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0)

자치통감강목(10)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0)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丙子年(196)
建安元年 春二月 修雒陽宮하다
董承, 張楊 欲以天子還雒陽이어늘 楊奉, 李樂 不欲하니 由是 諸將 更相疑貳러라
張楊 使董承으로 先繕修雒陽宮하니 五月 帝遣使하여 至楊奉, 李樂, 韓暹營하여 求送至雒陽한대 奉等 從詔하다
夏六月 러니 呂布襲取下邳하니 備降於布하여 遂與幷兵擊術하다
袁術 攻劉備하여 以爭徐州러니 備使司馬張飛 守下邳하고 自將拒術於盱眙, 淮陰하여 相持經月 更有勝負注+郡國志 “盱眙ㆍ淮陰二縣屬下邳國.”
與呂布書하여 勸令襲下邳하고 許助以軍糧한대 布引軍東下注+布去年奔備, 蓋屯於下邳之西.하니 飛敗走어늘 布虜備妻子及將吏家口하다
備收餘兵하여 東取廣陵하여 與術戰又敗하니 飢餓困踧하여 請降於布한대
布亦忿術運糧不繼하여 乃召備하여 復以爲豫州刺史하고 與幷勢擊術하여 使屯小沛하고 布自稱徐州牧注+幷, 畀政切.하다
秋七月 帝還雒陽하다
楊奉, 韓暹 奉帝東還하니 張楊 以糧迎道路하다 七月 至雒陽하니
張楊 謂諸將曰 天子 當與天下共之 朝廷 自有公卿하니 當出扞外難이라하고 遂還野王注+野王縣, 屬河內郡, 張楊所屯也.하니
楊奉 亦出屯梁注+郡國志 “梁縣屬河南尹.”하고 韓暹, 董承 留宿衛하다 宮室燒盡이라 百官 披荊棘하여 依牆壁間하고
州郡委輸不至 尙書郞以下 自出採稆注+稆, 音呂, 自生禾也.하니 或飢死牆壁間하고 或爲兵士所殺하니라
曹操在許하여 謀迎天子注+郡國志 “許縣屬潁川郡.” 帝旣徙都, 改曰許昌.하니 衆以爲山東未定하고 韓暹, 楊奉 負功恣睢하니 未可卒制注+卒, 讀曰猝.니이다
荀彧曰 昔 晉文公 納周襄王而諸侯景從하고 漢高祖爲義帝縞素而天下歸心注+景從, 言如景之從形也. 左傳, 狐偃言於晉侯曰 “求諸侯, 莫如勤王, 諸侯信之, 且大義也.” 晉侯以左師逆王, 王入于王城, 取太叔于溫, 殺之于隰城, 遂定霸業, 天下服從.하니이다
自天子蒙塵으로 將軍 首唱義兵이로되 徒以山東擾亂으로 未遑遠赴러니 今鑾駕旋軫하고 東京榛蕪注+軫, 車後橫木也. 旋軫, 猶言回轅. 榛, 鋤榛切, 木叢生之貌. 蕪, 荒薉也.하니
誠因此時하여 奉主上以從人望 大順也 秉至公以服天下 大略也 扶弘義以致英俊 大德也
四方 雖有逆節이나 其何能爲리오 若不時定하여 使豪傑生心이면 後雖爲慮라도 亦無及矣리이다
操乃遣曹洪하여 將兵하여 西迎天子한대 董承等 拒之하니 不得進이러니
議郞董昭 以楊奉兵馬最强而少黨援이라하여 作操書與奉曰 方今群凶猾夏하고 四海未寧하니 必須衆賢以淸王軌注+
曹操가 皇帝를 맞이하여 정권을 잡다曹操가 皇帝를 맞이하여 정권을 잡다
王軌, 猶言王度ㆍ王路, 指王室而言.
將軍 當爲內主 吾爲外援이라 今吾有糧하고 將軍有兵하니 有無相通이면 足以相濟 死生契闊 相與共之注+契闊, 勤苦也. 此蓋謂死也生也, 處勤苦之中, 相與共之也.니라
得書喜하여 語諸將하여 共表操爲鎭東將軍하다
韓暹 矜功專恣어늘 董承 患之하여 因潛召操하니 操乃將兵詣雒陽하다
旣至 奏韓暹, 張楊之罪하니 帝以暹, 楊有功이라하여 詔勿問하고 以操 領司隷校尉, 錄尙書事하다
操於是 誅有罪하고 賞有功하며 矜死節하고 封董承等十三人하여 爲列侯注+宏紀曰 “封衛將軍董承, 輔國將軍伏完, 侍中丁ㆍ种 尙書僕射鍾繇, 尙書郭 御史中丞董芬, 彭城相劉艾, 馮翊韓斌, 東郡太守楊衆, 議郞羅邵ㆍ伏德ㆍ趙蕤爲列侯.”하다
하고 自爲大將軍하여 封武平侯하다
操引董昭問計한대 昭曰 此下諸將 人殊意異하니 今留匡弼 事勢不便이라 惟有移駕幸許耳니이다
이나 朝廷播越하여 新還舊京하여 跂望獲安注+播, 流也. 遷也. 越, 顚墜也, 走也. 跂, 去智切, 與企同. 跂望, 擧踵以望也.이러니 今復徙駕하면 不厭衆心이라
夫行非常之事라야 乃有非常之功이니 願將軍 算其多者注+凡擧事, 有利, 亦有害, 惟算其利多而害少者行之.하소서 操曰 此 孤本志也라하고
乃奉車駕東遷하여 自爲大將軍하여 封武平侯注+武平縣, 屬陳國. 此取其以神武平禍亂也.하고 始立宗廟社稷於許하니 自是 政歸曹氏하고 天子 守位而已러라
하니 太守王朗하다
孫策 引兵渡浙江하니 會稽功曹虞翻 說太守王朗曰 策 善用兵하니 不如避之니이다 不從하고 發兵拒策於固陵注+水經註 “浙江東逕固陵城北. 昔范蠡築城於浙江之濱, 言可以固守, 謂之固陵. 浙江又東逕塘, 謂之柤瀆.”하다
數戰不克이러니 策叔父静 說策曰 朗 負阻城守하니 難可卒拔이라
査瀆 南去此數十里 宜從彼據其內注+卒, 讀曰猝.하면 所謂攻其無備 出其不意者也니라
從之하여 多然火爲疑兵하고 分軍投査瀆道하여 襲高遷屯注+裴松之曰 “按今永興縣有高遷橋.”하니
大驚하여 遣周昕逆戰이어늘 破斬之하다 遁走어늘 追擊大破之한대 乃降하니
自領會稽太守하고 復命翻爲功曹하여 待以交友之禮하다
好遊獵하니 諫曰 明府喜輕出微行하니 從官 不暇嚴하고 吏卒 常苦之注+嚴, 裝也.
夫白龍魚服이라가 困於豫且하니 願少留意注+且, 七余切. 豫且, 姓名也. 說苑曰 “吳王欲從民飮酒, 伍子胥諫曰 ‘不可. 昔白龍下淸泠之淵, 化爲魚, 漁者豫且射中其目, 白龍上訴, 天帝曰 「當是之時, 若安置而形.」 白龍對曰 「我下淸泠之淵, 化爲魚.」 天帝曰 「魚固人之所射也, 豫且何罪.」 夫白龍, 天帝貴畜也. 豫且, 宋國之賤臣也. 白龍不化, 豫且不射. 今棄萬乘之位, 而從布衣之飮酒, 臣恐其有豫且之患矣.’ 王乃止.”하소서 策曰 君言 是也라호되 然不能改러라
冬十月 曹操攻楊奉하여 走之하다
車駕東遷 楊奉 自梁欲邀之호되 不及이러니 操征奉하니 南犇袁術하다
詔書下紹하여 責以地廣兵多而不聞勤王之師하고 但擅相討伐注+勤王, 勤納王也. 擅相討伐, 謂與公孫瓚相攻也.한대 紹上書陳愬
乃以紹爲太尉하니 紹恥班在曹操下하여 辭不受어늘 操懼하여 請以大將軍讓紹하고 而自爲司空하여 行車騎將軍事하다
하고 荀攸爲軍師하고 郭嘉爲祭酒하다
操以荀彧爲侍中, 守尙書令하고 問以策謀之士한대 薦其從子攸及川郭嘉하다
操徴攸與語하고 大悦曰 公達 非常人也注+
郭嘉郭嘉
公達, 攸字.
