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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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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景平二이요 太祖文帝義隆元嘉元年이요 魏世祖太武帝 始光元年이라
春正月 宋廢其廬陵王義眞爲庶人하다
宋主義符居喪無禮하여 好與左右狎暱하고 遊戲無度어늘 特進致仕范泰上書諫之호되 不聽하니 寗之子也
廬陵王義眞警悟好文하되 而性輕易하고 與謝靈運顏延之慧琳道人으로 情好欵密注+道人, 僧也.이라
嘗云호되 得志之日 以靈運延之爲宰相하고 慧琳爲西豫州都督注+西豫州卽豫州也. 宋南豫州治歷陽, 豫州治壽陽. 壽陽在歷陽西, 故亦謂豫州爲西豫州.하니
靈運 玄之孫也 性褊傲하여 不遵法度하고 自謂才能宜參權要라하여 常懷憤悒하다 延之 含之曾孫也 嗜酒放縱하다
徐羨之等 惡義眞與兩人遊러라 義眞故吏范晏 從容戒之한대 義眞曰 靈運空疎하고 延之隘薄하니 魏文帝所謂古今文人 類不護細行者也로다 但性情所得 未能忘言於悟賞耳注+李希白曰 “予嘗聞諸翰林承旨王文炳說云 ‘言古今文人性情所得之文章, 我見則不能不喜悟稱賞耳.’”로라
於是羨之等 以爲靈運延之構扇異同하여 非毀執政이라하여 皆出爲郡守하다
義眞至歷陽 多所求索이어늘 執政每裁量不盡與注+裁, 剸節也. 量, 槩度也.하니 義眞怨之하다 表求還都이어늘 參軍何尙之屢諫이나 不聽이러니
時羨之等 已密謀廢宋主러니 而次立者應在義眞이라 乃因義眞與宋主有隙하여 先奏列其罪惡하여 廢爲庶人하여 徙新安郡하니
前吉陽令張約之上疏曰注+吉陽縣屬廬陵郡. 蓋吳立縣於吉水之陽, 因以爲名也. 廬陵王少蒙先皇優慈之遇하고 長受陛下睦愛之恩이라
故在心必言注+句.하여 容犯臣子之道注+言容有犯臣道之事, 宜在容養하여 錄善掩瑕하고 訓盡義方하여 進退以漸이니
今猥加剝辱하여 幽徙遠郡하니 上傷陛下常棣之篤이요 下令遠近恇然失圖注+剝辱, 謂褫爵爲庶人.이니
臣伏思大宋開基造次 根條未繁하니 宜廣樹藩戚하여 敦睦以道注+藩戚, 謂藩屛親戚也.니이다
人誰無過리오 貴能自新이니 以武皇之愛子이며 陛下之懿弟注+懿, 美也. 豈可以其一眚으로 長致淪棄哉
書奏見殺하다
夏五月 宋徐羨之傅亮謝晦 廢其主義符爲營陽王하여 遷於吳러니
六月 弑之注+壽, 十九.하고 迎宜都王義隆于江陵하고 殺前廬陵王義眞하고 以謝晦行都督荊湘等州軍事하다
羨之等將廢義符할새 以檀道濟先朝舊將으로 威服殿省이라하여 乃召道濟及江州刺史王弘入朝하여 以謀告之하고
謝晦聚將士於府內하여 使中書舎人邢安泰潘盛으로 爲內應하고 邀道濟同宿이러니 晦悚動不得眠호되 道濟就寢便熟이러라
時義符出於華林園하여 爲列肆하고 親自沽賣하고 與左右即龍舟而寢注+魏氏作華林園於洛中, 晉氏南渡, 放其制, 作之於建康. 華林園在宮城北隅.이러니 道濟引兵하여 入雲龍門하니 安泰等先誡宿衛 莫有禦者러니
軍士進殺二侍者하고 扶義符出하여 收璽綬한대 群臣拜辭하고 衛送故太子宮하다
侍中程道惠勸羨之等하여 立南豫州刺史義恭한대 羨之等 以宜都王義隆素有令望이라하여 乃稱皇太后令하여 數義符過惡하고 廢爲營陽王하고 以義隆纂承大統하고 遷義符於吳러니
使邢安泰就弑之하니 義符多力이라 突走出昌門이어늘 追者以門關踣而弑之注+閶門, 吳西郭門, 夫差作, 以天門通閶闔, 故名之. 後春申君改爲昌門. 踣, 蒲北切, 倒也, 斃也.하다
裴子野曰 古者人君養子 能言而師授之辭하고 能行而傅相之禮注+相, 去聲.러니 宋之教誨 雅異於斯하여 居中則任僕妾하고 處外則近趨走하고
帥侍二職 皆臺皁也注+趨走, 執役者也. 帥, 所類切. 太子皇子, 有帥有侍. 臺皁, 僕隷之屬, 左傳 “士臣皁, 僕臣臺.” 制其行止하며 授其法則하고 導達臧否 罔弗由之하여 言不及於禮義하며 識不達於今古하고 謹勅者能勸之以吝嗇하며 狂愚者或誘之以凶慝하고
雖有師傅 多以耆艾大夫爲之하며 友及文學 多以膏粱年少爲之하니 具位而已 亦弗與遊注+五十曰艾, 六十曰耆, 艾者, 氣力已衰, 髮蒼白如艾也. 耆, 至也, 至老之境也. 友․文學, 皆官名. 左傳 “膏粱之性難也.” 賈逵曰 “膏, 肉之肥者. 粱, 米之精者. 言食肥美, 而性率驕放也.” 又柳芳論曰 “凡三世有三公者曰膏粱.”하다
幼王臨州 長史行事하고 宣傳敎命 又有典籤하니 往往專恣하여 竊弄威權注+行事, 行府州事也. 籤, 七廉切. 南史曰 “故事, 府州部內論事, 皆籤前直敍所論之事, 後云 ‘謹籤.’ 日月下又云 ‘某官某籤.’ 故府州置典籤以領之. 本五品吏, 宋初改爲 職. 宋末, 多以幼少皇子爲藩鎭, 時主以左右親近領典籤, 其權任遂重.”이라
是以本枝雖茂로되 而端良甚寡 降及太宗 擧天下而棄之하니 亦眤比之爲也注+太宗, 明帝也. 昵比, 言親近小人也.
