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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애제哀帝 때에 한漢나라가 이미 쇠하였으나, 흉노匈奴와 오손烏孫이 여전히 신하의 예禮를 폐하지 않았고 서역西域에서 〈한漢나라의〉 인수印綬를 찬 나라가 50여 개국이었으니,
비록 ‘중국中國의 영광스러운 광경’이라고는 하겠으나, 비유하면 큰 나무가 가지를 멀리 뻗어서 가지와 잎이 아직 무성하나 좀벌레가 둥치에 생겨 뿌리와 줄기가 장차 넘어지게 될 형상과 같았다.
이 때문에 성주聖主는 오로지 내치內治를 힘써 근본을 견고히 하고, 멀리 경략經略하기를 힘쓰느라 가까운 계책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그 염려함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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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왕망王莽이 태후太后의 지시로 상서尙書를 시켜 동현董賢이 황제의 질병에 직접 약을 맛보지 않았다고 탄핵하여, 궁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동현이 대궐로 나와 관을 벗고 맨발로 사죄하자,
왕망은 태후의 명으로 대궐 아래로 나아가서
책서策書를 내려 동현의
인수印綬를 거두고 파면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니
注+① 즉卽은 나아간다는 뜻이다.,
동현의 집에서는 두려워하여 그날 밤에 장례를 치렀는데,
왕망은 그가 거짓으로 죽은 체 하는가 의심하여 그의 관을 꺼내어
옥獄에 가서 검사해보고 인하여 감옥 안에 매장하였다.
注+② 진診은 음이 진軫이니, 검사함이다.
동현의 가재家財 43억[만만萬萬] 전錢을 몰수하고 동현의 아비인 동공董恭은 가솔들과 함께 합포合浦로 귀양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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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태황태후太皇太后가 공경公卿들에게 조령詔令을 내려 대사마大司馬가 될 만한 자를 천거하게 하자, 공광孔光 이하가 모두 왕망王莽을 천거하였으나,
전장군前將軍 하무何武와 좌장군左將軍 공손녹公孫祿만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혜제惠帝와 소제昭帝 때에 외척이 권력을 잡아서 거의 사직을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지금 대를 이어 후사가 없으니, 마땅히 가까운 친족 중에 어린 군주를 가려서 세워야 합니다.
외척으로 하여금 권력을 잡게 해서는 안 되니, 친한 자(외척)와 소원한 자(타성)가 서로 뒤섞이게 하는 것만이 국가를 위한 편리한 계책입니다.”
注+① 비比는 자주이다. 친親은 외척外戚을 이르고, 소疎는 타성他姓 중에 장군將軍과 공경公卿이 된 자를 이른다. 착錯은 사이에 섞인다는 뜻이다. “위국계편爲國計便”은 국가를 위한 계책 중에 오직 이것만이 편리함이 됨을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무는 공손록을 천거하고 공손록 또한 하무를 천거하였으나, 태황태후가 직접 왕망을 등용하여 대사마로 삼아서 상서尙書의 일을 겸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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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홍양후紅陽侯 왕립王立이 비록 직위에 있지 않았으나,
왕망王莽은 왕립王立이 태후太后에게 넌지시 말해서 자신으로 하여금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할까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공광孔光으로 하여금 왕립의 죄악을 아뢰어, 봉국封國으로 내보낼 것을 청하게 하였는데, 태후가 따르지 않았다.
“한漢나라가 대를 이어 후사가 없고, 태후께서 홀로 어린 군주를 대신하여 정사를 통솔하시니,
공정함을 힘써서 천하의 모범이 되더라도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까 염려되는데
注+① 역力은 힘을 쓴다는 뜻이다.,
이제 사사로운 은혜로 이처럼 대신大臣의 논의를 거스르시니, 아랫사람들이 간사해져서 난亂이 이로부터 일어날 것입니다.”
태후가 부득이 왕립을 보내니, 왕망이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협박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