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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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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이라
趙光初八이요 後趙七年이라
春二月 贈故譙王氶, 戴淵, 周顗等官有差하다
詔故譙王氶, 戴淵, 周顗及甘卓, 虞望, 郭璞等贈官有差하다
周札故吏爲札訟寃이어늘 尙書卞壼하여 以爲札開門延寇하니 不當贈諡니이다
王導 以爲往年之事 敦姦逆未彰하니 自臣等有識以上으로 皆所未悟하여 與札無異하니이다 既悟其姦하여는 便以身許國하여 尋取梟夷하니 臣謂宜與周, 戴同例니이다
郗鑒 以爲周, 戴死節하고 周札延冦하니 事異賞均이면 何以勸沮리오 如司徒議 則譙王, 周, 戴皆應受責이니 何贈諡之有리오 今三臣既褒 則札宜貶 明矣니이다
導曰 札與譙王, 周, 戴 雖所見有異同이나 皆人臣之節也니이다
鑑曰 敦之逆謀 履霜日久하니 若以往年之舉 義同桓, 文이면 則先帝可爲幽, 厲邪잇가
이나 卒用導議하다
許昌하여 降後趙注+通鑑 “都尉魯潛, 以許昌叛, 降於後趙.”하다
◑立子衍爲皇太子하다
◑夏五月 以陶侃都督荆湘等州軍事하다
復鎮荆州하니 士女相慶이러라 性聰敏恭勤하여 終日斂膝危坐하여 軍府衆事 檢攝無遺하여 未嘗少閒注+攝, 錄也, 整也.이러라
常語人曰 大禹 聖人이로되 乃惜寸陰하시니 至於衆人하여는 當惜分陰이니 豈可逸遊荒醉하여 生無益於時하고 死無聞於後리오 自棄也니라
諸參佐以談戲廢事者 命取其酒器, 蒱博之具하여 悉投之於江하고
將吏則加鞭扑注+蒱, 卽摴蒱戲也, 晉人多好摴蒱. 以五木擲之, 其采有黑犢, 有雉, 有盧, 得盧者勝. 博, 局戲也. 鞭扑, 蓋重者鞭之, 輕者撻之.하고 曰 摴蒱者 牧猪奴戲耳 老莊浮華 非先王之法言이니 不益實用이라 君子當正其威儀 何有蓬頭跣足하여 自謂宏達邪注+蓬頭, 髮亂如蓬草也.
有奉饋者하면 必問其所由하여 若力作所致 雖微 必喜하여 慰賜參倍注+參, 猶三也.하고 若非理得之 則切厲訶辱하여 還其所饋注+切, 峻切. 厲, 嚴厲. 訶, 責怒也.하니라
嘗出遊라가 見人持一把未熟稻하고 侃問 用此何爲 人云 行道所見 聊取之耳니이다
大怒曰 汝既不佃이어늘 而戲賊人稻라하고 執而鞭之하다 是以 百姓 勤於農作하여 家給人足이러라
嘗造船할새 其木屑, 竹頭 皆令籍而掌之하니 人咸不解注+籍而掌之, 謂籍記而典掌之. 解, 曉也.러니
後正會 積雪始晴하여 聴事前 猶濕이어늘 乃以木屑布地하다 及桓温伐蜀 又以所貯竹頭 作丁裝船하니 其綜理微密 皆此類也注+丁, 讀曰釘.러라
後趙石生 冦河南하니 司州降趙러니
趙主曜撃生이라가 大敗하니 司, 豫, 徐, 兗 皆陷於後趙하다
