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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20)

자치통감강목(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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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20)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梁大同三年이요 魏大統三年이요 東魏天平四年이라
魏主 下詔하여 數髙歡二十罪어늘 歡亦移檄하여 謂宇文泰斛斯椿 爲逆徒러니
至是하여 遣司徒髙敖曹하여 攻上洛하고 大都督竇泰攻潼關하고 而自將軍蒲坂하여 造三浮橋하여 欲度河어늘
魏宇文泰 軍廣陽注+① 魏收志 “景明元年, 置廣陽縣, 屬馮翊郡.”하고 謂諸將曰 賊 掎吾三面하고 作浮橋하여 以示必度하니 欲綴吾軍하여 使竇泰 得西入耳
屢勝而驕하니 襲之하면 必克하리니 克泰하면 則歡 不戰自走矣리라
諸將 皆曰 不如分兵禦之로라 宇文泰 曰 賊雖作橋 未能徑度리니 不過五日하여 吾取竇泰必矣라하니 蘇綽 達奚武 亦以爲然注+② 達奚, 代北複姓也, 本東胡種.이러라
宇文泰 還長安하여 隱其計하고 以問族子直事郎中深注+③ 晉武帝置直事郞, 在尙書諸曹郞之上.한대 曰 竇泰 歡之驍將이라 今大軍 攻蒲坂하면 則歡拒守하고 而泰救之리니 吾表裏受敵하여 此危道也
不如選輕銳하여 潜出小關注+④ 小關, 在潼關之左, 唐時謂之禁谷.하면 竇泰 躁急하여 必來决戰이요 持重하여 未即救하리니 我急撃하면 泰必可擒也 擒泰 則歡勢自沮 回師撃之하면 可以决勝하리라
宇文泰 喜曰 此吾心也라하고 乃聲言欲保隴右하고 而潜軍東出하니 竇泰 猝聞軍至하고 度河어늘 宇文泰 撃破之하여 士衆 皆盡하고 竇泰 自殺하니 髙歡 撤浮橋而退하다
敖曹 自商山轉鬪而進하여 所向無前이라 遂攻上洛注+① 杜佑曰 “商山, 在商州上洛縣.”할새
郡人泉岳 及弟猛略 與杜窋等으로 謀翻城應之注+② 泉, 姓也. 窋, 竹律․丁骨二切.러니 洛州刺史泉企 知之하고 殺岳及猛略注+③ 此魏太和中所改洛州也, 治上洛, 時屬西魏.하니 走歸敖曹어늘 敖曹 以爲鄉導하여 而攻之한대
固守旬餘 二子元禮仲遵 力戰하여 仲遵 傷目하고 城遂陷이러라 見敖曹하여 曰 吾力屈이요 非心服也라하다
敖曹 以杜窋 爲洛州刺史하고 欲遂入藍田關이라가 聞竇泰軍没하고 而還하여 以企及元禮 自随注+④ 唐志 “京兆藍田縣, 有藍田關, 故嶢關也.”어늘
私戒二子하여 曰 吾 餘生無幾 汝曹 才器足以立功이니 勿以吾故 遂虧臣節하라하다
元禮 逃還하여 與仲遵으로 陰結豪右하여 襲窋殺之어늘 以元禮 世襲洛州刺史하다
東魏郎中杜弼 以在位貪汚 請治之한대 曰 今督將家屬 多在關西注+⑤ 此指言可朱渾道元ㆍ俟普ㆍ劉豐生等部曲也.하여 宇文黑獺 常招誘之하니 人情 去留未定이요
江東 復有一吳翁蕭衍 專事衣冠禮樂하여 中原士大夫 望之以爲正朔所在하니 我若不相假借하면 恐督將 盡歸黑獺하고 士子悉奔蕭衍이라 人物 流散하면 何以爲國이리오 宜少待하라 吾不忘之로라
至是하여 將出兵拒魏할새 請先除内賊이어늘 問爲誰 曰 諸勲貴掠奪百姓者 是也로라
不應하고 使軍士 皆張弓注矢하고 擧刀按矟하여 夾道羅列하고 命弼冒出其間하니
戰慓流汗이어늘 乃徐諭之하여 曰 矢注不射하고 刀擧不擊하고 矟按不刺로도 爾猶亡魂失膽이어늘 況諸勲人 身犯鋒鏑하고 百死一生하니 雖或貪鄙 所取者大 豈可同之常人哉리오하니 頓首謝하다
每號令軍士할새 其語鮮卑 則曰 漢民 是汝奴 夫爲汝耕하고 婦爲汝織하고 輸汝粟帛하여 令汝温飽하니 汝何爲陵之오하고
其語華人 則曰 鮮卑 是汝作客이라 得汝一斛粟一匹絹하고 爲汝擊賊하여 令汝安寧하니 汝何爲疾之注+① 作客, 言如傭作之客也.리오하다
鮮卑 共輕華人하되 唯憚髙敖曹러라 號令將士 常鮮卑語라가 敖曹在列하면 則爲之華言이러라
敖曹 嘗詣相府할새 門者不納이어늘 敖曹 射之하되 知而不責이러라
夏六月 東魏 遣使如梁하다
東魏 遣散騎常侍李諧하여 聘于梁注+① 諧, 平之孫也.하니 梁主 與語 應對如流 因目送之注+② 以目瞻之訖其出也.하고 謂左右曰 卿輩 常言北間無人物이러니 此等 何自而來오하다
是時 南北通好하여 務以俊乂相誇 銜命接客 必盡一時之選注+③ 銜命, 奉使者也. 接客. 主客也.하니
每梁使 至鄴하면 鄴下 爲之傾動이라 宴日 髙澄 常使左右覘之하여 一言制勝하면 爲之拊掌이러니 魏使 至建康에도 亦然이러라
魏獨孤信 自梁歸于魏하다
獨孤信 求還北커늘 梁主許之러니 信父母 皆在山東注+① 魏孝武西遷, 信棄父母, 追從之.이라 梁主 問信所適한대 曰 事君者 不敢顧私親而懷二心이니이다하니 梁主 以爲義하여 禮送甚厚러라
