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湛勸立鑠하고 湛之欲立誕한대 僧綽曰 建立之事는 仰由聖懐니 臣謂唯宜速斷이요 不可稽緩이라
하나니 願以義割恩
하여 略
이요 不爾
면 便應坦懐如初
하여 無煩疑論
注+坦懐如初, 謂坦懷待之, 如父子天性之初也.이니
事機雖密이나 易致宣廣이라 不可使難生慮表하여 取笑千載니이다하니
宋主曰 卿可謂能斷大事나 然此事至重하니 不可不慇懃三思라 且彭城始亡하니 人將謂我無復慈愛之道라한대
僧綽曰 臣恐千載之後에 言陛下唯能裁弟요 不能裁兒라하니 宋主黙然하다
江湛出謂僧綽曰 卿向言
이 將不太傷切直
가 僧綽曰 弟亦恨君不直
注+僧綽年少於湛, 故自稱爲弟. 一說 “弟, 但也.”하노라
鑠自壽陽入朝失旨라 宋主欲立宏호되 嫌其非次라 是以議久不决하여 與湛之屏人語호되 或連日累夕하여
常使湛之로 自秉燭繞壁檢行하여 慮有竊聽者러니 既而以其謀告潘淑妃어늘 妃以告濬하니 濬馳報劭한대 劭乃謀爲逆하다
目
初에 宋主以宗室彊盛으로 慮有内難하여 特加東宮兵하여 使與羽林相若하니 至有實甲萬人이러라
劭性黠而剛猛한대 宋主深倚之러라 及將作亂에 毎夜饗將士에 或親行酒하다
僧綽密以聞이러니 會嚴道育婢將至에 劭詐爲詔하고 豫加部勒云호되 有所討라하고
夜呼前中庶子蕭斌左衞率袁淑中舍人殷仲素入宮하여 流涕謂曰 主上信讒하니 將見罪廢라 内省無過하니 不能受枉이라 明旦에 當行大事하리니 望相與戮力하라하고
因起徧拜之하니 衆驚愕莫能對하다 久之에 淑斌皆曰 自古無此니 願加善思하소서하니 劭怒變色이어늘
斌懼曰 當竭身奉令하리이다하니 淑叱之曰 卿便謂殿下眞有是邪아 殿下幼嘗患風이러니 今疾動耳라
劭愈怒
하고 因眄淑曰 事當克否
注+眄, 目偏合而斜視也.아 淑曰 居不疑之地
하여 何患不克
이리오 但既克之後
에 不爲天地所容
이니 大禍亦旋至耳
라 假有此謀
라도 猶將可息
이니이다하니
左右引淑出曰 此何事而云可罷乎
아 淑還省
하여 繞床行
이라가 至四更乃寢
注+還省, 還左衛率省也.하다
目
[目] 江湛은 劉鑠을 태자로 세우기를 권하고, 徐湛之는 劉誕을 세우기를 권하였는데, 王僧綽이 말하기를 “태자를 세우는 일은 성상의 마음에 달려 있을 뿐이니, 신은 생각건대 마땅히 빨리 결단해야 할 것이고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결단해야 할 때에 결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어지러움을 받게 되니, 원컨대 의리로 은혜를 잘라내어 작은 것을 참지 못하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넓은 마음으로 〈父子 사이의 天性을〉 처음과 같이 하여
注+① “坦懐如初”는 넓은 마음으로 그들(劉劭․劉濬)을 대하여 마치 父子 사이의 天性을 처음과 같이 함을 말한다. 의혹되는 논의를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을 비록 기밀로 하더라도 쉽게 널리 드러나므로, 뜻밖에 재난이 발생하여 천 년 동안 비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宋主가 말하기를 “卿은 큰일을 잘 결단한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이 일은 매우 중요하니 절실하게 여러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彭城王 劉義康이 막 죽었으니 〈일을 성급히 결단하면〉 사람들은 장차 내가 다시는 자애하는 道理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승작이 말하기를 “신은 천 년 뒤에 폐하께서 아우를 잘 제재하고 아들을 잘 제재하지 못했다고 말할까 우려됩니다.”라고 하니, 宋主는 잠자코 있었다.
강담이 나와서 왕승작에게 말하기를 “卿이 아까 한 말이 너무 지나치게 솔직한 것이 아닌가.”라고 하니, 왕승작이 말하기를 “저
注+② 王僧綽이 江湛보다 어렸으므로 자신을 일컬어 弟라고 하였다. 일설에 “弟는 다만의 뜻이다.” 하였다. 역시 귀하께서 솔직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합니다.”라고 하였다.
