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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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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年이라
趙建平元年이라
春正月 太尉侃 討郭默하여 斬之하다
劉胤首至建康하니 司徒導 以郭黙驍勇難制라하여 梟胤首於大航하고 以默爲江州刺史하다
陶侃 聞之하고 投袂起曰注+投, 振也, 投袂, 言悤遽也. 此必詐也라하고 即將兵討之할새
上表言狀하고 且與導書曰 默 殺方州어늘 即用爲方州하니 害宰相이면 便爲宰相乎
導乃收胤首하고 答侃書曰 黙 據上流之勢하고 加有船艦成資 故苞含容忍하여 以俟足下하니 豈非遵養時晦以定大事者邪
笑曰 是乃遵養時賊也라하다 兵至 默将 縛默以降이어늘 斬之하다
二月 趙王勒 稱趙天王하고 以石虎爲太尉하여 封中山王하다
趙群臣 請勒即皇帝位한대 乃稱大趙天王하여 行皇帝事하고 立妃劉氏爲王后하고 世子弘爲太子하고 子宏爲大單于하고 中山公虎爲太尉하여 進爵爲王하다
虎怒하여 私謂其子邃曰 吾身當矢石二十餘年 以成大趙之業하니 大單于 當以授我어늘
乃與黄吻婢兒注+吻, 武粉切, 口邊曰吻. 鳥雛始出巢者, 口黃未褪, 目之曰黃吻, 言少艾也. 褪, 吐困切, 卸衣也.하니 念之 令人氣塞하여 不能寢食이라 待主上晏駕後 不足復留種也니라
僕射程遐 言於勒曰 天下粗定 當顯明逆順이라 漢髙祖赦季布하고 斬丁公하니이다 今祖約 猶存하니 臣竊惑之하노이다
姚弋仲 亦以爲言하니 族誅之하다
祖逖 有胡奴曰王安하여 甚愛之러니 在雍丘 謂曰 石勒 是汝種類라하고 厚資遣之러니 仕趙하여 爲左衛將軍하다
及約誅 嘆曰 豈可使祖士雅無後乎注+士稚, 逖字.아하고 乃往觀刑하고 竊取逖庻子道重하여 匿之러니 及石氏亡 復歸江南하다
夏五月 詔太尉侃하여 兼督江州하다
遂移鎮武昌하다
六月 趙以張駿爲涼州牧하다
駿 因前趙之亡하여 復收河南地하여 至於狄道하고 置五屯護軍하여 與趙分境注+五屯護軍, 武街․石門․侯和․漒川․甘松也.이러니
趙拜駿涼州牧한대 駿 恥爲之臣하여 不受하다 及趙破休屠王羌 駿 始懼하여 乃稱臣入貢注+羌, 休屠王名, 石武之部落也.하다
秋九月 趙王勒 稱皇帝하다
◑趙寇陷襄陽하다
趙郭敬 寇襄陽이어늘 南中郎將周撫拒之하니 退屯樊城하여 偃藏旗幟하여 寂若無人하고 偵者至 則告之曰
汝宜自愛堅守하라 後七八日 大騎將至하여 相禁하리니 不復得走矣리라
使人浴馬于津호되 周而復始하여 晝夜不絶하다 偵者還告한대 撫以爲趙兵大至라하여하여 奔武昌하니
毁襄陽하고 遷其民于沔北하고 城樊城以戍之하니 撫坐免官하다
更造新宫注+蘇峻之亂, 宮闕焚毁, 故更造之.하다


[] 나라(동진東晉) 현종顯宗 성황제成皇帝 함화咸和 5년이다.
[] 나라(후조後趙) 고조高祖 석륵石勒 건평建平 원년이다.
[] 봄 정월에 태위太尉 도간陶侃곽묵郭默을 토벌하여 참수하였다.
[] 유윤劉胤수급首級건강建康에 도착하니, 사도司徒 왕도王導곽묵郭黙이 날래고 용맹하여 제압하기 어렵다 해서, 유윤의 수급을 대항大航효시梟示하고 곽묵을 강주자사江州刺史로 삼았다.
도간陶侃은 이 말을 듣고 소매를 떨치고注+① 投는 떨침이니, “投袂”는 바쁘고 급함을 말한 것이다. 일어나서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속임수이다.” 하고는, 즉시 군대를 거느리고 곽묵을 토벌하러 나섰다.
