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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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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乙酉晉孝武皇帝太元十年하여 盡戊戌晉安帝隆安二年하니 凡十四年이라
十年이라
秦王符丕大安元이요 後秦白雀二年이라 ◑ 西燕主慕容沖 更始元年이라 ◑ 西秦王乞伏國仁 建義元年이라
◑ 舊大國三이요 新大國一이요 小國一이니 凡五僭國이라
春正月 燕慕容沖 稱帝于阿房注+① 先是, 謠曰 “鳳凰止阿房.” 堅以“鳳凰非梧桐不棲, 非竹實不食.” 乃植桐․竹數十萬株于阿房城, 以待之, 沖小字鳳凰, 至是上阿房城.하다
是爲西燕注+① 垂復興於山東, 而沖稱號於關中, 故書西燕以別之.이라
◑ 沖 稱帝改元하고 有自得之志하여 賞罰任情이러니
慕容盛 年十三 謂慕容柔曰 十人之長 亦須才過九人然後 得安注+① 長, 知兩切.이라 今中山王 才不逮人이요 功未成이어늘 而驕已甚하니 殆難濟乎注+② 沖在前燕時, 封中山王.인저
西燕主沖 襲長安하니 秦王堅 與戰敗之하다
秦王堅 與西燕主沖으로 戰于仇班渠雀桑하여 皆破之注+① 仇班渠․雀桑, 皆地名, 在京兆東北.러니 又戰于白渠하여 秦兵注+② 白渠, 卽漢時白公所鑿者也.하다
遣尙書令高蓋하여 夜襲長安하여 入其南城하니 秦將軍竇衝等 擊破之하고 秦王堅 與戰于城西하여 又大破之하고 追奔至阿城而還注+③ 阿城, 卽阿房宮城.하다
秦益州刺史王廣 棄成都走注+① 廣, 統之弟也.하다
◑ 燕將軍平規 攻薊拔之하다
◑ 西燕馮翊太守韋謙 來奔하다
西燕主沖 執秦尙書韋鍾하고 以其子謙爲馮翊太守하여 使招集三輔어늘
壘主邵安民 責之曰 君 雍州望族注+① 七相五公雍州之望族. 鍾, 蓋韋賢後也.이어늘 今乃從賊하여 與之爲不忠不義하니 何面目以行於世乎리오
謙以告鍾한대 自殺하니 來奔이러라
滎陽郡하다
◑ 燕 遣將軍慕容麟하여 屯信都하고 屯中山하다
燕王垂 攻鄴久不下 將北詣冀州할새
乃命趙王麟하여 屯信都하고 樂浪王溫 屯中山하고 召遼西王農하여 還鄴注+① 溫, 垂之弟子也.하니 於是 遠近 以燕爲不振이라하여 頗懐去就러라
至高邑하여 遣從事眭邃近出이러니 違期不還注+① 高邑, 本鄗縣, 漢光武卽位于此, 改曰高邑, 屬常山. 晉志, 屬趙國. 眭, 音雖, 眭邃, 姓名.하다
長史張攀 請討之어늘 不應하고 假邃高陽太守하고 參佐家在趙北者 悉假署遣歸注+② 趙北, 趙國以北也. 假署者, 權時以假板署置其官, 未以白燕王垂也.하고 退謂攀曰
君所見 殊誤 當今 豈可自相魚肉이리오 俟吾北還하여 邃等 當迎於道左耳리라
在中山하여 兵力甚弱이러니 撫舊招新하며 勸課農桑하니 民歸附者相繼 壁壘爭送軍糧하니 倉庫充溢이러라
翟眞 夜襲中山이어늘 擊破之注+① 眞, 斌之兄子也.하고 乃遣兵運糧以餉垂하고 且營中山宮室注+② 欲迎垂都中山也.하다
夏四月 劉牢之 進兵至鄴하니 燕王垂逆戰이라가 敗走中山이어늘 牢之追擊이라가 大敗而還하다