유삭이 壽陽에서 入朝하였는데 宋主의 뜻을 그르쳤기 때문에 宋主는 劉宏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그 순차가 아닌 것을 혐의하였다. 이 때문에 논의를 오래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여 서담지와 함께 사람을 물리치고 대화하였는데, 혹 여러 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때에 늘 서담지에게 직접 촛불을 잡고 벽을 따라 돌며 살피게 하였는데 몰래 엿듣는 자가 있는지 우려한 것이었다. 이윽고 宋主는 그 모의를 潘淑妃에게 고했는데 반숙비가 劉濬에게 고하였다. 유준이 급히 劉劭에게 고하였는데 유소는 마침내 반역할 것을 도모하였다.
目
[目] 예전에 宋主는 宗室이 강성함으로 인해 내란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특별히 東宮의 병력을 늘려 羽林軍과 비슷한 정도로 배치하니, 실제 甲士가 1만 명에 이르렀다.
劉劭는 성격이 교활하고 사나웠는데, 宋主가 몹시 의지하였다. 유소가 반란을 일으킬 즈음에 매일 밤 將兵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때 친히 술을 따라주기도 하였다.
王僧綽이 이를 비밀리에 宋主에게 보고하였는데, 마침 嚴道育의 하녀가 도착하자 劉劭가 거짓 조서를 만들고 미리 부대를 정비해놓고 말하기를 “토벌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밤에 前 中庶子 蕭斌․左衞率 袁淑․中舍人 殷仲素를 불러 동궁으로 들어오게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主上께서 참소를 믿으시니 죄를 받고 폐위될 것이다. 나 자신을 살펴보아도 과실이 없으니, 억울함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내일 아침에 큰일을 행할 것이니, 서로 함께 힘을 다하기를 바란다.”라고 하고,
이어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두루 절을 하니, 사람들은 경악하여 감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한참 뒤에 원숙과 소빈이 모두 말하기를 “예부터 이러한 일은 없었으니 더 잘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유소가 분노하여 얼굴빛이 변하였다.
소빈은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몸을 바쳐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하니, 원숙이 꾸짖기를 “卿은 전하께서 진짜 이런 일을 하시리라 생각하는가. 전하께서는 어렸을 적에 風疾을 앓은 적이 있으니, 지금 풍질이 발작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소가 더욱 분노하고 이어서 원숙을 흘겨보며
注+① 眄은 눈 한쪽을 찡그리며 흘겨보는 것이다. 말하기를 “일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원숙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의심받지 않을 지위에 있으시면서 어찌 성공하지 못할 것을 근심하십니까. 다만 성공한 뒤에는 天地에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니, 큰 재앙 역시 바로 닥칠 것입니다. 가령 이런 계획을 세우셨더라도 아직은 그만둘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동궁의 측근들이 원숙을 끌어내면서 말하기를 “이 일이 어떤 일인데 중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원숙이 左衛率省으로 돌아와서
注+② “還省”은 左衛率省으로 돌아온 것이다. 침상 주위를 서성거리다가 4更(2시경)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目
[目] 다음 날 궁궐문이 열리기 전에 劉劭가 붉은 옷을 군복 위에 껴입고 蕭斌과 함께 畫輪車를 타고
注+① 붉은 옷은 太子가 入朝할 때 입는 옷이다. ≪晉書≫ 〈輿服志〉에 말하기를 “畫輪車는 소가 끄는데 채색을 하여 바퀴통에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畫輪車라고 부른다. 위에는 4개의 좁은 기둥을 세우고 좌우에는 사방을 바라보도록 트이게 하며 綠油幢(푸르게 기름 먹인 휘장)과 朱絲絡(붉은 명주실로 맨 것)을 하고, 그 위는 모양새가 하나하나 輦과 비슷하고, 그 아래는 犢車(소가 끄는 수레)와 비슷하다. 太子의 法駕를 또한 鸞路라고도 한다. 法駕가 아니면 畫輪車를 타는데, 두 개의 車箱 안을 金錦과 黃金으로 치장하고, 5가지 채색을 칠한다.”라고 하였다. 袁淑을 매우 급히 불렀으나, 원숙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유소가 수레를 멈추고 원숙을 재촉하니, 원숙이 천천히 일어나서 수레 뒤로 왔다. 유소가 원숙에게 수레를 타게 하자 또 사양하고 오르지 않으니, 유소는 명을 내려 원숙을 죽였다.
궁궐문이 열리자 유소가 들어갔는데, 이전의 제도에 東宮의 군대는 臺城에 들어올 수가 없었으므로
注+② 〈“不得入城”은〉 臺城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유소는 위조된 조서를 궁문을 지키던 자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조칙을 받아 체포하고 토벌할 일이 있다.”라고 하고, 후속 부대에게 명하여 속히 오도록 하였다.
