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酉年(217) 【綱】 漢나라 孝獻皇帝建安 22년이다. 봄 정월에 魏王曹操가 孫權의 군대를 공격하니, 3월에 손권이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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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처음에 孫權의 護軍인 蔣欽이 徐盛과 원한이 있었는데,注+蔣欽이 宣城에 주둔했을 적에 徐盛이 장흠의 주둔군의 관리를 체포하고 表文을 올려 참수하게 하였다. 이때에 장흠이 여러 軍의 지휘를 맡으면서 매번 서성의 좋은 점을 칭찬하였다.
손권이 그 이유를 묻자, 장흠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서성은 충성스럽고 부지런하고 강하며 膽略과 器局이 있으니, 萬人의 督(大將)으로 삼기에 좋습니다.注+督은 大將이다. 지금 大事가 아직 정해지지 못하였으니, 신은 마땅히 나라를 도와 인재를 구해야 합니다. 어찌 감히 사사로운 원한을 가지고서 賢者를 은폐하겠습니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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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孫權이 魏나라에 항복을 청하고서 장군 周泰를 남겨두어 濡須를 감독하게 하니, 장수들은 주태가 미천한 가문의 출신이라 하여 복종하지 않았다.注+“寒門”은 출생이 미천함을 말한 것이다.
손권은 장수들을 모아 즐겁게 술을 마시고는 주태에게 옷을 벗게 한 다음 손으로 그의 상처를 가리키며 상처가 난 이유를 물었다.
그리고는 그의 팔뚝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幼平아! 卿이 우리 형제를 위하여 곰과 호랑이처럼 용감하게 싸워서 수십 곳의 상처를 입었으니,
나 또한 무슨 마음으로 경을 骨肉의 은혜로 대하여 兵馬의 重任을 맡기지 않겠는가.” 하였다. 장수들은 그제야 주태에게 복종하였다.注+幼平은 周泰의 자이다.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三國志≫ 〈吳書周泰傳〉에 “孫權이 宣城에 거주해 있을 적에 방비를 소홀히 하여 울타리를 고치지 않았는데 山賊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손권이 막 말에 올랐는데, 산적들의 예리한 칼날이 이미 눈앞에 있었다. 이때 주태가 몸을 던져 손권을 호위하다가 몸에 12곳의 상처를 입었으니, 이날 주태가 없었으면 손권은 거의 생명이 위태로울 뻔하였다.” 하였다. 또 주태는 黃祖를 토벌하고 曹公을 막고 曹仁을 공격할 때에 종군하여 모두 功이 있었으므로, 손권이 그에게 중임을 맡긴 것이다.
를 갖추었다.注+旒는 면류관에 드리운 玉을 꿴 술이다. 면류관에 술을 드리워 눈을 지나게 하는 것은 밝음을 가리기 위함이다. 12개의 술은 하늘의 12방위의 數를 본받은 것이다. 金根은 금으로 장식하였으니 德車라고 하는바, 殷나라에서는 乘根이라고 하였는데, 秦나라에서 금근이라고 고쳤다. 五時副車는 그 꾸밈이 모두 덕거의 제도와 같은데, 각각
【目】 처음에 曹操가 丁夫人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었고, 첩 劉氏가 아들 曹昂을 낳고 첩 卞氏가 曹丕, 曹彰, 曹植, 曹熊 네 아들을 낳았는데,
이때 정부인을 내치고 변씨를 세워 繼室로 삼았다.注+≪春秋左氏傳≫ 隱公 원년 조에 “聲子를 繼室로 삼았다.” 하였는데, 杜預의 註에 “제후가 처음 장가들면 그 시집온 여자의 同姓國에서 시집온 여자의 조카뻘이 되고 동생뻘이 되는 여자를 媵妾으로 보낸다. 元妃가 죽으면 次妃가 원비를 대신해 宮內의 일을 처리한다. 그러나 夫人이라고는 칭할 수 없기 때문에 繼室이라고 한다.” 하였다. 조식은 機智가 있고 다재다능하며 文才가 민첩하고 넉넉하니, 조조가 그를 사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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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曹操가 딸을 丁儀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는데 曹丕는 정의가 애꾸눈이라고 하여 저지하였다.注+眇는 한 눈이 작은 것이다. 정의는 이로 말미암아 조비를 원망하여 아우 丁廙(정이), 楊脩와 함께 자주 曹植의 재주를 칭찬하고 조조에게 조식을 세워 후사로 삼을 것을 권하였다.注+楊脩는 楊彪의 아들이다.
