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敖曹
가 自商山轉鬪而進
하여 所向無前
이라 遂攻上洛
注+① 杜佑曰 “商山, 在商州上洛縣.”할새
郡人泉岳
과 及弟猛略
이 與杜窋等
으로 謀翻城應之
注+② 泉, 姓也. 窋, 竹律․丁骨二切.러니 洛州刺史泉企
가 知之
하고 殺岳及猛略
注+③ 此魏太和中所改洛州也, 治上洛, 時屬西魏.하니 窋
이 走歸敖曹
어늘 敖曹
가 以爲鄉導
하여 而攻之
한대
企가 固守旬餘에 二子元禮仲遵이 力戰하여 仲遵은 傷目하고 城遂陷이러라 企가 見敖曹하여 曰 吾力屈이요 非心服也라하다
敖曹
가 以杜窋
로 爲洛州刺史
하고 欲遂入藍田關
이라가 聞竇泰軍没
하고 而還
하여 以企及元禮
로 自随
注+④ 唐志 “京兆藍田縣, 有藍田關, 故嶢關也.”어늘
企가 私戒二子하여 曰 吾는 餘生無幾나 汝曹는 才器足以立功이니 勿以吾故로 遂虧臣節하라하다
元禮가 逃還하여 與仲遵으로 陰結豪右하여 襲窋殺之어늘 魏가 以元禮로 世襲洛州刺史하다
東魏郎中杜弼
이 以在位貪汚
로 請治之
한대 歡
이 曰 今督將家屬
이 多在關西
注+⑤ 此指言可朱渾道元ㆍ俟普ㆍ劉豐生等部曲也.하여 宇文黑獺
이 常招誘之
하니 人情
이 去留未定
이요
江東에 復有一吳翁蕭衍이 專事衣冠禮樂하여 中原士大夫가 望之以爲正朔所在하니 我若不相假借하면 恐督將이 盡歸黑獺하고 士子悉奔蕭衍이라 人物이 流散하면 何以爲國이리오 宜少待하라 吾不忘之로라
至是하여 將出兵拒魏할새 弼이 請先除内賊이어늘 歡이 問爲誰오 弼이 曰 諸勲貴掠奪百姓者가 是也로라
歡이 不應하고 使軍士로 皆張弓注矢하고 擧刀按矟하여 夾道羅列하고 命弼冒出其間하니
弼이 戰慓流汗이어늘 歡이 乃徐諭之하여 曰 矢注不射하고 刀擧不擊하고 矟按不刺로도 爾猶亡魂失膽이어늘 況諸勲人이 身犯鋒鏑하고 百死一生하니 雖或貪鄙나 所取者大니 豈可同之常人哉리오하니 弼이 頓首謝하다
目
東魏 髙歡이 將兵二十萬하여 趣蒲津하고 使髙敖曹로 將兵三萬하여 出河南할새
時에 關中이 饑하고 魏宇文泰所將이 不滿萬人이라 屯恒農五十餘日이러니 聞歡將濟河하고 乃引兵入關하니 敖曹가 遂圍恒農이러라
長史薛琡
이 言於歡曰 西人
이 連年飢饉
이라 故冒死入陝州
하여 欲取倉粟
注+① 魏收志, 太和十一年, 置陝州, 治陝城, 帶恒農郡, 領西恒農․澠池․石城․河北郡.이어늘 今敖曹
가 已圍陝城
하여 粟不得出
하니
但置兵諸道하여 勿與野戰하고 比及麥秋하면 其民이 自應餓死리니 寳炬黑獺이 何憂不降이리오 願勿渡河라하고
侯景이 曰 今兹擧兵이 形勢極大하니 萬一不捷하면 猝難収斂이니 不如分爲二軍하여 相繼而進하여 前軍若勝하면 後軍이 全力하고 前軍이 若敗하면 後軍이 承之라하되
歡
이 不從
하고 自蒲津
으로 濟河
하다 至馮翊
하여 謂魏刺史王羆曰 何不降
가 羆
가 大呼曰 此城
은 是王羆冡
이니 欲死者
인댄 來
하라 歡
이 知不可攻
하고 乃渉洛
하여 軍於許原西
注+② 漢志 “馮翊懷德縣南有荊山, 山下有彊梁原, 洛水東南入渭.” 許原蓋在洛水之南.하다