이때 표문을 올려 곽묵의 죄상을 아뢰고, 또 왕도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곽묵이 방주方州(자사刺史)를 죽였는데 즉시 그를 등용하여 방주로 삼았으니, 재상宰相을 죽이면 곧 재상을 시키겠습니까?” 하였다.
왕도가 이에 유윤의 수급을 수습하고 도간에게 답서를 보내기를 “곽묵이 상류上流의 유리한 지세를 점거하고 게다가 전선戰船과 물자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포용하고 용인하면서 족하足下를 기다린 것이니, 어찌 하여 대사大事를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도간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상황을 살피면서 역적을 기르는 것이다.” 하였다. 도간의 군대가 도착하자, 곽묵의 장수가 곽묵을 포박하여 항복하니, 도간이 곽묵을 참수하였다.
[] 2월에 조왕趙王 석륵石勒조천왕趙天王을 칭하고, 석호石虎태위太尉로 삼아 중산왕中山王을 봉하였다.
[] 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석륵石勒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청하자, 석륵은 마침내 대조천왕大趙天王을 칭하고서 황제의 일을 행하였다. 후비后妃 유씨劉氏를 세워 왕후王后로 삼고, 세자世子 석홍石弘태자太子로 삼고, 아들 석굉石宏대선우大單于으로 삼고, 중산공中山公 석호石虎태위太尉로 삼고서 작위를 올려 중산왕中山王으로 삼았다.
이에 석호가 노하여 은밀히 그 아들 석수石邃(석수)에게 이르기를 “내 몸소 화살과 포석砲石을 무릅쓰며 〈전쟁에 종사한 지〉 20여 년에 대조大趙의 기업을 완성하였으니, 대선우大單于는 마땅히 나에게 주어야 한다.
그런데 마침내 계집종의 어린 아들에게 주었으니,注+① 吻은 武粉의 切이니, 주둥이를 吻이라 한다. 처음 둥지에서 나온 새끼 새는 주둥이의 황색이 아직 벗겨지지 않았으므로 이를 가리켜 ‘黃吻’이라 하니, 나이가 어림을 말한 것이다. 褪는 吐困의 切이니, 겉을 벗겨내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내 기가 막혀서 제대로 잠을 자고 밥을 먹을 수도 없다. 주상主上이 죽으면, 다시는 그의 종자들을 남겨두지 않겠다.” 하였다.
[] 나라(후조後趙)가 조약祖約을 주벌하고 그의 족속을 멸하였다.
趙誅祖約夷其族趙誅祖約夷其族
[] 복야僕射 정하程遐석륵石勒에게 말하기를 “천하가 대체로 평정되었으니, 마땅히 을 드러내어 밝혀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조약祖約이 아직도 살아 있으니, 신은 적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요익중姚弋仲도 이와 같이 말하니, 석륵은 조약의 족속 전부를 주벌하였다.
[] 처음에 조적祖逖에게 왕안王安이라는 오랑캐 종이 있었는데, 조적이 매우 총애하였다. 옹구雍丘에 있을 적에 조적이 그에게 이르기를 “석륵石勒은 바로 너와 같은 종족 사람이다.” 하고 후하게 재물을 주어 보내니, 왕안은 후조後趙에서 벼슬하여 좌위장군左衛將軍이 되었다.
조약祖約이 주살을 당하자, 왕안이 탄식하기를 “어찌 조사치祖士稚注+① 士稚는 祖逖의 字이다. 하여금 후손이 없게 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가서 형벌을 당하는 것을 보고 조적의 서자庶子 조도중祖道重을 몰래 데려다가 숨겨주었다. 석씨石氏가 망하자, 조도중이 다시 강남江南으로 돌아갔다.
[] 여름 5월에 조령을 내려 태위太尉 도간陶侃에게 강주도독江州都督을 겸하게 하였다.
[] 도간陶侃이 이에 무창武昌으로 을 옮겼다.
[] 6월에 나라(후조後趙)가 〈전량前涼의〉 장준張駿양주목涼州牧으로 삼았다.
