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에 네 명의 후侯가 더욱 횡포를 부리니, 천하 사람들이 말하기를 “좌관左悺은 회천回天이요 구원具瑗은 독좌獨坐요 서황徐璜은 와호臥虎요 당형唐衡은 양타兩墮이다.”注+“회천回天”은 세력이 군주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음을 말한 것이고, “독좌獨坐”는 교만하고 귀함이 짝할 자가 없음을 말한 것이고, “와호臥虎”는 감히 범접할 사람이 없음을 말한 것이고, “양타兩墮”는 양쪽을 잡고서 〈어물어물함을〉 말한 것이다. 〈“양타兩墮”는〉 일본一本에는 양兩이 우雨로 되어 있다. 비가 내리는 바에 적셔주지 않음이 없으니, 그가 퍼뜨리는 해독이 천하에 두루 미침을 말한 것이다. 일설一說에 “우타雨墮는 그 성질의 급함이 비가 떨어짐에 일정한 곳이 없는 것과 같음을 이른다.” 하였다. 하였다.
이들은 모두 다투어 저택을 지어서 화려함과 사치함을 숭상하고, 형제兄弟와 인척姻戚이 주州와 군郡의 장관長官이 되어 백성들로부터 이익을 독점하여 도둑과 다름이 없으니,
포악함이 천하에 두루 퍼져서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여 도적盜賊이 된 자가 많았다.注+각較는 각榷과 통通하니 오로지(독차지) 함이다. “고교辜較”은 자기가 이것을 오로지 독차지하여 타인이 취하면 번번이 직접 죄를 줌을 말한 것이다. 일설一說에 “고辜는 막음이니, 고각辜榷은 다른 사람들이 매매賣買하는 것을 막아서 자신이 그 이익을 취함을 이른다.” 하였다.
目
【목目】 좌관左悺의 형이 하동태수河東太守가 되니, 피씨장皮氏長(피지장)인 경조京兆 사람 조기趙岐가 이를 부끄러워하여 당일에 벼슬을 버리고 서쪽으로 돌아갔다.注+피씨현皮氏縣은 하동군河東郡에 속하였다.
당형唐衡의 형인 당현唐玹이 경조윤京兆尹이 되어서 조기의 가솔家率과 종친宗親들을 체포하여 무거운 법으로 모함해서 모두 죽이니注+현玹은 형견熒絹의 절切이고 또 음音이 현玄이니, 당현唐玹은 평소 조기趙歧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기가 사방四方으로 난을 피하여 자신의 성명姓名을 숨기고 북해北海의 시중市中에서 떡을 팔아 생활하였다.
안구安丘 사람 손숭孫嵩(손숭)이 그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注+안구현安丘縣은 북해군北海郡에 속하였다. 수레에 태워 함께 돌아와서 이중으로 된 벽속에 숨겨주었는데注+“복벽複壁”은 이중으로 된 벽이다., 여러 당씨唐氏가 죽자 사면을 받아 마침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綱
【강綱】 윤달에 서강西羌이 장액張掖을 침략하자, 단경段熲이 격파하여 항복시켰다.
目
【목目】 강족羌族들이 새벽에 단경段熲의 군영軍營으로 접근해오자注+박薄은 가까이 접근한다는 뜻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서강西羌의 여러 무리가 다시 소하燒何의 괴수와 함께 장액張掖을 침입하여 새벽에 교위 단경校尉 段熲의 군영軍營으로 접근해왔다.” 하였다., 단경이 말에서 내려 크게 싸워서 한낮에 이르러 칼이 부러지고 화살이 다하였는데, 오랑캐 또한 군대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단경이 이들을 추격하여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행군하면서 밤낮으로 공격하여 생고기를 베어 먹고 눈을 먹은 지 40여 일에 마침내 적석산積石山에 이르니, 변방에서 2,000여 리를 나간 것이었다. 단경은 소하燒何의 큰 우두머리를 참수하고 그 나머지 무리를 항복시키고 돌아왔다.注+≪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적석산積石山은 농서군 하관현隴西郡 河關縣서남西南에 있다.” 하였다.
綱
【강綱】 여름 5월에 한중漢中의 산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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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 7월에 장사長沙와 영릉零陵의 만족蠻族이 배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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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겨울 11월에 구진九眞의 남은 도적이 다시 배반하자, 하방夏方을 교지자사交阯刺史로 삼아서 항복시켰다.
역주1單超卒 :
“單超는 宦者인데 卒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漢나라를 나쁘게 여긴 것이다. 어찌하여 나쁘게 여겼는가. 그의 장례에 물건을 하사함이 제도를 넘어서 네 명의 侯가 더욱 횡포를 부릴 길을 열어놓았으니, 이것을 황제의 병통으로 여겼기 때문에 卒했다고 하면서 그 관직을 삭제한 것이다. 東漢의 여러 신하가 卒하였을 적에 관직을 쓰지 않은 것이 3번(單超, 馬日磾, 荀攸)이니 모두 폄하한 것인데, 牧鎭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환관에게 卒이라고 쓴 것이 3번인데, 楊復光(唐나라 僖宗 中和 3년(883))과 張承業(五代 壬午年(922))은 모두 훌륭하게 인정하였고, 오직 선초는 그 관직을 삭제하여 비난하였다.[超宦者也 其卒之 何 病漢也 曷爲病之 賜贈過制 以啓四侯之轉橫 以是爲帝病 故卒之而削其官 東漢諸臣卒 不書官者三(單超, 馬日磾, 荀攸) 皆貶也 牧鎭不與焉 終綱目 宦官書卒三 楊復光(唐僖宗中和三年) 張承業(五代壬午年) 皆予之也 惟單超削其官 爲譏焉]” ≪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