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辛酉年(301)
永寧元年이라 春正月 以張軌爲涼州刺史하다
散騎常侍張軌 以時方多難이라하여 陰有保據河西之志 故求爲涼州러라
盜賊縱橫하고 鮮卑爲寇 軌以宋配, 氾瑗爲謀主하여 悉討破之하니 威著西土러라
趙王倫 逼奪璽綬하고 備法駕入宮하여 卽位注+通鑑 “卽帝位, 赦天下.”하다
帝出居金墉城하여 尊爲太上皇하고 廢皇太孫하여 爲濮陽王하여 殺之하다
以孫秀爲侍中, 中書監하고 其餘黨與 皆爲卿, 將하고 奴卒亦加爵位注+將, 卽亮切. 卿將, 卿相‧列卿及諸中郞將也.하다
每朝會 貂蟬盈坐注+武冠, 一曰武弁, 諸武官冠之. 侍中‧中常侍, 加黃金璫, 附蟬爲文, 貂尾爲飾, 謂之趙惠文冠. 胡廣說曰 “趙武靈王效胡服, 以金鐺飾首, 前揷貂尾, 爲貴職, 秦滅趙, 以其冠賜近臣.”하니 時人 爲之諺曰 貂不足하여 狗尾續이라하니라
是歲 天下所擧賢良, 秀才, 孝廉 皆不試注+舊制, 賢良‧秀‧孝, 皆策試而後補官.하고 郡國計吏及太學生年十六以上者 皆署吏하고
守令赦日在職者 皆封侯하며 郡縣綱紀 竝爲孝廉, 廉吏注+郡綱紀, 竝爲孝廉, 縣綱紀, 竝爲廉吏. 郡綱紀, 功曹之屬, 縣綱紀, 主簿‧錄事‧史之屬. 廉吏亦選擧之一 史言 倫‧秀欲以濫恩收衆心.하니 府庫之儲 不足以供賜與하고
應侯者多하여 鑄印不給하여 或以白版封之러라
이어늘 詔以羅尙爲益州刺史巴氐李特殺趙廞하다
李庠 驍勇하고 得衆心하니 趙廞 浸忌之 勸廞稱尊號하니 廞以庠大逆이라하여 斬之하고 復用李特爲督將하다
怨廞하여 遂攻殺之하고 縱兵大掠하고 遣使詣洛陽하여 陳廞罪狀하다
梁州刺史羅尙 聞廞反하고 表廞素非雄才 敗亡 可待라하더니
詔拜尙益州刺史하여 督廣漢太守辛冉等하여 入蜀하다 聞之하고하여 使弟驤으로 迎獻珍玩이어늘하여 以驤爲騎督注+騎督, 督騎兵.하다
說尙曰 特等 專爲盜賊하니 宜因會斬之 不然이면 必爲後患이라호되 不從하다
三月 齊王冏及成都王穎 河間王顒等 擧兵討倫하니 遣兵拒之하다
齊王冏 遣使하여 告成都王穎, 河間王顒, 常山王乂及新野公歆하고
移檄征, 鎭하여 稱逆臣孫秀迷誤趙王하니 當共討之 有不從命이면 誅及三族注+武帝太康十年, 封乂爲長沙王, 楚王瑋之誅, 乂以同母, 貶爲常山王, 後復舊封. 歆, 扶風王駿之子也. 太康十年, 受封. 征‧鎭, 四征‧四鎭, 居方面者.호리라
召鄴令盧志하여 謀之注+志, 毓之孫也.하니 志曰 杖順討逆이면 百姓 必不召自至하리이다
從之하니 遠近 響應하여 至朝歌 二十餘萬이러라
得冏檄하고 未知所從이러니 嬖人王綏曰 趙 親而彊하고 疎而弱하니 宜從趙注+歆父駿與倫, 皆宣帝子, 歆於倫爲叔姪, 其屬親, 冏於歆爲從子, 其屬視倫爲疎.이니이다
參軍孫洵 大言曰 趙王凶逆하니 天下當共誅之 何親疎彊弱之有리오 乃從冏하다
初用長史李含謀하여 執冏使하고 遣張方하여 將兵助倫이러니 及聞二王兵盛하고 復召方還하고 更附二王注+二王, 謂齊王冏‧成都王穎.하다
倫, 秀 聞兵起하고 大懼하여 遣孫輔, 張泓, 司馬雅하여 帥兵拒冏하고 秀子會及士猗, 許超 率兵拒穎하다
閏月朔 日食하다
◑自正月 至于是月 注+日陽, 君道也. 星陰, 臣道也. 日出則星亡, 臣不得專也. 晝而星見午上, 爲經天, 其占爲不臣, 爲更王. 今五星悉經天, 天變所未有也.하다
◑夏四月 成都王穎 擊敗倫兵하고 帥師濟河하니 左衛將軍王輿等 하고 伏誅하다
張泓等 與齊王冏으로 戰於潁上하여 屢破之注+潁水, 出潁川陽城縣少室, 東南流, 過陽翟縣之北.하다 攻冏營이어늘 出兵하여 擊破其別將하니 泓等 乃退하다
成都王穎前鋒 至黃橋하여 爲孫會, 士猗, 許超所敗注+朝歌西有黃澤, 澤水右入蕩水, 謂之黃雀溝, 橋當在溝上.하니 欲退어늘
盧志曰 今我軍失利하니 敵有輕我之心이라 不若更選精兵하여 星行倍道하여 出敵不意 此用兵之奇也니이다 從之注+星行者, 夜行戴星而行也.하다
賞黃橋之功하여 猗, 超, 會 皆持節하니 由是 軍政不一하고 且恃勝하여 不設備러라
擊之于한대 會等 大敗어늘 乘勝長驅濟河注+湨, 古閴切, 湨水出河內軹縣, 東南至溫, 入河.하다