吾得與之計事호니 天下 當何憂哉리오하고 以爲軍師하다
郭嘉往見袁紹하니 紹甚敬禮之러니 居數十日 謂辛評, 郭圖曰 袁公 徒欲效周公之下士하고 而不知用人之機하며
多端寡要하고 好謀無決하니 欲與共濟天下大難하여 定霸王之業이면 難矣注+下, 禮下之也. 多端, 言事緖多也. 寡要, 少得其至要也. 大難之難, 去聲. 吾將更擧以求主하리니 子盍行乎注+更, 工衡切.
二人 不寤어늘 嘉遂去之하다 操召見하여 與論天下事하고 喜曰 使孤成大業者 必此人也라하더니
嘉出 亦喜曰 眞吾主也라하니라 操表嘉爲司空祭酒注+陳壽三國志作司空軍祭酒, 此逸軍字.하다
北海太守孔融 志在靖難호되 而才疏意廣하여 訖無成功注+難, 去聲. 訖, 竟也, 終也.하니 高談淸敎 可玩而誦이로되 論事考實하면 難可悉行이라
但能張磔網羅而目理甚疏注+磔, 陟格切, 張也, 開也.하고 造次 能得人心호되 久久亦不願附也 所任 多剽輕小才注+輕, 墟正切.러라
至於尊事名儒鄭玄하여는 執子孫禮하며 易其鄕名曰鄭公鄕이라하고
及淸雋之士左承祖, 劉義遜等하야는 皆備在座席호되 而不與論政하고 曰 此 民望이니 不可失也라하니라
袁, 曹, 公孫 首尾相連호되 孤立하여 不與通이러니 承祖勸融하여 自託彊國한대 不聽而殺之어늘 義遜 棄去하다
靑州刺史袁譚 攻融하여 自春及夏하니 戰士餘數百人이요 流矢交集이로되 而融 猶隱几讀書하고 談笑自若이러니
城陷 乃犇東山注+隱, 去聲, 憑也. 東山, 都昌縣之東山也. 都昌縣屬北海郡.하다 曹操與融有舊 徴爲將作大匠하다
旣破融 威惠甚著러니 其後 信任群小하고 肆志奢淫하니 聲望 遂衰하니라
中平以來 民棄農業注+中平, 靈帝年號.하니 諸軍竝起 率乏糧穀하여 饑則寇略하고 飽則棄餘하니 瓦解流離하여 無敵自破者 不可勝數注+瓦解, 言如衆瓦之解散.
袁紹軍 仰桑椹하고 袁術 取給蒲蠃注+椹, 桑實也. 蠃, 盧戈切, 蚌屬也.러니 棗祗請建置屯田하니
曹操從之하여 以祗爲屯田都尉하고 任峻爲典農中郞將하여 募民屯田許下하여 得穀百萬斛注+魏志曰 “曹公置典農中郞將, 秩二千石.” 許, 謂許州也. 許下, 猶洛曰洛下, 郟曰郟下之類.하다
於是 州郡 例置田官하여 所在 倉廩皆滿이라 操征伐四方 無運糧之勞러라
袁術 畏呂布하여 乃爲子求婚한대 布許之하다 遣將紀靈等하여 攻劉備하니 備求救於布어늘
布曰 術若破備 則北連泰山諸將하여 吾爲在術圍中이리니 不得不救也注+泰山諸將謂臧霸, 孫觀, 吳敦, 尹禮輩.라하고 馳往赴之하여
謂靈等曰 玄德 布弟也注+玄德, 備字. 爲諸君所困하니 故來救之하노라 靈等 乃罷하다
備合兵得萬餘人이어늘 布惡之하여 攻備하니 備敗走歸曹操한대 操厚遇之하고 以爲豫州牧하다
謂操曰 備有英雄之志하니 今不早圖 後必爲患하리라 操以問郭嘉한대
嘉曰 有是니이다이나 公起義兵 爲百姓除暴어늘 推誠杖信하여 以招俊傑이라도 猶懼其未也注+杖, 上聲. 左傳襄八年 “杖莫如信”, 註 “人之可倚杖者, 莫如誠信.”
今備有英雄名이어늘 以窮歸己而害之 以害賢爲名也 如此 則智士將自疑하여 回心擇主하리니
誰與定天下乎잇가 夫除一人之患하여 以沮四海之望 安危之機也 不可不察이니이다
操笑曰 君 得之矣로다하고 遂益其兵하고 給糧食하여 使東至沛하여 收散兵以圖呂布하다
備在豫州하여 擧袁渙茂才러니 至是하여 爲布所留 使作書罵辱備하니 渙不可라한대
布大怒하여 以兵脅之러니 顔色不變하고 笑而應之曰 渙 聞唯德可以辱人이요 不聞以罵라하니이다
使彼固君子邪인댄 且不恥將軍之言이요 彼誠小人邪인댄 將復將軍之意리니 則辱在此 不在彼注+言布以書罵備, 備君子邪, 固不以罵爲恥, 其小人邪, 將復以書罵布也.니이다
且渙 他日之事劉將軍 猶今日之事將軍也 如一旦去此 復罵將軍 可乎잇가 布慙而止하다
張濟攻穰城이라가 敗死하니 族子繡以其衆歸荊州하다
張濟自關中引兵入荊州하여 攻穰城이라가 中流矢死注+穰縣, 屬南陽郡.하다 荊州官屬 皆賀한대
劉表曰 濟以窮來어늘 主人無禮하여 至於交鋒注+無禮, 言無郊勞授館之禮也.하니 此非牧意 受弔 不受賀也注+時表爲荊州牧.라하고 使人納其衆하니
衆聞之하고하여 皆歸心焉이러라 濟族子繡 代領其衆하여 屯宛하다
帝旣出長安 賈詡往依段煨러니 至是歸繡하여 說繡使附劉表하니 繡從之하다
詡往見表어늘 表以客禮待之러니 詡曰 表 平世三公才也 不見事變하고 多疑無決하니 無能爲也라하니라
劉表愛民養士하여 從容自保하니 境內無事하고 學士歸之者以千數
表乃起立學校하여 講明經術하고 命故雅樂郞杜夔하여 作雅樂하여 欲庭觀之注+漢樂四品, 一曰太予樂, 典郊廟․上陵․殿擧之樂, 二曰周頌雅樂, 典辟雍饗射六宗社稷之樂, 三曰黃門鼓吹, 天子所以宴樂群臣, 四曰短簫․鐃歌, 軍樂也.러니
夔曰 今將軍 號不爲天子하니 合樂而庭作之 無乃不可乎잇가 表乃止하다
杜襲, 繁欽 避亂荊州어늘 表俱待以賓禮注+繁, 音婆. 繁欽, 姓名.러니 數見奇於表注+數, 音朔. 見, 賢遍切, 下見能同. 數見奇, 謂頻數以奇才見示也.한대
喩之曰 吾所以與子俱來者 徒欲全身以待時耳 豈謂劉牧 當爲撥亂之主而規長者委身哉
子若見能不已 非吾徒也 吾與子絶矣리라 慨然曰 請敬受命호리라
禰衡 少有才辯이나 而尙氣剛傲注+禰, 姓也.러니 孔融 薦之於操한대 罵辱操注+操召衡爲鼓吏, 故爲衡所罵辱.하니
操怒曰 禰衡豎子 孤殺之 猶雀鼠耳로되 顧此人 素有虛名하니 遠近 將謂孤不能容之라하고 乃送與劉表하다
稱表之美盈口로되 而好譏貶其左右하니 左右譖之
表怒하여 以江夏太守黄祖性急이라하여 送衡與之러니 衆辱祖하니 祖殺之하다


병자년丙子年(196)
나라 효헌황제 건안孝獻皇帝 建安 원년이다. 봄 2월에 낙양雒陽궁전宮殿수선修繕하였다.
동승董承장양張楊천자天子를 호위하여 낙양洛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는데, 양봉楊奉이락李樂이 이를 원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장수들이 돌아가며 서로 의심하여 딴마음을 품었다.
장양이 동승에게 먼저 낙양의 궁전宮殿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5월에 황제가 양봉楊奉, 이락李樂, 한섬韓暹의 군영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자신을 낙양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니, 양봉 등이 조령詔令을 따랐다.
】 여름 6월에 유비劉備원술袁術우이盱眙(우이)에서 싸웠다. 여포呂布하비下邳를 습격하여 점령하니, 유비가 여포에게 항복하고서 마침내 여포와 병력을 합하여 원술을 공격하였다.
원술袁術유비劉備를 공격하여 서주徐州를 다투자, 유비가 사마 장비司馬 張飛에게 하비下邳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우이盱眙회음淮陰에서 원술을 막았는데, 한 달 남짓 서로 대치하면서 이기고 지기를 번갈아 하였다.注+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우이盱眙회음淮陰하비국下邳國에 속하였다.” 하였다.