後趙將石生 冦掠河南하니 司州刺史李矩 潁川太守郭黙 軍數敗하고 乃附於趙
趙主曜使劉岳, 呼延謨 圍生於金墉이러니 後趙石虎救之하여 敗岳하고 撃謨斬之하다
曜自將救岳이어늘 虎逆戰하다 曜軍 無故驚潰하니 遂歸長安이러니 虎擒岳殺之한대 曜憤恚成疾이러라
郭黙 南奔建康하고 李矩亦帥衆南歸라가 卒於魯陽注+魯陽縣, 屬南陽郡.하니 於是 司, 豫, 徐, 兗之地 率皆入於後趙하여 以淮爲境矣러라
秋閏七月 注+壽, 二十七.하다
司徒導, 中書令庾亮, 尙書令卞壼 受遺詔輔政하고 太子衍 即位하여 尊皇后爲皇太后하니 太后하다
右衛將軍虞胤 左衛將軍南頓王宗 俱爲帝所親任하여 典禁兵하고 直殿内하니
多聚勇士하여 以爲羽翼注+胤, 元敬皇后之弟也. 元帝爲琅邪王, 納虞氏爲妃, 卽位, 追謚曰敬皇后, 祔廟, 從元帝謚曰元敬. 宗, 汝南王亮之子也, 元康中, 封南頓縣侯, 尋進爵爲公, 討劉喬有功, 進封王.이어늘 王導, 庾亮 頗以爲言호되 帝待之愈厚하여 宫門管鑰 皆委之注+胡三省曰 “管, 鍵也. 鑰, 關牡也. 今謂之鎖匙.”러라
帝寢疾 夜有所表하여 從宗求鑰한대 不與하고 叱亮使曰 此汝家門户邪아하니 益忿之러니 及帝疾篤 群臣 無得進者
疑宗, 胤有異謀하여 排闥入見하고 請黜之한대 帝不納하고
引太宰西陽王羕 司徒導及尙書令卞壼 將軍郗鑒, 庾亮, 陸曄, 丹楊尹温嶠하여 竝受遺詔하여 輔太子하고 更以亮爲中書令而崩하다
帝明敏有機斷이라 能以弱制强하여 誅翦逆臣하고 克復大業하니라
太子即位하니 生五年矣 群臣進璽 導以疾不至어늘
正色於朝曰 王公 非社稷之臣也로다 大行在殯하시고 嗣皇未立하시니 豈人臣辭疾之時邪아하니 導聞之하고 輿疾而至하다
太后臨朝하여 以導錄尙書事하여 與亮, 壼으로 參輔朝政이나 然大要皆决於亮이러라
尙書召樂謨爲郡中正하고 庾怡爲廷尉評하니 廣之子 珉族子也
各稱父命不就注+廣, 南陽人, 蓋召謨爲本郡中正. 漢置廷尉平, 晉曰廷尉評.어늘 壼曰 人非無父而生이요 職非無事而立이라 有父 必有命이요 居職이면 必有悔
若父各私其子하면 則王者無民하여 而君臣之道廢矣리라 廣, 珉 受寵聖世하여 身非己有하니 況後嗣哉아하니 謨, 怡不得已就職하다
塟武平陵하다
◑冬十一月朔 日食하다
◑十二月 段遼弑其君牙而自立하다
段氏自務勿塵以來 日益彊盛하여 其地西接漁陽하고 東界遼水하고 所統胡, 晉 三萬餘户 控弦 四五萬騎注+控, 滿引也.러라
末杯卒하고 子牙代立이러니 至是하여 疾陸眷之孫遼 攻牙하여 殺而代之하다
代王賀傉하니 弟紇那嗣하다


[] 나라(동진東晉) 숙종肅宗 명황제明皇帝 태령太寧 3년이다.
[] 조주趙主(전조前趙) 유요劉曜 광초光初 8년이고, 후조後趙 고조高祖 석륵石勒 7년이다.
[] 봄 2월에 초왕譙王 사마승司馬氶대연戴淵, 주의周顗 등에게 차등을 두어 관직을 추증하였다.
[] 조명詔命을 내려서 초왕譙王 사마승司馬氶대연戴淵, 주의周顗감탁甘卓, 우망虞望, 곽박郭璞 등에게 차등을 두어 관직을 추증하였다.