自冏等起兵으로 百官軍士 皆欲誅倫, 秀 及河北軍敗 左衛將軍王輿 帥營兵入宮하니
三部司馬爲應於內하여 攻孫秀於中書省하여 斬之하고 使黃門으로 將倫還第注+將, 如字, 引也. 洛陽城中, 有汶陽里, 倫私第在焉.하고
迎帝于金墉城하여 自端門入하여 升殿하니 群臣 頓首謝罪러라
分遣使者하여 慰勞三王하고 賜倫死하고 收其子誅之하며 凡百官爲倫所用者 皆斥免하니 臺, 省, 府, 衛 僅有存者注+臺‧省, 尙書‧御史‧謁者, 臺, 門下‧中書‧秘書, 省也. 府, 諸公府也. 衛, 二及六軍也.러라
穎, 顒 皆至洛陽하니 自兵興으로 六十餘日 戰鬪死者 近十萬人이러라
六月 以齊王冏爲大司馬하여 輔政하고 成都王穎爲大將軍하고 河間王顒爲太尉하여 各還鎭하다
齊王冏 入洛陽하니 甲士數十萬이라 威震京師러라
詔以爲大司馬하여 加九錫하고 備物典策 如宣, 景, 文, 武輔魏故事注+備物典策, 謂備賜威儀之物, 及史官書策之典, 使之依法書時事也.하고
成都王穎爲大將軍하여 都督中外諸軍事하고 假黃鉞하고 錄尙書事하고 加九錫하고
河間王顒爲侍中, 太尉하고 常山王乂爲撫軍大將軍하고 進新野公歆爵爲王하며
齊, 成都, 河間三府 各置掾屬四十人하니 武號森列하고 文官 備員而已 識者知兵之未戢也注+自東漢以來, 公府皆有掾有屬, 但不帶武號耳.러라
說冏奪穎兵權하고 乂亦勸穎圖冏하니 聞者憂懼注+憂懼者, 以冏與乂‧穎必阻兵相圖, 將罹其禍也.러라
盧志謂穎曰 大王 逕前濟河하니 功無與貳이나 兩雄不俱立하니
宜因太妃微疾하여 求還定省注+穎母程才人, 冊爲成都太妃.하고 委重齊王하여 以收四海之心注+委朝政之重於齊王, 則四海之人, 謂穎功大不居, 將歸心於穎.이니이다
從之하여 表請冏功德 宜委以萬機라하고 卽辭歸鄴하니 由是 士民之譽 皆歸穎이러라
辟劉殷爲軍諮祭酒하고 曹攄爲記室注+晉制, 文武官公及諸方面征‧鎭府, 皆置軍諮祭酒. 攄, 肇之孫也.하고 江統, 苟晞參軍事注+晉諸公‧諸從公, 爲持節都督, 增參軍爲六員.하고 張翰, 孫惠爲掾注+翰, 音寒. 惠, 賁之曾孫也.하고 顧榮, 王豹爲主簿注+榮, 雍之孫也.하다
幼孤貧하여 養曾祖母 以孝聞이러니 人以穀帛遺之하면 受而不謝하고 直云 待後貴當相酬耳라하더라
及長 博通經史하고 倜儻有大志하여 儉而不陋하고 淸而不介하여 望之頹然而不可侵也러라
冏以何勖爲中領軍하고 董艾典樞機하고 又封其將佐有功者葛旟等하여 爲縣公하여 委以心膂하니 號曰五公注+葛旟牟平公, 路秀小黃公, 衛毅陰平公, 劉眞安鄕公, 韓泰封丘公.이러라
至鄴하여 讓九錫殊禮하고 表論興義功臣하며 乞運河北邸閣米하여 以振陽翟饑民하고 斂祭黃橋戰士하고 旌顯其家하니 皆盧志之謀也
形美而神昏하여 不知書 然氣性敦厚하고 委事於志 故得成其美焉이러라
疑中書郞陸機 爲趙王倫撰禪詔하고하여 欲殺之어늘 爲辨理得免注+爲, 竝去聲.이러라
因表爲平原內史하고 以其弟雲爲淸河內史하니 機友人顧榮, 戴淵 以中國多難이라하여 勸機還吳한대
機以受穎全濟之恩하고 且謂穎有時望하여 可與立功이라하여 遂留不去하다
冬十月 李特 據廣漢하고 進攻成都하다
朝廷 符下秦, 雍하여 召還流民入蜀者하고 又遣御史馮該하여 督之러니
李特兄輔 自略陽至蜀하여 言中國方亂하니 不足復還이라한대
然之하여 累遣閻式하여 詣羅尙하여 求權停至秋하고 又納賂於尙及該하니 尙, 該許之하다
璽書下益州하여 條列六郡流民與特同討趙廞者하여 將加功賞이러니
辛冉 欲以爲己功하여 不以實上하니 衆咸怨之注+上, 時掌切, 下同. 衆, 六郡之衆也.러라 督流民하여 七月上道하니
流民 布在梁, 益하여 爲人傭力이러니 聞州郡逼遣하고 人人愁怨하며 且水潦方盛하고 年穀未登하여 無以爲行資
復求停至冬이어늘 辛冉及犍爲太守李苾 以爲不可하다
性貪暴하여 欲殺流民首領하고 取其資貨하여 乃與苾白尙하여 設關搜索注+設關者, 先未甞立關, 今特設之.하다
數爲流民請留하니 流民 皆感而恃之하여 多相帥歸特이어늘 乃結大營於綿竹以處之하다
辛冉 又分牓하여 購募特兄弟어늘 取以歸하여 與弟驤改之하여 爲募六郡豪傑侯王一首百匹하니
