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詔故譙王氶, 戴淵, 周顗及甘卓, 虞望, 郭璞等贈官有差하다
周札故吏爲札訟寃이어늘 尙書卞壼이 議하여 以爲札開門延寇하니 不當贈諡니이다
王導는 以爲往年之事는 敦姦逆未彰하니 自臣等有識以上으로 皆所未悟하여 與札無異하니이다 既悟其姦하여는 札이 便以身許國하여 尋取梟夷하니 臣謂宜與周, 戴同例니이다
郗鑒은 以爲周, 戴死節하고 周札延冦하니 事異賞均이면 何以勸沮리오 如司徒議면 則譙王, 周, 戴皆應受責이니 何贈諡之有리오 今三臣既褒면 則札宜貶이 明矣니이다
導曰 札與譙王, 周, 戴로 雖所見有異同이나 皆人臣之節也니이다
鑑曰 敦之逆謀는 履霜日久하니 若以往年之舉로 義同桓, 文이면 則先帝可爲幽, 厲邪잇가
目
右衛將軍虞胤과 左衛將軍南頓王宗이 俱爲帝所親任하여 典禁兵하고 直殿内하니
多聚勇士
하여 以爲羽翼
注+胤, 元敬皇后之弟也. 元帝爲琅邪王, 納虞氏爲妃, 卽位, 追謚曰敬皇后, 祔廟, 從元帝謚曰元敬. 宗, 汝南王亮之子也, 元康中, 封南頓縣侯, 尋進爵爲公, 討劉喬有功, 進封王.이어늘 王導, 庾亮
이 頗以爲言
호되 帝待之愈厚
하여 宫門管鑰
을 皆委之
注+胡三省曰 “管, 鍵也. 鑰, 關牡也. 今謂之鎖匙.”러라
帝寢疾에 亮이 夜有所表하여 從宗求鑰한대 宗이 不與하고 叱亮使曰 此汝家門户邪아하니 亮이 益忿之러니 及帝疾篤에 群臣이 無得進者라
亮이 疑宗, 胤有異謀하여 排闥入見하고 請黜之한대 帝不納하고
引太宰西陽王羕과 司徒導及尙書令卞壼과 將軍郗鑒, 庾亮, 陸曄, 丹楊尹温嶠하여 竝受遺詔하여 輔太子하고 更以亮爲中書令而崩하다
帝明敏有機斷이라 故로 能以弱制强하여 誅翦逆臣하고 克復大業하니라
目
[목目] 조명詔命을 내려서 고故 초왕譙王 사마승司馬氶과 대연戴淵, 주의周顗 및 감탁甘卓, 우망虞望, 곽박郭璞 등에게 차등을 두어 관직을 추증하였다.
주찰周札의 옛 부하 관리가 주찰을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하자, 상서尙書 변곤卞壼(변곤)이 의논하여 이르기를 “주찰은 문을 열어 역적을 맞이하였으니, 시호를 내려서는 안 됩니다.” 하였고,
왕도王導는 말하기를 “지난해의 일은 왕돈王敦의 간악한 역모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었으니, 신 등 식견이 있는 사람들조차 모두 이것을 깨닫지 못하여 주찰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주찰이 왕돈의 간악함을 깨닫고 나서는 곧 몸을 나라에 바쳐서 얼마 후 왕돈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신臣은 생각하건대 마땅히 주의, 대연과 같은 예例로 대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치감郗鑒은 말하기를 “주의와 대연은 충절에 죽었고 주찰은 역적을 맞아들였으니, 일이 다른데
상賞이 똑같으면 어떻게
선善을 권면하고
악惡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시호를 내려준단 말입니까. 지금 세 신하를 이미 표창했으니, 그렇다면 주찰은 마땅히 폄하해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였다.
왕도가 말하기를 “주찰이 초왕, 주의, 대연과 비록 소견에 차이가 있었으나, 모두 신하의 절개입니다.” 하였다.
치감이 말하기를 “왕돈의 역모는 그 계획이 싹터 모습을 드러낸 지가 오래되었으니,
하였다.
目
[목目] 후조後趙의 장수 석생石生이 하남河南 지역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니, 사주자사司州刺史 이구李矩와 영천태수潁川太守 곽묵郭黙의 군대가 여러 번 패하고는, 마침내 조趙나라(전조前趙)에 귀의하였다.
