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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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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年이라
趙主石祗永寧元年注+祗, 虎之子也.이라
◑魏主冉閔永興元年이라
◑舊大國一이요 涼, 代, 燕小國三이요 新大國一이니 凡五僭國이라
欲滅去石氏之迹하여 託以讖文 有繼趙李라하여 更國號曰衞하고 易姓李氏하다
新興王祗 鎮襄國하니 公, 侯, 卿, 校出奔하여 從之者萬餘人이라 諸將張沈, 張賀度等 擁衆各數萬하고 亦皆不附於閔하다
汝陰王琨 帥衆伐鄴하니 與戰於城北하여 敗之하고 遂與李農으로 擊張賀度于石瀆注+魏收地形志 “鄴縣, 有石竇堰.”하다
密召張沈하여 使乗虚襲鄴이러니 宦者以告한대 閔, 農 廢鑑殺之하고 并殺趙主虎十八孫하고 盡滅石氏하다
司徒申 上尊號於閔하니 閔以讓農한대 固辭
閔曰 吾屬 故晉人也 請與諸君으로 分割州郡하여 各稱牧, 守, 公, 侯하고 奉迎天子하여 還都洛陽 何如
尙書胡睦 曰 陛下 聖德 應天하시니 宜登大位 晉氏衰微하여 遠竄江表하니 豈能總馭英雄하여 混一四海乎잇가
閔曰 尙書可謂識機知命矣로다하고 乃即皇帝位하여 國號大魏하다
以殷浩督揚豫等州하다
朝廷 聞中原大亂하고 復謀進取 以浩爲中軍將軍하여 督揚, 豫, 徐, 兗, 青州하고 蒲洪爲征北大將軍하여 督河北諸軍事하다
蒲洪 自稱三秦王하고 改姓苻하다
姚弋仲, 蒲洪 各有據關右之志 弋仲 遣其子襄하여 擊洪하니 迎撃破之하고
自稱大都督大將軍大單于三秦王하고 改姓苻氏注+洪以讖文, 草付應王, 又其孫堅背, 有艸付字, 遂改姓苻氏.하며 以雷弱兒, 梁楞, 魚遵, 段陵으로 爲將相注+楞, 盧登切.하다
二月 燕王儁 撃趙하여 拔薊城하고 徙都之하다
燕王儁 與慕容霸, 慕輿于 將兵하고 三道出塞하여 以伐趙하니 趙守將 皆走
遂拔薊하고 欲悉阬其士卒이러니 霸諫曰 趙爲暴虐하니 興師伐之 將以拯民於塗炭而撫有中州也注+中州, 猶言中原․中華也.어늘
今始得薊而阬其士卒이면 恐不可以爲王師之先聲이라하니 乃釋之하다 入都于薊하니 中州士女降者相繼러라
燕兵 至范陽하니 太守李産 欲爲石氏拒燕이로되 衆莫爲用이어늘 乃帥八城令長하고 出降注+范陽郡, 統涿․良鄕․方城․長鄕․․故安․范陽․容城八縣.하다
悉置幽州郡縣守宰하고 引兵還薊하다
魏主閔 復姓冉氏하다
閔以李農爲太宰, 録尙書事하고 遣使者하여 持節赦諸軍屯이러니 皆不從注+諸軍屯, 張沈及苻洪等也.하다
趙將麻秋 爲苻洪所獲하여 以爲軍師將軍이러니 説洪曰 冉閔, 石祗方相持하니 中原 未可平也 不如先收關中하여 基業已固然後 東爭天下니이다 深然之하다
既而 秋因宴鴆洪하고 欲并其衆이어늘 世子健 收秋斬之하다
謂健曰 吾所以未入關者 以爲中州可定이러니 今不幸爲豎子所困이라 中州 非汝兄弟所能辦이니 我死어든 汝急入關하라하고 言終而卒하다
代統其衆하고 乃去王號하고 稱晉官爵하여 告喪請命하다
趙石祗稱帝於襄國하다
祗既稱帝 六夷據州郡擁兵者 皆應之注+六夷, 胡․羯․氐․羌․段氏及巴蠻也.러라
祗以姚弋仲爲右丞相하여 待以殊禮하고 弋仲子襄 雄勇多才어늘 祗以爲驃騎將軍하고 又以苻健爲鎮南大將軍하다
魏殺其太宰李農하다
魏主閔 既殺農하고 遣使臨江하여 告晉曰 逆胡亂中原이러니 今已誅之하니 能共討者 可遣軍來也하라 朝廷 不應하다
夏五月 廬江太守袁真 攻魏合肥하여 克之하다
◑杜洪 據長安한대 苻健 擊敗之하다