牢之至枋頭하니 楊膺․姜讓謀泄하여 長樂公丕收殺之어늘
牢之聞之하고 盤桓不進이러니 及是하여 乃至鄴하니 燕王垂 逆戰而敗
遂撤圍北遁이어늘 牢之引兵追之하여 疾趨二百里하여 至五橋澤하여 爭燕輜重注+① 五橋澤, 在臨漳縣北.이러니 垂邀擊大破之
牢之單馬走러니 會秦救至하여 得免하다
鄴中 饑甚이라 丕帥衆하고 就晉榖於枋頭하다
牢之入屯鄴城하니 兵復少振이러니 尋坐軍敗徵還하고 丕亦還鄴하다
燕․秦相持經年 幽․冀人相食하여 邑落蕭條
垂以桑椹爲軍糧하여 北趣中山할새 使農先驅하니 邃等 皆來迎이라 上下如初러라
會稽王道子 專權하고 復爲姦諂所構하여 與安有隙이러니 秦來求救하니
乃請自將救之하여 出鎭廣陵하여 築新城而居之하다
蜀郡太守任權 攻拔成都하고 復取益州하다
◑ 後秦 攻秦新平하여 拔之하다
秦新平太守苟輔 堅守以拒後秦이러니 糧竭矢盡하고 外救不至
後秦王萇 使人謂曰 吾方以義取天下하니 豈讐忠臣邪 但帥衆還長安하라 吾正欲得城耳로라
輔帥民出하니 圍而阬之하다
五月 西燕 攻長安하니 秦王堅 出奔五將山하다
西燕主沖 攻長安이어늘 秦王堅 身自督戰하여 飛矢滿體러라 縱兵暴掠하니 士民流散하고 道路斷絶이라
有堡壁三十餘 結盟冒難하여 遣兵糧助堅이라가 多爲西燕兵所殺이러라
三輔民爲沖所略者 密遣人告堅호되 欲縱火爲内應이라한대
堅曰 甚哀諸卿忠誠하노라 吾以猛士利兵으로 困於烏合之虜하니 豈非天乎 恐徒使諸卿夷滅하니 吾不忍也하노라
其人 固請이러니 果不克而死注+① 通鑑 “其人固請不已, 乃遣七百騎, 赴之沖營, 縱火者反爲風火所燒, 其得免者什一二.”하다
堅驍將楊定 戰復被禽注+① 定, 堅之壻也. 通鑑 “定, 佛奴之孫也.” 北史 “定, 佛奴之子, 佛奴, 宋奴之子也.”하니 大懼하여 以讖書云 帝出五將久長得이라하여 乃留太子宏하여 守長安하고 帥騎數百하여 與張夫人․中山公으로 奔五將山하고 告州郡하여 期以孟冬救長安注+② 水經註 “扶風杜陽縣, 有五將山.”하다
六月 秦太子宏 奔下辨하니 西燕主沖 入長安하다
不能守하여 出奔이어늘 入長安하여 縱兵大掠하니 死者不可勝計러라
秋七月하여하고 井竭하다
◯ 後秦 圍五將山하여 執秦王堅以歸하다
◑ 秦太子宏 來奔이어늘 處之江州하다
◑ 八月 太保建昌公謝安하다
有疾求還하여 至建昌而卒하니 詔加殊禮以塟하고 諡曰文靖이라하다
以琅琊王道子 領揚州刺史錄尙書都督中外諸軍事하다
後秦王萇 幽秦王堅于别室하고 使求傳國璽한대 叱之曰 五胡次序 無汝羌名하니 璽已送晉이라 不可得也注+① 胡․羯․鮮卑․氐․羌, 五胡之次序也. 無汝羌名, 謂讖文耳. 姚萇自謂次應曆數, 堅故亦以讖文爲言.니라
復遣右司馬尹緯하여 說堅注+② 求爲禪代也.한대 問緯호되 在朕朝何官 緯曰 尙書令史注+③ 後漢以來, 尙書有令史十八人, 秩二百石.로이다
歎曰 卿 王景略之儔어늘 而朕不知하니 宜其亡也로다
自以平生遇萇有恩이라하여 尤忿之하여 數罵萇求死하니 遣人縊之한대 張夫人, 中山公詵 皆自殺이라 後秦將士 亦皆哀慟이러라
欲隠其名하여 諡堅曰壯烈天王이라하다
司馬公曰
論者 皆以爲堅之亡 由不殺慕容垂, 姚萇이라호되 臣獨以爲不然이라하노라