嗚呼 有國有家 其鑑之矣로다
◑傅亮帥行臺百官하여 奉法駕하여 迎義隆于江陵하니 尙書蔡廓謂曰
營陽在吳 宜厚加供奉이니 一旦不幸이면 卿諸人有弑主之名이니 欲立於世 將可得邪아하니
時亮已與羨之 議害義符러니 乃馳信止之하되 不及하니 羨之大怒曰 與人共計議하고 如何旋背即賣惡於人邪注+背, 旋背, 猶言轉背也. 一說, 背音佩, 棄也.
羨之等 遣使殺義眞하고 以荊州地重으로 恐義隆至 或別用人하여 乃亟以錄命除謝晦都督刺史하여 欲令居外爲援하니 精兵舊將 悉以配之注+錄命, 錄尙書自出命也.러라
七月 行臺至江陵하여 立行門於城南하고 題曰 大司馬門이라하다 傅亮帥百僚하여 詣門上表하고 進璽綬한대
義隆時年十八이라 下敎曰注+王之命令曰敎. 猥以不德으로 謬降大命하니 顧己兢悸 何以克堪이리오
當暫歸朝廷하여 展哀陵寢하고 幷與賢彥申寫所懷 望體其心하여 勿爲辭費하라
府州佐史竝稱臣하고 請牓諸門 一依宮省注+府, 都督府. 州, 荊州也.한대 義隆不許하고 敎綱紀하여 宥見刑하고 原逋責注+敎, 下敎也. 綱紀者, 王府官屬也. 宥, 赦也. 見刑, 見在之刑. 逋, 欠也, 負也. 責, 與債通. 言欠負官物, 逋亡而不還者, 原免之.하다
諸將佐聞二王死하고 皆疑하여 不可東下러니 司馬王華曰
先帝有大功於天下하여 四海所服이니 雖嗣主不綱이나 人望未改注+嗣主, 謂義府也. 不綱, 謂失綱維也.하고 羨之中才寒士 亮布衣諸生으로 受寄崇重하니 未容遽敢背德이요
畏廬陵嚴斷하여 將來必不自容하여 以殿下寛慈 奉迎하여 冀以見德이니 悠悠之論 殆必不然注+冀以見德, 謂冀以定策爲德也.이라
又此五人 同功竝位하니 孰肯相讓이리오 就懷不軌 勢必不行注+五人, 謂徐羨之․傅亮․謝晦․檀道濟․王弘也.이요
廢主若存이면 慮其將來受禍하여 致此殺害 蓋由貪生過深이요 不過欲握權自固하여 以少主仰待耳라하니
義隆曰 卿復欲爲宋昌邪注+宋昌事, 見漢高后八年.아하다
長史王曇首南蠻校尉到彥之皆勸行하니 乃命華留鎭荊州하고 欲使彥之將兵前驅러니 彥之曰
了彼不反이면 便應朝服順流注+了, 决知也. 若使有虞 此不足恃 更開嫌隙之端이니 非所以副遠邇之望也
會雍州刺史褚叔度卒이어늘 乃遣彥之權鎭襄陽하다
義隆遂發江陵하여 引見傅亮 號泣하니 哀動左右러라 旣而問義眞及少帝薨廢本末하고 悲哭嗚咽하니 侍側者莫能仰視注+咽, 烏結切. 嗚咽, 嗚唈哽咽也.
亮流汗하고 不能對러니 乃布腹心於到彥之王華等하여 深自結納이러라 義隆以府州文武自衛하고 臺官衆力 不得近部伍注+力, 謂僕從. 臺官衆力, 臺省遣來之, 百官衆力也.하니
參軍朱容子抱刀處舟戶外하여 不解帶者累旬注+防非常也. 舟, 王所乘舟也.이러라
秦攻涼하여 敗之하다
◑八月 宋主義隆立하다
宜都王義隆至建康하니 群臣迎拜於新亭할새 徐羨之問傅亮曰 王可方誰 亮曰 晉文景以上人注+文․景, 謂昭․師也.이라
羨之曰 必能明我赤心이리라 亮曰 不然注+亮固知其不得免矣.하다
義隆謁初寧陵하고하여 止中堂注+晉孝武以太學在秦淮南, 去臺城懸遠, 權以中堂爲太學, 親釋奠於先聖, 則中堂亦在秦淮北, 但在臺城之外耳.이어늘 百官奉璽綬한대 義隆辭讓數四하고 乃受之하고 遂即位하다
大赦하고 謁太廟하며 復廬陵王先封하고 迎其柩還建康하다
以行荊州刺史謝晦爲眞하니 晦將行 問蔡廓曰 吾其免乎 廓曰
卿受先帝顧命하고 任以社稷하며 廢昬立明하니 義無不可로되 但殺人二兄而以之北面하여 挾震主之威하며 據上流之重하니 以古推今 自免爲難이로다
晦始懼不得去러니 旣發 喜曰 今得脫矣와라 徐羨之等 進位有差하고
有司奏호되 車駕依故事하여 臨華林園聽訟이라한대 詔曰 政刑多所未悉하니 可如先者하여 二公推訊注+二公, 謂徐羨之․王하라
乃以王曇首王華爲侍中하고 竟陵王義宣鎭石頭注+義宣, 宋高祖子.하다
羨之等 欲遂以到彥之 爲雍州어늘 不許하고 徴爲中領軍하여 委以戎政하니
彥之自襄陽南下할새 謝晦慮彥之不過己注+過, 古禾切.러니 彥之至楊口하여 步往江陵하여 深布誠款하니 晦亦厚自結納하여 由此大安이러라
柔然紇升蓋可汗 聞魏太宗殂하고 將六萬騎入雲中하여 攻拔盛樂宮注+紇升蓋, 柔然王之號, 猶華言制勝也, 其王名大檀. 魏之先什翼犍始居雲中之盛樂宮, 築盛樂城於故城南八里.이어늘
魏主自將輕騎討之하여 三日二夜 至雲中하니 紇升蓋引騎圍之五十餘重이요 하여 相次如堵하니 將士大懼러니
魏主顏色自若하니 衆情乃安이러라 紇升蓋弟子於陟斤爲大將이러니 魏人射殺之하니 紇升蓋懼遁去하다
阿柴有子二十人이러니 疾病 召諸子弟謂之曰
先公車騎捨其子拾虔而授孤하니 孤敢私於緯代而忘先君之志乎注+先公, 謂樹洛干也. 樹洛干自號車騎將軍. 我死어든 汝曹當奉慕璝爲主하라
緯代者 阿柴之長子 慕璝者 阿柴之母弟 叔父烏紇提之子也注+烏紇提之立也, 妻樹洛干母, 生二子, 慕璝慕利延.