원술이 여포呂布에게 편지를 보내어 하비下邳를 습격하도록 권하고 군량을 지원해줄 것을 허락하였다. 여포가 군대를 이끌고 注+여포呂布가 지난해에 〈서주徐州에 가서〉 유비劉備에게 의탁하였으니, 이는 하비下邳의 서쪽에 주둔한 것이다. 장비가 패하여 달아나니, 여포가 유비의 처자식 및 장수와 관원들의 식솔들을 포로로 잡았다.
유비는 남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동쪽으로 가서 광릉廣陵을 점거하고 원술과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니, 군량이 떨어져 굶주리고 처지가 매우 곤궁하여 여포에게 항복을 받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여포 역시 원술이 약속했던 군량 지원이 이어지지 않은 것에 분노하여 이에 유비를 불러서 다시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고, 그와 병력을 연합하여 원술을 공격하고 소패小沛에 주둔하게 하였다. 여포는 스스로 서주목徐州牧이라고 칭하였다.注+(합하다)은 비정畀政이다.
】 가을 7월에 황제가 낙양雒陽으로 돌아왔다.
양봉楊奉한섬韓暹이 황제를 받들어 동쪽으로 돌아오니, 장양張楊이 양식을 가지고 와서 도로에서 맞이하였다. 7월에 거가車駕낙양洛陽에 이르니,
장양이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천자天子는 마땅히 천하 사람들과 함께 섬겨야 할 분이다. 조정朝廷에는 본래 공경公卿이 있어서 천자를 보좌하니, 나 장양은 응당 밖으로 나가서 외적外敵을 막아야 할 것이다.” 하고 마침내 야왕현野王縣으로 돌아갔다.注+야왕현野王縣하내군河內郡에 속하였으니, 장양張楊이 주둔한 곳이다.
양봉 역시 밖으로 나가서 양현梁縣에 주둔하고注+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양현梁縣하남윤河南尹에 속하였다.” 하였다., 한섬韓暹동승董承경사京師에 머물러 숙위宿衛를 담당하였다. 이때에 궁실宮室이 모두 불에 타 없어져서 백관百官이 가시덤불을 헤치고 담장과 벽 사이에 의지해 있었는데,
에서 수송해오는 물건이 이르지 않아서 상서랑尙書郞 이하의 관원들이 직접 밖으로 나가 돌벼를 채취해오니注+는 음이 이니, 돌벼(씨를 뿌리지 않았는데 저절로 나는 벼)이다., 어떤 이는 담장과 벽 사이에서 굶주려 죽고 어떤 이는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조조曹操입조入朝하고 스스로 사예교위 녹상서사司隷校尉 錄尙書事가 되었다.
조조曹操허현許縣에 있으면서 천자天子를 맞이해올 것을 계획하자注+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허현許縣영천군潁川郡에 속하였다.” 하였다. 황제가 이미 도읍을 허현許縣으로 옮기고서 허창許昌(허주許州)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동山東 지역이 아직 평정되지 못하였고, 한섬韓暹양봉楊奉호가扈駕한 공로를 자부하여 방자하고 포학하니 갑작스럽게 제압할 수 없습니다.”注+〈“미가졸제未可卒制”의〉 (갑자기)은 로 읽는다. 하였는데,
순욱荀彧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적에 나라 문공文公나라 양왕襄王을 〈호위하여〉 경사京師로 들여보내자 제후諸侯들이 그림자처럼 따랐고, 천하 사람들의 마음이 고조高祖에게 돌아왔습니다.注+경종景從”은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僖公 25년(B.C.635) 조에 호언狐偃나라 문공文公에게 말하기를 “제후諸侯패자霸者가 되려고 한다면 천자天子의 일에 진력盡力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이렇게 하면 제후諸侯들이 믿을 것이고 또한 대의명분大義名分이 있습니다.” 하니, 문공이 좌군左軍을 거느리고서 양왕襄王을 맞이하였다. 양왕이 왕성王城으로 들어가서 반란을 일으킨 태숙太叔 땅에서 잡아 습성濕城에서 죽였다. 이로 말미암아 문공이 마침내 패업霸業을 정하니, 천하가 복종하였다.
천자天子몽진蒙塵(파천播遷)한 이래로 장군將軍께서 먼저 의병義兵을 제창하였으나 다만 산동山東이 소란하므로 멀리 달려갈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난가鑾駕(대가大駕)가 돌아왔는데 동경東京(낙양雒陽)은 잡목雜木이 자라고 황폐합니다.注+은 수레 뒤에 가로댄 나무이니, “선진旋軫”은 수레를 돌린다는 말과 같다. 서진鋤榛이니, 나무가 총생叢生하는 모양이다. 는 황폐함이다.
진실로 이때를 이용하여 주상主上을 받들어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큰 순리順理(의리義理에 순응함)이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함을 잡아 지켜 천하를 복종시킴은 큰 지략이고, 대의大義를 붙들어 영걸들을 초치招致함은 큰 이니,
사방에 비록 반역하는 적신賊臣이 있으나 그들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만약 제때에 결정하지 않아서 호걸들에게 이러한 마음을 갖게 하면 뒤에 비록 생각하더라도 또한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조曹操가 이에 조홍曹洪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서 천자天子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동승董承 등이 막으니 조홍이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의랑 동소議郞 董昭양봉楊奉병마兵馬가 가장 강성하지만 당원黨援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조조의 명의로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써서 양봉에게 보내었다. “바로 지금 군흉群凶중하中夏(중국中國)를 어지럽혀서 사해四海가 편안하지 못하니, 반드시 많은 현자賢者를 필요로 하여야 황실皇室을 깨끗이 할 수 있다.注+왕궤王軌”는 왕도王度, 왕로王路라는 말과 같으니, 왕실王室(황실皇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장군은 응당 안에서 조정의 일을 주관하고 나는 밖의 지원支援이 되어야 한다. 지금 나는 양곡이 있고 장군은 군대가 있으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융통하면 충분히 서로 구제할 수 있다. 죽든 살든 고생하든 서로 더불어 이 모든 것을 함께하겠다.”注+계활契闊”은 근고勤苦함이다. 이는 죽든 살든 근고勤苦하는 상황에 처하든 서로 더불어 이 모든 것을 함께함을 이른다.
양봉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여 장수들에게 말하고 함께 표문表文을 올려서 조조를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삼았다.
한섬韓暹이 자신의 을 자랑하며 전횡을 부리고 방자하게 굴자 동승董承이 이를 근심하고 인하여 은밀하게 조조曹操를 부르니, 조조가 이에 군대를 거느리고 낙양洛陽으로 왔다.
조조가 낙양에 이른 다음 한섬과 장양張楊를 아뢰자, 황제가 한섬과 장양은 이 있다고 하여 조령詔令을 내려 죄를 묻지 말도록 하고, 조조에게 사예교위司隷校尉녹상서사錄尙書事를 겸하게 하였다.
조조가 이에 죄가 있는 자를 주벌하고 이 있는 자에게 을 주며 절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자를 무휼撫恤하고 동승董承 등 열세 사람을 하여 열후列侯로 삼았다.注+〈“봉동승등십삼인 위열후封董承等十三人 爲列侯”는〉 원굉袁宏의 ≪후한기後漢紀≫ 권29 〈효헌황제기孝獻皇帝紀〉에 “위장군 동승衛將軍 董承, 보국장군 복완輔國將軍 伏完, 시중 정충侍中 丁冲충집种輯, 상서복야 종요尙書僕射 鍾繇, 상서 곽포尙書 郭浦, 어사중승 동분御史中丞 董芬, 팽성상 유애彭城相 劉艾, 좌풍익 한빈左馮翊 韓斌, 동군태수 양중東郡太守 楊衆, 의랑 나소議郞 羅邵복덕伏德조유趙蕤하여 열후列侯로 삼았다.” 하였다.
조조曹操가 황제를 허현許縣으로 옮기고 스스로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무평후武平侯해졌다.
조조曹操동소董昭를 데려다가 계책을 물으니, 동소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이곳(낙양洛陽)에 있는 장수들이 사람마다 각자 다른 속셈을 가지고 있으니, 지금 낙양에 머무르며 조정을 바로잡아 돕는 것은 사세事勢가 이롭지 못합니다. 오직 거가車駕를 옮겨 허현許縣으로 거둥함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조정朝廷(천자天子)이 파천播遷하였다가 이제 막 옛 경사京師로 돌아와서 모든 사람들이 안정되기를 학수고대하는데注+유리流離이고 옮김이며, 전추顚墜(실추시킴)이고 달아남이다. (발꿈치)는 거지去智와 같으니, “기망跂望”은 발꿈치를 들고서 바라보는 것이다., 지금 다시 거가車駕를 옮기면 사람들의 마음에 불만스러울 것입니다.