使堅治國 無失其道 則垂, 萇 皆秦之能臣也 烏能爲亂哉리오
李克 有言호되 數戰則民疲하고 數勝則主驕 以驕主御疲民이면 未有不亡者也라하니 似之矣로다
秦符丕 稱帝于晉陽하다
秦長樂公丕 將赴長安이러니 幽州刺史王永 自薊走壺關하여 遣使招之어늘
丕乃帥鄴中男女六萬餘口하고 西如潞川하니 將軍張蚝 幷州刺史王騰 迎入晉陽하고 永以騎來會
丕始知堅死하고 乃發喪卽位하다
遣南中郞將慕容和하여 守鄴注+① 和, 垂之弟子也.하다
◑ 劉顯 弑其君頭眷而自立하다
庫仁之子也 旣殺頭眷 又將殺拓跋珪注+① 珪依庫仁, 見上元年.하니 珪遂奔賀蘭部하여 依其舅賀訥이러니
訥兄染干 忌珪得衆心하여 擧兵圍之어늘 珪母謂曰 汝等 欲於何置我而殺吾子乎아하니 染干 慙而去하다
九月 秦呂光 還自龜兹하여 擊涼州하여 殺其刺史梁熙而代之하다
呂光 以龜兹饒樂이라하여 欲留居之注+① 樂, 音洛.러니 天竺沙門鳩摩羅什曰注+② 鳩摩羅, 姓也. 什, 其名. 一云 “鳩摩, 虜姓. 羅什, 其名.” 此不足留 將軍 但東歸하라 自有福地可居注+③ 鳩摩羅什, 知數, 知呂光必得涼州之地而據之.하니라
乃以駝二萬餘頭 載外國珍寶奇玩하고 驅駿馬萬匹而還하여 兵至宜禾注+④ 班志 “敦煌郡廣至縣昆崙障, 宜禾都尉治, 晉分爲宜禾縣, 屬晉昌郡.”하니 涼州刺史梁熙 謀閉境拒之어늘
高昌太守楊翰曰注+⑤ 李延壽曰 “高昌者, 車師前王之故地. 昔漢武帝遣兵西討, 師旅頓弊, 其中尤困者住焉. 地勢高敞, 人庶昌盛, 因名高昌. 其地有漢時高昌壘, 晉爲高昌郡, 後因爲國名.” 新破西域하여 兵彊氣銳하고 聞中原喪亂 必有異圖 若出流沙 其勢難敵이라
高梧谷口 險阻之要 宜先守之而奪其水注+⑥ 高梧谷口, 當在高昌西界.하면 彼旣窮渴하여 可以坐制 如以爲遠이어든 伊吾關 亦可拒也注+⑦ 伊吾縣, 晉置. 屬晉昌郡, 有伊吾關. 度此二阨이면 雖有子房之策이나 無所施矣리라 熙不聽하다
美水令張統曰 行唐公洛 上之從弟 勇冠一時하니 若奉爲盟主하여 以帥群豪하면 則光雖至 不敢有異心이니 資其精銳하여 東合四州하여 掃兇逆하고 寧帝室이면 此桓文之擧也注+① 通鑑 “東兼毛興, 連王統․楊璧, 合四州之衆.” “興時刺河州, 統時刺秦州, 璧時刺南秦州.”니이다 熙又不聽하고 而殺洛於西海注+② 上五年, 洛反被禽, 堅赦不誅, 徙涼州之西海郡.하다
聞翰謀하고 懼不敢進이어늘 杜進曰 熙文雅有餘 機鑑不足하니 終不能用이니 宜及其上下離心하여 速取之하라
至高昌하니 翰以郡降하다 至玉門하니 熙移檄하여 責光擅命還師하고 遣其子㣧하여 帥衆拒之어늘 破擒之하다
武威太守彭濟 執熙以降이어늘 殺之하고 入姑臧하여 自領涼州刺史하니 郡縣皆降호되 獨酒泉宋皓 西郡索泮 不下注+① 漢分張掖之日勒․刪丹等縣, 置西郡, 其地當嶺要.러라
攻而執之하여 責泮不降한대 泮曰 將軍 受詔平西域이요 不受詔亂涼州하니 梁公何罪而將軍殺之 泮力不足하여 不能報讐하니 主滅臣死 固其宜也니라 光皆殺之하다
主簿尉祐 姦佞傾險하여 與濟同執熙注+① 尉, 讀如字, 姓也.하니 光寵信之
祐譖殺名士十餘人하니 涼州人 由是不悅이러라
乞伏國仁 自稱單于하다