阿柴又命諸子하여 各獻一箭하고 取一箭하여 授其弟慕利延하고 使折之하니 慕利延折之어늘
又取十九箭하여 使折之하니 不能折이라 阿柴乃諭之曰
汝曹知之乎 孤則易折하고 衆則難摧 汝曹當戮力一心然後 可以保國寧家니라 言終而卒하니
慕璝亦有才略이라 撫納秦涼失業之民及氐羌雜種至五六百落하니 部衆轉盛이러라
十二月 魏伐柔然하여 大獲하다
◑宕昌朝貢于魏하다
宕昌羌之別種也注+宕, 徒浪切. 宕昌, 蓋三苗之裔. 羌地東接中國하고 西通西域하여 長數千里
各有酋帥하고 部落分地하고 不相統攝한대 而宕昌最彊하여 有民二萬餘落하니 諸種畏之러라
夏主將廢太子璝하고 而立少子倫이러니 璝將兵伐倫하니 倫拒之敗死어늘 倫兄昌襲璝하여 殺之하고 幷其衆하여 歸于統萬하니 夏主大悅하여 立昌爲太子하다
夏主好自矜大하여 名其四門이어늘 東曰招魏 南曰朝宋이요 西曰服涼이요 北曰平朔이러라


宋主 劉義符 景平 2년이고,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원년이고, 北魏 世祖 太武帝 拓跋燾 始光 원년이다.
[綱] 봄 정월에 宋나라가 廬陵王 劉義眞을 폐하여 庶人으로 삼았다.
謝靈運謝靈運
[目] 宋主 劉義符는 居喪 중에 무례하여, 측근들과 격의 없이 가까이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노니는 데에 절도가 없이 하였다. 으로 치시한 范泰가 上書를 하여 간언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범태는 范寗의 아들이다.
廬陵王 劉義眞은 민첩하고 총명하며 문장을 좋아하였으나 성격이 경솔하였고, 謝靈運․顔延之․慧琳 스님과注+① 道人은 스님이다. 우정이 두터웠고 친밀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뜻을 이루는 날에는 사영운․안연지를 재상으로 삼고, 혜림 스님을 西豫州都督으로注+② 西豫州는 바로 豫州이다. 宋나라 南豫州는 歷陽에 治所를 두고, 豫州는 壽陽에 治所를 두었다. 壽陽은 歷陽의 서쪽에 있었으므로 또한 豫州를 일러 西豫州라고 한 것이다. 삼겠다.”라고 하였다.
사영운은 謝玄의 손자이니, 성격이 편벽되고 오만하여 법도를 준수하지 않았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 재능이 마땅히 주요 권력에 참여해야 한다고 하여 항상 울분을 품었다. 顔延之는 顔含의 曾孫이니, 술을 좋아하고 방종하였다.
[目] 徐羨之 등은 劉義眞이 두 사람과 교유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유의진의 옛 부하 관리인 范晏이 조용히 그에게 경계하였는데, 유의진이 말하기를 “謝靈運은 허황되고 경솔하며 안연지는 속이 좁으며 식견이 얕으니, 이것은 魏 文帝(曹丕)가 말했던 ‘고금의 문인들은 대부분 작은 절도를 지키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마음에 터득한 문장을 보면 감동하여 칭찬하는 말을 잊지 못할 뿐이다.”注+① 李希白이 말하기를 “내가 翰林承旨 王文炳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가 이르기를 ‘이는 고금 문인들이 마음에 터득한 문장이 〈있으니〉 내가 그것을 보면 감동하여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때에 서선지 등이 사영운과 안연지는 시비를 선동하여 집정자를 비난한다고 하여 모두 太守로 내보냈다.
[目] 처음에 劉義眞이 歷陽에 도착했을 때에 요구하는 것이 많았는데, 집정자가 매번 양을 줄이고注+① 裁는 줄인다는 뜻이다. 量은 헤아려 잰다는 뜻이다. 다 주지 않자 유의진이 이를 원망하였다. 표문을 올려서 서울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參軍 何尙之가 여러 차례 간언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때 徐羨之 등이 이미 몰래 宋主(劉義符)를 폐위시킬 것을 모의하였는데, 차례에 따라 즉위할 사람이 응당 유의진이었다. 마침내 유의진과 宋主 사이에 틈이 있는 것을 이용하여 우선 상주문을 올려서 유의진의 죄악을 열거하여 폐위하고 庶人으로 삼아서 新安郡으로 귀양 보냈다.
前 吉陽縣令注+② 吉陽縣은 廬陵郡에 속하였다. 吳나라가 縣을 吉水의 북쪽에 세웠고 그것으로 인하여 이름하였다. 張約之가 상소하기를 “廬陵王(유의진)이 어려서는 先皇의 자상한 대우를 받았고, 성장해서는 폐하의 우애로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두었던 것을 반드시 말하여 혹은 신하의 도리를 범하는 것이 있었으나注+③ 여기서 句를 뗀다. 注+④ 〈“容犯臣子之道”는〉 혹은 신하 도리를 저촉하는 일이 있음을 말한다. , 마땅히 포용하고 양육하여 그의 장점을 기억하고 허물을 가려주며 올바른 방도를 다하여 가르쳐서 그를 나아오고 물러나게 하는 것을 천천히 하소서.