泰가 至渭南하여 徵諸州兵하되 皆未會러니 欲進撃歡커늘 諸將이 以衆寡不敵으로 請待歡更西하여 以觀其勢한대
泰가 曰 歡이 若至長安하면 人情이 大擾리니 今及其新至하여 可擊也라하고 即造浮橋於渭하여 令軍士로 齎三日糧하고 輕騎度渭라
目
十月
에 至沙苑
하니 距東魏軍六十里
注+① 水經注 “沙苑在渭北, 沙苑之南, 即漢懷德縣故城.”라 諸將
이 皆懼
하되 宇文深
이 獨賀曰 歡
이 鎭撫河北
하여 甚得衆心
이라 以此自守
하면 未易可圖
어늘
今懸師度河는 非衆所欲이어늘 獨歡이 恥失竇泰하여 愎諫而來하니 所謂忿兵이라 可一戰擒也니
願假深一節하여 發王羆之兵하여 邀其走路하여 使無遺類리라하다
泰가 遣順昌公達奚武하여 覘歡軍하니 武가 從三騎하되 皆效歡將士服하여 日暮에 去營數百歩下馬하여 潜聽得其軍號하고 因上馬歷營을 若警夜者하여 有不如法하면 往往撻之하여 具知敵之情狀하여 而還하다
歡이 聞泰至하고 引兵會之어늘 李弼이 謂泰曰 彼衆我寡하여 不可平地置鎭이라 此東十里에 有渭曲하니 可先據以待之라하니
泰
가 從之
하여 背水東西爲
하고 李弼趙貴
로 爲左右拒
하고 命將士
하되 皆偃戈於葦中
하여 約聞鼓聲而起
注+② 拒, 陣名. 弼爲右拒, 趙貴爲左拒. 葦, 大葭也.하라하다
晡時
에 東魏兵
이 至
어늘 斛律羌擧
가 曰 黑獺
이 擧國而來
하여 欲一死决
注+③ 言欲盡死力戰以決勝負.에 渭曲
이 葺深土濘
하여 無所用力
하니 不如緩與相持
하고 密分精銳
하여 徑掩長安
이니 巢穴
이 既傾
이면 則黑獺
은 不戰成擒矣
리라
歡이 曰 縱火焚之가 何如오 侯景이 曰 當生擒黑獺하여 以示百姓이니 若燒死면 誰復信之리오
彭樂이 盛氣請鬪曰 我衆賊寡하니 何憂不克이리오하니 歡이 從之하다
目
東魏兵
이 望見魏兵少
하고 爭進撃之
하여 無復行列
이어늘 泰
가 鳴鼓
하니 士皆奮起合戰
하고 李弼等
이 帥鐡騎横撃之
하니 東魏兵
이 中絶
하여 遂大破之
注+① 時東魏之師萃于左拒, 于謹等與之合戰, 李弼引右拒之騎兵橫擊之.하다
歡이 欲収兵更戰이나 衆已盡去러니 斛律金이 曰 衆心離散하면 不可復用이니 宜急向河東이라하다 歡이 乃馳去夜度河하니 喪甲士八萬人과 鎧仗十八萬이러라
泰가 追至河上하여 選留甲士二萬餘人하고 餘悉縱歸러라 李穆이 曰 髙歡이 破膽矣니 速追之하면 可獲이라하되
泰가 不聽하고 還軍渭南이러니 所徵之兵이 甫至어늘 乃於戰所에 人種柳一株하여 以旌武功이러라
侯景이 言於歡曰 黑獺이 驟勝而驕하니 必不爲備라 願得精騎二萬하여 徑得取之라커늘
歡이 以告婁妃한대 妃가 曰 設如其言이나 景이 豈有還理리오 得黑獺하고 而失景하면 何利之有리오하니 歡이 乃止하다 髙敖曹가 聞歡敗하고 釋恒農하고 退保洛陽하다
目
魏가 遣行臺王季海하여 與獨孤信으로 趣洛陽하고 李顯은 趣三荆하고 賀拔勝李弼은 圍蒲坂하다
髙歡之西伐也
에 蒲坂民敬珍
이 謂其從祖兄祥曰
注+① 敬, 姓也. 髙歡
이 迫逐乗輿
어늘 天下忠義之士
가 皆欲倳刃於其腹
注+② 倳, 側吏切, 揷刃也. 或作剚.하니
今又稱兵西上하니 吾欲與兄起兵하여 斷其歸路하노니 此는 千載一時也라하니 祥이 從之하여 糾合鄉里하니 有衆萬餘러라
