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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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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年(272)
晉泰始八年이요 吳鳳凰元年注+以西苑言鳳凰集, 改元.이라
春正月 匈奴殺劉猛하고 降晉하다
侍中尙書令賈充 自文帝時 寵任用事러니 晉主爲太子 充頗有力이라 故益有寵이러라
充爲人巧諂하여 與太尉荀顗侍中荀勖越騎校尉馮紞으로 相爲黨友하니 朝野惡之注+紞, 都感切.러라
晉主問侍中裴楷以方今得失注+楷, 秀之從弟也.한대 對曰 陛下受命 四海承風호되
所以未比德於堯舜者 但以賈充之徒 尙在朝耳 宜引天下賢人하여 與弘政道 不宜示人以私니이다
侍中任愷河南尹庾純 皆與充不協이러니 會樹機能亂秦雍하니 晉主以爲憂한대
愷曰 宜得威望重臣有智略者하여 以鎭撫之니이다 晉主曰 誰可者오하니 愷及純因薦充하여 使督秦涼諸軍이라
充患之하여 問計於勖한대 勖曰 是行也 辭之實難하니 獨有結婚太子 可不辭而自留矣니이다
晉主初欲爲太子取衛瓘女러니 充妻郭槐 賂楊后左右하여 使后說納其女하니
晉主曰 衛公女有五可하고 賈公女有五不可하니 衛氏種賢而多子하고 美而長白하며 賈氏 種妬而少子하고 醜而短黑이니라
后固以爲請注+五可, 種賢一也, 多子二也, 美三也, 長四也, 白五也. 五不可, 可以類推.이러니 至是하여 勖又與顗紞으로 皆稱充女 絶美且有才德이라한대 晉主遂從之하여 留充復居舊任이라
賈妃年十五 長太子二歲 妬忌多權詐하니 太子嬖而畏之러라
晉太宰安平王孚卒하다
孚性忠愼하여 宣帝執政 常自退損하고 後逢廢立之際 未嘗預謀러니 及晉主卽位 恩禮尤重이라
元會 詔孚乘輿上殿하여 晉主於阼階迎拜注+阼階, 東階, 主階也.하고 旣坐 親奉觴上壽하여 如家人禮하니
孚雖見尊寵하나 常有憂色이러니 臨終遺令曰 有魏貞士河內司馬孚 字叔達이니
不伊不周하고 不夷不惠하며 立身行道 終始若一하니 當衣以時服하고 斂以素棺이라하고하니 年九十三이라
諡曰獻이라하고 詔賜東園溫明秘器하되 其家遵遺旨하여 一不施用注+服虔曰 “東園溫明, 形如方漆 開一面, 漆畫之, 以鏡置其中, 以縣屍上, 大斂幷蓋之.” 師古曰 “東園, 署名也, 屬少府, 其署主作此器. 秘器梓棺以凶器, 故秘之.”하다
晉主與右將軍皇甫陶 論事注+泰始五年, 罷鎭軍將軍, 復置左右將軍.러니 陶爭辯不已어늘 徽請罪之한대
晉主曰 忠讜之言 惟患不聞이어늘 徽越職妄奏하니 可免其官이라하다
汶山白馬胡 侵掠諸種注+汶, 讀與崏同. 白馬胡, 西南夷種名, 在汶山郡.이어늘 益州刺史皇甫晏欲討之注+益州統蜀‧犍爲‧汶山‧漢嘉‧江陽‧朱提‧越巂‧牂柯.러니
從事何旅諫曰 胡夷相殘 未爲大患이라 盛夏出軍 必有疾疫일까하노이다하니 不聽하다
牙門張弘 作亂殺晏이어늘 兵曹從事楊倉 勒兵戰死注+自漢以來, 諸州有軍事, 則置兵曹從事.하니 弘遂誣晏欲反하여 傳首京師어늘
主簿何攀 方居母喪이러니 聞之詣洛하여 證晏不反注+州主簿, 錄閤下事, 省文書. 郡主簿, 所職略同.하다
廣漢主簿李毅 言於太守王濬曰 廣漢與成都密邇 而統於梁州者 朝廷欲以制益州之衿領이니
正防今日之變이라 宜卽時赴討하여 不可失也注+漢廣漢郡治雒, 泰始二年, 分新都郡治雒, 而廣漢郡治廣漢縣, 與成都相近. 濬欲先上請注+上, 時掌切, 下先上列上同.한대
毅曰 殺主之賊 爲惡尤大하니 當不拘常制어늘 何請之有리오 濬乃發兵討弘斬之하니 詔以濬爲益州刺史하다
濬爲羊祜參軍하니 祜深知之注+晉制, 諸位從公爲持節都督, 參軍六人.러니 或曰 濬爲人志大奢侈하니 不可專任이라한대
祜曰 濬有大才하여 將以濟其所欲하리니 必可用也니라
濬至益州 明立威信하니 蠻夷歸附어늘 俄遷大司農이러니
晉主與羊祜謀伐吳할새 祜以爲宜藉上流之勢라하여 密表留濬하여 加龍驤將軍하여 監梁益軍注+龍驤將軍之號始此. 晉制方面之任, 資重者爲都督諸軍事, 資望輕者爲監軍事.이라
詔使罷屯田兵하고 大作舟艦한대 別駕何攀曰 屯兵五六百人 作船不能猝辦하니 後者未成 前者已腐
宜召諸郡兵하여 合萬餘人造之 歲終可成이라 濬欲先上須報한대
攀曰 朝廷 猝聞召萬兵하면 必不聽하리니 不如輒召注+輒, 專也. 設或見却이라도 功夫已成 勢不得止라하니
濬從之하여 令攀典造 於是 作大艦하니 長百二十步 受二千餘人하고
以木爲城하고 起樓櫓하여 開四出門하면 其上 可馳馬往來러라
時作船木柹 蔽江而下注+柹, 方廢切, 斫木札也.하니 吳建平太守吳郡吾彦 取以白吳主曰 晉必有攻吳之計 宜增建平兵하여 以塞其衝이니이다한대
吳主不從注+建平郡, 漢南郡之巫縣, 吳主權分置宜都郡, 吳主休永安三年, 分宜都立建平郡.하니 彦乃爲鐵鎖하여 橫斷江路하다 濬雖受募兵이나 而無虎符러니
廣漢太守張斆收濬從事列上注+列上, 謂陳列而封上.한대 晉主召斆還하고 責曰 何不密啓而便收從事오하니
斆曰 蜀漢絶遠하니 劉備嘗用之矣 輒收注+句. 臣猶以爲輕하노이다하니 晉主善之러라
秋七月 晉以賈充爲司空하다
充與侍中任愷 皆爲晉主所寵任이러니 充欲專名勢而忌愷하니 於是 朝士各有朋黨이어늘
晉主召充愷宴而謂之曰 朝廷宜一하고 大臣當和라한대 充愷拜謝러니
旣而以晉主知而不責으로 愈無所憚하여 外相崇重이나 內怨益深이라
充乃薦愷하여 出爲吏部尙書하고 而與荀勖馮紞으로 共譖之하니 愷由是得罪하여 廢於家하다
九月 吳步闡 據西陵叛하여 降晉하다
闡世在西陵注+自吳主權用步騭督西陵, 騭卒, 子協繼之. 闡, 協弟也.이러니 至是하여 吳主徵之하니 闡自以失職하고 且懼有讒하여 遂據城降晉하다
冬十月朔 日食하다
吳陸抗 聞步闡叛하고 亟遣將軍吾彦討之어늘 而晉遣荊州刺史楊肇迎闡이러니
羊祜 出江陵하고 徐胤 擊建平하여 以救之어늘 抗勅西陵諸軍築嚴圍하여
自赤谿至于故市하여 內以圍闡하고 外禦晉兵하여 晝夜催切하니 衆甚苦之注+胡三省曰 “水經註 ‘江水出西陵峽, 東南流, 逕故城洲, 洲北附岸, 洲頭曰郭洲, 長二里, 廣一里, 上有步闡故城, 方圓稱洲, 周迴略滿. 故城洲上, 城周里, 闡父騭所築也. 又東逕陸抗故城.’ 今峽州遠安縣在江北, 有孤山, 有陸抗故城, 有丹山. 時有赤氣, 意赤溪當出於丹山. 故市, 卽步騭故城, 所居成市, 而闡別築城, 故曰故市.” 切, 迫也.