於是 流民大懼하여 歸特愈衆하여 旬月間 至二萬人이러라 復遣閻式하여 詣羅尙하여 求申期한대 許之注+申, 重也. 求重爲期限, 使流民得自寬也.어늘
하여 謂特曰 尙 威刑不立하고 冉等 各擁彊兵하니 一旦爲變이면 非尙所能制 宜爲備니라
從之하여 與弟流分二營하여 繕甲治兵以待러라
至是하여 冉, 苾 帥步騎三萬하여 襲特營이어늘 發伏擊之하니 死者甚衆이라
於是 流民 推特行鎭北大將軍하고 承制封拜하여
流及兄輔, 弟驤 皆號將軍하고 進兵攻冉於廣漢하니 出戰屢敗하고 犇德陽注+德陽縣, 後漢置, 屬廣漢郡.하다
入據郡하고 進攻成都할새 與蜀民約法三章하고 施捨賑貸하고 禮賢拔滯하고 軍政肅然하니 蜀民 大悅注+施捨, 施恩惠, 捨勞役.이러라
頻爲特所敗하고 乃阻長圍하여 緣郫水作營하여 連延七百里하여 與特相拒하고 求救於梁州及南夷校尉注+水經註 “綿水西出綿竹縣, 又與湔水合, 亦謂之郫江.” 郫音疲. 南夷校尉, 統南中諸郡.하다


辛酉年(301)
[] 나라 孝惠皇帝 永寧 원년이다. 봄 정월에 張軌涼州刺史로 삼았다.
[] 散騎常侍 張軌는 세상이 한창 난리가 많다 하여 은밀히 河西 지역을 점거할 뜻을 두었으므로 涼州刺史가 되기를 요구하였다.
이때 도적이 횡행하고 鮮卑가 침략하였다. 장궤가 宋配氾瑗(범원)을 謀主로 삼아 이들을 모두 토벌하여 격파하니, 위엄이 서쪽 지역에 드러났다.
[] 趙王 司馬倫이 스스로 皇帝라 칭하고 황제( 惠帝)를 金墉城으로 옮기고 太孫 司馬臧을 죽였다.
司馬倫이 皇帝를 폐위하고 스스로 서다司馬倫이 皇帝를 폐위하고 스스로 서다
[] 趙王 司馬倫이 황제를 핍박하고 玉璽印綬를 빼앗고 法駕를 갖추어 궁으로 들어가서 즉위하였다.注+資治通鑑≫에는 “황제의 지위에 올라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하였다.
황제(惠帝)는 궁에서 나와 金墉城에 거처하여 ‘太上皇’으로 높여졌고, 皇太孫(司馬藏)을 폐하여 濮陽王으로 삼아 죽였다.
孫秀侍中 中書監으로 삼고 그 나머지 徒黨들을 모두 과 장수로 삼았으며, 종과 군졸들도 또한 작위를 하였다.注+(장수)은 卽亮이니, “卿將”은 卿相列卿과 여러 中郞將이다.
매번 朝會할 때에 貂蟬(초선)이 자리에 가득하니,注+武冠은 한편으로는 武弁이라고도 하니, 여러 武官들이 착용한다. 侍中中常侍는 황금의 고리를 하고 매미를 붙여 문양으로 삼고 貂皮 꼬리로 장식을 하니, 이것을 趙惠文冠이라 이른다. 胡廣이 말하기를 “나라 武靈王이 오랑캐의 복식을 본받아 금 고리로 머리를 꾸미고 앞에 초피 꼬리를 꽂아 귀한 직책의 장식으로 삼았는데, 나라가 나라를 멸망시키고는 이 관을 가까운 신하들에게 하사했다.”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속담을 짓기를 “貂皮 꼬리가 부족하여 개 꼬리로 이었다.” 하였다.
이해에 천하에서 천거한 賢良秀才, 孝廉이 모두 시험보지 않고 그대로 임용되고,注+옛 제도에 賢良秀才孝廉은 모두 策文으로 시험한 뒤에 관직에 보임하였다. 郡國計吏太學生으로서 나이가 16세 이상인 자는 모두 관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사면하는 날 守令 중에 현직에 있는 자들을 모두 에 봉하였으며, 郡縣綱紀를 모두 孝廉廉吏로 삼으니,注+郡綱紀는 모두 孝廉으로 삼고 縣綱紀는 모두 廉吏로 삼은 것이니, 郡綱紀功曹의 등속이고 縣綱紀主簿錄事의 등속이다. 廉吏 또한 選擧의 한 과목이다. 이는 史官司馬倫孫秀가 지나친 은혜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했음을 말한 것이다. 府庫의 저축이 하사하는 물건을 충당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 된 자가 너무 많아서 을 주조하여 다 지급하지 못하자, 혹은 白版으로 봉하였다.
