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綱] 봄 정월에 송주宋主(효무제孝武帝)가 적전籍田을 가는 예를 행하고, 3월에 황후皇后가 서교西郊에서 친히 양잠養蠶하는 예를 행하고, 태후太后가 예禮를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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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여름 6월에 북위北魏가 토욕혼吐谷渾을 정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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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토욕혼왕吐谷渾王모용습인慕容拾寅이 송宋나라와 북위北魏 양쪽에서 준 작명爵命을 받고는 행동거지와 출입(경필警驆)하는 것이 제왕帝王에 견주었다. 그러자 북위北魏 사람들이 분노하여 양평왕陽平王탁발신성拓跋新成注+① 拓跋新成은 魏主(文成帝)의 아우이다. 등을 보내어 여러 군대를 감독하여 공격하게 하니, 포로와 노획물이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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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북위北魏가 다시 사관史官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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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최호崔浩가 주륙되고 나서 사관史官이 마침내 폐기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다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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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겨울 10월에 송宋나라가 여릉내사廬陵内史주랑周朗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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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주랑周朗이 일을 말할 적에 간절하며 솔직하니 송주宋主(효무제孝武帝)는 앙심을 품고서 유사有司에게 주랑이 모친의 상중에 예법대로 하지 않는다고 아뢰게 하고 파발마로注+① 傳(파발마)은 知戀의 切이다.영주寧州에 압송하여 도중에 주랑을 죽였다.
주랑이 출발할 적에 시중侍中채흥종蔡興宗이 마침 당직이어서 주랑과 이별하기를 청하였는데 이것에 연루되어
놀이를 하였을 때에 송주宋主가 오목五木을 던져서 치雉를 얻고는 스스로 반드시 이길 것이라 생각하였다. 안사백이 다음에 던져서 노盧를 얻으니 송주宋主가 실색失色하자,
안사백은 갑자기 오목五木[자子]을 거두면서 말하기를 “거의 노盧가 나올 뻔하였습니다.”라고 하고, 이날 모두 1백만 전錢을 잃었다.注+① 擲은 던짐이다. 子는 五木(나무로 만든 다섯 개 패나 주사위)이다. ≪樗蒲譜≫에 “〈五木을 던졌을 때에〉 𢳚은 2이고 撅은 3이고 黑은 4이고, 搨은 5이고 退는 6이고, 白은 8이고 進은 9이고 犢은 10이고 塞은 11이고 開는 12이고 野는 14이고 盧는 16이다.” 또 말하기를, “〈五木을 던져〉 2犢 3黑이 나온 것을 盧라 하고, 2雉 3白이 나온 것을 白이라 하고, 2犢 3白이 나온 것을 犢이라 하고, 2雉 3黑이 나온 것을 雉라 하니 이상을 貴采라고 한다. 1犢 1雉 1白 2黑이 나온 것을 𢳚이라 하고, 1雉 1犢 1黑 2白이 나온 것을 撅이라 하고, 2犢 2黑 1白이 나온 것을 秃이라 하고, 2雉 2白 1黑이 나온 것을 搨이라 하고, 2雉 2黑 1白이 나온 것을 進이라 하고, 2犢 2白 1黑이 나온 것을 退라 하고, 1雉 1犢 3白이 나온 것을 開라 하고, 1雉 1犢 3黑이 나온 것을 塞라 한다. 秃은 또 里라고도 한다.” 하였다. 𢳚는 音이 犍이다. 搨은 都盒의 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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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유연柔然이 고창髙昌을 공격하여 저거안주沮渠安周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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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유연柔然이 고창髙昌을 공격하여 저거안주沮渠安周를 죽이고, 저거씨沮渠氏를 멸망시키고, 감백주闞伯周를 고창왕髙昌王으로 삼았다. 고창이 왕王을 일컬은 것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역주
역주1春正月……太后觀禮 :
“‘親耕(황제가 친히 밭을 갈았다.)’이라고 기록한 것은 많으나 ‘親蠶(황후가 친히 양잠하다.)’이라고 기록한 것은 없었는데, ‘親蠶’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근본을 중시함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漢 文帝 때에 ‘詔具親耕桑禮儀(조서를 내려서 친히 밭을 갈며 양잠하는 예의를 갖추게 하였다.)’라고 기록한 데서부터 이때에 비로소 ‘親蠶’을 기록하였으니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은 근본(농사와 양잠)을 중시하였으므로 ‘具親耕桑禮儀’라고 기록하고(漢 文帝 12년), ‘親蠶’이라고 기록하고(이해(460)), ‘皇后帥命婦親蠶(皇后가 命婦들을 데리고서 친히 양잠하였다.)’이라고 기록하고(唐 太宗 貞觀 원년(627)), ‘祀先蠶(養蠶의 神에 제사하였다.)’이라고 기록하고(唐 髙宗 上元 2년(675)), ‘賜近臣絲(近臣에게 명주실[絲]을 내려주었다.)’라고 기록하였다(唐 玄宗 開元 15년(727)).[書親耕多矣 未有書親蠶者 書親蠶何 嘉重本也 自漢文帝書詔具親耕桑禮儀 於是始書親蠶 嘉之也 綱目重本 故具親耕桑禮儀書(漢文帝十二年) 親蠶書(是年) 皇后帥命婦親蠶書(唐太宗貞觀元年) 祀先蠶書(唐髙宗上元二年) 賜近臣絲書(唐玄宗開元十五年)]” ≪書法≫
역주2魏復置史官 :
“‘復置’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오랫동안 폐기했기 때문이다. 崔浩가 죽고 나서 이때에 13년이 되었으므로 ‘復(다시)’라고 기록하여 나무란 것이다.[書復置何 久廢也 自崔浩之死 於是十三年矣 故書復譏之]” ≪書法≫
역주4樗蒲 :
놀이나 노름의 하나로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주사위나 윷놀이와 비슷하거나 쌍륙놀이를 가리키기도 한다. 또는 나무로 만든 다섯 개의 投子로 하는 놀이를 말하는데, 다섯 개의 투자마다 兩面의 한쪽에는 黑色을 칠하고 송아지를 그렸으며, 다른 쪽에는 白色을 칠하고 꿩을 그렸는데, 이 다섯 투자를 던져서 모두 흑색을 얻으면 ‘盧’라고 외쳤다. 아래 訓義의 내용은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