國仁 稱單于置將相하고 分其地하여 置十二郡하고 築勇士城而都之어늘 封以爲苑川王하니 是爲西秦注+① 十二郡, 武城․武陽․安固․武始․漢陽․天水․略陽․漒川․甘松․匡朋․白馬․苑川也. 苑, 通作菀. 水經註 “苑川水, 出勇士縣之子城南山, 北逕牧師菀, 故漢牧菀之地也. 有東西二菀城, 其城相去七里. 西城, 卽乞所都.”이라
河北州郡 復降於秦하다
符定, 符紹, 符謨, 符亮 皆自河北으로 遣使謝罪注+① 謨, 堅之從弟. 亮, 堅之從子也. 上年, 燕慕容麟, 拔常山, 謨․亮皆降.하고 中山太守王兗 固守博陵하여 爲秦拒燕注+② 博陵國, 屬冀州.이어늘 丕以定等으로 皆爲河北牧守하다
楊定 自西燕으로 亡奔隴右하여 收集舊衆하고 竇衝 據玆川하여 有衆數萬이라
與定及秦州刺史王統, 河州毛興, 益州王廣, 南秦州楊壁으로 皆自隴右 遣使邀丕하여 共擊後秦注+③ 玆川, 卽霸川也. 霸水, 古曰滋水, 秦穆公之霸也, 更滋水曰霸水, 以顯霸功. 今曰玆川, 因古名也. 壁, 堅之壻也.이어늘 丕各進其位號하다
尋徙治歴城하여 自稱仇池公하고 遣使稱藩于晉이러니 又取天水, 略陽之地하고 自稱隴西王하다
冬十一月 燕以慕容農으로 爲幽州牧하여 守龍城하다
燕將軍餘巖 叛據令支하고 而高句麗亦擊取其遼東二郡이어늘 燕王垂 遣農하여 討巖斬之하고 進擊高句麗하여 復取二郡하고 還至龍城하여 繕修陵廟注+① 燕自慕容皝以前, 皆葬遼西, 故陵廟在焉.하다
垂以農爲幽州牧하여 留鎭之한대 法制寬簡하여 清刑獄하고 省賦役하고 勸農桑하니 居民富贍이라 四方流民至者 數萬이러라
攻博陵하니 城中 糧竭矢盡이라 功曹張猗 踰城出하여 聚衆以應麟이어늘 臨城數之曰
卿是秦民이요 吾是卿君이라 起兵應賊而號義兵하니 何名實之相違也 古人 求忠臣 必於孝子之門이라 卿母在城이어늘 棄而不顧하니 吾何有焉이리오
今人 取卿一時之功則可矣어니와 寧能忘卿不忠不孝之罪乎 不意中州禮義之邦 乃有如卿者也니라 麟拔博陵하고 執兗殺之하다
定都中山하다
燕王垂 北如中山하여 謂諸將曰 樂浪王 招流散하고 實倉廩하여 外給軍糧하고 内修宮室하니 雖蕭何 何以加之리오하고 乃定都焉하다


≪資治通鑑綱目≫ 제22권은 乙酉年 晉나라(東晉) 孝武皇帝 太元 10년(385)부터 戊戌年 晉나라 孝安皇帝 隆安 2년(398)까지이니, 모두 14년이다.
【綱】 晉나라(東晉) 孝武皇帝 太元 10년이다.
【目】 秦王(前秦) 符丕 大安 원년이고, 燕나라(後燕) 世祖 慕容垂 燕元 2년이고, 後秦 太祖 姚萇 白雀 2년이다. 西燕主 慕容沖 更始 원년이다. 西秦王 乞伏國仁 建義 원년이다.
옛날에 있던 큰 나라(前秦, 後燕, 後秦)가 셋이고, 새로 생긴 큰 나라(西燕)가 하나이고, 작은 나라(西秦)가 하나이니, 합하여 僭國이 다섯이다.
【綱】 봄 정월에 燕나라(西燕) 慕容沖이 阿房에서 황제를 칭하였다.注+① 이보다 앞서 동요에 “봉황이 아방에 앉는다.”라고 하니, 符堅은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라고 하고, 마침내 오동나무와 대나무 수십만 그루를 阿房城에 심어서 봉황이 오기를 기다렸다. 慕容沖의 어릴 적 字가 鳳凰인데, 이때에 阿房城에 올랐다.
