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赭陽의 戍主, 南鄉太守가 서로 이어서 남쪽으로 달아났는데,注+① 湖陽縣은 옛날 蓼國이며 漢나라 때에는 南陽郡에 속하였고, 晉나라와 宋나라 때에는 없앴는데, 齊나라가 여기에 戍를 설치하였다. 舞陰의 戍主 黄瑤起가 北魏에게 붙잡혔다. 魏主(元宏)가 황요기를 王肅에게 내려주니, 왕숙이 살을 저며서 먹었다.注+② 黄瑤起가 王肅의 아버지 王奐을 죽였다.
綱
【綱】 齊主(蕭鸞)가 河東王 蕭鉉 등 10인을 죽였다.
目
【目】 齊主(蕭鸞)가 병이 있기 때문에 ‘자기 가까운 친속이 적고 나약하나 高帝(蕭道成)와 武帝(蕭頤)의 子孫은 오히려 10명의 왕이 있다.’고 하여, 齊主가 그들을 다 제거하려 하여 太尉 陳顯逹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이들이 어찌 마음에 두고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齊主가 또 始安王 蕭遙光에게 물으니, 소요광은 마땅히 차례차례로 제거해야 한다고 하였다.
소요광이 매번 齊主와 함께 사람을 물리치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고서 마친 후에 齊主가 향을 찾아서 피우고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고, 다음 날엔 반드시 죽임을 당한 자가 있었다.
마침 齊主가 병이 심해져서 갑자기 기절하였기 때문에注+① ≪資治通鑑≫에 “마침 齊主의 병이 갑자기 심해져서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살아났다.” 하였다. 소요광이 마침내 河東王 蕭鉉, 南康王 蕭子琳 등 10인을 죽였다. 이에 太祖(蕭道成)ㆍ世祖(蕭頤)와 世宗(蕭長懋)의 여러 아들들이 모두 죽었다.注+② 10인은 河東王 蕭鉉, 臨賀王 蕭子岳, 西陽王 蕭子文, 永陽王 蕭子峻, 南康王 蕭子琳, 衡陽王 蕭子珉, 湘東王 蕭子建, 南郡王 蕭子夏, 桂陽王 蕭昭粲, 巴陵王 蕭昭秀이다. 소현은 太祖의 아들이다. 소자악에서 소자하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世祖의 아들이다. 소소찬ㆍ소소수는 世宗의 아들이다.
소현 등이 이미 죽은 후에 마침내 公卿들을 시켜서 그들의 죄를 상주하여 그들을 죽일 것을 청하게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허락하지 않고 다시 상주한 후에 허락하였다.
가 소자림의 죽음을 통곡하였는데 눈물이 다하니, 이어서 피가 나왔고 직접 殯葬을 살피고 마친 뒤에 떠나갔다.
綱
【綱】 2월에 北魏 사람들이 宛城을 함락시키고, 3월에 齊나라 병사를 鄧城에서 물리쳤다.
目
【目】 北魏 사람들이 宛城의 北城을 빼앗으니, 房伯玉이 얼굴을 앞으로 하고 손을 뒤로 묶고 나와 항복하였다. 3월에 崔慧景이 襄陽에 도착하니, 沔水 북쪽 지역의 5郡이 이미 함락되었다.注+① 5郡은 南陽, 新野, 南鄕, 北襄城과 아울러 西汝南과 北義陽 2郡의 太守를 말한다. 최혜경이 蕭衍과 軍主 劉山陽ㆍ傅法憲 등과 함께 5,000여 명을 거느리고 鄧城으로 진군하였다.注+② 行(항렬)은 去聲이다. 鄧縣은 漢나라 때에는 南陽郡에 속하고, 宋나라 大明 말기에는 襄陽 서쪽 경계를 분할하여 京兆郡으로 삼고 거기에 鄧縣을 소속시켰다. 그 땅은 隋나라의 襄陽郡 安養縣 경계에 있다.
北魏의 수만 기병이 갑자기 도착하자, 齊나라의 諸軍들이 城에 올라가 막아 지킬 적에 당시 제나라 將士들이 새벽밥을 먹고 경무장으로 행군하여 모두 굶주리고 두려운 기색이 있었다.
최혜경이 南門에서 군사를 거두고서 달아나니, 諸軍들이 서로 〈누구를 따라야 할지〉 알지 못하고 서로 이어서 모두 도망하였는데, 劉山陽이 후방을 차단하고 죽을힘을 다하여 싸워서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퇴각하였다.
