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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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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宋元嘉三十年이요 魏興安二年이라
春正月 宋以始興王濬으로 爲荆州刺史하다
濬以南徐刺史 鎭京口러니 求爲荆州한대 宋主許之하다 濬還京口治行이라가 而巫蠱事覺하니 宋主怒未解 故濬久留京口러니 既除荆州 乃聽入朝하다
宋遣武陵王駿하여 統諸軍하여 討西陽蠻하다
◑二月 宋太子劭 弑其君義隆注+壽, 四十七.하고 하다
嚴道育之亡命也 搜捕甚急하니 道育匿於東宮이라가 又随始興王濬하여 至京口러니 濬入朝 復載還東宮하다
捕得其婢하니호되 道育随征北還都注+濬爲征北將軍, 故稱之.라한대 宋主乃命京口送婢하여 須至檢覆注+言待婢至, 檢覈覆審其事也.하고
欲廢太子劭하며 賜濬死하여 先與王僧綽謀之하고 使尋漢魏典故하여 送徐湛之江湛注+典, 經常之籍也. 故, 舊事也. 通鑑 “使僧綽尋漢魏以來廢太子諸王典故.” 送, 送典故也.하다
武陵王駿素無寵이라 故屢出外藩하고 南平王鑠建平王宏 皆爲宋主所愛注+宋文帝子.러니 鑠妃 江湛之妹 随王誕妃 徐湛之之女也
湛勸立鑠하고 湛之欲立誕한대 僧綽曰 建立之事 仰由聖懐 臣謂唯宜速斷이요 不可稽緩이라
하나니 願以義割恩하여이요 不爾 便應坦懐如初하여 無煩疑論注+坦懐如初, 謂坦懷待之, 如父子天性之初也.이니
事機雖密이나 易致宣廣이라 不可使難生慮表하여 取笑千載니이다하니
宋主曰 卿可謂能斷大事 然此事至重하니 不可不慇懃三思 且彭城始亡하니 人將謂我無復慈愛之道라한대
僧綽曰 臣恐千載之後 言陛下唯能裁弟 不能裁兒라하니 宋主黙然하다
江湛出謂僧綽曰 卿向言 將不太傷切直 僧綽曰 弟亦恨君不直注+僧綽年少於湛, 故自稱爲弟. 一說 “弟, 但也.”하노라
鑠自壽陽入朝失旨 宋主欲立宏호되 嫌其非次 是以議久不决하여 與湛之屏人語호되 或連日累夕하여
常使湛之 自秉燭繞壁檢行하여 慮有竊聽者러니 既而以其謀告潘淑妃어늘 妃以告濬하니 濬馳報劭한대 劭乃謀爲逆하다
宋主以宗室彊盛으로 慮有内難하여 特加東宮兵하여 使與羽林相若하니 至有實甲萬人이러라
劭性黠而剛猛한대 宋主深倚之러라 及將作亂 毎夜饗將士 或親行酒하다
僧綽密以聞이러니 會嚴道育婢將至 劭詐爲詔하고 豫加部勒云호되 有所討라하고
夜呼前中庶子蕭斌左衞率袁淑中舍人殷仲素入宮하여 流涕謂曰 主上信讒하니 將見罪廢 内省無過하니 不能受枉이라 明旦 當行大事하리니 望相與戮力하라하고
因起徧拜之하니 衆驚愕莫能對하다 久之 淑斌皆曰 自古無此 願加善思하소서하니 劭怒變色이어늘
斌懼曰 當竭身奉令하리이다하니 淑叱之曰 卿便謂殿下眞有是邪 殿下幼嘗患風이러니 今疾動耳
劭愈怒하고 因眄淑曰 事當克否注+眄, 目偏合而斜視也. 淑曰 居不疑之地하여 何患不克이리오 但既克之後 不爲天地所容이니 大禍亦旋至耳 假有此謀라도 猶將可息이니이다하니
左右引淑出曰 此何事而云可罷乎 淑還省하여 繞床行이라가 至四更乃寢注+還省, 還左衛率省也.하다
明日 宮門未開 劭以朱衣加戎服上하고 乗畫輪車하여 與蕭斌同載注+朱衣, 太子入朝之服. 晉志曰 “畫輪車, 駕牛, 以綵漆畫輪轂, 故名曰畫輪車. 上起四夾杖, 左右開四望, 綠油幢, 朱絲絡, 其上形制事事如輦, 其下猶如犢車耳. 太子法駕亦謂之鸞路, 非法駕則乘畫輪車, 兩箱裏飾以金錦黃金, 塗五采.”하고 呼袁淑甚急하되 淑眠不起
劭停車催之하니 淑徐起하여 至車後어늘 劭使登車한대 又辭不上이어늘 劭命殺之하다
門開而入한대 舊制 東宮隊 不得入城注+言不得入臺城也.이라 劭以僞詔 示門衞曰 受勅하여 有所收討라하고 令後隊速來하니
張超之等數十人 馳入齋閣하여 拔刃徑上合殿注+晉世諸帝多處內房, 朝宴所臨, 東西二堂而已. 孝武末年, 淸暑方構, 永初受命, 無所改作, 所居惟稱 殿, 不製嘉名, 文帝因之, 亦有合殿之稱.하니 宋主其夜 與徐湛之 屏人語至旦하여 燭猶未滅하고 衛兵尙未起러라
宋主見超之入하고 舉几捍之하니 五指皆落한대 遂弑之하다 湛之驚起하니 兵人殺之하다
劭出坐東堂한대 江湛聞喧噪聲하고 歎曰 不用王僧綽言하여 以至於此로다하니 劭遣兵殺之하다
左細仗主天與 不暇被甲하여 執刀持弓하고 疾呼左右出戰하여 射劭幾中이러니 劭黨擊之하여 斷臂而死注+宋宿衛之官, 有細鎧主․細鎧將․細仗主等.하다
隊將張泓之朱道欽陳滿 與天與 俱戰死어늘 劭使人殺潘淑妃及太祖親信數十人하다
濬時在西州府하여 臺内喧噪하고 不知事之濟不하여 騷擾不知所爲注+濬自京口入朝, 蹔居西州. 濟不之不, 讀曰否.어늘
將軍王慶曰 宮内有變하되 未知主上安危 凡在臣子 當投袂赴難하니 憑城自守 非臣節也니라 濬不聽이러니 俄而劭馳召濬한대 濬屏人問狀하고 即戎服乗馬而去하니
王慶又諫曰 太子反逆하니 天下怨憤이라 明公但當堅閉城門하고 坐食積粟하면 不過三日 凶黨自離하니 公情事如此어늘 今豈宜去注+石頭倉城有積粟. 情事, 謂人情公事.리오
濬入見劭하니 劭曰 潘淑妃遂為亂兵所害라한대 濬曰 此是下情由來所願이니이다
劭詐以詔 召大將軍義恭尚書令何尚之하여 入拘於内하고 竝召百官하니 至者纔數十人注+內謂臺內.이러라
劭遽即位下詔曰 徐湛之江湛 弑逆無狀 吾勒兵入殿하되 已無所及이라 今罪人斯得하니 可大赦하고 改元太初라하고 即稱疾還永福省하여 不敢臨喪하고 以白刃自守注+永福省, 太子所居也, 在禁中.러라
以蕭斌為僕射하고 以何尚之為司空하니 劭不知王僧綽之謀하여 以為吏部尚書하다
武陵王駿屯五洲하니 沈慶之自巴水來하여 咨受軍略注+水經註 “江水東逕江夏軑縣故城南. 縣古弦國也. 城在山之陽, 南對五洲. 江中有五洲相接, 故以爲名.” 軑, 音汰, 又徒系切. 水經 “巴水出廬江雩婁縣之巴山, 南歷蠻中, 又南流注于江.” 軍略, 謂用兵之策略也. 去年, 宋主使沈慶之討蠻, 是年, 使駿統討蠻諸軍, 故慶之來駿咨受軍略.하더라
典籖董元嗣 自建康至五洲하여 具言太子弑逆한대
沈慶之密謂腹心曰 蕭斌婦人이요 其餘將帥皆易與耳 東宮同惡 不過三十人注+謂張超之等.이요 此外屈逼이라 必不為用이니 今輔順討逆이면 不憂不濟也注+順謂武陵王, 逆謂劭也.리라
劭料檢文帝巾箱及江湛家書疏라가 得王僧綽所啟饗士幷前代故事하고 收殺之注+料, 音聊. 巾箱所以藏要密文書, 便於尋閱.하다
僧綽弟僧虔 為司徒屬注+舊制, 司徒府有東西曹, 曹有掾有屬.이러니 所親咸勸之逃한대 僧虔泣曰
吾兄奉國以忠貞하고 撫我以慈愛하니 今日之事 苦不見及耳 若得同歸九泉이면 猶羽化也注+羽化, 猶言登仙, 神仙家所謂飛昇也.
劭因誣北第諸王侯云호되 與僧綽謀反이라하고 殺之注+諸王侯列第於臺城北, 故曰北第. 此皆穆․武子孫也.하다
夏四月 宋江州刺史武陵王駿 舉兵討劭하니 宋人立駿이러니
劭密與沈慶之手書하여 令殺武陵王駿한대 慶之求見駿하니 駿懼하여 辭以疾이어늘 慶之突入하여 以劭書示駿한대 駿泣求入與母訣注+母, 路淑媛.이어늘
慶之曰 下官受先帝厚恩하니 今日之事 唯力是視 殿下何見疑之深 駿起再拜曰 家國安危 皆在將軍이로다
慶之即命内外勒兵한대 主簿顔竣曰注+竣, 七倫切. 今四方未知義師之舉하고 劭據有天府하니
若首尾不相應이면 此危道也 宜待諸鎭協謀하여 然後舉事注+天府, 謂建康. 首, 謂武陵已倡義於九江. 尾, 謂諸方鎭.니이다
慶之厲聲曰 今舉大事 而黄頭小兒 皆得參預하니 何得不敗리오 宜斬以徇衆注+男女始生爲黃頭小兒, 言其如嬰兒, 未有知識也.이라하여늘
駿令竣拜謝하니 慶之曰 君 但當知筆札事耳라하다 於是 専委慶之處分하여 旬日之間 内外整辦하니 人以為神兵이러라 竣延之子也注+延之, 時在建康.
駿戒嚴誓衆하고 以沈慶之 領府司馬하고 柳元景宗慤朱脩之 皆為參佐하고 顔竣領錄事하여 總内外하고 以劉延孫으로 為長史行留府事注+延孫, 道產之子也.하다
荆州刺史南譙王義宣雍州刺史臧質 皆不受劭命하고 與司州刺史魯爽으로 同舉兵以應駿하니 質爽俱詣江陵하여 見義宣하고 且遣使勸進於駿注+司․雍皆受督於義宣, 故俱詣之.하다
駿至尋陽하여 命顔竣하여 移檄四方하니 州郡響應이러라 義宣遣臧質하여 引兵詣尋陽하니 兗冀刺史蕭思話將軍垣護之 皆帥所領赴之하다
義宣張永為冀州刺史한대 永遣司馬崔勲之等하여 將兵赴義하다
會稽太守随王誕 將受劭命한대 參軍事沈正 説司馬顧琛曰注+正, 田子之兄子. 琛, 和之曾孫也.
國家此禍 開闢未聞이라 今以江東驍鋭之衆으로 唱大義於天下하니 其誰不響應이리오 豈可使殿下 北面凶逆하여 受其僞寵乎注+此江東, 謂浙江之東也.
琛曰 江東忘戰日久하니 雖逆順不同이나 然彊弱亦異하니 當須四方有義舉者然後 應之不為晚也니라
正曰 天下 未嘗有無父無君之國이니 寧可自安讐恥而責義於餘方乎리오 今正以弑逆冤醜 義不同天이라 舉兵之日 豈求必全邪注+醜, 衆也.