會에 歡이 自沙苑敗歸어늘 祥珍이 帥衆邀之하여 斬獲甚衆하고 賀拔勝李弼이 至河東이어늘 祥珍이 帥六縣十餘萬戸하여 歸之하니 宇文泰가 以珍爲平陽太守하고 祥爲行臺郎中하다
東魏秦州刺史薛崇禮가 守蒲坂할새 其族弟善이 爲别駕하여 言於崇禮曰 髙歡이 有逐君之罪어늘 善與兄이 忝衣冠緒餘하여 世荷國恩이라가 今大軍已臨하되 而猶爲歡守하니 一旦城陷하여 送首長安하고 署爲逆賊하면 死有餘愧리니 及今歸欵하면 猶爲愈也라하되
崇禮가 猶豫不决이어늘 善이 與族人으로 斬關納魏師하니
宇文泰
가 進軍蒲坂
하여 略定汾絳
注+③ 五代志 “文城郡, 東魏置南汾州, 後周改爲汾州. 絳郡, 後魏置東雍州, 後周改爲絳州.”하고 凡薛氏預開城之謀者
를 皆賜五等爵
한대 善
이 曰 背逆歸順
은 臣子常節
이어니 豈容闔門俱叨封邑
이리오하고 與其弟愼
으로 固辭不受
하다
目
【目】 예전에 魏主(西魏 文帝)가 조칙을 내려 高歡의 20가지 죄를 거론하자, 고환 역시 檄文을 내어 이르기를, “宇文泰와 斛斯椿이 반역의 무리가 되었다.”라고 했다.
이때에 와서 고환이 司徒 髙敖曹를 보내 上洛을 공격하고 大都督 竇泰에겐 潼關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蒲坂에서 군사를 이끌고서 세 개의 浮橋를 만들어 黃河를 건너려 했다.
西魏 우문태가 廣陽에 주둔하고
注+① 魏收의 ≪魏書≫ 〈地形志〉를 살펴보면 “景明 원년(500)에 廣陽縣을 설치했으며 馮翊郡에 속하였다.” 하였다. 諸將들에게 이르기를, “적들이 우리의 삼면을 견제하고 浮橋를 만들어 반드시 黃河를 건널 것임을 보이고 있으니, 이는 우리 군대를 끌어들여, 두태를 서쪽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浮橋
두태가 여러 차례 승리하여 교만해져 있으니 그를 습격하면 반드시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 두태를 물리치면 고환은 싸우지 않고도 저절로 달아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제장들이 모두, “병사를 나눠 방어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자, 우문태가 말하기를, “적들이 浮橋를 만든다 해도 곧장 건널 수는 없을 것이니, 5일이 안 돼서 내가 반드시 두태를 붙잡고 말 것이다.”라고 하니 蘇綽과 達奚武가 역시 동의를 표했다.
注+② 達奚는 代北의 複姓이며 원래 東胡의 종족이었다.
우문태가 長安으로 돌아와 그 계책을 숨긴 채 조카 直事郎中 宇文深에게 계책을 묻자,
注+③ 晉 武帝가 直事郞을 설치했는데 尙書省 여러 曹의 郞의 위에 있다. 우문심이 말하기를, “두태는 髙歡의 용맹한 장수입니다. 지금 대군이 蒲坂을 공격하면 고환이 이를 방어하고 두태가 구원하러 올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안팎으로 공격을 받아서 위험한 길입니다.