與楊忠으로 皆至長安하니 以爲驃騎大將軍하고 宇文泰 愛忠之勇하여 留置帳下하다
秋八月 魏大丞相泰 伐東魏하여 克恒農하고 遣使하여 喩降河北城堡하다
魏宇文深 勸宇文泰하여 取恒農커늘 伐東魏하여 以于謹爲前鋒하여 拔恒農하다
河北諸城 多附東魏러니 左丞楊檦 請往説之注+① 左丞, 行臺左丞也. 檦, 與標同.하여 乃與土豪擧兵하여 収邵郡守令斬之하고 說諭東魏城堡하니 旬月之間 歸附甚衆注+② 五代志 “絳郡垣縣, 後魏置邵郡及白水縣.”이러라
梁主 修長干寺阿育王塔할새 出佛爪髪舍利 幸寺하여 設無礙食하고 大赦注+① 集覽 “長干寺, 今名天褘寺, 在金陵城南五里, 地名長干里. 阿育王塔在焉, 出佛爪髮舍利. 先是, 藏於塔中, 今出之, 而設齋焉.”하다
閏九月 以武陵王紀 爲益州刺史注+① 紀, 梁主子.하다
東魏 髙歡 將兵二十萬하여 趣蒲津하고 使髙敖曹 將兵三萬하여 出河南할새
關中하고 魏宇文泰所將 不滿萬人이라 屯恒農五十餘日이러니 聞歡將濟河하고 乃引兵入關하니 敖曹 遂圍恒農이러라
長史薛琡 言於歡曰 西人 連年飢饉이라 故冒死入陝州하여 欲取倉粟注+① 魏收志, 太和十一年, 置陝州, 治陝城, 帶恒農郡, 領西恒農․澠池․石城․河北郡.이어늘 今敖曹 已圍陝城하여 粟不得出하니
但置兵諸道하여 勿與野戰하고 比及麥秋하면 其民 自應餓死리니 寳炬黑獺 何憂不降이리오 願勿渡河라하고
侯景 曰 今兹擧兵 形勢極大하니 萬一不捷하면 猝難収斂이니 不如分爲二軍하여 相繼而進하여 前軍若勝하면 後軍 全力하고 前軍 若敗하면 後軍 承之라하되
不從하고 自蒲津으로 濟河하다 至馮翊하여 謂魏刺史王羆曰 何不降 大呼曰 此城 是王羆冡이니 欲死者인댄하라 知不可攻하고 乃渉洛하여 軍於許原西注+② 漢志 “馮翊懷德縣南有荊山, 山下有彊梁原, 洛水東南入渭.” 許原蓋在洛水之南.하다
至渭南하여 徵諸州兵하되 皆未會러니 欲進撃歡커늘 諸將 以衆寡不敵으로 請待歡更西하여 以觀其勢한대
曰 歡 若至長安하면 人情 大擾리니 今及其新至하여 可擊也라하고 即造浮橋於渭하여 令軍士 齎三日糧하고 輕騎度渭
十月 至沙苑하니 距東魏軍六十里注+① 水經注 “沙苑在渭北, 沙苑之南, 即漢懷德縣故城.” 諸將 皆懼하되 宇文深 獨賀曰 歡 鎭撫河北하여 甚得衆心이라 以此自守하면 未易可圖어늘
今懸師度河 非衆所欲이어늘 獨歡 恥失竇泰하여 愎諫而來하니 所謂忿兵이라 可一戰擒也
願假深一節하여 發王羆之兵하여 邀其走路하여 使無遺類리라하다
遣順昌公達奚武하여 覘歡軍하니 從三騎하되 皆效歡將士服하여 日暮 去營數百歩下馬하여 潜聽得其軍號하고 因上馬歷營 若警夜者하여 有不如法하면 往往撻之하여 具知敵之情狀하여 而還하다
聞泰至하고 引兵會之어늘 李弼 謂泰曰 彼衆我寡하여 不可平地置鎭이라 此東十里 有渭曲하니 可先據以待之라하니
從之하여 背水東西爲하고 李弼趙貴 爲左右拒하고 命將士하되 皆偃戈於葦中하여 約聞鼓聲而起注+② 拒, 陣名. 弼爲右拒, 趙貴爲左拒. 葦, 大葭也.하라하다
晡時 東魏兵어늘 斛律羌擧 曰 黑獺 擧國而來하여 欲一死决注+③ 言欲盡死力戰以決勝負. 渭曲 葺深土濘하여 無所用力하니 不如緩與相持하고 密分精銳하여 徑掩長安이니 巢穴 既傾이면 則黑獺 不戰成擒矣리라
曰 縱火焚之 何如 侯景 曰 當生擒黑獺하여 以示百姓이니 若燒死 誰復信之리오
彭樂 盛氣請鬪曰 我衆賊寡하니 何憂不克이리오하니 從之하다
東魏兵 望見魏兵少하고 爭進撃之하여 無復行列이어늘 鳴鼓하니 士皆奮起合戰하고 李弼等 帥鐡騎横撃之하니 東魏兵 中絶하여 遂大破之注+① 時東魏之師萃于左拒, 于謹等與之合戰, 李弼引右拒之騎兵橫擊之.하다
欲収兵更戰이나 衆已盡去러니 斛律金 曰 衆心離散하면 不可復用이니 宜急向河東이라하다 乃馳去夜度河하니 喪甲士八萬人 鎧仗十八萬이러라
追至河上하여 選留甲士二萬餘人하고 餘悉縱歸러라 李穆 曰 髙歡 破膽矣 速追之하면 可獲이라하되
不聽하고 還軍渭南이러니 所徵之兵 甫至어늘 乃於戰所 人種柳一株하여 以旌武功이러라
侯景 言於歡曰 黑獺 驟勝而驕하니 必不爲備 願得精騎二萬하여 徑得取之라커늘
以告婁妃한대 曰 設如其言이나 豈有還理리오 得黑獺하고 而失景하면 何利之有리오하니 乃止하다 髙敖曹 聞歡敗하고 釋恒農하고 退保洛陽하다
遣行臺王季海하여 與獨孤信으로 趣洛陽하고 李顯 趣三荆하고 賀拔勝李弼 圍蒲坂하다
髙歡之西伐也 蒲坂民敬珍 謂其從祖兄祥曰注+① 敬, 姓也. 髙歡 迫逐乗輿어늘 天下忠義之士 皆欲倳刃於其腹注+② 倳, 側吏切, 揷刃也. 或作剚.하니
今又稱兵西上하니 吾欲與兄起兵하여 斷其歸路하노니 千載一時也라하니 從之하여 糾合鄉里하니 有衆萬餘러라
自沙苑敗歸어늘 祥珍 帥衆邀之하여 斬獲甚衆하고 賀拔勝李弼 至河東이어늘 祥珍 帥六縣十餘萬戸하여 歸之하니 宇文泰 以珍爲平陽太守하고 祥爲行臺郎中하다