〈최혜경이 도망가는 중에〉 북위 병사들이 도로 양쪽에서 그들을 쏘아 맞추니, 제나라 士卒들이 도랑에 몸을 던져 죽은 자들이 서로 이어졌다.
유산양이 죽기 살기로 싸워서 北魏 병사들이 마침내 물러나니, 제나라 諸軍들이 모두 襄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魏主(元宏)가 10만 군대를 가지고 樊城을 포위하였는데 曹虎가 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니, 魏主가 떠나서 懸瓠로 갔다.注+③ 沔水 북쪽에 樊城이 있는데, 지난해에 曹虎가 樊城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綱
【綱】 北魏가 齊나라의 義陽을 공격하였는데, 제나라가 북위의 渦陽(과양)을 포위하여 의양을 구원하니, 의양의 포위가 풀렸다. 그러나 〈과양의〉 제나라 군사 또한 무너졌다.
目
【目】 北魏 鎭南將軍 王肅이 義陽을 공격하였는데, 齊나라 裴叔業이 〈북위의〉 渦陽(과양)을 포위하여 〈의양을〉 구원하였다.注+① 渦는 音이 戈이다. 渦陽城은 漢나라 때에 沛郡 山桑縣 동남쪽에 있고, 渦水가 그 남쪽을 경유하는데, 당시에 北魏 南兗州의 治所가 되었다. 북위 南兗州刺史 孟表가 과양을 지키고 있었는데, 양식이 떨어져서 草木의 껍질과 잎을 먹고 있었다.
그러자 魏主(元宏)가 將軍 傅永ㆍ劉藻ㆍ高聰 등과 함께 과양을 구원하자, 배숙업이 進擊하여 크게 격파하여, 수급 수만을 베고 3,000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器械ㆍ雜畜ㆍ財物을 노획한 것이 천이나 만으로 헤아렸다.
왕숙이 다시 군사를 보내서 과양을 구원하기를 청하자, 魏主가 말하기를 “병사를 적게 나누어 주면 적을 제압하기 어렵고 병사를 많이 나누어 주면 禁衛의 병사가 부족하니, 卿이 잘 알아서 도모하시오. 의양을 공격하는 것은 중지해야 할 것 같으면 중지하고 공격해야 할 것 같으면 공격해야 하지만 만약 과양을 잃게 된다면 卿의 과실이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왕숙은 결국 의양의 포위를 풀고 統軍 楊大眼ㆍ奚康生 등과 함께 과양을 구원하였다. 배숙업은 북위 병사들이 많은 것을 보고 밤중에 병사를 이끌고 퇴각하니, 다음 날에 제나라 군사들이 도망하여 무너졌다. 북위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니, 부상당하고 죽은 병사들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綱
【綱】 北魏 中尉 李彪가 파면당하고, 僕射 李沖이 卒하였다.
目
【目】 李彪는 집안이 대대로 한미하여 처음으로 代都에 갔을 때에 李沖이 선비를 좋아한다고 하여 마음을 기울여 이충을 따랐다. 이충이 또한 그의 재주와 학문을 귀중하게 여겨서 예우를 매우 후하게 하고 공적으로 조정에 추천하고 사적으로 인도하여 관직에 나가게 하였다.注+① 공적으로 조정에 말하여 그를 위에 추천하고 나서 또 사적으로 같은 반열에서 말하면서 이끌어 진취시킨 것이다. 물을 끌어 올리는 것을 汲이라고 하니, 이 뜻을 취한 것이다.
이표는 中尉가 되자 貴戚들을 피하지 않고 탄핵을 하니, 魏主(元宏)는 그를 현명하게 여겨서
에 비교하였다. 이표는 스스로 임금과 친분을 맺고 인정을 받게 되자, 다시는 이충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점점 그와 소원해져 오직 공식석상에서만 소매를 여미며 경의를 표할 뿐, 다시 尊敬의 뜻이 없으니, 이충이 점점 그에게 앙심을 품었다.
目
【目】 魏主(元宏)가 남쪽을 정벌하자 李彪는 李沖과 任城王 元澄과 함께 〈낙양에서〉 留守의 업무를 관장할 적에 이표는 성품이 강직하고 호방하여 어긋난 점이 많았다.