지금 갑자기 삭탈하는 모욕을注+⑤ “剝辱”은 작위를 박탈하여 庶人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주고 먼 군으로 유배 보내니, 위로는 폐하의 돈독한 우애를 해치고 아래로는 원근의 사람들에게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게 합니다.
臣이 생각하건대 위대한 宋나라가 기틀을 연 지 얼마 안 되어 뿌리와 가지가 아직 번창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제후왕을注+⑥ “藩戚”은 울타리가 되는 친척(제후왕)을 말한다. 널리 양성하여 도리에 맞게 돈독하고 화목하게 지내야 합니다.
사람이 누가 허물이 없겠습니까마는 능히 스스로 고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武皇帝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폐하의 아름다운注+⑦ 懿는 아름답다는 뜻이다. 동생을 어찌 하나의 허물이 있다고 해서 오랫동안 내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글이 상주되자 〈장약지는〉 죽임을 당하였다.
[綱] 여름 5월에 宋나라 徐羨之․傅亮․謝晦가 그 군주 劉義符를 폐하여 營陽王으로 삼아서 吳郡으로 옮겼다.
宋 文帝宋 文帝
6월에 영양왕을 시해하고注+① 향년이 19세였다. 宜都王 劉義隆을 江陵에서 맞이하였으며, 前 廬陵王 劉義眞을 죽이고 사회로 都督荊湘等州軍事를 겸직하게 하였다.
[目] 徐羨之 등이 장차 劉義符를 폐하려고 할 적에 檀道濟가 이전 조정의 옛 장수로서 위세가 殿省(조정)을 승복시킨다고 하여 마침내 단도제와 江州刺史 王弘을 불러서 入朝하게 하여 廢立의 모의를 그들에게 고하였다.
謝晦가 장수와 병사를 관부 안에 모이게 하여 中書舍人 邢安泰와 潘盛에게 안에서 호응하게 하였다. 밤에 단도제를 맞이하여 함께 자는데 사회는 두려워서 잠을 잘 수 없었으나 단도제는 침석에 들어 잠이 곧 깊어졌다.
이때 劉義符가 華林園에注+① 魏氏가 華林園을 洛陽 안에 만들었는데, 晉氏가 남쪽으로 건너와 그 제도를 모방하여 建康에 이를 만들었다. 화림원은 宮城의 북쪽 모퉁이에 있다. 나가서 점포를 늘어놓고 친히 물건을 팔았고, 측근들과 함께 龍舟에 가서 잠을 잤다. 단도제가 군사를 이끌고 雲龍門으로 들어갔는데, 형안태 등이 앞서 宿衛를 타일렀기 때문에 막는 사람이 없었다.
군사들이 들어가서 두 명의 侍從을 죽이고 유의부를 부축하여 나와서, 옥새와 인끈을 거두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하직인사를 하고 유의부를 옛 태자궁으로 호송하였다.
[目] 侍中 程道惠가 徐羨之 등에게 권하여 南豫州刺史 劉義恭을 황제로 세우자고 하였다. 서선지 등은 宜都王 劉義隆이 평소 명망이 있다 하여 마침내 皇太后의 명령이라고 칭하고서 劉義符의 죄악을 일일이 꾸짖고는 그를 폐하여 營陽王으로 삼고, 劉義隆으로 大統을 잇도록 하고 유의부를 吳郡으로 귀양 보냈다.
邢安泰를 시켜 가서 시해하게 하였는데, 유의부는 힘이 세었으므로 돌진하여 달아나 昌門을 나가자 쫓는 사람이 문빗장으로 그를 넘어뜨리고 〈붙잡아〉 시해하였다.注+① 閶門(창문)은 吳郡의 서쪽 외곽문으로 夫差가 만들었다. 하였으므로 이렇게 이름 지었다. 후에 春申君이 昌門으로 개칭하였다. 踣은 蒲北의 切이니, 엎어짐이고 넘어짐이다.
[目] 裵子野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옛날에 임금이 아들을 양육할 때 말을 할 수 있으면 師가 그에게 말을 가르쳤고, 걸을 수 있으면 傅가 그에게 禮를 익히도록 도왔다.注+① 相(돕다)은 去聲이다. 宋나라의 교육은 평소에 이와 달라 禁中에 있을 때는 노복과 비첩에게 맡겼고, 밖에 있을 때는 심부름하는 사람이 쫓아다녔다.
황자의 무관과 시종의 직책에 종사하는 사람이 모두 노복인데注+② “趨走”는 부림을 받는 사람이다. 帥(무관)는 所類의 切이다. 太子․皇子는 帥(무관)가 있고 侍(시중)가 있다. “臺皁”는 僕隷의 부류이니, ≪春秋左氏傳≫ 昭公 7년에 ”라고 하였다. , 皇子의 행동거지를 통제하고 법도를 가르치며, 선악을 인도하는 것이 그들을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말은 禮義에 미치지 못하며 식견은 고금에 통하지 못하고, 삼가며 조심하는 사람은 황자에게 인색함을 권하며, 경망하며 우매한 사람은 간혹 그를 흉악함으로 유도하기도 한다.
비록 師傅가 있으나 대부분 연로한 大夫를 임명하며, 을 대부분 귀족 출신의 연소한 자를 임명하니注+③ 50을 艾라고 하고, 60을 耆라고 하는데, 艾는 기력이 이미 쇠약하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 쑥과 같다는 것이다. 耆는 이르는 것이니, 늙음의 지경에 이른 것이다. 友․文學은 모두 官名이다. ≪春秋左氏傳≫에 “기름진 음식을 먹고 산 사람의 성품은 바로잡기 어렵다.”라고 하였는데, 賈逵가 말하기를 “膏는 기름진 고기이고, 粱은 정갈한 쌀이다. 기름진 고기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부유하게 지내면 대체로 성품이 교만 방종해짐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고, 또 柳芳이 논하기를 “무릇 3代를 이어 三公에 있는 자를 膏粱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자리만 갖추고 있을 뿐이고 역시 함께 교류하지 못한다.