東魏秦州刺史薛崇禮 守蒲坂할새 其族弟善 爲别駕하여 言於崇禮曰 髙歡 有逐君之罪어늘 善與兄 忝衣冠緒餘하여 世荷國恩이라가 今大軍已臨하되 而猶爲歡守하니 一旦城陷하여 送首長安하고 署爲逆賊하면 死有餘愧리니 及今歸欵하면 猶爲愈也라하되
崇禮 猶豫不决이어늘 與族人으로 斬關納魏師하니
宇文泰 進軍蒲坂하여 略定汾絳注+③ 五代志 “文城郡, 東魏置南汾州, 後周改爲汾州. 絳郡, 後魏置東雍州, 後周改爲絳州.”하고 凡薛氏預開城之謀者 皆賜五等爵한대 曰 背逆歸順 臣子常節이어니 豈容闔門俱叨封邑이리오하고 與其弟愼으로 固辭不受하다
魏取洛陽豫州하니 潁梁廣陽等州 皆降하다
獨孤信 至新安하니 髙敖曹 引兵北度河注+① 新安縣, 漢屬弘農郡, 晉屬河南尹, 魏天平初置新安郡, 屬洛州.하고 逼洛陽하니 洛州刺史廣陽王湛 棄城歸鄴이어늘 遂據金墉城하다
孝武之西遷也 散騎常侍裴寛 謂諸弟曰 天子既西하시니 吾不可以東附髙氏라하고 帥家屬하여 逃於大石嶺이러니 聞信入洛하고 乃出見之注+② 水經注 “洛陽之南有新城縣, 縣界有大石嶺, 來儒之水逕其南.”러라
潁州長史賀若統 擧城降魏어늘 魏都督梁 入據之하니 梁州滎陽廣州 皆降注+③ 魏收志 “天平初置潁州, 治長社城, 領許昌ㆍ潁川ㆍ陽翟郡, 武定七年, 改爲鄭州.” 若, 音惹. 賀若, 代北複姓. 魏收志 “天平初, 置梁州, 治大梁城, 領陽夏․開封․陳留․汝南․潁川․汝陽․義陽․新蔡․初安․襄陽․城陽․廣陵郡.”이러라
十一月 東魏行臺任祥 攻潁川이어늘 宇文泰 使大都督宇文貴 救之러니 諸將 咸以爲彼衆我寡 不可爭鋒이라한대
曰 彼謂吾兵少하여 必不敢進이라하여 合攻潁川하면 城必危矣리니 今進據頴川하면 有城可守 又出其不意 破之必矣라하고
遂疾趨據潁川하고 背城爲陳하여 以待其至하여 合戰大破之하여 俘其士卒萬餘人하여 悉縱之하고 乗勝追擊하여 大敗之하니
東魏將是云寳 殺其陽州刺史하여 以降注+④ 魏收志 “天平初置陽州, 治宜陽, 領宜陽ㆍ金門郡.”하다 魏都督韋孝寛 攻豫州拔之注+⑤ 孝寬, 名叔裕, 以字行.하고 荆州刺史郭鸞 攻東荆州러니 刺史慕容儼 晝夜拒戰二百餘日이라가 乗間出撃하여 大破之하니 東魏河南諸州 多失守하되 喩東荆州 獲全하다
東魏濮陽陽平盗起어늘 濟州刺史髙季式 討平之하다
東魏濮陽民 爲盗어늘 濟州刺史髙季式 討擒之하고 又撃陽平賊하여 平之한대
或謂季式曰 盗不侵境이어늘 而使私軍遠戰이라가 萬一失利하면 豈不獲罪乎注+① 季式所自養部曲, 不衣食於官, 故謂之私軍.
季式 曰 君何言之不忠也 我與國家 同安共危어니 以此獲罪라도 亦無所恨이로다


梁나라 高祖 武帝 萧衍 大同 3년이고 西魏 文帝 元寳炬 大統 3년이고 東魏 孝靜帝 元善見 天平 4년이다.
【綱】 봄 정월에 東魏 大丞相 高歡이 西魏를 침공하자 서위 대승상 宇文泰가 격파하고 동위의 장군 竇泰를 죽였다. 고환의 别將이 서위의 洛州를 습격하여 刺史 泉企를 붙잡았다.
【目】 예전에 魏主(西魏 文帝)가 조칙을 내려 高歡의 20가지 죄를 거론하자, 고환 역시 檄文을 내어 이르기를, “宇文泰와 斛斯椿이 반역의 무리가 되었다.”라고 했다.
이때에 와서 고환이 司徒 髙敖曹를 보내 上洛을 공격하고 大都督 竇泰에겐 潼關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蒲坂에서 군사를 이끌고서 세 개의 浮橋를 만들어 黃河를 건너려 했다.
西魏 우문태가 廣陽에 주둔하고注+① 魏收의 ≪魏書≫ 〈地形志〉를 살펴보면 “景明 원년(500)에 廣陽縣을 설치했으며 馮翊郡에 속하였다.” 하였다. 諸將들에게 이르기를, “적들이 우리의 삼면을 견제하고 浮橋를 만들어 반드시 黃河를 건널 것임을 보이고 있으니, 이는 우리 군대를 끌어들여, 두태를 서쪽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浮橋浮橋
두태가 여러 차례 승리하여 교만해져 있으니 그를 습격하면 반드시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 두태를 물리치면 고환은 싸우지 않고도 저절로 달아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제장들이 모두, “병사를 나눠 방어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자, 우문태가 말하기를, “적들이 浮橋를 만든다 해도 곧장 건널 수는 없을 것이니, 5일이 안 돼서 내가 반드시 두태를 붙잡고 말 것이다.”라고 하니 蘇綽과 達奚武가 역시 동의를 표했다.注+② 達奚는 代北의 複姓이며 원래 東胡의 종족이었다.