자주 이충과 함께 논쟁을 할 때 말소리나 낯빛에 나타났고, 자신이 法官이므로 다른 사람이 규찰하여 탄핵할 수 없다고 여기고 전횡하는 일이 많았다.
이충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그의 전후에 범한 허물과 악행을 수집하여 탄핵하는 表文를 올려 廷尉에게 회부하여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魏主가 表文를 보고 오랫동안 탄식하다가 말하기를 “道固(이표)는 넘친다고 말할 수 있고, 僕射(이충)도 또한 가득 찼구나.”라고 하였다.注+① 道固는 李彪의 字이다. 有司가 이표를 사형으로 판결하자 魏主가 그를 사면하고 그의 이름을 官籍에서 삭제할 뿐이었다.
目
【目】 李沖은 평소 성품이 温厚하였으나 李彪를 잡아들일 때에는 눈을 부릅뜨고 크게 소리치며 안석을 던져서 부수고 〈이표를 대할 적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꾸짖고 욕을 하였다. 마침내 병이 나서 심장이 놀라 말에 착오가 나니, 의약으로 치료하지 못하였다.
혹자는 이충의 간이 〈노기로 인해〉 손상되었다 여겼는데, 10여 일이 지나서 卒하니,注+① 悸는 심장이 요동치는 것이다. 〈“或以爲肝裂”은〉 怒氣가 肝을 상하게 한 것이니, 노기가 심하여 병이 발생하여 의약으로도 치료하지 못하므로 간이 파열되었다 한 것이다. 魏主(元宏)가 그의 죽음에 통곡하고 슬픔을 스스로 가누지 못하였다.
이충은 부지런하고 영민하며 정력이 강대하여 오랫동안 요직에 있으면서 종일 일을 보았지만 싫증을 내거나 피곤해한 적이 없었는데, 겨우 40살에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 형제는 4명의 어머니가 낳았기 때문에 어려서는 성내고 다투는 일이 많았다.注+② ≪資治通鑑≫에 “兄弟 6명에 어머니는 모두 4명이었다.” 하였다.
이충이 귀하게 되자 녹봉과 賞賜를 모두 형제들과 함께하니, 다시 돈독하고 화목함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親戚과 姻戚을 많이 끌어들여 사사로이 官爵을 주니, 한 집안의 1년 녹봉이 1만 匹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것으로 그를 輕視하였다.
綱
【綱】 北魏가 彭城王 元勰을 宗師로 삼았다.
目
【目】 北魏는 元勰을 宗師로 삼아서 宗室을 감독하고 살피게 하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는 보고하도록 하였다.
綱
【綱】 여름 4월에 齊나라 大司馬 王敬則이 會稽에서 반란을 했다가 군대가 曲阿에 도착하여 패하여 죽었다.
目
【目】 齊나라 大司馬 會稽太守 王敬則이 스스로 高帝(蕭道成)와 武帝(蕭頤)의 옛 장수로서 마음이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다. 齊主(蕭鸞)가 겉으로는 비록 예우하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왕경칙을 의심하였는데 그가 노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또 内地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너그럽게 하였다.
왕경칙의 적장자인 王仲雄이 琴을 잘 탔는데, 齊主가 蔡邕의 焦尾琴을 그에게 빌려주어 연주하게 하니,注+① 蔡邕이 吳에 있을 적에, 吳人 중에 오동나무로 불을 피워서 밥을 짓는 이가 있었다. 채옹이 〈오동나무가〉 불타는 소리를 듣고 좋은 재목인 것을 알았다. 이어서 채옹이 오동나무를 달라고 해서 거문고를 만들었는데, 과연 소리가 아름다웠다. 거문고 끝에 불탄 흔적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그것으로 인하여 ‘焦尾琴’이라고 불렀다.
이 제위를 찬탈하니, 義旗(정의의 깃발)를 들고 3월 2일에 京都를 소탕하여 평정하고 환현을 죽였다. 환현의 宮女와 逆黨의 집안 子女와 妓妾을 모두 군사들에게 상으로 주었다. 동쪽으로 歐․越에 미치고 북쪽으로 淮水와 泗水에 이르기까지 사람들 모두 상을 얻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절기에 있어서는 풀은 엮을 만하고 事情에 있어서는 여자는 가질 만한 것을 말한 것이다. 杜佑가 말하기를 “懊憹歌는 石崇의 妾인 綠珠가 지은 것인데 〈
〉 하나의 악곡일 뿐이다. 懊는 於報의 切이다. 憹는 如冬의 切이다. 王仲雄이 그 곡을 모방하여 노래를 지은 것이다.” 하였다. 읊기를 “항상 나의 情을 저버리는 것을 탄식하였는데, 그대가 지금 이렇게 하였구나.”라고 하고,注+③ 儂은 音이 農이니, ‘나’라는 뜻이다. 吳人의 말이다.
