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五年이라
秦建元六이요 燕建熙十一年이라 ◑ 是歳 燕亡하다 大一小二이니 凡三僭國이라
春正月 慕容令 自秦奔燕하다
王猛之發長安也 請慕容令參其軍事하여 以爲鄉導하다
將行 造慕容垂하여 飲酒라가 從容謂曰 今當遠别하니 卿何以贈我하여 使我覩物思人 垂脫佩刀贈之러니
至洛陽하여 賂垂所親하여 使詐爲垂使者하여 謂令曰 吾父子來此 以逃死也러니 今王猛 疾人如讐하고 秦主心亦難知
聞東朝比來悔悟라하니 吾今還東호리니 汝可速發하라
疑之하여 躊躇終日이라가 又不可審覆이라 乃犇燕軍注+① 躊躇, 猶豫住足之意.하다
表令叛狀한대 垂懼而出走라가 及藍田하여 爲追騎所獲하니
秦王堅 勞之曰 卿 家國失和하여 委身投朕하니 賢子心不忘本 亦各其志
이나 燕之將亡 非令所能存이니 惜其徒入虎口耳로라 且父子兄弟罪不相及注+① 晉臼季薦冀缺於晉文公, 公曰 “其父有罪, 可乎.” 對曰 “舜之罪也, 殛鯀, 其擧也, 興禹. 康誥曰 ‘父不慈, 子不祗, 兄不友, 弟不共, 不相及也.’”이니 卿何爲過懼而狼狽如是乎아하고 待之如舊하다
燕人 以令叛而復還이라하여 疑爲反間하여 徙之沙城注+② 沙城, 在龍城東北六百里.하다
司馬公曰
敵國材臣 來爲己用 進取之良資也 慕容垂材高功盛이로되 無罪見疑하여 窮困歸秦이라
秦王堅 禮之以收燕望하고 親之以盡燕情하고 寵之以傾燕衆하고 信之以結燕心하니 未爲過矣
何汲汲於殺垂하여 至乃爲市井鬻賣之行하여 有如嫉其寵而讒之者 豈雅德君子所宜爲哉리오
燕慕容臧 將兵拒秦師어늘 秦王猛 擊走之하다
燕樂安王臧 自新樂으로 進屯滎陽注+① 新樂, 當在滎陽界.이어늘 遣梁成, 鄧羌하여 撃走之하고 留羌鎭金墉하고 以桓寅代羌하여 戍陝城而還하다
秦王堅 以猛爲司徒錄尙書事하고 封平陽郡侯한대 固辭曰 今燕吳未平하여 戎車方駕어늘 而始得一城 卽受三事之賞注+② 三事, 三公也.인댄 若克殄二冦 將何以加之리잇가
堅曰 苟不蹔抑朕心이면 何以顯卿謙光之美리오하고 遂寢司徒尙書之命하다
◑ 五月 慕容令 襲燕龍城이라가 不克而死하다
自度終不能免하고 密謀起兵하여 沙城中讁戍士數千人 皆厚撫之하여 帥以東襲威德城하여 據之注+① 燕王皝改南羅城爲威德城.하니 諸戍皆應이라
將襲龍城이러니 弟麟以告하니 出走라가 遂爲其下所殺하다
六月 秦王猛 督諸軍하여 復伐燕하다
秦王堅 送猛於灞上曰
今委卿以關東之任하노니 當先破壺關하고 平上黨하고 長驅取鄴이니 所謂疾雷不及掩耳注+① 秦置上黨郡, 治壺關城. 前漢治長子城, 董卓治壺關城. 慕容氏治安民城, 後遷壺關城. 吾當親督萬衆하여 繼卿星發하고 舟車糧運하여 水陸俱進하리니 卿勿以爲後慮也注+② 星發, 謂戴星而發行也.하라
猛曰 臣杖威靈하고 奉成算하여 盪平殘胡 如風掃葉이니 不煩鑾輿 親犯塵霧니이다 但速敕所司하여 部置鮮卑之所하소서 大悅注+③ 部置鮮卑之所, 謂克燕之後, 徙鮮卑於關中也, 但令有司部分安置鮮卑之處所.이러라
秋七月朔 日食하다
◑ 八月 克壺關하다
王猛 攻壺關이어늘 燕主暐 命太傅評하여 將中外精兵三十萬以拒之러니 畏猛不敢進이라
克壺關 所過郡縣 皆望風降附하니 燕人 大震이라
申胤 歎曰 鄴必亡矣로다이나 越得歲而吳伐之하여 卒受其禍注+① 歲星, 一曰應星, 一曰經星, 一曰紀星. 歲行一次, 謂之歲星, 十二歲而星一周天. 東方木之精, 蒼帝之象也. 歲星所在之國, 不可伐, 可以伐人. 左傳昭三十二年, 吳伐越, 史墨曰 “不及四十年, 越其有吳乎. 越得歲, 而吳伐之, 必受其凶.” 杜預註曰 “此年, 歲在星紀, 星紀. 吳․越之分也. 歲星所在, 其國有福, 吳先用兵, 故反受其殃.” 哀二十二年, 越果滅吳.러니 今福德在燕하니 秦雖得志 而燕之復建 不過一紀耳注+② 福德, 一曰德星, 出於有道之國. 德星卽歲星, 歲星所在, 其國有福, 故曰福德. 福德在燕, 亦謂歲星在燕分也, 十二年爲一紀.리라
大司馬溫 敗袁瑾于壽春하고 遂圍之하다
◑ 九月 秦王猛 入晉陽하여 冬十月 及燕慕容評으로 戰于潞川하여 敗之하고 遂圍鄴하다
秦楊安 攻晉陽하여 久未下어늘 引兵助攻할새 爲地道하여 使將軍張蚝 帥壯士數百하고 潛入城中하여 大呼斬關하고 納秦兵하여 遂入晉陽하다
屯潞川注+① 據水經註 “潞川在上黨潞縣北. (關)[闞]駰曰 ‘潞水卽漳水也’, 爲冀州浸.”이어늘 進兵與相持할새 遣將軍徐成하여 覘燕軍호되 期以日中이러니 及昏而返이어늘
將斬之한대 鄧羌 固請曰 成 羌郡將也注+② 成, 蓋爲羌本郡太守. 願與效戰以贖罪注+③ 效戰, 謂效力決戰也.하노이다 弗許하니하여 還營하여 嚴鼓勒兵하여 將攻猛注+④ 嚴鼓, 謂擊之急也.이어늘 赦之하다
詣猛謝어늘 執其手하고 曰 吾試將軍耳로라 將軍於郡將 尙爾어든 況國家乎
爲人貪鄙하여 障固山泉하고 鬻樵及水하여 積錢帛如丘陵하니 士卒怨憤하여 莫有闘志注+① 山者, 樵之所仰. 泉者, 汲之所仰. 障固山泉, 使軍士不得樵汲, 而鬻薪水, 以牟利.
