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目] 조주趙主석륵石勒이 서광徐光에게 이르기를 “짐朕은 옛날 어떠한 군주에게 비할注+① 方은 비교함이다. 만한가?” 하니, 〈서광이〉 대답하기를 “폐하의 신묘한 무용武勇과 모략謀略은 한漢나라 고조高祖보다 더합니다.” 하였다.
석륵이 웃으며 말하였다. “내가 어찌 자신을 모른단 말인가. 경卿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 짐이 만약 한漢나라 고조高祖를 만났으면 마땅히 북면北面하여 그를 섬겨서 한신韓信, 팽월彭越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것이요, 만약 광무제光武帝를 만났으면 마땅히 함께 중원中原을 다투어서
대장부는 일을 함에 마땅히 광명정대하여注+② 礌는 磊와 통하니, “磊落”은 넓고 공정한 모양이다. 해와 달처럼 분명해야 하니, 끝내 조맹덕曹孟徳(조조曹操)과 사마중달司馬仲逹(사마의司馬懿)이 남의 고아와 과부를 속여서 여우처럼注+③ 여우는 요망한 짐승이니, 능히 사람을 홀린다. 〈부정한 방법으로 사람을〉 미혹시켜 천하를 취했던 것을 본받지는 않겠다.”
目
[목目] 석륵石勒은 비록 배우지 못하였으나, 제생諸生들로 하여금 책을 읽게 하고 듣기를 좋아하였으며, 때로는 자기 견해를 가지고 고금古今의 득실得失을 논하니, 듣는 자들이 기뻐하여 복종하였다.
서광이 인하여 석륵을 설득하기를 “중산왕中山王(석호石虎)이 용맹하고 포악하며 속임수가 많으니, 폐하께서 하루아침 갑자기 서거하신다면 신臣은 태자가 사직을 소유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마땅히 점차 중산왕의 권력을 빼앗아서, 태자로 하여금 빨리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정하程遐 또한 말하기를 “중산왕은 용맹하고 사납고 잔인하여 위엄이 내외에 진동하고 또 여러 아들들이 모두 병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뜻과 야망이 끝이 없으니,注+② 石勒이 石虎의 아들 石邃와 石宣에게 병권을 주관하게 하였다. “志願無極”은 석호가 천자의 자리를 넘보는 뜻이 있음을 이른다. 만약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시면 신은 종묘宗廟가 혈식血食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석륵은 그들의 말을 모두 듣지 않았다.
目
[목目] 서광徐光이 며칠 후에 틈을 타서 석륵石勒에게 말하기를 “지금 국가가 큰일이 없이 평안한데, 폐하께서는 언짢은 기색이 있는 듯하시니 어째서입니까?” 하니, 석륵이 말하기를 “내 아직 오吴(동진東晉)와 촉蜀(성한成漢)을 평정하지 못했으니, 후세 사람들이 나를 천명을 받은 군주(황제)라고 아니 여길까 염려된다.” 하였다.
서광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두 도읍을 차지하고 여덟 주州를 평정하셨으니,注+① 두 도읍은 長安과 洛陽이고, 여덟 州는 冀州, 幽州, 幷州, 靑州, 兗州, 豫州, 司州, 雍州이다.제왕帝王의 정통正統이 폐하에게 있지 않고 다시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또 폐하는 폐와 심장의 병(위급한 화환禍患)을 근심하지 않고, 다시 사지四肢를 근심하십니까.
중산왕中山王(석호石虎)은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지 못하고 이익을 보면 의리를 잊으며, 부자父子가 함께 권력과 지위를 차지하고 불안해하면서注+② “耿耿”은 불안해하는 모양이다. 항상 불만스런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또 근래 동궁東宮을 모시고 연회하는 자리에서 황태자를 경시하는 기색이 있었으니, 신은 폐하께서 서거하신 뒤에 더 이상 그를 제재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석륵은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처음으로 태자에게 명命해서 상서尙書에서 아뢰는 일을 재결하게 하고,注+③ 〈“省可尙書奏事”는〉 그 〈내용이〉 가한 것은 살펴보아 행하고, 다시 임금에게 아뢰지 않는 것이다.중상시中常侍엄진嚴震으로 하여금 참여하여 가부可否를 결정하게 하였으며, 오직 정벌征伐과 죄인을 참수斬首하는 큰일만 석륵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이에 엄진의 권세가 정승보다 더하였고 석호의 문門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참새 그물을 칠 정도였다.注+④ “可設雀羅”는 고요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이에 석호는 더욱 앙앙불락怏怏不樂하였다.
綱
[강綱] 가을에 태위太尉도간陶侃이 남중랑장南中郎將환선桓宣을 보내어 양양襄陽을 공격해서 함락시키고, 마침내 〈환선으로 하여금 양양에〉 머물러 진주하게 하였다.
目
[목目] 조趙나라(후조後趙)의 곽경郭敬이 남쪽으로 강서江西 지역을注+① 江西는 邾城 동쪽에서 歷陽까지를 이른다. 노략질하자, 도간陶侃이 환선桓宣을 보내어 빈틈을 타서 번성樊城을 공격하여 그 무리를 모두 사로잡았다.
곽경이 곧바로 번성을 구원하였는데, 환선이 그와 열수涅水(열수)에서注+② ≪水經註≫에 “涅水는 南陽郡 涅陽縣 서북쪽의 岐棘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열양현을 지나고, 또 동남쪽으로 安衆縣을 지나고, 또 동남쪽으로 新野縣에 이르러 동쪽으로 淯水(육수)로 들어간다.” 하였다. 싸워서 격파하니, 곽경이 두려워하여 도망갔다. 환선이 마침내 양양襄陽을 함락하니, 도간이 환선으로 하여금 양양에 진주하게 하였다.