王朗 聞趙亂하고 自長安赴洛한대 其司馬杜洪 據長安하여 自稱晉征北將軍하니 關西夷, 夏皆應之러라
苻健 欲取之하여 乃治宮室於枋頭하고 課民種麥하여 示無西意러니 既而 自稱晉征西大將軍都督關中雍州刺史하고 悉衆而西하여
以魚遵爲前鋒하고 爲浮梁하여 以濟孟津하고 遣弟輔國將軍雄하여 帥衆五千하여 自潼關入하고 兄子揚武將軍菁 帥衆七千하여 自軹關入注+軹關, 在河內軹縣.할새
臨别 謂菁曰 若事不捷이면 汝死河北하고 我死河南하여 不復相見하리라
既濟 焚橋하고 自帥大衆하여 隨雄而進한대 使張先으로 逆戰于潼關之北이라가 大敗走還하니하여 固守長安하다
趙故將張賀度等 會于昌城하여 將攻鄴注+魏收地形志 “魏郡昌樂縣, 有昌城.”이어늘 魏主閔 自將擊之하여 戰于蒼亭이러니 賀度等 大敗하여 盡俘其衆而歸注+蒼亭, 在河上西南, 至東阿六十里.하다
閔戎卒三十餘萬이요 旌旗, 鉦, 鼓百餘里 雖石氏之盛이라도 無以過也러라
故晉散騎常侍隴西辛謐 有高名이라 歴劉, 石之世토록 徴辟 皆不就러니 魏主閔 備禮하여 徵爲太常한대
遺閔書하여 以爲物極則反하고 致至則危하나니 君王 功已成矣 宜因兹大捷하여 歸身晉朝하면 必有由, 夷之廉하고 享喬, 松之壽矣리라하고 因不食而卒注+由․夷, 許由․伯夷也. 喬․松, 王子喬․赤松子也.하다
秋九月 徇冀州하여 取章武, 河間注+漢時章武城, 屬勃海平舒縣界, 晉武帝泰始元年置章武國, 後爲郡.하다
海賈堅 少尙氣節이라 仕趙하여 爲殿中督이러니 及趙亡 還鄉里하여 擁部曲數千家
燕慕容評 徇渤海할새 招之호되 不降이어늘 與戰擒之하여 以爲樂陵太守하다
冬十一月 苻健 入長安하여 遣使來獻捷하다
驅至長安하니 杜洪 奔司竹注+扶風盩庢縣, 有司竹園.하다
健以民心思晉이라하여 乃遣參軍杜山伯하여 詣建康獻捷하고 并修好於桓溫하니 於是 秦雍夷夏皆附之하다
十二月 하다
謨除司徒三年 不就職하고 詔書屢下호되 終不受 於是 帝臨軒하여 遣侍中, 黄門徴之한대 謨陳疾篤하니 自旦至申 使者十餘返이라
帝方八歲러니 甚倦하여 問左右曰 所召人 何以至今不來 臨軒 何時當竟 太后乃詔罷朝하다
會稽王昱 令曹曰注+下令於尙書曹也. 昱時錄尙書六條事. 蔡公 傲違上命하여 無人臣之禮하니 若人主卑屈於上하고 大義不行於下 亦不復知所以爲政矣로다
公卿 乃奏請送廷尉하니 謨懼하여 帥子弟하고 素服詣闕稽顙하고 自到廷尉待罪하다
殷浩欲加謨大辟이러니 荀羨 入朝라가 語浩曰 蔡公 今日事危注+謂謨死也. 明日 必有桓, 文之舉注+言將擧兵以問其罪. 時桓溫, 與執政有隙. 故以此脅之.리라하니 浩乃止하다 詔免謨爲庶人하다


[] 나라(동진東晉) 효종孝宗 목황제穆皇帝 영화永和 6년이다.
[] 조주趙主 석지石祗注+① 石祗는 石虎의 아들이다. 영녕永寧 원년이다.
영흥永興 원년이다.
옛날의 큰 나라(후조後趙)가 하나이고, 작은 나라가 나라(전량前涼)․나라․나라(전연前燕) 셋이고, 새로 생긴 큰 나라(후조後趙)가 하나이니, 합하여 참국僭國이 다섯이다.
[] 봄 윤정월에 나라(후조後趙) 석민石閔석감石鑑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여 국호를 로 바꾸었다.
[] 석민石閔석씨石氏의 종적을 없애고자 하여 도참圖讖의 글에 나라 다음에 이씨李氏가 뒤를 잇는다는 내용이 있는 것에 가탁하여 국호를 로 고치고 성을 이씨李氏로 고쳤다.
이때 신흥왕新興王 석지石祗양국襄國에 진주하니, 들이 그리로 달아나서 따르는 자가 만여 명이었다. 장침張沈장하도張賀度 등의 여러 장수들도 각각 수만의 병력을 보유하고서 또한 모두 석민에게 붙지 않았다.