[] 장준張駿전조前趙가 망한 틈을 타서 황하 남쪽 지역을 수복해서 적도狄道까지 점유하였고, 오둔호군五屯護軍注+
趙石勒卽皇帝位趙石勒卽皇帝位
① 五屯護軍은 武街, 石門, 侯和, 漒川, 甘松이다.
설치하여 나라(후조後趙)와 경계를 나누어 대치하고 있었다.
나라가 장준을 양주목涼州牧에 제수하자, 장준은 나라의 신하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받지 않았다. 나라가 注+② 羌은 休屠王의 이름이니, 石武의 부락이다. 격파하자, 장준이 비로소 두려워하여 마침내 이라고 칭하고 들어가 조공을 바쳤다.
[] 가을 9월에 조왕趙王 석륵石勒이 황제를 칭하였다.
[] 나라(후조後趙)가 양양襄陽을 침입하여 함락하였다.
[] 나라의 곽경郭敬양양襄陽을 침입하자, 〈나라(동진東晉)〉 남중랑장南中郎將 주무周撫가 이들을 막았다. 곽경은 후퇴하여 번성樊城에 주둔하고서 기치旗幟를 눕혀 감추어서 마치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하게 있다가, 정찰하는 자가 오면 그들에게 하기를
“너희들은 스스로 몸을 아껴 굳게 지켜야 할 것이다. 7, 8일 후에 많은 기병騎兵이 장차 도착해서 너희를 저지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너희는 다시는 도망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시켜서 나루에서 말을 목욕시키게 하였는데, 한 바퀴를 돌면 다시 시작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정찰하는 자가 돌아가 보고하자, 주무는 나라의 군대가 크게 몰려올 것이라 생각하고 두려워하여 무창武昌으로 달아났다.
곽경은 양양성襄陽城을 허물고 그 백성을 면수沔水의 북쪽으로 옮기고는 번성樊城에 성을 쌓고 수비하였다. 주무는 이 일로 죄에 걸려 관직을 파면당하였다.
[] 다시 새 을 지었다.注+① 蘇峻의 난리에 궁궐이 불타 훼손되었으므로 다시 지은 것이다.


역주
역주1 상황을……遵養時晦 : ‘遵養時晦’는 현재의 상황에 순응하며 역량을 축적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을 이른다. ≪詩經≫ 〈周頌 酌〉에 “아, 성대한 천자의 군대로 道를 따라 힘을 기르고 때로 숨어, 때가 되어 크게 밝아지자 이에 큰 갑옷을 입으셨도다.[於鑠王師 遵養時晦 時純煕矣 是用大介]”라고 보인다.
역주2 趙誅祖約 夷其族 : “趙나라에게 어찌하여 ‘誅’라고 썼는가. 亂臣賊子는 夷狄도 주살할 수가 있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반역을 토벌하는 것이 엄격하다.[趙也 何以書誅 亂臣賊子 夷狄得而誅之 綱目之討叛 嚴矣]” ≪書法≫
“石勒은 羯族의 도적인데도 ‘祖約을 주벌했다.’라고 썼으니, 이는 반역하여 난리를 일으킨 신하는 비록 夷狄과 盗賊이라도 모두 이들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하늘의 토벌을 엄격히 하고 王法을 바로잡아서 逆臣들로 하여금 천지의 사이에 발을 붙일 수 없게 한 것이니, 그 뜻이 매우 엄격하다.[石勒羯賊 而書誅祖約者 逆亂之臣 雖夷狄盗賊 皆得誅之 所以嚴天討 正王法 而使之無容足於天地之間也 其旨嚴矣]” ≪發明≫
역주3 漢나라……것입니다 : 季布와 丁公은 同母兄弟이다. 모두 楚나라 項羽의 部將으로 漢나라와 싸웠는데, 계포는 싸움터에서 漢나라 高祖를 자주 곤궁하게 압박하였고, 정공은 곤궁에 처한 한 고조를 살려 주었다. 항우가 멸망한 뒤, 한 고조는 붙들려온 계포에게는 항우에게 충성을 다한 것으로 포상하고 벼슬을 주었으나, 찾아온 정공에게는 不忠의 죄를 물어 斬首하였다.
역주4 休屠王 羌 : 이전에 後趙 休屠王 石武가 前趙의 劉曜에게 항복하였다. 羌은 石武를 이은 사람으로 보이는데 정확히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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