聞之하고 笑曰 慕容評 眞奴才로다 雖億兆之衆이라도 不足畏어든 況數十萬乎아하고
乃遣將軍郭慶하여 帥騎五千하고 夜從間道하여 出評營後하여 燒評輜重하니 火見鄴中注+② 見, 堅遍切. 潞川, 地形高而近鄴, 且火盛, 故鄴中望而見之.이라
燕主暐懼하여 讓評曰 府庫之積 朕與王共之하니 何憂於貧이리오 若家國喪亡이면 持錢帛欲安所置之오하고
乃命悉以其錢帛으로 散之軍士하고 且趣使戰注+③ 趣, 讀曰促.하다
大懼하여 請戰이어늘 陳於渭源而誓之曰注+① 按渭水不出潞縣. 水經注有涅水出潞縣西覆甑山, 或者渭字, 其涅字之誤乎. 又按溫公稽古錄書 “王猛破評于淸原.” 杜預曰 “河東聞喜縣北有淸原.” 其地又與潞川相遠, 姑存疑以待知者. 杜佑通典, 作潞源.
王景略 受國厚恩하고 任兼内外注+② 景略, 猛自稱其字.하여 今與諸君으로 深入賊地하니 當竭力致死하여 有進無退하여 共立大功하여 以報國家하여 受爵明君之朝하고 稱觴父母之室 不亦美乎注+③ 受爵明君之朝, 謂有功而受賞於朝也. 稱觴父母之室, 謂受賞而歸擧酒爲父母壽也.아하니
衆皆踊躍하여 破釜棄糧하고 大呼競進이러라
望燕兵之衆하고 謂鄧羌曰 今日 非將軍이면 不能破勍敵이니 將軍 勉之注+① 勍, 音擎, 強也.하라 羌曰 若能以司隷 公勿以爲憂하소서
猛曰 此非吾所及也 必以安定太守萬戶侯相處注+② 秦雍州刺史治安定, 安定在秦中爲大郡.호리라 不悅而退하다
俄而兵交 召羌한대 寢弗應이어늘 馳就許之하니 乃大飲帳中하고 與張蚝, 徐成等으로 跨馬運矛하여 馳赴燕陳하여 出入數四호되 旁若無人하여 所殺傷數百이라
及日中 燕兵 大敗하니 俘斬五萬餘人하고 乘勝追擊하여 所殺及降 又十萬餘 單騎走還鄴하다
崔鴻曰注+① 鴻, 後魏散騎常侍, 著十六國春秋. 鄧羌 請郡將以撓法 徇私也 勒兵欲攻王猛 無上也 臨戰 豫求司隷 邀君也 有此三者하니 罪孰大焉이리오
能容其所短하고 收其所長하여 若馴猛虎馭悍馬하여 以成大功하니 采葑采菲 無以下體라하니 猛之謂矣로다
◑ 秦兵 長驅圍鄴하니 號令 嚴明하여 軍無私犯하고 法簡政寬注+① 軍無私犯, 言軍士不敢私犯鄴民也.하니 燕民 各安其業하여 更相謂曰 不圖今日 復見太原王注+② 太原王, 謂慕容恪也, 死四年矣, 今有王猛猶再見恪.이로라
聞之하고 歎曰 慕容玄恭 可謂古之遺愛矣라하고 設太牢以祭之注+③ 玄恭, 恪字. 左傳昭公二十年 “子産卒, 仲尼聞之, 出涕曰 ‘古之遺愛也.’ 註云 “子産見愛, 有古人之遺風.”하다 秦王堅 詔猛曰 朕今親帥六軍하여 星言電赴하리니 將軍 其休養將士하여 以俟朕至然後 取之注+④ 詩曰 “星言夙駕.” 謂早駕, 見星而行也. 電赴, 言其疾也.하라
秦王堅 留李威하여 輔太子하고 自帥精銳十萬하여 赴鄴하여 七日而至安陽하여 宴祖父時故老注+① 晉志 “安陽縣屬魏郡.” 魏收志曰 “天平初, 倂蕩陰․安陽, 屬鄴.” 又“汲郡北脩武縣有安陽城.” 符洪父子先屯枋頭, 有故老尙存, 聞堅之來, 迎於安陽, 故宴之.하다
燕主暐與慕容評等으로 犇龍城이어늘 入鄴宮하다
慕容垂 見燕公卿及故僚吏하고 有慍色하니 高弼 密言曰 今雖國家傾覆이나 安知其不爲興運之始邪잇가 宜恢江海之量하여 慰結其心하여 以立覆簣之基하여 成九仞之功注+② 言譬如爲山, 自覆一簣而進, 成九仞之功.이니 奈何以一怒捐之오한대 垂悅從之하다
暐旣出城 衛士皆散하고 惟將軍孟高扶侍 極其勤瘁하고 所在遇盜하면 轉闘而前이라가 與將軍艾朗으로 俱死於賊注+① 艾, 姓也.하다
暐失馬歩走러니 使將軍郭慶追之한대 及於高陽하여 執以詣堅이어늘
詰其不降之狀하니 對曰 狐死首丘하나니 欲歸死於先人墳墓耳注+② 首丘, 謂狐以首枕丘而死, 不忘其所自生也. 檀弓曰 “狐死, 正丘首, 仁也.” 慕容氏之先, 皆葬昌黎.로라 哀而釋之하여 令還宮하여 帥文武出降하다
暐稱高朗之忠於堅이어늘 命厚加斂葬하고 拜其子爲郞中하다
犇高句麗어늘 高句麗執送於秦하니 凡得郡 百五十七이요 戶二百四十六萬이요 口九百九十九萬이라 以燕宮人珍寶 分賜將士하다
評之敗也 暐疑梁琛知秦謀하여 收繋獄이러니
至是하여 召釋之하고 謂曰 卿 不能見幾而作하여 反爲身禍하니 可謂智乎 對曰
臣聞幾者 動之微 吉凶之先見者也注+① 易大傳之辭.라하니 如臣愚暗 實所不及이니이다이나 爲臣莫如忠이요 爲子莫如孝
是以 烈士 臨危不改하고 見死不避하여 以徇君親이어늘 彼知幾者 心達安危하고 身擇去就하여 不顧家國하나니 臣雖知之 尙不忍爲어든 況非所及邪잇가
聞悅綰之忠하고 恨不及見하여 拜其子爲郞中하다
以猛爲使持節都督關東六州諸軍事冀州牧하여 鎭鄴하고 悉以評第中之物賜之하고 守令有闕 令以便宜補授하고 將士封賞 各有差하다
州縣守長 皆因其舊注+① 盡易州縣牧守令長, 旣駭觀聽, 且人情新舊不相安, 故皆因舊.하고 以燕申紹與韋儒 俱爲繡衣使者하여 循行關東하여 觀省風俗하고
勸課農桑하며 振恤窮困하고 收葬死亡하며 旌顯節行하고 燕政 有不便於民者 皆變除之注+② 儒, 京兆人. 竝用燕․秦之人, 爲繡衣使者, 用燕人者, 以其習關東風俗, 用秦人者, 使宣堅之德意也.하다
十二月 遷故燕主暐及鮮卑四萬戶於長安하다
秦王堅 遷慕容暐及其百官幷鮮卑四萬餘戶于長安하다 表留梁琛爲主簿하다
它日 與僚屬宴할새 語及燕使한대 猛曰 人心不同이라 梁君 專美本朝하고 郝君 微說國弊注+① 梁君, 謂梁琛. 郝君, 謂郝晷也. 本朝․國弊, 皆謂燕也.로라
參軍馮誕曰 敢問取臣之道 何先이니잇고 猛曰 郝君知幾하니 爲先이로라 誕曰 然則明公 賞丁公而誅季布也注+② 言取臣之道, 與漢高帝異.라하니 大笑러라
封暐爲新興侯하고 以評爲給事中하고 皇甫眞爲奉車都尉하다
