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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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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元嘉二十一年이요 魏太平眞君五年이라
春正月 宋主耕籍田하고 大赦하다
魏太子晃 總百揆하다
魏太子晃 始總百揆하고 以中書監穆壽司徒崔浩侍中張黎古弼輔之하니
弼忠愼質直하여 嘗以上谷苑囿太廣으로 乞減太半以賜貧民注+據北史古弼傳 “時上谷人上書, 言苑囿過度, 人無田業, 宜減太半以賜貧者.” 蓋上谷距代都甚遠, 魏未嘗置苑囿於其地. 而道武帝起鹿苑於南臺陰, 北距長城, 東苞白登, 屬之西山, 廣輪數十里. 天興六年, 幸南平城, 規度灅南夏屋山背黃瓜堆以建新邑. 至天賜三年, 遂築灅南宮闕, 引溝穿池, 廣苑囿, 所謂太廣者此也, 不在上谷. 當以北史爲正.한대 魏主方與給事中劉樹 圍碁하여 志不在弼이어늘
弼侍坐良久 不獲陳聞이라 忽起하여 捽樹頭하고 歐之曰 朝廷不治 實爾之罪니라
魏主失容曰 不聽奏事 朕之過也 樹何罪리오 置之하라 弼具以狀聞한대 魏主可之어늘
弼曰 爲臣無禮至此하니 其罪大矣라하고 出詣公車하여 免冠徒跣請罪한대
魏主召入하고 謂曰 吾聞築社之役 蹇蹷而築之하고 端冕而事之 神降之福注+蹇蹷, 跛蹇而顚蹶也.이라 然則卿有何罪
其冠履就職하여 苟有可以利社稷便百姓者어든 竭力爲之하고 勿顧慮也하라
晃課民稼穡하여 使無牛者 借人牛而爲之芸以償之注+爲, 去聲.호되
凡耕種二十二畝而芸七畝하여 大略以是爲率하고 使民各標姓名於田首하여 以知其勤惰하고 禁飲酒遊戲者하니 於是 墾田大增이러라
魏禁私養沙門巫覡하다
魏主詔호되 王公以下至庶人 有私養沙門巫覡者어든 皆遣詣官호되 過二月十五日不出하면 沙門巫覡死하고 主人門誅注+門誅者, 闔門盡誅之.하다
魏令公卿子弟 皆入太學하다
魏詔호되 王公卿大夫之子 皆詣太學하고 其百工商賈之子 各習父兄之業하고 毋得私立學校하라 違者 師死하고 主人 門誅하다
二月 魏尚書令劉絜 有罪誅하니 樂平王丕 以憂卒하다
魏尚書令劉絜 久典機要하여 恃寵自專하니 魏主心惡之注+宋高祖永初末, 魏明元帝寢疾, 魏主監國, 劉絜與古弼等選侍東宮, 對綜機要, 至是二十餘年矣.러니
及將襲柔然 絜諫曰 蠕蠕遷徙無常이라 前者出師 勞而無功注+蓋指太延四年魏伐柔然不見虜而還也.하니 不如廣農積榖하여 以待其來니이다
崔浩固勸魏主行한대 魏主從之하니 絜恥其言不用하여 欲敗魏師하다
魏主與諸將으로 期會鹿渾谷 絜矯詔易其期하고 至鹿渾谷欲擊柔然 絜又止之하여 使待諸將이러니
留六日而諸將不至 柔然遂遠遁하고 軍還糧盡하여 士卒多死어늘 絜陰使人驚魏軍하고 勸魏主委軍輕還한대 不從하다
又以軍出無功으로 請治崔浩之罪한대 魏主曰 諸將失期하여 遇賊不擊하니 浩何罪也 浩以絜矯詔事 白魏主하니 收絜囚之하다
魏主之北行也 絜私謂所親曰 若車駕不反이면 吾當立樂平王호리라 又聞尚書右丞張嵩家 有圖讖하고 問曰 劉氏應王이라하니 吾有姓名否
魏主聞之하고 命有司窮治絜嵩하여 皆夷三族하다 絜好作威福하고 諸將破敵得財物 皆與分之러니 旣死 籍其家하니 財巨萬이러라
