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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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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寅年(210)
十五年이라 曹操下令求才하다
掾和洽 言於操曰 天下之人 才德各殊하니 不可以一節取也 儉素過中 自以處身則可어니와 以此格物이면 所失或多注+格, 正也.
今朝廷之議 吏有著新衣, 乘好車者하면 謂之不淸이라하고 形容不飾하고 衣裘敝壞者하면 謂之廉潔이라하여
至令士大夫 故汚辱其衣하고 藏其輿服하고 朝府大吏 或自挈壺飧하여 以入官寺注+挈, 提也. 壺, 酒器也. 飧, 音孫, 食曰飧.하니이다
夫立敎觀俗 貴處中庸 爲可繼也注+易曰 “先王觀民設敎.” 處, 上聲. 今崇一槪難堪之行하여 以檢殊塗注+行, 去聲. 檢, 束也.하니 勉而爲之 必有疲瘁而或容隱僞矣리이다
操善之하여 下令曰 孟公綽 爲趙魏老則優어니와 不可以爲滕薛大夫라하니 若必廉才而後可用이면 則齊桓 其何以霸世注+管仲富擬公室, 築歸之臺, 塞門反玷, 鏤簋朱紘, 桓公用之而霸.리오
二三子其佐我하여 明揚하여 惟才是擧하라 吾得而用之注+(反)[仄], 古側字.호리라
二月朔 日食하다
◑冬 曹操作銅爵臺於鄴注+水經註 “銅爵臺, 在鄴城西北, 因城爲之, 高千丈, 有屋百餘間.”하다
◑十二月 하다
操下令曰 孤始擧孝廉注+操年二十, 擧孝廉爲郞.하니 自以本非巖穴知名之士 恐爲人所凡愚注+恐時人以凡愚待之也.하여 欲好作政敎以立名譽 在濟南 除殘去穢하고 平心選擧注+故, 猶言所以也. 操爲濟南相, 國有十餘縣, 長吏多阿附貴戚, 贓汚狼藉. 於是奏免其八, 姦宄逃竄, 境內肅然.
以是 爲強豪所忿하여 恐致家禍 以病還鄕里하여 乃於譙東五十里 築精舍注+精舍, 卽精廬也.하여 欲秋夏讀書하고 冬春射獵하여
爲二十年規注+規, 圖也.하고 待天下淸하여 乃出仕耳로라이나 不能得如意하여 徵爲典軍校尉하니
意遂更하여 欲爲國家討賊立功하여 使題墓道 言漢故征西將軍曹侯之墓 此其志也로라
遭値董卓之難하여 興擧義兵하여 破降黃巾하고 又討擊袁術하고 摧破袁紹하여 梟其二子하고
復定劉表하여 遂平天下하고 身爲宰相하니 人臣之貴已極하여 意望已過矣 設使國家無有孤 不知當幾人稱帝 幾人稱王이라
或者見孤彊盛하고 妄相忖度하여 言有不遜之志注+言其將簒也.라하니 每用耿耿注+耿耿, 小明, 心有所存, 不能忘之貌.하노라이나 欲孤便爾委兵歸國 實不可也注+國, 謂武平侯國. 何者
誠恐離兵이면 爲人所禍注+離, 力智切.하니 旣爲子孫計 又己敗하면 則國家傾危하리니 是以 不得慕虛名而處實禍也로라
이나 封兼四縣하고 食戶三萬 何德堪之리오 今上還陽夏, 柘, 苦三縣 戶二萬하고 但食武平萬戶注+陽夏‧柘‧苦‧武平四縣, 皆屬陳國.하여 且以分損謗議하고 少減孤之責也하노라
劉表故吏士 多歸劉備 備以周瑜所給地少하여 不足以容其衆이라하여 乃自詣孫權하여 求都督荊州注+荊州八郡, 瑜旣以江南四郡給備, 備又欲兼得江漢間四郡也.러니
瑜上疏曰 劉備以梟雄之姿 而有關羽, 張飛熊虎之將하니 必非久屈爲人用者
謂宜徙備置吳하여 盛爲築宮하고 多其美女玩好하여 以娛其耳目하고
而分羽飛하여 各置一方하고 使如瑜者 挾與攻戰이면 大事 可定也리이다
今猥割土地하여 以資業之하고 聚此三人하여 俱在疆埸注+猥, 多也. 資業之, 謂資之土地, 使成霸業也. 埸, 音亦.하니 恐蛟龍得雲雨 終非池中物也니이다 不從이러라
備還 乃聞之하고 歎曰 天下智謀之士 所見略同이라 前時孔明 諫孤莫行이러니 其意亦慮此也라하니라
瑜詣京見權하고注+京, 京口城也. 絶高曰京, 其城因山爲壘, 緣江爲境, 因謂之京口. 權時居京, 故瑜詣京見之. 後都秣陵, 於京口置京督, 又曰徐陵督. 今曹操新敗하여 憂在腹心하니 未能與將軍連兵相事也注+操以赤壁之敗, 威望頓損. 中國之人, 或欲因其敗而圖之, 是憂在腹心. 相事, 謂相與從事於戰攻也.