燕故太史黄泓 歎曰 燕必中興이니 其在吳王乎인저 恨吾老不及見耳注+③ 慕容之初興, 泓歸之, 及儁之取中原, 泓贊其決, 泓知數者也.라하니라
燕以宜都王桓將兵하여 爲評後繼注+① 桓, 儁之弟也.러니 聞敗하고 走和龍하여 攻遼東하니 遼東已降秦이라
追桓하여 擊而殺之하다 其子鳳 年十一이라 陰有復讐之志하여 鮮卑丁零有氣幹者 皆傾身與之交러니
權翼 謂曰 兒方以才望自顯하니 勿效爾父不識天命하라
厲色曰 先王 欲建忠而不遂하시니 此乃人臣之節이라 君侯之言 豈奬勸將來之義乎리오
改容謝之하고 言於堅曰 鳳 忼慨有才器호되 但狼子野心이니 恐終不爲人用耳니이다


【綱】 晉나라(東晉) 帝 司馬奕 太和 5년이다.
【目】 秦나라(前秦) 符堅 建元 6년이고 燕나라(前燕) 幽帝 慕容暐 建熙 11년이다. 이해에 燕나라가 망하였다. 큰 나라(前秦)가 하나이고 작은 나라(前涼, 代)가 둘이니, 합하여 僭國이 셋이다.
【綱】 봄 정월에 慕容令이 秦나라(前秦)에서 燕나라(前燕)로 달아났다.
【目】 王猛이 長安을 출발할 적에 慕容令을 자신의 軍事에 참여시켜서 鄉導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왕맹은 장차 길을 떠나려 할 적에 慕容垂를 찾아가서 술을 마시다가 조용히 이르기를 “지금 멀리 작별하게 되었는데, 卿은 나에게 무엇을 선물하여 나로 하여금 물건을 보고 사람을 생각하게 하겠는가.” 하자 모용수는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선물로 주었다.
왕맹은 洛陽에 이르러 모용수와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거짓으로 모용수의 使者인 것처럼 꾸며 慕容令에게 이르기를 “우리 父子가 이곳에 온 것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였는데, 지금 왕맹이 사람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秦主(符堅)의 마음 또한 알기가 어렵다.
듣자하니 東朝(前燕)가 근래에 잘못을 뉘우쳤다 한다. 나는 이제 동쪽(前燕)으로 돌아갈 것이니, 너는 속히 출발하도록 하라.” 하였다.
모용령이 이것을 의심하여 종일토록 주저하였으나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어서 마침내 연나라 군대로 달아났다.注+① ‘躊躇’는 猶豫하여 발걸음을 멈추는 뜻이다.
【目】 王猛이 慕容令이 배반한 사실을 표문으로 올리자, 慕容垂가 두려워하여 도망하다가 藍田에 이르러 추격하는 기병에게 사로잡혔다.
秦王 符堅이 모용수를 위로하기를 “卿이 나라가 화목하지 못하여 몸을 던져 짐에게 투항하였는데, 경의 어진 아들이 마음에 근본을 잊지 못하여 〈고국으로 돌아간 것은〉 각자의 뜻이 또한 다른 것이다.
연나라 사람은 모용령이 배반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하여 反間計를 한다고 의심하여 그를 沙城으로 옮겼다.注+② 沙城은 龍城 동북쪽 600리 지점에 있다.
【目】 司馬溫公(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評하였다.
“敵國의 재주 있는 신하가 와서 자기의 쓰임이 됨은 적국으로 진격하여 승리를 취하는 데에 좋은 자산이다. 慕容垂는 재주가 뛰어나고 功이 많은데, 아무런 罪가 없이 의심을 받아 곤궁하게 되어 秦나라(前秦)로 귀의하였다.
그러므로 秦王 符堅이 그를 예우하여 燕나라(前燕)의 名望을 거두어들이고 그를 친애하여 연나라의 실정을 다 알아내고 그를 총애하여 연나라 무리를 모두 오게 하고 그를 신임하여 연나라의 인심을 결집하였으니,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王猛이 어찌하여 모용수를 죽임에 급급해서 마침내 시정배가 물건을 파는 행실을 하여 마치 은총을 질투하여 참소하는 자처럼 하였단 말인가. 어찌 아름다운 덕을 갖춘 군자가 마땅히 할 바이겠는가.”
【綱】 燕나라(前燕) 慕容臧이 군대를 거느리고 秦나라(前秦) 군대를 막았는데, 진나라 王猛이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目】 燕나라 樂安王 慕容臧이 新樂에서 전진하여 滎陽에 주둔하였다.注+① 新樂은 마땅히 滎陽의 경계에 있을 것이다. 그러자 王猛이 梁成과 鄧羌을 보내어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등강을 남겨 金墉에 진주하게 하고, 등강 대신 桓寅에게 陝城을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秦王 符堅은 왕맹을 司徒 錄尙書事로 삼고 平陽郡侯에 봉하였는데, 왕맹이 굳이 사양하기를 “지금 燕(前燕)와 吳(東晉)가 아직 평정되지 않아서 兵車가 막 출동하였는데, 처음 한 城을 얻고서 곧바로 三事의 賞을 받는다면注+② 三事는 三公이다. 두 賊을 이겨 섬멸할 경우에는 장차 무엇을 더 내려주시겠습니까.” 하였다.