樂平戾王丕 以憂卒하다
魏主築白臺注+魏主嗣起白臺於平城南.러니 丕夢登其上하여 四顧不見人이어늘 命術士董道秀筮之한대 曰 吉이라하니
丕黙有喜色이러니 至是하여 道秀亦坐棄市하다
高允聞之曰 夫筮者 皆當依附爻象하여 勸以忠孝하나니 王之問也 道秀宜曰 窮高爲亢이니 易曰 亢龍有悔라하고
又曰 高而無民이라하니 皆不祥也 王不可以不戒라하면 如此則王安於上하고 身全於下矣어늘 道秀反之하니 宜其死也로다
宋以江夏王義恭爲太尉하다
◑夏六月 河西王沮渠無諱卒하니 弟安周代立하다
◑魏罷舊俗所祀胡神하다
魏入中國以來 雖頗用古禮하여 祀天地宗廟百神호되 而猶循其舊俗하여 所祀胡神 甚衆이러니
崔浩請存其合於祀典者五十七所하고 餘悉罷之한대 魏主從之하다
秋八月 하다
魏主詔以肥馬給獵騎어늘 尚書令古弼 留守라가 悉以弱馬給之한대 魏主大怒하여 欲還臺斬之하니 弼官屬惶怖하여 恐并坐誅어늘
弼曰 吾爲人臣하여 不使人主盤于遊田 其罪小 不備不虞하여 乏軍國之用 其罪大
今蠕蠕方强하고 南寇未滅하니 吾爲國遠慮 雖死何傷注+爲, 去聲.이리오 且吾自爲之 非諸君之憂也니라
魏主聞之하고 歎曰 有臣如此하니 國之寳也라하고 賜衣一襲하다
它日 復畋於山北하여 獲麋鹿數千頭注+山北, 平城北山之北.하여 詔尚書發牛車五百乘以運之注+蓋發民軍也.러니
旣而謂左右曰 筆公必不與我 汝輩不如自以馬運之니라 尋果得弼表하니
秋榖懸黄하고 麻菽布野하니 豬鹿竊食 鳥雁侵費 風雨所耗 朝夕三倍 乞賜矜緩하여 使得收載注+言夕之所收, 較於朝之所收得失三倍, 收穫不可以不速, 載糜鹿猶可緩.라하니
魏主曰 果如吾言이로다 筆公可謂社稷之臣矣라하더라 弼頭鋭故 魏主常以筆目之注+鋭, 尖也.러라
宋以衡陽王義季 爲兗州刺史하고 南譙王義宣으로 爲荆州刺史하다
宋主以義宣不才 故不用이러니 會稽公主屢以爲言하니 宋主不得已用之하여
先賜詔曰 師護在西 雖無殊績이나 潔己節用하여 通懐期物하고 不恣群下하여 聲著西土하니 士庶所安이라 論者 未議遷之注+師護, 義季小字. 時爲荊州刺史, 故云在西. 通懐, 開心見誠之謂, 期物, 待人接物之謂.러니
今之回換 更爲汝與師護 年時一輩 欲各試其能하노니 汝往하여 脱有一事減之者 遷代之譏 必歸於吾矣리라
義宣至鎭하여 勤自課厲하고 事亦修理러라
宋主餞義季于武帳岡注+杜佑曰 “武帳岡在廣莫門外宣武場, 設行宮殿便坐於其上, 因名.”할새 將行 勅諸子且勿食하고 至會所設饌하되 日旰不至하니 皆有飢色이어늘
乃謂曰 汝曹少長豐佚하여 不見百姓艱難하니 今使汝曹 識有飢苦하여 知以節儉御物耳라하더라
裴子野曰 善乎 太祖之訓也 夫侈興於有餘하고 儉生於不足하나니 欲其隱約인댄 莫若貧賤이니 習其險艱하면 利以任使 逹其情僞하면 易以躬臨注+隱, 猶靜也. 約, 儉也.이라
太祖若能帥此訓也인댄 難其志操하고 卑其禮秩하여 教成德立然後 授以政事리니 則無怠無荒하여 可播之九服矣어늘
而崇樹襁褓하여 迭據方岳注+謂義眞․義康․義恭․義宣, 皆迭居方面.하니 國之存亡 旣不是係 早肆民上하니 非善誨也로다
柔然勅連可汗하니 子處羅可汗吐賀眞注+處羅, 魏言唯也.하다
◑敦煌公李寳 入朝于魏하니 魏人留之하다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21년이고, 北魏 世祖 太武帝 拓跋燾 太平眞君 5년이다.