따라서 정예 병사를 선발해서 조용히 小關으로 나가게 되면
注+④ 小關은 潼關 왼쪽에 있으며 唐나라 때 禁谷이라 했다. 두태가 조급해져 반드시 와서 결전을 벌일 것이고, 고환은 신중하여 바로 구제하지 않을 것이니, 우리가 서둘러 공격하면 두태를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고, 두태를 사로잡으면 고환의 기세는 저절로 꺾일 것이고, 이때 군사를 되돌려 공격하면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우문태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라고 하고, 겉으로는 隴右를 지키려 한다고 소문을 내고 조용히 군사를 동쪽으로 보냈다. 두태가 갑자기 군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황하를 건너자, 우문태가 이를 격파하여 병사들이 모두 전멸했고 두태도 자살하니, 고환이 부교를 철거하고 퇴각했다.
目
【目】 髙敖曹가 商山에서 떠돌며 전투를 벌여 전진하여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어서 결국 上洛까지 침공했다.
注+① 杜佑가 말하기를, “商山은 商州 上洛縣에 있다.”
上洛郡 출신 泉岳과 그의 아우 泉猛略이 杜窋 등과 함께 城을 뒤엎어 호응할 것을 도모했었는데,
注+② 泉은 姓이다. 窋은 竹律과 丁骨의 두 가지 切이다. 洛州刺史 泉企가 이 사실을 알고 천악과 천맹략을 죽이자
注+③ 이것은 北魏 太和 연간에 개칭한 洛州이니, 上洛을 治所로 삼았다. 당시에 西魏에 속했다. 두줄이 도주하여 고오조에게 투항하거늘 고오조가 그를 鄕導로 삼아 상락을 공격했다.
천기가 열흘 동안 굳게 지킬 때 두 아들 泉元禮와 泉仲遵이 온 힘을 다해 싸웠는데, 천중준이 눈을 잃었고 결국 성이 함락되었다. 천기가 고오조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힘이 부족한 것일 뿐 마음속으로 굴복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고오조가 두줄을 洛州刺史로 삼고 결국 藍田關으로 들어가려 하다가 竇泰의 군사가 몰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와서 천기와 천원례에게 수행하게 했다.
注+④ ≪新唐書≫ 〈地理志〉에 의하면, “京兆의 藍田縣에 藍田關이 있는데 옛 嶢關이다.”라고 하였다.
천기가 사사로이 두 아들에게 경계의 말을 전하기를, “나는 남은 삶이 얼마 되지 않으나 너희들은 才能과 器局이 공을 세울 만하니 나 때문에 끝내 신하의 節義를 망가뜨리지 말라.”고 했다.
천원례가 도망해 돌아와서 천중준과 함께 남몰래 명문 귀족들과 친교를 맺어, 두줄을 습격해 죽이자, 西魏가 천원례에게 洛州刺史를 世襲하게 했다.
東魏 郎中 杜弼이 관직에 있으면서 탐욕과 오욕을 일삼는 자들을 처벌하자고 요청하자, 髙歡이 말하기를, “지금 都督과 將軍의 가속들이 대부분 西魏의 關西 지역에 있어서
注+⑤ 이것은 可朱渾道元ㆍ万俟普ㆍ劉豐生 등의 部曲을 지칭한다. 宇文黑獺(宇文泰)이 항상 그들을 불러 잘 달래고 있는데, 이들이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요,
江東의 吳 땅에 蕭衍이라는 원로가 있는데 衣冠과 禮樂을 중시하여 中原 士大夫들이
이 있는 곳처럼 추앙하고 있으니, 내가 그들을 용인하지 않으면 도독과 장군들이 모두 우문흑달에게 돌아가고 사대부들이 모두 소연에게 귀의할까 우려되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면 어떻게 국가를 다스리겠소.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가 잊지는 않을 것이오.”라고 했다.
이때에 이르러 병사들을 이끌고 西魏를 막으려 할 때 두필이 내부의 적을 먼저 제거할 것을 요청하자, 고환이 “그가 누구요?”라고 묻자, 두필이, “勳貴 가운데 백성을 약탈한 자들이 그들입니다.”라 하니,
고환이 대답하지 않고 군사들을 시켜 모두 화살을 장전한 채 활을 당기고 칼을 들고 창을 치켜들은 채 길가에 나열하게 하고 두필에게 그 사이를 걷게 했다.