어린 王이 州를 다스리면 長史가 일을 행하고, 敎命을 전하는 데에 또 이 있는데注+④ “行事”는 府와 州의 업무를 행하는 것이다. 籤(公文)은 七廉의 切이다. ≪南史≫ 〈呂文顯列傳〉에 “옛일에 府州의 部內에서 논의한 일은 모두 籤의 앞면에 직접 논의한 일을 기록하고 뒷면에 ‘謹籤’이라고 쓰며, 날짜의 아래에 또 ‘某官某籤’이라고 썼으므로 府州에 典籤을 두어서 관장하게 하였다. 본래 5品의 관리였는데, 宋나라 초기에 고쳐서 7品 관리로 하였다. 宋나라 말기에는 대부분 어리고 젊은 황자로 藩鎭(지방관)을 삼았는데 당시에 황제가 좌우에 친근한 사람을 典籤으로 임명하여 그 권한과 책임이 마침내 무거워졌다.”라고 하였다. , 이따금 이들이 전횡하여 권위를 훔쳐 농단하였다.
이 때문에 황실의 뿌리와 가지(皇孫)는 비록 무성하지만 정직하고 선량한 황자가 매우 적다. 宋나라 太宗 劉彧의 시대에 내려와서는 온 천하가 이를 버렸으니, 역시 친근한 소인배가 조성한 것이다.注+⑤ 太宗은 明帝이다. “昵比”는 친근한 소인배를 말한다.
아! 국가를 가진 자는 이를 거울삼아야 할 것이다.”
[目] 傅亮이 의 백관을 인솔하여 法駕를 갖추고서 劉義隆을 江陵에서 영접하였다. 尙書 蔡廓이 말하기를
“營陽王 劉義符가 吳郡에 계신데 마땅히 奉養하는 일을 후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갑자기 불행한 일이 생기면 卿과 여러 사람들은 군주를 시해했다는 오명을 가지게 되니, 〈그렇게 되면〉 세상에 서고자 하나 어찌 가능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부량이 이미 徐羨之와 함께 유의부를 해칠 것을 모의하였는데, 마침내 편지를 급히 전하여 중지시키려 하였으나 제시간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서선지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남과 함께 계책을 의논하고서 어떻게 등을 돌려注+① 背(등)는 본음대로 읽는다. “旋背”는 轉背(등을 돌린다)라는 말과 같고, 일설에 背는 음이 佩이니 버린다는 뜻이다. 바로 오명을 남에게 轉嫁시키는가.”라고 하였다.
서선지 등이 사자를 파견하여 劉義眞을 죽이고, 荊州의 땅이 중요하므로 劉義隆이 도착하면 혹시 따로 사람을 채용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재빨리 錄命으로注+② 錄命은 錄尙書가 스스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謝晦를 로 임명하여 밖에 있으면서 후원하게 하니, 정예 병사와 옛 장수들이 모두 그에게 배속되었다.
[目] 7월에 行臺의 관원들이 江陵에 도착하여 성의 남쪽에 行門(임시 궁전 정문)을 세우고, 쓰기를 ‘’이라고 하였다. 부량이 백관을 인솔하고서 문에 가서 표문을 올리고 옥새와 인끈을 바쳤다.
劉義隆은 이때 나이가 18세였는데, 교서를注+① 왕의 명령을 敎라고 한다. 내려 말하기를 “외람되게도 부덕한 사람에게 大命이 잘못 내려지니, 스스로를 돌아봄에 두렵다.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잠시 조정으로 돌아가서 능침에 정성스럽게 애도하고 현명한 선비들과 함께 생각한 바를 토로하겠다. 바라건대 그 마음을 헤아려서 많은 말을 하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府州의注+② 府는 都督府이고, 州는 荊州이다. 보좌관과 長史가 臣을 칭하고 여러 문의 명패를 걸기를 궁전과 같이하기를 청하자 유의륭이 허락하지 않았다. 綱紀에게 교서를 내려 현재 형벌을 받은 사람들을 사면하고 조세를 못 갚은 사람을 용서하도록 하였다.注+③ 敎는 下敎(교서를 내림)이다. 綱紀는 王府의 官屬이다. 宥는 赦免이다. “見刑”은 현재의 형벌이다. 逋는 모자람이며 저버린 것이다. 責(빚)는 債와 통한다. 이는 官物을 축내고 망실하여 반환하지 않는 것을 용서하고 면제하는 것을 말한다.
[目] 여러 장군들과 보좌관들이 두 왕(營陽王과 廬陵王)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서 모두 의심하여 〈劉義隆에게〉 동쪽으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司馬 王華가 말하기를
“先帝께서는 천하에 큰 공적을 이룩하시어 四海가 복종하였으니, 비록 계승한 군주(劉義符)가 기강을 잃었지만注+① “嗣主”는 劉義府를 말한다. “不綱”은 紀綱을 잃은 것을 말한다. 本朝에 대한 인망은 아직 바뀌지 않았습니다. 徐羨之는 중간 등급의 재주를 가진 빈한한 士人이고, 傅亮은 평민 출신의 일반 선비로서 先帝의 유지를 받아 높은 중책에 있으니, 대번에 은덕을 감히 배반할 리가 없습니다.
여릉왕이 엄격하고 단호하여 장래에 반드시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너그럽고 인자하신 전하로서 저들이 형제 순서를 뛰어넘어 받들어 영접하여 은덕을 받기를 바라는 것이니注+② “冀以見德”은 〈劉義隆이〉 定策의 공을 〈자신들의〉 은덕으로 여기길 바람을 말한 것이다. , 저 부질없는 논의(동쪽으로 가지 말라는 논의)는 반드시 옳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 다섯 명은注+③ “五人”은 徐羨之․傅亮․謝晦․檀道濟․王弘을 말한다. 공로가 같고 지위가 나란하니 누가 서로 양보하려 하겠습니까. 가령 반역의 생각을 품었어도 형세상 반드시 실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廢主 劉義符가 만약 살아 있다면 그들이 장차 화를 입을까 걱정하여 〈영양왕과 여릉왕을〉 죽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니, 대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매우 지나친 것에 말미암은 것이고, 권력을 장악하여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여 어린 군주에게 자신들을 우대하게 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의륭이 말하기를 “경은 다시 注+④ 宋昌의 일이 漢나라 高后(呂太后) 8년(B.C.180)에 보인다. 되고 싶은가.”라고 하였다.
