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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徐羨之 등이 장차 劉義符를 폐하려고 할 적에 檀道濟가 이전 조정의 옛 장수로서 위세가 殿省(조정)을 승복시킨다고 하여 마침내 단도제와 江州刺史 王弘을 불러서 入朝하게 하여 廢立의 모의를 그들에게 고하였다.
謝晦가 장수와 병사를 관부 안에 모이게 하여 中書舍人 邢安泰와 潘盛에게 안에서 호응하게 하였다. 밤에 단도제를 맞이하여 함께 자는데 사회는 두려워서 잠을 잘 수 없었으나 단도제는 침석에 들어 잠이 곧 깊어졌다.
이때 劉義符가 華林園에
注+① 魏氏가 華林園을 洛陽 안에 만들었는데, 晉氏가 남쪽으로 건너와 그 제도를 모방하여 建康에 이를 만들었다. 화림원은 宮城의 북쪽 모퉁이에 있다. 나가서 점포를 늘어놓고 친히 물건을 팔았고, 측근들과 함께 龍舟에 가서 잠을 잤다. 단도제가 군사를 이끌고 雲龍門으로 들어갔는데, 형안태 등이 앞서 宿衛를 타일렀기 때문에 막는 사람이 없었다.
군사들이 들어가서 두 명의 侍從을 죽이고 유의부를 부축하여 나와서, 옥새와 인끈을 거두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하직인사를 하고 유의부를 옛 태자궁으로 호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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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여러 장군들과 보좌관들이 두 왕(營陽王과 廬陵王)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서 모두 의심하여 〈劉義隆에게〉 동쪽으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司馬 王華가 말하기를
“先帝께서는 천하에 큰 공적을 이룩하시어 四海가 복종하였으니, 비록 계승한 군주(劉義符)가 기강을 잃었지만
注+① “嗣主”는 劉義府를 말한다. “不綱”은 紀綱을 잃은 것을 말한다. 本朝에 대한 인망은 아직 바뀌지 않았습니다. 徐羨之는 중간 등급의 재주를 가진 빈한한 士人이고, 傅亮은 평민 출신의 일반 선비로서 先帝의 유지를 받아 높은 중책에 있으니, 대번에 은덕을 감히 배반할 리가 없습니다.
여릉왕이 엄격하고 단호하여 장래에 반드시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너그럽고 인자하신 전하로서 저들이 형제 순서를 뛰어넘어 받들어 영접하여 은덕을 받기를 바라는 것이니
注+② “冀以見德”은 〈劉義隆이〉 定策의 공을 〈자신들의〉 은덕으로 여기길 바람을 말한 것이다. , 저 부질없는 논의(동쪽으로 가지 말라는 논의)는 반드시 옳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 다섯 명은
注+③ “五人”은 徐羨之․傅亮․謝晦․檀道濟․王弘을 말한다. 공로가 같고 지위가 나란하니 누가 서로 양보하려 하겠습니까. 가령 반역의 생각을 품었어도 형세상 반드시 실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廢主 劉義符가 만약 살아 있다면 그들이 장차 화를 입을까 걱정하여 〈영양왕과 여릉왕을〉 죽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니, 대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매우 지나친 것에 말미암은 것이고, 권력을 장악하여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여 어린 군주에게 자신들을 우대하게 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의륭이 말하기를 “경은 다시
注+④ 宋昌의 일이 漢나라 高后(呂太后) 8년(B.C.180)에 보인다. 되고 싶은가.”라고 하였다.
長史 王曇首와 南蠻校尉 到彥之가 모두 가기를 권하니, 마침내 명하여 왕화에게 荊州에 남아서 鎭守하도록 하고, 도언지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에 세우려고 하였다. 도언지가 말하기를
“저들이 모반하지 않을 것이 명백하다면
注+⑤ 了는 명백히 아는 것이다. 응당 관복을 입고 하류로 따라갈 것이고, 만약 우려가 있다면 이 군사로는 충분히 믿을 만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시 혐의하는 단서를 만들게 될 것이니, 원근의 소망에 부응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마침 雍州刺史 褚叔度가 卒하자 마침내 도언지를 파견하여 임시로 襄陽에 鎭守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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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行荊州刺史 謝晦의 지위를 정식으로 삼았다. 사회가 형주로 출발할 적에 蔡廓에게 묻기를 “나는 화를 모면하겠는가.”라고 하니, 채확이 말하기를
“경은 先帝의 고명을 받았고 사직을 맡았으며 혼미한 군주를 폐위하고 현명한 군주를 세웠으니 대의에서는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남의 두 형을 죽이고서 北面을 하여, 군주를 흔드는 위세를 지니고 上流의 重鎭을 점거하고 있으니 옛날의 일을 가지고 지금의 일을 헤아려보면 스스로 화를 모면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사회는 처음에는 두려워 떠날 수 없었는데, 출발하고 나서는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제 여기를 벗어나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徐羨之 등의 작위를 올렸는데 차등을 두었다.
