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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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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이라
趙建武十三年이라
◑是歲 漢亡하니 大一小三하여 凡四僭國이라
春三月 桓温 敗漢兵于笮橋하고 進至成都하니 漢主勢降이어늘 詔以爲歸義侯하다
溫軍 至青衣注+靑衣縣, 漢屬蜀郡, 後漢順帝陽嘉二年, 更名漢嘉, 蜀立爲漢嘉郡. 劉昫曰 “眉州靑神縣, 臨靑衣江, 西魏置靑衣縣. 靑衣水出盧山徼外, 東北流, 至武陽而合于江.”하니 大發兵하여 趣合水以拒之注+水經註 “江水東南過犍爲武陽縣, 靑衣水․水從西南來, 合注之.” 所謂合水, 當是此地.할새 諸將 欲設伏於江南하여 以待晉兵이어늘 將軍昝堅 不從하고 引兵向犍爲注+昝, 子感切. 昝堅, 姓名.하다
溫軍 至彭模하니 議者欲分爲兩軍하여 異道俱進하여 以分漢兵之勢注+彭模, 卽漢犍爲郡武陽縣之彭亡聚也, 岑彭死處.어늘
袁喬曰 今懸軍深入하니 當合勢力하여 以取一戰之捷이라 萬一偏敗 大事去矣注+偏敗, 謂兩道竝進, 或一軍爲蜀所敗.리니 不如全軍而進하여 棄去釡甑하고 齎三日糧하여 以示無還心이면 勝可必也리이다
從之하여 留參軍孫盛하여 將羸兵하여 守輜重하고 自將歩卒하고 直指成都러니 進遇漢將李權하여 三戰三捷하니 漢兵走散이러라
昝堅 至犍爲하여 乃知與溫異道하고 還至하니 則溫 軍於成都之十里陌矣 堅衆 自潰하다
勢悉衆出戰于笮橋注+笮, 音昨, 竹索也, 以竹簀爲橋面, 以笮維之. 笮橋, 在蜀郡萬里橋之西.하니 溫前鋒不利하여 矢及溫馬首
衆懼하여 欲退러니 而鼓吏誤鳴進鼓注+雷鼓以進衆, 曰進鼓.하니 袁喬拔劒督士卒力戰하여 遂大破之하다
乗勝長驅하여 至成都하여 縱火燒其城門하니 漢人 惶懼하여 無復鬪志러라
勢輿櫬面縛하고 詣軍門이어늘 送勢於建康하고 引漢司空譙獻之等하여 以爲參佐하고 舉賢旌善하니 蜀人 悦之
留成都三十日 振旅還江陵하니 詔封勢歸義侯하다
夏四月 趙攻涼州하니 張重華遣謝艾하여 將兵擊破之하다
趙麻秋攻枹罕하니 晉昌太守郞坦 欲棄外城注+惠帝分敦煌․酒泉, 置晉昌郡, 坦以城大難守, 欲棄外城.이어늘 武成太守張悛曰注+武成郡, 張氏置. 棄外城則動衆心하여 大事去矣라하고 固守大城하다
秋帥衆八萬하고 圍塹數重하여 雲梯, 地突 百道皆進注+地突者, 爲地道, 突出於城中.이어늘 城中 禦之하니 秋衆死傷數萬이라 退保大夏注+大夏縣, 漢屬隴西郡, 張軌分屬晉興郡, 後又分置大夏郡.하다
張重華遣謝艾하여 帥歩騎三萬하고 進軍臨河할새 艾乗軺車하고 戴白幍하고 鳴鼓而行注+軺車, 立乘小車也. 幍, 本作帢.하다
秋望見하고 怒曰 艾年少書生으로 冠服如此하니 輕我也라하고 命黑矟龍驤三千人하여 馳擊之注+矟, 音朔, 矛長丈八, 謂之矟.하니 艾左右大擾
艾踞胡床하고 指麾處分하니 趙人 以爲有伏兵이라하여 懼不敢進이라
别將張瑁 自間道 引兵截趙軍後하니 趙軍 退어늘 艾乗勢進撃하여 大破之하다