乞與奮威 俱進取蜀而幷張魯注+時劉璋據蜀.하고 因留奮威하여 固守其地하여 與馬超結援注+時超據關中.하고
瑜還하여 與將軍據襄陽하여 以蹙操하면 北方 可圖也리이다 許之하니 奮威者 權從弟瑜也注+奮威, 謂奮威將軍.
周瑜還治行裝이러니 道病하여 與權牋曰 修短 命矣 誠不足惜이나 但恨微志未展하여 不復奉敎命耳니이다
今曹操在北하여 疆埸未靜하고 劉備寄寓하여 有似養虎하니 此朝士旰食之秋 至尊垂慮之日也注+旰, 音幹, 晩也.니이다
魯肅 忠烈하고 臨事不苟하니 可以代瑜 儻所言可采 瑜死不朽矣라하고 卒於巴丘注+胡三省註 “裴松之曰 ‘瑜欲取蜀, 還江陵治嚴, 所卒之處, 應在今之巴陵, 與前所鎭巴丘, 名同處異也.’ 據水經註, 巴丘山在湘水右岸, 晉武帝太康元年, 立巴陵縣, 宋文帝元嘉十六年, 置巴陵郡, 今岳州也.”하다
聞之하고 哀慟曰 公瑾 有王佐之資러니 今忽短命하니 孤何賴哉리오하고 自迎其喪於蕪湖注+蕪湖縣, 屬丹陽郡.하고 爲子登하여 娶其女하고 而以女妻其子循, 胤注+循‧胤, 周瑜二子名. 通鑑 “以其男循爲騎都尉, 妻以女, 胤爲興業都尉, 妻以宗女.”하다
瑜見友於孫策이러니 太夫人 又使權으로 以兄奉之하니 諸將賓客 爲禮尙簡이로되 而瑜 便執臣節하고
程普以年長이라하여 數陵侮瑜호되 瑜折節下之하여 終不與校注+校, 計校也, 不與校, 謂不與之校曲直也.러니
普後自敬服하여 乃告人曰 與公瑾交 若飮醇醪하여 不覺自醉注+酒不澆爲醇. 醪, 滓汁酒.라하니라
以肅代瑜하니 勸權以荊州借劉備하여 與共拒曹操한대 從之하다
謂呂蒙曰 卿今當塗掌事하니 不可不學注+當塗, 猶言當路也.이니라 辭以軍中多務한대
權曰 孤豈欲卿治經爲博士邪 但當涉獵見往事耳注+涉獵, 言泛覽流觀, 譬如涉水獵獸, 不專精也.로라 卿言多務라하나 孰若孤 孤常讀書하여 自以爲大有所益이로라 乃始就學이러라
及肅過尋陽 與蒙議論하고 大驚曰 卿今者才略 非復吳下阿蒙注+阿, 相傳從安, 入聲.이로다
蒙曰 士別三日 卽更刮目相待하니 大兄 何見事之晩乎注+刮目, 猶拭目也. 遂拜蒙母하고 結友而別하다
劉備以龐統爲治中從事하다
劉備以龐統守耒陽令이러니 不治하여注+耒陽縣, 屬桂陽郡. 治, 理效也.하니 魯肅 遺備書曰 士元 非百里才也 使處治中, 別駕之任이라야 始當展其驥足耳注+治中‧別駕, 皆州之紀綱.니이다
諸葛亮 亦言之한대 備與善譚하고 大器之하여 遂用統爲治中하니 親待亞亮하여 竝爲軍師中郞將注+譚, 與談同, 善譚者, 劇論當世事也. 物之有用者, 謂之器. 器之者, 器重之也, 重其才之足以用世也.하다
孫權 以步隲爲交州刺史注+步, 姓也.하다
士燮 爲交阯太守 表其三弟領合浦, 九眞, 南海太守注+壹領合浦太守, 䵋領九眞太守, 武領南海太守. 䵋, 于鄙‧虎猥二切.하다
體器寬厚하니 中國士人 多往依之하여 雄長一州하고 震服百蠻이라
而交州刺史張津 好鬼神事하여 常著絳帕頭하고 讀道書러니 爲其將所殺注+帕, 音怕, 亦作柏. 陸遊曰 “帕頭者, 巾幘之類, 猶今言幞頭.”이라
至是하여 以隲爲刺史한대 率兄弟하여 奉承節度하고 遣子入質注+質, 音致.하니 由是 嶺南 始服於權하다


庚寅年(210)
나라 孝獻皇帝 建安 15년이다. 봄에 曹操가 명령을 내려 인재를 구하게 하였다.