馮衍有言曰 大漢之貴臣 將不如荆齊之賤士乎注+馮衍, 後漢人也. 此蓋衍責田邑之言. 荊齊之賤士, 謂申包胥赴秦求救以存荊, 王孫賈殺淖齒以存齊也. 況殿下義兼臣子하니 事實國家者哉
琛乃與正으로 共入説誕하니 誕從之하다 劭自謂素習武事라하여 語朝士曰 卿等 但助我理文書하라 若有冦難이면 吾自當之라하더니 及聞四方兵起 始憂懼戒嚴이러라
四月 柳元景統薛安都等十二軍하여 發湓口하고 參軍徐遺寶 以荆州之衆으로 繼之하고 駿發尋陽할새 沈慶之摠中軍以從하다
檄至建康 劭以示太常顔延之曰 彼誰筆也 延之曰 竣之筆也라하니 劭曰 何至於是 延之曰 竣尚不顧老臣하니 安能顧陛下 劭怒稍解러라
劭疑舊臣不為己用하여 乃厚撫魯秀王羅漢하여 悉以軍事委之하고 以蕭斌으로 為謀主하고 殷沖으로 掌文符注+沖, 融之曾孫, 劭之妃父也.하다 蕭斌勸劭勒水軍自上决戰하고 不爾則保據梁山注+胡三省曰 “今太平州當塗縣西南三十里有天門山, 亦曰蛾眉山. 兩山夾大江對峙, 東曰博望山, 西曰梁山.”하라하다
江夏王義恭 以南軍倉猝하고 船舫陋小하여 不利水戰이라하여 乃進策曰
賊駿少年未習軍旅하고 遠來疲弊하니 宜以逸待之 今遠出梁山하면 則京都空弱하니 東軍乗虚 或能為患注+東軍, 謂會稽隨王誕之兵也.이라
若分力兩赴하면 則兵散勢離 不如養鋭待期하여 坐而觀舋하며 割棄南岸하고 柵斷石頭 此先朝舊法이니 不憂賊不破也注+先朝舊法, 謂晉明帝拒王含及武帝拒盧循時用兵之法.라하니 劭善之
斌厲色曰 南中郎二十年少 能建如此大事하니 豈復可量注+時武陵王駿爲南中郎將․江州刺史, 故稱之. 駿時年二十四.이리오 三方同惡하여 勢據上流하고 沈慶之甚練軍事하고 元景宗慤屢嘗立功이라 形勢如此하니 實非小敵注+三方, 謂荊․雍․江.이라
唯宜及人情未離하여 尚可决力一戰이니 端坐臺城이면 何由得久 今主相咸無戰意하니 豈非天也리오 劭不聽注+相, 息亮切.하다
或勸劭保石頭城하니 劭曰 昔人所以固石頭城者 俟諸侯勤王耳 我若守此 誰當見救리오 唯應力戰决之 不然이면 不克이라
太尉司馬龐秀之 自石頭先衆南奔하니 人情 由是大震注+先, 息薦切.하니라
駿軍于鵲頭注+鵲頭在宣城郡界. 蓋其地在鵲洲之頭.할새 宣城太守王僧逹 得檄하고 未知所從이라 客説之曰
方今 舋逆滔天하여 古今未有 為君計컨대 莫若承義師之檄하여 移告傍郡이니 茍在有心이면 誰不響應이리오 此上策也注+謂凡有人心者, 皆若響之應聲.
如其不然이면 可躬師向義之徒하고 詳擇水陸之便하니 致身南歸 亦其次也니이다
僧逹乃自候道南奔注+候道, 伺候邊上警急之道也.이어늘 駿即以為長史하니 僧逹 弘之子也
駿初發尋陽 沈慶之謂人曰 王僧逹必來赴義리라 人問其故한대 慶之曰 吾見其在先帝前 議論開張하고 執意明决하니 以此言之컨대 其至必也니라
柳元景以舟艦不堅으로 憚於水戰하여道兼行하여 至江寧步上注+江寧縣臨江渚, 晉咸和之後, 以江外無事, 於南浦置江寧縣.하여 使薛安都 帥鐵騎曜兵於淮上注+秦淮之上也.하고 移書朝士하여 為陳逆順하니 降者相屬이러라
駿自發尋陽으로 有疾不能見將佐하고 唯顔竣出入卧内하여 擁駿於膝하고 親視起居注+在室在舟, 凡寢臥之所, 皆謂之臥內.한대
疾屢危篤하여 不任咨稟이어늘 竣皆専决하고 軍政之外 間以文教書檄하고 應接遐邇하며 昏曉臨哭 若出一人注+間, 中間也. 一說 “間, 古莧切.”하니 如是累旬 自舟中甲士 亦不知駿之危疾也러라
柳元景潜至新亭依山為壘하니 新降者皆勸元景速進한대 元景曰 理順難恃하고 同惡相濟 輕進無防이면 實啟冦心이라하다
劭使蕭斌等으로 分統水陸精兵萬人하여 攻新亭壘하고 劭自登朱雀門督戰이어늘
元景宿令軍中曰注+宿令者, 先未戰之日而令之也 鼓繁이면 氣易衰하고 呌數이면 力易竭이니 銜枚疾戰하여 一聽吾鼓聲하라
劭將士懐劭重賞하여 皆殊死戰이러라 元景水陸受敵호되 意氣彌彊하여 麾下勇士 悉遣出鬪하니
劭兵垂克 魯秀擊退鼓한대 劭衆遽止어늘 元景乃開壘鼓譟以乗之하니 劭衆大潰
劭更帥餘衆하여 自來攻壘어늘 復大破之하여 殺傷過前하니 劭僅以身免하고 魯秀南奔하다
駿至江寧하니 江夏王義恭單騎南奔하여 上表勸進하니 駿遂即位于新亭하다
劭葬太祖하고 諡曰景이라하고 廟號中宗이러니 至是하여 改諡曰文이라하고 廟號太祖하다 尊母路氏為皇太后하고 立妃王氏為皇后하고 封拜義恭以下有差注+后父偃, 導之玄孫也.하다
五月 臧質以雍州兵으로 至新亭하고 豫州刺史劉遵考 遣將帥步騎五千하여 軍于瓜步하다
先是 宋主遣將軍顧彬之하여 將兵東入하여 受随王誕節度하니
誕遣參軍劉季之하여 將兵與彬之俱向建康하고 誕自頓西陵하여 為之後繼注+胡三省曰 “西陵, 今紹興府蕭山縣西興鎭是也. 其地西臨浙江, 吳越王錢鏐以陵非吉語, 改曰西興.”하니 劭遣兵拒之라가 大敗하다
劭緣淮樹柵自守할새 男丁既盡이어늘 召婦女供役이러니 魯秀等募勇士攻大航克之하니 王羅漢即放仗降注+大航, 卽雀航. 放仗降, 謂放棄兵仗而降服也.하여
城中하여 文武將吏争踰城出降하니 蕭斌令所統解甲하고 自石頭戴白幡來降이어늘 詔斬於軍門하다
諸軍遂克臺城하니 張超之走至合殿御牀之所하여 為軍士所殺하여 刳腸割心하니 諸將臠其肉生噉之
劭入武庫井中이어늘 隊副髙禽執之하고 臧質見之慟哭한대 劭曰 天地所不覆載 丈人何為見哭注+質, 武敬皇后之姪, 故劭呼爲丈人. 質縛劭於馬上하여 防送軍門하다
不見傳國璽 問劭하니 曰 在嚴道育處라하여 就取得之하고 斬劭及四子於牙下注+牙, 旗竿也.하다
濬帥左右南走라가 遇江夏王義恭曰 南中郎 今何所作 義恭曰 上已君臨萬國이니라
又曰 虎頭來無晚乎注+虎頭, 濬自稱其小字. 義恭曰 殊當恨晚이로다
勒與俱歸라가 於道斬之하고 及其三子하다 劭濬父子首 竝梟於大航하고 暴尸於市하고 汚瀦劭所居齋注+汚, 音烏, 濁水不流曰汚. 瀦, 音諸, 水所停曰瀦. 齋, 燕居之室也. 記檀弓 “臣弒君, 子弒父者, 殺其人, 毁其室, 汚其宮而瀦焉.”하고
嚴道育王鸚鵡 竝都街鞭殺하여 焚尸揚灰於江하고 殷沖尹弘王羅漢及沈璞皆伏誅注+璞累爲濬參佐, 守于湖不迎義師, 故誅.하다
贈袁淑為太尉하고 諡忠憲公하며 徐湛之為司空하고 諡忠烈公하며 江湛為開府儀同三司하고 諡忠簡公하며 王僧綽為金紫光禄大夫하고 諡簡侯하며
卜天與益州刺史하고 諡壯侯하여 與淑等四家 長給廪禄하다
劭以尚書令何尚之為司空하고 子偃為侍中이러니 及劭敗 尚之左右皆散하니 自洗黄閤注+自洗, 躬親洗掃也. 舊制, 三公聽事置黃閤. 鄭玄云 “三公與天子禮秩相亞, 故黃其閤. 閤, 小門也.”이니라
宋主以尚之偃 素有令譽하고 且居劭朝 用智將迎하여 時有이라하여 故特免之注+時三方興義, 將佐家在都者, 劭悉欲誅之, 尙之誘說百端, 竝得全免.하고 復以尚之為尚書令하고 偃為大司馬長史하여 任遇無改러라
宋以柳元景으로 為護軍將軍하다
宋主之討西陽蠻也 臧質使柳元景將兵會之러니 及質起兵하여 欲奉南譙王義宣為主하여 潜使元景西還이러니
元景即以質書 呈宋主하고 語其信曰注+信, 使也. 臧冠軍 當是未知殿下義舉耳注+質以冠軍將軍鎭襄陽. 方應伐逆이니 不容西還이로다 質以此恨之러니
及宋主即位 以質為江州하고 元景為雍州하니 質慮元景為荆江後患하여 建議元景當為爪牙 不宜遠出이라하니
宋主重違其言하여 以元景為護軍將軍하여 領石頭戍事하다
宋以南郡王義宣으로 為荆湘刺史하다
◯秋七月朔 日食하다
宋主詔求直言하고 省細作竝尚方彫文塗飾하고 貴戚競利 悉皆禁絶注+宋有細作署令, 大明四年改爲左右御府令.하다
中軍錄事參軍周朗 上疏以為毒之在體 必割其緩處하나니 歴下泗間不足戍守注+歷下, 謂歷城. 泗間, 謂彭城․湖陸.어늘
議者必以為胡衰不足避注+當時議者, 蓋以魏連有內難, 遂謂之衰.라호되 而不知我之病甚於胡矣注+兵甲饋餫之費, 虛內以給外, 則吾國之病甚於胡運之衰. 餫, 王問切, 野饋也.
今空守孤城하여 徒費財役하니 使虜 但發輕騎三千하여 更互出入하여 春來犯麥하고 秋至侵禾 水陸漕輸 居然復絶이니
於賊不勞而邊已困이라 不至二年 卒散民盡 可蹻足而待也注+居然, 徒然也. 虜騎至, 則江南之人, 不敢至彭․泗, 水陸漕輸絕矣. 蹻, 丘妖切, 擧趾謂之蹻.니이다
今人知不以羊追狼蟹捕鼠 而令重車弱卒 與肥馬悍胡相逐하니 其不能濟固宜矣注+言不濟事也.
又三年之喪 天下之逹喪이니 漢氏節其臣則可矣 薄其子則亂也注+漢文遺詔短喪以日易月, 然本爲吏民設耳. 景帝嗣君也, 可緣此而短其喪乎.
凡法有變於古而刻於情하면 則莫能順焉이요 至乎敗於禮而安於身이면 必遽而奉之하나니 今陛下以大孝始基하시니 宜反斯謬注+言帝旣能討元凶劭之罪, 當行三年之喪, 以反短喪之謬.니이다
又舉天下以奉一君 何患不給이리오 一體炫金 不及百兩이요 一歲美衣 不過數襲이나 而必收寳連櫝하고 集服累笥注+炫, 胡練切. 炫金, 銷金也.하니 目豈常視 身未時親하니
是櫝帶寳 笥著衣也 何糜蠧之劇이며 惑鄙之甚邪 且細作始幷 以爲儉節이나 而市造華恠하여 即傳於民하니 如此則遷也 非罷也注+幷, 必政切.
凡厥庶民 制度日侈하여 見車馬不辨貴賤하며 視冠服不知尊卑하고 尙方今造一物 小民明已䁹睨하고 宮中朝制一衣 庶家晚已裁學하니 侈麗之源 實先宮閫注+明, 謂來旦也. 䁹, 與睥同. 䁹睨, 傍視也. 謂明日已見之, 而便欲倣傚也.이니이다
又設官者 宜官稱事立이며 人稱官置注+稱, 尺證切. 王侯識未堪務 不應強仕注+強, 其兩切. 此強仕, 謂強之使仕也.
且帝子未官이나 人誰謂賤이리오 但宜詳置賓友하며 茂擇正人이니 亦何必列長史參軍別駕從事然後 爲貴哉리오
又俗好以毀沈人하고 不知察其所以致毀하며 以譽進人하고 不知測其所以致譽注+沈, 言殺人之實也.하니
毀徒皆鄙 則遭毀者宜擢이요 譽黨悉庸이면 則得譽者宜退 如此 則毀譽不妄하고 善惡分矣리이다
凡無世不有言事 無時不有下令이나 然升平不至하고 昏危相繼 何哉 設令之本 非實故也니이다하다
書奏忤旨하여 自解去職하다
侍中謝莊 上言호되 詔云 貴戚競利 悉皆禁絶이라하니 此實允愜民聽이라
若有犯違 則應依制裁糾어니와 若廢法申恩하면 便爲明詔既下하고 而聲實乖爽也니이다
臣愚謂大臣在祿位者 尤不宜與民爭利 不審可得在此詔不注+不, 讀曰否.