諸將諫曰 今宜乘銳攻闡이어늘 何事於圍하여 以敝士民之力고하니
抗曰 此城勢固糧足하고 凡備禦之具 皆抗宿規注+抗先嘗督西陵. 今反攻之 不可猝拔이요 北兵至而無備 表裏受難이니 何以禦之리오
諸將請不已어늘 抗欲服衆心하여 聽令一攻이러니 果無利하다 圍始合하고 而祜兵五萬至江陵하니
諸將咸以抗不宜上注+自樂鄕而西赴西陵爲上.이어늘 抗曰 江陵城固兵足하니 無可憂者 假令敵得之라도 必不能守 所損者小어니와
若晉據西陵하면 則南山群夷皆動이니 其患不可量也注+南山, 謂江南諸山, 群夷所依阻.라하고 乃帥衆赴西陵하다
抗以江陵北 作大堰遏水以絶寇叛이러니 祜欲因水運糧하여 而揚聲將破堰以通步軍한대
抗聞卽決之하니 諸將皆惑하여 屢諫不聽이러니 祜至當陽聞堰敗하고 乃以車運하니 大費功力이러라
十一月 肇至西陵이어늘 抗自將憑圍對之注+憑長圍以對之, 則彼爲客, 我爲主.하니 都督兪贊亡詣肇한대
抗曰 贊舊吏 知吾虛實하니 吾常慮夷兵素不簡練이라 若敵攻圍 必先此處라하고 卽夜易夷兵하여 以精兵守之러니
明日 肇果攻故夷兵處하여 衆敗夜遁이어늘 抗欲追之 而慮闡伺間하고 兵不足分하여
於是 但鳴鼓若將追者하니 肇衆兇懼하여 悉解甲挺走注+挺, 拔也. 挺走, 拔身而走也.어늘 抗使輕兵躡之하니 肇又大敗하고 祜等 皆引軍還이라
抗遂拔西陵하여 誅闡及同謀將吏數十人하여 皆夷三族한대 東還樂鄕 貌無矜色이러라
吳主旣克西陵 志益張大하여 使術士尙廣으로 筮取天下注+張, 去聲. 尙廣, 姓名.한대
對曰 吉하니 庚子歲 靑蓋當入洛陽注+其後吳亡, 皓入洛, 歲在庚子.이라하니 吳主喜하여 不修德政하고 專爲兼幷之計러라
祜歸自江陵하여 務修德信以懷吳人하니 每交兵 刻日方戰하며 不爲掩襲之計하고
將帥有欲進譎計者어든 輒飮以醇酒하여 使不得言하고
軍行吳境 刈穀爲糧한대 皆計所侵하여 送絹償之하고 每遊獵 常止晉地하고
所得禽獸 或先爲吳人所傷者어든 皆送還之하니 於是 吳邊人 皆悅服이러라
祜與陸抗對境 使命常通注+使, 疏吏切.하여 抗遺祜酒 祜飮之不疑하고 抗疾 祜與之成藥이어든 抗卽服之하니
人多諫抗이어늘 抗曰 豈有酖人羊叔子哉注+成藥, 已合成熟藥也. 叔子, 祜字.리오 抗告其邊戍曰 彼專爲德하고 我專爲暴 是不戰而自服이니 各保分界而已 無求細利注+分, 扶問切.하라
吳主聞而責之한대 抗曰 一邑一鄕 不可以無信義어든 況大國乎 臣不如此 適足彰彼之德이니 於祜無傷也니이다
吳主用諸將謀하여 數侵盜晉邊한대 抗上疏曰 今不務力農富國하고 審官任能하며 明黜陟하고 愼刑賞하며
訓諸司以德하고 撫百姓以仁注+諸司, 謂百執事‧文人‧有司存者.하며 而聽諸將徇名하여 窮兵黷武하니 動費萬計 士卒凋瘁하니 寇不爲衰而我已大病矣
爭帝王之資而昧十百之利하니 此人臣之姦便이요 非國家之良策也注+昧, 昏也.