有司가 아뢰기를 “황상께서는 전례에 따라서 華林園에 가서 소송을 다스려야 합니다.”라고 하니, 조서를 내리기를 “정치와 형벌은 아직 다 알지 못하는 것이 많으니 이전과 같이 두 公이
注+① 두 공은 徐羨之와 王弘을 말한다. 신문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마침내 王曇首와 王華를 侍中으로 삼고, 竟陵王 劉義宣을
注+② 劉義宣은 宋 高祖(劉裕)의 아들이다. 石頭에서 鎭守하게 하였다.
서선지 등이 到彥之를 雍州刺史에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불러서 中領軍으로 삼아서 군사 업무를 맡겼다.
도언지가 襄陽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적에 사회는 도언지가 자기를 방문하지
注+③ 過(들르다)는 古禾의 切이다. 않을까 염려하였다. 도언지가 楊口에 이르러 걸어서 江陵에 가서 깊이 성의를 보이자, 사회도 역시 후한 마음으로 친교를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사회가 크게 안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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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柔然의 紇升蓋可汗은 北魏의 太宗(拓跋嗣)이 殂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6만 기병을 거느리고 雲中에 침입하여 盛樂宮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注+① 紇升蓋는 柔然王의 호칭인데 중국말에 ‘싸워 이긴다.’라는 말과 같으며, 그 왕의 이름은 大檀이다. 北魏의 선조 拓跋什翼犍이 처음에 雲中의 盛樂宮에 거처하였다. 〈그 다음해에〉 盛樂城을 옛 성에 남쪽 8리 되는 곳에 쌓았다.
魏主가 직접 경무장한 기병을 거느리고 유연을 토벌하여 삼일 낮 이틀 밤 만에 운중에 도착하니, 흘승개가한이 기병을 이끌고서 魏主를 포위한 것이 50여 겹이었고, 기병이 앞뒤의 말의 머리를 바짝 붙여서 담장처럼 나열하니, 北魏의 장병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魏主의 안색이 태연자약하니 장병들의 마음이 이내 안정되었다. 흘승개가한의 조카 於陟斤이 大將이 되었는데 北魏 사람이 활을 쏘아 맞추어 죽이니, 흘승개가한이 두려워하여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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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慕容阿柴는 20명의 아들을 두었다. 병이 위독해지자 아들들과 동생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先公 車騎將軍(慕容樹洛干)께서는
注+① 先公은 慕容樹洛干을 말한다. 모용수락간은 車騎將軍이라 스스로 칭하였다. 〈王位를〉 자기의 아들 慕容拾虔에게 주지 않고 나에게 주었는데, 내가 감히 내 아들 慕容緯代를 사사롭게 대하여 선군의 뜻을 잊겠는가.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마땅히 慕容慕璝를 받들어서 주군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모용위대는 모용아시의 맏아들이고, 모용모괴는 모용아시의 同母弟로 숙부 慕容烏紇提의 아들이다.
注+② 慕容烏紇提가 즉위하여 慕容樹洛干의 모친을 아내로 맞아들여서 두 아들을 낳으니 慕容慕璝와 慕容慕利延이다.
모용아시가 또 여러 아들들에게 명령하여 각각 화살 하나씩 바치라고 하고, 하나의 화살을 잡아서 자기의 동생 慕容慕利延에게 주고 그것을 꺾게 하자, 모용모리연이 그것을 꺾었다.
또 〈나머지〉 19개의 화살을 잡아서 꺾게 하자 모용모리연은 꺾지 못하였다. 모용아시는 마침내 그들에게 타이르기를
“너희들은 이를 알겠느냐. 하나면 꺾기가 쉬우나 많으면 꺾기 어렵다. 너희들은 마땅히 함께 힘을 쓰고 마음을 하나로 합친 뒤에야 나라를 지키고 집안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말을 끝내고는 죽었다.
모용모괴 역시 재간과 책략을 갖고 있었다. 秦州․涼州의 生業을 잃은 백성과 氐族․羌族의 여러 종족 5, 6백 부락까지 어루만져 받아들이니, 부족의 무리가 더욱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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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夏主(赫連勃勃)가 장차 太子 赫連璝를 폐하고 少子 赫連倫을 세우려고 하였다. 혁련괴가 병사를 거느리고 혁련륜을 토벌하자 혁련륜이 대적하다가 패하여 죽거늘, 赫連倫의 형 赫連昌이 혁련괴를 습격하여 죽이고 그 군대를 합병하여 統萬으로 돌아왔다. 夏主는 크게 기뻐하여 혁련창을 세워서 太子로 삼았다.
夏主는 스스로 자랑하기를 좋아하여 도성에 있는 4개의 문에 이름을 붙였는데, 東門은 招魏(北魏를 부름)라 하고, 南門은 朝宋(宋나라를 조회시킴)이라 하고, 西門은 服涼(涼을 복종시킴)이라 하고, 北門은 平朔(북방을 평정함)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