弘微之子也 時多變易太祖之制하여 郡縣以三周爲滿하니 宋之善政 於是乎衰注+元嘉之制, 守宰以六期爲斷. 然自時厥後, 率以三周爲備, 而又有數更數易, 不及三周者.하다
鑠素負才能하여 常輕宋主하니 宋主潛使人毒之하다
宋廣州反이어늘 討平之하다
南海太守蕭簡 據廣州反하니 斌弟也 詔新南海太守鄧琬 始興太守沈法系하여 討之注+法系, 慶之之從弟也.하니
簡誑其衆曰 臺軍 是賊劭所遣이라한대 衆信之하여 爲之固守하다
琬先至하여 止爲一攻道한대 法系至曰 宜四面竝攻이니 若守一道 何時可拔이리오하니 琬不從이어늘 法系曰 更相申五十日호리라한대
日盡又不克하니 乃從之注+申, 容也. 又緩爲之期申.하여 八道俱攻하여 一日即破之하고 斬簡하니 廣州平하다 法系封府庫付琬而還하다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30년이고, 北魏 高宗 文成帝 拓跋濬 興安 2년이다.
[綱] 봄 정월에 宋나라가 始興王 劉濬을 荆州刺史로 삼았다.
[目] 예전에 劉濬이 南徐刺史로 京口를 수비하다가 荆州刺史가 되기를 원하자 宋主가 허락하였다. 유준이 京口로 돌아가 행장을 꾸리다가 巫蠱 사건이 발각되니, 宋主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았다. 그로 인해 유준이 오랫동안 京口에 머물렀는데, 형주자사로 제수하고 나서야 入朝를 허락하였다.
[綱] 宋나라가 武陵王 劉駿을 보내어 여러 군대를 통솔하여 西陽의 蠻族을 토벌하였다.
[綱] 2월에 宋나라 太子 劉劭가 그 임금 劉義隆을 시해하고注+① 〈宋 文帝는〉 향년이 47세였다. 左衞率 袁淑․僕射 徐湛之․尙書 江湛을 죽이고서 스스로 즉위하여 何尙之를 司空으로 삼았다.
[目] 〈여자 무당〉 嚴道育이 망명했을 때에 수색하기를 매우 긴급하게 하였다. 엄도육은 東宮에 숨어 있다가 또 始興王 劉濬을 따라 京口로 가 있었다. 유준이 入朝할 적에 다시 수레에 실려 東宮으로 돌아왔다.
엄도육의 하녀를 체포하였는데, 그녀가 말하기를 “엄도육이 征北將軍 유준을注+① 劉濬이 征北將軍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따라 서울로 돌아갔습니다.”라고 하였다. 宋主는 京口에 명을 내려 하녀를 〈서울로〉 압송하게 하여 도착하면 조사하여 그 사건을 다시 심리하게 하였다.注+② 〈“須至檢覆”은〉 하녀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조사해 그 일을 다시 심리하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太子 劉劭를 폐위시키고 유준을 賜死하고자 하여 먼저 王僧綽과 모의를 하고 그에게 漢․魏의 典故를 찾아 徐湛之와 江湛에게 보내게 하였다.注+③ 典은 일상적인 전적이고, 故는 옛 일이다. ≪資治通鑑≫에서는 “王僧綽을 시켜서 漢․魏 이래로 太子와 諸王들을 폐한 典故를 찾게 하였다.”고 하였다. 送은 典故를 보내는 것이다.
武陵王 劉駿은 평소에 총애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주 外藩에 나갔고, 南平王 劉鑠과 建平王 劉宏은注+④ 〈南平王과 建平王은〉 宋 文帝의 아들이다. 모두 宋主의 총애를 받았다. 유삭의 妃는 강담의 손아래 누이였고, 随王 劉誕의 妃는 서담지의 딸이었다.
[目] 江湛은 劉鑠을 태자로 세우기를 권하고, 徐湛之는 劉誕을 세우기를 권하였는데, 王僧綽이 말하기를 “태자를 세우는 일은 성상의 마음에 달려 있을 뿐이니, 신은 생각건대 마땅히 빨리 결단해야 할 것이고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결단해야 할 때에 결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어지러움을 받게 되니, 원컨대 의리로 은혜를 잘라내어 작은 것을 참지 못하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넓은 마음으로 〈父子 사이의 天性을〉 처음과 같이 하여注+① “坦懐如初”는 넓은 마음으로 그들(劉劭․劉濬)을 대하여 마치 父子 사이의 天性을 처음과 같이 함을 말한다. 의혹되는 논의를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을 비록 기밀로 하더라도 쉽게 널리 드러나므로, 뜻밖에 재난이 발생하여 천 년 동안 비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宋主가 말하기를 “卿은 큰일을 잘 결단한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이 일은 매우 중요하니 절실하게 여러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彭城王 劉義康이 막 죽었으니 〈일을 성급히 결단하면〉 사람들은 장차 내가 다시는 자애하는 道理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승작이 말하기를 “신은 천 년 뒤에 폐하께서 아우를 잘 제재하고 아들을 잘 제재하지 못했다고 말할까 우려됩니다.”라고 하니, 宋主는 잠자코 있었다.
강담이 나와서 왕승작에게 말하기를 “卿이 아까 한 말이 너무 지나치게 솔직한 것이 아닌가.”라고 하니, 왕승작이 말하기를 “저注+② 王僧綽이 江湛보다 어렸으므로 자신을 일컬어 弟라고 하였다. 일설에 “弟는 다만의 뜻이다.” 하였다. 역시 귀하께서 솔직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합니다.”라고 하였다.
유삭이 壽陽에서 入朝하였는데 宋主의 뜻을 그르쳤기 때문에 宋主는 劉宏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그 순차가 아닌 것을 혐의하였다. 이 때문에 논의를 오래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여 서담지와 함께 사람을 물리치고 대화하였는데, 혹 여러 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때에 늘 서담지에게 직접 촛불을 잡고 벽을 따라 돌며 살피게 하였는데 몰래 엿듣는 자가 있는지 우려한 것이었다. 이윽고 宋主는 그 모의를 潘淑妃에게 고했는데 반숙비가 劉濬에게 고하였다. 유준이 급히 劉劭에게 고하였는데 유소는 마침내 반역할 것을 도모하였다.
[目] 예전에 宋主는 宗室이 강성함으로 인해 내란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특별히 東宮의 병력을 늘려 羽林軍과 비슷한 정도로 배치하니, 실제 甲士가 1만 명에 이르렀다.
劉劭는 성격이 교활하고 사나웠는데, 宋主가 몹시 의지하였다. 유소가 반란을 일으킬 즈음에 매일 밤 將兵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때 친히 술을 따라주기도 하였다.
王僧綽이 이를 비밀리에 宋主에게 보고하였는데, 마침 嚴道育의 하녀가 도착하자 劉劭가 거짓 조서를 만들고 미리 부대를 정비해놓고 말하기를 “토벌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밤에 前 中庶子 蕭斌․左衞率 袁淑․中舍人 殷仲素를 불러 동궁으로 들어오게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主上께서 참소를 믿으시니 죄를 받고 폐위될 것이다. 나 자신을 살펴보아도 과실이 없으니, 억울함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내일 아침에 큰일을 행할 것이니, 서로 함께 힘을 다하기를 바란다.”라고 하고,
이어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두루 절을 하니, 사람들은 경악하여 감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한참 뒤에 원숙과 소빈이 모두 말하기를 “예부터 이러한 일은 없었으니 더 잘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유소가 분노하여 얼굴빛이 변하였다.
소빈은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몸을 바쳐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하니, 원숙이 꾸짖기를 “卿은 전하께서 진짜 이런 일을 하시리라 생각하는가. 전하께서는 어렸을 적에 風疾을 앓은 적이 있으니, 지금 풍질이 발작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소가 더욱 분노하고 이어서 원숙을 흘겨보며注+① 眄은 눈 한쪽을 찡그리며 흘겨보는 것이다. 말하기를 “일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원숙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의심받지 않을 지위에 있으시면서 어찌 성공하지 못할 것을 근심하십니까. 다만 성공한 뒤에는 天地에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니, 큰 재앙 역시 바로 닥칠 것입니다. 가령 이런 계획을 세우셨더라도 아직은 그만둘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동궁의 측근들이 원숙을 끌어내면서 말하기를 “이 일이 어떤 일인데 중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원숙이 左衛率省으로 돌아와서注+② “還省”은 左衛率省으로 돌아온 것이다. 침상 주위를 서성거리다가 4更(2시경)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目] 다음 날 궁궐문이 열리기 전에 劉劭가 붉은 옷을 군복 위에 껴입고 蕭斌과 함께 畫輪車를 타고注+① 붉은 옷은 太子가 入朝할 때 입는 옷이다. ≪晉書≫ 〈輿服志〉에 말하기를 “畫輪車는 소가 끄는데 채색을 하여 바퀴통에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畫輪車라고 부른다. 위에는 4개의 좁은 기둥을 세우고 좌우에는 사방을 바라보도록 트이게 하며 綠油幢(푸르게 기름 먹인 휘장)과 朱絲絡(붉은 명주실로 맨 것)을 하고, 그 위는 모양새가 하나하나 輦과 비슷하고, 그 아래는 犢車(소가 끄는 수레)와 비슷하다. 太子의 法駕를 또한 鸞路라고도 한다. 法駕가 아니면 畫輪車를 타는데, 두 개의 車箱 안을 金錦과 黃金으로 치장하고, 5가지 채색을 칠한다.”라고 하였다. 袁淑을 매우 급히 불렀으나, 원숙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유소가 수레를 멈추고 원숙을 재촉하니, 원숙이 천천히 일어나서 수레 뒤로 왔다. 유소가 원숙에게 수레를 타게 하자 또 사양하고 오르지 않으니, 유소는 명을 내려 원숙을 죽였다.
궁궐문이 열리자 유소가 들어갔는데, 이전의 제도에 東宮의 군대는 臺城에 들어올 수가 없었으므로注+② 〈“不得入城”은〉 臺城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유소는 위조된 조서를 궁문을 지키던 자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조칙을 받아 체포하고 토벌할 일이 있다.”라고 하고, 후속 부대에게 명하여 속히 오도록 하였다.
張超之 등 수십 명이 齋閣으로 달려 들어가 칼을 빼들고 곧바로 合殿으로注+③ 晉나라 시대에는 여러 황제들이 대부분 內房에 거처하여 조정 연회에 나가는 것은 東堂과 西堂 두 곳뿐이었다. 孝武帝 말년에 한창 淸暑宮을 짓고, 永初 연간에 宋나라가 천명을 받아 황제가 되고난 뒤에도 고쳐 짓지 않아서 사는 곳은 西殿이라 일컫고 따로 좋은 이름을 짓지 않아서 文帝가 그대로 사용하고 또한 合殿이라는 명칭도 있게 되었다. 올라갔다. 宋主는 그날 밤에 徐湛之와 함께 사람을 물리고 아침까지 대화를 하여 촛불이 여전히 꺼지지 않았고, 호위병이 아직 일어지 않은 상황이었다.
宋主는 장초지가 침입하는 것을 보고 안석을 들어 막다가 5개의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갔는데, 마침내 宋主를 시해하였다. 서담지가 놀라 일어나니 병사가 그를 죽였다.
유소가 나가서 東堂에 앉았는데, 江湛이 떠들썩한 소리를 듣고 탄식하기를 “王僧綽의 말을 쓰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라고 하니, 유소가 군사를 보내어 그를 죽였다.
左細仗主注+④ 宋나라 宿衛의 관원은 細鎧主․細鎧將․細仗主 등이 있다. 卜天與는 갑옷을 입을 겨를도 없이 칼을 잡고 활을 들고는 급히 소리를 질러 측근들에게 출전하도록 하여 유소에게 활을 쏘아 거의 맞출 뻔했는데, 유소의 무리가 복천여를 공격하여 팔이 잘려 죽었다.
隊將 張泓之․朱道欽․陳滿이 복천여와 함께 같이 전투를 하다가 죽었다. 유소는 사람을 보내어 潘淑妃 및 太祖(文帝)와 친하고 신임을 받았던 이 수십 명을 죽였다.