[綱] 봄 정월에 宋主가 을 경작하고 크게 사면하였다.
北魏 太子 拓跋晃이 모든 정무를 총괄하였다.
[目] 北魏 太子 拓跋晃이 처음으로 모든 정무를 총괄하고 中書監 穆壽, 司徒 崔浩, 侍中 張黎와 古弼로 태자를 보필하도록 하였다.
고필이 충직하고 신중하며 소박하고 정직하여 일찍이 上谷의 苑囿가 너무 넓으므로 太半을 줄여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내려주기를 청한 적이 있었다.注+① ≪北史≫ 〈古弼傳〉에 의거하면 “당시 上谷 사람이 上書를 하여 말하기를 ‘苑囿가 過度하여 백성들의 田地가 없으니 마땅히 太半을 줄여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줘야 합니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대저 上谷은 代都까지 매우 멀리 떨어져 있어서 北魏는 일찍이 그곳에 苑囿를 둔 적이 없었다. 그런데 道武帝(拓跋珪)가 南臺 북쪽에 鹿苑을 세우니, 北으로는 長城에 미치고 東으로는 白登을 둘렀으며 西山으로 이어져 있어 넓이가 수십 리였다. 天興 6년(403)에 南平城에 행차할 적에 灅水 남쪽 夏屋山 북쪽의 黃瓜堆를 헤아려보고 新邑을 건설하였다. 天賜 3년(406)에 마침내 灅水 남쪽에 궁궐을 건축하고 도랑을 끌어들이고 못을 파니, 苑囿를 넓힌 것이다. 이른바 너무 넓다고 한 것이 이것이니, 상곡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북사≫로 바로잡는다. 魏主가 한창 劉樹와 함께 바둑을 두면서 마음이 고필에게 있지 않았다.
고필이 오랜 기간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도 보고할 기회를 얻지 못하자, 갑자기 일어나서 유수의 머리채를 잡고 때리면서 말하기를 “조정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실로 너의 죄이다.”라고 하였다.
[目] 魏主가 失色하며 말하기를 “奏請할 일을 보고받지 않은 것은 짐의 잘못이다. 劉樹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를 놓아주어라.”라고 하였다. 古弼이 일을 갖추어 보고하였는데 魏主가 허락하였다.
고필이 말하기를 “신하된 자가 무례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그 죄가 큽니다.”라고 하고, 조정에서 나와 에 가서 관을 벗고 맨발로 죄를 청하였다.
魏主가 그를 불러 들어오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社壇을 쌓는 부역에 가서 절뚝거리며 넘어져도注+① “蹇蹷”은 절름거리다가 넘어지는 것이다. 〈힘을 다해〉 그것을 쌓고, 그 후에 衣冠을 단정히 하고 제사를 지내면 神이 福을 내려준다 하였다. 그러니 卿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관을 쓰고 신을 신고 직책에 나아가서 진실로 社稷을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온 힘을 다하여 그 일을 처리하고 망설이지 말라.”라고 하였다.
[目] 太子 拓跋晃이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것을 독려하여 소가 없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소를 빌려서 밭을 갈고 소를 빌려준 자들을 위하여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밭의 김을 대신 매주어서 그것을 보상하도록 하였다.
대략 〈소를 빌려〉 22畝를 갈아 파종하면 7畝를 김을 매어 갚는 것으로 기준을 삼았고, 백성들에게 각각 밭머리에 성명을 표기하여 근면한지 나태한지를 알게 하였으며, 술 먹고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에 개간된 밭이 크게 증가하였다.
[綱] 北魏가 사사로이 沙門과 무당을 공양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目] 魏主가 조서를 내리기를 “王․公 이하에서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사로이 사문과 무당을 공양하는 자가 있거든 모두 관청으로 나오도록 하라. 2월 15일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다면 사문․무당은 죽임을 당하고 주인은 일족이 주살당할 것이다.”注+① “門誅”는 온 집안이 모두 주살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綱] 北魏가 公卿의 子弟를 모두 太學에 들어가게 하였다.
