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 같다. 사謝는 그의 이름이다., 반초의 군대는 병력이 적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크게 두려워하였다.
반초가 말하기를 “월지의 병력이 비록 많으나 수천 리 멀리 총령蔥嶺을 지나와서 수송하는 물자가 있지 않으니, 어찌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注+〈“비유운수 하족우야非有運輸 何足憂邪”는〉 양식이 다하여 응당 항복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우리가 곡식을 거둬들이고 견고히 수비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하면 저들이 굶주리고 곤궁하여 스스로 항복할 것이니, 수십 일이 지나지 않아서 승부가 결정될 것이다.”注+〈“결의决矣”는〉 승부가 결정됨을 이른다. 하였다. 사謝가 공격하였으나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노략질하였으나 얻은 바가 없었다.
반초는 그들이 반드시 구자龜玆에게 식량을 요구하리라고 짐작하고는 수백 명의 병사를 보내 동쪽 경계에서 이들을 가로막았다.注+요要는 가로막음이다.
사謝가 과연 기병을 보내 구자에 뇌물을 바치려 하자, 복병이 이들을 가로막고 공격하여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가져다가 사謝에게 보였다. 사謝는 크게 놀라 죄를 청하고 이로부터 해마다 공물을 받들어 올렸다.
【목目】 처음에 북해애왕北海哀王(유기劉基)이 후사가 없으니注+애왕哀王은 이름이 유기劉基이니 유연劉縯의 증손이고, 아버지는 경왕 유목敬王 劉睦이다., 숙종肅宗(장제章帝)은 제무왕齊武王이 맨 먼저 대업大業을 창도했다 하여 유명遺命을 내려 두 나라를 회복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두 봉하였다.
綱
【강綱】 가을 7월에 두헌竇憲이 양주涼州로 나가 주둔하였다.
綱
【강綱】 9월에 북흉노北匈奴가 변방에 와서 조회할 것을 청하였는데, 겨울에 두헌竇憲이 사자使者를 보내 맞이하고는 다시 군대를 보내 습격해서 흉노를 격파하였다.
目
【목目】 북선우北單于가 사자使者를 보내 변방에 와서 신臣을 칭하고 들어와 조회하고 황제를 뵙고자 하므로 두헌竇憲이 반고班固를 보내 맞이하게 하였다.
마침 남선우南單于가 북흉노北匈奴의 조정을 멸망시킬 것을 청하자, 두헌이 다시 중낭장 경담中郎將 耿譚을 보내 기병을 거느리고 변경으로 나가서 북선우를 습격하게 하니注+경담耿譚이 사흉노중랑장使匈奴中郞將으로 있었다., 북선우가 상처를 입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남부南部(남선우)의 무리가 더욱 번성하여 거느린 호구가 3만 4천이고 정예병[승병勝兵]이 5만이었다.注+승勝은 음이 승升이니, “승병勝兵”은 다섯 가지 병기(세모진 창[모矛], 갈래진 창[극戟], 활[궁弓], 검[검劍], 평두창[과戈])를 잡고 싸울 수 있는 병사를 이른다.
역주
역주1(士)[王] :
저본에는 ‘士’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集覽≫에 의거하여 ‘王’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北匈奴……襲擊破之 :
“조회하기를 청한 것은 순한 일이다. 그를 맞이하고 다시 공격하였다고 하여 그 일을 곧바로 썼으니, 폄하한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求朝 順節也 迎之 復擊之 直書其事 貶意自見矣]” ≪書法≫ “변방에 와서 조회하기를 청한 것은 夷狄들이 귀순하려는 것이다. ‘사신을 보내 맞이했다.’고 썼고 또 ‘군대를 보내 습격해서 격파했다.’고 썼으니, 그렇다면 거짓된 꾀가 더욱 심한 것이다. 竇憲이 병권을 전횡하여 행한 바가 이와 같으니, 漢나라 조정이 그러고도 나라를 제대로 세울 수 있겠는가.[欵塞求朝 夷狄之向化也 旣書遣使迎之 又書遣兵襲擊破之 則詐謀爲益甚矣 竇憲專兵 所爲如此 漢朝尙可立國乎]” ≪發明≫
역주4(來)[求] :
저본에는 ‘來’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上海古籍出版社)에 의거하여 ‘求’로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