주찰周札의 옛 부하 관리가 주찰을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하자, 상서尙書 변곤卞壼(변곤)이 의논하여 이르기를 “주찰은 문을 열어 역적을 맞이하였으니, 시호를 내려서는 안 됩니다.” 하였고,
왕도王導는 말하기를 “지난해의 일은 왕돈王敦의 간악한 역모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었으니, 신 등 식견이 있는 사람들조차 모두 이것을 깨닫지 못하여 주찰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주찰이 왕돈의 간악함을 깨닫고 나서는 곧 몸을 나라에 바쳐서 얼마 후 왕돈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은 생각하건대 마땅히 주의, 대연과 같은 로 대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치감郗鑒은 말하기를 “주의와 대연은 충절에 죽었고 주찰은 역적을 맞아들였으니, 일이 다른데 이 똑같으면 어떻게 을 권면하고 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시호를 내려준단 말입니까. 지금 세 신하를 이미 표창했으니, 그렇다면 주찰은 마땅히 폄하해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였다.
왕도가 말하기를 “주찰이 초왕, 주의, 대연과 비록 소견에 차이가 있었으나, 모두 신하의 절개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끝내 왕도의 의논을 따랐다.
[] 허창許昌이 배반하여 후조後趙에게 항복하였다.注+① ≪資治通鑑≫에 “都尉 魯潛이 許昌을 가지고 배반하여 後趙에 항복했다.” 하였다.
[] 아들 사마연司馬衍황태자皇太子로 세웠다.
[] 여름 5월에 도간陶侃도독형都督荆상등주군사湘等州軍事로 삼았다.
[] 도간陶侃이 다시 형주荆州에 진주하니, 형주의 남녀들이 서로 경하하였다. 도간은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공손하고 부지런하여, 종일토록 무릎을 꿇고 앉아서 군부軍府의 여러 사무事務를 빠짐없이 단속하고 감독하느라注+① 攝은 단속함이고, 정돈함이다. 일찍이 조금도 한가로운 적이 없었다.
陶侃勸人惜分陰陶侃勸人惜分陰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대우大禹성인聖人이셨는데도 한 치의 시간도 아끼셨으니, 보통 사람들은 마땅히 한 푼의 시간이라도 아껴야 한다. 어찌 안일하게 놀고 술에 취하여, 살아서는 당시에 유익함이 없고 죽어서는 후세에 알려짐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이는 스스로 포기하고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여러 참좌參佐들 중에 담소談笑유희遊戲사무事務를 폐하는 자가 있으면, 명하여 술그릇과 도박하는 도구들을注+② 蒱는 바로 摴蒱 놀이이니, 晉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저포 놀이를 좋아하였다. 이는 다섯 개의 나무 조각을 던지며 즐기는 놀이로, 그 패에 黑犢(검은 송아지)이 있고 雉(꿩)가 있고 盧(개)가 있는데, 盧를 얻은 자가 이긴다. 博은 〈장기, 바둑 따위와 같이〉 판을 차리고 마주 앉아서 하는 놀이이다. “鞭扑”은 죄가 무거운 자는 채찍으로 때리고, 가벼운 자는 종아리를 치는 것이다. 가져다가 모두 강물에 던지게 하였고,
장수와 관리들에게는 채찍을 치고 매를 때리며 말하기를 “도박은 돼지를 기르는 종들의 놀이요, 노자老子장자莊子부화浮華한 말은 선왕先王예법禮法에 맞는 말이 아니니, 모두 실용에 유익하지 않다. 군자는 마땅히 그 위의威儀를 바로잡아야 하니, 어찌 쑥대머리에注+③ “蓬頭”는 머리털이 쑥대처럼 어지럽게 흩어진 것이다. 맨발을 하고서 스스로 도량이 넓고 크다고 여긴단 말인가.” 하였다.