丞相掾和洽曹操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하의 사람은 재주와 덕이 각기 다르니, 한 가지 일로 취할 수 없습니다. 검소함이 중도를 넘는 것은 스스로 처신하기에는 좋지만 이로써 남을 바로잡으면 실수하는 바가 혹 많게 됩니다.注+은 바로잡음이다.
지금 조정의 의논은 관리 중에 새 옷을 입고 좋은 수레를 타는 자가 있으면 淸白하지 못하다 하고, 形容(용모)을 꾸미지 않고 옷과 갖옷이 해진 자가 있으면 淸廉潔白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大夫들이 일부러 자신의 옷을 더럽히고 수레와 복식을 감추며, 조정의 큰 관리가 혹 직접 물병과 밥을 가지고서 官府에 들어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注+은 듦이다. 는 술그릇이다. 은 음이 이니, 익은 밥을 이라 한다.
가르침을 세워 풍속을 관찰할 적에 中庸에 처함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이렇게 해야 계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注+ (처하다)는 上聲이다. 그런데 이제 한결같이 감당하기 어려운 행실을 숭상하여 재주와 덕이 다른 사람들을 검속하니,注+(행실)은 去聲이다. 은 검속함이다. 억지로 이것을 하게 하면 반드시 수고로운 나머지 혹 거짓을 숨길 수가 있습니다.”
曹操가 그의 말을 옳게 여겨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렸다. “ 하였으니, 만약 반드시 청렴한 재질을 가진 사람만을 등용해야 한다면, 나라 桓公이 어떻게 세상에 霸者가 되었겠는가.注+管仲은 부유함이 公室에 비견되고 〈사치함을 좋아하여〉 환공이 그를 등용하여 霸者가 되었다.
그대들은 나를 보좌해서 오직 재주 있는 사람을 천거하라. 내 그를 얻어 등용하겠다.”注+古字이다.
】 2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12월에 曹操가 사양하여 세 개의 을 돌려주었다.
曹操가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렸다. “내가 처음 孝廉으로 천거되었는데,注+曹操는 나이 20세에 孝廉에 천거되어 郞官이 되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본래 초야에 있어 이름이 알려진 선비가 아니라서 사람들에게 범상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인식될까 두려웠다.注+〈“恐爲人所凡愚”는〉 당시 사람들이 범상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대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그리하여 政敎를 잘 만들어 名譽를 세우고자 하여, 注+(때문에)는 所以라는 말과 같다. 曹操濟南相으로 있을 적에, 濟南國에 10여 개의 소속된 이 있었는데 長吏(縣令)들 중에 貴戚에 아부하고 지나치게 贓物을 받은 자가 많았다. 이에 아뢰어서 그중 8명을 면직시키니, 간사한 자들이 도망해 숨어서 境內가 숙연해졌다.
이 때문에 豪強들에게 분노를 사서, 家禍를 불러들일까 염려되었으므로 병이 있다고 칭탁하고 鄕里로 돌아왔다. 마침내 譙縣 동쪽 50리 지점에 精舍를 짓고서注+精舍는 바로 精廬(講學하는 장소)이다. 가을과 여름에는 책을 읽고 겨울과 봄에는 활쏘기를 하고 사냥하여
20년 계획을 하고注+는 계책함이다. 천하가 깨끗해지기를 기다려서 비로소 出仕하고자 하였노라.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못하고 조정의 부름에 응하여 가 되니,
생각이 마침내 바뀌어서 국가를 위해 逆賊을 토벌하고 을 세워서 나의 무덤에 ‘나라 征西將軍 曹侯의 묘’라고 쓰이기를 바랐으니, 이것이 내가 본래 뜻한 바였다.