昔齊魯三戰 魯人再克이로되 而亡不旋踵하니 況今克獲 不補所喪哉아하니 吳主不從하다
祜不附結中朝權貴하니 荀勖馮紞之徒 皆惡之러라 從甥王衍 嘗詣陳事하여 辭甚淸辯이어늘
祜不然之한대 衍拂衣去하니 祜顧謂客曰 王夷甫方當以盛名處大位 然敗俗傷化 必此人也注+夷甫, 衍字.라하더니
及攻江陵 祜以軍法으로 將斬王戎하니 戎之從弟也 故二人皆憾之注+通鑑 “二人皆憾之, 言論多毁祜.”하니
時人爲之語曰 二王當國 羊公無德이라하더라
注+帝初立國子學, 定置國子祭酒博士各一人助敎十五人, 以敎生徒.하다
賈充與朝士宴할새 河南尹庾純醉與充爭言이러니 充曰 父老不歸養하니 卿爲無天地로다하니
純曰 高貴鄕公 何在注+斥其弑君也.오한대 充慙怒하여 上表解職하고 純亦自劾이어늘
詔免純官하고 仍下五府하여 正其臧否注+當時除賈充之外, 居公位者有五, 故下五府.러니 石苞以純榮宦忘親하니 當除名이라한대
齊王攸以爲純於禮律 未有違者라하니 詔復純爲祭酒하다
吳主之遊華里也 萬彧與將軍留平으로 密謀曰 若至華里不歸 社稷事重하니 不得不自還이니라
吳主頗聞之하고 因會以毒酒飮彧及平不死注+通鑑 “以毒酒飮彧, 傳酒人私減之, 又飮留平, 平覺之, 服他藥以解, 得不死.”러니 自殺하고 憂懣而卒하다
彧請選忠淸之士하여 以補近職한대 吳主以樓玄으로 爲宮下鎭하여 主殿中事注+宮下鎭, 官名也. 吳舊事, 禁中主者, 自用親近人, 皓以彧言, 用玄主殿中事.러니
正身帥衆하여 奉法而行하고 應對切直하니 吳主浸不悅이러니
中書令賀卲諫曰 臣聞興國之君 樂聞其過하고 荒亂之主 樂聞其譽라하니
聞其過者 過日消而福臻하고 聞其譽者 譽日損而禍至하나니
陛下嚴刑法以禁直辭하고 黜善士以逆諫口하여 杯酒造次 死生不保하니
是以 正士摧方하고 庸臣苟媚하여 人執反理之評하고 士吐詭道之論注+摧方, 言刓稜角而爲圓也. 詭, 違也, 異也.하여 遂使仕者 以退爲幸하고
居者 以出爲福하니 非所以保洪緖也로소이다 何定 妄興事役하여 發江邊戍兵하여 以驅麋鹿하니 老弱飢凍하고 大小怨歎이라
傳曰 國之興也 視民如赤子하고 其亡也 以民爲草芥注+左傳, 陳逢滑曰 “國之興也, 視民如傷, 其亡也, 以民爲土芥.”라하니
今法禁轉苛하고 賦調益繁하여 呼嗟之聲 感傷和氣하고
且國無一年之儲하며 家無經月之蓄이로되 而後宮坐食 萬有餘人이라
北敵注目하여 伺國盛衰하니 長江之限 不可久恃 苟不能守 一葦可航也注+航, 通作杭.
願陛下 豐基彊本하고 割情從道하시면 則聖祖之祚隆矣注+聖祖謂孫權.리이다
吳主深恨之어늘 於是 左右誣玄與卲 謗訕政事라하니 俱被詰責하여 徙玄於交趾러니 竟殺之하다


壬辰年(272)
나라 世祖 武皇帝 司馬炎 泰始 8년이고, 吳主 孫皓 鳳凰 원년이다.注+西苑에서 鳳凰이 모였다고 말한 것으로 인해 改元한 것이다.
[] 봄 정월에 匈奴劉猛을 죽이고 나라에 항복하였다.
[] 2월에 나라 太子 司馬衷賈氏太子妃로 맞았다.
[] 예전에 侍中 尙書令 賈充 文帝(司馬昭) 시절부터 총애를 받아 중용되어 일을 주관하였는데, 晉主(司馬炎)가 태자가 될 적에 가충이 꽤 힘을 썼으므로 더욱 총애를 받았다.
가충은 사람됨이 아첨을 잘하여 太尉 荀顗, 侍中 荀勖, 越騎校尉 馮紞(풍담) 등과 서로 黨友가 되니, 朝野에서 그를 미워하였다.注+都感이다.
晉主侍中 裴楷에게 현재의 잘잘못을 묻자,注+裴楷裴秀從弟이다.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천명을 받아서 천하 사람들이 교화를 받들고 있지만,
恩德堯舜에게 견주지 못하는 것은 다만 가충의 무리가 여전히 조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천하의 현인을 발탁하여 그들과 政道를 넓히고, 남들에게 사사로운 마음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侍中 任愷, 河南尹 庾純이 모두 가충과 마음이 맞지 않았다. 때마침 禿髮樹機能秦州雍州 지역을 어지럽히자 晉主가 근심을 하였는데,
임개가 아뢰기를 “마땅히 위엄과 명망이 있는 重臣 가운데 지략이 있는 자를 임명하여 그곳을 진무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晉主가 “누가 적임자인가.”라고 하자, 임개와 유순이 이로 인해 가충을 천거하여 그에게 秦州涼州의 모든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다.
가충이 근심하여 순욱에게 계책을 묻자, 순욱이 말하기를 “이번에 가게 될 일은 실로 사양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太子와 혼인을 맺는다면 사양하지 않아도 저절로 여기에 남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晉主가 처음에 태자를 위해 衛瓘의 딸을 태자비로 맞으려고 하였는데, 賈充의 처 郭槐(곽괴)가 楊皇后의 주위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어 양황후로 하여금 晉主에게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도록 설득하게 하였다.
그러자 晉主가 말하기를 “衛公의 딸은 다섯 가지 좋은 점이 있고, 賈公의 딸은 다섯 가지 불가한 점이 있다. 衛氏는 종족이 현명하고 아들이 많으며, 용모가 아름답고 키가 크며 흰 피부를 지녔다. 賈氏는 종족이 투기심이 있고 아들이 적으며, 용모가 추하고 키가 작으며 검은 피부를 지녔다.”라고 하였다.
양황후가 굳게 청하였는데,注+다섯 가지 좋은 점은 종족이 현명한 것이 첫 번째이고, 아들이 많은 것이 두 번째이며, 용모가 아름다운 것이 세 번째이고, 키가 큰 것이 네 번째이며, 흰 피부를 지닌 것이 다섯 번째이니, 다섯 가지 불가한 점은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이때에 이르러 荀勖이 또 荀顗, 馮紞과 함께 모두 가충의 딸이 절세미인이며 才德을 갖추었다고 하자, 晉主가 드디어 그들의 말을 따라 가충을 머물러 다시 이전 직임을 맡게 하였다.
賈妃는 나이가 15세로, 태자보다 두 살이 많았다. 투기에다 권모술수와 속임수가 많아 태자가 총애하면서도 두려워하였다.
[] 나라 太宰 安平王 司馬孚하였다.
[] 司馬孚는 성품이 충성스럽고 신중하여 宣帝(司馬懿)가 政事를 펼칠 때, 늘 스스로 겸손하였고, 미리 모의를 한 적이 없었는데, 晉主가 즉위하고는 은혜와 예우를 더욱 융숭히 하였다.