선물을 바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내력을 물어서, 만약 자기가 힘써 농사지어 이룬 것이면 비록 하찮더라도 반드시 기뻐하면서 받고는 그의 세注+④ 參은 三과 같다. 배로 위로하고 하사하였으며, 만약 비리非理로 얻은 것이면 준엄하게 꾸짖고 나무라면서注+⑤ 切은 峻切함이고, 厲는 엄함이고, 訶는 꾸짖고 노함이다. 그 물건을 되돌려주었다.
[] 도간陶侃이 일찍이 놀러 나갔다가 어떤 사람이 익지 않은 벼 한 묶음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그 사람은 말하기를 “길을 가다가 보이는 것을 그저 가져왔을 뿐입니다.” 하였다.
도간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도, 장난삼아 남의 벼를 훔쳤다.” 하고는 그를 붙잡아 채찍을 쳤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여 집집마다 풍족하고 사람마다 넉넉하였다.
일찍이 배를 만들 적에, 도간이 나무에서 나온 톱밥과 대나무 조각을 모두 장부에 적어 관장하게 하니, 사람들은 모두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였다.注+① “籍而掌之”는 장부에 기록하여 관장하게 함을 이른다. 解는 이해함이다.
그 후 원단元旦에 모임을 할 적에 쌓였던 눈이 막 갠 날씨에 녹아서 청사聴事 앞이 여전히 흥건하게 젖어 있었는데, 이에 톱밥을 땅에 뿌렸으며, 또 환온桓温 지역을 공격할 적에는 저장해두었던 대나무 조각으로 대못을注+② 丁(못)은 釘으로 읽는다. 만들어 배를 정비하니, 일을 종합하고 처리함에 치밀하고 빈틈없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 후조後趙석생石生하남河南을 침략하니, 사주司州나라(전조前趙)에 항복하였다.
조주趙主 유요劉曜가 석생을 공격하다가 대패하니, 사주司州예주豫州서주徐州연주兗州가 모두 후조後趙에 함락되었다.
[] 후조後趙의 장수 석생石生하남河南 지역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니, 사주자사司州刺史 이구李矩영천태수潁川太守 곽묵郭黙의 군대가 여러 번 패하고는, 마침내 나라(전조前趙)에 귀의하였다.
조주趙主 유요劉曜유악劉岳호연모呼延謨로 하여금 석생을 금용金墉에서 포위하게 하였는데, 후조後趙석호石虎가 석생을 구원하여 유악을 패배시키고 호연모를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劉曜兵戰敗石虎劉曜兵戰敗石虎
유요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유악을 구원하러 오자 석호가 맞아 싸웠는데, 유요의 군대가 까닭 없이 놀라 흩어져 달아나니, 유요가 마침내 장안으로 돌아갔다. 석호가 유악을 사로잡아 죽이자, 유요는 분을 이기지 못하여 병이 들었다.
곽묵郭黙이 남쪽 건강建康으로 달아나고 이구李矩 또한 병력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돌아오다가 노양魯陽에서注+① 魯陽縣은 南陽郡에 속하였다. 하니, 이에 사주司州, 예주豫州, 서주徐州, 연주兗州의 지역이 대부분 모두 후조後趙에 편입되어, 〈나라와〉 회수淮水를 경계로 하였다.
[] 가을 윤7월에 황제( 명제明帝)가 하였다.注+① 향년이 27세였다.
사도司徒 왕도王導, 중서령中書令 유량庾亮, 상서령尙書令 변곤卞壼유조遺詔를 받아 정사를 보필하고, 태자太子 사마연司馬衍이 즉위하여 황후皇后를 높여 황태후皇太后로 삼으니, 태후太后가 조정에 임하여 칭제稱制하였다.
[] 우위장군右衛將軍 우윤虞胤좌위장군左衛將軍 남돈왕南頓王 사마종司馬宗注+① 虞胤은 元敬皇后의 친정 아우이다. 元帝가 琅邪王이 되어 虞氏를 받아들여 妃로 삼았는데, 즉위하자 敬皇后라고 追諡하여 祔廟하고는 元帝의 시호를 따라 元敬皇后라 하였다. 司馬宗은 汝南王 司馬亮의 아들이니, 元康 연간에 南頓縣侯에 봉해졌다가 얼마 후 작위가 올라 公이 되었고, 劉喬를 토벌하여 功을 세워 王으로 進封되었다. 모두 황제( 명제明帝)의 친애와 신임을 받아서 금군禁軍을 관장하고 궁전 안에서 숙직하였다.