여음왕汝陰王 석곤石琨이 군대를 거느리고 업성鄴城을 공격하니, 석민이 이들과 성 북쪽에서 싸워서 패퇴시키고 마침내 석독石瀆에서注+①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鄴縣에 石竇堰(석두언)이 있다.” 하였다. 이농李農과 함께 장하도를 공격하였다.
석감은 은밀히 장침을 불러 빈틈을 타고 업성을 기습하게 하였는데, 환관이 이 사실을 고하자, 석민과 이농은 석감을 폐하여 죽이고서 조주趙主 석호石虎의 28명의 손자를 함께 죽이고 석씨를 모두 멸족하였다.
[] 사도司徒 신종申鍾 등이 석민石閔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니, 석민은 이농李農에게 사양하였으나, 이농이 굳이 사양하였다.
석민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 나라 사람이니, 제군들과 함께 을 나누어 점령해서 각각 , 를 칭하고 천자를 받들어 맞이하여 돌아가 낙양洛陽에 도읍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상서尙書 호목胡睦이 말하기를 “폐하는 성스러운 덕이 하늘에 응하시니, 마땅히 제위帝位에 오르셔야 합니다. 나라는 쇠약하여 멀리 장강長江 밖으로 도망하여 있으니, 어찌 능히 영웅을 통솔하여 사해를 통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석민이 말하기를 “상서는 기미를 알고 천명을 안다고 이를 만하다.” 하고는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국호를 대위大魏라 하였다.
[] 〈나라(동진東晉)가〉 은호殷浩에게 양주揚州, 예주豫州 등을 도독都督하게 하였다.
[] 조정朝廷중원中原이 크게 혼란하다는 말을 듣고 다시 진취進取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러므로 은호殷浩중군장군中軍將軍으로 삼아 양주揚州, 예주豫州, 서주徐州, 연주兗州, 청주青州를 도독하게 하고 포홍蒲洪정북대장군征北大將軍으로 삼아 하북河北의 여러 군사軍事를 도독하게 하였다.
[] 포홍蒲洪이 스스로 삼진왕三秦王을 칭하고 부씨苻氏로 고쳤다.
[] 요익중姚弋仲포홍蒲洪이 각각 관서關西 지방을 점거할 뜻이 있었다. 요익중이 자기 아들 요양姚襄을 보내어 포홍을 공격하니, 포홍이 맞이하여 싸워 격파하고
스스로 대도독大都督 대장군大將軍 대선우大單于 삼진왕三秦王을 칭하고 성을 부씨苻氏로 고쳤으며注+① 蒲洪은 圖讖書에 草(艸)付가 응당 왕이 되어야 한다 하였고, 또 손자 蒲堅의 등에 艸付字가 있다 하여 마침내 성을 苻氏로 고쳤다. 뇌약아雷弱兒, 양능梁楞(양릉),注+② 楞은 盧登의 切이다. 어준魚遵, 단릉段陵을 장수와 정승으로 삼았다.
[] 2월에 연왕燕王 모용준慕容儁나라(후조後趙)를 공격하여 계성薊城을 함락하고 도읍을 계성으로 옮겼다.
[] 연왕燕王 모용준慕容儁모용패慕容霸, 모여우慕輿于와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세 길로 나누어 변방을 나가 나라를 공격하니, 나라의 수장守將들이 모두 달아났다.
모용준은 마침내 계성薊城을 함락하고 계성의 사졸士卒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자 하였는데, 모용패가 간하기를 “나라가 포학한 짓을 하였으니, 왕이 군대를 일으켜 나라를 공격함은 장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여 중국을注+① 中州는 中原, 中華라는 말과 같다. 어루만져 소유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처음 계성을 얻고서 그 사졸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인다면 왕사王師의 출동을 알리는 예고가 될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마침내 사졸들을 풀어주었다. 모용준이 계성에 들어가 도읍하니, 와서 항복하는 중국의 사녀士女들이 이어졌다.
[] 나라(전연前燕) 군대가 범양范陽에 이르니, 태수太守 이산李産석씨石氏를 위하여 나라를 막고자 하였으나, 병사들이 따르지 않으므로 마침내 여덟 注+① 范陽郡은 涿, 良鄕, 方城, 長鄕, 遒, 故安, 范陽, 容城 여덟 현을 통솔하였다. 영장令長을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였다.
모용준은 유주幽州군현郡縣군수郡守현령縣令들을 모두 배치하고 군대를 거느리고 계성薊城으로 돌아갔다.
[] 위주魏主(염위冉魏) 석민石閔염씨冉氏 을 회복하였다.
[] 염민冉閔이농李農태재太宰 녹상서사録尙書事로 삼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을 가지고 가서 여러 주둔하는 군대를注+① 여러 주둔하는 군대는 張沈과 苻洪 등이다. 사면赦免하게 하였는데 모두 따르지 않았다.