[目] 劉濬은 이때 西州府에 있으면서 臺城(宮城) 안의 시끄러운 소식을 듣고 일의 성공 여부를 몰라서 혼란스러워하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注+① 劉濬은 京口에서 入朝하러 와서 잠시 西州에 머물렀다. 濟不의 不(의문사)는 否로 읽는다.
將軍 王慶이 말하기를 “宮中에 변고가 있으나 아직 主上의 안위를 모릅니다.신하된 자는 마땅히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임금을 환난에서 구제하러 가야지, 성에 의지한 채 자신만을 지키는 것은 신하의 절개가 아닙니다.”라고 하였으나 얼마 뒤에 劉劭가 서둘러 유준을 부르자, 유준이 사람들을 물리고는 상황을 묻고서 곧바로 군복을 입고 말에 올라 그곳으로 갔다.
왕경이 또한 간언하기를 “太子가 반역을 하였으니, 천하가 원망하고 분개를 하고 있습니다. 明公께서 단지 〈石頭城의〉 성문을 굳게 닫고 앉아서 쌓아놓은 곡식을 드시기만 하면 3일이 지나지 않아 흉악한 무리들이 스스로 떠날 것입니다. 公께서는 人情과 公事가 이와 같은데, 지금 어찌 떠나셔야 되겠습니까.”注+② 石頭倉城에는 쌓아놓은 곡식이 있었다. 情事는 人情과 公事를 말한다.라고 하였다.
[目] 劉濬이 들어와 劉劭를 만나니, 유소가 말하기를 “潘淑妃가 결국 난을 일으킨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라고 하자, 유준이 말하기를 “이는 제가 본래 바라던 일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유소가 詔書를 거짓으로 꾸며 大將軍 劉義恭과 尚書令 何尚之를 불러 들여 궁중에注+① 內는 臺城 안을 말한다. 구금하고 아울러 百官을 불렀는데 도착한 사람이 겨우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유소가 재빨리 황제에 즉위하여 조서를 내리기를 “徐湛之와 江湛이 임금을 시해하고 반역을 꾀하여 못된 짓을 하기에 내가 병사를 이끌고 궁전으로 들어왔으나 이미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지금 죄인들을 잡았으니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로 바꾼다.”라고 하고, 곧바로 병을 핑계 삼아 永福省으로注+② 永福省은 太子가 거처하는 곳으로 궁궐 안에 있다. 돌아가서 감히 상례에 참여하지 못하고 예리한 칼로 자신을 지켰다.
[目] 蕭斌을 尙書僕射로 삼고, 何尚之를 司空으로 삼았다. 劉劭는 王僧綽이 文帝와 모의한 것을 알지 못하여 왕승작을 吏部尙書로 삼았다.
武陵王 劉駿이 五洲에 주둔하니 沈慶之가 巴水에서 五洲로 와서 用兵에 관한 책략을 자문 받았다.注+① ≪水經註≫에 “江水는 동쪽으로 가서 江夏軑縣의 故城 남쪽을 지난다. 江夏軑縣은 옛 弦國이다. 城은 산의 남쪽에 있으며 남쪽은 五洲를 마주하고 있다. 강 가운데에 五洲가 있어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름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軑는 음이 汰이며, 또는 徒系의 切이다. ≪水經註≫에 “巴水는 廬江 雩婁縣의 巴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가서 蠻 지역을 지나며 또 남쪽으로 가서 江水로 흘러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軍略”은 用兵의 책략을 말한다. 지난해(452)에 宋主가 沈慶之를 시켜서 蠻을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이해에 劉駿에게 蠻을 토벌하는 여러 군대를 통솔하도록 하였으므로 심경지가 유준에게 나아가서 용병에 관한 책략을 자문 받은 것이다.
[目] 董元嗣가 建康에서 五洲에 도착하여 太子가 임금을 시해하고 반역을 꾀한 사실을 모두 말하였다.
沈慶之가 비밀리에 心腹에게 말하기를 “蕭斌은 婦人과 같으며, 그 나머지 장수도 모두 상대하기 쉬울 뿐이다. 東宮 劉劭와 함께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30명에 불과하고注+① 〈“不過三十人”은〉 張超之 등을 말한다., 그 외에는 협박에 굴복한 자들이라 반드시 쓰이지 못할 것이다. 지금 순응하는 자를 도와주고 반역하는 자를 토벌하면注+② 順은 武陵王을 말하고, 逆은 劉劭를 말한다. 성공하지 못할까 근심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綱] 北魏가 保太后를 높여 皇太后로 삼았다.
[綱] 3월에 宋나라 劉劭가 吏部尚書 王僧綽을 죽였다.
[目] 劉劭가 文帝의 작은 상자와 江湛의 집에서 나온 편지․奏疏를 조사하다가注+① 料(헤아리다)는 음이 聊이다. “巾箱”은 중요한 비밀문서를 보관하는 곳으로, 찾아보기에 편리하도록 한 것이다., 유소가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푼 일과 前代의 〈태자와 제왕을 폐위한〉 故事에 관해 아뢴 王僧綽의 문서를 얻고는 왕승작을 체포하여 죽였다.
왕승작의 아우 王僧虔은 司徒府의 屬吏였는데注+② 舊制에 司徒府에 東曹․西曹가 있었는데, 曹에는 掾과 屬이 있었다., 친한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라고 권하자 왕승건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형은 나라를 충정으로 받들고 자애로움으로 나를 보살펴주었다. 오늘 일이 나에게 미치게 되지 않을까 괴로울 뿐이다. 만약 함께 九泉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신선이 되어 날아가는 것과注+③ 羽化는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올라간다는 말과 같으니, 神仙家들이 말하는 날아오른다는 것이다.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소가 이어서 북쪽 저택의 여러 王侯들을注+④ 宋나라 여러 王侯의 邸宅이 臺城 북쪽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北第라고 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穆帝(劉翹)와 武帝(劉裕)의 자손들이다. 모함하여 말하기를 “왕승작과 함께 모반하였다.”라고 하고, 그들을 죽였다.
[綱] 여름 4월에 宋나라 江州刺史 武陵王 劉駿이 거병하여 劉劭를 토벌하니, 宋나라 사람들이 유준을 즉위시켰다.
5월에 劉劭와 아우 劉濬이 모두 주살되었다.
[目] 劉劭가 비밀리에 沈慶之에게 편지를 보내 武陵王 劉駿을 살해하도록 명령하였다. 심경지가 무릉왕 유준을 알현하기를 요구하니 유준이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심경지가 달려 들어가서 유소의 편지를 유준에게 보여주자, 유준이 울면서 안으로 들어가 어머니와注+① 〈劉駿의〉 母는 路淑媛이다. 작별할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심경지가 말하기를 “저는 先帝(劉義隆)에게 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의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 노력을 보여드릴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저에 대해서 깊은 의심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하자, 유준이 일어나 재배하며 말하기를 “국가의 안위가 모두 장군에게 달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심경지가 곧바로 명하여 안팎에 병사들을 정비하도록 하자, 主簿 顔竣이注+② 竣(마치다)은 七倫의 切이다. 말하기를 “지금 사방에서는 아직 정의로운 군사의 擧事를 모르고 있으며, 유소가 天府를 점거하고 있습니다.
만약 머리와 꼬리가 서로 호응하지 못하면 이는 위험한 방법입니다.注+③ 天府는 建康을 말한다. 首는 武陵王 劉駿이 이미 九江에서 正義를 창도했음을 말한 것이다. 尾는 여러 방면의 征鎭을 말한다. 마땅히 여러 征鎭이 협력하여 모의하기를 기다린 뒤에 擧事를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目] 沈慶之가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지금 大事를 거행하고자 하는데 어린 애송이가注+① 갓 태어난 남아와 여아를 黃頭小兒라고 하니, 顔駿이 마치 영아처럼 아무 식견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모두 참여하니, 어찌 패배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목을 베어 조리를 돌려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劉駿이 顔竣에게 공손히 사과하도록 하니, 심경지가 말하기를 “그대는 단지 기록하는 일만을 담당하면 된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심경지에게 전적으로 처리를 맡겨서 열흘 동안에 안팎이 정비되니 사람들이 神兵이라 하였다. 顔竣은 顔延之의注+② 顔延之는 當時에 建康에 있었다. 아들이다.
[目] 劉駿이 경계를 엄하게 하여 군사들에게 맹세하고 沈慶之에게 府의 司馬를 겸직시키고, 柳元景․宗慤․朱脩之 등을 모두 參佐로 삼고 顔竣에게 錄事를 겸임하게 하여 내외를 총괄하도록 하였으며, 劉延孫을注+① 劉延孫은 劉道產의 아들이다. 長史로 삼아 의 업무를 대행하게 하였다.
荆州刺史 南譙王 劉義宣과 雍州刺史 臧質은 모두 劉劭의 명을 받지 않았고 司州刺史 魯爽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유준에게 호응하였다. 장질과 노상은 함께 江陵으로 가서 유의선을 만나고注+② 司州․雍州는 모두 劉義宣에게 감독을 받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함께 그에게 나아간 것이다. 또 사신을 보내 유준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권하였다.
[目] 劉駿이 尋陽에 도착하여 顔竣에게 명하여 사방에 檄文을 돌리도록 하니 州郡이 호응하였다. 劉義宣이 臧質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尋陽으로 나가도록 하니, 兗州․冀州刺史 蕭思話와 將軍 垣護之가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심양에 도착하였다.
유의선이 張永을 임명하여 冀州刺史로 삼자, 장영이 司馬 崔勲之 등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유의선과 합류하도록 하였다.
[目] 會稽太守 随王 劉誕이 장차 劉劭의 명령을 받으려 하자, 參軍事 沈正이 司馬 顧琛에게注+① 沈正은 沈田子의 조카이다. 顧琛은 顧和의 曾孫이다. 유세하기를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국가의 이런 재앙은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江東에서注+② 이 江東은 浙江의 동쪽을 말한다. 굳세고 날랜 군대를 거느리고 천하에 大義를 주창하니 그 누가 호응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전하로 하여금 흉악한 역적의 신하 노릇을 하도록 하여 그의 거짓된 총애를 받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고침이 말하기를 “江東 지역은 전쟁을 잊은 날이 오래되었습니다. 비록 반역과 순응이 같지 않지만, 强弱 또한 서로 다릅니다. 마땅히 사방에서 정의롭게 거병하는 자를 기다린 뒤에 호응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目] 沈正이 말하기를 “아직까지 천하에 부모가 없고 임금이 없었던 나라는 없었습니다. 어찌 원수에게 치욕을 당하고도 스스로 편안해하며 나머지 사람들에게 정의로운 거사를 책임지울 수 있겠습니까. 지금 부친을 시해하고 반역을 꾀한 원통한 무리들과는注+① 醜는 무리이다. 의리상 같은 하늘 아래에 살 수 없습니다. 거병하는 때에 어찌 반드시 자신이 온전하기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馮衍이 말하기를 ‘위대한 漢나라의 귀한 신하들이 장차 楚나라와 齊나라의 천한 인사만 못할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注+② 馮衍은 後漢 사람이다. 이는 馮衍이 田邑을 꾸짖을 때 한 말이다. “荊齊之賤士”는 하물며 전하께서는 의리상 신하와 자식을 겸하고 있으신데, 이 일은 실로 나라의 일이자 집안의 일이니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顧琛이 곧바로 심정과 함께 들어가서 劉誕에게 유세하니, 유탄이 그대로 따랐다. 劉劭는 평소 자신이 軍事에 익숙하다고 생각하여 조정의 인사들에게 말하기를 “卿들은 단지 나를 도와 文書를 처리하기만 하시오. 만약 역적의 환난이 있으면 내가 스스로 그들을 감당할 것이오.”라고 하였는데, 사방에서 병력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비로소 두려워하고 근심하며 경계를 엄하게 하였다.
4월에 柳元景이 薛安都 등 12군대를 거느리고 湓口에서 출발하였고, 參軍 徐遺寶가 荊州의 무리를 이끌고 그들을 따랐다. 劉駿이 尋陽에서 출발할 적에 沈慶之가 中軍을 총괄하여 따랐다.
[目] 〈武陵王 劉駿의〉 檄書가 建康에 도착하자, 劉劭가 太常 顔延之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저것은 누가 쓴 것인가?”라고 하니, 안연지가 말하기를 “〈제 아들〉 顔竣의 필적입니다.”라고 하였다. 유소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하니, 안연지가 말하기를 “안준은 이 늙은 신하도 돌아보지 않는데, 어찌 폐하를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유소는 화가 조금 풀렸다.