長史 王曇首와 南蠻校尉 到彥之가 모두 가기를 권하니, 마침내 명하여 왕화에게 荊州에 남아서 鎭守하도록 하고, 도언지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에 세우려고 하였다. 도언지가 말하기를
“저들이 모반하지 않을 것이 명백하다면注+⑤ 了는 명백히 아는 것이다. 응당 관복을 입고 하류로 따라갈 것이고, 만약 우려가 있다면 이 군사로는 충분히 믿을 만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시 혐의하는 단서를 만들게 될 것이니, 원근의 소망에 부응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마침 雍州刺史 褚叔度가 卒하자 마침내 도언지를 파견하여 임시로 襄陽에 鎭守하도록 하였다.
[目] 劉義隆이 마침내 江陵을 출발하여 傅亮을 引見할 때에 소리 내어 우니注+① 咽(목이 메이다)은 烏結의 切이다. “嗚咽”은 처량하게 목메어 우는 것이다. ,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윽고 劉義眞과 少帝(劉義符)가 죽고 폐위된 경과를 묻고 슬피 곡하고 오열하니,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이 쳐다보지 못하였다.
부량이 땀을 흘리며 대답하지 못했는데 마침내 到彥之․王華 등에게 심중의 뜻을 알려서 스스로 깊게 결속하였다. 유의륭은 府州의 문무 관원으로 자신을 호위하게 하고, 行臺 관원의 여러 하인들은注+② 力은 하인을 말한다. “臺官衆力”은 建康의 臺省에서 보내온 백관의 여러 인력을 말한다. 유의륭의 隊伍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參軍 朱容子가 칼을 쥐고 왕이 탄 배의 문 밖에 있으면서 혁대를 풀지 않은 지가 수십 일이었다.注+③ 〈“不解帶”는〉 비상사태를 방비한 것이다. 舟는 왕이 탄 배이다.
[綱] 가을에 西秦이 北涼을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綱] 8월에 宋主 劉義隆이 즉위하였다.
[目] 宜都王 劉義隆이 建康에 이르니, 여러 신하들이 新亭에서 영접하고 배례하였다. 이때 徐羨之가 傅亮에게 묻기를 “의도왕은 누구와 비교할 수 있는가.”라고 하니, 부량이 말하기를 “晉나라 文帝와 景帝注+① 文帝와 景帝는 司馬昭와 司馬師를 말한다. 이상의 분이다.”라고 하였다.
서선지가 말하기를 “반드시 나의 忠心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자, 부량이 말하기를 “그렇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注+② 傅亮은 진실로 그가 화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유의륭은 初寧陵(劉裕의 능)을 배알하고 돌아와서 中堂에 머물렀다.注+③ 東晉 孝武帝(司馬曜)는 太學이 秦淮 남쪽에 있어 臺城과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여 임시로 中堂을 太學으로 삼아 先聖에게 친히 釋奠을 하였다. 中堂은 또한 秦淮의 북쪽에 있으니, 다만 臺城의 밖에 있을 뿐이다. 백관이 옥새와 인수를 바치자 유의륭이 네 차례 사양하고서 마침내 받고는 드디어 황제에 즉위하였다.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太廟를 배알하였으며, 廬陵王의 이전 봉호를 회복시키고, 여릉왕의 靈柩를 맞이하여 건강으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目] 行荊州刺史 謝晦의 지위를 정식으로 삼았다. 사회가 형주로 출발할 적에 蔡廓에게 묻기를 “나는 화를 모면하겠는가.”라고 하니, 채확이 말하기를
“경은 先帝의 고명을 받았고 사직을 맡았으며 혼미한 군주를 폐위하고 현명한 군주를 세웠으니 대의에서는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남의 두 형을 죽이고서 北面을 하여, 군주를 흔드는 위세를 지니고 上流의 重鎭을 점거하고 있으니 옛날의 일을 가지고 지금의 일을 헤아려보면 스스로 화를 모면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사회는 처음에는 두려워 떠날 수 없었는데, 출발하고 나서는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제 여기를 벗어나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徐羨之 등의 작위를 올렸는데 차등을 두었다.
有司가 아뢰기를 “황상께서는 전례에 따라서 華林園에 가서 소송을 다스려야 합니다.”라고 하니, 조서를 내리기를 “정치와 형벌은 아직 다 알지 못하는 것이 많으니 이전과 같이 두 公이注+① 두 공은 徐羨之와 王弘을 말한다. 신문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마침내 王曇首와 王華를 侍中으로 삼고, 竟陵王 劉義宣을注+② 劉義宣은 宋 高祖(劉裕)의 아들이다. 石頭에서 鎭守하게 하였다.
서선지 등이 到彥之를 雍州刺史에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불러서 中領軍으로 삼아서 군사 업무를 맡겼다.
도언지가 襄陽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적에 사회는 도언지가 자기를 방문하지注+③ 過(들르다)는 古禾의 切이다. 않을까 염려하였다. 도언지가 楊口에 이르러 걸어서 江陵에 가서 깊이 성의를 보이자, 사회도 역시 후한 마음으로 친교를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사회가 크게 안심하였다.
[綱] 柔然이 北魏를 침략하였다.
[目] 柔然의 紇升蓋可汗은 北魏의 太宗(拓跋嗣)이 殂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6만 기병을 거느리고 雲中에 침입하여 盛樂宮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注+① 紇升蓋는 柔然王의 호칭인데 중국말에 ‘싸워 이긴다.’라는 말과 같으며, 그 왕의 이름은 大檀이다. 北魏의 선조 拓跋什翼犍이 처음에 雲中의 盛樂宮에 거처하였다. 〈그 다음해에〉 盛樂城을 옛 성에 남쪽 8리 되는 곳에 쌓았다.
