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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에 趙將麻秋 爲苻洪所獲하여 以爲軍師將軍이러니 説洪曰 冉閔, 石祗方相持하니 中原을 未可平也라 不如先收關中하여 基業已固然後에 東爭天下니이다 洪이 深然之하다
既而요 秋因宴鴆洪하고 欲并其衆이어늘 世子健이 收秋斬之하다
洪이 謂健曰 吾所以未入關者는 以爲中州可定이러니 今不幸爲豎子所困이라 中州는 非汝兄弟所能辦이니 我死어든 汝急入關하라하고 言終而卒하다
健이 代統其衆하고 乃去王號하고 稱晉官爵하여 告喪請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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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석민石閔은 석씨石氏의 종적을 없애고자 하여 도참圖讖의 글에 조趙나라 다음에 이씨李氏가 뒤를 잇는다는 내용이 있는 것에 가탁하여 국호를 위衛로 고치고 성을 이씨李氏로 고쳤다.
이때 신흥왕新興王 석지石祗가 양국襄國에 진주하니, 공公․후侯․경卿․교校들이 그리로 달아나서 따르는 자가 만여 명이었다. 장침張沈과 장하도張賀度 등의 여러 장수들도 각각 수만의 병력을 보유하고서 또한 모두 석민에게 붙지 않았다.
여음왕汝陰王 석곤石琨이 군대를 거느리고
업성鄴城을 공격하니, 석민이 이들과 성 북쪽에서 싸워서 패퇴시키고 마침내
석독石瀆에서
注+①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鄴縣에 石竇堰(석두언)이 있다.” 하였다. 이농李農과 함께 장하도를 공격하였다.
석감은 은밀히 장침을 불러 빈틈을 타고 업성을 기습하게 하였는데, 환관이 이 사실을 고하자, 석민과 이농은 석감을 폐하여 죽이고서 조주趙主 석호石虎의 28명의 손자를 함께 죽이고 석씨를 모두 멸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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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사도司徒 신종申鍾 등이 석민石閔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니, 석민은 이농李農에게 사양하였으나, 이농이 굳이 사양하였다.
석민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 진晉나라 사람이니, 제군들과 함께 주州와 군郡을 나누어 점령해서 각각 목牧과 수守, 공公과 후侯를 칭하고 천자를 받들어 맞이하여 돌아가 낙양洛陽에 도읍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상서尙書 호목胡睦이 말하기를 “폐하는 성스러운 덕이 하늘에 응하시니, 마땅히 제위帝位에 오르셔야 합니다. 진晉나라는 쇠약하여 멀리 장강長江 밖으로 도망하여 있으니, 어찌 능히 영웅을 통솔하여 사해를 통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석민이 말하기를 “상서는 기미를 알고 천명을 안다고 이를 만하다.” 하고는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국호를 대위大魏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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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연왕燕王 모용준慕容儁이 모용패慕容霸, 모여우慕輿于와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세 길로 나누어 변방을 나가 조趙나라를 공격하니, 조趙나라의 수장守將들이 모두 달아났다.
모용준은 마침내
계성薊城을 함락하고 계성의
사졸士卒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자 하였는데, 모용패가 간하기를 “
조趙나라가 포학한 짓을 하였으니, 왕이 군대를 일으켜
조趙나라를 공격함은 장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여 중국을
注+① 中州는 中原, 中華라는 말과 같다. 어루만져 소유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처음 계성을 얻고서 그 사졸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인다면 왕사王師의 출동을 알리는 예고가 될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마침내 사졸들을 풀어주었다. 모용준이 계성에 들어가 도읍하니, 와서 항복하는 중국의 사녀士女들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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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조趙나라 장수 마추麻秋가 부홍苻洪에게 사로잡혀 군사장군軍師將軍이 되었는데, 부홍을 설득하기를 “염민冉閔과 석지石祗가 막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일거에〉 중원을 평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관중關中(장안長安)을 수습하여 기업基業이 견고해진 뒤에 동쪽으로 천하를 다투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부홍이 그의 말을 매우 옳게 여겼다.
이윽고 마추는 잔치를 인하여 부홍에게 짐독鴆毒을 마시게 하고 그의 무리를 겸병하고자 하였는데, 세자世子 부건苻健이 마추를 체포하여 참수하였다.
부홍이 부건에게 이르기를 “내가 아직 관중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중원을 평정할 수 있다고 여겨서였는데, 지금 불행히 하찮은 놈에게 곤욕을 당하였다. 중원은 너의 형제들이 평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내가 죽거든 너는 급히 관중으로 들어가라.” 하고는 말을 마치고 졸卒하였다.
부건이 그 병력을 대신 거느리고 마침내 왕호王號를 제거하고는 진晉나라의 관작을 칭하여 진나라에 상喪을 통고하고 조명詔命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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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부건苻健이 이들을 점령하고자 해서 마침내 방두枋頭에 궁실을 짓고 백성들에게 보리를 심도록 장려하여 서쪽으로 갈 뜻이 없음을 보였는데, 이윽고 스스로 진晉나라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도독관중제군사都督關中諸軍事 옹주자사雍州刺史를 칭하고 병력을 모두 인솔하여 서쪽으로 가면서
어준魚遵을 선봉으로 삼고
부교浮橋를 만들어
맹진孟津을 건너게 하였고, 아우인
보국장군輔國將軍 부웅苻雄을 보내 5천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동관潼關에서 들어가게 하였고, 형의 아들
양무장군揚武將軍 부청苻菁에게는 7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지관軹關으로
注+① 軹關은 河內의 軹縣에 있다. 들어가게 하였다.
이때 작별에 임하여 부건이 부청에게 이르기를 “만약 일이 성공하지 못하면 너는 황하 북쪽에서 죽고 나는 황하 남쪽에서 죽어 다시는 만나보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황하를 건너간 뒤에 부교를 불태우고 스스로 큰 병력을 거느리고서 부웅을 따라 전진하자, 두홍杜洪이 장선張先을 시켜서 동관의 북쪽에서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대패하고 달아나 돌아오니, 두홍이 두려워 장안長安을 굳게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