】 그런데 마침 을 만나서 의병을 일으켜 黃巾賊을 격파하여 항복받고 또 袁術을 토벌하고 袁紹를 격파하여 그의 두 아들을 梟首하였으며,
다시 劉表를 평정하여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고 몸소 재상이 되었으니, 人臣의 귀함이 이미 지극하여 내가 바라던 바를 이미 넘어섰다. 만일 국가에 내가 없었다면 마땅히 몇 사람이 황제를 칭하고 몇 사람이 왕을 칭했을지 알 수 없다.
그런데 혹자는 나의 세력이 강성한 것을 보고는 망령되이 추측해서 내가 不遜한 뜻을 품고 있다고 말하니,注+〈“言有不遜之志”는〉 曹操가 장차 황제의 지위를 찬탈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나는 매번 이 때문에 마음에 잊지 못하여 염려하노라.注+耿耿”은 조금 밝음이니, 마음에 매여 있는 바가 있어서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곧바로 兵權을 버리고 封國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이는 실로 불가한 일이다.注+武平侯의 나라이다. 어째서인가.
진실로 내가 병권을 놓으면 남에게 화를 당할 것이니,注+(떠나다)는 力智이다. 이미 자손을 위하여 계책을 하였고 또 내가 실패한다면 국가가 따라서 기울고 위태로울까 두렵다. 이 때문에 〈겸양한다는〉 헛된 명예를 사모하여 실제의 화에 처할 수가 없다.
그러나 封地가 네 개의 을 겸하고 食戶가 3만이니, 내 무슨 덕으로 이를 감당하겠는가. 이제 陽夏柘縣(자현), 苦縣戶口 2만을 조정에 돌려드리고 武平縣의 1만 호만을 식읍으로 하여,注+陽夏, 柘縣, 苦縣, 武平縣 네 현은 모두 陳國에 속하였다. 우선 나를 비방하는 말을 덜고 나의 책임을 다소 줄이려 하노라.”
孫權南郡을 지키는 장수 周瑜하니, 손권이 魯肅에게 대신 그 군대를 거느리게 하였다.
劉表의 옛 관리와 병사들이 劉備에게 많이 귀의하였다. 유비는 周瑜가 준 땅이 적어서 귀의한 무리를 수용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직접 孫權에게 찾아가서 荊州都督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注+荊州의 여덟 개의 가운데 周瑜가 이미 長江의 남쪽의 네 군(武陵, 長沙, 桂陽, 靈陵)을 劉備에게 주었었는데, 유비가 또다시 長江漢水 사이에 있는 네 군을 겸하여 얻고자 한 것이다.
이에 주유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유비는 영웅호걸의 자질로 곰과 호랑이처럼 용맹한 장수인 關羽張飛가 있으니, 반드시 오랫동안 굽혀서 남의 쓰임이 될 자가 아닙니다.
생각건대 마땅히 유비를 로 옮겨서 성대하게 궁궐을 건축하고 미녀와 완호품을 많이 주어서 그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해야 합니다.
또 관우와 장비를 나누어 각각 다른 곳에 두고, 저 주유와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거느리고서 적과 싸우게 하면 大事를 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 토지를 지나치게 많이 떼어주어서 資業으로 삼게 하고 이 세 사람을 모아서 함께 한 지역에 있게 하니,注+는 많음이다. “資業之”는 그에게 토지를 주어서 霸業을 이루게 함을 이른다. 은 음이 이다. 교룡이 구름과 비를 얻으면 끝내 못 가운데의 물건(칩거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손권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劉備가 돌아와서 이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천하의 智謀가 있는 선비의 소견은 대략 같다. 지난번 孔明이 나에게 周瑜를 찾아가지 말라고 간하였는데, 그의 뜻도 이것을 염려한 것이다.” 하였다.
周瑜京口에 나아가서 孫權을 만나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京口城이다. 매우 높은 것을 이라 하니, 이 이 산을 따라 보루를 만들고 강을 따라 경계를 삼고는 인하여 京口라 하였다. 孫權이 이때 경구에 거주하였으므로 周瑜가 경구에 가서 그를 만나본 것이다. 손권은 뒤에 秣陵에 도읍하고 경구에 京督을 두고 또 徐陵督이라 하였다. “지금 曹操가 막 패하여 근심이 心腹에 있으니, 군대를 동원하여 장군과 함께 싸우지 못할 것입니다.注+曹操赤壁의 패전 때문에 위엄과 명망이 크게 깎이니, 중국(中原) 사람들 중에 혹 그의 패전을 빌미로 조조를 도모하고자 하였는바, 이에 조조의 근심이 심복에 있는 것이다. “相事”는 서로 더불어 전쟁함에 종사함을 이른다.