무릇 비상非常한 일을 행하여야 비상非常공업功業을 세울 수 있으니,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이로움이 많은 것을 헤아려서 결행하십시오.”注+〈“산기다자算其多者”는〉 무릇 일을 거행함에 이로움이 있고 또한 해로움이 있으니, 오직 이로움이 많고 해로움이 적은 것을 헤아려서 결행하는 것이다. 조조가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본뜻이다.” 하고는
마침내 거가車駕를 받들어 동쪽으로 옮겨서 스스로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무평후武平侯해지고注+무평현武平縣진국陳國에 속하였다. 이는 조조曹操신무神武로써 화란禍亂을 평정한 뜻을 취한 것이다. 처음으로 허현許縣종묘宗廟사직社稷을 세우니, 이로부터 조정의 정사政事조씨曹氏에게 돌아가고 천자는 빈자리만 지킬 뿐이었다.
손책孫策회계會稽를 점령하니, 회계태수 왕랑會稽太守 王朗이 항복하였다.
손책孫策이 군대를 이끌고 절강浙江을 건너가니, 회계會稽공조 우번功曹 虞翻태수 왕랑太守 王朗을 설득하기를 “손책이 용병用兵을 잘하니 피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으나, 왕랑이 이를 따르지 않고 군대를 내어 고릉固陵에서 손책을 막았다.注+수경주水經注≫에 “절강浙江이 동쪽으로 고릉성固陵城의 북쪽을 지나간다. 옛적에 범려范蠡절강浙江 가에 을 쌓고서 ‘견고하게 지킬 수 있다.’ 하였으니, 이 때문에 이름을 고릉固陵이라 하였다. 절강浙江이 또 동쪽으로 사당柤塘(자당)을 지나가니, 이를 일러 사독柤瀆이라 한다.” 하였다.
손책이 자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니, 손책의 숙부 손정孫靜이 다음과 같이 손책을 설득하였다. “왕랑이 지형의 험조險阻함을 믿고 을 의지해 수비하니, 갑작스럽게 함락시키기 어렵다.
사독査瀆(자독)이 여기에서 남쪽으로 수십 리 지점에 있으니, 마땅히 저곳을 따라 나가서 그 안을 점거해야 한다.注+(갑자기)은 로 읽는다. 이렇게 한다면 이것이 병법兵法에 이른바 라는 것이다.”
손책이 이를 따라서 밤에 횃불을 많이 들어 올려 의병疑兵을 만들고, 군대를 나누어 자독의 길을 따라 나가서 고천둔高遷屯을 습격하였다.注+삼국지三國志51 〈오서 종실전吳書 宗室傳〉에 대한 배송지裴松之에 “살펴보건대, 지금 영흥현永興縣고천교高遷橋가 있다.” 하였다.
왕랑이 크게 놀라 주흔周昕(주흔)을 보내어 맞아 싸우게 하였는데, 손책이 격파하여 참살하였다. 왕랑이 달아나자 손책이 추격하여 대파하니, 왕랑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이에 손책이 스스로 회계태수會稽太守를 겸하고, 다시 우번을 임명하여 공조功曹로 삼아 교우交友로써 대우하였다.
손책孫策유렵遊獵을 좋아하니, 우번虞翻이 간하기를 “현명한 태수太守께서 가볍게 나가 미복微服 차림으로 출행出行하기를 좋아하시니, 수종하는 관원들이 차비할 겨를이 없고 이졸吏卒들이 항상 괴로워하고 있습니다.注+은 차비함이다.
백룡白龍이 물고기의 옷을 입었다가 어부 예저漁夫 豫且(예저)에게 곤욕을 당했으니, 다소 유의留意하시길 바랍니다.”注+칠여七余이니, 예저豫且는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설원說苑9 〈정간正諫〉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나라 왕이 〈미복微服 차림으로〉 백성과 어울려 술을 마시려 하자, 오자서伍子胥가 간하기를, ‘이는 불가합니다. 옛적에 백룡白龍청령淸泠의 연못에 내려와 물고기로 변했는데 어부 예차豫且가 작살로 그 눈을 쏘아 맞추었습니다. 백룡이 하늘로 올라가서 천제天帝에게 호소하자, 천제가 이르기를 「이때를 당하여 너는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느냐?」 하니, 백룡이 대답하기를 「저는 청령의 연못에 내려와 물고기로 변신해 있었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천제가 말하기를 「물고기는 본디 사람들이 작살로 쏘아 잡는 것이다. 예저가 무슨 죄가 있는가.」 하였습니다. 저 백룡은 천제가 귀하게 기르는 동물이고 예저는 나라의 미천한 어부입니다. 백룡이 물고기로 변신하지 않았더라면 예저가 작살로 쏘아 맞추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왕께서 만승萬乘의 지위를 버리고 포의布衣의 선비와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려 하시니, 신은 예저의 작살을 맞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왕이 이에 중지하였다.” 하였다. 손책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하였으나 이를 고치지 못하였다.
】 겨울 10월에 조조曹操양봉楊奉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거가車駕가 동쪽으로 옮겨갈 적에 양봉楊奉양현梁縣에서 와서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조조曹操가 양봉을 정벌하자, 양봉이 남쪽으로 달아나 원술袁術에게 의탁하였다.
원소袁紹태위太尉로 삼고, 조조曹操가 스스로 사공司空이 되었다.
】 황제가 원소袁紹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힐책하기를 “땅이 넓고 병력이 많은데 근왕勤王하는 군대가 출동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다만 마음대로 서로 토벌하였을 뿐이다.”注+근왕勤王(천자天子)을 경사京師로 들여보내는 일에 진력盡力하는 것이다. “천상토벌擅相討伐”은 원소袁紹공손찬公孫瓚과 서로 공격한 것을 이른다. 하자, 원소가 상서上書하여 해명하고 하소연하였다.
이에 원소를 태위太尉로 삼았는데, 원소는 자신의 반열班列조조曹操의 아래에 있음을 부끄럽게 여겨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조조가 두려워하여 대장군大將軍을 원소에게 양보할 것을 청하고 스스로 사공司空이 되어서 거기장군車騎將軍의 일을 대행代行하였다.
조조曹操순욱荀彧시중 상서령侍中 尙書令으로 삼고 순유荀攸군사軍師로 삼고 곽가郭嘉좨주祭酒로 삼았다.
荀攸荀攸
조조曹操순욱荀彧시중 수상서령侍中 守尙書令으로 삼고 훌륭한 책모策謀를 낼 수 있는 선비에 대해 묻자, 순욱이 자기의 종자 순유從子 荀攸영천潁川 사람 곽가郭嘉를 천거하였다.
조조가 순유를 불러서 그와 함께 이야기하고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공달公達(순유荀攸)은 비범한 사람이다.注+공달公達순유荀攸이다. 내가 그와 함께 일을 계획하게 되었으니, 천하의 일은 응당 어찌 근심하겠는가.” 하고 그를 군사軍師로 삼았다.
】 처음에 곽가郭嘉원소袁紹를 찾아가 만나보자 원소가 매우 공경하여 예우하였다. 곽가가 수십 일 머문 뒤에 신평辛評곽도郭圖에게 이르기를 “원공袁公은 그저 주공周公이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었던 것만 본받으려고 할 뿐 사람을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하며,
일이 번잡하고 다단하나 요점이 부족하고 계책을 좋아하나 결단함이 없으니, 그와 함께 천하의 대난大難을 구제하여 패왕霸王을 정하고자 한다면 어려운 일이다.注+는 예로써 낮춤이다. “다단多端”은 일의 단서가 많음을 말하고, “과요寡要”는 지극한 요점을 얻음이 적은 것이다. “대난大難”의 (어려움, 난리)은 거성去聲이다. 나는 장차 다시 떠나가서 주인을 찾을 것이니, 그대들은 어찌하여 떠나가지 않는가.”注+(바꾸다)은 공형工衡이다. 하였다.
두 사람이 깨닫지 못하자, 곽가가 마침내 떠나갔다. 조조曹操가 곽가를 불러 보아 그와 함께 천하의 일을 논하고서 기뻐하여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대업大業을 이루게 할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다.” 하였는데,
곽가가 밖으로 나오자 그 역시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분이 진짜 나의 주인이다.” 하였다. 조조가 표문表文을 올려서 곽가를 사공군제주司空軍祭酒로 삼았다.注+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권14 〈위서 곽가전魏書 郭嘉傳〉에는 “사공군제주司空軍祭酒”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자가 빠져 있다.