元旦의 조회 때에 사마부에게 조령을 내려 가마를 탄 채로 殿閣에 오르라고 하였고, 晉主(司馬炎)가 阼階에서 맞이하여 배알하였으며,注+阼階”는 동쪽 섬돌이니, 주인이 다니는 계단이다. 자리에 앉고 나서는 직접 술잔을 올려 축수하여 민간 집안에서 행하는 예처럼 하였다.
사마부가 비록 존경과 은총을 받았으나 늘 근심하는 기색이 있었는데, 임종 때에 遺命을 내려 “나라의 곧은 선비 河內 사람 사마부는 叔達인데,
伊尹도 되지 못하고, 周公도 되지 못하였으며, 管夷吾도 되지 못하고, 柳下惠도 되지 못하였지만, 몸을 세워 를 행한 것이 시종 한결같았으니, 〈장레에〉 마땅히 평상복을 입히고 무늬가 없는 관을 사용하여 염을 하라.” 하고 하니, 나이가 93세였다.
諡號이라 하고, 조서를 내려 東園溫明秘器를 내려주었는데, 그 집안에서는 그의 유언을 따라 어떤 물품도 쓰지 않았다.注+服虔이 말하기를 “東園溫明은 모양이 네모난 漆桶 같다. 한쪽을 열면 옻칠로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 거울이 있는데, 이것을 시체 위에 걸어두었다가 大斂 때에 아울러 덮는다.”라고 하였다. 顔師古가 말하기를 “東園官署의 명칭으로 少府에 속하였는데, 그 관서에서 이 기물을 제작하는 것을 주관한다. 秘器梓棺은 흉한 기물이므로, 그것을 숨긴다.”라고 하였다.
[] 나라 散騎常侍 鄭徽가 죄를 지어 면직되었다.
[] 晉主右將軍 皇甫陶와 일을 논의하였는데,注+泰始 5년(269)에 鎭軍將軍을 없애고 다시 左將軍右將軍의 직위를 두었다. 황보도가 다투어 변론을 하여 그만두지 않자, 鄭徽가 그에게 벌을 주라고 청하니,
晉主가 말하기를 “忠直한 말은 듣지 못할까를 근심할 뿐인데, 정휘는 자신의 직분을 넘어 함부로 上奏하였으니, 그를 면직시켜라.”라고 하였다.
[] 여름에 나라 益州 사람들이 刺史를 죽이자, 廣漢太守 王濬이 토벌하여 평정하니 왕준을 益州刺史로 임명하였다.
[] 당시에 汶山白馬胡가 여러 종족을 침략하자,注+은 읽는 것이 과 같다. 白馬胡西南 오랑캐 종족의 명칭이니, 汶山郡에 있다. 益州刺史 皇甫晏이 그들을 토벌하려고 하였다.注+益州蜀郡, 犍爲郡, 汶山郡, 漢嘉郡, 江陽郡, 朱提郡, 越巂郡, 牂柯郡을 관할한다.
그러자 從事 何旅가 간언하기를 “오랑캐가 서로 해치는 것은 큰 근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한여름에 出兵을 하면 필시 전염병이 발생할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牙門 張弘이 난을 일으켜 황보안을 죽였는데, 兵曹從事 楊倉이 병사를 무장하여 싸우다가 죽자,注+나라 이후로 여러 軍事에 관한 일이 있어서는 兵曹從事를 두었다. 장홍이 마침내 황보안이 반란을 도모했다고 무고하여 그의 首級京師로 보냈다.
主簿 何攀이 한창 모친의 喪中이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洛陽에 이르러 황보안이 반란을 도모하지 않았음을 증명하였다.注+主簿閤下의 일을 기록하고 文書를 살피며, 主簿도 직무가 대략 동일하다.
廣漢主簿 李毅太守 王濬에게 말하기를 “廣漢成都와 아주 가깝지만 梁州의 통제를 받게 한 것은 조정에서 益州의 요충지를 제압하려고 한 것이니,
바로 오늘날과 같은 변고를 막고자 한 것입니다. 의당 때에 맞춰 토벌하러 나아가야지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注+나라 때에는 廣漢郡雒縣治所를 두었다가 泰始 2년(266)에 新都郡을 분할하여 雒縣에 치소를 두고 광한군은 廣漢縣에 치소를 두었는데, 成都와 서로 가까웠다.라고 하였다. 왕준이 먼저 조정에 알려 요청하고자 하였는데,注+(올리다)은 時掌이니, 아래에 나오는 “先上”과 “列上”의 도 동일하다.
이의가 말하기를 “主將을 죽인 적은 악행이 더욱 크니, 마땅히 일상적인 법에 구애를 받지 않는데, 어찌 요청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준이 이에 군사를 출동하여 장홍을 토벌하여 참수하니, 조서를 내려서 왕준을 益州刺史로 삼았다.
[] 예전에 王濬羊祜參軍으로 있었는데, 양호가 그를 잘 알았다.注+나라 제도에 의하면 으로 持節 都督이 된 사람은 參軍이 6명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왕준은 사람됨이 뜻이 크고 사치하니, 일을 전적으로 맡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양호가 말하기를 “왕준은 큰 재주를 지니고 있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반드시 쓸 만하다.”라고 하였다.
왕준이 益州에 이르러 위엄과 신의를 분명히 세우니 蠻夷가 귀부하자, 얼마 있다가 大司農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당시에 晉主가 양호와 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하였는데, 양호가 長江 上流에 위치한 형세를 이용해야 한다고 하여 비밀리에 晉主에게 표문을 올려 왕준을 그곳에 머무르게 하여 龍驤將軍의 직책을 더해주어 梁州益州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다.注+龍驤將軍의 호칭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나라 제도에 의하면 方面의 직임을 맡는 경우 資級이 중한 사람이 都督諸軍事가 되고, 資級人望이 가벼운 사람이 監軍事가 되었다.
조서를 내려 屯田兵을 철폐하고 艦船를 대대적으로 건조하게 하니, 別駕 何攀이 말하기를 “屯田兵 5, 6백 명이 갑작스레 배를 만들 수 없으니, 뒤에 만드는 것이 완성되기 전에 이전에 만든 배가 썩어버릴 것입니다.
의당 여러 의 병사들을 소집하여 도합 1만여 명으로 만들어야 하니, 그렇게 하면 한 해를 마치기 전에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준이 먼저 보고를 하여 응답을 기다리려고 하자,
하반이 말하기를 “조정이 대번에 1만 명의 군사를 소집한다는 말을 들으면 필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전적으로 결단하여 소집하는 것만 못합니다.注+(오로지)은 이라는 뜻이다. 설령 허락을 받지 못하더라도 일이 이미 이루어져 형세상 중지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준이 그 말을 따라 하반에게 배를 만드는 일을 맡겼다. 그리하여 큰 함선을 만드니, 길이가 120이고, 2천여 명을 태울 수 있었으며,
배에는 나무로 을 만들고 망루를 세워서 사방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놓으면 그 위에서 말을 달리며 왕래할 수 있었다.