조조가 글을 써서 은밀히 외부에 물으니,注+函은 書信을 이른다.尙書崔琰이 露版(봉함하지 않은 奏章)을 보내 답하기를注+露版은 봉함하지 않은 奏章이다. “≪春秋≫의 의리는 후계자를 세울 적에 연장자로 하였으며,注+≪春秋公羊傳≫ 隱公 원년에 “嫡子를 세울 적에는 年長으로써 하고 현명함으로써 하지 않으며, 庶子(媵妾 및 姪娣의 아들)를 세울 적에는 모친의 신분의 귀함으로써 하고 연장으로써 하지 않는다.” 하였다.五官中郞將(조비)은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총명하니 마땅히 정통을 이어야 합니다. 臣 최염은 죽음으로써 지키겠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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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曹丕가 사람을 시켜 太中大夫賈詡(가후)에게 자신의 지위를 견고히 할 계책을 묻자, 가후가 말하기를 “원컨대 將軍은 덕과 도량을 넓히고 높여 몸소 검소한 선비의 일을 행하고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힘써서 자식의 도리를 어기지 말아야 하니, 이와 같이 할 뿐입니다.”注+曹丕가 五官中郞將이었으므로 그를 칭하여 將軍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
후일에 曹操가 사람을 물리치고 가후에게 물으니, 가후가 묵묵히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조조가 그 이유를 묻자, 가후가 말하기를 “마침 생각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즉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注+屬은 음이 燭이니, 때마침이다. 하였다.
조조가 묻기를 “무슨 생각을 하였는가?” 하니, 가후가 말하기를 “袁本初(袁紹)와 劉景升(劉表) 父子를 생각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조가 크게 웃었다.注+袁紹와 劉表는 모두 嫡子를 폐하고 庶子(次子)를 세워서 패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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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曹操가 일찍이 출정할 적에 曹丕와 曹植이 함께 전송하였는데, 조식은 조조의 공덕을 칭송하여 말에 문채가 있으니 좌우 신하들이 주목하였고 조조 또한 기뻐하였다.
조비가 이것을 보고 망연자실해 하자,注+“悵然”은 뜻을 잃은 모양이다.吳質이 그의 귀에 대고 말하기를 “대왕이 출정하실 적에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작별할 적에 조비가 눈물을 흘리고 절하니, 조조와 좌우 신하들이 모두 서글퍼하여 흐느꼈다.
이에 모두 조식은 화려한 말이 많으나 誠心이 조비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조식은 이미 성질대로 행동하여 스스로 꾸미지 않았고,
조비는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여 실정을 숨기고 스스로 꾸미니, 宮人과 좌우 측근들이 모두 그를 위하여 칭송하였다.注+爲(위하다)는 去聲이다. 그러므로 조조는 마침내 조비를 太子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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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曹丕가 議郞辛毗의 목을 안고 말하기를 “辛君은 내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아는가.”注+不는 否로 읽는다. 하였다. 신비가 이 말을 그의 딸인 辛憲英에게 전하자,
신헌영이 말하기를 “태자는 군주를 대신하여 宗廟와 社稷을 주관하는 자이니, 군주를 대신함은 슬퍼하지 않을 수 없고 나라를 주관함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슬퍼하고 마땅히 두려워해야 하는데 도리어 기뻐하니, 어찌 능히 長久하겠습니까. 魏나라는 아마도 번창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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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얼마 후에 曹植이 수레를 타고 馳道 가운데로 달려가고 司馬門을 열고 나가니,注+魏나라 제도에 司馬門은 오직 군주의 수레가 나갈 때에만 비로소 열었다.曹操가 크게 노하여
이 이 일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제후(王子)들의 禁令을 무겁게 하니, 조식에 대한 총애가 날로 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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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劉備가 漢中으로 진군하니, 魏王曹操가 장군 曹洪을 보내어 그를 막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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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法正이 劉備를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曹操가 일거에 張魯를 항복시키고 漢中을 평정하였는데, 이 기세를 인하여 巴와 蜀 지역을 도모하지 않고 夏侯淵과 張郃을 남겨두어 주둔하여 지키게 하고 자신은 급히 북쪽으로 돌아갔으니,