공융孔融장작대장將作大匠으로 삼았다.
북해태수 공융北海太守 孔融이 천하의 화란禍亂을 평정할 뜻을 두었으나 재주는 부족한데 포부만 커서 끝내 을 이룬 바가 없었다.注+(병란)은 거성去聲이다. 은 마침내이고 끝내이다. 그의 고상한 담론과 청아한 가르침은 사람들이 완미玩味하여 전송傳誦할 만하였으나 일을 논하고 실정을 고찰하면 모두 실행되기가 어려웠다.
다만 그물을 치는 데에만 능할 뿐 그물눈은 매우 엉성하고注+척격陟格이니, 벌림이고 엶이다., 잠시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는 있었지만 오랜 시일이 지나면 사람들 또한 다시는 그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으며, 임용한 자들이 대부분 경박하며 잔재주만 부리는 사람들이었다.注+(가볍다)은 허정墟正이다.
공융이 명유 정현名儒 鄭玄을 높여 섬김에 있어서는 자손子孫를 행하였으며 그가 사는 고을 이름을 정공향鄭公鄕이라고 바꾸었다.
그러나 청아하고 준수한 선비 좌승조左承祖유의손劉義遜 등에 대해서는 모두 좌석座席만 갖출 뿐 그들과 더불어 정사政事를 논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들은 백성들이 우러러 바라는 사람이니, 이들을 잃을 수 없다.” 하였다.
당시에 원소袁紹조조曹操공손찬公孫瓚의 세력이 머리와 꼬리로 서로 연결하였는데, 공융孔融고립孤立되어 그들과 왕래하지 못하였다. 좌승조가 공융에게 권하여 스스로 강국强國에 의탁하도록 하였는데, 공융이 이를 따르지 않고 그를 죽이자 유의손이 공융을 저버리고 떠나갔다.
청주자사 원담靑州刺史 袁譚공융孔融을 공격하여 전투가 봄부터 여름까지 이어졌는데, 전사戰士는 수백 명만 남았고 유시流矢가 사방에서 날아들었지만 공융은 여전히 안석案席에 기대어 책을 읽고 태연자약하게 담소하였다.
그러다가 이 함락되자 비로소 동산東山으로 달아났다.注+거성去聲이니, 기댐이다. 동산東山도창현都昌縣동산東山이다. 도창현都昌縣북해군北海郡에 속하였다. 조조曹操는 공융과 오랜 친분이 있었으므로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여 장작대장將作大匠으로 삼았다.
원담袁譚은 공융을 격파한 뒤에 위엄과 은혜가 크게 드러났는데, 그 뒤에 소인小人들을 신임하고 자기 마음대로 방종하여 사치하고 음탕하니, 성망聲望이 마침내 쇠락하였다.
】 백성을 모집하여 허주許州(허현許縣, 허창許昌) 일대에서 둔전屯田을 경작하게 하고 각 주군州郡에 모두 전관田官을 설치하였다.
중평中平 이래로 백성들이 농업을 포기하니注+중평中平영제靈帝연호年號이다., 여러 군대가 함께 일어남에 대부분 양곡糧穀이 부족하여 굶주리면 노략질하고 배부르면 먹고 남은 것을 버리니, 와해되고 유리하여 적이 없는데도 스스로 멸망하는 자를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注+와해瓦解는 기와 조각들이 흩어지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원소袁紹의 군사들은 〈먹을 것이 없어〉 뽕나무 열매(오디)를 따서 먹었고 원술袁術포라蒲蠃(소라)를 채취해 먹었다.注+은 뽕나무 열매(오디)이다. 노과盧戈이니, 방합蚌蛤(조개)의 종류이다. 조지棗祗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청하자,
조조曹操가 그의 말을 따라 조지를 둔전도위屯田都尉로 삼고 임준任峻전농중랑장典農中郞將으로 삼아서 백성들을 모집하여 허주許州 일대에서 둔전을 경작하게 하여 곡식 백만 을 얻었다.注+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에 “조공曹公전농중랑장典農中郞將을 설치하였으니, 이천석二千石이다.” 하였다. 허주許州를 이른다. 허하許下낙하洛下라 하고, 겹하郟下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따위이다.
이에 주군州郡에는 으레 전관田官(농사를 감독하는 관원)을 두어 소재지마다 창름倉廩이 모두 가득하였다. 이 때문에 조조가 사방四方을 정벌할 적에 양식을 운반하는 노고가 없었다.
여포呂布가 다시 유비劉備를 공격하자 유비劉備가 달아나 허주許州로 돌아갔다. 조령詔令을 내려 유비를 예주목豫州牧으로 삼아, 그를 동쪽으로 보내어 패현沛縣에 주둔하게 하였다.
원술袁術여포呂布를 두려워하여 마침내 아들을 위하여 구혼求婚(청혼請婚)하자, 여포가 허락하였다. 원술이 장수 기령紀靈 등을 보내어 유비劉備를 공격하자 유비가 여포에게 구원을 청하였는데,
여포가 말하기를 “원술이 만약 유비를 격파하면 북쪽으로 태산泰山의 장수들과 연합하여 내가 원술의 포위 속에 있게 될 것이니, 유비를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注+태산泰山제장諸將장패臧霸, 손관孫觀, 오돈吳敦, 윤례尹禮의 무리를 이른다. 하고 급히 달려가서 유비와 기령이 대치하는 곳으로 갔다.
여포가 기령 등에게 이르기를 “현덕玄德(유비)은 나 여포의 아우이다.注+현덕玄德유비劉備이다. 그대들에게 곤란을 당하기 때문에 내가 와서 구원하는 것이다.” 하니, 기령 등이 마침내 전투를 멈추었다.
유비劉備가 군대를 수합하여 만여 명을 얻으니, 여포呂布가 이를 미워하여 유비를 공격하였다. 유비가 패주하여 조조曹操에게 귀의하자, 조조가 유비를 후하게 대우하고 예주목豫州牧으로 삼았다.
어떤 이가 조조에게 이르기를 “유비는 영웅英雄의 뜻을 품고 있으니, 지금 조속히 도모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조조가 이것을 곽가郭嘉에게 물으니,
곽가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께서 의병義兵을 일으키심은 백성을 위하여 포학한 자를 제거하려는 것인데, 정성을 미루고 신의에 의지해서 준걸俊傑들을 부르더라도 오히려 이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注+(의지함)은 상성上聲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양공襄公 8년(B.C.565) 조에 “의지할 것[]은 성신誠信만 한 것이 없다.” 하였는데, 임요수林堯叟(임지기林之奇)의 에 “사람이 의지할 만한 것으로는 성신誠信만 한 것이 없다.” 하였다.
지금 유비는 영웅이란 명성이 있습니다. 곤궁함 때문에 자신()에게 귀의하였는데 도리어 그를 해치면 이는 어진 이를 해쳤다는 이름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지혜로운 선비들이 장차 스스로 의심하여 마음을 돌려서 다른 주인을 찾을 것이니,
이 누구와 더불어 천하를 평정하겠습니까. 근심거리가 되는 한 사람을 제거하려다가 사해四海기망期望을 막는 것은 안위安危의 기틀에 관계되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맞다.” 하고 마침내 유비에게 군대를 더 보태 주고 양식을 공급해서 동쪽으로 패현沛縣에 이르러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서 여포를 도모하게 하였다.
】 처음에 유비劉備예주豫州에 있으면서 원환袁渙무재茂才로 천거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원환이 여포呂布에게 억류되었다. 여포가 원환에게 유비를 꾸짖고 모욕하는 편지를 쓰게 하였으나 원환은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여포가 크게 노하여 무기로 협박하자, 원환이 안색을 조금도 변치 않고 웃으며 다음과 같이 응대하였다. “저 원환은 오직 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욕되게(부끄러워하게) 할 수 있다고 들었고, 욕설로써 〈부끄러워하게〉 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저(유비)가 진실로 군자君子라면 또한 장군의 욕하는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요, 저가 진실로 소인小人이라면 장차 다시 편지로 장군의 뜻을 욕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모욕당함이 여기(장군)에 있고 저기(유비)에 있지 않습니다.注+〈“사피고군자야使彼固君子邪……장부장군지의將復將軍之意”는〉 여포呂布가 편지로 유비劉備에게 욕할 경우 유비가 군자君子라면 진실로 〈여포呂布가〉 욕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고, 유비가 소인小人이라면 장차 다시 편지로 여포에게 욕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또 저 원환이 지난날에 유장군劉將軍을 섬긴 것은 오늘날 장군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만일 하루아침에 이곳을 떠나가서 다시 장군을 욕한다면 옳겠습니까.” 여포가 부끄러워하여 중지하였다.