[目] 魏主가 조서를 내리기를 “王과 公卿大夫의 자제는 모두 太學에 나오게 하고, 기술자와 상인의 자제는 각각 부형의 직업을 익히도록 하고, 사사로이 학교를 세우지 말라. 위반하는 자는 스승은 죽임을 당하고, 주인은 일족이 주살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綱] 2월에 北魏 尚書令 劉絜이 죄가 있어 주살되었다. 樂平王 拓跋丕가 근심으로 卒하였다.
[目] 예전에 北魏 尚書令 劉絜이 오랫동안 중요한 기밀을 주관하여 총애를 믿고 스스로 전횡하니注+① 宋나라 高祖(武帝) 永初 말기에 北魏 明元帝가 병으로 눕자, 魏主가 監國할 적에 劉絜과 古弼 등을 선발하여 東宮(태자)을 모시면서 둘이서 중요한 기밀을 종합 관리하니, 이때까지 20여 년이다., 魏主가 마음속으로 그를 싫어하였다.
장차 柔然을 기습하려고 할 때 유혈이 諫言하기를 “蠕蠕(柔然)은 옮겨 다니는 것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이전에 出兵했을 적에 고생만하고 공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注+② 〈“前者出師 勞而無功”은〉 太延 4년(438)에 北魏가 柔然을 정벌하였으나 오랑캐를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온 일을 가리킨다. 농사를 확대하고 곡식을 비축하여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崔浩가 굳게 魏主에게 출병할 것을 권유하자, 魏主가 그것을 따랐다. 유혈은 자기의 간언이 채택되지 않음을 수치스럽게 여겨서 魏軍을 패배시키려고 하였다.
魏主가 諸將들과 함께 약속된 기일을 정하여 鹿渾谷에서 집결하고자 했는데 유혈이 조서를 고쳐서 약속한 기일을 바꾸고, 魏主가 鹿渾谷에 도착하여 유연을 공격하려고 할 적에 유혈이 또한 제지하며 諸將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이렇게 6일 동안 머물러도 제장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柔然이 결국 멀리 달아났고 군대가 돌아오는 중에 군량미가 다하여 병사들이 많이 죽었다. 유혈이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北魏 군대를 놀라게 하고 魏主에게 군대를 버리고 경무장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는데 따르지 않았다.
또 군대가 출동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한 것으로 崔浩의 죄를 다스리도록 요청하였다. 魏主가 말하기를 “제장들이 집결 기일을 놓쳐 적들을 만나도 공격하지 못했으니, 최호가 무슨 죄인가.”라고 하였다. 최호가 유혈이 조서를 고친 일을 魏主에게 아뢰니 유혈을 잡아서 가두었다.
[目] 魏主가 北伐을 행할 적에 劉絜이 사적으로 친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만약 황제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마땅히 樂平王을 황제로 세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尚書右丞 張嵩의 집에 圖讖의 글이 보관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묻기를 “劉氏가 마땅히 왕이 된다고 하였으니 내 이름이 들어있는가?”라고 하였다.
魏主가 그것을 듣고 有司에게 명을 내려 유혈과 장숭을 끝까지 조사하여 모두 삼족을 멸하였다. 유혈은 상벌을 행하는 것을 좋아하고, 諸將들이 적을 공격하고 재물을 탈취하면 모두 유혈과 함께 나누어 가졌으므로 그가 죽고 나서 그 가산을 몰수하니 재산이 巨萬(억)이었다.
[目] 樂平戾王 拓跋丕가 근심으로 卒하였다.
예전에 魏主가 白臺를注+① 魏主 拓跋嗣가 白臺를 平城 남쪽에 건립하였다. 건축하였는데 탁발비가 꿈에 그 정상에 올라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術士 董道秀에게 그것을 점쳐보라고 명하니, 吉하다고 하였다.
탁발비가 침묵하였으나 기쁜 표정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탁발비가 죽자〉 동도수도 또한 죄에 연루되어 棄市되었다.
高允이 그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무릇 점치는 자는 모두 응당 爻象에 의거하여 忠孝로 권유해야만 한다. 왕의 물음에 동도수가 마땅히 말하기를 ‘궁극의 높음은 亢(너무 높음)이 되는 것이니, ≪易經≫ 乾卦에 이르기를 「亢龍(너무 높이 올라간 용)은 후회가 있다.」라고 하고,
또 「높아서 백성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모두가 상서롭지 못합니다. 왕께서는 경계하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였다면 왕은 위에서 편안하고 자신은 아래에서 온전할 것인데, 동도수가 그것을 반대로 하였으니 죽임을 당한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綱] 宋主가 江夏王 劉義恭을 太尉로 삼았다.