부견이 말하기를 “만약 짐의 기쁜 마음을 잠시 억누르지 않으면 卿의 아름다운 겸양의 덕을 어떻게 드러내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왕맹에게〉 司徒와 尙書의 직책을 내리는 명령을 중지하였다.
【綱】 2월에 袁眞이 죽자 아들 袁瑾이 대신 그 무리를 거느리니, 燕나라(前燕)와 秦나라(前秦)가 모두 군대를 보내어 도왔는데, 여름 4월에 〈晉나라(東晉)의〉 大司馬 桓溫이 군대를 보내어 격파하였다.
【綱】 5월에 慕容令이 燕나라(前燕)의 龍城을 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目】 慕容令이 끝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 판단하고는 은밀히 군대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沙城에 귀양 와서 戍자리 서는 군사 수천 명을 모두 후하게 어루만져 위로하고는 이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威德城을 공격하여 점거하니,注+① 燕王 慕容皝이 南羅城을 고쳐 威德城이라 하였다. 부근에서 수자리 서는 병사들이 모두 호응하였다.
장차 龍城을 습격하려 하였는데, 아우 慕容麟이 이 사실을 연나라에 고발하니, 모용령이 나가 달아나다가 마침내 자기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綱】 6월에 秦나라(前秦) 王猛이 여러 군대를 감독하여 다시 燕나라(前燕)를 공격하였다.
【目】 秦王 符堅이 王猛을 灞水 가에서 전송하며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지금 卿에게 關東의 임무를 맡기노니, 마땅히 먼저 壺關을 격파하고 上黨을 평정하고서 승승장구하여 鄴城을 취하여야 한다. 이것은 이른바 는 것이다.注+① 秦나라 때에는 上黨郡을 설치하고 壺關城을 치소로 삼았는데, 前漢 때에는 長子城을 치소로 삼았고 董卓은 壺關城을 치소로 삼았다. 慕容氏는 安民城을 치소로 삼았는데 뒤에 호관성으로 옮겼다. 내 마땅히 만여 명의 병력을 친히 감독하여 경의 뒤를 이어 새벽에 일찍 출발하고 배와 수레로 군량을 운반하여 수로와 육로로 함께 나갈 것이니, 경은 뒤를 염려하지 말라.”注+② ‘星發’은 새벽별을 보며 출발함을 이른다.
왕맹이 말하기를 “신이 임금님의 威靈을 의지하고 세워놓은 계책을 받들어 마치 바람이 낙엽을 쓰는 것처럼 잔약한 오랑캐를 소탕할 것이니, 번거롭게 御駕가 직접 자욱한 먼지를 무릅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속히 有司에게 칙령을 내려 의 처소를 關中에 몇 部로 나누어 안치하게 하소서.” 하니, 부견이 크게 기뻐하였다.注+③ ‘部置鮮卑之所’는 燕나라를 이긴 뒤에 鮮卑族을 關中으로 옮김을 말한 것이다. 다만 有司로 하여금 선비족을 안치할 처소를 〈關中에〉 몇 部로 나누게 하는 것이다.
【綱】 가을 7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綱】 8월에 秦나라(前秦)가 壺關을 점령하였다.
【目】 王猛이 壺關을 공격하자, 燕主 慕容暐가 太傅 慕容評에게 명하여 中外의 精兵 30만을 거느리고 막게 하였는데, 모용평은 왕맹을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왕맹이 壺關을 점령할 적에 지나가는 郡縣들이 모두 그의 氣勢를 멀리서 바라보고 항복하여 따르니, 연나라 사람들이 크게 진동하였다.
申胤이 탄식하기를 “鄴城이 반드시 망할 것이다. 그러나 옛날 越나라가 歲星을 얻었는데, 吳나라가 월나라를 공격하여 끝내 그 禍를 받았다.注+① 歲星은 일명은 應星이라 하고 일명은 經星이라 하고 일명은 紀星이라 한다. 1년에 한 를 이동하는 것을 세성이라 하니, 12년에 별이 하늘을 한 번 일주한다. 〈세성은〉 東方 木의 精氣이고 蒼帝의 象이다. 세성이 있는 나라는 공격해서는 안 되고, 그 나라에서 다른 나라는 공격할 수가 있다. ≪春秋左氏傳≫ 昭公 32년에 吳나라가 越나라를 공격하자, 史墨이 말하기를 “40년이 못 되어서 월나라가 오나라를 소유할 것이다. 월나라가 세성을 얻었는데 오나라가 공격하였으니, 반드시 그 흉함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杜預의 註에 “이해에 세성이 星紀에 있었으니, 성기는 오나라와 월나라의 분야이다. 세성이 있는 곳에는 그 나라에 福이 있으니, 오나라가 먼저 병력을 동원하여 월나라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도리어 앙화를 받은 것이다.” 하였다. 哀公 22년에 월나라가 과연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지금 福德星이 燕나라에 있으니, 秦나라가 비록 뜻을 얻더라도 1紀가 지나지 않아 연나라가 다시 세워질 것이다.” 하였다.注+② 福德은 일명은 德星이라 하니, 道가 있는 나라에 나타난다. 덕성은 바로 歲星이니, 세성이 있는 곳은 그 나라에 福이 있다. 그러므로 복덕이라 한 것이다. 복덕이 燕나라에 있음은 또한 세성이 연나라 분야에 있음을 말한 것이니, 12년을 1紀라 한다.
歲星歲星
【綱】 〈晉나라(東晉)〉 大司馬 桓溫이 袁瑾을 壽春에서 패퇴시키고 마침내 그를 포위하였다.
【綱】 9월에 秦나라(前秦) 王猛이 晉陽으로 쳐들어가서 겨울 10월에 燕나라(前燕) 慕容評과 潞川에서 싸워 패퇴시키고 마침내 鄴城을 포위하였다.
【目】 秦나라 楊安이 晉陽을 공격하여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자, 王猛이 군대를 이끌고 양안을 도와 공격하였는데, 지하도를 만들어서 將軍 張蚝(장자)로 하여금 壯士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안으로 잠입하여 크게 고함쳐 관문을 지키는 장수의 목을 베고 진나라 군대를 들여보내 마침내 진양으로 쳐들어갔다.