또 읊기를 “그대가 깨끗하지 않은 마음으로 행동하거늘 어찌 남들의 의론을 싫어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注+④ 惡(싫어하다)는 烏路의 切이다. 齊主가 더욱 시기하고 부끄러워하였다.
마침 병이 들었는데 이에 張瓌를 平東將軍 吳郡太守로 삼아서 왕경칙을 방비하게 하니,注+⑤ 張瓌는 張永의 아들이다. 왕경칙이 듣고 말하기를 “동쪽에 지금 누가 있는가. 이것은 나를 평정하려는 것일 뿐이다. 동쪽을 또한 어찌 쉽게 평정할 수 있겠는가. 나는 끝까지 金甖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金甖은 鴆酒를 말한다.注+⑥ 賜死할 때에는 金甖(황금 장식 술단지)에 鴆酒를 가득 채웠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目
【目】 徐州行事 謝朓는 王敬則의 사위이다.注+① 朓는 土了의 切이다. 왕경칙의 아들 王幼隆이 〈사조에게〉 사람을 보내 이 정황을 보고하였는데 사조가 그의 사자를 체포하고 이를 齊主(蕭鸞)에게 아뢰었다.
인 王公林이 왕경칙에게 권하기를 〈齊主에게〉 급히 서신을 보내서 아들(왕유융)에게 죽음을 내리게 하고 홀로 배를 타고 밤에 도성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注+② 晉나라 이래로 여러 郡에 五官掾이 있었다. 王公林은 王敬則의 族子이다.
왕경칙이 응답하지 않고 山陰縣令 王詢을 불러서 民丁을 징발하여 병사를 얼마나 얻을 수 있느냐 묻자, 왕순이 말하기를 “縣 안에 民丁을 갑자기 모집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왕경칙이 화가 나서 왕순을 끌어내어 참수하려고 하였다.注+③ 將은 끌어낸다는 뜻이다.
왕공림이 또 간언하기를 “무릇 일은 모두 후회할 수 있지만 오직 이 일만은 후회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官人(왕경칙)께서는 어찌 다시 생각하지 않습니까.”라고 하니,注+④ 官은 官人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왕경칙이 왕공림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말하기를 “내가 하는 일에 너 같은 조무래기가 무슨 상관이냐.”라고 하고,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반란하였다.
目
【目】 前 中書令 何胤이 관직을 버리고 若邪山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王敬則이 위협하여 尙書令으로 삼으려고 하였다.注+① 邪는 耶로 읽는다. 若邪山은 會稽 동남쪽 40리에 있다.
은 은둔하여 고고하게 지내니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따르지 않으면 바로 그를 죽여야 할 것이지만, 큰일을 일으킬 때에 이름난 賢人을 먼저 죽이면 일이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
하윤은 何尙之의 손자이다. 왕경칙이 南康侯 蕭子恪을 받드는 것으로 명분을 삼으니, 소자각이 도주하였는데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注+② 蕭子恪은 蕭嶷의 아들이다.
始安王 蕭遙光이 마침내 齊主(蕭鸞)에게 高帝(蕭道成)와 武帝(蕭頤)의 자손들을 다 죽일 것을 권하자, 이에 그들을 다 불러 궁중에 들어오게 할 적에 幼兒인 자는 乳母와 함께 들어오게 하여 3更(밤 11시~새벽 1시)을 기다려 그들을 다 죽이려고 하였는데,注+③ 須는 기다린다는 뜻이다.
注+④ “自歸”는 스스로 와서 죄를 자수하는 것을 말한다. 中書舍人 沈徽孚가 측근인 單景雋과 함께 모의하여 그 일을 조금 유보하였다.