바라건대 奮威將軍과 함께 나아가 지방을 취하고 張魯를 겸병하고는注+이때 劉璋 지방을 점거하였다. 인하여 분위장군을 남겨두어 그 땅을 굳게 지키면서 馬超와 서로 지원해주기로 약속을 맺고,注+이때 馬超關中을 점거하였다.
저는 돌아와 장군과 함께 襄陽을 점거하고서 조조를 압박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北方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손권이 이것을 허락하였다. 분위장군은 손권의 從弟孫瑜이다.注+奮威奮威將軍을 이른다.
周瑜가 돌아가 行裝을 챙겼는데 도중에 병이 위독해지자, 孫權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올렸다.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天命입니다. 〈제가 죽는 것은〉 진실로 애석할 것이 없으나, 다만 저의 작은 뜻을 떨치지 못하여 다시는 장군의 敎命을 받들지 못하게 되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지금 曹操가 북쪽에 있어서 국경이 안정되지 못하고 劉備가 임시로 우리 나라에 붙어 있어서 호랑이를 기르는 것과 유사하니, 이는 조정의 선비들이 제때에 밥을 먹지 못하고 정사에 바빠야 할 시기이고 至尊께서 염려하셔야 할 때입니다.注+은 음이 이니, 늦음이다.
魯肅忠烈이 뛰어나고 일에 임하여 구차하지 않으니, 저를 대신하게 할 만합니다. 혹시라도 제가 말한 것이 채택되면, 저는 죽어도 썩어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주유는 巴丘에서 하였다.注+胡三省에 “裴松之가 말하기를 ‘周瑜 지방을 취하고자 하여 江陵으로 돌아와 행장을 챙겼다. 그렇다면 그가 죽은 곳은 응당 지금의 巴陵에 있을 것이니, 앞에 진주했던 巴丘와는 이름이 같으나 다른 곳일 것이다.’ 하였고, ≪水經註≫를 근거해보면 巴丘山湘水 오른쪽 江岸에 있는데, 武帝 太康 원년(280)에 巴陵縣을 세웠고 文帝 元嘉 16년(439)에 巴陵郡을 설치하였는바, 지금의 岳州이다.” 하였다.
孫權은 이 말을 듣고 애통하여 말하기를 “公瑾(周瑜)이 王者를 보좌할 자품이 있었는데 이제 갑자기 단명하였으니, 내가 누구를 의뢰하겠는가.” 하고는 직접 蕪湖에서 그의 상여를 맞이해오고注+蕪湖縣丹陽郡에 속하였다. 아들 孫登을 위하여 그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고, 자기의 딸을 주유의 아들 周循周胤에게 시집보냈다.注+周循周胤周瑜의 두 아들의 이름이다. ≪資治通鑑≫에는 “그의 아들 주순을 騎都尉로 삼아서 자기 딸을 시집보냈고, 주윤을 興業都尉로 삼아서 宗室의 딸을 시집보냈다.” 하였다.
】 처음에 周瑜孫策과 친구로 지냈는데 太夫人이 또 孫權으로 하여금 주유를 형으로 받들게 하였다. 이때 諸將賓客들이 손권에 대하여 예를 행함이 간략하였으나 주유는 신하의 예절을 지켰고,
程普가 나이가 많은 것을 믿고서 여러 번 주유를 능멸하고 모욕하였으나 주유는 허리를 굽혀 자신을 낮추어서 끝내 그와 더불어 曲直을 따지지 않았다.注+는 계교함이니, “不與校”는 그와 더불어 曲直을 따지지 않은 것이다.
정보는 뒤에 스스로 주유를 공경하고 심복하여 마침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公瑾과 사귀다 보면 물을 타지 않은 진국술을 마신 듯 나도 모르게 훈훈하게 취하게 된다.”注+술에 물을 타지 않은 것을 이라 하며, 는 찌꺼기와 즙이 섞여 있는 술이다. 하였다.
손권이 魯肅으로 주유를 대신하게 하니, 노숙이 손권에게 荊州劉備에게 빌려주어 함께 曹操를 막을 것을 권하자, 손권이 그의 말을 따랐다.
