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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유윤劉胤의 수급首級이 건강建康에 도착하니, 사도司徒 왕도王導는 곽묵郭黙이 날래고 용맹하여 제압하기 어렵다 해서, 유윤의 수급을 대항大航에 효시梟示하고 곽묵을 강주자사江州刺史로 삼았다.
도간陶侃은 이 말을 듣고 소매를 떨치고
注+① 投는 떨침이니, “投袂”는 바쁘고 급함을 말한 것이다. 일어나서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속임수이다.” 하고는, 즉시 군대를 거느리고 곽묵을 토벌하러 나섰다.
이때 표문을 올려 곽묵의 죄상을 아뢰고, 또 왕도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곽묵이 방주方州(자사刺史)를 죽였는데 즉시 그를 등용하여 방주로 삼았으니, 재상宰相을 죽이면 곧 재상을 시키겠습니까?” 하였다.
왕도가 이에 유윤의 수급을 수습하고 도간에게 답서를 보내기를 “곽묵이
상류上流의 유리한 지세를 점거하고 게다가
전선戰船과 물자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포용하고 용인하면서
족하足下를 기다린 것이니, 어찌
하여
대사大事를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도간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상황을 살피면서 역적을 기르는 것이다.” 하였다. 도간의 군대가 도착하자, 곽묵의 장수가 곽묵을 포박하여 항복하니, 도간이 곽묵을 참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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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趙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석륵石勒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청하자, 석륵은 마침내 대조천왕大趙天王을 칭하고서 황제의 일을 행하였다. 후비后妃 유씨劉氏를 세워 왕후王后로 삼고, 세자世子 석홍石弘을 태자太子로 삼고, 아들 석굉石宏을 대선우大單于으로 삼고, 중산공中山公 석호石虎는 태위太尉로 삼고서 작위를 올려 중산왕中山王으로 삼았다.
이에 석호가 노하여 은밀히 그 아들 석수石邃(석수)에게 이르기를 “내 몸소 화살과 포석砲石을 무릅쓰며 〈전쟁에 종사한 지〉 20여 년에 대조大趙의 기업을 완성하였으니, 대선우大單于는 마땅히 나에게 주어야 한다.
그런데 마침내 계집종의 어린 아들에게 주었으니,
注+① 吻은 武粉의 切이니, 주둥이를 吻이라 한다. 처음 둥지에서 나온 새끼 새는 주둥이의 황색이 아직 벗겨지지 않았으므로 이를 가리켜 ‘黃吻’이라 하니, 나이가 어림을 말한 것이다. 褪는 吐困의 切이니, 겉을 벗겨내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내 기가 막혀서 제대로 잠을 자고 밥을 먹을 수도 없다.
주상主上이 죽으면, 다시는 그의 종자들을 남겨두지 않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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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趙나라의 곽경郭敬이 양양襄陽을 침입하자, 〈진晉나라(동진東晉)〉 남중랑장南中郎將 주무周撫가 이들을 막았다. 곽경은 후퇴하여 번성樊城에 주둔하고서 기치旗幟를 눕혀 감추어서 마치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하게 있다가, 정찰하는 자가 오면 그들에게 고告하기를
“너희들은 스스로 몸을 아껴 굳게 지켜야 할 것이다. 7, 8일 후에 많은 기병騎兵이 장차 도착해서 너희를 저지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너희는 다시는 도망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시켜서 나루에서 말을 목욕시키게 하였는데, 한 바퀴를 돌면 다시 시작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정찰하는 자가 돌아가 보고하자, 주무는 조趙나라의 군대가 크게 몰려올 것이라 생각하고 두려워하여 무창武昌으로 달아났다.
곽경은 양양성襄陽城을 허물고 그 백성을 면수沔水의 북쪽으로 옮기고는 번성樊城에 성을 쌓고 수비하였다. 주무는 이 일로 죄에 걸려 관직을 파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