우문태가 長安으로 돌아와 그 계책을 숨긴 채 조카 直事郎中 宇文深에게 계책을 묻자,注+③ 晉 武帝가 直事郞을 설치했는데 尙書省 여러 曹의 郞의 위에 있다. 우문심이 말하기를, “두태는 髙歡의 용맹한 장수입니다. 지금 대군이 蒲坂을 공격하면 고환이 이를 방어하고 두태가 구원하러 올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안팎으로 공격을 받아서 위험한 길입니다.
따라서 정예 병사를 선발해서 조용히 小關으로 나가게 되면注+④ 小關은 潼關 왼쪽에 있으며 唐나라 때 禁谷이라 했다. 두태가 조급해져 반드시 와서 결전을 벌일 것이고, 고환은 신중하여 바로 구제하지 않을 것이니, 우리가 서둘러 공격하면 두태를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고, 두태를 사로잡으면 고환의 기세는 저절로 꺾일 것이고, 이때 군사를 되돌려 공격하면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우문태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라고 하고, 겉으로는 隴右를 지키려 한다고 소문을 내고 조용히 군사를 동쪽으로 보냈다. 두태가 갑자기 군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황하를 건너자, 우문태가 이를 격파하여 병사들이 모두 전멸했고 두태도 자살하니, 고환이 부교를 철거하고 퇴각했다.
【目】 髙敖曹가 商山에서 떠돌며 전투를 벌여 전진하여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어서 결국 上洛까지 침공했다.注+① 杜佑가 말하기를, “商山은 商州 上洛縣에 있다.”
上洛郡 출신 泉岳과 그의 아우 泉猛略이 杜窋 등과 함께 城을 뒤엎어 호응할 것을 도모했었는데,注+② 泉은 姓이다. 窋은 竹律과 丁骨의 두 가지 切이다. 洛州刺史 泉企가 이 사실을 알고 천악과 천맹략을 죽이자注+③ 이것은 北魏 太和 연간에 개칭한 洛州이니, 上洛을 治所로 삼았다. 당시에 西魏에 속했다. 두줄이 도주하여 고오조에게 투항하거늘 고오조가 그를 鄕導로 삼아 상락을 공격했다.
천기가 열흘 동안 굳게 지킬 때 두 아들 泉元禮와 泉仲遵이 온 힘을 다해 싸웠는데, 천중준이 눈을 잃었고 결국 성이 함락되었다. 천기가 고오조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힘이 부족한 것일 뿐 마음속으로 굴복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고오조가 두줄을 洛州刺史로 삼고 결국 藍田關으로 들어가려 하다가 竇泰의 군사가 몰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와서 천기와 천원례에게 수행하게 했다.注+④ ≪新唐書≫ 〈地理志〉에 의하면, “京兆의 藍田縣에 藍田關이 있는데 옛 嶢關이다.”라고 하였다.
천기가 사사로이 두 아들에게 경계의 말을 전하기를, “나는 남은 삶이 얼마 되지 않으나 너희들은 才能과 器局이 공을 세울 만하니 나 때문에 끝내 신하의 節義를 망가뜨리지 말라.”고 했다.
천원례가 도망해 돌아와서 천중준과 함께 남몰래 명문 귀족들과 친교를 맺어, 두줄을 습격해 죽이자, 西魏가 천원례에게 洛州刺史를 世襲하게 했다.
東魏 郎中 杜弼이 관직에 있으면서 탐욕과 오욕을 일삼는 자들을 처벌하자고 요청하자, 髙歡이 말하기를, “지금 都督과 將軍의 가속들이 대부분 西魏의 關西 지역에 있어서注+⑤ 이것은 可朱渾道元ㆍ万俟普ㆍ劉豐生 등의 部曲을 지칭한다. 宇文黑獺(宇文泰)이 항상 그들을 불러 잘 달래고 있는데, 이들이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요,
江東의 吳 땅에 蕭衍이라는 원로가 있는데 衣冠과 禮樂을 중시하여 中原 士大夫들이 이 있는 곳처럼 추앙하고 있으니, 내가 그들을 용인하지 않으면 도독과 장군들이 모두 우문흑달에게 돌아가고 사대부들이 모두 소연에게 귀의할까 우려되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면 어떻게 국가를 다스리겠소.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가 잊지는 않을 것이오.”라고 했다.
이때에 이르러 병사들을 이끌고 西魏를 막으려 할 때 두필이 내부의 적을 먼저 제거할 것을 요청하자, 고환이 “그가 누구요?”라고 묻자, 두필이, “勳貴 가운데 백성을 약탈한 자들이 그들입니다.”라 하니,
고환이 대답하지 않고 군사들을 시켜 모두 화살을 장전한 채 활을 당기고 칼을 들고 창을 치켜들은 채 길가에 나열하게 하고 두필에게 그 사이를 걷게 했다.
두필이 두려움에 떨며 땀을 흘리자, 고환이 조용히 타이르기를, “화살을 장전한 채 쏘지 않고 칼을 든 채 공격하지 않고 창을 든 채 찌르지 않는 것만으로 그대가 넋을 잃고 간담이 써늘하거늘, 하물며 勳臣들은 몸소 적의 칼날에 맞서고 수많은 죽음 속에서 살아왔으니 탐욕과 비루한 행동을 했다 해도 취해야 할 것은 그 장점인데 어떻게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볼 수 있겠소.”라고 하니, 두필이 머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目】 髙歡이 군사들에게 號令을 내릴 때, 鮮卑族에게 말할 경우는 “漢나라 사람이 너희의 종이다. 남자는 너희를 위해 경작하고 여인은 너희를 위해 베 짜며 너희에게 곡식과 옷감을 보내어 너희로 하여금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를 부르게 하니 너희가 어찌 그들을 무시할 것이겠는가.”라고 하고,
漢族에게 이야기할 경우는 “鮮卑는 너희의 객이다. 너희로부터 곡식과 비단을 얻고 너희를 위해 적을 공격하여 너희를 편안하게 하니 너희가 어찌 그들을 미워할 것이겠는가.”라고 했다.注+① ‘作客’은 고용하는 객과 같다는 말이다.