】 처음에 孫權呂蒙에게 이르기를 “이 지금 중요한 要路를 담당하여 일을 관장하고 있으니,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注+當塗(要路를 담당하다)”는 當路라는 말과 같다. 하였다. 여몽이 軍中에 일이 많다고 사양하자,
呂蒙呂蒙
손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어찌 경에게 經典을 연구하여 博士가 되기를 바라겠는가. 다만 마땅히 여러 책을 섭렵하여 지나간 일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注+涉獵”은 널리 보고 두루 관찰함을 말한 것이니, 비유하면 물을 건너면서 짐승을 사냥하는 것과 같아서 온 정신을 다 쓰지는 않는 것이다. 경이 일이 많다고 말하나 어찌 나만 하겠는가. 나는 늘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크게 유익한 바가 있다고 여긴다.” 여몽이 이에 비로소 나아가 배웠다.
魯肅尋陽을 지날 적에 呂蒙과 의논을 하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의 지금의 재주와 지략은 더 이상 이 아니다.”注+는 〈이나 이름 중에〉 서로 전하기를 편안한 쪽을 따르는 것이니, 入聲이다. 하였다.
여몽이 말하기를 “선비는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면 눈을 비비고 상대를 다시 보아야 하는데, 大兄은 어찌 일을 알아차리는 것이 이렇게 늦습니까.”注+刮目”은 눈을 씻고 다시 본다는 말과 같다. 하였다. 노숙은 마침내 여몽의 어머니를 뵙고서 예를 다하고 여몽과 친구 관계를 맺고 떠나갔다.
劉備龐統治中從事로 삼았다.
龐統龐統
劉備龐統守耒陽令으로 삼았는데 치적이 없어서 면직되니,注+耒陽縣桂陽郡에 속하였다. 는 다스린 효험(治績)이다. 魯肅이 유비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士元(방통)은 百里의 고을을 다스릴 재주가 아닙니다. 그로 하여금 의 임무를 담당하게 하여야 비로소 그 뛰어난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입니다.”注+治中別駕는 모두 紀綱이다. 하였고,
諸葛亮 또한 노숙과 같이 말을 하였다. 유비는 방통과 더불어 당세의 일을 말해보고 큰 그릇으로 여겨서 마침내 방통을 등용하여 治中으로 삼았다. 유비가 친애하여 대우하는 것이 제갈량의 다음이어서 방통은 제갈량과 함께 軍師中郞將이 되었다.注+과 같으니, “善譚”은 것은 당세의 일을 지극히 논하는 것이다. 물건 중에 쓸모가 있는 것을 라 하니, “器之”란 큰 그릇으로 여겨 소중히 대하는 것으로, 그의 재주가 충분히 세상에 쓰일 만함을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
孫權步隲(보즐)을 交州刺史로 삼았다.注+는 성이다.
】 처음에 士燮交阯太守가 되었을 적에 表文을 올려 그의 세 아우를 合浦, 九眞, 南海太守를 겸하게 하였다.注+士壹合浦太守를 겸하고 士䵋(사유)는 九眞太守를 겸하고 士武南海太守를 겸하였다. 于鄙虎猥의 두 가지 이다.
사섭은 器局이 너그럽고 후덕하니, 중국(중원)의 선비들이 많이 찾아가서 귀의하여 한 의 으뜸이 되고 여러 蠻族들을 두렵게 하여 복종시켰다.
交州刺史 張津은 귀신의 일을 좋아하여 항상 붉은 帕頭巾을 쓰고 道家의 서적을 읽곤 하였는데, 그의 부하 장수에게 살해를 당하였다.注+는 음이 이니, 으로도 쓴다. 陸遊가 말하기를 “帕頭란 두건의 따위이니, 지금의 幞頭라는 말과 같다.” 하였다.
이때에 孫權步隲을 자사로 삼자, 사섭이 형제들을 데리고 와서 그의 節度(지휘)를 받들고 아들을 들여보내어 인질로 삼으니,注+(인질)는 음이 이다. 이로 말미암아 嶺南 지역이 처음으로 손권에게 복속되었다.


역주
역주1 周易에……하였다 : ≪周易≫ 觀卦 〈象傳〉에 “바람이 땅 위에 부는 것이 觀이니, 先王은 이를 본받아 사방을 두루 살피고 백성들의 풍속을 관찰하여 교화를 베푼다.[風行地上 觀 先王以 省方觀民 設敎]”라고 보인다.