[] 巴氐李特趙廞을 죽이자, 詔令을 내려 羅尙益州刺史로 삼았다.
[] 李庠이 몸이 날래고 용맹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니, 趙廞이 점점 그를 시기하였다. 마침 이상이 조흠에게 尊號를 칭하라고 권하자, 조흠은 이상을 대역죄인으로 몰아 참수하고 다시 李特을 등용하여 督將으로 삼았다.
이특은 조흠을 원망하여 마침내 그를 공격해 죽이고 군대를 풀어 크게 노략질하였으며, 使者를 보내어 洛陽에 가서 조흠의 죄상을 아뢰었다.
[] 처음에 梁州刺史 羅尙趙廞이 배반했다는 말을 듣고, 표문을 올려 “조흠은 본래 빼어난 재주를 가진 자가 아니니, 패망할 것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였다.
詔令을 내려 나상을 益州刺史로 임명하여 廣漢太守 辛冉 등을 감독해서 으로 들어가게 하니, 李特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아우 李驤으로 하여금 나상을 맞이해 진귀한 보물을 올리게 하자, 나상은 기뻐하여 이양을 騎督으로 삼았다.注+騎督騎兵을 감독하는 것이다.
신염이 나상을 설득하기를 “이특 등은 오로지 도적질을 하니, 마땅히 이번 기회에 참수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틀림없이 후환이 될 것이다.” 하였으나, 나상은 따르지 않았다.
[] 3월에 齊王 司馬冏(사마경)과 成都王 司馬穎河間王 司馬顒(사마옹) 등이 군대를 일으켜 司馬倫을 토벌하니, 사마륜이 군대를 보내어 막았다.
[] 齊王 司馬冏이 사신을 보내어 成都王 司馬穎河間王 司馬顒常山王 司馬乂新野公 司馬歆에게 通告하고
에 격문을 보내어 말하기를 “逆臣孫秀趙王을 미혹하게 하고 誤導하니, 마땅히 함께 토벌하여야 한다.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주벌이 三族에 미칠 것이다.”注+武帝 太康 10년(289)에 司馬乂를 봉하여 長沙王으로 삼았는데, 楚王 司馬瑋가 주살을 당하자, 사마예는 사마위와 어머니가 같은 형제라 하여 常山王으로 폄직되었다가 뒤에 옛 封號를 회복하였다. 司馬歆扶風王 司馬駿의 아들이니, 太康 10년에 封地를 받았다. 四征四鎭으로, 방면을 맡은 자이다. 하였다.
사마영이 鄴令 盧志를 불러 계책을 상의하니,注+盧志盧毓(노육)의 손자이다. 노지가 말하기를 “忠順에 의지하여 반역자들을 토벌하면 백성들이 틀림없이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이를 것입니다.” 하였다.
사마영이 그 말을 들으니, 원근에서 호응하여 朝歌縣에 이르자 병력이 20여 만이나 되었다.
사마흠은 사마경의 격문을 받고서 따라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총애하는 사람 王綏(왕수)가 말하기를 “趙王은 〈(사마흠)과 친속 관계가〉 친하면서 강하고 齊王은 소원하면서 약하니, 마땅히 조왕을 따라야 합니다.”注+司馬歆의 아버지 司馬駿司馬倫은 모두 宣帝(司馬懿)의 아들이니, 사마흠은 사마륜에게 叔姪 간이 되어서 그 친속이 가깝고, 司馬冏은 사마흠에게 從子(조카)가 되어서 그 친속이 사마륜에 비하여 소원하다. 하였다.
參軍 孫洵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조왕은 흉악한 역적이니, 천하가 마땅히 함께 주살해야 한다. 무슨 親疎彊弱이 있겠는가.” 하니, 사마흠이 마침내 사마경을 따랐다.
[] 司馬顒이 처음에는 長史 李含의 계책을 따라 司馬冏使者를 붙잡고 張方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司馬倫을 도우려 하였는데, 두 兵勢가 강성하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장방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다시 두 왕에게 붙었다.注+두 왕은 齊王 司馬冏成都王 司馬穎을 이른다.
司馬倫孫秀는 자신들을 토벌하는 군대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孫輔張泓司馬雅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려 사마경을 막고, 손수의 아들 孫會士猗(사의)와 許超는 군대를 거느려 사마영을 막게 하였다.
[] 윤3월 초하루에 日食이 있었다.
[] 정월로부터 이달까지 五星이 서로 經天하여 縱橫해서 일정함이 없었다.注+해는 으로 人君이고, 별은 으로 신하의 이다. 해가 나오면 별이 사라지니, 신하가 專斷할 수 없는 것이다. 낮에 별이 午方(南方)의 위에 나타나는 것을 經天이라 하니, 그 점괘는 ‘신하가 신하 노릇 하지 않고 왕을 바꿈’이 된다. 지금 五星經天함은 하늘의 재변에 일찍이 있지 않았던 것이다.
[] 여름 4월에 成都王 司馬穎司馬倫의 군대를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군대를 거느려 황하를 건너가니, 左衛將軍 王輿 등이 황제를 맞이하여 復位하였고 司馬倫伏誅되었다.
[] 張泓 등이 齊王 司馬冏潁水 가에서 싸워 여러 번 격파하였다.注+潁水潁川 陽城縣少室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陽翟縣의 북쪽을 지나간다. 장홍이 사마경의 진영을 공격하자 사마경이 군대를 출동하여 그의 別將을 격파하니, 장홍 등이 마침내 후퇴하였다.