趙王虎復遣孫伏都하여 帥歩騎二萬하고 會秋軍하여 長驅濟河어늘
艾又破之하니 虎嘆曰 吾以偏師 定九州러니 今以九州之力으로 困於枹罕하니 彼有人焉하여 未可圖也로다
趙築華林苑하다
趙主虎據十州之地하고 聚斂財物 不可勝記로되 猶以爲不足하여 悉發前代陵墓하여 取其金寳注+十州, 幽․幷․冀․司․豫․兗․靑․徐․雍․秦.하다
沙門吳進 言於虎曰 胡運將衰 晉當復興하리니 宜苦役晉人하여 以厭其氣注+厭, 一葉切.니이다
虎遂發近郡男女十六萬人 車十萬乗하여 運土築華林苑하고 及長牆于鄴北할새 然燭夜作이러니 暴風大雨하여 死者數萬人이러라
郡國 前後送蒼麟十六 白鹿七이어늘 虎命司虞調之하여 以駕芝蓋注+晉職官志, 太僕之屬, 有典虞都尉, 趙之司虞, 卽是官也. 調者, 調和其性也, 猶馴擾之義. 芝蓋者, 蓋爲瑞芝之形.하다 命太子宣하여 祈福於山川하고 因行遊獵할새
乗大輅하고 羽葆, 華蓋 建天子旌旗하고 戎卒十八萬으로 出自金明門注+葆, 音保. 合聚五采羽, 爲幢, 名曰羽葆, 建於車上也. 水經註 “鄴城有七門, 南曰鳳陽門, 中曰中陽門, 次曰廣陽門, 東曰建春門, 北曰廣德門, 次曰廐門, 西曰西明門, 蓋卽金明門也.하다
虎升凌霄觀하여 望之注+觀, 古玩切.하고 笑曰 我家父子如是하니 自非天崩地陷이면 當復何愁리오 但抱子弄孫하여 日爲樂耳라하니라
所舍 縱獵하니 士卒饑凍死者 萬餘人이라 所過三州十五郡 資儲皆無孑遺注+宣所過三州, 蓋司․兗․豫也.러라
虎復命秦公韜하여 繼出할새 自并州 至于秦, 雍 亦如之하니 怒其與己鈞敵한대 宦者趙生 勸宣除之하다
冬十月 以張重華 爲涼州刺史西平公하다
遣侍御史俞歸하여 授重華官爵하니 重華欲稱涼王하여 未肯受詔하고
使所親으로 私謂歸曰 主公 奕世爲晉忠臣이어늘 今曾不如鮮卑 何也注+奕世, 累葉也. 鮮卑, 指慕容皝, 咸康七年, 封燕王.
歸曰 吾子失言이로다 昔三代之王也 爵之貴者 莫若上公注+三代封建, 列爵五等, 曰公․侯․伯․子․男. 上公, 九命作伯.이러니 及周之衰하여 吳, 楚始僭號稱王이로되 而諸侯亦不之非하니 蓋以蠻夷畜之也
借使齊, 魯稱王이면 諸侯豈不四面攻之乎 漢高祖封韓, 彭爲王이라가 尋皆誅滅하니 蓋權時之宜 非厚之也
聖上 以貴公忠賢故 爵以上公하고 任以方伯하시니 寵榮 極矣 豈鮮卑夷狄所可比哉
且吾聞之호니 功有大小하고 賞有重輕이라하니 今貴公 始繼世而爲王注+言重華始繼父位, 未有功於晉, 而求爲王也.하니
若帥河右之衆하여 東平胡, 羯하고 修復陵廟하고 迎天子하여 返洛陽이면 將何以加之乎 重華乃止하다
楊初遣使稱藩이어늘 詔以初爲雍州刺史仇池公하다


[] 나라(동진東晉) 효종孝宗 목황제穆皇帝 영화永和 3년이다.
[] 나라(후조後趙) 태조太祖 석호石虎 건무建武 13년이다.
이해에 나라(성한成漢)가 망하니, 큰 나라(후조後趙)가 하나이고 작은 나라(전량前涼전연前燕)가 셋으로, 합하여 참국僭國이 넷이다.
[] 봄 3월에 환온桓温나라(성한成漢) 군대를 작교笮橋(작교)에서 물리치고 전진하여 나라의 도성인 성도成都에 이르렀다. 한주漢主 이세李勢가 항복하자, 조서를 내려 귀의후歸義侯로 삼았다.
