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燕王皝이 以牛假貧民하여 使佃苑中하여 税其什之八하고 自有牛者는 税其七하다
記室参軍封裕諫하여 以爲古者에 什一而税하니 天下之中正也라 降及魏晉에 仁政衰薄이로되 猶不取其七八也니이다
今殿下拓地三千里하고 増民十萬戸한대 其無田者 十有三四라 是宜悉罷苑囿하여 以賦新民하고 無牛者는 官賜之牛니 不當更收重税也니이다
今官司猥多
하니 皆宜澄汰
요 工商末利
는 宜立常員
이요 學生
이 三年無成
이면 當歸之於農
注+猥, 濫也. 澄汰, 以用水爲諭, 澄之使淸, 而汰去其沙泥也.이니이다
参軍王憲과 大夫劉明은 近以言忤旨하여 免官禁錮하고 長史宋該는 阿媚茍容하여 輕劾諫士하니 不忠之甚者也니이다
目
詔徵褚裒輔政하니 尚書劉遐説之曰 會稽王은 令德雅望이니 足下宜以大政授之하라한대 裒乃固辭歸藩하다
昱이 淸虛寡欲하고 尤善玄言이러니 常以劉惔, 王濛, 韓伯爲談客하고 郗超, 謝萬爲掾屬하니
超
는 鑒之孫也
라 少卓犖不羈
注+卓, 高也. 犖, 呂角切, 有力也. 言其氣韻甚高, 且有才力, 譬之馬駒逸群, 不可得而覊縶也.러니 父愔
이 簡黙沖退
로되 而嗇於財
하여 積錢
이 至數千萬
이라
常開庫하여 任超所取한대 超散施親故하여 一日都盡이러라
目
漢主勢之弟廣이 以勢無子라하여 求爲太弟한대 不許하다
馬當, 解思明이 諫曰 陛下兄弟不多하시니 若復有所廢면 將益孤危리이다하고 固請許之하다
勢疑其與廣有謀하여 收斬之하고 襲廣於涪城하니 廣이 自殺하다
思明이 被收에 歎曰 國之不亡은 以我數人在也러니 今其殆矣로다 思明이 有智略하고 敢諫諍하며 當이 素得人心이라 及其死에 士民이 無不哀之러라
目
[목目]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소를 가난한 백성들에게 빌려주고서 원유苑囿 가운데에서 농사짓게 하여 소출의 10분의 8을 세금으로 바치게 하고 본래 소가 있는 자는 10분의 7을 세금으로 내게 하였다.
기실참군記室参軍 봉유封裕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옛날에는 10분의 1을 조세로 바쳤으니, 이것은 천하의 중정中正한 방법입니다. 후대로 내려와 위진시대魏晉時代에 이르러 인자한 정사가 쇠퇴하고 각박해졌으나, 그래도 10분의 7이나 8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3천 리의 영토를 개척하고 10만 호의 백성을 늘렸는데, 전지田地가 없는 자가 10명 중에 3, 4명에 이릅니다. 이는 마땅히 원유苑囿를 파하여 새로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소가 없는 자에게는 관에서 소를 하사하여야 하니, 다시 세금을 많이 거두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관사官司가 지나치게 많으니, 마땅히 모두 깨끗이 정리해야 하고,
注+① 猥는 지나침이다. “澄汰”는 물을 사용하는 것을 가지고 비유하였으니, 침전시켜서 맑게 하고 그 모래와 진흙을 가려내어 버리는 것이다. 공업과 상업의 하찮은 이익에 종사하는 인원을 줄여서 일정하게 만들어야 하고, 학생이 3년 내에 성취가 없으면 마땅히 농사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참군参軍 왕헌王憲과 대부大夫 유명劉明은 근래 직언을 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서 관직에서 파면되어 금고를 당하였습니다. 장사長史 송해宋該는 아첨하여 구차하게 비위를 맞추어 직간하는 선비를 함부로 탄핵하였으니, 매우 불충한 자입니다.”