成都王 司馬穎의 선봉 부대가 黃橋에 이르러 孫會士猗, 許超에게 패하니,注+朝歌縣의 서쪽에 黃澤이 있는데 이 黃澤의 물이 오른쪽으로 蕩水로 들어가는바, 이곳을 黃雀溝라 하니, 黃雀橋는 당연히 황작구 위에 있을 것이다. 사마영이 후퇴하고자 하였다.
이때 盧志가 말하기를 “지금 우리 군대가 승리하지 못하였으니, 적은 우리를 얕보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정예병을 선발하여 밤중에 별을 보고 길을 떠나 행군 속도를 배가해서 적의 예상 밖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좋은 계책이 없으니, 이것이 기이한 용병술입니다.” 하니, 사마영이 그 말을 따랐다.注+星行”은 밤에 길을 떠나 별을 보면서 가는 것이다.
[] 司馬倫黃橋의 공로에 을 주어 士猗許超와 손회가 모두 을 잡으니, 이로 말미암아 軍政이 통일되지 못하였고, 또 승리한 것을 믿고는 방비를 하지 않았다.
司馬穎湨水(격수)에서 이들을 공격하자 손회 등이 대패하니, 사마영이 승승장구하여 황하를 건너갔다.注+古閴이다. 湨水河內軹縣(지현)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溫水에 이르러 황하로 들어간다.
[] 司馬冏 등이 군대를 일으켰을 때부터 백관과 군사들이 모두 司馬倫孫秀誅殺하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河北의 군대가 패하자 左衛將軍 王輿가 진영에 있는 병사를 거느리고 궁중으로 들어가니,
三部司馬가 안에서 호응하여 손수를 中書省에서 공격하여 참수하고, 黃門으로 하여금 사마륜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며,注+은 본음대로 읽으니, 인솔함이다. 洛陽城 안에 汶陽里가 있으니, 司馬倫私第가 이곳에 있었다.
황제를 金墉城에서 맞이하여 端門으로 들어와 殿에 오르게 하니,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謝罪하였다.
使者를 나누어 보내어 세 왕을 위로하고 사마륜에게 사약을 내리고 그 아들을 체포하여 죽였으며, 百官 중에 사마륜에게 제수된 자는 모두 배척하여 면직하니, , , , 에 겨우 몇 명만 남게 되었다.注+ 중에 尙書, 御史, 謁者이고, 門下, 中書, 秘書이다. 는 여러 公府이다. 는 2와 6이다.
司馬穎司馬顒이 모두 洛陽에 이르니, 군대를 일으킬 때부터 60여 일 동안 전투하여 죽은 자가 10만 명에 가까웠다.
[] 6월에 齊王 司馬冏大司馬로 삼아 정사를 보필하게 하고, 成都王 司馬穎大將軍으로 삼고 河間王 司馬顒太尉로 삼아 각각 그들의 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 齊王 司馬冏洛陽에 들어오니, 갑옷을 입은 병사가 수십 만이었다. 위엄이 京師에 진동하였다.
詔令을 내려서 사마경을 大司馬로 삼아 九錫하고 備物典策을 하사하는 것을 와 같게 하였으며,注+備物典策”은 威儀의 물건을 고루 하사하고 아울러 史官의 서책에 쓰는 을 하사하여 법에 따라 당시의 일을 기록하게 한 것을 이른다.
成都王 司馬穎大將軍 都督中外諸軍事로 삼고 黃鉞을 주고 錄尙書事로 삼고 九錫하였다.
그리고 河間王 司馬顒侍中太尉로 삼고, 常山王 司馬乂撫軍大將軍으로 삼고, 新野公 司馬歆의 작위를 승진하여 으로 삼았다.
齊王成都王, 河間王의 3에 각각 掾屬 40명을 두니, 武官의 칭호가 빽빽하게 나열되었고 文官은 인원수를 채울 뿐이었다. 식견이 있는 자들은 兵難이 그치지 않을 줄을 알았다.注+東漢 이래로 公府에는 모두 이 있고 이 있었으나, 다만 무관의 칭호는 띠지 않았다.
[] 司馬歆司馬冏을 설득하여 司馬穎兵權을 빼앗게 하고, 司馬乂 또한 사마영에게 사마경을 도모하라고 권하니, 이 말을 들은 자들은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注+〈이 말을 들은 자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한 것은 司馬冏司馬乂, 司馬穎이 반드시 군대에 의지하여 서로를 도모해서 장차 그 禍亂에 걸릴까 염려한 것이다.
盧志가 사마영에게 이르기를 “大王이 곧바로 앞장서서 황하를 건넜으니, 더불어 을 견줄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두 영웅은 양립하지 못하니,
마땅히 太妃의 가벼운 병환을 핑계 삼아 돌아가 할 방법을 찾으시고注+司馬穎의 어머니 程才人이 책봉되어 成都太妃가 되었다. 조정의 중한 임무를 齊王에게 맡겨서 이를 통해 四海의 인심을 수합하여야 합니다.”注+朝政重任齊王에게 맡기면 四海의 사람들은 司馬穎이 공이 큰데도 자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장차 사마영에게 민심이 돌아가는 것이다. 하자,
사마영이 그 말을 따라서 표문을 올려 “사마경의 功德를 맡기기에 적합하다.”고 청하고는 즉시 사양하고 지역으로 돌아가니, 이로 말미암아 선비와 백성들의 찬양이 모두 사마영에게 돌아갔다.