[] 환온桓溫의 군대가 청의현青衣縣注+① 青衣縣은 漢나라 때에는 蜀郡에 속하였는데 後漢 順帝 陽嘉 2년(133)에 이름을 漢嘉로 바꿨으며 蜀漢은 漢嘉郡을 세웠다. 劉昫가 말하였다. “眉州 靑神縣은 靑衣江에 임하였는데, 西魏가 청의현을 설치하였다. 靑衣水는 盧山의 변방 밖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흘러 武陽에 이르러 長江과 합류한다.” 이르니, 나라가 크게 군대를 징발하여 합수合水注+② ≪水經註≫에 “長江은 동남쪽으로 犍爲의 武陽縣을 지나가는데, 靑衣水와 沫水가 서남쪽으로 와서 합류한다.” 하였으니, 이른바 合水(땅 이름)는 마땅히 이 지역일 것이다. 달려와 막을 적에 여러 장수들이 강의 남쪽에 복병伏兵을 설치하여 나라(동진東晉)의 군대를 대비하고자 하였으나, 장군 잠견昝堅(잠견)이注+③ 昝은 子感의 切이니, 昝堅은 사람의 성명이다.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건위犍爲로 향하였다.
[] 환온桓溫의 군대가 팽모彭模注+① 彭模는 바로 漢나라 犍爲郡 武陽縣의 彭亡 부락이니, 바로 岑彭이 죽은 곳이다. 이르니, 의논하는 자들이 군대를 둘로 나누어서 길을 달리하여 함께 진격해서 나라의 군세軍勢를 분산시키고자 하였으나,
원교袁喬가 말하기를 “지금 군대를 이끌고 멀리 쳐들어왔으니, 마땅히 세력을 연합하여 일전一戰의 승리를 취해야 합니다. 〈두 길로 나갔다가〉 만일 한쪽이 패하면注+② “偏敗”는 두 길로 함께 전진하다가 혹 한 군대가 蜀에게 패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대사가 잘못될 것이니, 군대를 온전히 하고 전진하여 취사도구인 가마솥과 시루를 버리고 3일 치의 식량만 가지고 가서 돌아올 마음이 없음을 보이는 것만 못합니다. 이렇게 하면 승리를 기필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환온이 그의 말을 따라서 참군參軍 손성孫盛을 남겨두어 잔약한 군대를 거느리고서 치중대輜重隊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보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성도成都로 향하였는데, 전진하다가 나라 장수 이권李權을 만나서 세 번 싸워 세 번 이기니, 나라 군대가 달아나 흩어졌다.
잠견昝堅건위犍爲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환온과 다른 길로 가고 있음을 알고는 다시 돌아오니, 환온이 성도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길거리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잠견의 무리가 저절로 궤멸되었다.
[] 이세李勢가 병력을 총동원하여 나와 작교笮橋에서注+① 笮은 음이 昨이다. 대오리로 꼰 새끼이니, 대나무 발로 다리의 평면을 만들고 대오리를 꼬아서 만든 새끼로 동여맨 것이다. 笮橋는 蜀郡 萬里橋의 서쪽에 있다. 싸우니, 환온의 선봉 부대가 불리하여 화살이 환온의 말 머리까지 날아왔다.
여러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후퇴하고자 하였는데, 북을 치는 관리가 잘못 진군進軍을 알리는 북을 치니,注+② 북을 크게 쳐서 여러 군사들을 전진시키는 것을 “進鼓”라 한다. 원교袁喬가 검을 뽑아 사졸들을 독려하여 힘써 싸워서 마침내 이세를 대파하였다.
환온이 승승장구하여 성도에 이르러 불을 놓아 그 성문을 불태우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싸울 마음이 없었다.
이세가 수레에 을 싣고서 얼굴을 내놓고 두 손을 뒤로 묶고 군문軍門으로 나와 항복하였다. 환온이 이세를 건강建康으로 압송하고 나라 사공司空 초헌지譙獻之 등을 데려다가 참모와 보좌로 삼고 어진 이를 등용하고 선한 사람을 표창하니, 지방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성도成都에 머무른 지 30일 만에 군대를 정돈하여 강릉江陵으로 돌아오니, 황제( 목제穆帝)가 조칙을 내려 이세를 귀의후歸義侯에 봉하였다.
[] 여름 4월에 나라(후조後趙)가 양주涼州(전량前涼)를 공격하니, 장중화張重華사애謝艾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출동하여 격파하게 하였다.
[] 나라 마추麻秋부한枹罕(부한)을 공격하니, 진창태수晉昌太守 낭탄郞坦외성外城을 포기하려고 하였는데,注+① 惠帝가 敦煌과 酒泉을 나누어 晉昌郡을 설치하였는데, 郞坦은 城이 커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外城을 포기하고자 한 것이다. 무성태수武成太守注+② 武成郡은 張氏가 설치하였다. 장전張悛(장전)이 말하기를 “외성을 포기하면 여러 사람의 마음이 동요하여 대사를 그르칠 것입니다.” 하고는 대성大城을 굳게 지켰다.