역주2 (熱)[熟] : 저본에는 ‘熱’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熟’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 孟公綽이……없다 : ≪論語≫ 〈憲問〉에 보이는 孔子의 말씀으로, 朱子의 ≪集註≫에 “大家는 세력은 중하나 諸侯의 일이 없고, 家老는 명망이 높지만 관직을 맡은 책임이 없다. 滕과 薛은 나라가 작으나 정사가 번거로우며, 大夫는 지위가 높고 책임이 중하다. 그렇다면 孟公綽은 아마도 청렴하고 욕심이 적으나, 재능이 부족한 자인 듯하다.” 하였다.
역주4 三歸의……만들었는데 : ≪論語≫ 〈八佾〉에 孔子가 管仲을 두고 器局이 작다고 하셨는데, 혹자가 기국이 작은 것이 검소함이 되는가 의심하여 관중은 검소하냐고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管氏는 三歸를 두었으며 家臣의 일을 겸직시키지 않았으니, 어찌 검소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管氏有三歸 官事不攝 焉得儉]”라고 하셨고, 혹자가 다시 관중은 禮를 알았느냐고 묻자, 공자께서 “나라의 임금이어야 병풍으로 문을 가릴 수 있는데 관씨도 병풍으로 문을 가렸으며, 나라의 임금이어야 두 임금이 友好로 만날 때에 술잔을 되돌려놓는 자리를 둘 수 있는데 관씨도 술잔을 되돌려놓는 자리를 두었으니, 관씨가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알지 못하겠는가.[邦君樹塞門 管氏亦樹塞門 邦君 爲兩君之好 有反坫 管氏亦有反坫 管氏而知禮 孰不知禮]”라고 하셨다. ≪禮記≫ 〈禮器〉에 “관중이 祭器에 장식을 하고 면류관의 끈을 붉게 하며 斗栱에 산을 새기고 들보 위의 동자기둥에 水草을 새기니, 君子가 그를 참람하다고 하였다.[管仲鏤簋朱紘 山節藻梲 君子以爲濫矣]”라고 보인다. 簋는 黍稷을 담는 祭器이니 鏤簋는 玉을 조각해 장식한 簋로 천자의 제기의 꾸밈이고, 紘은 冠冕의 끈이니 붉은 끈은 천자의 服飾이고, 山節은 斗栱에 산을 조각한 것이고, 藻梲은 동자기둥에 水草를 그린 것이니, 천자의 宗廟의 꾸밈인데, 관중이 大夫로서 천자의 禮制를 僭用한 것이다.
역주5 이미……드날려 : ‘明明揚仄陋’를 축약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 ≪書經≫ 〈虞書 堯典〉에 “明明揚側陋”라고 보이는바, 이는 높은 지위에 있어 밝게 드러난 자도 천거하여 밝히고 側陋한 자도 드날리라는 뜻으로 조정에 있는 자와 초야에 있는 미천한 자를 가리지 말고 모두 천거하라는 堯임금의 말씀이다. 側陋는 미천한 자를 가리킨다.
역주6 (二)[三] : 저본에는 ‘二’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三’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 (反)[仄] : 저본에는 ‘反’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仄’으로 바로잡았다. 아래 訓義도 같다.
역주8 水經註에……하였다 : ≪水經註≫에는 “銅雀臺는 높이가 열 길이고 101칸의 건물이 있었다.[銅雀臺 高十丈 有屋百一間]”라고 하여, 爵이 雀으로 되어 있고 千이 十으로 되어 있으며, 百자 아래에 一자가 더 있다. 爵과 雀은 통용된다.
역주9 操讓還三縣 : “‘讓’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비판한 것이다. 사양은 아름다운 일인데 어찌하여 비판하였는가. 거짓이기 때문이다. 武平縣을 스스로 봉했다고 썼으니, 그렇다면 사양하여 돌려준 것이 거짓이 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나라를 봉해주고 관직을 제수하였는데 받지 않았다고 쓴 것이 19번이고, 肅拜하지 않았다고 쓴 것이 3번이고, 사양했다고 쓴 것이 2번인데, 曹操와 司馬昭와 劉裕는 모두 비난한 것이다.[書讓 何 譏也 讓 美事也 何譏 僞也 武平書自封 則讓還之爲僞 可知矣 終綱目 書封拜不受十九 不拜三 讓二 曹操司馬昭劉裕皆譏也]” ≪書法≫
書法은 ‘筆法’이란 말과 같다. 朱子는 ≪資治通鑑綱目≫을 편찬할 적에 孔子의 ≪春秋≫ 筆法을 따라 綱과 目으로 나누었는바, 綱은 ≪春秋≫의 經文을, 目은 ≪春秋左氏傳≫의 傳文을 따랐다. ≪資治通鑑綱目≫의 筆法을 밝힌 것으로는 劉友益(宋)의 ≪綱目書法≫, 尹起莘(宋)의 ≪綱目發明≫이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두 책은 현재 淸나라 聖祖(康熙帝)가 엮은 ≪御批資治通鑑綱目≫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이 필법은 綱에 주안점이 맞춰져 있는데, 우리나라 학자들이 특별히 이 ≪자치통감강목≫을 愛讀한 이유는 바로 이 필법에 있다. ≪어비자치통감강목≫에는 이외에도 汪克寬(元)의 ≪綱目凡例考異≫ 등 많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나, 본서에서 다 소개하지 못하고 ≪강목서법≫과 ≪강목발명≫의 중요한 것만을 발췌하여 수록하였다. 또한 陳濟(明)의 ≪資治通鑑綱目集覽正誤≫를 인용하여 오류를 바로잡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각각 ≪書法≫, ≪發明≫, ≪正誤≫로 요약하여 표기하였다.