[綱] 여름 6월에 河西王 沮渠無諱가 卒하자, 그 아우 沮渠安周가 대를 이어 즉위하였다.
[綱] 北魏가 옛 풍속대로 胡神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철폐하였다.
[目] 北魏가 중국에 들어온 이래로 비록 옛 儀禮를 꽤 채용하여 天地․宗廟․百神에게 제사 지냈으나 여전히 옛 풍속을 따라서 胡神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대단히 많았다.
崔浩가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합쳐 57곳만 보존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철폐하기를 주청하니, 魏主가 그것을 따랐다.
[綱] 가을 8월에 魏主가 河西에서 사냥하였다.
[目] 魏主가 조서를 내려 살찐 말을 사냥하는 騎兵들에게 지급하도록 하였다. 尚書令 古弼이 留守하고 있었는데 모두 빈약한 말을 지급하였다. 魏主가 크게 노하여 尙書臺로 돌아가서 그의 목을 베려고 하니, 고필의 부하가 떨면서 함께 죄에 걸려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고필이 말하기를 “나는 신하된 자로서 주군이 돌아다니면서 사냥하는 것을 즐기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 죄가 작은 것이고, 뜻밖을 대비하지 못하여 군대와 국가에 쓸 용품을 부족하게 하는 것은 그 죄가 큰 것이다.
지금 蠕蠕이 한창 강성하고 남쪽 오랑캐(宋나라)는 멸망하지 않았으니 나는 나라의 먼 장래를 걱정하는 것이다.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비록 죽을지언정 어찌 서글프겠는가. 또 내 스스로 그것을 한 것이니 그대들이 걱정할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그것을 듣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런 신하가 있으니, 나라의 보물이다.”라고 하고, 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
[目] 뒷날 魏主가 다시 北山注+① 山北은 平城 北山의 북쪽이다. 북쪽에 사냥을 가서 큰 사슴과 작은 사슴 수천 마리를 잡아 尙書省에 조서를 내려 牛車 500乘을 보내 그것을 운반하도록 하였다.注+② 백성의 수레를 징발한다는 뜻이다.
얼마 후에 좌우 측근에게 말하기를 “筆公(古弼의 별명)은 반드시 나에게 수레를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자기 말로 그것을 운반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과연 고필의 표문을 받아보니 그곳에 이르기를
“지금 가을 곡식이 누렇게 익어 있고 삼과 콩이 들판에 넓게 깔려 있습니다. 멧돼지와 사슴이 몰래 뜯어먹는 것과 새와 기러기가 침투하여 손상시키는 것과 바람과 비에 소모되는 것에서 아침 수확이 저녁 수확보다 3배나 차이 나게 많습니다. 바라건대 짐승을 천천히 운송하도록 명하시어 수레로 수확한 곡식을 거두어 실어올 수 있게 하십시오.”注+③ 〈“朝夕三倍……使得收載”는〉 저녁에 수확하는 양이 아침 수확량과 비교해 3배나 손실이 나서 수확을 빨리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사슴 운반은 늦어도 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말하기를 “과연 내 말과 같구나. 필공은 국가를 책임질 신하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고필의 머리 모양이 뾰족하였기注+④ 鋭는 뾰족하다는 뜻이다. 때문에 魏主가 항시 그를 붓(筆公)으로 지칭하였다.
[綱] 宋主가 衡陽王 劉義季를 兗州刺史로 삼고, 南譙王 劉義宣을 荆州刺史로 삼았다.
[目] 예전에 宋主는 劉義宣이 재주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등용하지 않았다. 會稽公主가 자주 그에 대해 말을 하니 宋主가 부득이 그를 등용하였다.
먼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師護(劉義季)는 서쪽에서 在任하여 비록 특수한 공적은 없으나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물자를 절약하여, 마음을 열어 성실하게 하며 사람들을 잘 대하고, 아랫사람에게 교만하지 아니하여 그 명성이 서쪽 지방에 드날리니 사대부와 서민들이 편안해하므로 의논하는 자가 아직까지 옮기라고 논의하지 않았다.注+① 師護는 劉義季의 어렸을 때 字이다. 당시 荊州刺史로 있었으므로 서쪽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通懐”는 마음을 열어 정성을 보여주는 것을 말하고, “期物”은 남을 대하고 물건을 접함을 말한다.