두필이 두려움에 떨며 땀을 흘리자, 고환이 조용히 타이르기를, “화살을 장전한 채 쏘지 않고 칼을 든 채 공격하지 않고 창을 든 채 찌르지 않는 것만으로 그대가 넋을 잃고 간담이 써늘하거늘, 하물며 勳臣들은 몸소 적의 칼날에 맞서고 수많은 죽음 속에서 살아왔으니 탐욕과 비루한 행동을 했다 해도 취해야 할 것은 그 장점인데 어떻게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볼 수 있겠소.”라고 하니, 두필이 머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目
【目】 髙歡이 군사들에게 號令을 내릴 때, 鮮卑族에게 말할 경우는 “漢나라 사람이 너희의 종이다. 남자는 너희를 위해 경작하고 여인은 너희를 위해 베 짜며 너희에게 곡식과 옷감을 보내어 너희로 하여금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를 부르게 하니 너희가 어찌 그들을 무시할 것이겠는가.”라고 하고,
漢族에게 이야기할 경우는 “鮮卑는 너희의 객이다. 너희로부터 곡식과 비단을 얻고 너희를 위해 적을 공격하여 너희를 편안하게 하니 너희가 어찌 그들을 미워할 것이겠는가.”라고 했다.
注+① ‘作客’은 고용하는 객과 같다는 말이다.
당시 선비족이 모두 한족을 경시했지만 오직 髙敖曹만은 두려워했다. 고환이 장수와 군사들에게 호령할 땐 늘 선비족 말을 사용하다가도 고오조가 대열 안에 있으면 한족 말을 썼다.
고오조가 일찍이 丞相府에 찾아갔을 때 수위가 들이지 않자, 고오조가 그를 활로 쏘았지만 고환이 이를 알고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目
【目】 東魏 髙歡이 20만 병사를 이끌고서 蒲津으로 향하고 髙敖曹를 시켜서 3만의 병사를 이끌고 황하 이남으로 가게 했다.
당시 關中에 기근이 들고 西魏 宇文泰가 거느린 병사들이 1만 명이 안 된 채 恒農에 50여 일 동안 주둔해 있었는데, 고환이 머지않아 황하를 건넌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들을 이끌고 관중으로 들어가자, 고오조가 결국 항농을 포위했다.
長史 薛琡이 고환에게 말하기를, “서위 사람들이 해를 이어 기근이 들었으므로 목숨을 무릅쓰고 陝州로 들어가 창고 곡식을 탈취하려고 했는데,
注+① 魏收의 ≪魏書≫ 〈地形志〉를 살펴보면 太和 11년(487)에 陝州를 설치하여 陝城에 治所를 두고 恒農郡을 兼有하고, 西恒農郡ㆍ澠池郡ㆍ石城郡ㆍ河北郡을 관할하였다. 지금 고오조가 이미 섬주를 포위하여 곡식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길에 병사들만 배치하여 野戰을 벌이지 않은 채로 麥秋(음력 4, 5월)까지 가게 되면 그 백성들이 저절로 굶어 죽을 터인데, 元寳炬와 宇文黑獺(宇文泰)이 항복하지 않을 것을 어찌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디 황하를 건너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하고,
侯景이 말하기를, “지금 이 출병은 규모가 대단히 큰데 만에 하나 승리하지 못하면 대번에 수습하기 어려울 것이니, 군대를 前軍과 後軍 둘로 나눠 전진하여 전군이 승리하면 후군이 온 힘을 다하고, 전군이 실패하면 후군이 그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했으나, 고환이 따르지 않고 포진에서 황하를 건넜다.
고환이 馮翊에 이르러 서위의 刺史 王羆에게 이르기를,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하자, 왕비가 큰 소리로 외치기를, “이 城은 나 왕비의 무덤이니 죽고 싶으면 오라.”라고 하니 고환이 공격할 수 없음을 알고 洛水를 건너 許原 서쪽에 주둔했다.
注+② ≪漢書≫ 〈地理志〉에 의하면, “馮翊 懷德縣 남쪽에 荊山이 있고 산 아래에 彊梁原이 있는데, 洛水가 동남쪽으로 흘러 渭水로 들어간다.”라고 했는데, 許原은 洛水 남쪽에 있는 것이다.