당시 선비족이 모두 한족을 경시했지만 오직 髙敖曹만은 두려워했다. 고환이 장수와 군사들에게 호령할 땐 늘 선비족 말을 사용하다가도 고오조가 대열 안에 있으면 한족 말을 썼다.
고오조가 일찍이 丞相府에 찾아갔을 때 수위가 들이지 않자, 고오조가 그를 활로 쏘았지만 고환이 이를 알고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綱】 여름 6월에 東魏가 梁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目】 東魏가 散騎常侍 李諧를 梁나라에 보내니,注+① 李諧는 李平의 손자이다. 梁主(蕭衍)가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 물 흐르는 것처럼 대답했다. 그를 전송할 때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며注+② 〈‘目送之’는〉 다 나갈 때까지 바라보는 것이다.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경들은 언제나 ‘북쪽 지역엔 인물이 없다.’라고 하더니 이런 사람은 어디서 온 것인가.”라고 했다.
당시 南北이 우호를 맺어 왕래할 때, 저마다 빼어난 인물들을 내세워 자랑하려 들었다. 사신을 나가거나 사신을 접대할 때 반드시 당대의 인물을 최대한 선정했다.注+③ ‘銜命’은 사행 일을 맡은 사람이다. ‘接客’은 主客(빈객을 영접하는 일을 맡은 자)이다.
양나라 사신이 鄴城에 이르면 업성이 발칵 뒤집혀 연회를 베풀 때면 髙澄이 늘 주변 사람을 보내 이를 지켜보게 해서, 한마디 말로 상대 사신을 제압하면 손뼉을 쳤다. 東魏 사신이 建康에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綱】 西魏의 獨孤信이 梁나라에서 서위로 돌아왔다.
【目】 獨孤信이 북방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梁主(蕭衍)가 허락했다. 독고신의 부모가 모두 山東에 있어注+① 北魏 孝武帝가 서쪽으로 옮길 때, 獨孤信이 부모를 버리고 따라갔다. 梁主가 독고신에게 〈東魏와 西魏 중〉 어디로 갈지를 묻자 독고신이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자는 감히 사적인 부모를 생각하며 두 마음을 품어선 안 됩니다.”고 하니 梁主가 신의가 있다고 하며 많은 예물로 전송했다.
독고신이 楊忠과 함께 長安에 오자 西魏가 驃騎大將軍으로 삼고, 宇文泰가 양충의 용맹을 아껴서 자기 주변에 두었다.
【綱】 가을 8월에 西魏 大丞相 宇文泰가 東魏를 정벌하여 恒農에서 승리하고, 河北의 城과 堡들에 사신을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目】 西魏 宇文深이 宇文泰에게 恒農을 탈취할 것을 권유하자, 우문태가 東魏를 정벌하며 于謹을 선봉으로 삼아 항농을 함락했다.
당시 河北의 여러 성들이 대부분 동위에 귀속되어 있었는데, 左丞 楊檦가 그곳으로 가서 그들을 달래겠다고 하여,注+① 左丞은 行臺左丞이다. 檦는 標와 같다. 그곳 토호들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邵郡의 太守와 縣令들을 붙잡아 참수하고, 이어서 동위 각 城과 堡들을 찾아가 달래자, 한 달 무렵에 많은 성들이 귀의했다.注+② ≪五代志≫를 살펴보면 “絳郡 垣縣에 後魏(北魏)가 邵郡과 白水縣을 설치했다.” 하였다.
【綱】 梁나라가 長干塔을 수리했다.
【目】 梁主(蕭衍)가 長干寺의 阿育王塔을 수리할 때 부처의 손톱, 머리카락, 舍利가 나오자 절을 찾아가 을 거행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注+① ≪資治通鑑綱目集覽≫에 의하면, “長干寺는 지금의 天褘寺이며 金陵城 남쪽 5리쯤에 있다. 지명이 長干里인데 阿育王塔이 존재하며 부처의 손톱, 머리카락, 舍利가 나왔다. 이전에 이것이 탑 안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지금 출현해서 공양을 베푼 것이다.” 하였다.
【綱】 윤9월에 梁나라가 武陵王 蕭紀를 益州刺史로 삼았다.注+① 蕭紀는 梁主(蕭衍)의 〈여덟째〉 아들이다.
【綱】 東魏 大丞相 高歡이 西魏를 침략했는데 겨울 10월에 서위 大丞相 宇文泰가 渭曲에서 맞아 싸워 크게 패퇴시켰다.
【目】 東魏 髙歡이 20만 병사를 이끌고서 蒲津으로 향하고 髙敖曹를 시켜서 3만의 병사를 이끌고 황하 이남으로 가게 했다.
당시 關中에 기근이 들고 西魏 宇文泰가 거느린 병사들이 1만 명이 안 된 채 恒農에 50여 일 동안 주둔해 있었는데, 고환이 머지않아 황하를 건넌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들을 이끌고 관중으로 들어가자, 고오조가 결국 항농을 포위했다.
長史 薛琡이 고환에게 말하기를, “서위 사람들이 해를 이어 기근이 들었으므로 목숨을 무릅쓰고 陝州로 들어가 창고 곡식을 탈취하려고 했는데,注+① 魏收의 ≪魏書≫ 〈地形志〉를 살펴보면 太和 11년(487)에 陝州를 설치하여 陝城에 治所를 두고 恒農郡을 兼有하고, 西恒農郡ㆍ澠池郡ㆍ石城郡ㆍ河北郡을 관할하였다. 지금 고오조가 이미 섬주를 포위하여 곡식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길에 병사들만 배치하여 野戰을 벌이지 않은 채로 麥秋(음력 4, 5월)까지 가게 되면 그 백성들이 저절로 굶어 죽을 터인데, 元寳炬와 宇文黑獺(宇文泰)이 항복하지 않을 것을 어찌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디 황하를 건너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하고,
侯景이 말하기를, “지금 이 출병은 규모가 대단히 큰데 만에 하나 승리하지 못하면 대번에 수습하기 어려울 것이니, 군대를 前軍과 後軍 둘로 나눠 전진하여 전군이 승리하면 후군이 온 힘을 다하고, 전군이 실패하면 후군이 그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했으나, 고환이 따르지 않고 포진에서 황하를 건넜다.