이번에 〈荆州刺史로〉 바꾸는데 더욱이 너는 사호와 同年輩이니, 각각 그 능력을 시험하고자 한다. 네가 가서 만일 한 가지 일이라도 사호만 못한 것이 있으면 교대를 시킨 비난이 반드시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의선이 鎭(荊州)에 도착하여 부지런하게 스스로의 課業에 힘쓰며 업무 또한 잘 처리하였다.
[目] 宋主가 武帳岡에서注+① 杜佑가 말하기를 “武帳岡은 廣莫門 밖 宣武場에 있으며 그 위에 行宮殿의 便坐(주방)를 설치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劉義季를 송별할 적에 장차 출발하려 하면서 여러 아들에게 勅書를 내려 잠시 음식을 먹지 말고 송별하는 장소에 도착하여 음식을 차리도록 하였는데, 해가 늦도록 오지 않으니 모두 배고픈 기색이 있었다.
이에 宋主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젊었을 때 풍족하고 편안하여 백성들의 고민을 알지 못했으니, 지금 너희들에게 배고픈 고통을 알도록 하여 근검절약으로 물건을 써야 함을 알려주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目] 裴子野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太祖의 교훈이 훌륭하도다. 무릇 사치는 풍족한 데서 일어나고 검소는 부족한 데서 생긴다. 절약하고 검소하려고注+① 隱은 靜과 같다. 約은 검소하다는 뜻이다. 한다면 빈천만 한 것이 없다. 험난함에 익숙하면 다른 사람을 임용하고 부리는 데 이롭고, 眞僞에 통달하면 자신이 정사를 다스리는 데 용이하다.
태조가 만약 〈자식들이〉 이러한 자신의 가르침을 잘 따르게 하려면 자식들에게 志操를 신중히 연마하게 하고 그들의 예의와 爵祿의 등급을 낮추어서 가르침이 이루어지고 道德이 확립된 후에 政事를 맡겨야 하니, 그렇게 되면 나태함과 황폐함이 없어 〈宋나라의 정사를〉 천하에 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린 황자들을 높이 〈제후왕으로〉 봉하여 번갈아 지방의 장관에 임명하니注+② 義眞․義康․義恭․義宣 등이 모두 교대로 方面(지방 장관)에 있었음을 말한다., 이에 나라의 존망이 황자들에게 달려 있지 않게 되었고 일찍부터 백성의 위에서 제멋대로 굴게 하였으니, 훌륭한 가르침이 아니다.”
[綱] 柔然의 勅連可汗이 死하자 그의 아들 處羅可汗注+① 處羅는 北魏의 말로는 唯一의 의미이다. 郁久閣吐賀眞이 즉위하였다.
[綱] 敦煌公 李寳가 北魏에 들어가서 朝會를 드리니, 北魏에서 그를 억류하였다.


역주
역주1 籍田 : 백성들에게 농경에 힘쓸 것을 권장하기 위하여 황제가 친히 농사짓는 田地이다.
역주2 給事中 : 황제를 좌우에서 侍從하면서 獻納의 得失, 上奏文書 및 이에 대한 論駁 등을 담당하였다.
역주3 公車 : 官署의 명칭이다. 前漢 때 황궁과 司馬門의 경비를 담당하였다. 아울러 사방에서 上書를 올리는 자나 공물을 바치거나 입조하는 자들을 접대한다. 北朝에서는 公車署라 하였다.
역주4 魏主畋于河西 : “北魏의 사냥을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간언을 따름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 ‘田(사냥)’을 기록한 것이 세 번인데, 오직 北魏 太武帝의 경우만 나무라는 말이 아니다. ‘獵(수렵)’을 기록한 것은 13번인데 오직 唐 太宗의 경우만 나무라는 말이 아니다(周나라 顯王 14년(B.C.355)에 자세하다.).[書魏畋 何 美從諫也 綱目書田三 惟魏太武非譏辭 書獵十三 惟唐太宗非譏辭(詳周顯王十四年)]” ≪書法≫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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