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初에 朝廷이 符下秦, 雍하여 召還流民入蜀者하고 又遣御史馮該하여 督之러니
李特兄輔 自略陽至蜀하여 言中國方亂하니 不足復還이라한대
特이 然之하여 累遣閻式하여 詣羅尙하여 求權停至秋하고 又納賂於尙及該하니 尙, 該許之하다
璽書下益州하여 條列六郡流民與特同討趙廞者하여 將加功賞이러니
辛冉
이 欲以爲己功
하여 不以實上
하니 衆咸怨之
注+上, 時掌切, 下同. 衆, 六郡之衆也.러라 尙
이 督流民
하여 七月上道
하니
時에 流民이 布在梁, 益하여 爲人傭力이러니 聞州郡逼遣하고 人人愁怨하며 且水潦方盛하고 年穀未登하여 無以爲行資라
特이 復求停至冬이어늘 辛冉及犍爲太守李苾이 以爲不可하다
目
[目] 齊王 司馬冏이 사신을 보내어 成都王 司馬穎과 河間王 司馬顒과 常山王 司馬乂와 新野公 司馬歆에게 通告하고
에 격문을 보내어 말하기를 “
逆臣인
孫秀가
趙王을 미혹하게 하고
誤導하니, 마땅히 함께 토벌하여야 한다.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주벌이
三族에 미칠 것이다.”
注+武帝 太康 10년(289)에 司馬乂를 봉하여 長沙王으로 삼았는데, 楚王 司馬瑋가 주살을 당하자, 사마예는 사마위와 어머니가 같은 형제라 하여 常山王으로 폄직되었다가 뒤에 옛 封號를 회복하였다. 司馬歆은 扶風王 司馬駿의 아들이니, 太康 10년에 封地를 받았다. 征과 鎭은 四征과 四鎭으로, 방면을 맡은 자이다. 하였다.
사마영이
鄴令 盧志를 불러 계책을 상의하니,
注+盧志는 盧毓(노육)의 손자이다. 노지가 말하기를 “
忠順에 의지하여 반역자들을 토벌하면 백성들이 틀림없이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이를 것입니다.” 하였다.
사마영이 그 말을 들으니, 원근에서 호응하여 朝歌縣에 이르자 병력이 20여 만이나 되었다.
사마흠은 사마경의 격문을 받고서 따라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총애하는 사람
王綏(왕수)가 말하기를 “
趙王은 〈
公(사마흠)과 친속 관계가〉 친하면서 강하고
齊王은 소원하면서 약하니, 마땅히 조왕을 따라야 합니다.”
注+司馬歆의 아버지 司馬駿과 司馬倫은 모두 宣帝(司馬懿)의 아들이니, 사마흠은 사마륜에게 叔姪 간이 되어서 그 친속이 가깝고, 司馬冏은 사마흠에게 從子(조카)가 되어서 그 친속이 사마륜에 비하여 소원하다. 하였다.
參軍 孫洵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조왕은 흉악한 역적이니, 천하가 마땅히 함께 주살해야 한다. 무슨 親疎와 彊弱이 있겠는가.” 하니, 사마흠이 마침내 사마경을 따랐다.
目
[目] 司馬冏 등이 군대를 일으켰을 때부터 백관과 군사들이 모두 司馬倫과 孫秀를 誅殺하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河北의 군대가 패하자 左衛將軍 王輿가 진영에 있는 병사를 거느리고 궁중으로 들어가니,
三部의
司馬가 안에서 호응하여 손수를
中書省에서 공격하여 참수하고,
黃門으로 하여금 사마륜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注+將은 본음대로 읽으니, 인솔함이다. 洛陽城 안에 汶陽里가 있으니, 司馬倫의 私第가 이곳에 있었다.
황제를 金墉城에서 맞이하여 端門으로 들어와 殿에 오르게 하니,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謝罪하였다.
使者를 나누어 보내어 세 왕을 위로하고 사마륜에게 사약을 내리고 그 아들을 체포하여 죽였으며,
百官 중에 사마륜에게 제수된 자는 모두 배척하여 면직하니,
臺,
省,
府,
衛에 겨우 몇 명만 남게 되었다.
注+臺와 省 중에 尙書, 御史, 謁者는 臺이고, 門下, 中書, 秘書는 省이다. 府는 여러 公府이다. 衛는 2衛와 6軍이다.
司馬穎과 司馬顒이 모두 洛陽에 이르니, 군대를 일으킬 때부터 60여 일 동안 전투하여 죽은 자가 10만 명에 가까웠다.
目
[目] 처음에 조정에서 符節을 秦州와 雍州에 내려보내어 流民 중에 蜀으로 들어간 자들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또 御史 馮該를 보내어 이것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李特의 형인 李輔가 略陽에서 蜀으로 와서 이특에게 말하기를 “中國이 막 혼란하니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특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여러 번 閻式을 보내어 羅尙에게 찾아가서 〈蜀에서 本地로 돌아가는 것을〉 가을까지 잠시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고, 또 나상과 풍해에게 뇌물을 바치니, 나상과 풍해가 이를 허락하였다.
황제가 璽書를 益州에 내려보내 6개 郡의 流民 중에 이특과 함께 趙廞을 토벌한 자들의 공로를 조목조목 나열하여 올리게 해서 장차 이들에게 功과 賞을 가하려 하였는데,
辛冉이 이것을 자기 공로로 삼고자 하여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注+上(올리다)은 時掌의 切이니, 아래도 같다. 衆은 6개 郡의 무리이다. 나상은 유민들을 감독하여 7월에 강제로 길을 떠나게 하였다.
이때 유민들이 梁州와 益州에 분포되어 있으면서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州郡에서 강제로 보낼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사람마다 근심하고 원망하였으며, 또 장마가 져서 강물이 불어나고 곡식이 아직 익지 않아서 旅費로 삼을 것이 없었다.
이특이 다시 겨울까지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신염과 犍爲太守 李苾이 不可하다 하였다.
目
[
目]
辛冉이 성질이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流民의
首領을 죽이고 그 재물을 빼앗고자 해서 마침내
李苾과 함께
羅尙에게 아뢰어 특별히 관문을 설치하여 수색하게 하였다.
注+“設關”은 예전에는 관문을 세우지 않았는데, 이제 특별히 설치한 것이다.
李特이 여러 번 유민을 위하여 기한을 더 연장해줄 것을 청하니, 유민들이 모두 감격하여 이특을 믿어 서로 거느리고 귀의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특은 마침내 큰 진영을 綿竹에 만들어 거처하게 하였다.
신염이 또다시
榜文을 나누어 써 붙여서 이특 형제에게 현상금을 걸어 잡아오게 하자, 이특이 이 방문을 가지고 돌아가서 아우
李驤과 함께 그 내용을
고 바꾸어 붙였다.
이에 유민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이특에게 더욱더 많이 귀의하니, 그 수가 열흘에서 한 달 사이에 2만 명에 이르렀다. 이특은 다시
閻式을 보내어
羅尙에게 가서 기한을 거듭 연장해줄 것을 요구하니, 나상이 이를 허락하였다.
注+申은 거듭함이니, 〈“求申期”는〉 기한을 거듭 연장해서 流民들로 하여금 스스로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요구한 것이다.
염식이 돌아와서 이특에게 이르기를 “나상은 위엄과 형벌이 확립되지 못한 상태이고 신염 등은 각기 강한 병력을 보유하였으니, 하루아침에 변고가 일어나면 그 형세는 나상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대비를 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특이 이 말을 따라서 아우 李流와 두 진영으로 나누어 갑옷을 수리하고 군대를 조련하여 변고에 대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