[] 옛 나라(후조後趙) 장수 마추麻秋부홍苻洪을 죽이니, 부홍의 아들 부건苻健이 마추를 참수하고 사신을 보내어 나라(동진東晉)에 와서 조명詔命을 청하였다.
[] 처음에 나라 장수 마추麻秋부홍苻洪에게 사로잡혀 군사장군軍師將軍이 되었는데, 부홍을 설득하기를 “염민冉閔석지石祗가 막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일거에〉 중원을 평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관중關中(장안長安)을 수습하여 기업基業이 견고해진 뒤에 동쪽으로 천하를 다투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부홍이 그의 말을 매우 옳게 여겼다.
이윽고 마추는 잔치를 인하여 부홍에게 짐독鴆毒을 마시게 하고 그의 무리를 겸병하고자 하였는데, 세자世子 부건苻健이 마추를 체포하여 참수하였다.
부홍이 부건에게 이르기를 “내가 아직 관중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중원을 평정할 수 있다고 여겨서였는데, 지금 불행히 하찮은 놈에게 곤욕을 당하였다. 중원은 너의 형제들이 평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내가 죽거든 너는 급히 관중으로 들어가라.” 하고는 말을 마치고 하였다.
부건이 그 병력을 대신 거느리고 마침내 왕호王號를 제거하고는 나라의 관작을 칭하여 진나라에 을 통고하고 조명詔命을 청하였다.
[] 나라(후조後趙) 석지石祗양국襄國에서 를 칭하였다.
[] 석지石祗가 이미 를 칭하자, 주군州郡을 점거하여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여섯 오랑캐들이注+① 여섯 오랑캐는 胡族, 羯族, 氐族, 羌族, 段氏와 巴蠻이다. 모두 호응하였다.
석지는 요익중姚弋仲우승상右丞相으로 삼고 특별한 예로 대하였으며, 요익중의 아들 요양姚襄이 빼어나게 용맹하고 재주가 많자, 석지는 그를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삼고 또 부건苻健진남대장군鎮南大將軍으로 삼았다.
[] 나라(염위冉魏)가 태재太宰 이농李農을 죽였다.
[] 위주魏主 염민冉閔이농李農을 죽이고서 사신을 보내어 장강長江 가로 와서 나라(동진東晉)에 통고하기를 “역적질하던 오랑캐가 중원을 어지럽혔는데 내가 지금 그들을 주살하였으니, 능히 함께 오랑캐를 토벌할 수 있으면 군대를 보내오라.” 하였으나, 조정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 여름 5월에 여강태수廬江太守 원진袁真나라(염위冉魏) 합비合肥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 두홍杜洪장안長安을 점거하자, 부건苻健이 공격하여 물리쳤다.
[] 왕낭王朗나라(후조後趙)가 혼란하다는 말을 듣고는 장안長安에서 낙양洛陽으로 달려가니, 그의 사마司馬 두홍杜洪이 장안을 점거하여 스스로 나라 정북장군征北將軍이라고 칭하니, 관서關西 지방의 오랑캐와 한족漢族들이 모두 호응하였다.
[] 부건苻健이 이들을 점령하고자 해서 마침내 방두枋頭에 궁실을 짓고 백성들에게 보리를 심도록 장려하여 서쪽으로 갈 뜻이 없음을 보였는데, 이윽고 스스로 나라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도독관중제군사都督關中諸軍事 옹주자사雍州刺史를 칭하고 병력을 모두 인솔하여 서쪽으로 가면서
어준魚遵을 선봉으로 삼고 부교浮橋를 만들어 맹진孟津을 건너게 하였고, 아우인 보국장군輔國將軍 부웅苻雄을 보내 5천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동관潼關에서 들어가게 하였고, 형의 아들 양무장군揚武將軍 부청苻菁에게는 7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지관軹關으로注+① 軹關은 河內의 軹縣에 있다. 들어가게 하였다.
이때 작별에 임하여 부건이 부청에게 이르기를 “만약 일이 성공하지 못하면 너는 황하 북쪽에서 죽고 나는 황하 남쪽에서 죽어 다시는 만나보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황하를 건너간 뒤에 부교를 불태우고 스스로 큰 병력을 거느리고서 부웅을 따라 전진하자, 두홍杜洪장선張先을 시켜서 동관의 북쪽에서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대패하고 달아나 돌아오니, 두홍이 두려워 장안長安을 굳게 지켰다.
苻雄以衆取潼關苻雄以衆取潼關
[] 옛 나라(후조後趙) 장수 장하도張賀度 등이 군대를 동원하여 나라(염위冉魏)를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나라의 옛 장수 장하도張賀度 등이 창성昌城에서注+①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魏郡의 昌樂縣에 昌城이 있다.” 하였다. 모여 장차 업성鄴城을 공격하려 하자, 위주魏主 염민冉閔이 스스로 병력을 거느리고 이들을 공격하여 창정蒼亭에서注+② 蒼亭은 黃河 가의 서남쪽에 있으니, 東阿까지의 거리가 60리이다. 싸웠는데, 장하도 등이 대패하여 거느리던 병력을 모두 사로잡히고 돌아갔다.