조주趙主 유요劉曜가
유악劉岳과
호연모呼延謨로 하여금 석생을
금용金墉에서 포위하게 하였는데,
후조後趙의
석호石虎가 석생을 구원하여 유악을 패배시키고 호연모를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劉曜兵戰敗石虎
유요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유악을 구원하러 오자 석호가 맞아 싸웠는데, 유요의 군대가 까닭 없이 놀라 흩어져 달아나니, 유요가 마침내 장안으로 돌아갔다. 석호가 유악을 사로잡아 죽이자, 유요는 분을 이기지 못하여 병이 들었다.
곽묵郭黙이 남쪽
건강建康으로 달아나고
이구李矩 또한 병력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돌아오다가
노양魯陽에서
注+① 魯陽縣은 南陽郡에 속하였다. 졸卒하니, 이에
사주司州,
예주豫州,
서주徐州,
연주兗州의 지역이 대부분 모두
후조後趙에 편입되어, 〈
진晉나라와〉
회수淮水를 경계로 하였다.
目
[
목目]
우위장군右衛將軍 우윤虞胤과
좌위장군左衛將軍 남돈왕南頓王 사마종司馬宗이
注+① 虞胤은 元敬皇后의 친정 아우이다. 元帝가 琅邪王이 되어 虞氏를 받아들여 妃로 삼았는데, 즉위하자 敬皇后라고 追諡하여 祔廟하고는 元帝의 시호를 따라 元敬皇后라 하였다. 司馬宗은 汝南王 司馬亮의 아들이니, 元康 연간에 南頓縣侯에 봉해졌다가 얼마 후 작위가 올라 公이 되었고, 劉喬를 토벌하여 功을 세워 王으로 進封되었다. 모두 황제(
진晉 명제明帝)의 친애와 신임을 받아서
금군禁軍을 관장하고 궁전 안에서 숙직하였다.
이들이 용사들을 많이 모아서 자신의
우익羽翼으로 삼았는데,
왕도王導와
유량庾亮이 이 일에 대해 자주 아뢰었으나, 황제는 이들을 더욱 후대하여 궁문의 자물쇠와 열쇠를
注+② 胡三省이 말하기를 “管은 자물쇠이고, 鑰은 열쇠이니, 지금은 이것을 鎖匙라 한다.” 하였다. 모두 이들에게 맡겼다.
황제가 병환이 들자, 유량이 밤중에 표문을 올릴 일이 있어서 사마종에게 열쇠를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마종은 주지 않고 유량의 사자를 꾸짖기를 “이것이 너의 집 문호門户이냐?” 하니, 유량이 더욱 분하게 여겼다. 황제의 병환이 위독해졌는데도 여러 신하들 중에 나아가 뵐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이에 유량은 사마종과 우윤이 딴 계책을 꾸미고 있는가 의심해서 문지방을 밀치고 들어가 황제를 뵙고 이들을 내칠 것을 청하였는데, 황제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제는 태재太宰인 서양왕西陽王 사마양司馬羕(사마양)과 사도司徒 왕도王導, 상서령尙書令 변곤卞壼, 장군將軍 치감郗鑒, 유량庾亮, 육엽陸曄(육엽), 단양윤丹楊尹 온교温嶠를 불러들여 이들 모두에게 유조遺詔를 받들어 태자太子를 보필하게 하고, 유량을 다시 중서령中書令으로 삼고는 붕崩하였다.
황제는 명민하고 기지와 결단력이 있었으므로 능히 약함으로 강한 신하를 제재하여 역신逆臣을 죽이고 대업大業을 회복하였다.
目
卞壼 [
목目]
상서성尙書省에서
악모樂謨를
징소徵召하여
으로 삼고
유이庾怡를
정위평廷尉評으로 삼으니,
注+① 樂廣은 南陽郡 사람이니, 樂謨를 징소하여 本郡의 中正으로 삼은 것이다. 漢나라 때에 廷尉平을 두었는데, 晉나라에서는 廷尉評이라고 하였다. 악모는
악광樂廣의 아들이고, 유이는
유민庾珉의
족자族子이다.
이들이 각각 아버지의 명命이라고 칭하고 직책에 나오지 않자, 변곤卞壼이 말하기를 “사람은 아버지가 없이 태어나지 못하고 직책은 일이 없이 성립하지 못하며, 아버지가 있으면 반드시 명命이 있고 직책에 있으면 반드시 후회가 있기 마련이다.
만약 아버지가 각기 그 자식을 사사로이 소유한다면, 왕자王者에게는 백성이 없어서 군신君臣의 도道가 무너질 것이다. 악광과 유민은 태평성세에 총애를 받아서 자기 몸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니, 하물며 후사이겠는가.” 하니, 악모와 유이가 부득이 직책에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