잠시 후에 齊主가 잠에서 깨어났는데,注+⑤ 單은 音이 善이니 姓이다. 景雋은 그의 이름이다. 覺(깨다)는 古孝의 切이다. 선경준이 소자각이 이미 도착했다고 아뢰자 齊主가 놀라며 묻기를 “아직 손을 쓰지 않았는가? 아직 손을 쓰지 않았는가?”라고 하니,
선경준이 상세히 대답하였다. 齊主가 침상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소요광이 남(소란)의 일을 거의 그르칠 뻔했구나.”라고 하고,注+⑥ 單景雋이 갖추어 蕭子恪이 아뢴 일로 대답하였다. 齊主(蕭鸞)가 마침내 소요광에게 잘못 이끌리게 되어 함부로 죽일 뻔했음을 말한 것이다. 이에 王侯들에게 음식을 하사하고, 다음 날에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目
【目】 王敬則이 甲士 1만 명을 거느리고 浙江을 지나가는데注+① 胡三省이 말하기를 “浙江은 지금의 錢唐江이다.” 하였다. 張瓌가 병사를 보내어 왕경칙을 막았으나 〈왕경칙 군대의〉 북소리를 듣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니, 장괴는 민간으로 도망하였다.
왕경칙이 〈齊나라의〉 老將으로 큰일을 일으키니 백성들 중에 상앗대를 들고 삽을 메고 따르는 자가 10여만 명이었다. 〈왕경칙이〉 武進의 高祖의 능원 입구에 이르러서는 통곡하며 지나갔다.注+② 篙(상앗대)는 古勞의 切이며 대나무 장대이니, 배를 저어 가는 데 사용한다. 蕭氏의 선조는 모두 武進에 장사 지냈다. 高帝가 殂하자 그 조상의 무덤을 따라서 역시 무진에 장사 지냈고, 泰安陵이라고 불렀다. 王敬則은 고제의 은혜를 생각했기 때문에 慟哭을 하고 지나간 것이다.
이 말하기를 “吳나라 大帝(孫權)가 丹陽을 改名하여 武進縣이라고 하였다. 吳나라 말기에 아울러 晉陵縣에 들어갔다.”
曲阿縣令 丘仲孚가 관리와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역적이 승세를 타서 비록 그 기세가 날카롭지만 오합지졸이라 흩어지기가 쉽다. 지금 만약 艦船을 거두고 長岡埭를 뚫어서 瀆水(강물)를 흐르게 하고 그 길을 막아서 며칠을 지체하게 하면 臺軍(조정의 군대)이 반드시 도착할 것이니, 이와 같이하면 큰일을 성공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왕경칙의 군대가 나가지 못하였다.注+③ 長岡은 曲阿縣의 경계에 있다.
目
【目】 5월에 齊主(蕭鸞)가 前軍司馬 左興盛과 將軍 胡松 등에게 조서를 내려서 曲阿縣 長岡에 보루를 쌓게 하였는데, 王敬則이 급히 그들을 공격하니, 臺軍이 대적하지 못하여 퇴각하려고 하였으나 포위망을 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각각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蕭寶卷
호송이 騎兵을 이끌고 왕경칙의 후미를 돌격하자 왕경칙의 군대가 크게 패하니 臺軍이 왕경칙을 참수하였다.
이때에 齊主는 병이 이미 위독하였다. 그런데 왕경칙이 갑자기 동쪽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朝廷이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太子 蕭寶卷이 행전을 차고 달아나려고 하였는데,注+① ‘急裝’은 縛袴(행전)을 말한다. 군장을 착용하는 것을 急裝이라 한다. 왕경칙이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
36策에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다.注+② 이는 檀道濟가 〈전쟁터에서〉 北魏의 군대를 피한 것을 기롱한 말이다. 생각건대 너희 부자는 오직 달아나는 것만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目
【目】 晉陵의 백성이 王敬則에게 귀부하여 죽음을 받아야 할 자가 매우 많았다. 晉陵太守 王瞻이注+① 王瞻은 王弘의 從孫이다. 齊主(蕭鸞)에게 말하기를 “어리석은 백성들은 선동되기 쉬우니, 법으로 끝까지 다스릴 것까지는 없습니다.”라고 하자, 그것을 허락하니, 온전히 살아난 자가 1만 명으로 추산되었다.注+② “窮法”은 법으로 끝까지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謝朓가 功으로 인하여 吏部郎으로 승진하자 그가 3번 사양하였는데 齊主가 허락하지 않았다.注+③ ≪唐六典≫에 “吏部郞은 選擧를 담당하는 관직이다. 魏나라(曹魏)와 晉나라에서 사람을 등용할 적에 당시 선발을 정밀하게 하여 여러 曹의 郞官 중에 功이 높은 자를 吏部郞으로 승진시켰으니, 歷代에 品秩이 모두 여러 曹의 郞官보다 높았다. 魏ㆍ晉ㆍ宋ㆍ齊에서는 吏部郞을 第5品으로 하고, 諸曹郞을 第6品으로 하였다.” 하였다.