환선은 이제 막 귀의한 자들을 회유하여 형벌을 줄이고 위의威儀를 간략히 하였으며, 농사짓고 누에치는 것을 권장하고 감독하였다. 그리하여 때로 호미와 쟁기자루를 수레에 싣고注+③ 軺는 使者가 타는 작은 수레에 말을 멍에한 것이다. 軒은 굽은 끌채이니, 闌板(수레를 가로막는 판자)을 軒이라 한다. 직접 백성들을 거느리고 가서 김매고 수확하였다.
양양에 있은 지 10여 년에 조趙나라가 두 번 공격하였는데, 환선은 적고 약한 병력으로 막아내고 지켜서 조趙나라가 승리하지 못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조적祖逖과 주방周訪에 버금간다고 칭찬하였다.
[목目] 장중화張重華는注+① 重은 直龍의 切이다.장준張駿의 둘째 아들이다. 양주涼州(전량前涼)의 요속僚屬이 장준에게 양왕涼王을 칭하고 백관百官을 설치할 것을 권하자, 장준이 말하기를 “이는 신하가 마땅히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감히 이것을 말하는 자는 죄를 주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경내境内에서는 모두 그를 양왕涼王이라고 칭하였다.
역주
역주1사슴이……모른다 :
원문의 ‘鹿死誰手’는 사슴을 쫓는 것을 정권을 쟁탈하는 것에 비유한 말로, 석륵이 광무제와 자기 중에 누가 승리하여 천하를 얻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역주2酈食其(역이기)가……권했다 :
漢나라 高祖가 楚나라에 자주 침탈을 당하자, 역이기가 말하기를 “湯王과 武王이 桀王과 紂王을 친 뒤에 그 후손을 杞나라와 宋나라에 봉한 古事를 따라 六國의 후손을 다시 세우고, 德義가 행해진 뒤에 霸者를 칭하면, 楚나라도 옷깃을 여미고 조회할 것입니다.” 하자, 고조가 곧 六國의 印章을 새기게 하였다. 이때 張良이 이 일의 불가함을 말하니, 고조가 곧 그 인장을 녹여 없애게 하였다.(≪史記≫ 권55 〈留侯世家〉)
역주3趙命太子弘 省可尙書奏事 :
“太子가 일을 결단하는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태자에게 ‘일을 살폈다.’라고 쓴 것이 2번이고(이해 趙나라 太子 石弘, 咸康 6년(340) 趙나라 太子 石宣), ‘百官을 총괄했다.’라고 쓴 것이 1번이고(宋나라 甲申年(444) 北魏 太子 拓跋晃), ‘일을 결단하고 송사를 결단했다.’라고 쓴 것이 3번이고(唐나라 髙祖 武徳 9년(626), 太宗 貞觀 4년(630), 睿宗 景雲 2년(711)), ‘政事를 다스렸다.’라고 쓴 것이 2번이고(唐나라 太宗 貞觀 19년(645), 23년(649)), ‘監國했다.’라고 쓴 것이 7번이다(宋나라 壬戌年(422) 北魏 太子 拓跋燾, 唐나라 太宗 貞觀 19년, 髙宗 調露 원년(679)과 弘道 원년(683), 睿宗 景雲 2년(711), 玄宗 天寳 14년(755), 徳宗 貞元 20년(804)).[太子决事自此始 終綱目 太子書省事二(是年趙太子弘 咸康六年趙太子宣) 總百揆一(宋甲申年魏太子晃) 書决事决訟三(唐髙祖武徳九年 太宗貞觀四年 睿宗景雲二年) 書聴政二(唐太宗貞觀十九年 二十三年) 書監國七(宋壬戌年魏太子燾 唐太宗貞觀十九年 髙宗調露元年 弘道元年 睿宗景雲二年 玄宗天寳十四載 徳宗貞元二十年)]” ≪書法≫
역주4仁政으로……없애는 :
원문의 ‘勝殘去殺’은 군주가 仁政을 베풀어 殘暴한 사람이 교화되고 善을 행함으로써 死刑을 쓰지 않는 것을 이른다. ≪論語≫ 〈子路〉에 “善人이 나라를 백 년 동안 다스리면 또한 흉악한 자를 이겨내고 사형을 쓰지 않을 수 있다.[善人爲邦百年 亦可以勝殘去殺矣]”라고 보인다.
역주5太尉侃 遣南中郎將桓宣 :
“‘遣(보냈다)’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功을 陶侃에게 돌린 것이다. 무릇 〈어떤 일에 대하여〉 공과 죄가 있을 적에 ‘보냈다’라고 쓴 것은 그 윗사람에게 공과 죄를 돌린 것이다. 이 때문에 桓宣이 襄陽을 함락했을 적에 ‘도간이 보냈다.’라고 썼고(이해), 唐나라 渾瑊이 吐蕃을 물리쳤을 적에 ‘郭子儀가 보냈다.’라고 썼고(唐나라 代宗 大曆 8년(773)), 李懐光이 토번을 격파했을 때에 ‘곽자의가 보냈다.’라고 썼으니(大曆 13년(778)), 이는 모두 그 윗사람에게 功을 돌린 말이다.[書遣 何 歸功侃也 凡功罪書遣 歸其上也 是故桓宣之拔襄陽 書陶侃遣(是年) 渾瑊之却吐蕃 書郭子儀遣(唐代宗大曆八年) 李懐光之破吐蕃 書郭子儀遣(大曆十三年) 皆歸功於其上之辭也]” ≪書法≫
역주6趙나라(後趙)……삼았다 :
이는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前涼에 관한 기사이다. 이때 前涼이 後趙에 겉으로 稱臣하였으나, 독자적인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