사마경이 劉殷辟召하여 軍諮祭酒로 삼고 曹攄(조터)를 記室로,注+나라 제도에 文武官과 여러 방면을 담당하는 四征四鎭에 모두 軍諮祭酒를 설치하였다. 曹攄(조터)는 曹肇의 손자이다. 江統苟晞(구희)를 參軍事로,注+나라는 여러 과 여러 중에 持節都督이 되면 參軍을 6명으로 增員하였다. 張翰孫惠으로,注+이다. 孫惠孫賁曾孫이다. 顧榮王豹主簿로 삼았다.注+顧榮顧雍의 손자이다.
[] 劉殷이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여 曾祖母를 봉양할 적에 효성으로 이름이 났는데, 사람들이 비단과 곡식을 주면 유은은 받고서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말하기를 “후일에 내가 귀하게 되면 마땅히 보답하겠다.” 하였다.
장성하자 경서와 역사책을 두루 통달하고 성품이 드높아 큰 뜻이 있어서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깨끗하되 꼬장꼬장하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바라보면 절로 머리가 숙여져 침범하지 못하였다.
司馬冏何勖中領軍으로 삼고 董艾에게 중추적인 임무를 맡기고, 또 그 장수와 보좌관 중에 공이 있는 자인 葛旟(갈여) 등을 봉하여 縣公으로 삼아서 心腹의 임무를 맡기니, 이들을 五公이라 호칭하였다.注+葛旟(갈여)는 牟平公, 路秀小黃公, 衛毅陰平公, 劉眞安鄕公, 韓泰封丘公이다.
[] 司馬穎 지역에 이르자, 九錫과 특별한 예를 사양하고 표문을 올려 의병을 일으킨 功臣을 논하였으며, 河北邸閣에 있는 쌀을 운반하여 陽翟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고 黃橋戰士들을 斂襲하여 제사하며 그 집안을 정표할 것을 청하니, 이것은 모두 盧志의 계책이었다.
司馬穎은 모습은 아름다웠으나 정신이 혼우하여 책을 읽을 줄 몰랐다. 그러나 성품이 溫厚하고 정사를 노지에게 맡겼으므로 그 아름다운 명성을 이룰 수 있었다.
[] 처음에 司馬冏中書郞 陸機趙王 司馬倫을 위해 禪位하는 詔書를 지었다고 의심하고 그를 체포하여 죽이고자 하였는데, 司馬穎이 그를 위해 변호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注+(위하다)는 모두 去聲이다.
사마경은 인하여 表文을 올려 그를 平原內史로 삼고 그의 아우 陸雲淸河內史로 삼으니, 육기의 친구인 顧榮戴淵中國兵難이 많다 하여 육기에게 지역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으나,
육기는 자신을 온전히 구제해준 사마영의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또 사마영이 당시에 명망이 있어서 더불어 을 세울 수 있다고 여겨 마침내 떠나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렀다.
[] 겨울 10월에 李特廣漢을 점거하고 전진하여 成都를 공격하였다.
[] 처음에 조정에서 符節秦州雍州에 내려보내어 流民 중에 으로 들어간 자들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또 御史 馮該를 보내어 이것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李特의 형인 李輔略陽에서 으로 와서 이특에게 말하기를 “中國이 막 혼란하니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특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여러 번 閻式을 보내어 羅尙에게 찾아가서 〈에서 本地로 돌아가는 것을〉 가을까지 잠시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고, 또 나상과 풍해에게 뇌물을 바치니, 나상과 풍해가 이를 허락하였다.
황제가 璽書益州에 내려보내 6개 流民 중에 이특과 함께 趙廞을 토벌한 자들의 공로를 조목조목 나열하여 올리게 해서 장차 이들에게 을 가하려 하였는데,
辛冉이 이것을 자기 공로로 삼고자 하여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원망하였다.注+(올리다)은 時掌이니, 아래도 같다. 은 6개 의 무리이다. 나상은 유민들을 감독하여 7월에 강제로 길을 떠나게 하였다.
이때 유민들이 梁州益州에 분포되어 있으면서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州郡에서 강제로 보낼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사람마다 근심하고 원망하였으며, 또 장마가 져서 강물이 불어나고 곡식이 아직 익지 않아서 旅費로 삼을 것이 없었다.
이특이 다시 겨울까지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신염과 犍爲太守 李苾不可하다 하였다.
[] 辛冉이 성질이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流民首領을 죽이고 그 재물을 빼앗고자 해서 마침내 李苾과 함께 羅尙에게 아뢰어 특별히 관문을 설치하여 수색하게 하였다.注+設關”은 예전에는 관문을 세우지 않았는데, 이제 특별히 설치한 것이다.
李特이 여러 번 유민을 위하여 기한을 더 연장해줄 것을 청하니, 유민들이 모두 감격하여 이특을 믿어 서로 거느리고 귀의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특은 마침내 큰 진영을 綿竹에 만들어 거처하게 하였다.
신염이 또다시 榜文을 나누어 써 붙여서 이특 형제에게 현상금을 걸어 잡아오게 하자, 이특이 이 방문을 가지고 돌아가서 아우 李驤과 함께 그 내용을 고 바꾸어 붙였다.
이에 유민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이특에게 더욱더 많이 귀의하니, 그 수가 열흘에서 한 달 사이에 2만 명에 이르렀다. 이특은 다시 閻式을 보내어 羅尙에게 가서 기한을 거듭 연장해줄 것을 요구하니, 나상이 이를 허락하였다.注+은 거듭함이니, 〈“求申期”는〉 기한을 거듭 연장해서 流民들로 하여금 스스로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요구한 것이다.