慕容評이 潞川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다.注+① ≪水經註≫를 근거해보면 “潞川은 上黨 潞縣의 북쪽에 있다. 이 말하기를 ‘潞水는 바로 漳水이다.’ 하였으니, 冀州의 浸(큰 물)이 된다.” 하였다. 왕맹이 군대를 전진시켜 그와 대치할 적에 將軍 徐成을 보내어 燕나라 군대를 정탐하게 하였는데, 한낮에 오기로 기약하였으나 해가 저물어 어두울 때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왕맹이 장차 그를 목 베려 하자, 鄧羌이 굳이 간청하기를 “서성은 저의 입니다.注+② 徐成은 아마도 鄧羌의 本郡 太守가 되었던 듯하다. 원컨대 그와 더불어 힘을 다해 싸워서 속죄하기를 청하노이다.” 하였다.注+③ ‘效戰’은 힘을 바쳐 결전함을 이른다. 그러나 왕맹이 허락하지 않으니, 등강은 怒하여 진영으로 돌아가서 급히 북을 울리고 군대를 무장하여 왕맹을 공격하려고 하였는데,注+④ ‘嚴鼓’는 북을 급히 쳐서 〈공격함을〉 이른다. 왕맹이 서성을 용서하였다.
등강이 왕맹에게 찾아와서 사죄하자, 왕맹은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 장군을 한 번 시험했을 뿐이다. 장군이 郡將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의리를 지키는데, 하물며 국가에 있어서이겠는가.” 하였다.
【目】 慕容評은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山林과 샘물을 봉쇄하고 뗄나무와 식수를 팔아서 돈과 비단을 丘陵처럼 쌓아놓으니, 士卒들이 원망하고 분노하여 싸울 뜻이 없었다.注+① 山은 나무꾼이 우러러보는 곳이요, 샘물은 물긷는 자가 우러러보는 곳이니, 산과 샘물을 봉쇄하여 병사들로 하여금 뗄나무를 하거나 식수를 길어오지 못하게 하고는 뗄나무와 식수를 팔아서 이익을 도모한 것이다.
왕맹은 이 말을 듣고 웃기를 “모용평은 참으로 노예의 재질이다. 비록 億兆의 무리가 있더라도 굳이 두려워할 것이 못 되는데, 하물며 수십 만의 무리이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장군 郭慶을 보내어 5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밤중에 샛길을 따라 慕容評의 진영 뒤로 나가서 모용평의 輜重을 불태우니, 불이 鄴城 가운데에서도 보였다.注+② 見(바라보다)은 堅遍의 切이다. 潞川은 地形이 높고 鄴城과 가까우며, 또 불이 크게 났으므로 업성 가운데에서 이것을 바라본 것이다.
燕主 慕容暐가 두려워하여 모용평을 꾸짖기를 “府庫에 쌓인 재물을 朕이 과 함께 소유하니, 어찌 가난함을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나라가 패망할 경우 왕은 돈과 비단을 가지고 어느 곳에 두려고 하는가.” 하고는
마침내 명하여 그 돈과 비단을 모두 軍士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모용평을 재촉하여 싸우게 하였다.注+③ 趣(재촉하다)은 促으로 읽는다.
【目】 〈燕王의 꾸지람에〉 慕容評이 크게 두려워하여 싸울 것을 청하자, 王猛이 渭源에 진을 치고 맹세하기를注+① 살펴보건대 渭水는 潞縣에서 발원하지 않는다. ≪水經註≫에 “涅水(날수)가 潞縣 서쪽 覆甑山에서 발원한다.” 하였으니, 어쩌면 ‘渭’자는 ‘涅’자의 오자일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司馬溫公(司馬光)의 ≪稽古錄≫에 “王猛이 慕容評을 淸原에서 격파했다.”고 썼는데, 杜預는 “河東 聞喜縣 북쪽에 淸原이 있다.”고 하였다. 그 땅은 또 潞川과 거리가 머니, 우선 의심스러운 것을 남겨두어 아는 자를 기다린다. 杜佑의 ≪通典≫에는 ‘潞川’이 ‘潞源’으로 되어 있다.
“王景略이 나라의 큰 은혜를 받고서 内外의 重職을 겸하여注+② 景略은 王猛이 자기의 字를 스스로 칭한 것이다. 이제 諸君과 함께 賊地에 깊숙이 쳐들어왔으니, 마땅히 힘을 다해 목숨을 바쳐 싸워 오직 진격만 하고 물러나지 않아서 함께 큰 공을 세워 나라에 보답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밝은 임금의 조정에서 상을 받고 부모의 방에서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는 것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니,注+③ ‘受爵明君之朝’는 功이 있어 조정에서 상을 받음을 말한 것이요, ‘稱觴父母之室’은 상을 받고 돌아가서 술잔을 들어 부모를 위해 축수함을 말한 것이다.
王景略王景略
여러 병사들이 모두 기뻐 날뛰며 〈결사적으로 싸울 의지를 보여〉 가마솥을 깨트리고 양식을 버리고서 크게 함성을 지르며 앞다투어 진격하였다.
【目】 王猛이 燕나라(前燕) 군대의 무리를 바라보고 鄧羌에게 이르기를 “오늘 將軍이 아니면 강한 敵을 격파할 수가 없으니, 장군은 노력하라.” 하였다.注+① 勍은 음이 擎이니, 강함이다. 등강이 말하기를 “만약 공이 司隷의 자리를 나에게 준다면 공은 걱정하지 마소서.” 하였다.
왕맹이 이르기를 “이것은 내가 미칠 바가 아니니, 반드시 安定太守와 萬戶侯를 그대에게 내리게 하도록 하겠다.” 하니,注+② 秦나라 雍州刺史는 安定을 치소로 삼으니, 안정은 진나라 지역에 있어 큰 郡이다. 등강은 기뻐하지 않고 물러갔다.
잠시 후 두 나라 군대가 교전할 적에 왕맹이 등강을 불렀으나 등강은 잠을 자고 응하지 않았다. 왕맹이 달려가서 사예의 자리를 주기로 허락하니, 등강은 마침내 장막 안에서 크게 술을 마시고 張蚝(장자)와 徐成 등과 함께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연나라 진영으로 달려가서 옆에 아무 사람이 없는 것처럼 거리낌 없이 서너 차례 출입하며 적병 수백 명을 살상하였다.
점심 무렵에 연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니, 사로잡고 참수한 것이 5만여 명이었고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다시 죽이고 항복시킨 것이 또다시 10여만 명이었다. 慕容評은 단신으로 말을 타고 달아나 鄴城으로 돌아갔다.
【目】 崔鴻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注+① 崔鴻은 後魏(北魏)의 散騎常侍였으니, ≪十六國春秋≫를 지었다. “鄧羌이 郡將을 살려줄 것을 간청하여 法을 어지럽힘은 사사로움을 따른 것이요, 군대를 무장하여 王猛을 공격하고자 함은 윗사람을 무시한 것이요, 전투에 임하여 미리 司隷의 자리를 요구함은 군주에게 강요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잘못이 있으니, 어떠한 죄가 이보다 크겠는가.