그때 배를 만들던 나무 조각이 장강을 덮으며 떠내려가니,注+方廢이니, 쪼개진 나무 조각이다. 나라 建平太守 吳郡 사람 吾彦이 나무 조각을 주워 吳主에게 아뢰기를 “나라가 필시 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하고 있으니, 의당 建平의 병력을 증강하여 그 요충지를 막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吳主가 그 말을 따르지 않자,注+建平郡나라 때에 南郡巫縣이었는데, 吳主 孫權이 나누어 宜都郡을 두었고, 吳主 孫休 永安 3년(260)에 宜都郡을 나누어 建平郡을 세웠다. 오언이 이에 쇠사슬을 만들어 장강을 가로질러 물길을 가로막았다. 왕준이 비록 조정의 명을 받아 군사를 모집하였으나 虎符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廣漢太守 張斆(장효)가 왕준의 종사관을 잡아들여 정황을 열거하여 보고하였다.注+列上”은 열거하여 봉함해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晉主가 장효를 불러 京師에 돌아오게 하고 나무라기를, “어찌하여 은밀히 아뢰지도 않고 바로 종사관을 잡아들였는가?”라고 하니,
장효가 아뢰기를 “漢中은 아주 먼 지역인데, 劉備가 이 점을 사용하였습니다. 바로 잡아들인 것도注+여기서 를 뗀다. 신은 오히려 너무 가볍게 처리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하니, 晉主가 훌륭하다고 여겼다.
[] 가을 7월에 나라가 賈充司空에 임명하였다.
[] 賈充侍中 任愷와 함께 모두 晉主(司馬炎)의 총애를 받았는데, 가충이 명예와 권세를 독차지하려 하여 임개를 시기하니, 이에 조정의 인사들은 각기 朋黨을 이루게 되었다.
晉主가 가충과 임개를 불러서 연회를 베풀며 말하기를 “조정은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하고, 大臣은 마땅히 화합해야 한다.”라고 하니, 가충과 임개가 절하며 사과하였다.
얼마 후에 晉主가 알면서도 문책을 하지 않자 더욱 꺼리는 바가 없어서 겉으로는 상대를 존숭하였지만, 속으로는 원망이 더욱 깊어졌다.
가충이 이윽고 임개를 추천하여 吏部尙書로 나가게 하고는 荀勖, 馮紞(풍담)과 함께 그를 참소하니, 임개가 이로 말미암아 죄를 얻어 집으로 폐출되었다.
[] 9월에 나라 步闡西陵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나라에 항복하였다.
[] 步闡은 대대로 西陵에 살았는데,注+吳主 孫權步騭을 등용하여 西陵을 감독하게 한 뒤로 보즐이 하자 그의 아들 步協이 승계하였다. 步闡은 보협의 아우이다. 이때에 吳主가 그를 부르자 보천이 자신의 직위를 잃을 것으로 여기고 거기다 자신을 참소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성을 점거하여 나라에 항복하였다.
[] 겨울 10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11월에 나라 陸抗西陵을 함락하여 步闡誅殺하였는데, 나라 羊祜 등이 그를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미치지 못했다.
[] 나라 陸抗步闡이 〈西陵에서〉 반란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장군 吾彦을 파견하여 토벌하니, 나라에서는 荊州刺史 楊肇를 파견하여 보천을 맞이하였다.
羊祜江陵으로 출발하고, 徐胤建平을 공격하여 보천을 구원하였다. 육항이 서릉으로 간 군사들에게 성을 포위하는 담장을 견고히 구축하라고 명을 내려
赤谿에서 故市까지 쌓아서 이로써 안으로는 보천을 포위하고 밖으로는 나라 군사들을 막게 하여 밤낮으로 독촉하니, 군사들이 매우 고생을 하였다.注+胡三省이 말하기를 “≪水經註≫에 ‘江水西陵의 협곡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故城洲를 가로지른다. 의 북쪽이 해안에 붙어 있는데, 의 윗부분은 郭洲로 길이가 2리이고, 폭이 1리이다. 그 위에 步闡이 있는데, 네모나고 둥근 모양이 와 걸맞고 주위를 둘러 대략 가득 차 있다. 故城洲 위에 5리에 걸쳐 있는 성이 있는데 보천의 아버지인 보즐이 쌓은 것이다. 또 〈江水가〉 동쪽으로 陸抗을 지나간다.’ 하였다. 지금의 峽州 遠安縣江北에 위치하여 거기에 孤山, 육항 옛 , 丹山이 있다. 당시에 붉은 기운이 있었는데, 赤溪가 마땅히 丹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故市는 바로 보즐 옛 으로, 거처하는 곳에 가 형성되었는데, 보천이 별도로 성을 쌓았기 때문에 故市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은 급박하다는 뜻이다.
여러 장수들이 간언하기를 “지금 군사들의 銳氣를 이용하여 보천을 공격해야 마땅한데, 무엇 때문에 포위하는 것을 일삼아서 군사와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육항이 말하기를 “이 은 지세가 견고하고 군량이 넉넉하며 방어 무기를 모두 내가 알고 있다.注+陸抗이 이전에 西陵을 감독한 적이 있다. 지금 도리어 그들을 공격하면 빨리 함락할 수가 없고, 북쪽의 병사들이 이르렀는데 아무 대비가 없으면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될 것이니,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공격하자고 청하기를 그치지 않자, 육항이 여러 사람의 마음을 승복시키려고 하여 한 번 공격하도록 허락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이득이 없었다. 포위망이 비로소 완성되자 양호의 병력 5만이 江陵에 도착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육항이 서릉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하자,注+樂鄕에서 서쪽을 향해 西陵으로 나아간 것이 올라가는 것이 된다. 육항이 말하기를 “강릉은 이 견고하고 병력도 충분하니, 걱정할 것이 없다. 가령 적들이 강릉을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필시 지켜내지 못할 것이니 우리의 손해가 적지만,
만약 나라가 서릉을 차지한다면 南山의 여러 오랑캐들이 동요하게 될 것이니 그 근심을 헤아릴 수 없다.”注+南山”은 江南의 여러 산을 말하는데, 여러 오랑캐들이 의지하는 험준한 지형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많은 병력을 이끌고 서릉으로 갔다.