염식이 돌아와서 이특에게 이르기를 “나상은 위엄과 형벌이 확립되지 못한 상태이고 신염 등은 각기 강한 병력을 보유하였으니, 하루아침에 변고가 일어나면 그 형세는 나상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대비를 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특이 이 말을 따라서 아우 李流와 두 진영으로 나누어 갑옷을 수리하고 군대를 조련하여 변고에 대비하였다.
[] 이때 辛冉李苾이 보병과 기병 3만을 거느리고 李特의 진영을 기습하자, 이특이 매복했던 군대를 출동시켜 공격하니, 신염과 이필의 병사가 매우 많이 죽었다.
이에 유민들이 이특을 行鎭北大將軍으로 추대하고 황제의 명을 받아 관직을 제수하고 작위를 해서
李流 및 형 李輔, 아우 李驤이 모두 將軍이라 칭하고 군대를 전진하여 廣漢에서 신염을 공격하니, 신염이 出戰하여 여러 번 패하고 德陽으로 달아났다.注+德陽縣後漢에서 설치하였으니, 廣漢郡에 속하였다.
이특이 廣漢郡에 들어가 점거하고 成都로 진격할 적에 지역 백성들과 법조문을 간략하게 3으로 만들 것을 약속하였고, 은혜를 베풀고 노역을 면제하며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하고 곡식을 꾸어주며 어진 이를 예우하고 벼슬길이 침체한 자를 발탁하며 軍政을 엄숙히 하니, 지역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注+施捨”는 은혜를 베풀고 노역을 면제해주는 것이다.
羅尙이 여러 번 이특에게 패하고는 마침내 긴 둑에 의지하여 郫水(비수)를 따라 7백 리를 연이어 진영을 만들어서 이특과 서로 항거하고, 梁州南夷校尉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注+水經註≫에 “綿水는 서쪽 綿竹縣에서 발원하여 또 湔水와 합류하니, 또한 이곳을 ‘郫江’이라 한다.” 하였다. 이다. 南夷校尉南中의 여러 을 통솔하였다.


역주
역주1 趙王倫……殺太孫臧 : “王莽이 ‘스스로 新皇帝라 칭했다.’고 썼는데, 이때 다시 보인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황제를 칭함에 ‘自’라고 쓴 것이 두 번뿐이다.(漢나라 孺子 嬰의 初始 2년(9), 이해(301)) 왕망은 구리 궤짝을 칭탁하고 司馬倫은 神의 말씀을 칭탁하였으니, 이는 모두 근거 없이 그러한 것이므로 ‘自’라고 쓴 것이다.[莽書自稱新皇帝矣 於是復見 終綱目稱皇帝 書自者二而已(漢孺子嬰初始二年 是年) 莽託銅匱 倫託神語 皆無故而然 故書自]” ≪書法≫
“‘趙王 司馬倫이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고 쓴 것을 보면 魏王 曹丕가 황제를 칭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리고 ‘사마륜이 황제를 金墉城으로 옮겼다.’고 쓴 것을 보면 曹操가 獻帝를 許로 옮긴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전의 史書에서는 성공과 실패를 가지고 인물을 논하였다. 그러므로 記述에 드러냄이 서로 큰 차이가 있었는데 ≪資治通鑑綱目≫에서 나란히 썼으니, 찬탈하고 시해한 사람은 모두 그 실제가 똑같은 것이다. 또 어찌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른 차이가 있겠는가. 슬프다.[觀趙王倫自稱皇帝之書 與魏王曹丕稱皇帝 何異 觀倫遷帝于金墉城之書 與曹操遷帝于許 何殊 自前史 以成敗論人 故見於紀述者 大相遼絶 至綱目 等而書之 則凡簒弑之人 其實一耳 又豈有此是彼非之間哉 噫]” ≪發明≫
역주2 (利)[科] : 저본에는 ‘利’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科’로 바로잡았다.