目
[목目] 조령을 내려 저부褚裒를 불러 정사를 보필하게 하니, 상서尚書 유하劉遐가 그를 설득하기를 “회계왕會稽王은 훌륭한 덕과 고상한 명망이 있으니, 족하足下가 마땅히 조정의 정권을 그에게 주어야 한다.” 하자, 저부가 마침내 굳이 사양하고 번진藩鎭으로 돌아갔다.
사마욱司馬昱은 마음이 깨끗하고 욕심이 적으며
을 담론하기를 더욱 잘하였는데, 항상
유담劉惔(유담)과
왕몽王濛,
한백韓伯을 담론하는 빈객으로 삼고
치초郗超와
사만謝萬을
연속掾屬으로 삼았다.
치초는
치감郗鑒의 손자인데, 젊어서부터
기개氣槪가 높고 재주가 뛰어나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注+① 卓은 높음이다. 犖은 呂角의 切이니, 힘이 있음이다. 〈“卓犖不羈”는〉 기개와 風趣가 매우 높고 또 才力이 있어서 마치 무리들 중에 두드러지게 뛰어난 말이나 망아지처럼 속박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아버지
치음郗愔은 말수가 적고 태도가 신중하며 겸손하였으나 재물을 아껴 축적한 돈이 거의 수천 만이었다.
일찍이 창고를 열어 치초가 마음대로 가져가게 놔두자, 치초는 이것을 친척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어 하루 만에 다 써서 없앴다.
사만謝萬은 사안謝安의 아우인데, 청명淸明하고 광달曠達하고 준수俊秀하고 호매豪邁해서 또한 당시에 명망이 있었다.
目
[목目] 유익庾翼이 병이 위독하자, 표문表文을 올려 아들 유원지庾爰之(유익의 차자次子)를 형주자사荆州刺史로 삼고 후임後任을 맡기기를 청하였다.
그가 졸卒하자 조정의 의논은 “여러 유씨庾氏가 대대로 서쪽 번진藩鎭에 있어서 인심이 편안하였다.” 하여, 그의 청원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하충何充은 다음과 같이 반대하였다.
“
형초荆楚는 나라의 서쪽 문이다.
호구戶口가 백 만이고 북쪽으로 강한 오랑캐(
후조後趙)와 접해 있으며 서쪽으로 굳센
촉蜀 지방(
전한前漢)과 이웃하였으므로 훌륭한 인재를 얻으면
중원中原을 평정할 수 있고 인물을 잃으면
사직社稷을 우려할 만하니,
육항陸抗이 이른바 ‘형초 지방이 보존되면
오吳나라가 보존되고, 형초 지방을 잃으면 오나라가 망한다.’는 것이다.
注+① 〈“陸抗所謂存則呉存 亡則呉亡者也”는〉 陸抗이 죽을 때 올린 상소문인바, 晉 武帝 泰始 10년(274)에 보인다.
어찌 〈한갓 글만 읽고 세상일에 경험이 없는〉 백면白面의 소년으로 하여금 이곳을 담당하게 할 수 있겠는가. 환온桓温은 영명함과 지략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문무文武의 기국器局과 재간才幹이 있으니, 서하西夏(형주荊州)의 임무는 환온을 능가할 자가 없다.”
目
[목目] 한주漢主 이세李勢의 아우 이광李廣은 이세가 아들이 없다 하여 자신을 태제太弟로 삼아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세가 허락하지 않았다.
마당馬當과 해사명解思明이 간하기를 “폐하는 형제가 많지 않으시니, 만약 또다시 이광을 버리시면 장차 더욱 외롭고 위태로울 것입니다.” 하고 허락할 것을 굳이 청하였다.
이세는 이들이 이광과 모의한 것이라고 의심하고 체포하여 참수하고 이광을 부성涪城에서 기습하니, 이광이 자살하였다.
해사명이 체포될 때 탄식하기를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우리 몇 사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데 이제는 위태로울 것이다.” 하였다. 해사명은 지략智略이 있었고 과감하게 간쟁하였으며, 마당은 평소 인심을 얻었다. 그래서 이들이 죽게 되자,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슬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