그런데도 왕맹이 사나운 호랑이를 길들이고 억센 말을 어거하듯 능히 그의 단점을 포용하고 장점을 거두어 써서 큰 공을 이루었다. 하였으니, 왕맹을 두고 한 말이다.”
【目】 秦나라(前秦) 군대가 승승장구하여 鄴城을 포위하니, 號令이 엄격하고 분명해서 군사들이 사사로이 백성들을 침범함이 없었고, 法이 간략하고 政事가 너그러우니注+① ‘軍無私犯’은 군사들이 감히 鄴城의 백성을 사사로이 침범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燕나라 백성들이 각각 자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서로 말하기를 “오늘 다시 太原王을 만나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였다.注+② 太原王은 慕容恪을 이른다. 이때 죽은 지가 4년이 지났으니, 현재의 王猛이 모용각이 다시 나타난 것과 같다는 말이다.
子産子産
王猛은 이 말을 듣고 감탄하기를 “慕容玄恭은 옛날의 遺愛라고 이를 만하다.” 하고는 太牢를 장만하여 그에게 제사하였다.注+③ 玄恭은 慕容恪의 字이다. ≪春秋左氏傳≫ 昭公 20년에 “子産이 죽자, 仲尼가 그 소식을 들으시고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기를 ‘옛날의 遺愛이다.’ 하셨다.” 하였는데, 그 註에 이르기를 “자산이 백성들을 사랑해주어 古人의 遺風이 있었다.” 하였다. 秦王 符堅이 왕맹에게 명하기를 “朕이 이제 직접 6軍을 거느리고서 새벽 일찍 출동하여 번개처럼 달려갈 것이니, 장군은 장병들을 편안히 쉬면서 보양하게 하고, 짐이 도착한 뒤에 연나라를 점령하라.” 하였다.注+④ ≪詩經≫ 〈鄘風 定之方中〉에 “별을 보고 일찍 말에 멍에를 한다.” 하였으니, 일찍 멍에를 하여 별을 보고 길을 떠남을 이른다. ‘電赴’는 빠름을 말한 것이다.
【綱】 11월에 秦王 符堅이 鄴城으로 들어가서 燕主 慕容暐를 잡고 王猛을 冀州牧 都督關東六州軍事로 삼았다.
【目】 秦王 符堅이 李威를 남겨두어 太子를 보필하게 하고는 정예병 10만을 직접 거느리고 鄴城으로 달려갔는데, 7일 만에 安陽에 도착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의 故老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注+① ≪晉書≫ 〈地理志〉에 “安陽縣은 魏郡에 속한다.” 하였다.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天平 초년에 蕩陰과 安陽을 합병하여 鄴縣에 소속시켰다.” 하였고, 또 “汲郡의 北脩武縣에 安陽城이 있었다.” 하였다. 符洪의 父子가 먼저 枋頭에 주둔하였는데, 故老가 아직 살아 있다가 符堅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安陽에서 맞이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준 것이다.
燕主 慕容暐가 慕容評 등과 함께 龍城으로 달아나자, 부견이 鄴城의 宮으로 들어갔다.
慕容垂가 燕나라 公卿 및 옛 관리들을 보고 서운해하는 기색이 있자, 高弼이 은밀히 말하기를 “지금 비록 국가가 傾覆되었으나 이것이 국운을 부흥시키는 시발점이 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마땅히 江海처럼 넓은 도량으로 저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결속시켜 注+② 비유하건대 산을 만들 적에 한 삼태기의 흙을 쏟아붓는 것을 시작으로 나아가 아홉 길의 공을 이루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어찌하여 한 번의 노여움 때문에 이것을 버린단 말입니까.” 하니, 모용수가 기뻐하여 따랐다.
【目】 慕容暐가 鄴城을 빠져나온 뒤에 호위하는 병사들이 모두 흩어졌는데 오직 將軍 孟高가 곁에서 부축하여 시중드는 수고로움을 다하였다. 곳곳에서 賊을 만났을 적에 이리저리 이동하여 싸우며 전진하다가 장군 艾朗과 함께 모두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注+① 艾는 姓이다.
모용위가 말을 잃고 도보로 달아났는데, 符堅이 장군 郭慶으로 하여금 추격하게 하자, 高陽에서 따라잡아 모용위를 사로잡아 가지고 부견에게 왔다.
부견이 항복하지 않는 情狀을 따져 물으니, 모용위는 대답하기를 “여우가 죽을 때 옛날 살던 언덕 쪽에 머리를 두니, 先人의 墳墓로 돌아가 죽고자 해서입니다.” 하였다.注+② ‘首丘’는 여우가 머리를 옛날 살던 언덕 쪽으로 향해 죽으니, 태어난 곳을 잊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禮記≫ 〈檀弓〉에 “여우가 죽을 적에 바로 머리를 옛 언덕 쪽으로 두는 것은 仁이다.” 하였다. 慕容氏의 선조는 모두 昌黎에 安葬되었다. 부견은 그를 가엾게 여겨 석방하여 宮으로 돌아가서 文武의 관원을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게 하였다.
모용위가 孟高와 艾朗의 충성을 부견에게 칭찬하자, 부견이 명을 내려 후한 예로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하게 하고 그들의 자식을 郞中에 제수하게 하였다.
【目】 慕容評이 高句麗로 달아나자, 고구려가 그를 사로잡아 秦나라(前秦)로 보냈다. 진나라가 얻은 郡이 모두 157개이고 家戶가 246만이고 인구가 999만이었다. 燕나라의 궁녀와 진귀한 보물을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目】 慕容評이 패전하자, 慕容暐는 梁琛이 秦나라(前秦)의 계책을 알았다고 의심하고는 그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때 이르러 符堅이 그를 석방하고 불러와서 이르기를 “卿이 기미를 보고 일찍 떠나가지 못하여 도리어 몸소 禍를 불러왔으니, 지혜롭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신이 듣건대 ‘기미라는 것은 動함이 은미한 것이므로 吉凶이 먼저 나타난다.’ 하니,注+① 이 내용은 ≪周易≫ 〈繫辭傳〉의 말이다. 신과 같이 어리석고 어두운 자는 실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보다 좋은 것이 없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烈士는 위태로움에 처하여도 지조를 바꾸지 않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피하지 아니하여 군주와 어버이를 위해 희생하는데, 저 기미를 아는 자들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安危를 분명하게 살피고 자신의 거취를 택하면서도 국가의 안위를 돌보지 않습니다. 신은 비록 기미를 안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러한 짓을 차마 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여기에 미칠 수 없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부견은 을 한스럽게 여기고는 그의 아들에게 郞中 벼슬을 제수하였다.