염민은 이때 병력이 30여만 명이고 깃발과 징과 북이 100여 리에 걸쳐 있었으니, 비록 석씨石氏가 성할 때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하였다.
[] 위주魏主(염위冉魏) 염민冉閔이 옛 산기상시散騎常侍 신밀辛謐(신밀)을 불러 태상太常으로 삼자, 신밀이 음식을 먹지 않고 하였다.
[] 옛 나라 산기상시散騎常侍 농서隴西 사람 신밀辛謐이 높은 명성이 있었다. 유씨劉氏석씨石氏의 시대를 지나도록 나라와 대신大臣의 부름에 모두 나아가지 않았는데, 위주魏主 염민冉閔를 갖추어 불러 태상太常을 삼자,
신밀이 염민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사물은 극에 이르면 뒤집어지고 그 이룬 것이 지극하면 위태로우니, 군왕은 공을 이미 이루었다. 마땅히 이번의 큰 승리로 인하여 나라 조정에 몸을 귀의歸依하면 반드시 의 청렴이 있고 의 장수를 누릴 것이다.”注+① 由․夷는 許由와 伯夷이고, 喬․松은 王子喬와 赤松子이다. 하고는 인하여 밥을 먹지 않고 하였다.
[] 가을 9월에 나라(전연前燕)가 기주冀州 지방을 순행하여 장무章武注+① 漢나라 때의 章武城은 勃海의 平舒縣 경계에 속하였는데, 晉나라 武帝 泰始 원년(265)에 章武國을 설치하였다가 뒤에 郡으로 만들었다. 하간河間을 점령하였다.
[] 처음에 발해渤海 사람 가견賈堅이 젊었을 적에 기개와 절개를 숭상하였다. 나라(후조後趙)에서 벼슬하여 전중독殿中督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하자 가견은 향리로 돌아가서 부곡部曲 수천 가호를 보유하였다.
나라 모용평慕容評이 발해를 순행할 적에 불렀으나 항복하지 않자, 그와 싸워 사로잡아서 낙릉태수樂陵太守로 삼았다.
[] 겨울 11월에 부건苻健장안長安에 들어가고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나라(동진東晉)에〉 와서 전리품을 바쳤다.
[] 부건苻健이 승승장구하여 장안長安에 이르니, 두홍杜洪사죽司竹으로注+① 扶風 盩庢縣(주질현)에 司竹園이 있다. 달아났다.
부건은 백성들의 마음이 나라를 그리워한다 하여 마침내 참군參軍 두산백杜山伯을 보내어 건강建康에 나아가 전리품을 바치고 아울러 환온桓溫과 우호를 닦으니, 이에 진주秦州옹주雍州 지방의 오랑캐와 한족漢族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 12월에 채모蔡謨를 면직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 채모蔡謨사도司徒에 제수된 지 3년이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조서詔書가 여러 번 내려졌으나 끝내 조서를 받지 않았다. 이에 황제( 목제穆帝)가 에 임하여 시중侍中황문黃門을 보내어 불렀으나, 채모가 병이 위독하다고 아뢰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자가 10여 번 갔다가 왔다.
이때 황제가 막 8세였는데 매우 피곤하여 좌우 신하들에게 묻기를 “부르는 사람이 왜 지금까지 오지 않는가? 내가 에 임하는 것을 어느 때에나 끝낼 것인가?” 하였다. 태후가 마침내 조령을 내려 조회를 파하였다.
[] 회계왕會稽王 사마욱司馬昱에 명령하기를注+① 〈“令曹”는〉 尙書曹에 조령을 내린 것이다. 司馬昱이 이때 錄尙書六條事였다.채공蔡公이 오만하여 의 명령을 어겨서 신하의 예절이 없으니, 만약 인주人主가 위에서 낮추어 굽히고 대의大義가 아래에 행해지지 못한다면 또한 다시 정사政事하는 방법을 알 수 없다.” 하였다.
공경公卿들이 마침내 채모蔡謨정위廷尉로 보낼 것을 주청奏請하니, 채모가 두려워하여 자제들을 거느리고 소복을 입고 궁궐에 나와 이마를 조아리고는 스스로 정위에 가서 죄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은호殷浩가 채모에게 사형을 가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순선荀羨이 들어와 조회하다가 은호에게 말하기를 “채공이 오늘 일이 위태로우면注+② 〈“蔡公 今日事危”는〉 蔡謨의 죽음을 이른 것이다. 명일에 반드시 환공桓公 문공文公거사擧事가 있을 것이다.”注+③ 〈“明日必有桓文之舉”는 桓溫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그 죄를 물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때 환온이 執政者와 틈이 있었기 때문에 이 말로 위협한 것이다. 하니, 은호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조령을 내려 채모를 파면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역주
역주1 魏主 冉閔 : 오호십육국시대에 漢族 출신 冉閔에 의해 세워진 국가인 冉魏(石閔)를 가리킨 것이다.