우문태가 渭水 남쪽에 이르러 여러 州에 병사들을 징발했으나 모두 모이지 않았다. 고환을 공격하려 하자, 제장들이 衆寡不敵이라는 이유를 들어 고환이 다시 서쪽으로 가는 것을 기다렸다 그 형세를 관망하자고 하니,
우문태가 말하기를, “고환이 만일 長安에 도착하면 人情이 크게 요동칠 것이니 지금 막 도착할 즈음에 공격해야 한다.”라고 하고, 곧바로 위수에 浮橋를 만들어 군사들에게 3일 치 양식만 휴대하게 한 뒤 輕騎兵을 이끌고 위수를 건넜다.
目
【目】 10월에 沙苑에 이르니 東魏 군사와의 거리가 60리였다.
注+① ≪水經注≫에, “沙苑은 渭水 북쪽에 있으니 사원 남쪽은 바로 漢나라 懷德縣의 古城이다.” 하였다. 諸將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지만 宇文深만 홀로 〈宇文泰에게〉 축하하며 말하기를, “髙歡이 河北 지역을 안정시켜 민심을 크게 얻었으니, 이것으로 자신을 지킨다면 쉽게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孤軍을 이끌고 黃河를 건너는 것은 뭇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닌데 고환만 竇泰를 잃은 것을 수치로 여겨 다른 사람의 諫言을 물리치고 왔으니, 이것은 이른바 ‘분노하여 일으킨 군사’이므로 한 번 싸움으로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 兵符 하나를 내주시어, 王羆의 병사들을 출동시켜, 고환의 퇴로에서 그들을 막아서서 하나도 놓치는 것이 없게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우문태가 順昌公 達奚武를 보내 고환의 군사를 정탐하게 하였다. 달해무가 세 명의 기병을 대동했는데 모두 고환의 병사 복장을 했다. 저물 무렵 고환의 군영에서 백 보 쯤 떨어진 곳에서 말에서 내려 조용히 적들의 口令을 훔쳐 듣고, 이어서 말에 올라 마치 밤에 경계 임무를 담당하는 사람처럼 군영을 돌아다니다 군법을 어기는 자가 발견되면 이따금 매질도 해가며 적들의 정세를 모두 탐지하여 돌아왔다.
고환이 우문태가 왔다는 말을 듣고 병사들을 한곳으로 모을 때, 李弼이 우문태에게 말하기를, “저들은 숫자가 많고 우리는 부족하여 평지에서 鎭을 설치할 수가 없습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渭曲이 있는데 이곳을 먼저 점거하여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하자,
우문태가 그 말을 따라 물을 등지고 동서로 陣을 치고 李弼과 趙貴를 좌우
로 삼고 將士들에게 명하여 모두 갈대 속에서 창을 눕히고 있다가 북소리를 들으면 곧장 일어서 나오도록 약속했다.
注+② 拒는 陣의 이름인데 李弼이 右拒가 되고 趙貴가 左拒가 된 것이다. 葦는 큰 갈대이다.
저녁 무렵 동위 병사들이 이르자, 斛律羌擧가 이르기를, “宇文黑獺(우문태)이 온 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결전을 벌이려 하는데
注+③ 〈‘欲一死決’은〉 죽을힘을 다해 싸워 승부를 겨룬다는 말이다. 위곡 지역은 갈대숲이 깊고 진흙땅이어서 힘을 펼칠 수가 없으니, 우선 저들과 대치하지 말고 조용히 정예 부대를 조직해 곧장 長安을 엄습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렇게 본거지가 무너지고 나면 우문흑달은 싸우지 않고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고환이 말하기를, “불을 질러 태워버리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자, 侯景이 말하기를, “우문흑달을 생포해서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니, 만일 불에 태워 죽인다면 누가 이를 믿겠습니까.”라고 하니,
彭樂이 기세를 떨치며 싸우자고 하기를, “숫자가 우리가 많고 적들이 적은데 무찌르지 못할 걸 어찌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고환이 이를 따랐다.
目
【目】 東魏 병사들은 西魏 병사가 적은 것을 보고 앞다퉈서 진격하며 대오가 헝클어지자, 宇文泰가 북을 울리니 사졸들이 모두 일어나 싸움을 벌였고, 李弼 등이 鐵騎를 이끌고 적진의 옆구리를 공격하니 동위 병사들은 중간이 단절되어 결국 크게 격파되었다.