【目】 符堅은 王猛을 使持節 都督關東六州諸軍事 冀州牧으로 삼아 鄴城에 진주하게 하고 慕容評의 집에 있는 물건을 모두 그에게 하사하였으며, 守令 중에 결원이 생기면 왕맹으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보임하게 하였다. 또 장병들에게 각기 차등을 두어 封地를 하사하고 상을 주었다.
州縣의 守長을 모두 옛사람을 그대로 등용하고,注+① 州縣의 州牧과 郡守, 縣令을 모두 바꾸면 사람들의 귀와 눈을 놀라게 하는 데다 인정상 新官과 舊官이 서로 편안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모두 구관을 그대로 둔 것이다. 燕나라의 申紹와 〈秦나라(前秦)의〉 韋儒를 모두 로 삼아 關東 지방을 순행해서 풍속을 관찰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농업과 뽕나무 가꾸는 일을 권장하였으며 곤궁한 자들을 구휼하고 사망한 자들을 거두어 장례하였다. 그리고 節行이 있는 자를 旌表하고 燕나라 政事 중에 백성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모두 바꾸고 제거하였다.注+② 韋儒는 京兆 사람이다. 燕나라와 秦나라의 사람을 함께 등용하여 繡衣使者로 삼았으니, 연나라 사람을 등용한 것은 그가 관동 지방의 풍속에 익숙하기 때문이요, 진나라 사람을 등용한 것은 符堅의 덕스러운 뜻을 펴게 하려는 것이었다.
【綱】 12월에 秦나라(前秦)가 前 燕主 慕容暐와 鮮卑族 4만 호를 長安으로 옮겼다.
【目】 秦王 符堅은 慕容暐와 그의 百官 및 鮮卑族 4만여 戶를 長安으로 옮겼다. 王猛은 表文을 올려 梁琛을 머무르게 하여 主簿로 삼았다.
왕맹은 다른 날에 관료들과 잔치할 적에 왕맹이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똑같지 않다. 옛날에 梁君(梁琛)은 本朝(前燕)를 찬미하였고 郝君(郝晷)은 燕나라의 병폐를 약간 말하였다.” 하였다.注+① 梁君은 梁琛을 이르고 郝君은 郝晷를 이른다. ‘本朝’와 ‘國弊’는 모두 燕나라를 이른다.
參軍 馮誕이 말하기를 “감히 묻겠습니다. 신하를 취하는 도는 무엇을 우선해야 합니까.” 하니, 왕맹이 말하기를 “학군은 기미를 알았으니, 학군이 우선이 된다.” 하였다. 풍탄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明公은 丁公을 상주고 季布를 주벌하겠습니다.” 하자,注+ 왕맹은 크게 웃었다.
秦나라는 慕容暐를 봉하여 新興侯를 삼고 慕容評을 給事中으로 삼고 皇甫眞을 奉車都尉로 삼았다.
燕나라 前 太史인 黄泓이 탄식하기를 “연나라가 반드시 中興할 것이니, 아마도 吳王(慕容垂)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내가 늙어서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注+③ 慕容氏가 처음 일어날 적에 黃泓이 귀의하였고, 慕容儁이 中原을 취할 적에 황홍이 그 계책의 결정을 도왔으니, 황홍은 운수를 아는 자이다.
【目】 처음에 燕나라(前燕)는 宜都王 慕容桓에게 군대를 거느려 慕容評의 지원 부대가 되게 하였는데,注+① 慕容桓은 慕容儁의 아우이다. 모용환은 모용평이 패했다는 말을 듣고 和龍으로 달려가 遼東을 공격하니, 이때는 이미 요동이 秦나라(前秦)에 항복한 뒤였다.
진나라가 모용환을 추격하여 죽였는데, 모용환의 아들 慕容鳳은 이때 나이가 11세였다. 은밀히 복수할 뜻을 품고서 鮮卑와 丁零의 사람 중에 氣魄과 才幹이 있는 자를 모두 자신을 낮추어 사귀었다.
權翼이 그에게 이르기를 “어린아이로서 지금 막 재주와 명망으로 스스로 이름이 드러났으니, 天命을 알지 못한 너의 부친을 본받지 말라.” 하였다.
모용봉이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先王(모용환)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세우고자 하셨으나 이루지 못하셨으니, 이는 바로 신하의 절개입니다. 君侯께서 하시는 말씀이 어찌 후배를 장려하는 도리라 하겠습니까.” 하니,
권익이 용모를 고쳐 사과하고 符堅에게 말하기를 “모용봉이 慷慨하고 재주와 기국이 있으나 이리 새끼의 野心을 가졌으니, 끝내 우리의 쓰임이 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역주
역주1 晉나라……하였다 : 臼季는 춘추시대 晉나라 대부이고 冀缺은 진나라 사람 郤缺을 가리키는바, 이 대화가 나온 전말은 다음과 같다. 晉나라의 重耳가 19년간의 오랜 유랑 생활 끝에 진나라로 돌아와 임금의 자리에 올라 文公이 되었는데, 당시 대신으로 있던 郤芮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뒤에 극예의 아들인 극결이 미천한 신분으로 지내면서 冀 땅에서 밭을 갈 때 그 아내가 들밥을 내왔는데,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여 대하였다. 구계가 이것을 보고서 ‘평상시의 공경은 축적된 德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므로 등용하면 백성들을 덕으로 잘 다스릴 것이다.’라고 문공에게 추천하자, 문공과 구계가 이러한 대화를 한 것이다. 문공은 구계의 청원을 받아들여 극결을 下軍大夫로 삼고 冀 땅을 식읍으로 주었고, 이후 극결은 문공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다.(≪春秋左氏傳≫ 魯僖公 33년) 〈康誥〉는 ≪書經≫의 편명으로 인용한 내용은 ‘어떤 사람이 罪를 지었을 경우 本人만을 처벌하고 父子兄弟에게 연좌시키지 않는다.’는 말인데, 左氏가 말한 〈강고〉의 내용은 현전하는 ≪서경≫에는 보이지 않는다.
역주2 袁眞……遣兵擊破之 : “袁氏가 배반했다고 썼는데, 여기서는 토벌을 쓰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袁眞이 배반함은 桓溫이 격동시켰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禍를 제일 먼저 일으킨 자를 죄준다. 그러므로 謝尙이 張遇의 반란을 격동시킨 것에 대해서는 사상이 〈장우를〉 토벌했다고 쓰지 않고 공격했다[攻]고 썼고,(穆帝 永和 8년(352)이다.) 桓溫이 袁氏의 반란을 격동시킨 것에 대해서는 환온이 〈원씨를〉 토벌했다고 쓰지 않고 공격했다[擊]고 쓴 것이다.(이해(370)이다.)[袁氏書叛矣 此其不書討 何 眞之叛 溫激之也 綱目罪首禍 故謝尙激張遇之叛 則尙不書討而書攻(穆帝永和八年) 桓溫激袁氏之叛 則溫不書討而書擊(是年)]” ≪書法≫
역주3 빠른……못한다 : ≪六韜≫ 〈龍韜〉에 보인다.