역주2 趙石閔……改國號魏 : “앞에서는 군주 石鑑을 幽閉했다고 썼는데, 여기에서는 시해했다고 쓰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석감과 石閔이 똑같이 그 군주를 시해하였으니, 그렇다면 똑같은 역적이다. 역적이 역적을 죽였을 뿐이니, 이 때문에 석민과 석감이 함께 그 군주를 시해하였는데, 석민이 석감을 죽이자 殺이라고 쓰고 弑라고 쓰지 않은 것이다. 〈五代時代에〉 張顥와 徐溫이 똑같이 그 군주를 시해하였는데, 서온이 장호를 죽이자 殺이라고 쓰고 討라고 쓰지 않았으니, 이는 ≪資治通鑑綱目≫의 판단 기준이다.[前書幽其主鑑矣 此其不書弑 何 鑑閔同弑其君 則賊一也 賊殺賊而已矣 是故石閔石鑑同弑其君 而閔殺鑑 則書殺而不書弑 張顥徐溫同弑其君而溫殺顥 則書殺而不書討 此綱目之權衡也]” ≪書法≫
“楚나라 公子 棄疾이 그 군주 虔을 위협하여 乾谿에서 시해하였는데, ≪春秋≫에서는 죄를 公子 比에게 돌렸는바, 내가 이미 앞에서 이것을 논하였다. 比가 이미 군주가 되었다가 죽음에 이르자, ≪춘추≫에서는 기질이 公子 比를 죽였다고 썼는데, 선유들은 이르기를 ‘比의 去就와 死生, 가고 멈춤과 느리고 빠름이 모두 國人들이 하게 한 것이요, 비가 일찍이 가타부타하지 않았으니, 어찌 기질의 군주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춘추≫에서는 다만 公子 比를 죽였다고 썼다.’ 하였다.
지금 ≪資治通鑑綱目≫은 石閔의 일에 대해 비록 앞에서는 이미 그 군주 石鑑을 유폐했다고 썼으나, 여기에서는 석감을 죽였다고 썼으니, 그 일이 참으로 楚나라 公子 比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 더구나 石氏는 지극히 흉악하고 石閔은 바로 晉나라의 옛 백성으로 本姓이 冉氏이니, 애당초 羯賊의 종류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그의 손을 빌려 석씨를 주살한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에서 殺이라고 쓰고 弑라고 쓰지 않은 것은 이미 ≪춘추≫의 뜻에 근본한 것이고, 여기에서 또 中華를 귀하게 여기고 오랑캐를 천하게 여긴 뜻을 볼 수 있으니, 석민을 용서함은 羯族을 미워한 것이다. 그 뜻이 엄격하다.[楚公子棄疾 脅弑其君虔於乾谿 而春秋歸獄公子比 臣前已論之矣 至比已立爲君而死 春秋 則以棄疾殺公子比書之 先儒謂比之去就死生行止遲速 皆國人所爲 而比未嘗可否 安得爲棄疾之君 故春秋但以殺公子比書之 今綱目 於石閔之事 雖前已書幽其主鑑 而此則以殺鑑書之者 其事正與楚公子比相類故也 又況石氏 窮凶極惡 而閔乃晉之故民 本姓冉氏 初非羯賊之種 故天假手誅之 綱目 書殺而不書弑 既本春秋之旨 又以見貴華賤夷之意 恕閔 所以惡羯也 其旨嚴矣]” ≪發明≫
역주3 (三)[二] : 저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二’로 바로잡았다.
역주4 (鐘)[鍾] : 저본에는 ‘鐘’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鍾’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 (道)[遒] : 저본에는 ‘道’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遒’로 바로잡았다.
역주6 故趙將麻秋……遣使來請命 : “옛 趙나라 장수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의리를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郭循 또한 옛날 魏나라의 신하였는데, 漢나라(蜀漢) 費褘를 죽였을 적에(後主 延熙 16년(253)) 어찌해서 ‘盗’라고 썼는가. 이는 반역과 순종을 나눈 말이다. ‘斬’이라고 쓰고 ‘誅’라고 쓰지 않은 것은 趙나라 장수로 여겼기 때문이고, 〈‘斬’이라 쓰고〉 ‘殺’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苻健이〉 苻洪의 아들이기 때문이다.[故趙將 何 予義也 然則郭循亦故魏臣也 殺漢費褘(後主延熙十六年) 何以書盗 逆順之辭也 書斬不書誅 趙將也 不書殺 洪子也]” ≪書法≫ 朱子의 〈資治通鑑綱目凡例〉에 “무릇 罪人을 잡을 경우 臣子에 대해서는 ‘誅’라 하고, 夷狄에 대해서는 만일 臣子가 아니면 ‘斬’, ‘殺’이라 하였다.[凡得其罪人者 於臣子 曰誅 於夷狄 若非臣子者 曰斬 曰殺]”라 하였다.