[] 예전에 陸抗江陵의 북쪽에 큰 둑을 쌓아 물길을 막아서 적의 노략질과 내부 반란을 단절시켰다. 羊祜는 수로를 통해 군량을 운반하려고 하여 일부러 소리를 질러 “장차 둑을 무너뜨려서 보병을 통과시키겠다.”라고 하였다.
육항이 그 소식을 듣고는 즉시 둑을 트라고 하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여 여러 차례 간언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양호가 當陽에 이르러 둑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수레로 군량을 운반하였는데, 대단히 많은 힘이 소비되었다.
11월에 楊肇西陵에 이르렀는데, 육항이 스스로 병력을 거느리고 성을 포위하는 담장에 의지하여 대항하였다.注+성 주변을 두른 장벽에 의지하여 대치하면 저들은 이 되고, 우리는 가 된다. 나라 都督 兪贊이 도망쳐서 양조에게 가자,
육항이 말하기를 “유찬은 〈우리 군중에〉 오래 있던 관리라, 우리의 虛實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늘 夷族의 병력이 평소 엄격한 훈련을 받지 않은 것을 염려하였는데, 만약 적들이 우리의 포위망을 공격해온다면 반드시 이곳을 먼저 공략할 것이다.”라고 하고, 그날 밤에 夷族의 병력을 바꾸어 정예병으로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다음 날 양조가 과연 원래 夷族의 병력이 있던 곳을 공격하였다가 군사들이 패배하여 밤에 도망갔다. 육항이 추격하고자 하였으나 步闡이 틈을 보고 공략할까 염려되고 병력을 나누기에도 부족하여
다만 북을 울리며 추격하는 것처럼 하니, 양조의 군대가 두려워 모두 갑옷을 벗고 몸만 빼내어 도망쳤다.注+은 뽑는다는 뜻으로, “挺走”는 몸을 빼내 도망치는 것이다. 육항이 경무장한 병력들로 그들을 뒤쫓게 하자 양조가 또 크게 패배하였고, 양호 등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육항이 드디어 서릉을 함락하여 보천과 같이 모의한 장군과 관리 수십 명의 목을 베고 이들의 삼족을 모두 멸하였는데, 동쪽으로 樂鄕에 돌아가서도 자랑하는 기색이 없었다.
吳主가 이미 서릉에서 승리하고는 뜻이 더욱 커져서 術士 尙廣에게 천하를 차지할 시기를 점치게 하니,注+(확장하다)은 去聲이다. 尙廣姓名이다.
대답하기를 “길합니다. 庚子年(280)에 로 장식된 수레가 낙양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注+그 후에 나라가 망하여 孫皓洛陽으로 들어갔으니, 庚子年의 일이었다.라고 하니, 吳主가 기뻐하면서 德政을 펴지 않고 오로지 겸병할 계책만을 세웠다.
[] 羊祜江陵에서 돌아와 은덕을 베풀고 신의를 쌓아 나라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교전을 벌일 때마다 날짜를 정하여 전투를 하였으며, 몰래 습격하는 계책을 쓰지 않았고,
羊祜羊祜
장수들 가운데 속임수를 쓰자고 진언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좋은 술을 마시게 하여 말을 할 수 없게 하였다.
군대가 나라의 접경 지역에 가서 곡식을 베어 군량으로 썼는데, 침탈한 양을 모두 계산하여 비단을 보내어 배상하고, 사냥을 할 때는 늘 나라의 땅에 그쳤고,
만약 잡은 짐승 중에 먼저 나라 사람에 의해 상처를 입은 것이 있으면 모두 돌려보내니, 나라의 변경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탄복하였다.
양호와 陸抗이 경계를 마주하면서 使者들이 늘 왕래하여注+使(사신)는 疏吏이다. 육항이 양호에게 술을 보내면 양호는 의심하지 않고 이를 마셨으며, 육항이 병이 나자 양호가 조제해놓은 약을 그에게 주었는데, 육항이 즉시 복용하였다.
사람들이 대부분 육항에게 간언을 하자 육항이 말하기를 “어찌 다른 사람에게 을 줄 羊叔子이겠는가.”注+成藥”은 이미 합성하여 조제한 약이다. 叔子羊祜이다.라고 하였다. 육항이 변경의 수비병들에게 말하기를 “저들은 전적으로 덕을 쌓는데 우리는 전적으로 포악한 짓을 한다면 이는 싸워보지도 않고 스스로 굴복하는 것이니, 각자 나누어진 경계를 지킬 뿐, 자잘한 이익을 구하지 말라.”注+(경계)은 扶問이다. 하였다.
吳主가 그 일을 듣고는 육항을 꾸짖자, 육항이 말하기를 “한 이나 한 信義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더군다나 大國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다만 저들의 덕행을 드러낼 뿐이니, 양호에게는 손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 吳主가 여러 장수들의 계책을 이용하여 여러 차례 나라의 변경을 침략하여 노략질을 하였는데, 陸抗이 상소하기를 “지금 힘써 농사지어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데 힘쓰지 않고, 관리를 잘 살피고 능력 있는 사람을 임용하지 않으며, 관리의 승진과 좌천을 분명히 하고 형벌과 포상을 신중히 하지 않으며,
여러 관청을 덕으로써 가르치거나 백성들을 으로 어루만지지 않고,注+諸司”는 百執事文人, 有司가 있는 곳이다. 功名만을 추구하는 여러 장수들의 말을 따라 병사들을 끝까지 내몰아 무력을 남발하여 걸핏하면 비용이 만으로 헤아리고 사졸들은 지쳐있으니, 적들은 쇠퇴하지 않았지만 우리 나라는 이미 크게 병이 들었습니다.
천하 제왕의 기업을 다투면서 10이나 100의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우니, 이는 신하의 간교한 꾀임이지, 국가의 좋은 계책은 아닙니다.注+는 어둡다는 뜻이다.
옛날에 하물며 지금 우리가 얻은 승리가 잃은 것을 메울 수 없는 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吳主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 양호가 조정의 권력이 있고 귀한 사람들과 결탁하지 않으니, 荀勖馮紞의 무리가 모두 그를 싫어하였다. 從甥(5촌 생질) 王衍이 양호를 찾아가 이 일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아주 분명하고 조리가 있었다.
양호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왕연이 옷을 털고는 가버렸다. 그러자 양호가 빈객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王夷甫가 마땅히 큰 명성을 얻어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겠지만 풍속을 훼손시킬 사람은 필시 이 사람일 것이다.”注+夷甫王衍이다.라고 하였다.