이는 그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고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요, 반드시 국내에 우환이 있어 압박을 받기 때문일 것입니다.注+偪은 핍박함이다. 이제 헤아려보건대, 하후연과 장합의 재주와 지략이 우리나라의 장수를 감당하지 못하니,注+策은 헤아림이다. 군대를 일으켜 가서 한중을 토벌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승리하는 날에 농업을 크게 장려하여 곡식을 저축해두고서 틈과 기회를 엿보면, 위로는 寇敵을 전복시켜 왕실을 높이고 도울 수 있고, 다음으로는 雍州와 涼州를 잠식하여 국경을 넓힐 수 있을 것이요,
또 그 다음으로는 요해처를 굳게 지켜서 오랫동안 버틸 계책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준 기회이니, 이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유비가 마침내 진군하여 張飛와 馬超, 吳蘭 등을 보내어 下辨에 주둔시키니, 조조는 曹洪을 보내어 막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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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陸口를 지키던 孫權의 장수인 魯肅이 卒하니, 손권이 呂蒙으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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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孫權이 嚴畯으로 魯肅을 대신하여 군대를 감독해서 陸口에 진주하게 하니, 엄준이 자신은 질박한 書生이라서 군대의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굳이 사양하였다.注+閑은 익숙함이다. 손권이 마침내 呂蒙으로 대신하게 하니, 사람들은 엄준이 진심으로 사양한 것을 훌륭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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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孫權이 陸遜을 보내어 丹陽의 山越을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陸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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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吳郡 사람 陸遜이 孫權에게 말하기를 “賊을 이기고 亂을 평정하여 편안하게 하는 일은 많은 병력이 아니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山越의 적들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먼 곳을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部伍(部曲, 부대)를 크게 증설하여 그중에 정예병을 선발해야 합니다.” 하니,
손권이 그의 말을 따라注+部伍는 部曲과 行伍이다. 〈“可大部伍取其精銳”는〉 크게 部伍를 증설하여 그중에 정예병을 뽑아 취함을 말한 것이다. 육손에게 명해서 동쪽의 세 郡을 部伍로 만들어서 강한 자는 병사로 삼고 약한 자는 編戶(호적에 편입된 일반 가호)에 보충하니, 정예병 수만 명을 얻었다.注+“東三郡(동쪽의 세 郡)”은 丹陽과 新都와 會稽이다. ≪資治通鑑≫에는 “마침 단양의 賊帥인 費棧이 난을 일으켜 山越을 선동하자, 孫權이 陸遜에게 명해서 비잔을 토벌하여 격파하고는 마침내 동쪽 세 군을 部伍로 만들었다.” 하였다. 육손은 오랜 元兇을 깨끗이 제거하고 지나가는 곳마다 엄숙하게 정돈하고서 돌아가 蕪湖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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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會稽太守淳于式이 表文을 올려 陸遜이 人民들에게 함부로 탈취한다고 아뢰었는데, 육손이 뒤에 도성에 와서 말하던 차에 순우식을 훌륭한 관리라고 칭찬하였다.注+孫權이 이때 秣陵에 도읍하였다. “言次”는 말하던 차를 이른다.孫權이 말하기를 “순우식은 그대의 잘못을 고발하였는데, 그대가 그를 천거함은 어째서인가?” 하니,
육손이 대답하기를, “순우식은 마음에 백성을 편안히 기르고자 합니다. 이 때문에 저의 잘못을 아뢰었으니, 제가 어찌 다시 순우식을 훼방하여 聖上의 귀를 어지럽히겠습니까.” 하였다. 손권은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長者의 일인데, 다만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역주
역주1警蹕 :
‘出警入蹕’의 줄임말로 외출할 때에는 경계하고 들어올 때에는 사람들을 辟除함을 이른다. 一說에는 출경입필은 한 가지씩만을 든 것으로, 실제는 출입할 적에 모두 경계하고 벽제하는데, 互文을 사용하여 각각 한 가지씩 든 것이라 한다. 호문은 같은 내용이 중복될 경우 다 쓰지 않고 각각 한 가지만을 듦을 이른다.