注+① 이때 東魏 병사가 左拒에 모이자 于謹 등이 싸움을 벌였는데 李弼이 右拒의 騎兵을 이끌고 적의 옆구리를 공격한 것이다.
髙歡이 병사들을 수습해 다시 싸우려 했으나 무리들이 이미 전부 가버렸다. 斛律金이 이르기를, “뭇사람의 마음이 떠나버리면 더 이상 쓸 수가 없으니 속히 河東으로 가야 합니다.”라고 했다. 고환이 길을 내달려 밤중에 黃河를 건넜는데, 전투에서 8만의 甲士와 18만 건의 병장기를 잃었다.
우문태가 황하 언덕까지 추격하여 2만여 명의 갑사들을 골라 남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아가게 했다. 李穆이 말하기를, “고환이 간담이 무너졌으니 속히 추격하면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지만
우문태가 듣지 않고 물러나 渭南에 병사를 주둔했다. 징발했던 병사가 막 이르자 전투를 벌였던 곳에 사람마다 버드나무 한 그루씩 심게 해서 그들의 武功을 기념했다.
侯景이 高歡에게 말하기를, “宇文黑獺(우문태)이 갑자기 승리한 탓에 교만해져 반드시 대비하지 않을 것이니 정예병 2만을 이끌고 곧장 무찌르겠습니다.”라고 하거늘,
고환이 이를 婁妃에게 묻자, 누비가 말하기를, “설령 그의 말대로 된다 해도 후경이 돌아올 리 있겠습니까. 우문흑달을 얻고 후경을 잃으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고환이 그 계책을 저지했다. 髙敖曹는 고환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恒農을 포기하고 퇴각하여 洛陽을 지켰다.
目
【目】 西魏가 行臺 王季海에게 獨孤信과 함께 洛陽으로 가게 하고, 李顯은 三荆으로 가게 하고, 賀拔勝과 李弼은 蒲坂을 포위하게 했다.
髙歡이 西魏를 정벌할 때 포판의 백성 敬珍이 그의 從祖兄 敬祥에게 이르기를,
注+① 敬은 姓이다. “고환이 皇上(北魏 孝武帝 元脩)을 축출하자 천하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사들이 모두 그의 뱃속에 칼날을 찌르고 싶어 합니다.
注+② 倳는 側吏의 切이니 칼을 꽂는 것이다. 혹은 剚로 쓰기도 한다.
〈고환이〉 지금 또다시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한다 하니 제가 형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그의 귀로를 끊고 싶습니다.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라고 하자, 경상이 그 말을 받아들여 鄕里의 백성들을 규합했는데 그 숫자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마침 고환이 沙苑에서 패해 돌아오자 경상과 경진이 무리들을 이끌고 그를 막아서 많은 무리들을 참수하거나 생포했고, 賀拔勝과 李弼이 河東에 이르자 경상과 경진이 여섯 縣 10여만 호를 이끌고 귀의하였다. 宇文泰가 경진을 平陽太守로 삼고 경상을 行臺郎中으로 삼았다.
東魏 秦州刺史 薛崇禮가 포판을 지키고 있었는데 別駕인 그의 族弟 薛善이 설숭례에게 말하기를, “고환이 임금을 축출한 죄가 있는데 저와 형이 衣冠을 입은 후예로서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입어오다가 지금 황실의 대군이 이미 가까이 와 있는데도 우리들이 고환을 위해 지키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성이 함락되어 우리들의 머리가 장안에 보내지고 역적이라 기록되면 죽어서도 부끄러움이 남을 것이니 지금이라도 귀의하면 그래도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설숭례가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자, 설선이 일가족과 함께 관문지기를 참수하고 서위의 병사들을 맞아들였다.