역주10 濟南에……등용하였다 : 曹操가 효렴으로 천거되어 郞官이 되고서 黃巾賊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濟南相이 되었다.(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2권 중 漢 靈帝 中平 원년(184))
역주11 典軍校尉 : 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漢 靈帝 中平 5년(188)에 西園八校尉를 두었다. 이는 황제의 친위부대로 환관인 小黃門 蹇碩을 上軍校尉로 삼고, 袁紹 등 8명의 校尉를 두어 건석의 통솔을 받게 하였는데 이때 조조는 典軍校尉에 임명되었다. 또한 大將軍이라도 건석에게 영속시켰는데, 이로 인해 대장군 何進과 건석 간에 갈등이 생겨 하진이 건석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2권 중 漢 靈帝 中平 5년(188))
역주12 董卓의 난 : 董卓은 後漢 靈帝 때 장군으로, 영제가 죽자 병사를 거느리고 都城에 들어가 환관들을 죽이고 스스로 相國이 되어 少帝를 폐위하고 何太后를 시해한 뒤 獻帝를 세웠다. 袁紹 등이 토벌하자 長安으로 천도하였으나 뒤에 王允이 呂布를 끌어들여 그를 죽이게 한 다음 가산을 몰수하고 멸족시켰다.
역주13 : 反切音을 표시한 것이다. ‘反(번)’은 뒤집는다(되치다)는 뜻으로 번역을 의미하고, ‘切’은 자른다는 의미이다. 앞 글자의 初聲을 따고 뒷글자의 中聲과 終聲을 따서 읽는다.
역주14 孫權……以魯肅代領其兵 : “≪資治通鑑綱目≫에 蜀漢, 吳, 魏, 晉의 諸臣들의 卒에 대해서 姓을 쓰지 않은 경우가 없는데, 그중에 官爵을 갖추어 쓴 것은 모두 찬미한 말이고, 오직 관작을 쓰지 않은 것은 폄하하는 말이다. 그러나 僭國(혼란한 시기에 簒位하거나 지역에 웅거한 나라)의 신하는 〈원칙적으로 이러한 褒貶에〉 해당되지 않는다.[綱目卒蜀漢吳魏及晉諸臣 無不書姓者 具官爵 皆美辭也 惟不書官者 貶辭也 而僭國臣不與焉]” ≪書法≫
역주15 (因)[困] : 저본에는 ‘因’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困’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6 吳下의 阿蒙 : 吳나라의 呂蒙으로, 전하여 식견이 짧고 文才가 부족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吳下는 長江 하류 일대로 吳 지역을 가리키며, 阿는 명사 앞에 쓰여 친근하거나 경시하는 뜻을 나타낸다.
역주17 治中과 別駕 : 紀綱은 要職이라는 뜻이다. 治中과 別駕는 治中從事, 別駕從事인데, 從事는 州刺史의 막료로 자사의 辟召를 통해 임명된다. 종사는 別駕從事, 治中從事, 兵曹從事, 部從事 등 여러 직으로 구분되는데, 특히 별가종사와 치중종사가 屬吏의 長이 된다. 별가종사는 자사가 部를 순행할 적에 자사를 수행하여 자사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치중종사는 州의 屬吏의 선발과 諸曹의 일을 주관한다.(安作璋‧熊鐵基, ≪秦漢官制史稿≫, 齊魯書社, 1984) 여기서는 牧使인 劉備를 보좌하는 요직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자치통감강목(11)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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