역주4 鮮卑族 : 前燕의 지배층은 鮮卑族 慕容部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5 星次(방위) : 黃赤道 부근의 一周天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12등분한 구획인 12次로, 그 명칭은 星紀․玄枵․娵訾(추자)․降婁․大梁․實沈․鶉首․鶉火․鶉尾․壽星․大火․析木이다. 木星이 1년에 12차를 차례로 하나씩 거쳐 가기 때문에 목성을 歲星이라 한 것이다.
역주6 郡將 : 郡守가 군사의 권한을 겸한 데서 일컬어진 칭호로 보인다. 서성이 등강의 고향 군수이기 때문에 등강이 서성을 옹호한 것이다.
역주7 闞駰 : 자는 玄陰으로, 南北朝 때 北魏의 저명한 地理學家이며 經學家이고, 벼슬은 尙書, 從事中郞 등을 지냈다. 저서로 지리 총서인 ≪十三州志≫ 10권이 있었는데, 北宋 이후에 散逸된 것을 淸나라 때 학자들이 자료를 모아 다시 책으로 만들었다.
역주8 : 慕容評의 봉작이 上庸王이었다.
역주9 見與 : 見은 동사 與(주다) 앞에서 일인칭 대명사로 쓰인 것이다.
역주10 순무나……아니다 : 순무는 잎은 좋으나 뿌리는 좋지 못한바, 사람이 단점이 있더라도 그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좋은 점을 버리지 말고 취해야 한다는 뜻이다.(≪詩經≫ 〈邶風 谷風〉)
역주11 秦王堅……都督關東六州軍事 : “劉氏와 石氏, 符氏, 姚氏는 똑같이 오랑캐이다. 그러나 符堅은 능히 王猛을 등용하였고 군대가 출동할 적에 기강을 갖추었다. 그러므로 燕나라를 공격할 적에 사람들을 목 베고 도륙하는 참상을 볼 수 없었으니, 다른 오랑캐의 행위와 차이가 있었다. 이 때문에 위에서는 ‘晉陽으로 쳐들어갔다.[入晉陽]’고 쓰고 여기서는 ‘鄴城으로 쳐들어갔다.[入鄴]’고 써서 모두 장황하게 쓰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연나라가 이미 함락되었다. 한 大國을 멸망시키는 것을 손을 뒤집는 것처럼 쉽게 하였으니, 왕맹이 이른바 ‘6州의 선비와 서민들로 하여금 군주가 바뀐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 것은 아마도 진실한 말일 것이다. 그리고 부견은 또 왕맹을 등용하여 6주를 통합하여 연나라의 백성들을 편안히 살도록 하였으니, 다른 나라들이 남의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대부분 불안하여 전전반측하였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는 부견이 홀로 5胡 중에 强盛하게 된 이유이다.[劉石符姚 均之夷狄也 然堅能用猛 師行有紀 故伐燕之擧 不見其斬艾屠戮之慘 異乎他虜所爲 是以上書入晉陽 此書入鄴 詞皆不費 而燕已擧矣 滅一大國 易若反手 如猛所謂使六州士庶 不覺易主者 蓋眞實語也 而堅又能就用猛 統六州 以安其衆 異於他滅國之後 多有反側不安者 此堅之所以獨盛於五胡也]” ≪發明≫
역주12 삼태기의……하니 : 燕나라의 公卿 및 옛 관리들을 위로하고 결속시키는 것이 국가 復興의 대업을 이루는 기초이니,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내용은 ≪論語≫ 〈子罕〉의 “비유하자면 산을 쌓는데, 마지막 흙 한 삼태기를 쏟아붓지 않아 산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내 자신이 중지한 것과 같고, 평지에 흙 한 삼태기를 쏟아부어 산을 만들기 시작해서 점점 만들어 나가는 것도 내가 해 나가는 것과 같다.[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라는 말과 ≪書經≫ 〈周書 旅獒〉의 “아홉 길 높이의 산을 쌓는데, 공이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서 무너진다.[爲山九仞 功虧一簣]”는 말에서 온 것이다.
역주13 悅綰의……것 : ≪資治通鑑≫ 권101 太和 3년(368) 9월 조에 悅綰의 일이 보인다. 열관이 왕공과 귀척의 蔭戶를 적발해내었는데, 이에 힘쓰다 지병이 심해져 태화 3년 11월에 죽었다.
역주14 繡衣使者 : 繡衣御史, 繡衣直指御史, 繡衣直指, 繡衣直指使者로 불리며 暗行御史라고도 한다. 前漢 武帝 때에 설치하였는데, 繡衣를 입으므로 皇帝가 직접 내린 사법 안건을 집행한다. 지위가 높으며 항상 설치되지는 않는다.
역주15 燕나라……언급하였는데 : 이는 본서 太和 4년(369) 7월에 前燕이 郝晷와 梁琛을 前秦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학구는 평소 王猛과 친분이 있어 왕맹에 의탁하고자 전연의 실정을 누설하였다. 반면에 양침은 전연의 위신을 높이려 노력하였다.
역주16 신하를……것이다 : 漢 高祖가 丁公을 주벌하고 季布에게 상을 주었던 것과 다름을 이른다. 정공은 계포의 同母弟인데, 項羽의 부하 장수가 되어 彭城 서쪽에서 劉邦(漢 高祖)을 궁지에 몰아넣어 거의 죽일 뻔하였으나, 유방이 둘 다 좋은 사람끼리 너무 심하게 싸울 필요가 없다고 설득하자, 정공은 군대를 돌려 돌아갔다. 항우가 죽고 유방이 漢나라를 건국하였는데, 정공이 유방을 찾아가니, 유방은 항우가 천하를 잃게 만든 不忠한 죄인으로 지목하여 정공의 목을 베어 후세의 신하들이 정공을 본받지 않도록 본을 보였다. 계포는 본래 항우의 부하 장수로 여러 번 유방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유방이 항우를 멸하고 천하를 평정하자, 계포를 잡기 위해 千金의 현상금을 내걸고서 “만약 집에 숨겨주는 자가 있으면 三族을 멸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계포를 숨겨두고 있던 朱氏의 말에 의해 滕公이 한 고조에게 계포를 사면해주라고 말하니, 고조가 죄를 사면하고 郞中으로 삼았다.(≪史記≫ 권7 〈項羽本紀〉, 권100 〈季布列傳〉)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