中書省의 관원이 사조의 이부랑의 관품이 사양할 만큼 높지 않다고 의심하자 祭酒 沈約이 말하기를 “근세에 작은 관직은 사양하지 않는 것이 마침내 풍속을 이루었는데 사조가 지금 사양한 것에는 또 다른 뜻이 있구나.注+④ 謝朓가 처의 아버지를 고발하여 관직을 얻었기 때문에 다른 뜻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가 사양함이 人情에서 나왔으니 어찌 관직의 크고 작음에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사조의 妻가 〈아버지 왕경칙을 고발한 원수를 갚으려고〉 항상 가슴에 칼을 품고 사조를 찔러 죽이려 하니, 사조가 감히 처를 만나지 못하였다.
로 軍國의 비용에 보태겠다고 하자注+① 國秩은 彭城國王으로서의 俸祿이다. 職俸은 元勰이 맡은 관직에 따라 마땅히 받아야 할 봉록이다. 親恤은 또한 北魏 조정에서 恤親(친족을 보살핌)의 명목으로 원협에게 지급한 비용이다. 魏主(元宏)가 마침내 조서를 내려 皇后 私府에 보관한 재물의 반으로 줄이고, 六宮의 妃嬪과 궁녀, 황족 중 五服의 친족에 속하는 남녀에게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지급한 비용을 또한 반으로 줄이고, 〈황제의 친속 중에〉 軍中에 있는 자 3분의 1을 줄여 군중에 내리는 포상에 지급하게 하였다.注+② “供恤”은 ≪北史≫ 〈魏本紀〉에 “恒恤恒供(항시 구휼하여 항상 제공한다.)”으로 썼고, “在軍者”는 〈魏本紀〉에 “在戎之親(군대에 있는 황제의 친족)”이라고 썼다.
【目】 齊主(蕭鸞)는 성품이 시기하고 걱정이 많아서 출입을 줄이더니 〈등극한 후에〉 마침내 南郊에서 상제에게 지내는 제사를 행하지 않았다.注+① 天子가 즉위하면 珪幣를 받들어 南郊에서 상제를 알현해야 한다.
또 무당을 매우 믿어서 나갈 때마다 먼저 이로움과 해로움을 점치게 하여, 동쪽으로 나갈 경우에는 서쪽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남쪽으로 나갈 경우에는 북쪽으로 가겠다고 말하였다. 예전에 병이 있었는데 병을 깊이 숨겼다가 이때에 이르러 殂하였다.
遺詔로 내려서 徐孝嗣를 尙書令으로 삼고, 沈文季ㆍ江祏을 尙書僕射로 삼고, 江祀를 侍中으로 삼고 劉暄을 衛尉로 삼고,注+② 江祀는 江祏의 동생이다. 軍政의 일은 陳太尉(陳顯達)에게 맡기고, 조정에 여러 일은 徐孝嗣ㆍ蕭遙光ㆍ蕭坦之ㆍ江祏에게 맡기고, 조정의 중대한 일은 沈文季ㆍ江祀ㆍ劉暄과 함께 상의하게 하고, 조정의 中樞的인 임무는 劉悛ㆍ蕭惠休ㆍ崔慧景에게 맡도록 하였다.注+③ 陳太尉는 陳顯達을 말한다.
有鶖在梁
太子 蕭寶卷이 황제에 即位하여 明帝(蕭鸞)의 靈柩가 太極殿에 있는 것을 싫어하여 빨리 장사를 지내려고 하였다. 서효사가 굳게 간쟁하여 踰月(1개월을 넘김)의 장례로 하게 되었는데, 곡을 할 때마다 번번이 목이 아프다고 말하였다.