江陵을 공격하게 되자, 양호가 軍法으로 王戎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왕연은 왕융의 사촌동생이 되기 때문에 두 사람이 모두 이를 유감으로 생각하니,注+資治通鑑≫에는 “두 사람이 모두 유감을 가져서 말할 적에 대부분 羊祜를 비난하였다.”라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말하기를 “두 왕씨가 나라를 책임지게 되면 羊公은 아무런 덕행을 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나라가 國子祭酒 庾純의 관직을 파면시켰다가 얼마 뒤에 다시 그를 임용하였다.注+武帝가 처음에 國子學을 설립하여 규정을 마련하여 國子祭酒博士 각 1명 및 助敎 15인을 두어서 생도를 가르치게 하였다.
[] 賈充이 조정의 인사들과 연회를 열었을 때에 河南尹 庾純이 취하여 가충과 언쟁을 벌였는데, 가충이 말하기를 “그대의 아버지가 연로한데도 돌아가서 봉양하지 않으니, 경은 하늘도 없고 땅도 없는 것이구려.”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순이 말하기를 “이 어디 있는가.”注+賈充이 임금을 시해한 일을 배척한 것이다.라고 하니, 가충이 부끄럽고 화가 나서 표문을 올려 해직을 청하고, 유순 역시 자신을 탄핵하였다.
그러자 조서를 내려 유순을 면직시키게 하고 그대로 五府에 회부하여 그의 잘잘못을 바로잡게 하였다.注+당시에 賈充을 제외하고 의 지위에 있는 자가 다섯 명이었기 때문에 五府에 맡겼다고 한 것이다. 石苞가 논하기를 유순이 관직에 나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 부모를 잊었으니, 마땅히 제명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齊王 司馬攸가 유순이 禮法刑律에 있어 아직까지 어긋나는 점이 없다고 하니, 조서를 내려 다시 유순을 祭酒로 삼았다.
[] 나라가 丞相 萬彧將軍 留平大司農 樓玄을 죽였다.
[] 萬彧將軍 留平과 비밀리에 모의하여 말하기를 “만약에 君主華里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으면 사직의 일이 중요하니, 스스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吳主가 자못 이 소식을 듣고는 연회로 인하여 만욱과 유평에게 毒酒를 마시게 하였는데, 죽지 않았다.注+資治通鑑≫에는 “毒酒萬彧에게 먹이게 하였는데, 술을 전해주던 사람이 사사로이 이를 덜어내었고, 또 留平에게 먹이게 하였는데, 유평이 이를 알아차리고 다른 약을 먹고 해독을 하여 죽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만욱은 자살하고 유평은 근심과 울분으로 하였다.
예전에 만욱은 충성스럽고 청렴한 인물을 선발하여 近臣으로 보임하기를 청하자, 吳主樓玄宮下鎭으로 임명하여 궁전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注+宮下鎭官名이다. 나라의 舊事에 궁궐의 일을 주관하는 자는 친근한 사람을 등용하는데, 孫皓萬彧의 말로 인해 樓玄을 등용하여 궁중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누현은 몸을 바르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이끌며 법을 잘 받들어 시행하고 군주에게 응답하기를 간절하고 정직하게 하니, 吳主가 점차 기뻐하지 않았다.
[] 中書令 賀卲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신이 듣건대 나라를 일으키는 군주는 자신의 허물을 듣기 좋아하고, 나라를 혼란하게 하는 군주는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듣기 좋아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허물이 날로 줄어들어 복된 일이 찾아오고, 자신의 칭찬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칭찬이 날마다 줄어들어 재앙이 이르게 됩니다.
폐하께서는 엄한 형법으로 곧은 말을 막고, 훌륭한 인물을 내쫓아서 간언하는 말을 막아서 술잔을 돌리는 연회에서조차 목숨을 보장받지 못하니,
이 때문에 올바른 인물은 바른 절조를 굽히고, 용렬한 신하는 구차히 아첨하여 사람들은 이치에 어긋나는 평의를 채택하고, 선비들은 도리에 어긋나는 논의를 펼쳐注+摧方”은 모난 곳을 깎아서 둥글게 만드는 것이다. 는 어기고 다르다는 뜻이다. 이윽고 벼슬하는 자들에게 물러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하고,
중앙에 있는 관원에게 외직으로 나가는 것을 복으로 여기게 하니, 大業을 보존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何定이 제멋대로 事役을 일으키고 江邊을 지키는 병사들을 징발하여 사슴 사냥을 하도록 하니, 노약자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어른과 아이들은 원망하고 탄식을 하였습니다.
(옛 책)에 이르기를 ‘나라가 흥성할 때에는 백성들을 갓난아이처럼 여기지만, 나라가 망할 때에는 백성을 초개처럼 여긴다.’注+春秋左氏傳哀公 원년에 陳逢滑이 이르기를 “나라가 융성할 때에는 백성 보기를 다칠 것처럼 하고, 나라가 망할 때에는 백성을 초개처럼 간주한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형법과 금령이 점점 가혹해지고, 조세는 날로 많아져서 부르짖고 한탄하는 소리가 和氣를 해치고 있으며,
또 나라 안에는 1년 정도 버틸 곡식이 없고, 민가에도 한 달을 넘길 양식이 없는데, 후궁에서 가만히 앉아 밥을 먹는 이들이 1만여 명입니다.
북쪽의 적국(나라)이 주의를 기울여 우리나라의 성쇠를 엿보고 있으니, 長江의 한계는 오래 믿을 것이 못됩니다. 만일 우리가 능히 장강을 지킬 수 없다면 뗏목 한 척으로 건널 수 있으니,注+과 통용하여 쓴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기초와 근본을 두텁고 굳건하게 하시고 개인적인 感情을 버리고 를 따르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聖祖의 복이 융성해질 것입니다.”注+聖祖孫權을 말한다.
吳主가 이를 한스럽게 여겼는데, 이때에 좌우 신하들이 누현과 하소를 무함하여 政事를 비방하였다고 하니, 두 사람 모두 힐책을 받아서, 누현을 交趾로 귀양을 보냈다가 마침내 죽였다.


역주
역주1 二月 晉太子衷 納妃賈氏 : “太子가 妃를 맞아들이는 것은 기록하지 않는데 여기에서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어지러움의 시작을 기록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太子가 妃를 맞아들인 일을 기록한 것이 세 번인데(晉나라 賈妃, 宋나라 江氏, 北周 楊氏) 모두 이유가 있다.[太子納妃不書 此其書 何 志亂始也 終綱目 書太子納妃三(晉賈妃 宋江氏 周楊氏) 皆有故也]” ≪書法≫
“太子가 妃를 맞아들이는 것은 드물게 기록하는데 여기에서 기록한 것은 晉나라를 망하게 한 근본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고, 또 역적의 딸을 맞이한 것이기 때문이다.[太子納妃 罕書 而此書之者 所以志亡晉之本 又且逆賊之女也]” ≪發明≫
역주2 뒤에……때에도 : 魏 高貴鄕公 正元 원년(254) 3월에 司馬師가 邵陵厲公(曹芳)을 폐위시키고, 魏 元帝 景元 원년(260) 4월에 司馬昭가 高貴鄕公(曹髦)을 살해한 일을 말한다.