이들이 용사들을 많이 모아서 자신의 우익羽翼으로 삼았는데, 왕도王導유량庾亮이 이 일에 대해 자주 아뢰었으나, 황제는 이들을 더욱 후대하여 궁문의 자물쇠와 열쇠를注+② 胡三省이 말하기를 “管은 자물쇠이고, 鑰은 열쇠이니, 지금은 이것을 鎖匙라 한다.” 하였다. 모두 이들에게 맡겼다.
황제가 병환이 들자, 유량이 밤중에 표문을 올릴 일이 있어서 사마종에게 열쇠를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마종은 주지 않고 유량의 사자를 꾸짖기를 “이것이 너의 집 문호門户이냐?” 하니, 유량이 더욱 분하게 여겼다. 황제의 병환이 위독해졌는데도 여러 신하들 중에 나아가 뵐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이에 유량은 사마종과 우윤이 딴 계책을 꾸미고 있는가 의심해서 문지방을 밀치고 들어가 황제를 뵙고 이들을 내칠 것을 청하였는데, 황제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제는 태재太宰서양왕西陽王 사마양司馬羕(사마양)과 사도司徒 왕도王導, 상서령尙書令 변곤卞壼, 장군將軍 치감郗鑒, 유량庾亮, 육엽陸曄(육엽), 단양윤丹楊尹 온교温嶠를 불러들여 이들 모두에게 유조遺詔를 받들어 태자太子를 보필하게 하고, 유량을 다시 중서령中書令으로 삼고는 하였다.
황제는 명민하고 기지와 결단력이 있었으므로 능히 약함으로 강한 신하를 제재하여 역신逆臣을 죽이고 대업大業을 회복하였다.
[] 태자가 즉위하니, 태어난 지 겨우 5년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옥새를 올릴 적에 왕도王導가 병이 있다 하여 조정에 나오지 않자,
변곤卞壼이 조정에서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왕공王公사직社稷의 신하가 아니다. 빈소殯所에 있고 후사를 이은 황제가 아직 즉위하지 않으셨으니, 어찌 신하가 병으로 사양할 때인가.” 하니, 왕도가 이 말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서 수레를 타고 왔다.
태후太后가 섭정하여 왕도를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고서 유량庾亮, 변곤卞壼과 함께 셋이서 조정의 정사를 보필하게 하였다. 그러나 대요大要는 모두 유량에게서 결정되었다.
卞壼卞壼
[] 상서성尙書省에서 악모樂謨징소徵召하여 으로 삼고 유이庾怡정위평廷尉評으로 삼으니,注+① 樂廣은 南陽郡 사람이니, 樂謨를 징소하여 本郡의 中正으로 삼은 것이다. 漢나라 때에 廷尉平을 두었는데, 晉나라에서는 廷尉評이라고 하였다. 악모는 악광樂廣의 아들이고, 유이는 유민庾珉족자族子이다.
이들이 각각 아버지의 이라고 칭하고 직책에 나오지 않자, 변곤卞壼이 말하기를 “사람은 아버지가 없이 태어나지 못하고 직책은 일이 없이 성립하지 못하며, 아버지가 있으면 반드시 이 있고 직책에 있으면 반드시 후회가 있기 마련이다.
만약 아버지가 각기 그 자식을 사사로이 소유한다면, 왕자王者에게는 백성이 없어서 군신君臣가 무너질 것이다. 악광과 유민은 태평성세에 총애를 받아서 자기 몸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니, 하물며 후사이겠는가.” 하니, 악모와 유이가 부득이 직책에 나아갔다.