장제張濟양성穰城을 공격하였다가 패하여 죽으니, 족자 장수族子 張繡장제張濟의 군대를 거느리고 형주荊州로 귀의하였다.
장제張濟관중關中에서 군대를 이끌고 형주荊州로 들어와 양성穰城을 공격하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注+양현穰縣남양군南陽郡에 속하였다. 형주荊州관속官屬들이 모두 축하하였는데,
유표劉表가 말하기를 “장제가 곤궁하기 때문에 왔는데 주인主人인 내가 무례無禮하여 서로 싸우는 지경에 이르렀으니注+무례無禮는 사람을 보내어 근교近郊에서 위로慰勞하고 관사館舍를 제공하는 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나(형주목荊州牧)의 뜻이 아니다. 나는 조문만 받고 하례는 받지 않겠다.”注+당시에 유표劉表형주목荊州牧으로 있었다. 하고 사람을 시켜 장제의 군대를 받아들이게 하니,
장제의 군사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여 모두 진심으로 유표劉表에게 귀부歸附하였다. 장제의 족자 장수族子 張繡가 그 군대를 대신하여 거느려 완현宛縣에 주둔하였다.
】 처음에 황제가 장안長安을 나온 뒤에 가후賈詡단외段煨(단외)에게 가서 의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장수張繡에게 귀의하였다. 가후가 장수를 설득하여 유표劉表에게 귀의하게 하니, 장수가 이를 따랐다.
가후가 유표를 찾아가 만나보니, 유표가 빈객賓客로써 대접하였다. 가후가 말하기를 “유표는 천하가 태평할 때에 삼공三公이 될 만한 재주를 지닌 자이다. 그러나 사세事勢의 변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의심이 많고 결단력이 없으니, 아무 일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유표劉表학교學校를 세우고 아악雅樂을 만들었다.
유표劉表가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를 우대하여 조용히 스스로 보전하니, 형주荊州의 경내가 평안하여 아무런 일이 없었고 학사學士로서 귀의하는 자가 천 명으로 헤아려졌다.
유표가 이에 학교學校를 일으켜 세워 경술經術(경학經學)을 강명講明하고, 옛날에 아악랑雅樂郞이었던 두기杜夔에게 명하여 아악雅樂을 만들게 하여 뜰에서 연주하는 것을 보려고 하였다.注+나라 음악은 네 가지 등급이 있으니, 첫 번째는 태여악太予樂이니 교묘郊廟상릉上陵殿에서 음식을 올릴 때 연주하는 음악을 담당하고, 두 번째는 주송周頌아악雅樂이니 벽옹辟雍향사饗射사직社稷에 사용하는 음악을 담당하고, 세 번째는 황문 고취黃門 鼓吹이니 천자天子가 신하들에게 연악宴樂을 베풀 때에 사용하고, 네 번째는 이니 군악軍樂이다.
그러자 두기杜夔가 말하기를 “지금 장군은 호칭이 천자天子가 아니니, 음악을 합주하여 뜰에서 연주하는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닙니까.” 하니, 유표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두습杜襲번흠繁欽(파흠)이 형주荊州에서 난을 피하였는데, 유표가 모두 빈객賓客로써 대우하였다.注+이니, 번흠繁欽은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파흠이 유표에게 자주 기이한 재간을 보이자注+이다. (보이다)은 현편賢遍이니, 아래의 “현능見能”도 똑같다. “삭현기數見奇”는 자주 기이한 재간을 보여줌을 이른다.,
두습杜襲이 그를 깨우쳐 말하기를 “내가 그대와 함께 형주에 온 것은 그저 몸을 보전하여 때를 기다리고자 한 것일 뿐이다. 어찌 형주목 유표가 마땅히 난을 평정할 주인이라고 여겨서 이 장자長者로 하여금 그에게 몸을 맡기라고 권하는가.
그대가 만약 유표에게 재능을 보이는 것을 그치지 않으면 나의 무리가 아니니, 나는 그대와 절교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파흠이 감개感慨하여 말하기를 “공경히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예형禰衡(예형)이 젊었을 때부터 재주가 있고 구변이 뛰어났으나 기개를 숭상하여 강하고 오만하였다.注+이다. 공융孔融조조曹操에게 그를 천거하였는데 예형이 조조를 꾸짖고 욕하니注+조조曹操예형禰衡을 불러서 고리鼓吏(북 치는 관리)로 삼았기 때문에 예형에게 꾸짖음과 욕을 받은 것이다.,
조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촌놈 예형을 내가 죽이는 것은 참새와 쥐를 죽이는 것처럼 쉬울 뿐이다. 다만 이 사람이 평소에 헛된 명성이 있으니, 〈그를 죽이면〉 원근에서 장차 나더러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유표劉表에게 보내었다.
예형은 유표의 훌륭함을 극구 칭찬하여 마지않았으나 유표의 좌우左右를 비난하고 폄하하기를 좋아하니, 유표의 좌우左右가 예형을 참소하였다.
이에 유표가 노하여 강하태수 황조江夏太守 黄祖가 성질이 급하다고 하여 예형을 황조에게 보내었는데, 뒤에 예형이 사람들 앞에서 황조를 욕하니, 황조가 예형을 죽였다.


역주
역주1 劉備與袁術 戰於盱眙 : “袁術이 劉備를 공격한 것은 徐州를 쟁탈한 것인데 이를 쓰지 않고, ‘유비가 원술과 싸웠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원술이 徐州를 두고 쟁탈한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徐州를 두고 쟁탈한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유비가 徐州牧을 겸한 것을 유비에게 허물하지 않은 것이니, ≪資治通鑑綱目≫은 유비에 대해 용서(양해)하는 말이 많다.[袁術攻備 爭徐州也 不書 書備與術戰 何 不予術之爭也 不予其爭者 不以領徐州累備也 綱目於備多恕辭]” ≪書法≫
역주2 동쪽으로 가자 : 원문의 “東下”는 ‘동쪽으로 내려간다’라는 말로 동쪽으로 가는 것을 뜻한다. 중국의 지형은 서쪽과 북쪽이 높고 동쪽과 남쪽이 낮으므로 동쪽으로 가는 것을 ‘동쪽으로 내려간다’라고 표현하는바, 서쪽으로 가는 것을 ‘서쪽으로 올라간다[西上]’라고 하는 것과 상대되는 표현이다.