역주3 巴氐李特殺趙廞 : “趙廞에 대해 일찍이 ‘반란했다.’고 썼는데, 어찌하여 ‘誅’라고 쓰지 않았는가. 이는 李特이 사사로이 죽였기 때문이다. 처음에 李庠이 조흠에게 尊號를 칭하라고 권하자, 조흠은 大義를 칭탁하여 이상을 참수하였는데 이특이 이에 조흠을 원망하여 죽였으니, 그렇다면 이것은 사사로운 원한을 보복했을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조흠에 대해 비록 ‘반란했다.’고 썼으나 ≪資治通鑑綱目≫에서 끝내 이특이 한 일을 토벌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廞嘗書反矣 曷爲不以誅書 特私也 初李庠勸稱尊號 廞託大義 斬庠 特於是怨廞殺之 則是復私怨而已矣 故廞雖書反 綱目終不以討予特也]” ≪書法≫
역주4 征과 鎭 : 魏晉 이래 將軍과 大將軍의 칭호로, 征東, 鎭東, 征西, 鎭西 등이 있어서 군대의 일을 감독하고 지방을 수비하였는데, 통틀어 征, 鎭이라고 하였으며, 東, 西, 南, 北에 모두 있어 四征, 四鎭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역주5 五星……縱橫無常 : “일찍이 ‘熒惑星과 歲星이 역행했다.’고 썼었고(漢 景帝 2년(B.C.155)에 자세히 보인다.), 또 일찍이 ‘五星이 역행했다.’고 썼었다(漢 景帝 後3년(B.C.141)). 그러나 모두 일정한 장소가 있었고, 縱橫으로 經天해서 몇 달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이후로는 황실이 서로 屠戮하여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懷帝와 愍帝가 播遷을 하고 중국이 침몰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應驗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별의 변고에 ‘經天’을 쓴 것이 두 번이고(이해(301), 唐 高祖 武德 9년(626)), ‘縱橫해서 일정함이 없다.’고 쓴 것이 이번 한 번뿐이다.[嘗書熒惑歲星逆行矣(詳景帝二年) 又嘗書五星逆行矣(景帝後三年) 然皆有定所也 未有縱橫經天 歷數月而未已者 自是以後 王室相屠 天下大亂 懷愍播蕩 神州陸沈 此其應矣 終綱目 星變書經天二(是年 唐高祖武德九年) 縱橫無常 則一而已]” ≪書法≫
“≪春秋≫에 별의 異變을 쓴 것이 많으나 이와 같이 심한 경우는 있지 않았다. 上天이 군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비록 심히 쇠약하고 혼란한 세상이라도 일찍이 경계를 告하는 바가 없지 않았고 또한 일찍이 아래에서 응함이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前日에 中台星이 갈라졌을 적에 張華 등이 계책을 바꿀 줄을 모르다가 모두 그 一族이 도륙을 당하였다. 이제 禍亂이 이미 지극하자, 이때에 하늘의 변고가 이와 같았는데, 이윽고 여러 왕이 서로 殺傷을 하여 魚肉이 되었고, 오랑캐가 이 틈을 타서 또한 서로 倂呑하여 中原이 도탄에 빠지고 懷帝와 愍帝가 蒙塵하여 병란의 화가 그치지 않았다. 춘추시대 이래로 또한 이와 같이 참혹한 경우는 있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五星이 종횡한 응험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이것을 게시하여 썼으니, 晉나라에 있어서는 진실로 구원할 수 있는 이치가 없으나, 이는 또한 來世를 경고함일 것이다.[春秋書星變多矣 未有如是之甚者 夫上天仁愛之心 雖甚衰亂之世 未嘗無所告戒 亦未嘗不應于下 前日中台星拆 張華等不知變計 皆赤其族 今禍亂已極 於是天變若此 旣而諸王互相魚肉 胡虜乘之 亦互相呑食 中原塗炭 懷愍蒙塵 兵禍不已 自春秋以來 亦未有如是之慘者 此皆五星縱橫之應也 綱目揭而書之 在晉固無可救之理 抑亦警告來世也歟]” ≪發明≫
역주6 迎帝復位 :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폐위된 황제가 복위되었다고 쓴 것이 4번이다(晉나라 惠帝와 安帝, 唐나라 中宗과 昭宗).[終綱目 廢帝書復位四(晉惠帝 安帝 唐中宗 昭宗)]” ≪書法≫
역주7 (溴)[湨] : 저본에는 ‘溴’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의 註와 ≪爾雅≫ 등에 의거하여 ‘湨’으로 바로잡았다.
역주8 (南)[衛] : 저본에는 ‘南’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衛’로 바로잡았다.
역주9 宣帝와……故事 : 宣帝, 景帝, 文帝, 武帝는 司馬懿, 司馬師, 司馬昭, 司馬炎의 시호인바, 魏나라 황제가 이들에게 이와 같은 특혜를 주었기 때문에 비유한 것이다. 사마의는 魏나라의 武帝 曹操, 文帝 曹丕, 明帝 曹叡, 哀帝 曹芳 등 4대를 보필하며 공을 세워 舞陽侯에 봉해진 뒤에 정변을 일으켜 魏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그 권력이 장자 사마사와 차자 사마소를 거쳐 손자 사마염이 帝位를 찬탈, 西晉을 세우는 데까지 이어지도록 기초를 닦은 사람이다. 사마염은 西晉을 세운 뒤에 그를 宣帝로 추존하였고, 사마사와 사마소 또한 景帝와 文帝로 추존하였다.(≪晉書≫ 〈帝紀〉)
역주10 昏定晨省 : 자식이 부모를 위해 날이 어두워지면 잠자리를 보살펴드리고 새벽이면 문안함을 이른다.
역주11 萬機 : 萬幾라고도 표기하는바, 幾微 또는 機務가 많다는 뜻으로, 군주의 임무를 가리킨다. 이는 ≪書經≫ 〈虞書 皐陶謨〉의 “하루 이틀에도 幾微의 일이 만 가지입니다.[一日二日萬幾]”라고 한 皐陶(고요)의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주12 從公 : 품계가 公과 같은 사람을 가리킨다. ≪晉書≫ 권24 〈職官志〉에 “여러 공 및 開府位의 從公은 품계가 제일 높으니, 봉록으로 매일 다섯 斛을 받는다.[諸公及開府位從公者 品秩第一 食奉日五斛]”라고 보인다.
역주13 6개……포상한다 : ≪資治通鑑≫에 “6개 郡의 酋豪인 李氏, 任氏, 閻氏, 趙氏, 上官氏 및 氐族과 叟族의 侯王 한 명을 잡아서 보내면 비단 백 필을 포상한다.[能送六郡酋豪李任閻趙上官及氐叟侯王一首賞百匹]”고 하였다.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