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니, 공이 만약 조금이라도 다시 남을 밀어올린다면 사람들의 바람도 떠나갈 것이니, 어찌 대업大業만이 영원히 망하여 없어질 뿐이겠습니까. 일곱 척의 몸도注+③ “七尺”은 7척의 몸을 말한다. 보존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소도성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니, 왕검이 말하기를 “공의 지금 명망과 지위가 본래 보통 재상과 같으니, 마땅히 예의를 여러 왕공王公들과 월등하게 하여注+④ 群后는 여러 王公이니, 〈“宜絕禮群后”는〉 여러 群后와 비교하여 儀禮를 그 부류보다 월등히 뛰어나게 한다는 말이다. 조금씩 변화를 보이십시오. 그러나 응당 저공褚公(저연褚淵)으로 하여금 먼저 그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 며칠이 지나서 소도성蕭道成이 스스로 저연褚淵에게 가서 해가 저물 때까지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다가 마침내 말하기를 “나는 꿈에 관직을 얻었소.”라고 하니 저연이 말하기를 “지금 막 께서 제수되었는데注+① “今授始爾”는 지금 막 太尉․都督에 제수되었음을 말한다., 1, 2년 사이에 옮기기가 용이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라고 하였다.
소도성이 돌아와서 왕검에게 말하니, 왕검이 말하기를 “저연이 이치를 모를 뿐입니다.”라고 하고 곧바로 소도성에게 태부太傅 벼슬을 덧붙여주고 황월黃鉞을 하사할 것을 건의하게 하였는데,
소도성이 자신과 친한 임하任遐에게 말하기를 “저공褚公이 따르지 않으니 어찌해야겠는가?”라고 하였다. 임하가 말하기를 “언회彥回注+② 彥回는 褚淵의 字이다. 몸을 아껴서 처자를 보호할 사람이지, 기이한 재주와 남다른 절의를 갖고 있지 않으니, 제가 그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저연이 과연 반대할 생각이 없자, 조서를 내려 소도성에게 가황월假黃鉞 대도독중외제군사大都督中外諸軍事 태부太傅 영양주목領揚州牧에 오르게 하고,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 어전御殿에 오르게 하여 조정에 들어와서는 종종걸음으로 걷지 않고, 배알할 때에는 찬례贊禮가 그 성명을 부르지 않도록 하였다.
[] 겨울 10월에 나라가 소영蕭映남연주자사南兗州刺史로 삼고 소황蕭晃注+① 蕭晃은 蕭映의 아우이다.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았다.
[] 12월에 북위北魏 풍태후馮太后청주자사靑州刺史 남군왕南郡王 이혜李惠를 죽였다.
[] 이혜李惠이부인李夫人의 부친이다. 풍태후馮太后가 그를 미워하여 남쪽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무고하여 죽였으니, 태후가 시기하고 혐오하여 죽인 사람이 10여 가구였으나 이혜는 역임한 관직에서 모두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북위北魏 사람들이 더욱 원통하고 애석해하였다.
[] 나라가 음악音樂을 제정하였다.
[] 상서령尙書令 왕승건王僧虔이 주청하기를 “조정에서 궁현宮縣(궁중에서 음악을 연주할 때 악기를 사면에 배열하는 것)으로 비무鞞舞불무拂舞로 조화를 이루게 하였으니, 절수節數는 비록 들어맞지만 바른 형식을 어그러뜨렸다고 생각합니다.注+① 縣(매달다)은 懸과 통용한다. 天子의 宮懸은 4면에 모두 악기를 거는 것인데, 궁실의 4면이 담장으로 둘러싸인 것과 같다. 合(합하다)의 음은 閤이다. 和(화합하다)는 去聲이니, 소리가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鞞(북)는 鼙와 동일하다. 鞞․拂은 모두 춤의 이름이다. ≪晉書≫ 〈樂志〉에 이르기를 “鼙舞는 언제 생겨났는지 상세하지 않지만, 漢代에 이미 연향에서 시행되었다. 拂舞는 江左(東晉)에서 시작되어 역시 殿庭에서 시행되었다.” 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청상淸商은 실제로 동작銅爵에서 나온 것이니注+② 魏나라 太祖(曹操)가 鄴 땅에 銅爵臺를 지었는데, 스스로 樂府를 짓고 管弦을 입혔고, 그 후에 드디어 淸商令을 두어 관장하게 하여 光祿勳에 소속시켰다., 중용中庸의 조화와 전아함이 이보다 가까운 것이 없으나 실정이 바뀌고 듣는 것도 달라져서 없어진 것이 거의 반입니다. 민간에서는 다투듯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어 번거롭고 음란하기가 끝이 없으니,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모두 보완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그의 말대로 하였다.
[] 북위北魏고윤高允중서감中書監으로 삼았다.
[] 고윤高允이 늙고 병이 들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얼마 뒤에 다시 안거安車로 불러서 평성平城으로 오게 하여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중서감中書監에 제수하니 굳게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조서를 내려 수레를 타고 궁으로 들어오게 하고 조하朝賀할 때에는 절을 하지 않게 하였다.


역주
역주1 大明 연간 : 宋 孝武帝 때의 연호(457~464)이다.
역주2 尙方 : 고대에 제왕이 사용하는 기물을 제조하는 官署이다.
역주3 魏太后殺其靑州刺史南郡王李惠 : “李訢을 죽일 적에 다만 ‘魏’라고 기록했는데 여기서 太后를 지적하여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태후가 사욕을 부렸기 때문이다. 이흔은 실로 小人이니 다만 죽인 것이 해당하는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李惠의 경력에는 모두 善政이 있었으니 賢人이었다. 그런데 다만 李夫人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꺼려서 죽였으니, 그 사사로움이 심하므로 지적하여 기록한 것이다.[殺李訢 止書魏 此其斥書太后 何 太后私也 訢實小人 但殺之不以其罪耳 惠之所歴 皆有善政 則賢也 而徒以李夫人之父 忌而殺之 其私甚矣 故斥書之]” ≪書法≫“이전에 李訢을 죽인 것도 馮氏였는데 지금에 와서 또 李惠를 죽였으니 그 악행이 또한 방자하므로 특별히 ‘太后’라고 기록하여 미워한 것이다.[前殺李訢 亦馮氏也 至是又殺李惠 則其惡亦肆矣 故特書太后以惡之]” ≪發明≫
역주4 (聲)[鼙] : 저본에는 ‘聲’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鼙’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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