역주3 (捅)[桶] : 저본에는 ‘捅’으로 되어 있으나, ≪漢書≫ 〈霍光傳〉의 顔師古 注에 의거하여 ‘桶’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晉散騎常侍鄭徽以罪免 : “이때에 皇甫陶가 일을 논의하여 다투어 변론을 그만두지 않자, 鄭徽가 그에게 벌을 주라고 청하니, 晉主가 정휘가 직분을 넘어 함부로 上奏한 것으로 인해 그를 면직시켰다. ≪資治通鑑綱目≫에서 ‘以罪免’이라고 특별히 기록한 것은 면전에서 아첨하는 자에 대한 경계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於是皇甫陶論事 爭辯不已 徽請罪之 帝以徽越職妄奏 免其官 綱目特書以罪免 所以示面諛者之戒也]” ≪書法≫
역주5 晉益州殺其刺史……以濬爲益州刺史 : “益州 사람들이 그 刺史를 죽였는데 어찌하여 ‘反’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인가. 오랑캐가 스스로 서로 해쳤는데 한여름에 군대를 출동하여 토벌하려 하여 사건과 재앙을 초래하였으므로 ‘州’로 기록을 하여 마치 한 州의 백성들이 서로 함께 그 刺史를 죽인 것처럼 기록한 것이다. 王濬이 조정에 청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矯(속임)’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인가. 主將을 해친 자는 누구나 토벌할 수 있으니 어찌 청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討’라고 기록하여 州兵의 죄를 바로잡은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輕重의 權衡이다.[益州殺其刺史 何以不書反 胡夷自相殘賊 而欲盛夏出軍討之 召釁啓禍 故以州書之 若一州之民 相與殺其刺史然耳 王濬不請于朝 何以不書矯 戕賊主將 人得誅之 何請之有 故書討以正州兵之罪 此所謂輕重之權衡也]” ≪發明≫
역주6 諸位從公 : ≪通典≫ 〈晉官品〉에 의하면 제1품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역주7 中制 : 조정의 詔書이다.
역주8 吳陸抗拔西陵……救之不及 : “‘晉나라가 그를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미치지 못했다.’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陸抗을 가상히 여긴 것이다. 육항이 步闡의 배반 소식을 듣고 급히 군대를 보내어 토벌하였으니, 임기응변에 능했다고 말할 수 있으므로 가상히 여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不及’이라고 기록한 것이 세 번인데(이해(272)의 羊祜, 梁나라 乙亥年(555)의 王琳, 같은 해(555) 北齊가 군대를 파견함), 北齊의 경우는 나무라는 말을 한 것이다.[書晉救之不及 何 嘉抗也 抗聞闡叛 亟遣兵討之 可謂能權矣 故嘉之 終綱目 救書不及三(是年羊祜 梁乙亥年王琳 同上齊遣兵) 惟齊爲譏辭]” ≪書法≫
역주9 [五] : 저본에는 ‘正’이 없으나, ≪水經註≫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0 靑蓋 : 청색 陽傘을 치장한 수레로, 황제와 황태자가 타는 수레이다.
역주11 齊나라와……망하였습니다 : ≪戰國策≫ 〈齊策 1〉에 “齊나라가 魯나라와 세 번 싸워 魯나라가 세 번 승리하였으나 나라가 위태로워지다가 뒤따라 나라가 망하였다. 그러니 비록 명분상으로는 이겼지만 실제로는 망한 것이다.[齊與魯三戰而魯三勝 國以危 亡隨其後 雖有勝名而有亡之實]”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12 晉免其國子祭酒庾純官 尋復用之 : “자기에게 잘못이 없은 뒤에야 남의 잘못을 비난하는 것이다. 賈充 자신이 시해를 저지른 반역자이면서 庾純이 부모 봉양을 어긴 것을 문책하였으니, 유순이 가충이 高貴鄕公에게 저지른 일을 문책한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晉나라는 간사한 자를 보호해 길러 마침내 유순의 관직을 파면하고서 이윽고 속으로 부끄러워하여 얼마 뒤에 다시 등용하였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이를 특별히 기록하여 의리를 일으켜서 後人들이 미루어 살펴서 알도록 하였다.[無諸己而後 可以非諸人 充自弑逆之賊 乃以違養責 庾純宜其取高貴鄕公之問也 然晉方護養姦回 遂免純官 旣而內愧於心 尋復用之 綱目所以特筆起義 欲使後人推考而得之也]” ≪發明≫ “無諸己而後 可以非諸人”은 ≪大學章句≫ 傳 9장에 보인다.
역주13 高貴鄕公 : 曹髦로 魏나라 황제이다. 司馬氏의 등장으로 분에 못 이겨 군사를 일으켜서 사마씨에게 대들다가 賈充의 지휘 아래 목숨을 잃었다. 이 일은 본서 161쪽에 보인다.
역주14 吳殺其丞相萬彧將軍留平大司農樓玄 : “萬彧과 留平은 吳主를 扈從했다가 도망오기를 생각했으니 죄가 없지 않은데 어째서 樓玄과 함께 아울러 ‘殺’이라고 기록했는가. ≪資治通鑑綱目≫에서는 본원을 맑게 하고 근본을 바로잡아서 만욱과 유평의 일을 생략하여 吳主를 죄준 것이다. 유람하는 데에 대한 경계가 크다.[彧平扈從而思逃 不無罪矣 曷爲與樓玄竝書殺 綱目澄源正本 略彧平 所以罪吳主也 其爲盤遊之戒深矣]” ≪書法≫
“孫皓가 이전에 王蕃을 죽인 것은 이미 冊에 기록되었는데 마치 일반 관료처럼 말하였고, 지금 또 죄가 없는데도 그 장군과 재상의 대신들을 죽인 것을 여기에 나열하여 기록하였으니 어지러이 망한 자취를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吳나라가 망한 것은 어찌 晉나라 王濬이 進軍하기를 기다린 뒤에 미친 결과이겠는가.[孫皓前殺王蕃 已書于冊 猶曰庶僚云耳 今又以無罪殺其將相大臣 列書于此 所以著其亂亡之迹也 然則吳之亡也 豈俟王濬進軍而後及乎]” ≪發明≫
역주15 吳主(孫皓)가……때 : 본서 256쪽에 보인다.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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