역주2魏王操用天子車服 出入警蹕 :
“옛날 周나라 成王이 周公에게 天子의 禮樂을 하사한 것은 추후에 하사한 것이다. 천자가 위에 계신데 천자의 수레와 의복과 儀制를 참람하게 사용하면 이는 천자가 둘인 것이니, 曹操의 죄를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는가.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1,300년 동안 1번 썼을 뿐이다.[昔成王賜周公以天子禮樂 蓋追賜也 天子在上 而僭其車服儀制 是二天子矣 操之罪 可勝誅哉 終綱目 千三百年 一書而已]” ≪書法≫ “曹操는 建安 18년(213) 여름에 ‘스스로 서서 魏公이 되고 九錫을 가했다.’고 썼고, 이해 가을에 ‘처음으로 社稷과 宗廟를 세웠다.’고 썼고, 이해 겨울에 ‘처음으로 尙書 등의 관직을 설치하였다.’고 썼고, 다음 해 봄에는 ‘지위를 올려 諸侯王의 위에 있게 하였다.’고 썼고, 21년(216)에 이르러는 ‘작위를 올려 왕이 되었다.’고 썼는데, 금년에는 마침내 ‘천자의 수레와 의복을 사용하고 출입할 적에 警蹕하였다.’고 썼으니, 이는 이미 완전히 천자의 제도를 사용한 것이다. 만일 조조가 죽지 않았다면 황제를 폐하여 山陽公으로 삼은 것이 어찌 五官將(曹丕)의 손에서 나오기를 기다렸겠는가. 그러나 이때에 漢나라가 비록 멸망하지 않았지만 황제라는 빈 그릇(명칭)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이는 德을 대신할 만한 王者가 있지 않은데 두 왕(황제)이 있는 것이니, 황제가 위에 계신데 신하가 어찌 천자의 수레와 의복을 사용하고 나갈 때 경계하고 들어올 때 辟除할 수 있겠는가. 조조가 이때에도 이미 스스로 황제 노릇 한 것이 매우 분명하여 漢나라를 보존할 뜻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혹자는 도리어 조조가 명분과 의리를 두려워해서 종신토록 감히 황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하지 않았다고 말하니, 이는 다만 깊이 살피지 못했을 뿐이다. ≪資治通鑑綱目≫에 쓴 것을 가지고 앞뒤를 모아 살펴보면 조조가 직접 漢나라를 찬탈한 실제가 이와 같이 분명하니, 그 간사한 마음으로 과연 천하와 후세를 속일 수 있겠는가. 아! 슬프다.[操十八年之夏 書自立爲魏公 加九錫 其秋 書始建社稷宗廟 其冬 書初置尙書等官 次年春 書進位諸侯王上 至二十一年 書進爵爲王 今年遂書用天子車服 出入警蹕 已全用天子之制矣 使操不死 則廢帝爲山陽公 豈待出於五官將之手 然是時漢雖未滅 特擁虛器而已 未有代德而有二王 烏有至尊在上 人臣可用天子車服 出警入蹕者乎 操於斯時 亦旣自帝甚明 略無存漢之意 或者顧謂操畏名義 沒身不敢廢帝自立 是特未深察耳 卽綱目之所書 合前後而觀之 則操躬自簒漢之實 昭昭若此 其姦詐之心 果可以欺天下後世乎 吁]” ≪發明≫
역주3金根車 :
제왕이 타던 황금으로 장식한 수레를 이른다. 根車는 천연적으로 둥글게 굽은 나무로 만든 바퀴가 달린 수레이다.
역주4五時副車 :
제왕의 車駕를 호종하던 五色(靑, 赤, 黑, 白, 黃)의 副車로, 五時車 또는 五帝車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