고환이 馮翊에 이르러 서위의 刺史 王羆에게 이르기를,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하자, 왕비가 큰 소리로 외치기를, “이 城은 나 왕비의 무덤이니 죽고 싶으면 오라.”라고 하니 고환이 공격할 수 없음을 알고 洛水를 건너 許原 서쪽에 주둔했다.注+② ≪漢書≫ 〈地理志〉에 의하면, “馮翊 懷德縣 남쪽에 荊山이 있고 산 아래에 彊梁原이 있는데, 洛水가 동남쪽으로 흘러 渭水로 들어간다.”라고 했는데, 許原은 洛水 남쪽에 있는 것이다.
우문태가 渭水 남쪽에 이르러 여러 州에 병사들을 징발했으나 모두 모이지 않았다. 고환을 공격하려 하자, 제장들이 衆寡不敵이라는 이유를 들어 고환이 다시 서쪽으로 가는 것을 기다렸다 그 형세를 관망하자고 하니,
우문태가 말하기를, “고환이 만일 長安에 도착하면 人情이 크게 요동칠 것이니 지금 막 도착할 즈음에 공격해야 한다.”라고 하고, 곧바로 위수에 浮橋를 만들어 군사들에게 3일 치 양식만 휴대하게 한 뒤 輕騎兵을 이끌고 위수를 건넜다.
【目】 10월에 沙苑에 이르니 東魏 군사와의 거리가 60리였다.注+① ≪水經注≫에, “沙苑은 渭水 북쪽에 있으니 사원 남쪽은 바로 漢나라 懷德縣의 古城이다.” 하였다. 諸將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지만 宇文深만 홀로 〈宇文泰에게〉 축하하며 말하기를, “髙歡이 河北 지역을 안정시켜 민심을 크게 얻었으니, 이것으로 자신을 지킨다면 쉽게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孤軍을 이끌고 黃河를 건너는 것은 뭇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닌데 고환만 竇泰를 잃은 것을 수치로 여겨 다른 사람의 諫言을 물리치고 왔으니, 이것은 이른바 ‘분노하여 일으킨 군사’이므로 한 번 싸움으로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 兵符 하나를 내주시어, 王羆의 병사들을 출동시켜, 고환의 퇴로에서 그들을 막아서서 하나도 놓치는 것이 없게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우문태가 順昌公 達奚武를 보내 고환의 군사를 정탐하게 하였다. 달해무가 세 명의 기병을 대동했는데 모두 고환의 병사 복장을 했다. 저물 무렵 고환의 군영에서 백 보 쯤 떨어진 곳에서 말에서 내려 조용히 적들의 口令을 훔쳐 듣고, 이어서 말에 올라 마치 밤에 경계 임무를 담당하는 사람처럼 군영을 돌아다니다 군법을 어기는 자가 발견되면 이따금 매질도 해가며 적들의 정세를 모두 탐지하여 돌아왔다.
고환이 우문태가 왔다는 말을 듣고 병사들을 한곳으로 모을 때, 李弼이 우문태에게 말하기를, “저들은 숫자가 많고 우리는 부족하여 평지에서 鎭을 설치할 수가 없습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渭曲이 있는데 이곳을 먼저 점거하여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하자,
우문태가 그 말을 따라 물을 등지고 동서로 陣을 치고 李弼과 趙貴를 좌우 로 삼고 將士들에게 명하여 모두 갈대 속에서 창을 눕히고 있다가 북소리를 들으면 곧장 일어서 나오도록 약속했다.注+② 拒는 陣의 이름인데 李弼이 右拒가 되고 趙貴가 左拒가 된 것이다. 葦는 큰 갈대이다.
저녁 무렵 동위 병사들이 이르자, 斛律羌擧가 이르기를, “宇文黑獺(우문태)이 온 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결전을 벌이려 하는데注+③ 〈‘欲一死決’은〉 죽을힘을 다해 싸워 승부를 겨룬다는 말이다. 위곡 지역은 갈대숲이 깊고 진흙땅이어서 힘을 펼칠 수가 없으니, 우선 저들과 대치하지 말고 조용히 정예 부대를 조직해 곧장 長安을 엄습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렇게 본거지가 무너지고 나면 우문흑달은 싸우지 않고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고환이 말하기를, “불을 질러 태워버리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자, 侯景이 말하기를, “우문흑달을 생포해서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니, 만일 불에 태워 죽인다면 누가 이를 믿겠습니까.”라고 하니,
彭樂이 기세를 떨치며 싸우자고 하기를, “숫자가 우리가 많고 적들이 적은데 무찌르지 못할 걸 어찌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고환이 이를 따랐다.
【目】 東魏 병사들은 西魏 병사가 적은 것을 보고 앞다퉈서 진격하며 대오가 헝클어지자, 宇文泰가 북을 울리니 사졸들이 모두 일어나 싸움을 벌였고, 李弼 등이 鐵騎를 이끌고 적진의 옆구리를 공격하니 동위 병사들은 중간이 단절되어 결국 크게 격파되었다.注+① 이때 東魏 병사가 左拒에 모이자 于謹 등이 싸움을 벌였는데 李弼이 右拒의 騎兵을 이끌고 적의 옆구리를 공격한 것이다.
髙歡이 병사들을 수습해 다시 싸우려 했으나 무리들이 이미 전부 가버렸다. 斛律金이 이르기를, “뭇사람의 마음이 떠나버리면 더 이상 쓸 수가 없으니 속히 河東으로 가야 합니다.”라고 했다. 고환이 길을 내달려 밤중에 黃河를 건넜는데, 전투에서 8만의 甲士와 18만 건의 병장기를 잃었다.
우문태가 황하 언덕까지 추격하여 2만여 명의 갑사들을 골라 남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아가게 했다. 李穆이 말하기를, “고환이 간담이 무너졌으니 속히 추격하면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지만
우문태가 듣지 않고 물러나 渭南에 병사를 주둔했다. 징발했던 병사가 막 이르자 전투를 벌였던 곳에 사람마다 버드나무 한 그루씩 심게 해서 그들의 武功을 기념했다.