역주7 故趙將張賀度等……不克 : “옛 趙나라 장수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의리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討라고 쓴 것이다. 그렇다면 麻秋 또한 의로운데 어찌하여 다만 殺이라고 썼는가. 冉閔은 군주를 시해한 역적이니, 苻洪에 비할 바가 아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故將이라고 쓴 것이 일곱 번인데,(漢 髙帝 5년(B.C.202)에 자세히 보인다.) 오직 利幾와 公師藩에게만 비난하는 말을 하였다.[故趙將 何 予義也 故得書討 然則麻秋亦義也 何以止書殺 閔弑君賊也 非苻洪比矣 終綱目 書故將七(詳漢髙帝五年) 惟利幾公師藩 爲譏辭]” ≪書法≫
역주8 徴故散騎常侍辛謐……不食而卒 : “먹지 않았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그의 충절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옛 관직을 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 ‘먹지 않고 卒하였다.’고 쓴 것이 세 번이니,(龔勝, 陳龜, 辛謐이다.) 모두 절개가 있는 선비이다. 周亞夫가 먹지 않고 죽은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현자를 불렀다고 쓴 것이 21번이고, 오지 않았다고 쓴 것이 8번이고, 굽히지 않고 나아가지 않고 받지 않고 먹지 않고 卒하였다고 쓴 것이 각각 1번씩이다.[書不食 何 予節也 故特書故官 綱目 書不食而卒者三(龔勝陳龜辛謐) 皆節士也 周亞夫不食而死 不與焉 終綱目 書徴賢二十有一 書不至八 書不屈不就不受不食而卒 各一而已]” ≪書法≫
“胡族과 羯族이 번갈아 中原을 점거하니, 지혜롭고 재능 있는 선비들도 왕왕 그 조정에서 벼슬한 자가 있었는데, 이들은 스스로 반드시 세상을 따라 공명을 이룬다는 핑계를 대지 않음이 없었다. 만일 이들이 모두 辛謐처럼 의리를 알았다면 또한 어찌 불가함이 있겠는가. 劉氏와 石氏가 부를 때에 이미 모두 나가지 않았고, 冉閔이 부르자 마침내 먹지 않고 卒하였는데, ≪資治通鑑綱目≫에서 특별히 옛 散騎常侍라고 쓴 것은 그가 신하의 충절을 잃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의 관작을 보존하여 귀하게 여긴 것이다. 군자가 이것을 본다면 어찌 義와 命을 편안히 여기지 않겠는가.[胡羯迭據中原 智能之士 亦往往有立其朝者 未必不以隨世就功名自詭 使皆能如辛謐之知義 亦何不可之有 劉石辟召 既皆不就 至冉閔召之 遂不食而卒 綱目 特書故散騎常侍 蓋明其不失臣節 故存其王爵以貴之爾 君子觀此 可不安於義命也歟]” ≪發明≫
역주9 許由와 伯夷 : 허유는 堯임금으로부터 천하를 물려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자신의 귀를 씻은 것으로 유명한 전설상의 隱者이고, 백이는 周나라 武王이 殷나라를 치려 할 적에 불가하다고 항변하였으며, 首陽山에 은거하여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은 인물인데, 모두 청렴한 지조를 지킨 인물이다.
역주10 王子喬와 赤松子 : 왕자교는 周 靈王의 태자 晉인데, 도사 浮丘公에게 신선술을 배워 신선이 되었고, 적송자는 古代의 신선으로, 모두 장수한 인물이다.(≪列仙傳≫, ≪神仙傳≫)
역주11 : ≪資治通鑑≫에는 ‘勃’로 되어 있으나, 통용되므로 그대로 두었다.