역주3 曹操入朝……錄尙書事 : “이때에 董承이 은밀하게 曹操를 부르니, 조조가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京師로 왔다. 조조가 경사에 이른 뒤에 韓暹과 張楊의 罪를 아뢰자, 황제가 〈한섬과 장양이 거가를 보좌한 공이 있다고 하여〉 詔令을 내려 죄를 묻지 말도록 하고 조조를 司隷校尉로 삼았으니, 그렇다면 이는 詔命이다. 그런데 ‘詔以’라고 쓰지 않고 ‘自爲’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군주를 협박함을 미워한 것이다.[於是董承潛召曹操 操遂將兵詣京師 旣至 罪狀韓張 帝詔勿問 而以操爲司隷校尉則詔命矣 不書詔以 書自爲 何 惡(오)要君也]” ≪書法≫ “≪資治通鑑綱目≫은 國政을 專斷한 신하의 爵位을 올림(승진)에 있어 반드시 ‘自爲’라고 썼다. 이때에 曹操가 막 入朝하여 아직 군주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는데, 書法이 대번에 이와 같음은 어째서인가. 무릇 賞을 내려 권면하고 刑罰을 가하여 두렵게 하는 것을 ‘君’이라 하니, 복을 내리고 위엄을 내리는 것은 오직 임금만이 할 수 있다. 조조가 이때에 와서는 죄가 있는 자를 주벌하고 功이 있는 자에게 賞을 주며 절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자를 撫恤하고 董承 등 열세 사람을 封하여 列侯로 삼았으니, 이는 모두 천자의 명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모두 조조가 스스로 한 것인가. 더구나 조조가 군대를 보유하고 대궐로 향하여 조정을 위협하고 제재해서 천자가 그의 손안에 있었으니, 그렇다면 ‘스스로 司隷校尉가 되었다.’라고 쓴 것이 어찌 지나친 것이겠는가. 살펴보건대 荀彧이 도모한 바는, ≪春秋≫의 마음속에 품은 생각(동기)을 주벌하는 法으로 따져보고, ≪자치통감강목≫에서 쓴 것을 참고해보면 더욱 미덥다.[綱目凡專國之臣 於其進爵 則必以自爲書之 是時操方入朝 未有無君之心 而書法遽已如此 何哉 夫慶賞刑威曰君 作福作威惟辟 操之此行 誅有罪 賞有功 矜死節 封董承等十三人爲列侯 是皆出於天子之命耶 抑皆出於操之所自爲耶 況操擁兵向闕 脅制朝廷 天子在其掌握 則以自爲司隷校尉書之 夫豈過哉 觀之 荀彧之所謀 槪以春秋誅心之法 參諸綱目之所書而益信]” ≪發明≫
역주4 漢나라 高祖가……입자 : 義帝는 戰國 시대 楚나라 懷王의 손자 熊心으로, 楚 懷王으로도 불린다. 秦나라가 楚나라를 멸망시키자, 웅심은 양치기로 숨어 지내다가 秦 二世 2년(B.C.208)에 項梁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는데, 전국 시대의 회왕과 구별하기 위해 懷王心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漢나라 2년(B.C.205) 겨울 10월에 西楚霸王 項羽가 은밀히 九江王 黥布 등에게 義帝를 공격하게 하여 郴縣(침현)에서 시해당하였다. 이때 漢王 劉邦이 남쪽으로 平陰津을 건너 洛陽의 新城에 이르렀는데, 三老인 董公이 길을 가로막고 유방에게 義帝를 위하여 素服을 입고 제후들에게 고하여 항우를 토벌하도록 설득하였다. 이에 유방이 의제를 위하여 喪을 발표하고 대성통곡한 다음 제후들에게 고하기를 “천하가 함께 의제를 세워서 北面하여 섬겼는데 이제 항우가 의제를 추방하여 江南에서 시해하였으니, 이는 대역무도한 죄이다. 寡人이 친히 의제를 위해 喪을 발표하여 군사들에게 모두 흰옷을 입히고 關中의 병력을 총동원하고 三河의 군사를 거두어 남쪽으로 江漢에 배를 띄워 내려가서 여러 侯와 王을 따라 초나라의 의제를 시해한 자를 공격하려 한다.[天下共立義帝 北面事之 今項羽放殺義帝於江南 大逆無道 寡人親爲發喪 兵皆縞素 悉發關中兵 收三河士 南浮江漢以下 願從諸侯王 擊楚之殺義帝者]”라고 하였다. 이에 제후들이 크게 호응하여 유방은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는 계기가 되었다.(≪史記≫ 권8 〈高祖本紀〉, ≪漢書≫ 권1上 〈高帝紀〉)
역주5 (原)[冲] : 저본에는 ‘原’으로 되어 있으나, ≪後漢紀校注≫에 의거하여 ‘冲’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輔)[輯] : 저본에는 ‘輔’로 되어 있으나, ≪後漢紀校注≫에 의거하여 ‘輯’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 (溥)[浦] : 저본에는 ‘溥’로 되어 있으나, ≪後漢紀校注≫에 의거하여 ‘浦’로 바로잡았다.
역주8 [左] : 저본에는 누락되었으나, ≪後漢紀校注≫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9 曹操遷帝于許 : “‘張濟가 황제를 맞이하여 동쪽으로 돌아왔다.’라고 쓴 것으로부터 1년이 지난 뒤에 ‘황제가 洛陽으로 돌아왔다.’라고 썼는데, 이윽고 달을 바꾸지 않고서 다시 ‘황제를 許縣으로 옮겼다.’라고 썼으니, 曹操의 죄를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동탁의 무리인〉 郭汜와 같이 〈‘自爲’라고〉 쓴 것이다.[自書張濟迎帝東歸 期年而後書帝還雒陽 曾未改月 而復書遷帝于許 操之罪 可勝誅哉 故書之如郭汜]” ≪書法≫ “≪春秋≫ 閔公 2년(B.C.660)에 ‘齊人이 陽나라의 주민을 옮기고서 그 땅을 점유하였다.’라고 썼으니, 옮겼다는 것은 강제로 옮긴 것이다. ≪春秋≫ 僖公 元年(B.C.659)에 ‘邢나라 사람들이 夷儀로 옮겨 갔다.’라고 썼으니, 옮겨 갔다는 것은 스스로 옮겨 간 것이다. 建安 初元(초기)의 일에 대해 이전의 史書들은 모두 許縣으로 遷都한 것으로 문장을 썼다. 과연 말한 바와 같다면 天子가 스스로 許縣으로 遷都한 것이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그러나 ≪資治通鑑綱目≫은 이에 대해 도리어 크게 옳지 않다고 여겼으니, 어째서인가. 董卓이 亂을 처음 일으킨 이후로 李傕과 郭汜가 서로 공격하여 天子가 가시덤불 속에서 분주하였는데, 曹操에게 勤王한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今年에 車駕가 洛陽으로 돌아오자 조조가 처음으로 入朝하였으니, 그의 계책은 진실로 天子를 끼고서 諸侯를 호령하고자 한 것일 뿐이요, 애당초 참으로 帝室을 扶翼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무릇 洛邑은 宗廟가 있는 곳이니, 불행하게도 殘毁되었으면 곧바로 수리하여 복구하고 다스려서 이 백성들로 하여금 漢나라 官吏의 威儀의 성대함을 다시 보게 했어야 한다. 〈조조가 이렇게 하였으면〉 거의 조금이나마 臣子가 君父를 바로잡는 책임에 부응할 수 있었을 터인데 이제 도리어 옛 거처와 宮室을 버리고 車駕를 옮겨 許縣에 거둥하게 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 ‘조조가 황제를 許縣으로 옮겼다.’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그 내용이 급박하여 제멋대로 한 뜻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황제를 옮겼다.’라고 하였다면, 옮긴 것은 황제의 一身에 그쳤을 뿐 宗廟와 社稷은 모두 버리고 돌아보지 않은 것이니, 漢나라 황제는 이에 이르러 또한 寄生하는 군주일 뿐인 것이다. 옛적에 高祖가 基業을 처음으로 열자 ≪資治通鑑綱目≫은 ‘황제가 서쪽으로 洛陽에 도읍하였다.’라고 쓰고, 이어서 ‘황제가 서쪽으로 關中에 도읍하였다.’라고 썼으며, 光武帝가 中興하자 ‘朱鮪가 洛陽을 가지고 항복하니 황제가 들어가 도읍하였다.’라고 썼으니, 조조가 황제를 許縣으로 옮겼다고 하여 황제가 스스로 옮겼다고 글을 쓰지 않은 것과 어찌 天壤之差일 뿐이겠는가. 아, 만약 조조가 강제로 옮기지 않고 漢나라 황제가 오히려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마땅히 ‘조조가 황제를 받들어서 許縣으로 천도하였다.’라고 썼을 것이니, 아! 슬프도다.[春秋閔二年 書齊人遷陽 遷之者 彊遷之也 僖元年書(刑)[邢]遷于夷儀 遷者 自遷也 建安初元之事 前史皆以遷都許爲文 果如所言 則天子自遷都許 夫復何說 而綱目於此 乃大不然 何哉 蓋自董卓肇亂 傕汜交攻 天子奔走荊棘間 未聞曹操有勤王之擧 今年車駕還洛陽 操始入朝 其謀固欲挾天子令諸侯而已 初非真有翊扶帝室之心也 夫洛邑 宗廟所在 不幸殘毁 正當修復經理 使斯民復見漢官威儀之盛 庶可少塞臣子救君父之責 今乃棄其故居宮室 移駕至許 何哉 故綱目書曹操遷帝于許 則其詞急而有專意 況謂之遷帝 則所遷者止於帝之一身 而宗廟社稷 皆棄不顧 則漢帝至是 亦寄生之君耳 昔高祖開基 綱目書帝西都洛陽 繼書帝西都關中 至光武中興 則書朱鮪以洛陽降 帝入都之 其與遷帝于許而不以自遷爲文者 相去何止霄壌 嗚呼 使曹操不出於强遷 而漢帝尙能爲有無 則當書操奉帝遷都于許矣 吁]” ≪發明≫
역주10 孫策 取會稽 : “앞에서 ‘그의 장수(朱治)를 보내어 吳郡을 점거하였다.’라고 썼는데, 여기에서 ‘會稽를 점령하였다.’라고 쓰고, 이어서 또 ‘廬江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다.’라고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孫氏(孫策)에 대해 이로부터 취할 바가 없는 것이다.[前書遣其將據吳郡矣 於是書取會稽 繼又書襲廬江取之 綱目於孫氏 自是無取焉矣]” ≪書法≫
역주11 적이……출동한다 : 이 말은 ≪孫子≫ 〈始計〉에 보인다.
역주12 (相)[柤] : 저본에는 ‘相’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柤’로 바로잡았다.
역주13 (土)[士] : 저본에는 ‘土’로 되어 있으나, ≪說苑≫에 의거하여 ‘士’로 바로잡았다.