마추가 8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참호塹壕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 운제雲梯지돌地突(땅굴)注+③ 地突은 지하 통로를 만들어서 성안으로 예기치 못하게 나오는 것이다. 등 온갖 방법으로 진격하자, 성안에서 이들을 막으니, 마추의 병력 중에 사상자가 수만 명이었다. 마추가 후퇴하여 대하현大夏縣注+④ 大夏縣은 漢나라 때에는 隴西郡에 속하였는데, 張軌가 나누어 晉興郡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또 다시 나누어 大夏郡을 설치하였다. 지켰다.
[] 장중화張重華사애謝艾를 보내어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진군하여 황하에 임할 적에 사애가 초거軺車를 타고 백도白幍(백도)를 쓰고서注+① 軺車는 서서 타는 작은 수레이다. 幍(도)는 본래 帢으로 되어 있다. 북을 울리며 전진하였다.
마추麻秋가 이것을 바라보고 노하여 말하기를 “사애는 나이가 젊은 서생인데 과 의복이 이와 같으니, 이는 나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고는 검은 창을注+② 矟은 음이 朔이니, 창의 길이가 1丈 8尺인 것을 삭이라 한다. 잡은 날쌘 기병 3천 명에게 명하여 달려가 공격하게 하니, 사애의 좌우 군대가 크게 동요하였다.
사애가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지휘하여 처분을 내리니, 나라 군대는 복병伏兵이 있다고 여겨서 두려워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별장别將 장모張瑁가 샛길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조군趙軍의 후미를 차단하자, 조군이 후퇴하므로 사애가 승세를 타고 진격해서 조군을 대파하였다.
[]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다시 손복도孫伏都를 보내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마추麻秋의 군대와 연합하여 길게 내달려 황하를 건너게 하였다.
사애謝艾가 또다시 이들을 격파하니, 석호가 탄식하기를 “내가 한 군대로 9를 평정하였는데, 지금은 9주의 병력을 가지고 부한枹罕에서 곤궁하니, 저쪽에 훌륭한 인물이 있어서 대책對策을 세울 수 없구나.” 하였다.
[] 나라(후조後趙)가 화림원華林苑을 건축하였다.
[] 조주趙主 석호石虎가 10注+① 10주는 幽州, 幷州, 冀州, 司州, 豫州, 兗州, 靑州, 徐州, 雍州, 秦州이다. 땅을 점거하고 취렴聚斂한 재물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나,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겨서 전대前代능묘陵墓를 모두 발굴하여 능묘 안의 금은보화를 취하였다.
사문沙門(승려) 오진吳進이 석호에게 말하기를 “오랑캐의 운이 장차 쇠하고 나라가 마땅히 다시 흥성할 것이니, 나라 사람들에게 고된 부역을 시켜서 그 기운을 눌러야 합니다.”注+② 厭(누르다)은 一葉의 切이다. 하였다.
석호가 마침내 가까운 의 남녀 16만 명과 수레 10만 대를 징발해서 흙을 운반하여 화림원華林苑을 축조하고 업성鄴城 북쪽에 긴 담장을 쌓을 적에 촛불을 밝혀 밤에도 일하게 하였는데, 폭풍이 치고 큰비가 내려서 죽은 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 군국郡國에서 그동안 푸른 기린 16마리와 흰 사슴 7마리를 보내었는데, 석호石虎사우司虞에게 명하여 이들을 길들여 영지靈芝 모양의 일산日傘을 단 수레를 끌게 하였다.注+① ≪晉書≫ 〈職官志〉에 따르면 太僕의 屬官에 典虞都尉가 있는데, 趙나라의 司虞가 바로 이 관직이다. 調는 그 성질을 조화롭게 하는 것이니, 길들인다는 뜻과 같다. “芝蓋”는 상서로운 靈芝 모양으로 만든 日傘이다. 태자 석선石宣에게 명하여 산천의 신에게 복을 빌게 하였고, 이로 인하여 유람하고 사냥하게 하였다.
이때 석선이 태로大輅(태로)를 탔는데, 태로의 우보羽葆화개華蓋에 천자의 깃발을 꽂고 병졸 18만 명을 호위병으로 삼아 금명문金明門에서 출발하였다.注+② 葆는 음이 保이다. 五采의 깃털을 모아 幢(당)을 만들고 이것을 羽葆라 하니, 수레 위에 세운다. ≪水經註≫에 하였는데, 서명문이 바로 金明門이다.