太中大夫 羊闡이 궁중에 들어와 臨哭하는데, 그가 머리털이 없고 영전에서 〈곡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들다가 幘이 벗겨지니, 소보권이 곡을 그치고 크게 웃으며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
가 울며 왔구나.”라고 하였다.注+④ 鶖는 음이 秋이다. 陸佃의 ≪埤雅≫에 “鶖는 성품이 貪惡하여, 지금 세속에서 ‘禿鶖’라고 부르며, 一名 ‘扶老’라고도 부른다. 모양이 마치 학과 같으면서 크고, 목이 길고, 눈이 붉으며, 그 털이 水毒을 물리치며, 머리까지의 높이가 8尺이고, 사람과 싸우기를 잘하고 뱀을 먹기를 좋아한다.” 하였다. 陳濟가 말하기를 “지금 살펴보면 齊主 蕭寶卷은 羊闡이 궁중에 들어와 臨哭할 적에 모자가 벗겨져 머리털이 없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웃으며 말하기를 ‘무수리[秃鶖]가 울며 왔구나.’ 하니, 〈무수리는〉 머리가 대머리[禿]이고 목이 길기 때문이다.” 하였다.
綱
【綱】 8월에 高車가 北魏에 반란하였는데, 9월에 魏主(元宏)가 병사를 이끌고 돌아와 정벌하자 항복하였다.
目
【目】 北魏가 高車의 병사를 징발하여 남방을 정벌하게 하니, 고차가 멀리 군역을 가는 것을 꺼려서 袁紇樹者를 받들어 주인으로 삼아서 서로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북방으로 돌아갔다.
魏主(元宏)가 將軍 宇文福을 파견하여 고차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크게 패하여 돌아오자 다시 將軍 江陽王 元繼에게 명령하여 정벌하게 하였다.注+① 元繼는 道武子 陽平王 元熙의 曾孫이다. 후에 옮겨서 京兆王에 봉하였고 다시 江陽王에 봉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齊나라 高宗(蕭鸞)이 殂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禮法에는 喪을 당한 나라는 정벌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병사를 이끌고 돌아와서 북쪽으로 高車를 정벌하였다.
마침 魏主가 병을 얻어 매우 위독하니, 彭城王 元勰이 안으로는 醫藥을 받들어 모시고, 밖으로는 軍國의 일을 총괄하여 다스리니, 원근이 숙연해져서 사람들 중에 異議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
【目】 魏主(元宏)가 병이 조금 차도가 있어서 11월에 鄴城에 도착하였다. 江陽王 元繼가 글을 올리기를 “高車가 완고하고 우매하여 군역을 도피하였으니, 만약 모두 추격하여 죽이면 요란한 일이 될까 염려됩니다.
청컨대 사자를 파견하여 조사하여 魁首 한 사람만 참수하고 나머지는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들이 뉘우치고 군역에 따른다면 즉시 〈南伐하는〉 군대에 따르게 하십시오.”라고 하자, 그 말을 따랐다.注+① “赴軍”은 南伐하는 군대에 달려가는 것이다.
이에 반란한 자들이 이따금 스스로 돌아왔는데 원계가 먼저 사람을 파견하여 袁紇樹者를 위로하고 타이르니, 원흘수자가 柔然으로 도망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후회하여 군사를 인솔하여 나와서 항복하였다.
魏主가 원계를 훌륭하게 여기고 말하기를 “강양왕은 큰 임무를 맡을 만하다.”라고 하고, 마침내 회군하였다.
역주
역주1魏拔新野……皆棄城走 :
“이때에 齊나라 太守 劉思忌를 붙잡았는데, 유사기가 말하기를 ‘차라리 제나라의 귀신이 될지언정 北魏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라고 하고 마침내 죽였는데 절개를 지켜 죽은 것이다. 그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蕭鸞을 미워한 것이다. 임금을 弑逆한 조정을 위해 목숨을 잃으면 비록 절개를 지켜 죽은 것이 유사기와 같더라도 기록하지 않았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蕭鸞을 미워함이 극심하다.[於是執齊太守劉思忌 思忌曰 寧爲南鬼 不爲北臣 乃殺之 則死節也 其不書 何 惡鸞也 失身於弑逆之朝 雖死節如思忌不書 綱目之惡鸞甚矣]” ≪書法≫
역주2戍主 :
戍將이라고도 하는데 남북조시대에 설치되어 隋唐 시기에도 두었다. 戍는 지방 군사행정 구역의 하나로 남북시대에 변경 지역 중 군사 요지에 설치되었으며 州에 소속되었는데, 그 장관이 戍主이고 그 아래 戍副, 掾, 隊主, 隊副 등을 두었으며, 관할 지역의 군무와 방위를 담당하면서 민정과 재정에도 관여하였다. 戍主는 그 지위가 縣令에 상응하였으며 郡守를 겸하는 경우도 있었다.
