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더불어 누가 더 나은가?”注+② 고羖는 음이 고古이니 숫양이다. 백리해百里奚는 다섯 마리 숫양의 가죽에 자신을 팔아 남을 위하여 소를 키웠다.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등용하여 정승으로 삼으니 진秦나라 사람들이 그를 오고대부五羖大夫라 불렀다.라고 하니, 조량이 대답하기를 “천 사람이 좋다고 하는 것이 한 사람의 바른말보다 못합니다.注+③ 낙諾은 대답하는 소리이다. 악諤은 오각五各의 절切이니 바른말이다.
청컨대 제가 하루 종일 바른말을 하여도 주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상군이 말하기를 “좋다.”라고 하였다.
조량이 말하기를 “오고대부는 형荊(楚)나라의 비천한 사람이었는데注+④ 백리해百里奚는 남양南陽완宛 땅 사람이다. 완宛은 초楚나라 소속이므로 형荊이라 하였다., 목공穆公이 그를 소를 먹이는 신분에서 등용하여 백성의 위에 올려놓았지만, 진秦나라에서 누구도 불만하지 못하였습니다.
진秦나라에서 정승으로 지낸 지 6, 7년 만에 동쪽으로 정鄭나라를 정벌하고, 세 번 진晉나라 임금을 세우고, 한 번 형荊나라의 화禍를 구원하여 파인巴人이 조공을 바치고 견융犬戎이 와서 복종하였습니다.注+⑤ “동벌정東伐鄭(동쪽으로 정鄭나라를 정벌하였다.)”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30년에 진晉나라와 함께 정鄭나라를 포위한 것을 말한다. “삼치진군三置晉君(세 번 진晉나라 임금을 세웠다.)”은 진晉나라의 혜공惠公과 회공懷公과 문공文公을 세운 것을 말한다. “일구형화一救荊禍(한 번 형荊나라의 화禍를 구원하였다.)”는 자세하지 않다. 황제黃帝의 후손이 병명幷明을 낳고 병명幷明이 백견白犬을 낳았는데, 백견白犬이 견융犬戎이다.
그가 정승이 되어서는 수고로워도 수레에 앉지 않았고 더워도 일산을 펴지 않았으며注+⑥ 옛날에 수레는 서서 타는데 오직 안거安車는 앉아서 타는 것이다. 개蓋는 수레의 위를 덮는 것이다., 나라 안을 다닐 때에는 수레가 뒤따르지 않고 창과 방패로 호위하지 않았습니다.注+⑦ 종從(따르다)은 재용才用의 절切이다.
그가 죽었을 때 남자와 여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어린아이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며 방아 찧는 자는 절구질을 해도 장단을 맞추지 않았습니다.注+⑧ 악기의 반주 없이 노래하는 것이 요謠이다. 상相(돕다)은 거성去聲이고 저杵는 창서昌署의 절切이다. 상저相杵는 소리로 서로 권면하는 것이다.
, 정사를 맡아서 공족公族을 업신여기고 백성百姓에게 모질게 하니注+① 역轢은 음이 역歷이니 수레가 밟고 지나가는 것을 이른다.공자公子건虔이 두문불출杜門不出한 지 이미 8년입니다.
《시경詩經》에 ‘인심을 얻은 자는 흥하고 인심을 잃은 자는 망한다.’注+② 《시경詩經》에 빠져 없어진 시詩이다.라고 하였으니, 위의 몇 가지는 인심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가 나갈 때는 뒤따르는 수레에 갑사甲士를 태웠으며, 힘이 세고 기골이 건장한 자를 참승驂乘으로 하고注+③ 병騈은 포면蒲眠의 절切이니 합함이다. 본래 변骿으로 쓴다. 협脅은 갈비뼈이다. 대개 겨드랑이 아래의 갈비뼈가 하나처럼 합쳐 있는 것이다., 창을 가진 자가 창으로 수레를 에워싸며 수레 옆에서 따라오게 하였습니다.注+④ 흡闟은 소급所及의 절切이다. 흡闟의 뜻은 상자처럼 싸는 것이니 네 면에서 창으로 수레를 둘러싸는 뜻을 취한 것이다. 방旁은 보흔步痕의 절切이니 곁에 붙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역토力土로 하여금 수레 옆에서 따라오게 하다가 급한 일이 있으면 창을 잡고 북을 치며 방어하는 것이다.
《서경書經》에 ‘덕德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패망한다.’注+⑤ 《서경書經》에 빠져 없어진 글이다.라고 하였으니 위의 몇 가지는 덕德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의 위태로움이 아침 이슬과 같은데도 오히려 상商과 오於의 부유함을 탐하며, 진秦나라의 정사를 농단하는 것을 총애로 여기고, 백성의 원망을 쌓으면서도 바꿀 생각이 없으니注+⑥ 아침 이슬은 쉽게 마르니 오래가지 않음을 말한다. “총진국지정寵秦國之政(秦나라의 정사를 농단했다.)”은 진秦나라의 정사를 오로지하는 것을 총애로 여긴다는 것이다.,
진秦나라 왕이 하루아침에 빈객賓客을 버리고 별세하여 조정에 서지 못하면 진秦나라에서 그대를 잡으려는 자가 어찌 적겠습니까?”注+⑦ 위앙衛鞅이 진秦나라에 인덕과 은혜가 없었으므로 진秦나라에서 장차 위앙衛鞅을 잡으려는 것은 그 징험이 매우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어찌 적겠는가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군商君이 그 말을 따르지 않았는데 5개월이 지난 뒤에 난이 일어났다.
目
[目]호씨胡氏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위앙衛鞅이 이때에 이르러 비록 바꿀 생각이 있었더라도 시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백성은 그의 원수이고 육국六國은 그의 적이다.
혜문왕惠文王의 서운함을 풀어줄 수 없고 공자公子건虔의 형벌을 보상할 수 없으며 상商과 오於의 작은 땅은 자신을 감추기에 부족하니注+① 최蕞는 조외祖外의 절切이니 작은 모양이다., 뒷마무리를 잘하는 계책을 쓰고 싶더라도 해서 될 만한 일이 없었다.
오호라!
형명刑名의 학문을 따르고 백성에게 모질게 하는 무리들에게 또한 조그만 경계가 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