侯景이 高歡에게 말하기를, “宇文黑獺(우문태)이 갑자기 승리한 탓에 교만해져 반드시 대비하지 않을 것이니 정예병 2만을 이끌고 곧장 무찌르겠습니다.”라고 하거늘,
고환이 이를 婁妃에게 묻자, 누비가 말하기를, “설령 그의 말대로 된다 해도 후경이 돌아올 리 있겠습니까. 우문흑달을 얻고 후경을 잃으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고환이 그 계책을 저지했다. 髙敖曹는 고환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恒農을 포기하고 퇴각하여 洛陽을 지켰다.
【綱】 西魏 大丞相 宇文泰가 東魏를 정벌하자 동위 秦州가 항복하였다. 우문태가 결국 汾과 絳을 평정했다.
【目】 西魏가 行臺 王季海에게 獨孤信과 함께 洛陽으로 가게 하고, 李顯은 三荆으로 가게 하고, 賀拔勝과 李弼은 蒲坂을 포위하게 했다.
髙歡이 西魏를 정벌할 때 포판의 백성 敬珍이 그의 從祖兄 敬祥에게 이르기를,注+① 敬은 姓이다. “고환이 皇上(北魏 孝武帝 元脩)을 축출하자 천하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사들이 모두 그의 뱃속에 칼날을 찌르고 싶어 합니다.注+② 倳는 側吏의 切이니 칼을 꽂는 것이다. 혹은 剚로 쓰기도 한다.
〈고환이〉 지금 또다시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한다 하니 제가 형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그의 귀로를 끊고 싶습니다.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라고 하자, 경상이 그 말을 받아들여 鄕里의 백성들을 규합했는데 그 숫자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마침 고환이 沙苑에서 패해 돌아오자 경상과 경진이 무리들을 이끌고 그를 막아서 많은 무리들을 참수하거나 생포했고, 賀拔勝과 李弼이 河東에 이르자 경상과 경진이 여섯 縣 10여만 호를 이끌고 귀의하였다. 宇文泰가 경진을 平陽太守로 삼고 경상을 行臺郎中으로 삼았다.
東魏 秦州刺史 薛崇禮가 포판을 지키고 있었는데 別駕인 그의 族弟 薛善이 설숭례에게 말하기를, “고환이 임금을 축출한 죄가 있는데 저와 형이 衣冠을 입은 후예로서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입어오다가 지금 황실의 대군이 이미 가까이 와 있는데도 우리들이 고환을 위해 지키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성이 함락되어 우리들의 머리가 장안에 보내지고 역적이라 기록되면 죽어서도 부끄러움이 남을 것이니 지금이라도 귀의하면 그래도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설숭례가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자, 설선이 일가족과 함께 관문지기를 참수하고 서위의 병사들을 맞아들였다.
우문태가 포판에 진군하여 汾과 絳을 탈취하여 평정하고注+③ ≪五代志≫에 의하면, “文城郡은 東魏 때에 南汾州를 설치했는데, 後周(北周) 때에 汾州로 바꿨다. 絳郡은 後魏(北魏) 때에 東雍州를 설치했는데 後周 때에 絳州로 바꿨다.” 하였다. 성문을 연 모의에 참여한 모든 薛氏들을 모두 五等의 작위를 하사하였다. 설선이 말하기를, “반역자들을 배반하고 군주에게 귀순한 것은 신하의 당연한 절의이니. 어떻게 모든 집안이 외람되이 책봉을 받는단 말인가.”라고 하고, 아우 薛愼과 함께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綱】 西魏가 洛陽과 豫州를 취하자 潁州ㆍ梁州ㆍ廣州ㆍ陽州 등이 모두 항복했다.
【目】 〈西魏의〉 獨孤信이 新安에 이르니 〈東魏의〉 髙敖曹가 병사를 이끌어 북쪽으로 黃河를 건넜고,注+① 新安縣은 漢나라 때에는 弘農郡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河南尹에 속했는데 東魏 天平 초에 新安郡을 설치한 뒤 洛州에 예속시켰다. 독고신이 洛陽을 압박하자 洛州刺史 廣陽王 元湛이 성을 버리고 鄴城으로 되돌아가거늘 독고신이 결국 金墉城을 점령했다.
〈北魏〉 孝武帝가 서쪽으로 옮겨갔을 때 散騎常侍 裴寛이 아우들에게 이르기를, “천자가 이미 서쪽으로 가셨는데 우리가 동쪽으로 高氏에게 귀속될 수는 없다.”라고 하고 식구들을 이끌고 大石嶺으로 달아났다가 독고신이 낙양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산을 내려가 만났다.注+② ≪水經注≫에 “洛陽 남쪽에 新城縣이 있고 신성현 경내에 大石嶺이 있는데 來儒의 물이 그 남쪽을 경유한다.” 하였다.
潁州長史 賀若統(하야통)이 성안의 모든 백성들을 이끌고 서위에게 투항하자 서위 都督 梁迥이 이를 점거하니, 梁州ㆍ滎陽ㆍ廣州가 모두 투항했다.注+③ 魏收의 ≪魏書≫ 〈地形志〉를 살펴보면 “天平 초에 潁州를 설치했는데 長社城에 治所를 두고 許昌郡ㆍ潁川郡ㆍ陽翟郡을 거느렸으며, 武定 7년(549)에 鄭州로 개칭했다.” 하였다. 若는 음이 惹(야)이니, 賀若(하야)는 代北의 複姓이다. 魏收의 ≪魏書≫ 〈地形志〉를 살펴보면 “천평 초에 梁州를 설치하여 大梁城에 治所를 두고 陽夏郡ㆍ開封郡ㆍ陳留郡ㆍ汝南郡ㆍ潁川郡ㆍ汝陽郡ㆍ義陽郡ㆍ新蔡郡ㆍ初安郡ㆍ襄陽郡ㆍ城陽郡ㆍ廣陵郡을 거느렸다.” 하였다.