魏主가 직접 경무장한 기병을 거느리고 유연을 토벌하여 삼일 낮 이틀 밤 만에 운중에 도착하니, 흘승개가한이 기병을 이끌고서 魏主를 포위한 것이 50여 겹이었고, 기병이 앞뒤의 말의 머리를 바짝 붙여서 담장처럼 나열하니, 北魏의 장병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魏主의 안색이 태연자약하니 장병들의 마음이 이내 안정되었다. 흘승개가한의 조카 於陟斤이 大將이 되었는데 北魏 사람이 활을 쏘아 맞추어 죽이니, 흘승개가한이 두려워하여 도망갔다.
[綱] 겨울 11월에 吐谷渾王 慕容阿柴가 卒하자, 동생 慕容慕璝가 즉위하였다.
[目] 慕容阿柴는 20명의 아들을 두었다. 병이 위독해지자 아들들과 동생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先公 車騎將軍(慕容樹洛干)께서는注+① 先公은 慕容樹洛干을 말한다. 모용수락간은 車騎將軍이라 스스로 칭하였다. 〈王位를〉 자기의 아들 慕容拾虔에게 주지 않고 나에게 주었는데, 내가 감히 내 아들 慕容緯代를 사사롭게 대하여 선군의 뜻을 잊겠는가.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마땅히 慕容慕璝를 받들어서 주군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모용위대는 모용아시의 맏아들이고, 모용모괴는 모용아시의 同母弟로 숙부 慕容烏紇提의 아들이다.注+② 慕容烏紇提가 즉위하여 慕容樹洛干의 모친을 아내로 맞아들여서 두 아들을 낳으니 慕容慕璝와 慕容慕利延이다.
모용아시가 또 여러 아들들에게 명령하여 각각 화살 하나씩 바치라고 하고, 하나의 화살을 잡아서 자기의 동생 慕容慕利延에게 주고 그것을 꺾게 하자, 모용모리연이 그것을 꺾었다.
또 〈나머지〉 19개의 화살을 잡아서 꺾게 하자 모용모리연은 꺾지 못하였다. 모용아시는 마침내 그들에게 타이르기를
“너희들은 이를 알겠느냐. 하나면 꺾기가 쉬우나 많으면 꺾기 어렵다. 너희들은 마땅히 함께 힘을 쓰고 마음을 하나로 합친 뒤에야 나라를 지키고 집안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말을 끝내고는 죽었다.
모용모괴 역시 재간과 책략을 갖고 있었다. 秦州․涼州의 生業을 잃은 백성과 氐族․羌族의 여러 종족 5, 6백 부락까지 어루만져 받아들이니, 부족의 무리가 더욱 많아졌다.
[綱] 12월에 北魏가 柔然을 정벌하여 크게 사로잡았다.
[綱] 宕昌이 北魏에게 조공을 받쳤다.
[目] 宕昌은 羌族의 혈족이다.注+① 宕(방탕하다)은 徒浪의 切이다. 宕昌은 三苗의 후손이다. 羌族의 땅은 동쪽으로는 中國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西域과 통해 있어서 길이가 수천 리이다.
각각 酋帥가 있고 部落은 땅을 나누어 살고 서로 관할하지 않았는데, 탕창이 가장 강하여 2만 여개의 부락의 백성을 소유하고 있으니, 여러 종족들이 탕창을 두려워하였다.
[綱] 夏나라 世子 赫連璝가 동생 赫連倫을 죽이니, 혁련륜의 형 赫連昌이 혁련괴를 토벌하여 죽였다.
[目] 夏主(赫連勃勃)가 장차 太子 赫連璝를 폐하고 少子 赫連倫을 세우려고 하였다. 혁련괴가 병사를 거느리고 혁련륜을 토벌하자 혁련륜이 대적하다가 패하여 죽거늘, 赫連倫의 형 赫連昌이 혁련괴를 습격하여 죽이고 그 군대를 합병하여 統萬으로 돌아왔다. 夏主는 크게 기뻐하여 혁련창을 세워서 太子로 삼았다.
夏主는 스스로 자랑하기를 좋아하여 도성에 있는 4개의 문에 이름을 붙였는데, 東門은 招魏(北魏를 부름)라 하고, 南門은 朝宋(宋나라를 조회시킴)이라 하고, 西門은 服涼(涼을 복종시킴)이라 하고, 北門은 平朔(북방을 평정함)이라 하였다.


역주
역주1 (壽)[燾] : 저본에는 ‘壽’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燾’로 바로잡았다.
역주2 特進 : 前漢 말에 설치된 관직으로 列侯 중에 특수한 지위에 있는 자에게 주었다. 魏晉南北朝時代에는 정식 加官이 되어 한직에 있거나 사직한 대신에게 주었다. 지위는 삼공의 아래다.
역주3 天門으로……통하게 : 天門과 閶闔은 모두 후대 궁궐의 대문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이 글은 ≪資治通鑑≫ 註의 ≪孫權記注≫를 인용한 것인데, 이 책이 정확히 어떤 책인지는 알 수 없다. 이는 ≪吳越春秋≫ 〈闔閭內傳〉의 고사와 관련된 것으로 여기에는 “閶門을 세우는 것은 天門을 형상하여 閶闔風을 통하게 한 것이다.[立閶門者 以象天門 通閶闔風也]” 하였다. 즉 天門은 하늘의 문이고 閶闔風은 ≪오월춘추≫의 註에 “≪史記≫ 〈律書〉에 ‘閶闔風은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閶은 인도한다는 뜻이고, 闔은 감춘다는 뜻이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說文解字≫에서는 八風(8방위의 바람) 중에 하나로 閶闔風을 들고 있다. 즉 閶闔風은 서풍을 말한다. 또한 ≪오월춘추≫에서는 창문을 闔閭가 지은 것으로 보았다.
역주4 士는……삼는다 : ≪春秋左氏傳≫ 朱申의 附註에 “臣은 그를 신하로 삼는 것이다.……士는 각종 事務를 처리할 수 있는 자를 이르고, 皁는 일을 조성하는 자를 이르고,……僕은 僕竪(僕人)로 창고에 저장한 재물을 주관하는 자이고, 臺는 臺下(官府)에서 給使 노릇 하는 微官의 명칭이니, 이상이 바로 사람의 열 가지 等級이다.” 하였다.