張超之 등 수십 명이 齋閣으로 달려 들어가 칼을 빼들고 곧바로 合殿으로
注+③ 晉나라 시대에는 여러 황제들이 대부분 內房에 거처하여 조정 연회에 나가는 것은 東堂과 西堂 두 곳뿐이었다. 孝武帝 말년에 한창 淸暑宮을 짓고, 永初 연간에 宋나라가 천명을 받아 황제가 되고난 뒤에도 고쳐 짓지 않아서 사는 곳은 西殿이라 일컫고 따로 좋은 이름을 짓지 않아서 文帝가 그대로 사용하고 또한 合殿이라는 명칭도 있게 되었다. 올라갔다. 宋主는 그날 밤에 徐湛之와 함께 사람을 물리고 아침까지 대화를 하여 촛불이 여전히 꺼지지 않았고, 호위병이 아직 일어지 않은 상황이었다.
宋主는 장초지가 침입하는 것을 보고 안석을 들어 막다가 5개의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갔는데, 마침내 宋主를 시해하였다. 서담지가 놀라 일어나니 병사가 그를 죽였다.
유소가 나가서 東堂에 앉았는데, 江湛이 떠들썩한 소리를 듣고 탄식하기를 “王僧綽의 말을 쓰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라고 하니, 유소가 군사를 보내어 그를 죽였다.
左細仗主
注+④ 宋나라 宿衛의 관원은 細鎧主․細鎧將․細仗主 등이 있다. 卜天與는 갑옷을 입을 겨를도 없이 칼을 잡고 활을 들고는 급히 소리를 질러 측근들에게 출전하도록 하여 유소에게 활을 쏘아 거의 맞출 뻔했는데, 유소의 무리가 복천여를 공격하여 팔이 잘려 죽었다.
隊將 張泓之․朱道欽․陳滿이 복천여와 함께 같이 전투를 하다가 죽었다. 유소는 사람을 보내어 潘淑妃 및 太祖(文帝)와 친하고 신임을 받았던 이 수십 명을 죽였다.
目
[目] 劉劭의 장병들은 유소가 큰 상을 내릴 것으로 생각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웠다. 柳元景이 水陸 양면으로 적의 공격을 받았지만 의지와 기개가 더욱 강해져서, 휘하의 용감한 병사들을 모두 보내 출전시켰다.
유소의 군대가 거의 보루를 함락할 즈음에 魯秀가 후퇴하라는 북을 치자 유소의 병사들이 즉시 전진을 멈추었다. 유원경이 곧바로 보루의 문을 열고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그 기회를 틈타 공격하니 유소의 무리들이 크게 무너졌다.
유소가 다시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친히 와서 보루를 공격하자, 유원경이 다시 대파하여 사상자가 이전보다 많았다. 유소는 겨우 죽음을 면했고 노수는 남쪽으로 도망쳤다.
유준이 江寧에 도착하니 江夏王 劉義恭이 홀로 말을 타고 南軍으로 도망쳐와서 表文을 올려 帝位에 즉위할 것을 권하니, 유준이 마침내 新亭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目
[目] 또 관직을 설치하는 것은 관직이 마땅하면 일이 제대로 되고 사람이 걸맞으면
注+① 稱(걸맞다)은 尺證의 切이다. 관직에 두어야 하니, 王侯가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면 억지로 벼슬을 시켜서는
注+② 強(억지로)은 其兩의 切이다. 여기의 “強仕”는 억지로 벼슬시키는 것을 말한다. 안 됩니다.
게다가 황제의 아들이 관직이 없다고 하여 사람들 중에 누가 천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다만 賓友의 직책을 잘 선발하고 바른 사람을 힘써 선발하는 것이 마땅하니, 또한 어찌 반드시 長史, 參軍, 別駕, 從事 등의 관속을 설치한 뒤에야 귀해지겠습니까.
세속 사람들이 남을 비방하여 해치기를
注+③ 沈은 남을 죽이는 실제를 말한다. 좋아하면서 그 비방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남을 칭찬하여 천거하기를 좋아하면서 그 칭찬하는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비방을 하는 무리들이 모두 비루하다면 비방을 받는 사람을 마땅히 뽑아야 하고, 칭찬을 하는 무리들이 모두 용렬하다면 칭찬을 받는 사람을 마땅히 물리쳐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헐뜯거나 칭찬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고 선악이 구분될 것입니다.
어느 세상에나 일에 관하여 말을 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고 어느 시기에도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태평한 시대가 이르지 않고 어지럽고 위태로운 시기가 계속 이어지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명령을 내리는 근본이 진실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주문이 올라갔는데 군주의 뜻에 거슬려 스스로 사퇴하여 관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