역주12 (張)[長] : 저본에는 ‘張’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長’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3 免蔡謨爲庶人 : “免職하는 준례가 세 가지가 있으니, ‘아무 관직을 면하게 했다.[免某官]’는 것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말이요, ‘아무가 죄로써 면직했다.[某以罪免]’는 것은 죄가 있다는 말이요, ‘아무가 면직했다.[某免]’는 것은 죄가 박하다는 말이다. ‘蔡謨를 면직했다.[免蔡謨]’고 쓴 것은 죄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의 관직을 쓰지 않았는가. 이때 채모를 司徒로 삼았는데 굳이 사양하고 나오지 않은 지가 지금 3년이 되었다. 사도라고 쓰자니 채모가 아직 명을 받지 않았고, 光禄大夫라고 쓰자니 전에 사도를 겸하였음을 이미 썼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만 그의 이름을 쓴 것이다.[免例有三 免某官者 無罪之辭也 某以罪免者 有罪之辭也 某免者 薄乎云爾之辭也 書免蔡謨 無罪也 然則曷爲不書官 於是 以蔡謨爲司徒 固讓不就 三年於此矣 書司徒 則謨未受命也 書光禄大夫 則前領司徒 已書之矣 故於此止書名]” ≪書法≫
“孔子는 군주가 명하여 부르시면 말에 멍에 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달려가셨는데, 齊王이 孟子를 만나보고자 하자 맹자는 병으로 사양하셨다. 후세에는 감히 맹자를 잘못이라고 할 수가 없고 또한 감히 공자를 옳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두 가지에서 무엇을 따라 절충해야 하는가. 공자가 말에 멍에 하기를 기다리지 않으신 것은 바로 맹자의 이른바 ‘관직을 담당하여 관직이 있다.’는 것이니, 공자에게 있어서는 군주를 섬김에 예를 다해야 하는 경우가 된다. 맹자의 경우에는 제왕이 병을 칭탁하여 자기를 조정으로 나오라고 하였고, 또 맹자는 손님과 스승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제왕의 녹을 먹어 신하가 된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제왕의 속임수를 미워하여 사양하였을 뿐이니, 군주에게 더 큰 것을 요구하여 윗사람에게 거만하게 함을 고상함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
蔡謨는 晉나라에 있어서 진실로 특출한 인물이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에 비하면 차이가 있으니, 천자가 軒에 임하고 백관들이 자리에 나열하여 神明을 기다리듯이 하였는데, 채모가 마침내 거만하고 방자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자가 10여 명이 갔다 왔는데도 어찌 오지 않는단 말인가. 또 사자가 가고 올 때에 반드시 그를 부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서 채모 또한 반드시 황제가 軒에 임하여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시다는 뜻을 알았을 터인데, 그 마음이 어찌 스스로 편안하단 말인가. 이윽고 조정의 의논이 용납하지 못해서 廷尉로 하여금 불러올 것을 청하자, 채모는 그제야 이마를 조아리고 죄가 내려질 것을 기다렸으니, 어쩌면 앞에서는 거만하고 뒤에서는 공손하단 말인가. 더구나 채모는 막 병이 위독하다고 아뢰었다가 곧바로 대궐에 나왔으니, 또 어찌 병이 이리도 빨리 나았단 말인가. 앞의 일을 가지고 말하면 충성스럽지 못하고 뒤의 일을 가지고 말하면 지혜롭지 못하니, 이는 모두 채모가 어린 군주를 깔보고 同列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과연 英明하고 과단성 있는 군주를 만나서 조정의 기강이 바로잡히고 엄숙하였다면 반드시 감히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殷浩가 그를 大辟으로 처리하고자 함에 이르러서는 또 너무 과하다. ≪資治通鑑綱目≫에 채모를 면직하여 庶人으로 삼았다고 써서 면직하기 전에 이미 그의 관직을 삭탈하였으니, 면직함이 마땅하다. 이것을 보는 자는 한번 생각해보라.[孔子君命召 不俟駕 而齊王欲見孟子 則辭以疾 後世不敢以孟子爲非 而亦不敢不以孔子爲是 二者孰從而折之 蓋孔子之不俟駕 正孟子所謂當仕有官職 而在孔子則事君盡禮者也 若夫孟子 則齊王託疾以邀其朝 而孟子又居賓師之位 非食其禄而臣之者 故惡其詐而辭之爾 非曰要君傲上以爲高也 蔡謨在晉 誠爲表表 然方之孔孟 則有間矣 安有天子臨軒 百官布列 若待神明 謨乃傲然偃蹇 自旦至申 使者十餘返而不至哉 且使者往返之時 必明言所以 而謨亦必明知臨軒久竢之意 其心何以自安 既而朝論不容 請致廷尉 方乃稽顙待罪 何前倨而後恭邪 況謨甫陳疾篤 隨即詣闕 又何愈之速邪 由前言之則不忠 由後言之則不智 此皆謨忽視幼君 下視同列之故爾 使其果遇英果之君 朝綱振肅 必不敢爾 至殷浩欲處以大辟 則又過矣 綱目 書免蔡謨爲庶人 於未免而已削其官 則其免之宜也 觀者試思之]” ≪發明≫
역주14 尙書曹 : 尙書省의 여러 曹를 말하는데, 보통 尙書六曹라 한다. 각 曹의 명칭은 때에 따라 변하였다.(≪晉書≫ 〈職官志〉)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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