유소는 조정에 있는 옛 신하들이 자신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고 의심하여 마침내 魯秀와 王羅漢을 후하게 대해주어 모든 군사의 일을 그들에게 맡겼고, 蕭斌을 謀主로 삼았으며, 殷沖에게注+① 殷沖은 殷融의 증손으로 劉劭의 장인이다. 文書와 符節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소빈이 유소에게 水軍을 정비하여 上流에서 결전을 치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梁山을注+② 胡三省이 말하기를 “지금 太平州 當塗縣 서남쪽 30리에 天門山이 있는데 또한 蛾眉山이라고 한다. 두 산이 큰 강을 끼고 대치하였는데 동쪽은 博望山이고 서쪽은 梁山이다.”라고 하였다. 지키며 점거하라고 권하였다.
[目] 江夏王 劉義恭은 이 급하게 편성되고 배들이 낡고 작아 水戰에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곧바로 계책을 올리기를
“逆賊 劉駿은 나이가 어려 아직 軍事를 익히지 못하였고 먼 곳으로부터 와서 피로하니, 우리는 편안히 그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멀리 梁山으로 나가면 京都(建康)가 텅 비어 약해지니, 東軍이注+① 東軍은 會稽隨王 劉誕의 병력을 말한다. 빈틈을 타서 공격하면 환란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병력을 둘로 나누어 진군하면 병력이 분산되고 勢力이 흩어질 것이니, 예리함을 기르면서 시기를 기다려 앉아서 틈을 찾는 것만 못합니다. 을 끊어버리고 木柵으로 石頭城을 격리해서 방어하는 것은 이전 조정의 舊法이니注+② “先朝舊法”은 晉나라 明帝가 王含에게 항거한 것과 武帝가 盧循에게 항거할 때 사용한 兵法을 말한다., 적을 격파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하니, 劉劭가 좋다고 하였다.
蕭斌이 화난 얼굴로 말하기를 “南中郎(유준)은注+③ 당시 武陵王 劉駿은 南中郞將 江州刺史였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劉駿의 당시 나이는 24살이었다. 20여 살로 어리지만 이와 같은 큰일을 할 수 있으니, 어찌 다시 그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3州가注+④ “三方”은 荊州․雍州․江州를 말한다. 동시에 반란을 일으켜 상류의 地勢를 점거하였고, 沈慶之는 군사업무에 대단히 노련하며 柳元景과 宗慤은 여러 번 공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 형세가 이와 같으니 실로 작은 적이 아닙니다.
마땅히 人心이 이탈되지 않은 때라야 결사적으로 一戰을 치를 수 있으니 臺城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떻게 오래 갈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主上과 宰相은注+⑤ 相(재상)은 息亮의 切이다. 모두 싸울 뜻이 없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유소가 따르지 않았다.
[目] 어떤 이가 劉劭에게 石頭城을 지키라고 권하니, 유소가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이 石頭城을 굳게 지킨 까닭은 제후들이 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이곳을 지킨다면 누구에게 구원을 받겠는가. 오직 힘써 싸워 결판을 내야 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라고 했다.
太尉司馬 龐秀之가 石頭에서 무리들을 인도하여注+① 先(인도하다)은 息薦의 切이다. 남쪽으로 도망치자 人心이 이때부터 크게 흔들렸다.
劉駿이 鵲頭에注+② 鵲頭는 宣城郡 경내에 있다. 그 지역은 鵲洲의 앞머리에 있다.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을 적에 宣城太守 王僧逹이 武陵王의 檄文을 받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빈객이 그를 설득하기를
“지금처럼 弑逆의 죄상이 극심했던 적은 고금에 없었습니다. 그대를 위한 계책을 세운다면 정의로운 군대의 격문을 받들어 주변의 郡으로 보내 알리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良心이 있다면 누가 호응하지 않겠습니까.注+③ 〈“茍在有心 誰不響應”은〉 人心이 있는 사람은 모두 메아리가 소리에 호응하는 것과 같이 할 것임을 말한다. 이것이 上策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몸소 정의를 따르는 무리들을 인솔하여 수로와 육로의 편리한 곳을 자세히 살펴 몸소 남쪽(유준)을 향해 가는 것이 또한 그 다음 계책입니다.”라고 하였다.
[目] 王僧達이 곧바로 候道를注+① “候道”는 변경을 정찰하여 警戒나 위급함을 알리는 길이다. 통해 남쪽으로 달아나자, 劉駿이 즉시 그를 長史로 삼았다. 왕승달은 王弘의 아들이다.
유준이 처음 尋陽을 출발할 적에 沈慶之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왕승달이 반드시 와서 정의로운 거사에 참여할 것이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심경지가 대답하기를 “나는 그가 先帝(文帝) 앞에서 논의를 개진하고 주장하여 자기 의견이 분명하고 결단력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일로 말해보자면 그는 필시 도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柳元景은 전함이 견고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水戰을 꺼려 곧바로 갑절의 속도로 전진하여 江寧에注+② 江寧縣은 長江 가에 닿아 있으니, 東晉 咸和(成帝) 이후로 장강 바깥쪽에 변란이 없었기 때문에 남쪽 물가에 江寧縣을 두었다. 도착해서는 도보로 올라가서 薛安都를 시켜 鐵騎를 거느리고서 秦淮河 가에서注+③ 〈“淮上”은〉 秦淮河의 상류이다. 무력을 과시하게 하고, 조정의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반역과 귀순의 이해관계를 진술하니, 항복하는 자가 서로 이어졌다.
[目] 劉駿이 尋陽에서 출발할 때부터 병이 있어 장군과 參佐들을 볼 수 없었고, 오직 顔竣만이 침실 안을注+① 집에서나 배에서나 무릇 누워 잠자는 곳을 모두 臥內라고 한다. 출입하며 무릎에 유준을 껴안고 친히 일상을 보살폈다.
여러 차례 병이 위독해져서 을 받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자 안준이 모두 전담하여 결정하였다. 軍政 이외에 중간에注+② 間은 中間이다. 一說에 “間(간간이)은 古莧의 切이다.” 하였다. 敎書를 짓고 檄文을 쓰고 遠近의 각계 인사들을 접견하며 저녁과 새벽에 文帝의 靈前에 통곡하는 일을 마치 유준과 동일하게 하였다. 이처럼 수십 일을 하였지만 배 안에 있는 甲士들은 또한 유준의 병세가 위독한 줄을 몰랐다.
柳元景이 비밀리에 新亭에 도착하여 山勢에 의지하여 보루를 만들었다. 새로 투항한 자들이 모두 유원경에게 속히 진격하라고 권하자, 유원경이 말하기를 “〈전쟁 중에〉 事理가 순조로운 것은 믿기 어렵고 함께 악을 행하는 자들은 서로 돕는지라, 경솔히 진격하고 방어하지 않는다면 실로 적의 野心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劉劭가 蕭斌 등에게 水陸 精兵 만여 명을 나누어 거느리고 新亭의 보루를 공격하게 하고 유소 자신은 에 올라가서 전투를 독려하였다.
유원경이 미리 군대에 명하기를注+③ “宿令”은 미리 전투하기 전날에 명령하는 것이다. “북을 자주 치면 기운이 쉽게 쇠약해지고 고함을 자주 지르면 쉽게 힘이 고갈되니 재갈을 물리고 신속히 싸우면서 한결같이 나의 북소리만을 들어라.”라고 하였다.
[目] 劉劭의 장병들은 유소가 큰 상을 내릴 것으로 생각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웠다. 柳元景이 水陸 양면으로 적의 공격을 받았지만 의지와 기개가 더욱 강해져서, 휘하의 용감한 병사들을 모두 보내 출전시켰다.
유소의 군대가 거의 보루를 함락할 즈음에 魯秀가 후퇴하라는 북을 치자 유소의 병사들이 즉시 전진을 멈추었다. 유원경이 곧바로 보루의 문을 열고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그 기회를 틈타 공격하니 유소의 무리들이 크게 무너졌다.
유소가 다시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친히 와서 보루를 공격하자, 유원경이 다시 대파하여 사상자가 이전보다 많았다. 유소는 겨우 죽음을 면했고 노수는 남쪽으로 도망쳤다.
유준이 江寧에 도착하니 江夏王 劉義恭이 홀로 말을 타고 南軍으로 도망쳐와서 表文을 올려 帝位에 즉위할 것을 권하니, 유준이 마침내 新亭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目] 예전에 劉劭가 太祖(文帝)를 장사 지내고 諡號를 景이라 하고 廟號를 中宗이라고 하였는데, 〈劉駿이 즉위한〉 지금에 이르러 시호를 고쳐 文이라 하고 묘호를 太祖라 하였다. 모친 路氏를 皇太后로 높이고, 妃 王氏를 皇后로 삼았으며注+① 황후의 부친 王偃은 王導의 玄孫이다., 劉義恭 등 이하 사람들에게 차등을 두어 관작을 제수하였다.
5월에 臧質이 雍州의 병사를 거느리고서 新亭에 도착하고 豫州刺史 劉遵考가 장수를 보내 步兵과 騎兵 5천 군사를 통솔하여 瓜步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전에 宋主(유준)가 將軍 顧彬之를 파견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들어가 隨王 劉誕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유탄이 參軍 劉季之를 파견하여 병사를 이끌고 고빈지와 함께 建康으로 향하도록 하고, 유탄 자신은 西陵에注+② 胡三省이 말하기를 “西陵은 지금의 紹興府 蕭山縣 西興鎭이 이곳이다. 그 지역은 서쪽으로는 浙江에 다다르는데, 吳나라 越王 錢鏐가 陵은 좋은 말이 아니라고 하여 고쳐서 西興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주둔하면서 그들의 후속부대가 되었다. 유소는 병사를 보내 항거하다가 크게 패하였다.
[目] 劉劭는 秦淮河를 따라서 木柵을 치고 스스로 지켰는데, 男子 장정들이 이미 모두 징집되자 부녀자들을 불러 부역을 하도록 하였다. 魯秀 등이 용감한 병사들을 모아서 을 공격하여 승리하니, 王羅漢이 즉시 무기를 버리고 南軍에 투항하였다.注+① “大航”은 곧 朱雀航이다. “放仗降”은 병장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것을 말한다.
京城 안은 물이 끓는 듯이 혼란해져 文武 將吏들이 앞다투어 성을 넘어 투항하였다. 蕭斌이 부하에게 명령하여 갑옷을 벗게 하고 石頭城에서 白旗를 들고 앞으로 나와서 항복하니, 劉駿이 詔書를 내려 소빈을 軍門에서 참수하였다.
모든 군대가 마침내 臺城을 점령하니 張超之가 달아나다가 合殿에 있는 황제의 침소에 이르러 군사들에게 살해되어 내장이 도려내지고 심장이 잘렸다. 諸將들이 그 살을 저며서 날 것으로 먹었다.
유소가 武庫에 있는 우물 속으로 들어가자 高禽이 그를 사로잡았다. 臧質이 유소를 보고 통곡하자, 유소가 말하기를 “하늘이 감싸주지 않고 땅이 실어주지 않은 것이오. 丈人은注+② 臧質은 武敬皇后의 조카이므로, 劉劭가 丈人(집안 어른)이라 부른 것이다. 어찌 눈물을 보이는가.”라고 했다. 장질이 유소를 말위에 묶어 軍門으로 호송하였다.
[目] 이때에 傳國璽가 보이지 않았다. 劉劭에게 물어보니 말하기를 “嚴道育이 있는 곳에 있다.”라고 하여 곧바로 가서 전국새를 확보하고, 유소와 네 아들들을 注+① 牙는 깃발을 거는 장대이다. 아래에서 참수하였다.
劉濬이 측근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江夏王 劉義恭을 만나 말하기를 “南中郎(劉駿)은 지금 어떻게 되었소?”라고 하니, 유의공이 말하기를 “황상께서는 이미 萬國에 군림하셨소.”라고 했다.
유준이 또한 말하기를 “나 虎頭가注+② 虎頭는 劉濬이 自稱한 어릴 때 字이다. 늦게 온 것은 아니오?”라고 하니, 유의공이 말하기를 “늦게 온 것을 특별히 한스러워해야 하오.”라고 했다.
유의공이 유준을 협박하여 함께 돌아가다가 길에서 유준을 참수하고 아울러 그의 세 아들을 죽였다. 유소와 유준 부자의 머리를 나란히 大航에 효시하고 시장에 시신을 늘어놓았으며, 유소가 살던 집을 파서 더러운 웅덩이로 만들었다.注+③ 汚(더럽다)는 음이 烏이니, 물이 흐르지 않아 흐린 것을 汚라고 한다. 瀦(웅덩이)는 음이 諸이니, 물이 고여 있는 곳을 瀦라고 한다. 齋는 편안히 거처하는 집이다. ≪禮記≫ 〈檀弓〉에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이 부모를 시해한 경우는 그 사람을 죽이며 그 집을 헐어버리고 그 집터를 파서 웅덩이로 만든다.”라고 했다.