석호가 능소관凌霄觀注+③ 觀(구경하다)은 古玩의 切이다. 올라 이것을 바라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우리 집 부자父子가 이와 같으니, 만일 하늘이 꺼지고 땅이 무너지는 경우가 아니면 마땅히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다만 아들을 안고 손자를 어르면서 날마다 즐거워할 뿐이다.” 하였다.
[] 석선石宣이 머무르는 곳에서 멋대로 사냥을 하니, 사졸 중에 굶주리고 얼어 죽은 자들이 만여 명이었다. 석선이 사냥을 위해 지나간 고을이 3개 주,注+① 石宣이 지나간 세 州는 아마도 司州, 兗州, 豫州인 듯하다. 15개 군이었는데, 석선이 지나가면 고을에 저축해놓은 물자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석호가 다시 진공秦公 석도石韜에게 명하여 자기의 뒤를 이어 출행하게 하자, 석도도 병주并州에서부터 진주秦州, 옹주雍州에 이르기까지 또한 이와 같이 하니, 석선은 석도의 세력이 자기와 대등한 것에 노여워하였다. 이에 환관宦官 조생趙生이 석선에게 석도를 제거하도록 권하였다.
[] 겨울 10월에 〈나라(동진東晉)가 전량前涼의〉 장중화張重華양주자사涼州刺史 서평공西平公으로 삼았다.
[] 시어사侍御史 유귀俞歸를 파견하여 장중화張重華에게 관작을 제수하였는데, 장중화는 양왕涼王을 칭하고자 하여 조정(동진東晉)의 명령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친한 사람을 시켜 은밀히 유귀에게 이르기를 “주공主公은 여러 대 동안 나라의 충신이 되었는데, 지금의 작위가 선비鮮卑만도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注+① “奕世”는 累代이다. 鮮卑는 慕容皝을 가리키니, 咸康 7년(341)에 燕王에 봉해졌다. 하였다.
이에 유귀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가 실언을 하였다. 옛날 삼대三代 시대 왕 노릇 할 적에 관작 중에 상공上公보다 더 귀한 것이 없었다.注+② 三代 시대에 제후들을 봉하여 나라를 세울 적에[封建] 다섯 등급의 작위를 나열하니, 公, 侯, 伯, 子, 男이었는데, 그중에 上公이 가장 높은 작위인 九命으로 伯(패)가 되었다. 그런데 나라가 쇠하게 되자, 나라와 나라가 처음 참람하게 왕이라는 칭호를 썼으나, 제후들이 또한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으니, 이는 오랑캐로 그들을 대한 것이다.
가령 나라와 나라가 왕을 칭했다면 제후들이 어찌 사면四面에서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겠는가. 나라 고조高祖한신韓信팽월彭越을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가 얼마 후에 모두 죽이고 멸망시켰으니, 이는 임시변통의 계책이지 후대厚待한 것이 아니다.
성상聖上귀공貴公(장중화)이 충성스럽고 어질기 때문에 상공의 작위를 내리고 방백方伯의 임무를 맡기셨으니, 총애와 영광이 지극하다. 어찌 오랑캐인 선비鮮卑에 견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듣건대 에는 큰 것과 작은 것이 있고 에는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있다 한다. 이제 귀공이 처음 대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注+③ 〈“今貴公始繼世而爲王”은〉 장중화가 처음으로 아버지의 지위를 이었으나 晉나라에 공이 있지 않으면서 왕이 되기를 구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만일 하서河西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동쪽으로 을 평정하고 나라 선제先帝의 능묘를 수복修復하고는 천자를 맞이하여 낙양洛陽으로 돌아간다면 장차 무슨 칭호로써 더해주어야 하겠는가.” 장중화가 이에 중지하였다.
[] 양초楊初가 사신을 보내어 번신藩臣을 칭하자, 조령을 내려 양초를 옹주자사雍州刺史 구지공仇池公으로 삼았다.


역주
역주1 (深)[沫] : 저본에는 ‘深’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沫’로 바로잡았다.
역주2 鄴城에……西明門이다 : 이 내용은 ≪水經註≫ 권10 〈濁漳水 淸漳水〉에 보인다. ≪수경주≫의 내용에는 西明門이 金明門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資治通鑑≫에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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