역주5 友와 文學 : 太子友와 太子文學 등을 가리킨 것이다.
역주6 典籤 : 지방을 통치하는 제후왕의 주변에서 문서를 처리하는 관원으로 宋나라 때에는 황제가 신임하는 자를 파견하여 제후왕들을 감시하게 하였다.
역주7 (止)[正] : 저본에는 ‘止’로 되어 있으나, ‘正’으로 바로잡았다.
역주8 (士)[七] : 저본에는 ‘士’로 되어 있으나, ≪南史≫ 〈呂文顯列傳〉에 의거하여 ‘七’로 바로잡았다.
역주9 行臺 : 지방에 있는 臺省을 이르는 말로 魏․晉나라 때에 처음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出征하였을 때 주둔한 곳에 설치한 중앙을 대표하는 정무 기구였는데, 北朝 후기에 이르러서 尙書大行臺로 호칭하고, 중앙과 다름없이 관속을 설치하여 자체적인 행정 계통을 형성하였다. 唐나라 貞觀 이후로 점점 폐지되었다가 金․元나라 때에 이르러 관할 지역이 광대하였으므로, 다시 중앙의 제도에 따라 각 지역에 설치하였다.
역주10 都督刺史 : ≪資治通鑑≫에는 行都督荊湘等七州諸軍事 荊州刺史로 되어 있다.
역주11 如字 : 한 글자에 여러 독음이 있는 경우 본음대로 읽으라는 것이다.
역주12 大司馬門 : 司馬門은 황궁의 外門을 이른다. 궁궐 담장 안의 衛兵이 있는 곳으로 궁궐의 사면에 모두 司馬가 있었다. 이에 외문을 사마문이라 한 것이다.
역주13 宋昌이……싶은가 : 宋昌은 漢나라 文帝의 謀臣이다. 周勃 등이 여러 呂氏들을 멸망시키고 당시 代王으로 있던 문제를 迎立하러 왔을 때, 漢室의 舊臣들을 믿을 수 없다는 대왕의 신하들의 논의를 뒤엎고 대왕을 皇帝로 즉위시키는 데에 앞장섰다. 문제가 代邸로부터 궁중에 들어온 뒤 군졸의 向背가 염려되어 밤에 송창으로 衛將軍을 삼아 군졸을 통솔하게 하였다.
역주14 越次 : 형을 제치고 아우를 세우는 일을 말한다. 劉義眞(盧陵王)은 劉義隆(宜都王)의 형이다.
역주15 (城)[弘] : 저본에는 ‘城’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弘’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6 柔然寇魏 : “柔然이 北魏에 대하여는 ‘侵’이라고 기록한 것이 보통인데(晉 安帝 義熙 10년(414)에 근거한 것이다.), 여기서 ‘寇魏’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晉나라가 멸망하여 〈정통이 사라졌기 때문에〉 宋나라와 대등한 지위에 북위를 나아가게 한 것이다.[柔然於魏書侵 恒也(據晉安帝義熙十年) 此其書寇魏 何 晉滅而進魏於宋也]” ≪書法≫
역주17 騎逼馬首 : ≪資治通鑑新註≫(陝西人民出版社, 1998)에서는 柔然의 기병이 魏主의 말 앞까지 다가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포위가 50겹으로 두껍고 담처럼 촘촘하다고 보아서 이처럼 번역하였다.
역주18 吐谷渾王阿柴卒 弟慕璝立 : “吐谷渾 慕容樹洛干은 ‘死’라고 기록하였는데(晉나라 安帝 義熙 13년(417)에 자세하다.) 여기서는 어찌하여 ‘卒’이라고 기록하였는가. 晉나라가 망했기 때문이다. 이때에 晉나라가 망해서 中國에 正統이 없고 吐谷渾은 순수한 夷狄이 아니기 때문에 〈그 지위에 맞게〉 나아가게 한 것이다. 隋나라 開皇 11년(591)에 이르러 中國에 주인이 있게 된 뒤에는 다시 慕容夸呂를 ‘死’로 기록하였다.[樹洛干書死矣(詳晉安帝義熙十三年) 此則曷爲書卒 晉亡也 於是晉亡 中國無正統 吐谷渾非純夷也 故進之 至隋開皇十一年 中國有主 然後夸呂復書死]” ≪書法≫ 朱熹의 〈資治通鑑綱目凡例〉에서 崩葬을 쓰는 書例를 설명하면서 秦漢 이후 王이 죽으면 모두 卒이라 하고, 王公을 칭한 자에게 卒이라 쓰며, 蠻夷의 君長에게 ‘死’를 쓴다 하였다.
역주19 夏世子璝殺其弟倫 倫兄昌討璝殺之 : “赫連璝가 赫連倫을 죽인 것과 그의 형 赫連昌이 혁련괴를 죽인 것은 똑같은데, ‘討璝’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자기의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혁련괴가 혁련륜을 토벌하였으니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은 것이 극심하다. 이와 같은 경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토벌할 수 있는 것인데, 혁련괴에게 ‘討’라고 기록하지 않으면 世子의 지위를 〈혁련창이〉 힘으로 빼앗은 것이 된다. 그렇다면 ‘世子’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世子’라고 기록한 것은 아버지가 생존해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데도 後趙의 太子 石宣이 자기 아우를 살해하여 죽였기 때문에 ‘伏誅’라고 기록하고, 夏나라 세자 혁련괴가 동생을 죽였기 때문에 ‘討’라고 기록한 것이다(晉나라 穆帝 永和 4년(348)에 자세하다.).[璝殺倫 昌殺璝 等耳 書討璝 何 不父其父也 父欲立少 而璝伐之 不父其父 甚矣 若是者 人得而討之 璝不書討 則世子之位 可以力取矣 然則書世子 何 書世子 見其有父在也 是故苟父在 趙太子宣以殺弟書伏誅 夏世子璝以殺弟書討(詳晉穆帝永和四年)]” ≪書法≫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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