嚴道育과 王鸚鵡는 나란히 모두 길에서 채찍으로 맞아 죽고 시신이 불태워져 장강에 재로 날려 버려졌으며, 殷沖․尹弘․王羅漢과 沈璞은 모두 주살되었다.注+④ 沈璞은 누차 劉濬의 參佐(막료)가 되어 于湖를 지키면서 정의로운 군사를 맞이하지 않았으므로 주살당했다.
[目] 袁淑을 추증하여 太尉로 삼고 諡號를 忠憲公이라 하였으며, 徐湛之를 司空으로 삼고 시호를 忠烈公이라 하였으며, 江湛을 開府儀同三司로 삼고 시호를 忠簡公이라 하였으며, 王僧綽을 金紫光禄大夫로 삼고 시호를 簡侯라고 하였으며,
卜天與를 益州刺史로 삼고 시호를 壯侯라고 하고서 원숙 등 네 집안과 함께 오랫동안 祿米를 주었다.
[綱] 宋나라가 다시 何尚之를 尚書令으로 삼았다.
[目] 예전에 劉劭가 尚書令 何尚之를 司空으로 삼고 아들 何偃을 侍中으로 삼았다. 유소가 패배하게 되었을 때 하상지의 측근들이 모두 흩어졌는데, 몸소 黃閤을 청소하였다.注+① “自洗”는 몸소 청소하는 것이다. 옛 제도에 의하면 三公의 聽事는 黃閤을 설치했다. 鄭玄이 이르기를 “三公은 天子와 예절이 버금가므로 閤門을 黃色으로 하였다. 閤은 작은 문이다.”라고 하였다.
宋主(劉駿)는 하상지와 하언이 평소 명성이 있고 또 유소의 조정에 있을 때에 지혜를 내어 義軍을 영접했으며 수시로 〈도성에 있던 義軍의 가족들을〉 보존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하여 특별히 사면하고注+② 당시 세 지역(荊州․雍州․江州)에서 義軍이 일어나자 義軍의 장수와 參佐의 가족 중에 도성에 있는 자를 劉劭가 모두 죽이려고 했으나 何尚之가 다방면으로 유소를 설득하여 모두 온전히 화를 면했다., 다시 하상지를 尙書令으로 삼고 하언을 大司馬 長史로 삼아서, 직임과 대우를 예전처럼 하였다.
[綱] 宋나라가 柳元景을 護軍將軍으로 삼았다.
[目] 예전에 臧質이 柳元景을 시켜서 병사를 거느리고 宋主와 만나도록 하였다. 장질이 병사를 일으켜서 南譙王 劉義宣을 主君으로 받들고자 하여 몰래 유원경을 시켜서 병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는데,
유원경이 즉시 장질의 書信을 宋主에게 올리고 장질의 서신을 전하는 使臣에게注+① 信은 사신이다. 말하기를 “臧冠軍(장질)은注+② 臧質은 冠軍將軍으로 襄陽을 수비하고 있었다. 응당 아직 전하의 정의로운 擧事를 알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지금은 반역자를 토벌해야 하니, 서쪽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장질이 이 일로 그에게 한을 품었다.
宋主가 즉위하고 난 뒤에는 장질을 江州刺史로, 유원경을 雍州刺史로 삼으니 장질은 유원경이 荊州와 江州의 후환이 될 것을 염려하여 宋主에게 건의하기를 “마땅히 유원경을 로 삼아 먼 곳으로 내보내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宋主는 그 말을 어기기가 어려워 유원경을 護軍將軍으로 삼아 石頭城을 수비하는 일을 겸직하게 하였다.
[綱] 宋나라가 南郡王 劉義宣을 荆州湘州刺史로 삼았다.
[綱] 가을 7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目] 宋主가 詔書를 내려 바른말을 구하고, 細作署와注+① 宋나라에 細作署令이 있었는데 大明 4년(460)에 左右御府令으로 고쳤다. 에서 문양을 새기고 도색하는 물품을 줄이고 貴戚들이 이익을 다투는 것을 모두 금지시켰다.
中軍 錄事參軍 周朗이 상소하기를 “독이 신체에 퍼져 있을 적에는 반드시 그 만연한 곳을 잘라내야 합니다. 歴下와 泗水 사이는注+② 歷下는 歷城을 말한다. 泗間은 彭城과 湖陸을 말한다. 방비가 충분하지 못합니다.
國事를 논의하는 이들은 필시 오랑캐(北魏)의 세력이 쇠퇴하여 우리들은 그들을 회피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注+③ 당시에 國事를 논의하는 이들은 대체로 北魏가 연이어 내란이 있어서 마침내 쇠퇴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의 병통이 오랑캐보다 심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注+④ 병장기 및 군량미의 운송비용은 내부를 비워서 외부에 공급하는 것이니, 우리나라(宋)의 병통이 오랑캐(北魏)의 국운이 쇠퇴하는 것보다 심하다는 것이다. 餫(보내다)은 王問의 切이니, 야전에 음식을 보내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헛되이 외로운 성을 수비하여 재물과 인력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만약 오랑캐가 단지 경무장한 騎兵 3천 명을 출동시켜 번갈아 드나들게 하여 봄에 보리를 침탈해가고 가을에 벼를 침탈해가면 우리 水路와 陸路의 수송은 공연히 다시 단절되어 버립니다.
이는 적에게 있어 수고롭지 않지만 우리의 변경은 매우 곤궁하게 됩니다. 2년이 지나기 전에 병사가 흩어지고 백성들이 사라지게 되는 것을 발뒤꿈치를 들고 기다리는 격이 될 것입니다.注+⑤ 居然은 공연하게라는 뜻이다. 〈“水陸漕輸 居然復絶”은〉 오랑캐 騎兵이 도착하면 江南의 사람은 彭城과 泗水에 감히 가지 못하여 水路와 陸路의 運送이 단절된다는 뜻이다. 蹻(발돋음하다)는 丘妖의 切이니, 발뒤꿈치를 드는 것을 蹻라고 한다.
[目] 지금 사람들은 양으로 이리를 쫒게 할 수 없고 게로 쥐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거운 수레와 약한 사졸로 살찐 전투마와 사나운 오랑캐를 대적하도록 하니 그것이 성공할 수 없는 것은 진실로 당연합니다.注+① 〈“其不能濟固宜矣”는〉 일이 성공할 수 없음을 말한다.
또 三年喪은 천하의 통용되는 상례입니다. 漢氏(漢나라) 때 신하에게 상례 기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명령한 것은 괜찮은 처사였지만, 注+② 漢 文帝가 遺詔를 내려 본래는 관리와 백성들을 위하여 베풀어준 것일 뿐이다. 景帝는 〈文帝를〉 계승한 임금으로서 이를 따라서 그 상례 기간을 단축해서야 되겠는가.
무릇 법규가 옛것에서 변하여 인정에 각박한 점이 있다면 사람들이 그 법규를 따르지 않고, 禮儀를 무너뜨려서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하는 데 이르면 사람들이 반드시 대번에 그 법규를 받들어 행합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큰 孝誠으로 제왕의 기업을 여시니 마땅히 이러한 잘못을 되돌리셔야 합니다.注+③ 〈“宜反斯謬”는〉 황제(劉駿)가 이미 원흉인 劉劭의 죄를 토벌하였으니 응당 三年喪을 시행하여 이 상례 기간을 단축한 잘못을 되돌려야 함을 말한 것이다.
[目] 또 온 천하 사람들이 한 사람의 군주를 모시니, 어찌 공급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한 몸을 금으로 장식하는 데注+① 炫(빛나게 하다)은 胡練의 切이다. “炫金”은 금박으로 장식하는 것이다. 백 냥이 들지 않으며 1년 동안 입는 좋은 옷이 몇 벌에 불과하지만, 굳이 보화를 거두어들여 궤짝이 줄지어 있고, 의복을 모아둔 상자가 겹겹이 쌓여져 있으니, 〈보화는〉 눈으로 항상 보기가 어렵고, 〈옷은〉 늘 몸에 걸치지는 않습니다.
이는 궤짝이 보화를 지니고 있는 것이며 상자가 옷을 걸치고 있는 것이니, 썩어 문드러지고 좀이 스는 것이 얼마나 많으며, 마음을 현혹시키는 것이 얼마나 심합니까. 게다가 정교한 물품을 비로소 줄인 것은注+② 幷(통합하다)은 必政의 切이다. 검소하고 절약하는 것이라 여길 수 있으나, 시장에서는 화려하고 괴이한 것을 만들어 곧바로 백성에게 전하고 있으니 이와 같이 하면 옮겨진 것이지 없앤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은 그 일상의 제도가 날이 갈수록 사치스럽게 되어 수레와 말을 보고서는 누가 귀한지 천한지를 구분할 수 없고, 冠과 의복을 보아도 누가 높은지 낮은지를 알지 못합니다. 尙方署에서 지금 물건 하나를 만들면 백성들은 다음 날 이미 〈이를 따라 하고자〉 곁눈질하여 보고 있고注+③ 明은 다음 날 아침을 말한다. 䁹은 睥(흘겨보다)와 같다. “䁹睨”는 곁눈질한다는 뜻이니, 〈“明已䁹睨”는〉 다음 날 아침에 이미 보고서 곧바로 따라하려는 것을 말한다., 궁전 안에서 아침에 옷 한 벌을 지으면 民家에서는 저녁에 이미 모방하여 마름질하고 있으니, 사치하고 화려하게 된 근본 원인은 실제 궁궐에서 먼저 비롯된 것입니다.
[目] 또 관직을 설치하는 것은 관직이 마땅하면 일이 제대로 되고 사람이 걸맞으면注+① 稱(걸맞다)은 尺證의 切이다. 관직에 두어야 하니, 王侯가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면 억지로 벼슬을 시켜서는注+② 強(억지로)은 其兩의 切이다. 여기의 “強仕”는 억지로 벼슬시키는 것을 말한다. 안 됩니다.
게다가 황제의 아들이 관직이 없다고 하여 사람들 중에 누가 천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다만 賓友의 직책을 잘 선발하고 바른 사람을 힘써 선발하는 것이 마땅하니, 또한 어찌 반드시 長史, 參軍, 別駕, 從事 등의 관속을 설치한 뒤에야 귀해지겠습니까.
세속 사람들이 남을 비방하여 해치기를注+③ 沈은 남을 죽이는 실제를 말한다. 좋아하면서 그 비방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남을 칭찬하여 천거하기를 좋아하면서 그 칭찬하는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비방을 하는 무리들이 모두 비루하다면 비방을 받는 사람을 마땅히 뽑아야 하고, 칭찬을 하는 무리들이 모두 용렬하다면 칭찬을 받는 사람을 마땅히 물리쳐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헐뜯거나 칭찬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고 선악이 구분될 것입니다.
어느 세상에나 일에 관하여 말을 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고 어느 시기에도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태평한 시대가 이르지 않고 어지럽고 위태로운 시기가 계속 이어지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명령을 내리는 근본이 진실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주문이 올라갔는데 군주의 뜻에 거슬려 스스로 사퇴하여 관직을 떠났다.
[目] 侍中 謝莊이 상주하기를 “詔書에서 貴戚들이 이익을 다투는 것을 모두 금지한다고 하셨으니, 이는 실로 백성들의 귀를 흡족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귀척 중에〉 만약 법을 위배한 자가 있으면 마땅히 제도에 따라 규제해야 하지만, 만일 법을 폐기하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면 곧바로 밝은 詔令이 땅에 떨어지고 명실이 어긋나게 될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녹봉을 받는 지위에 있는 大臣은 더욱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조서에서 그렇게 하셨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注+① 不(의문사)는 否(부)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사장은 謝弘微의 아들이다. 당시에 대부분 太祖(劉義隆)의 제도를 바꾸어 군현을 〈다스리는 관원의 임기를〉 3년을 만기로 하였으니注+② 元嘉 연간의 제도에 守宰는 6년이 기한이었다. 그러나 이 이후로는 대부분 3년을 만기로 하였다. 그런데 또 자주 경질되고 바뀌어 3년을 채우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宋나라의 훌륭한 정치가 여기에서 쇠퇴하였다.
[綱] 宋主(劉駿)가 자신의 아우 南平王 劉鑠을 죽였다.
[目] 劉鑠이 평소에 재능이 있다고 자부하여 항상 宋主를 가볍게 생각하였는데, 宋主가 몰래 사람을 시켜 독살하였다.
[綱] 宋나라 廣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目] 南海太守 蕭簡이 廣州를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소간은 蕭斌의 동생이다. 새로운 南海太守 鄧琬과 始興太守 沈法系에게注+① 沈法系는 沈慶之의 從弟이다. 조서를 내려 그를 토벌하도록 하니,
소간이 그 무리들을 속여서 말하기를 “조정의 군대는 역적 劉劭가 파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무리들이 그 말을 믿고 그를 위하여 굳게 지켰다.