우문태가 포판에 진군하여 汾과 絳을 탈취하여 평정하고
注+③ ≪五代志≫에 의하면, “文城郡은 東魏 때에 南汾州를 설치했는데, 後周(北周) 때에 汾州로 바꿨다. 絳郡은 後魏(北魏) 때에 東雍州를 설치했는데 後周 때에 絳州로 바꿨다.” 하였다. 성문을 연 모의에 참여한 모든 薛氏들을 모두 五等의 작위를 하사하였다. 설선이 말하기를, “반역자들을 배반하고 군주에게 귀순한 것은 신하의 당연한 절의이니. 어떻게 모든 집안이 외람되이 책봉을 받는단 말인가.”라고 하고, 아우 薛愼과 함께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目
【目】 〈西魏의〉 獨孤信이 新安에 이르니 〈東魏의〉 髙敖曹가 병사를 이끌어 북쪽으로 黃河를 건넜고,
注+① 新安縣은 漢나라 때에는 弘農郡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河南尹에 속했는데 東魏 天平 초에 新安郡을 설치한 뒤 洛州에 예속시켰다. 독고신이 洛陽을 압박하자 洛州刺史 廣陽王 元湛이 성을 버리고 鄴城으로 되돌아가거늘 독고신이 결국 金墉城을 점령했다.
〈北魏〉 孝武帝가 서쪽으로 옮겨갔을 때 散騎常侍 裴寛이 아우들에게 이르기를, “천자가 이미 서쪽으로 가셨는데 우리가 동쪽으로 高氏에게 귀속될 수는 없다.”라고 하고 식구들을 이끌고 大石嶺으로 달아났다가 독고신이 낙양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산을 내려가 만났다.
注+② ≪水經注≫에 “洛陽 남쪽에 新城縣이 있고 신성현 경내에 大石嶺이 있는데 來儒의 물이 그 남쪽을 경유한다.” 하였다.
潁州長史 賀若統(하야통)이 성안의 모든 백성들을 이끌고 서위에게 투항하자 서위 都督 梁迥이 이를 점거하니, 梁州ㆍ滎陽ㆍ廣州가 모두 투항했다.
注+③ 魏收의 ≪魏書≫ 〈地形志〉를 살펴보면 “天平 초에 潁州를 설치했는데 長社城에 治所를 두고 許昌郡ㆍ潁川郡ㆍ陽翟郡을 거느렸으며, 武定 7년(549)에 鄭州로 개칭했다.” 하였다. 若는 음이 惹(야)이니, 賀若(하야)는 代北의 複姓이다. 魏收의 ≪魏書≫ 〈地形志〉를 살펴보면 “천평 초에 梁州를 설치하여 大梁城에 治所를 두고 陽夏郡ㆍ開封郡ㆍ陳留郡ㆍ汝南郡ㆍ潁川郡ㆍ汝陽郡ㆍ義陽郡ㆍ新蔡郡ㆍ初安郡ㆍ襄陽郡ㆍ城陽郡ㆍ廣陵郡을 거느렸다.” 하였다.
11월에 東魏 行臺 任祥이 潁川을 공격하자 宇文泰가 大都督 宇文貴에게 구원하게 했는데 제장들이 모두, “저들이 숫자가 많고 우리가 적어 예봉을 다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우문귀가 말하기를, “저들이, 우리들의 병사가 적어 반드시 진격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병력을 합쳐 영천을 공격하게 되면 潁川城이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지금 나아가 먼저 영천을 점거하면 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고, 또 불의에 출격하므로 반드시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결국 신속히 달려가 영천을 점거하고 성곽을 등지고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연합 작전으로 크게 격파하여 만여 명의 병사들을 사로잡았다가 모두 풀어주고,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동위 장군 是云寳가 陽州刺史를 살해하여 서위에 투항했다.
注+④ 魏收의 ≪魏書≫ 〈地形志〉를 살펴보면 “天平 초에 陽州를 설치하여 宜陽에 治所를 두고 宜陽郡ㆍ金門郡을 거느렸다.” 하였다. 서위 都督 韋孝寛이 豫州를 공격해 점령하고
注+⑤ 孝寬은 이름이 叔裕인데 字를 사용하였다. 荊州刺史 郭鸞이 東荊州를 공격했는데, 東荊州刺史 慕容儼이 밤낮으로 맞서 싸우며 2백여 일을 고전하다가 빈틈을 타고 출격하여 크게 격파하자, 당시 東魏의 黃河 남쪽 여러 州들이 대부분 지켜내지 못했지만 동형주만은 온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