[] 〈명제明帝를〉 무평릉武平陵에 장례하였다.
[] 겨울 11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12월에 단료段遼가 그 군주 단아段牙를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 단씨段氏무물진務勿塵 이래로 날로 더욱 강성해져서, 그 영토가 서쪽으로는 어양漁陽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요수遼水를 경계로 삼았으며, 통솔하고 있는 오랑캐와 진인晉人(한족漢族)이 3만여 이고 활을 당겨 쏠 수 있는注+① 控은 활을 가득히 당기는 것이다. 기병騎兵이 4, 5만 명이었다.
단말배段末杯하고 아들 단아段牙가 대신 즉위하였었는데, 이때에 단질육권段疾陸眷의 손자 단료段遼가 단아를 공격하여 죽이고 지위를 대신하였다.
[] 대왕代王 탁발하녹拓跋賀傉하니, 아우 탁발흘나拓跋紇那가 뒤를 이었다.


역주
역주1 司徒(왕도)의……하니 :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역모가 일어나기 전에 왕돈의 간악한 마음을 몰랐으므로 똑같이 처벌해야 한다는 왕도의 논의와 같다면 나중에 역모가 들어나서 왕돈을 토벌하고자 했던 사마승, 대연, 주의도 역적을 맞이한 주찰과 같이 똑같이 처벌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역주2 만약……말입니까 : 왕돈을 춘추시대 中原을 제패한 齊나라 桓公과 晉나라 文公에 견준다면, 先帝는 周나라 幽王, 厲王과 같은 폭군에 견주어진다는 뜻이다. 제 환공은 재위 중에 管仲을 재상으로 삼고 개혁을 추진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었으며, 尊王攘夷의 기치를 내걸고 山戎과 楚나라를 정벌하여 춘추시대 중원에서 첫 번째 霸主가 되었다. 진 문공은 공명정대한 정치로 內政을 안정시키고 군사, 경제력을 부흥시켰으며, 이를 토대로 초나라의 대군을 격파해 중원의 평화를 수호하고 踐土에서 제후들을 威服시킴으로써 춘추시대의 두 번째 패주가 되었다. 周나라의 幽王과 厲王은 나라를 망친 昏君의 상징이다. 여왕은 周나라의 제10대 왕으로 無道한 정치를 하다가 國人暴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彘로 出奔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주나라가 쇠락하게 되었다. 유왕은 周나라의 제12대 왕으로 褒姒로 인해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犬戎의 침입을 받아 살해되었는데, 이로써 西周가 끝나고 東周가 시작되었다.
역주3 帝崩 : “賀善의 賛에 말하였다. ‘明帝가 즉위한 지 3년 동안에 ≪資治通鑑綱目≫에서 쓴 것은, 王敦에 관한 내용 외에 后와 太子를 세우고 大臣을 제수하고 대신이 卒한 몇 가지 일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홀로 능히 분발하고 과감하게 결단해서 몸소 흉악무도한 큰 역적(왕돈)을 섬멸하였으니, 현명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므로 ≪자치통감강목≫에 기입한 이래로 일찍이 「親征」을 쓴 경우가 있지 않았는데, 이때 특별히 써서 인정한 것이다.’[賀善賛曰 明帝即位三年 綱目所書 自王敦外 不過立后太子及大臣除卒數事耳 獨能奮發剛斷 躬殄大憝 可謂明也已矣 故自入綱目以來 未有書親征者 於是特書予之]” ≪書法≫
역주4 臨朝稱制 : 太后가 황제를 대신하여 황제의 명령인 制를 칭하고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역주5 大行 : 막 별세한 황제에 대한 敬稱이다.
역주6 郡中正 : 관리 임용제도인 九品中正制에서는 郡마다 中正을 설치하여 이들이 郡 안의 인재를 조사하여 재능과 덕행에 따라 1품에서 9품으로 나누었는데 이를 鄕品이라 한다. 이에 의거하여 인재를 선발하였다.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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