등완이 먼저 도착하여 오로지 한쪽 길로만 공격하였는데, 심법계가 도착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사면에서 함께 공격해야 하니, 만약 한쪽 길을 고수하면 언제 함락시킬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니, 등완이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심법계가 말하기를 “다시 50일을 지켜보겠다.”注+② 申은 용납한다는 뜻이다. 또 기일을 늦추는 것을 申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날짜가 다 지나도 이기지 못하자, 마침내 그의 말을 따라 여덟 경로로 같이 공격하여 하루 만에 격파하고 소간을 참수하니, 廣州가 평정되었다. 심법계는 府庫를 봉하여 등완에게 넘겨주고 돌아왔다.


역주
역주1 宋太子劭……為司空 : “≪資治通鑑綱目≫에서 임금이 시해되었을 때에 ‘及其君母(〈그 임금〉과 그 임금의 어머니)’와 ‘及其太后(〈그 임금〉과 그 태후)’라고 쓴 경우는 있다. 그러나 아직 ‘及其大臣(〈그 임금〉과 그 대신)’이라고 기록한 것이 있지 않았는데, 大臣에게 ‘及’이라고 기록하는 경우는 반드시 袁淑이나 徐湛之․江湛과 같은 경우라야 될 것이니,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두 번 보일 뿐이다. 李遠이 절개를 지켜 죽은 것(557)은 신하된 자로서의 극치이니, ≪자치통감강목≫에서 중시하여 사람을 허여한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에서 ‘太子가 임금을 시해했다.[太子弑]’고 기록한 것은 두 번이고(宋나라 劉劭, 隋나라 楊廣(煬帝)), 아들이 시해하였는데 ‘子’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 네 번이다(代國 拓跋六脩(316), 代國 拓跋寔君(376), 北魏 清河王 拓跋紹(409), 後梁 郢王 朱友珪(912)). 이때에 와서 天理가 사라졌으니, ≪자치통감강목≫에서 매우 서글퍼한 것이고, 그 중요한 것만을 들었을 뿐이다.[綱目君弑 書及其君母 及其太后 有之矣 未有書及其大臣者 大臣書及 必若淑與二湛而後可也 終綱目再見而已 李遠死節 人臣之極致 綱目重以予人也 綱目書太子弑者二(宋劭隋廣) 子弑不書子者四(代六脩 寔君 魏清河王紹 梁友珪) 蓋至是而天理滅矣 綱目之所甚悲也 舉其重而已矣]” ≪書法≫“과거에 唐나라 太子 李弘이 ≪春秋≫를 수업할 적에 楚나라 世子 商臣이 임금을 시해한 사건에 이르러서는 책을 덮고 탄식하자, 〈교육을 담당하던〉 官僚 郭瑜가 바꾸어 禮書를 읽도록 청하였다. 先正 胡安國 공께서 ≪春秋胡氏傳≫을 지었는데, 이 조목에 이르러 그들을 腐儒라고 하면서 이에 대해 말하기를 ‘君父가 되어서 ≪春秋≫의 의리를 통하지 못하는 이는 반드시 극악한 이름을 받게 되고, 臣子가 되어서 ≪春秋≫의 의리를 통하지 못하는 이는 반드시 찬탈․시해․誅戮의 죄에 빠지게 된다. 聖人이 이를 기록한 것은 天下 後世 사람들로 하여금 人倫을 살펴서 君臣父子의 도리를 행하여 극악한 이름과 주륙의 죄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게 한 것이다. 이홍이 이를 알았다면 반드시 몹시 두려워하여 ≪춘추≫를 배우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 臣子의 의리에 밝게 되어, 奏請을 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독약을 마시고 죽는 데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先正이 ≪춘추호씨전≫을 지은 의리가 이와 같다. 지금 ≪자치통감강목≫이 ≪춘추≫에서 법을 취하였으므로 弑逆의 일에 대해서 또한 반드시 책에 곧바로 기록했던 것이니, 만일 강독할 때에 이러한 내용을 忌諱하여 말하지 않는다면 앞에 참소가 있어도 보지 못하고 뒤에 역적이 있어도 알지 못할 것이니 이는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야 되겠는가.≪춘추≫는 傳으로 案을 삼고 ≪자치통감강목≫은 分注(目)로 案을 삼았으니, 分注에 실린 것에서 살펴보면 유래해 이르게 된 조짐을 알 수 있다. 우선 宋나라 劉劭의 일로 살펴보건대 善惡은 반드시 시작을 살펴야 하니 역적 유소는 諒闇(喪中)에 태어나고 그 생김새가 그 끝을 점칠 수 있어서 袁后가 그 해악을 미리 말한 적이 있었다. 음식을 받들어 모시고 문안을 드리는 것은 자식 된 직분에 마땅히 조심스럽게 할 일인데 東宫에 병력을 둔 것이 〈임금의 호위병인〉 羽林軍과 대등하였다. 신하는 무리를 거느려서는 안 되니, 신하가 무리를 거느리면 임금은 반드시 그 신하를 주살해야 한다. 그런데 巫蠱 사건이 발각되었으나 도리어 사면하여 불문에 부치고, 단죄해야 하는데도 단죄하지 않아서 도리어 반란을 초래하였다. 〈황제는〉 이윽고 태자를 폐위하고 동생을 세울 것을 도모하다가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고, 부인과 도모하였다. 황제가 죽은 것이 마땅하니, 일에 기밀을 지키지 못하여 潘妃에게 누설하였다.이뿐만 아니라 천하가 분열된 것이 이미 하루의 일이 아닌데 宋 文帝는 까닭 없이 군대를 출동하고 전쟁을 끝까지 하여 남북의 백성들이 죽어 간과 뇌를 땅에 바르듯이 하여서 쌓인 不善을 또한 가릴 수가 없었으니 진실로 그 말로의 재앙이 이와 같은 것이 마땅하다. ≪자치통감강목≫에서 이것을 기록한 것이 商臣의 사건과 마치 동일한 자취에서 나온 것과 같기 때문이니, 후세 사람들에게 유래한 바를 연구하여 극악한 행동을 삼가는 의리를 지극하게 하여 君父가 된 자의 경계를 삼도록 한 것이다. 아버지와 임금을 시해한 역적의 경우는 그 죄악이 폄하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드러나니, 어찌 군더더기를 언급할 것이 있겠는가. 슬프다.[昔唐太子弘受春秋 至楚世子商臣之事 廢書而嘆 其官僚郭瑜請改讀禮 先正胡公安國傳春秋 至此目之為腐儒 以為若語之曰 為人君父而不通春秋之義者 必蒙首惡之名 為人臣子而不通春秋之義者 必陷簒弑誅死之罪 聖人書此 使天下後世察於人倫 知所以為君臣父子之道 而免於首惡之名誅死之罪也 則弘而聞此 必𢥠然畏懼 知春秋之不可不學 而明於臣子之義 不至於奏請拂旨而見酖矣 先正傳春秋之義如此 今綱目取法春秋 故於弑逆之事 亦必直書于冊 若使講讀之際 避諱不言 則前有讒而不見 後有賊而不知 是自淪於陷穽者也而可乎 夫春秋以傳為案 綱目以分注為案 考於分注之所載 可以見其所由致之漸 姑以宋劭之事觀之 善惡必原所始 而逆劭則生於諒闇 形色可以占終 而袁后則預言其惡 侍膳問安 職所當謹 而東宫置兵 乃與羽林等 人臣無將 將則必誅 而巫蠱事覺 乃赦不問 當斷不斷 反受其亂 既而謀廢立 乃猶豫不决 謀及婦人 宜其死也 而事機不密 乃泄於潘妃 不惟是也 宇縣分裂 已非一日 宋文乃無故進兵 窮黷不已 使南北之民 肝腦塗地 不善之積 亦不可掩 固宜其末流之禍如此 綱目書之 與商臣之事 如出一轍 蓋欲使後世推本所由而致謹於首惡之義 以為人君父者之戒爾 若夫弑父與君之賊 其惡固自不待貶絶而後見也 又奚以贅及為哉 吁]” ≪發明≫ ‘袁后則預言其惡’은 본서 84쪽에 보인다.
역주2 當斷不斷 反受其亂 : ≪史記≫ 〈齊悼惠王世家〉에 보인다. 漢나라 초기 呂氏가 난리를 일으킬 즈음에 齊王의 相國인 召平이 군대를 일으켜 齊나라 王宮을 포위하였다가 軍權을 빼앗겨 도리어 魏勃에게 포위를 당하였는데, 소평이 “아! 道家에 ‘결단할 때에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그 어지러움을 받는다.[當斷不斷 反受其亂]’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하고는 자살하였다.
역주3 小不忍 : ≪論語≫ 〈衛靈公〉에 “공교로운 말은 덕을 어지럽히고,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큰 계책을 어지럽힌다.[巧言亂德 小不忍則亂大謀]”라고 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역주4 (四)[西] : 저본에는 ‘四’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西’로 바로잡았다.
역주5 (十)[卜] : 저본에는 ‘十’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과 ≪南史≫ 〈宋宗室及諸王下〉 등에 의거하여 ‘卜’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유준이……않았다 : ≪資治通鑑≫에는 劉濬이 石頭城으로 갔는데 얼마 후 劉劭가 부른 것이라 하였다.
역주7 (閉)[聞] : 저본에는 ‘閉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朱子大全≫8, 上海古籍出版社)에 의거하여 ‘聞’으로 바로잡았다.
역주8 太初 : 劉劭가 황제의 지위에 올라서 연호를 太初로 當年改元을 하였으나 ≪資治通鑑≫에서는 이를 紀年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보통 아버지의 뒤를 이은 황제는 그 아버지가 죽은 해의 연말까지는 아버지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여 當年改元을 하지 않고 다음 해부터 새 연호를 사용하는 踰年改元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유소는 이처럼 하지 않고 자기 연호를 정하였지만, ≪資治通鑑≫에서는 유소의 아버지 文帝의 연호 元嘉를 453년 말까지 사용하였다.
역주9 (謂)[詣] : 저본에는 ‘謂’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詣’로 바로잡았다.
역주10 典籖 : 문서 수발을 담당하는 관리를 말한다.