역주14 以袁紹爲太尉 曹操自爲司空 : “哀帝가 三公의 分職을 바로잡아 董賢을 높인 이후로 太尉와 大司馬가 司空의 위에 자리하고 大將軍의 지위가 또 이보다 더 높아졌다. 曹操가 이미 스스로 大將軍이 되었는데 이때에 袁紹가 太尉를 받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여 大將軍을 그에게 양보하고 스스로 司空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사양한 것인데 어찌하여 또한 폄하하여 ‘自’라고 썼는가. ≪資治通鑑綱目≫의 書法은 진실로 上(황제)의 뜻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한결같이 ‘自’라고 썼다.[自哀帝正三公分職以尊董賢 而太尉大司馬位司空上 大將軍位又尊焉 操旣自爲大將軍矣 於是 以紹不受太尉也懼 以大將軍讓之而自爲司空 則讓也 曷爲亦貶書自 綱目之法 苟不出於上意 一以自書之]” ≪書法≫ “袁紹와 曹操는 一般인 사람이다. 그러나 원소가 太尉가 된 것에 대해서 ‘以’자를 쓰고 曹操가 司空이 된 것에 대해서 ‘自’자를 쓴 것은 나라의 政事가 曹操에게서 나오고 袁紹에게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袁曹一體之人 然紹爲太尉則書曰以 操爲司空則書曰自者 國政出於曹而不出於袁故也]” ≪發明≫
역주15 曹操以荀彧爲侍中 尙書令 : “侍中과 尙書令은 司空의 소속이 아닌데 어찌하여 ‘曹操가 荀彧을 侍中 尙書令으로 삼았다.’라고 썼는가. 순욱은 조조의 謀主이다. 비록 漢나라의 신하이지만 다만 조조의 私人일 뿐이니, 특별히 조조를 써서 서로 죄준 것이다.[侍中尙書令 非司空屬也 曷爲書曹操以爲侍中尙書令 彧操謀主也 雖爲漢臣 直操之私人而已矣 特書曹操以交罪之]” ≪書法≫
역주16 (頴)[潁] : 저본에는 ‘頴’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潁’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7 以孔融爲將作大匠 : “다시 ‘以’자를 쓴 것은 어째서인가. 孔融을 荀彧과 차별한 것이다. 다시 ‘以’자를 쓰지 않으면 공융 또한 曹操의 私人이 되고 만다. 이 때문에 王龔을 梁冀와 차별할 적에 다시 ‘以’자를 썼고(順帝 永和 원년(136)) 공융을 순욱과 차별할 적에 다시 ‘以’자를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은 賢人과 간사한 사람에 대한 구별이 엄격하다.[再書以 何 殊融於彧也 不再書以 則融亦操之私人矣 是故殊王龔於梁冀 則再書以(順帝永和元年) 殊孔融於荀彧 則再書以 綱目賢邪之辨 嚴矣哉]다” ≪書法≫
역주18 募民屯田許下……竝置田官 : “曹操가 이 때문에 霸業을 이룬 것이다. 이 때문에 許州 일대에서 屯田을 경작하게 하면 썼고 芍陂의 屯田을 開墾하면 썼다.[操所以成霸業者也 故屯田許下則書 開芍陂屯田則書]” ≪書法≫ “군대는 식량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식량을 하늘로 삼는다. 이때 여러 군대가 함께 일어남에 대부분 糧穀이 부족하였는데, 오직 曹操가 棗祗의 계책을 써서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功을 이루었다. 이 때문에 ≪資治通鑑綱目≫에서 이를 써서 인정한 것이다.[兵以食爲本 民以食爲天 是時諸軍竝起 率乏糧穀 惟操用棗祗之策 成足食之功 故綱目書此 以予之也]” ≪發明≫
역주19 呂布復攻劉備……詔以爲豫州牧 : “이때에 袁術이 劉備를 공격하자 呂布가 구원하여 원술을 물리쳤는데, 이를 쓰지 않고 ‘다시 유비를 공격하였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여포의 번복함을 미워한 것이다. ‘走’에 대해 ‘歸許’를 쓰고 ‘牧’에 대해 ‘詔以’를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유비에 대해 인정하는 말이 많은데 오직 그의 행위가 바르기 때문일 뿐이다. 史書(≪資治通鑑≫)에는 ‘劉備가 달아나 曹操에게 귀의하자 조조가 후하게 대우하여 豫州牧으로 삼았다.’라고 썼다.[於是 袁術攻備 布救却之 不書 書復攻備 何 惡(오)反覆也 走書歸許 牧書詔以 綱目於備多予辭 惟其正而已矣 史書備走歸操 操厚遇之 以爲豫州牧]” ≪書法≫ “分注(目)에는 呂布가 劉備를 구원한 일을 기재하였는데 ≪資治通鑑綱目≫(綱)에는 여포가 유비를 공격한 것만을 쓴 것은, 여포가 번복을 일삼는 小人이어서 그가 유비를 구원함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分注에서는 유비가 曹操에게 귀의한 것을 기술하였는데 ≪자치통감강목≫에서는 곧바로 ‘許州로 돌아갔다.’라고 쓴 것은, 許州로 돌아감을 말하였으면 天子에게 돌아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分注에서는 조조가 유비를 豫州牧으로 삼았다고 기술하였는데 ≪자치통감강목≫에서는 곧바로 ‘詔令을 내려 유비를 豫州牧으로 삼았다.’라고 쓴 것은, 조령을 말하였으면 명령이 朝廷에서 나왔고 조조가 임용할 수 있는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직 昭烈帝(유비)만이 漢나라를 보존하려는 마음이 있었고 ≪자치통감강목≫에 소열제를 인정한 뜻이 있었기 때문에 그 書法이 이와 같은 것이다. 이로부터 4년 뒤에 ‘詔令을 내려 유비에게 군대를 거느려 袁術을 邀擊하게 하였다.’라고 썼으니, 그 뜻이 또한 이와 같다.[分注載呂布救備之事 而綱目止書布攻備者 布反覆小人 不予其救也 分注述備歸曹操 而綱目乃書歸許者 言歸許則見其歸天子也 分注述操以備爲豫州牧 而綱目乃書詔以爲豫州牧者 言詔則見出於朝廷 而非操所得用也 惟昭烈有存漢之心 綱目有予昭烈之意 故其書法如此 後此四年 書詔備將兵邀袁術 其義亦然]” ≪發明≫
역주20 劉表立學校 作雅樂 : “學校를 세우고 雅樂을 만듦을 쓴 것은 어째서인가. 비판한 것이다. 학교를 세우고 아악을 만든 것에 대해 무엇을 비판한 것인가. 帝室(皇室)이 장차 기울어져 가는데 군대를 출동시켜 나라를 바로잡지 못하고 禮文의 일에 종사하기를 태평성세인 듯하였으니, 時務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이를 만하다. ≪資治通鑑綱目≫에서 학교를 세움을 쓴 것은 모두 칭찬한 것인데, 오직 鴻都門學과 劉表의 學校 및 宋나라의 四學은 비판하는 말이 된다.[書學校雅樂 何 譏也 立學校 作雅樂 則何譏 帝室將傾 不能出兵匡國 而方從事禮文之事 若平世然 可謂不知務矣 綱目書立學 皆美也 唯鴻都門學 劉表學校及宋四學 爲譏辭]” ≪書法≫ “學校를 세우고 雅樂을 만든 것은 훌륭한 일이다. 劉表가 이것을 만든 것을 쓴 것은 또한 인정한 것인가? 아니다. 이때에 權臣이 명령을 擅斷하여 宗國이 위태로웠는데 劉表는 군대가 강하고 영토가 넓은데도 기회를 틈타서 분발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소탕하지 못하고 행하는 바가 마침내 이와 같았으니, 이를 쓴 것은 칭찬한 것이 아니고 바로 勤王에 태만하여 時務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을 비판하고자 한 것일 뿐이다.[立學校 作雅樂 美事也 書劉表作此 亦予之乎 曰 非也 是時權臣擅命 宗國阽危 表兵强地廣 不能乘時奮發 掃除亂略 而所爲乃爾 書非美之 正以譏其緩於勤王 不知時務云耳]” ≪發明≫
역주21 六宗 : 높여서 제사하는 여섯 가지의 神으로 四時와 宴暑, 日(해)과 月(달), 星(별)과 水旱이라 하니, 異說이 분분하다.
역주22 短簫와 鐃歌 : 모두 軍樂인데 短簫는 입으로 부는 악기의 이름이며 鐃歌 역시 騎兵들이 부는 악기이다.

자치통감강목(10) 책은 2022.07.1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