11월에 東魏 行臺 任祥이 潁川을 공격하자 宇文泰가 大都督 宇文貴에게 구원하게 했는데 제장들이 모두, “저들이 숫자가 많고 우리가 적어 예봉을 다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우문귀가 말하기를, “저들이, 우리들의 병사가 적어 반드시 진격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병력을 합쳐 영천을 공격하게 되면 潁川城이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지금 나아가 먼저 영천을 점거하면 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고, 또 불의에 출격하므로 반드시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결국 신속히 달려가 영천을 점거하고 성곽을 등지고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연합 작전으로 크게 격파하여 만여 명의 병사들을 사로잡았다가 모두 풀어주고,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동위 장군 是云寳가 陽州刺史를 살해하여 서위에 투항했다.注+④ 魏收의 ≪魏書≫ 〈地形志〉를 살펴보면 “天平 초에 陽州를 설치하여 宜陽에 治所를 두고 宜陽郡ㆍ金門郡을 거느렸다.” 하였다. 서위 都督 韋孝寛이 豫州를 공격해 점령하고注+⑤ 孝寬은 이름이 叔裕인데 字를 사용하였다. 荊州刺史 郭鸞이 東荊州를 공격했는데, 東荊州刺史 慕容儼이 밤낮으로 맞서 싸우며 2백여 일을 고전하다가 빈틈을 타고 출격하여 크게 격파하자, 당시 東魏의 黃河 남쪽 여러 州들이 대부분 지켜내지 못했지만 동형주만은 온전했다.
【綱】 東魏의 濮陽ㆍ陽平에 도적들이 일어나자, 濟州刺史 髙季式이 토벌하여 평정했다.
【目】 東魏의 濮陽 백성들이 도적이 되자 濟州刺史 髙季式이 토벌하여 생포하고, 또다시 陽平의 도적까지 공격하여 평정했다.
혹자가 고계식에게 이르기를, “도적들이 경내를 침범하지 않는데도 私軍을 동원해 먼 길 전쟁을 벌였다가 만에 하나 실패하면 어찌 죄를 얻지 않겠는가?”라고 하자,注+① 高季式이 스스로 키우는 部曲이 官으로부터 옷과 음식을 제공받지 않았으므로 ‘私軍’이라 이른 것이다.
고계식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不忠을 이야기하는가. 나는 국가와 그 안위를 함께하고 있으니, 이 일 때문에 죄를 얻더라도 아무 여한이 없다.”라고 했다.


역주
역주1 東魏大丞相歡侵魏……執其刺史泉企 : “西魏에서 高歡의 20가지 죄를 거론하였는데 어찌하여 ‘討’라고 기록하지 않았는가. 宇文泰 역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일 뿐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魏主(元寶炬)가 고환의 죄를 거론하였는데 허물을 우문태에게 돌리는 것이 옳은가.’하니, 이에 답변하기를 ‘魏主는 임금(元脩)을 시해한 자(우문태)에게 세워지고 그것을 받아들여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이 사람 역시 임금을 시해한 사람이다. 더구나 이때 국가 명령이 우문태의 손에 있었으니 어떻게 魏君으로 명분을 삼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문태가 고환을 토벌할 수 없는 것은 마치 고환이 우문태를 토벌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사실은 그 죄가 균등하다.’고 하였다. 이것이 ≪資治通鑑綱目≫에서 曲直을 나누지 않고 으레 서로 공벌한 것으로 기록한 이유이다.[魏數歡罪二十 何以不書討 泰亦弑君之賊爾 或曰 魏主數歡之罪 而歸咎於泰 可乎 曰 魏主爲弑君者所立 受之而不討賊 是亦弑君之人也 況是時國命在於泰手 何得以魏君爲名哉 故凡泰之不能討歡 猶歡之不能討泰 其實厥罪惟均 此綱目之所以不分曲直 例以交伐書之也]” ≪發明≫
역주2 正朔 : 새해를 맞아 帝王이 반포하는 달력으로, 正朔의 소재는 곧 세상의 중심을 의미한다.
역주3 (方)[万] : 저본에는 ‘方’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万’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梁修長干塔 : “절을 지은 것을 많이 기록하였으나 塔을 수리한 것은 없었다. 탑을 수리한 것을 기록한 것은 나무란 것이다. 탑을 수리한 것을 기록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탑을 지은 것을 기록한 것은 2번인데(이해(537), 병인년(546)) 모두 梁나라이다.[書作寺多矣 未有書修塔者 書修塔 譏也 書修塔始此 終綱目書作塔二(是年 丙寅年) 皆梁也]” ≪書法≫
역주5 無礙食 : 無遮會, 無碍會라고 한다. 聖凡, 道俗, 귀천, 상하 따위의 구별 없이 일체 평등으로 財施와 法施를 행하는 대법회이다.
역주6 東魏大丞相歡……大敗之 : “‘맞아 싸웠다[迎戰]’라고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인정해준 것이다. 그러므로 周瑜에게 ‘맞아 싸웠다[迎擊]’라고 기록했고(漢 獻帝 建安 13년(208)), 張悌에게 ‘맞아 싸웠다[迎戰]’라고 기록했고(晉 武帝 太康 원년(280)), 宇文泰에게 ‘맞아 싸웠다[迎戰]’라고 기록했으니(이해(537)), 모두 인정해준 것이다.[迎戰何 予之也 是故周瑜書迎擊(漢獻帝建安十三年) 張悌書迎戰(晉武帝太康元年) 宇文泰書迎戰(是年) 皆予之也]” ≪書法≫
역주7 : ≪資治通鑑≫의 註에는 “杜預가 이르기를 ‘拒는 方陣(방형의 진)이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역주8 : 陣(진지)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역주9 魏大丞相泰……泰遂略定汾絳 : “東魏 지역을 東魏라고 기록하지 않고 ‘東魏 秦州’라고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西魏는 본래 秦州를 소유하였다. ‘東魏 秦州’라고 기록하여 西魏에서 蒲坂이라 한 것과 구별한 것이다.[東魏地 不書東魏 書東魏秦州 何 魏自有秦州也 書東魏秦州 所以别其爲蒲坂也]” ≪書法≫
역주10 : 저본에는 ‘迥’으로 되어 있으나, ≪新譯資治通鑑≫에서는 ‘迴’로 교감하였다.

자치통감강목(20) 책은 2022.11.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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