역주11 魏尊保太后為皇太后 : “保太后는 누구인가. 〈拓跋濬의 乳母〉 常氏이니, 魏主가 처음 즉위하고 높여 保太后로 하였다. 太武帝가 竇氏를 높여 保太后로 한 것은 乙丑年(425)에 기록하였는데, 常氏는 어째서 기록하지 않았는가. 처음이 아니므로 생략한 것이다. 그러나 그를 높여서 皇太后로 하는 데에 있어서는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保母가 皇太后로 된 것을 기록한 것은 두 번이다. 앞에서는 ‘魏主’라고 하여 지척하여 기록하고, 여기서는 다만 ‘魏’라고만 기록하였으니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保太后 何 常氏也 魏主初立 尊為保太后焉 太武尊竇氏為保太后 則書乙丑年 常氏則曷為不書 非創也 故略之 至其尊為皇太后 則不可以不書矣 終綱目 書保母為皇太后 二 前斥書魏主 此止書魏 非創也]” ≪書法≫
역주12 宋劭殺其吏部尚書王僧綽 : “스스로 즉위하였으므로 ‘宋劭’라고 이름을 지척하여 일컬었으니 매우 미워한 것이다. 여기에서 북쪽 저택의 여러 王侯들을 죽인 것은 기록하지 않고 왕승작을 죽인 것을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왕승작에게 죄를 돌린 것이다. 왕승작이 劉劭를 폐위하는 도모에 참여하였으니 난리가 났을 때 죽은 것이 나았을 것인데, 요행으로 유소가 알지 못했다고 하여 역적의 관작을 받고 구차하게 벗어나기를 기대하였으니 죽음을 취한 것은 마땅하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역적이 임명한 직책을 기록하기를 ‘其吏部尚書王僧綽’이라고 하였으니 袁淑의 무리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自立矣 斥稱宋劭 極惡也 於是殺北第諸王侯不書 書僧綽 何 罪僧綽也 僧綽與謀廢劭 死於難 可矣 幸其不知 受賊官爵 冀以茍免 其取殺宜也 綱目以賊所署職書之曰 其吏部尚書王僧綽 與袁淑輩大異矣]” ≪書法≫“王僧綽이 宋 文帝에게 빨리 〈태자의 폐위 문제를〉 결단하라고 힘써 청하였지만 송 문제는 따르지 못하였다. 왕승작과 같은 자는 또한 국가의 경영에 충성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유소가 이미 반역하였으니 왕승작은 스스로 마땅히 몸을 이끌어 떠나야 할 것이고, 진실로 유소가 왕승작의 계획한 것을 몰랐다고 해서 마음속에 감추어 참고서 관직에 나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불행히도 역적의 손에 죽게 되었다면 반드시 의리에 편안했을 것이고 또한 君(왕승작)이 그 난리에 弑死되었음을 알기에 충분하다. 똑같은 죽음이라도 난리가 난 초기에 죽지 않고 직책을 받은 이후에 죽었으므로 왕승작이 비록 현명해도 일찍 죽지 않은 것에 결점이 있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는 또한 袁淑과 江湛․徐湛之와 같은 등급으로 할 수 없어서 기록하기를 ‘劭殺其吏部尚書王僧綽’이라고 하였다. 마치 유소 자신이 그 신하를 죽인 것처럼 하였으니, 어찌 매우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僧綽力請宋文速斷 而宋文不能從 若僧綽亦可謂忠於謀國者矣 然劭既為逆 僧綽自當引身而去 固不可以其不知所謀而隐忍就職 萬一不幸 死於賊手 則必安於義命 亦足見君弑死於其難矣 均之死也 不死於臨難之初 而死於受職之後 故僧綽雖賢 病於死之不早 是以綱目亦不得與袁淑江徐同科 而書曰 劭殺其吏部尚書王僧綽 若劭自殺其臣然者 豈不深可惜哉]” ≪發明≫
역주13 夏四月……劭及弟濬皆伏誅 : “北魏의 髙宗(拓跋濬)과 宋 世祖(劉駿)는 모두 선왕의 변고로 임금 자리를 이어받은 자들인데, 북위에는 ‘拓跋濬이 즉위했다[濬立]’라고 기록하고, 여기서는 ‘劉駿을 즉위시켰다.[立駿]’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탁발준은 嫡孫으로서 당연히 즉위할 사람이지만, 유준은 평소 총애가 없었기 때문에 기록하기를 ‘宋나라 사람들이 그를 즉위시켰다.[宋人立之]’라고 하여, 인심이 함께 원하여 스스로 즉위한 이와 다름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유준에게는 ‘宋人立’이라고 기록하고 혹은 ‘宋나라가 세웠다.[宋立]’라고 기록하였으니, 모두 嫡統이 아니기 때문이다. 宋나라 劉濬에게 관작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역적의 도당이기 때문이다.[魏髙宗宋世祖 皆繼故者也 魏書濬立 此書立駿 何 濬嫡孫當立者也 駿素無寵 書曰宋人立之 以見人心之同欲而與自立者異矣 故駿書宋人立 或書宋立 皆非嫡故也 宋濬不書爵 賊黨也]” ≪書法≫“위에서 ‘武陵王 劉駿이 거병하여 劉劭를 토벌했다.[武陵王舉兵討劭]’라고 기록한 것은 宋 文帝의 아들 劉駿이 역적을 토벌한 것이고, 이어서 ‘宋나라 사람들이 유준을 즉위시켰다.[宋人立駿]’라고 기록한 것은 宋나라 사람들이 즉위시킨 것을 허여한 것이다. ‘人’은 많다는 말이고, ‘立’은 마땅히 즉위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春秋≫ 隱公 4년에 ‘衞나라 사람들이 晉을 즉위시켰다.[衞人立晉]’라고 기록한 말과 말은 같으나 뜻은 다르다.[上書武陵王舉兵討劭者 子駿之討賊也 繼書宋人立駿者 予宋人之立也 人者 衆詞也 立者 宜立也 此與春秋書衞人立晉 詞同而義異]” ≪發明≫ 이곳의 ‘사람들이 즉위시켰다.[人立]’라는 용어가 ≪春秋≫와 동일하나, 즉위하게 된 배경은 다르다. ≪春秋≫에서는 衛나라 사람들이 州吁를 살해하고 公子 晉을 邢나라에서 맞이하여 즉위시켰고, 宋나라는 劉駿이 劉劭를 토벌한 뒤 江夏王 劉義恭 등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역주14 (在)[征] : 저본에는 ‘在’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征’으로 바로잡았다. 征鎭은 본서 272쪽 역주 27) 참조.
역주15 留府 : 왕이 직접 전장에 나갈 때 후방에 남겨둔 王府를 말한다.
역주16 : 晉․南北朝時代에는 諸王 및 大臣이 屬官을 임명할 때 ‘板’이라고 하였다.
역주17 [宣] : 저본에는 ‘宣’이 없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8 申包胥가……말한다 : 春秋時代에 吳나라 군사가 楚나라 郡을 함락하였을 때 楚나라의 大夫 申包胥가 秦나라로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대궐의 뜰에서 7일 동안이나 음식을 먹지 않고 울었다. 그러자 秦 哀公이 감동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楚나라를 구해주었다.(≪春秋左氏傳≫ 定公 4년)王孫賈는 戰國時代 齊나라 湣王의 신하이다. 민왕이 부하인 淖齒에게 살해되자 왕손가는 시장에 들어가 요치를 토벌할 것을 말하고는 “이에 찬동하는 사람은 오른팔을 걷어 올리라.”라고 하니, 따르는 사람이 4백 명이었다. 왕손가는 이들을 데리고 요치를 공격하여 죽이고 민왕의 아들을 세워 제나라를 구하였다.(≪戰國策≫ 권13 〈齊策〉)
역주19 南軍 : 劉劭를 토벌하기 위해 거병한 劉駿의 군대를 말한다. 그 군대가 尋陽․武昌 등 建康의 서남쪽에 있었으므로, 地勢에 따라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20 南岸 : 秦淮河의 南岸을 말한다. 秦淮河는 長江의 지류로 建康의 서남쪽 아래를 가로지른다.
역주21 勤王 : 황제가 곤란에 처했을 때 제후들이 병력을 데리고 와서 황제를 구원하는 것이다.
역주22 (信)[倍] : 저본에는 ‘信’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倍’로 바로잡았다.
역주23 咨稟 : 윗사람에게 의견을 올려 지시를 받는 것이다.
역주24 朱雀門 : 建康城 남쪽 秦淮河의 다리 위에 있는 문이다.
역주25 大航 : 朱雀航을 말한다. 航은 원래 浮橋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秦淮河 위에 설치한 다리를 말한다.
역주26 隊副 : 궁중 수비대의 部隊長을 말한다.
역주27 (宋)[朱] : 저본에는 ‘宋’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朱’로 바로잡았다.
역주28 (漢)[沸] : 저본에는 ‘漢’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沸’로 바로잡았다.
역주29 牙旗 : 임금이나 대장의 居所에 있는 큰 깃발이다.
역주30 宋復以何尚之為尚書令 : “劉劭가 군부를 시해하였는데 이어서 ‘何尚之로 司空을 삼았다.’라고 기록한 것은 하상지가 유소에게 신하 노릇을 한 것이다. 元凶이 주살되고 나면 그를 축출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에 다시 尚書令으로 삼았으니 잘못이 심하다. ‘다시[復]’라고 기록한 것은 그것을 매우 나무란 것이다.[劭之弑也 繼書以何尚之為司空 則尚之臣劭矣 元凶既誅 黜之宜也 於是復以為尚書令 失則甚矣 書復以深譏之]” ≪書法≫“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이 부모를 시해하면 관직에 있는 이는 그를 죽여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陳恒의 시역에 孔子는 이미 은퇴를 하였지만 또한 목욕을 하고 임금께 토벌하기를 청하였으니 이웃나라의 일이라고 해서 끝내 그만두지 않았다. 宋나라 劉劭의 변란에 何尚之는 이때에 앞서 致仕하였다가 다시 기용되어 大臣이 되었는데 임금이 시해되어도 그 난리에 죽지 못하였으니 또한 너무 잘못되었고, 게다가 다시 역적에게 신하 노릇을 하였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 〈하상지를 尙書令으로 삼았다는 것을 기록하기에〉 앞서 ‘하상지로 司空을 삼았다.’고 한 것으로 유소가 弑逆하였다고 한 아래에 기록하였으니, 이는 잘못된 명을 받아 역적을 따른 죄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지금 孝武帝가 즉위하고 나서 스스로 번듯하게 형벌을 행하였다면 거의 大義가 밝아졌을 것인데, 어찌하여 그를 다시 벼슬자리에 참여하게 하였는가. 그러므로 ≪자치통감강목≫에서 특별히 써서 의리를 밝히는 사례를 세운 것이니, ‘宋나라가 다시 하상지로 尚書令을 삼았다.’라고 기록한 것은 역적을 따른 사람을 다시 기용함이 마땅치 않다고 나무란 것이다. 시해한 역적은 죄를 더할 것이 없으나 역적을 따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역적의 무리를 고립시킬 수 있는 방법이니, 이것이 ≪자치통감강목≫을 지을 때 반역을 토벌하는 것을 시급하게 여긴 까닭이다. 그러므로 ≪자치통감강목≫이 편찬되자 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였다.[臣弑君 子弑父 凡在官者 殺無赦 陳恒之逆 孔子已告老矣 方且沐浴請討 不以隣國之故而遂已也 宋劭之變 何尚之先以致仕 復起身為大臣 君弑不能死於其難 亦已非矣 乃復北面逆賊 故綱目前書以尚之為司空於劭弑逆之下 所以正其受偽命從逆賊之罪也 今孝武既立 自宜顯行刑辟 庶幾大義昭明 胡為使之復齒薦紳之列 故綱目特筆起義 書宋復以尚之為尚書令者 蓋譏其不當復用從逆之人也 夫弑逆之賊 無罪可加 惟治其從逆之人 乃所以孤逆賊之黨 此綱目之作 所以為急於誅討逆亂者也 故曰 綱目修而亂臣賊子懼]” ≪發明≫
역주31 全脱 : ≪資治通鑑≫ 註에 “三鎭의 士民 家口를 살리는 것이다.[活三鎭士民家口]”라고 하였다. 三鎭은 荊州․雍州․江州의 鎭을 말한다.
역주32 宋主(劉駿)가……적에 : 본서 351쪽에 보인다. 당시 劉駿은 武陵王인데 지금 황제가 되었으므로 宋主라고 쓴 것이다.
역주33 爪牙 : 적을 막고 임금을 호위하는 신하를 비유하는 말이다.
역주34 細作署와 尙方署 : 細作署는 정교한 공예품을 만드는 부서이고, 尙方署는 궁중의 물건을 제작하는 부서이다.
역주35 상례……바꾸었는데 : 漢나라 文帝가 상례 기간을 단축하여 한 달을 하루로 쳐서 喪服을 입게 한 제도이다. 예컨대 斬衰 3년인 경우 禫祭까지 27개월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데, 27일 동안만 상복을 입고 脫喪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역주36 아들에게……처사입니다 : 漢나라 文帝가 상례 기간을 ‘以日易月’ 제도로 써서 줄이게 하였는데 문제의 아들 景帝가 처음으로 장례를 치르는 기간을 짧게 줄인 것을 말한다. ‘以日易月’ 제도는 아래 역주 56) 참조.
역주37 宋主殺其弟南平王鑠 : “南平王의 죽음은 宋主가 몰래 사람을 시켜서 독살한 것인데, 비밀리에 한 것임에도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책에 크게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어둠 속에서 악행을 저지른 것을 과연 숨길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나 아우보다 친한 이가 없는 법인데 걸핏하면 죽였으니 그 근원은 宋 文帝가 아우 劉義康을 죽인 데서 시작되었다. 어찌 여파가 미쳐 그 유폐가 점점 넓어져서 이후로 뒤따라 시행되어 마침내 常例가 될 줄을 알겠는가. ≪자치통감강목≫에서 이런 부류의 경우 반드시 그 임금을 전적으로 지목하여 ‘殺其弟’라고 기록한 것은 천륜을 끊고 형제를 죽인 악행을 심하게 여겨 미워한 것이다. 이를 이어 자행된 것이 분분하여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帝王의 가정에 태어났으면서도 〈형제간에〉 도륙함이 이와 같았으니, 슬프다.[南平之死 乃宋主潜使人毒之 蓋秘之也 而綱目大書于冊 然則為惡於幽隐者 果可諱哉 雖然莫親於弟 而動輙殺之 其源蓋始於文帝之殺義康爾 豈知餘波所及 其流浸廣 自後踵而行之 遂為故常 綱目凡此類 必専目其主 而以殺其弟書之者 蓋甚其絶滅天倫勦拉同氣之惡以惡之也 繼是紛紛 亦不可勝書矣 生於帝王之家 而屠戮若此 哀哉]” ≪發明≫
역주38 (自)[曰] : 저본에는 ‘自’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曰’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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