역주3江泌(강비) :
≪資治通鑑≫ 胡三省의 音注에 泌은 ‘薄必翻’ 또는 ‘兵媚翻’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강비’로 음을 달았다.
역주4諸軍不相知 :
≪新譯資治通鑑≫(張大可 等 注釋, 三民書局, 2017)에 이를 “기타 각 방면의 군대들이 누구도 누구를 관할하지 못하였다.[其他各路軍隊誰也不管誰]”로 해석하였는데, 이를 참조하여 번역하였다.
역주5魏兵 夾路射(석)之 :
≪資治通鑑≫에는 이 앞에 ‘崔慧景이 鬧溝를 지나갈 적에 군사들이 서로 짓밟고 지나가자 교량이 무너졌다.’고 하였다. 군사들이 鬧溝에 빠져 죽었기 때문에 여기서도 ‘赴溝死者’라 한 것이다.
역주6汲黯 :
漢나라 武帝 때의 강직한 신하로, 황제의 잘못을 면전에서 사정없이 공박하였으므로 무제가 그를 꺼리면서도 옛날의 社稷之臣에 가깝다고 인정하였다.(≪史記≫ 〈汲黯列傳〉)
역주7(處)[劇] :
저본에는 ‘處’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劇’으로 바로잡았다.
역주8齊大司馬……至曲阿敗死 :
“≪資治通鑑綱目≫에서 蕭鸞을 미워하였다면 王敬則은 어찌하여 ‘반란했다.[反]’고 기록하였는가. 蕭道成이 弑逆하였을 때 왕경칙이 힘을 썼으니 이와 같은데도 인정해준다면 옳겠는가. 그러므로 齊나라 소란은 미워할 만하지만 왕경칙은 인정해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왕경칙은 실제로 참수되었는데 ‘伏誅’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은미하게 소란을 미워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綱目惡鸞 則敬則曷爲以反書 道成弑逆 敬則有力焉 若是而予之 可乎 故齊鸞可惡 敬則則不可予也 然則敬則實斬 其不書伏誅何 所以微示惡鸞之意也]” ≪書法≫ “王敬則은 高帝(蕭道成)와 武帝(蕭頤)의 老將으로서 蕭鸞이 弑逆할 때에 토벌하지 못하고 마침내 머리를 굽혀 역적을 섬겨서 그를 大司馬에 제수한 命을 이미 받고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킨 것은 무엇인가. ‘反’으로 기록하였으니 패하여 죽은 것이 마땅하다.[敬則高武舊將 當蕭鸞弑逆之時 不能討之 乃俛首事賊 旣受其大司馬之命矣 又復擧兵 何哉 以反書之 敗死宜矣]” ≪發明≫
역주9懊憹歌(오뇌가) :
東晉의 隆安 연간에 吳 지방에서 불린 노래로서, 남녀 간의 사랑과 갈등을 읊었다. 이 노래가 불린 지 얼마 되지 않아 桓玄이 帝位를 찬탈하였다.
역주16소자각이 맨발로……않았다 :
이 부분은 ≪資治通鑑≫의 “子恪 徒跣自歸 二更達建陽門 刺啓 時刻已至 而上眠不起”로 되어 있는데,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이를 요약하면서 내용이 빠져 있다. 이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또한 ‘徒跣自歸’에 대해 ≪資治通鑑新注≫(陝西人民出版社, 1998)에서는 맨발로 걸어서 조정에 와서 죄를 청하는 행위로 보았다. ≪자치통감≫에 있는 ‘刺啓’에 대해서는 胡三省의 注에 아뢰는 글에 성명을 밝히는 것을 ‘刺’라 하였다.
역주17잠시……하니 :
齊主가 蕭子恪이 용서를 빈 상황을 알고 3경이 지났으므로 그를 죽인 줄 알고 놀란 것을 말한 것이다.
역주18宋白 :
唐 太宗 때 문장가이다. 당시에 이름을 날렸던 宋白ㆍ賈黃中ㆍ李至ㆍ呂蒙正ㆍ蘇易簡 등 다섯 명의 翰林學士 중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