【目】 이것이 西燕이다.注+① 慕容垂가 다시 山東에서 일어났는데, 慕容沖이 關中에서 황제를 칭하였다. 그러므로 西燕이라고 써서 구별한 것이다.
【目】 慕容沖이 황제를 칭하고 개원하고서 자못 스스로 만족해하는 뜻이 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상을 주고 벌을 내렸다.
慕容盛이 이때 나이가 13살이었는데, 慕容柔에게 이르기를 “열 사람의 우두머리라도 재주가 아홉 사람보다 뛰어난 뒤에야 편안할 수 있다.注+① 長(우두머리)은 知兩의 切이다. 지금 中山王은 재주가 남에게 미치지 못하고 공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교만함이 이미 심하니, 아마도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注+② 慕容沖이 前燕에 있을 때에 中山王에 봉해졌다.
【綱】 西燕主 慕容沖이 長安을 습격하니, 秦王(前秦) 符堅이 그와 싸워 패주시켰다.
【目】 秦王 符堅이 西燕主 慕容沖과 함께 仇班渠와 雀桑에서 싸워서 모두 격파하였는데,注+① 仇班渠와 雀桑은 모두 지명이니, 장안의 京兆 동북쪽에 있었다. 또다시 白渠에서 싸워서는 秦나라(前秦) 군대가 패하였다.注+
모용충이 尙書令 高蓋를 보내어서 밤에 長安을 기습하여 장안 남쪽의 성으로 들어가니, 秦나라 장군 竇衝 등이 격파시키고 진왕 부견이 장안성 서쪽에서 그와 싸워서 또다시 대파시키고는 달아나는 군대를 阿城까지 추격하고 돌아왔다.注+③ 阿城은 바로 阿房宮城이다.
【綱】 秦나라(前秦) 益州刺史 王廣이 成都를 버리고 달아났다.注+① 王廣은 王統의 아우이다.
【綱】 燕나라(後燕) 장군 平規가 薊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綱】 西燕의 馮翊太守 韋謙이 달아나 晉나라(東晉)로 왔다.
【目】 西燕主 慕容沖이 秦나라(前秦) 尙書 韋鍾을 사로잡고 그의 아들 韋謙을 馮翊太守로 삼아서 그로 하여금 三輔 지역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게 하자,
(풍익 지역 보루의 우두머리) 邵安民이 위겸을 꾸짖기를 “그대는 雍州의 望族(명망 있는 가문)인데,注+① 〈韋謙의 집안은〉 7명의 정승과 5명의 公이 나온 雍州의 望族이니, 위종은 아마도 의 후손일 것이다. 지금 도리어 역적을 따르며 그와 함께 불충하고 불의한 짓을 하니,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아가겠는가.”라고 하였다.
위겸이 이 말을 위종에게 고하자 위종이 자살하니, 위겸이 달아나서 晉나라로 왔다.
【綱】 滎陽郡이 〈晉나라(東晉)에〉 항복하였다.
【綱】 燕나라(後燕)가 장군 慕容麟을 보내서 信都에 주둔하고 慕容溫은 中山에 주둔하였다.
【目】 燕王 慕容垂가 鄴城을 공격하였으나 오랫동안 함락하지 못하여 장차 북쪽의 冀州로 가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趙王 慕容麟에게 명하여 信都에 주둔하게 하고 樂浪王 慕容溫은 中山에 주둔하게 하고 遼西王 慕容農을 불러서 업성에 돌아오게 하니,注+① 慕容溫은 慕容垂의 아우의 아들이다. 이에 원근의 사람들이 燕나라가 떨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자못 떠날 마음을 품었다.
【目】 慕容農이 高邑에 이르러 從事 眭邃(수수)를 보내어 가까운 곳에 나갔다가 오게 하였는데, 기한을 어기고 돌아오지 않았다.注+① 高邑은 본래 鄗縣(호현)이니, 漢나라 光武帝가 이곳에서 즉위하고는 高邑이라 고쳤는바, 常山에 속하였다. ≪晉書≫ 〈地理志〉에는 “趙國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眭는 음이 雖이니, 眭邃는 사람의 성명이다.
長史 張攀이 수수를 토벌할 것을 청하자 모용농이 응하지 않고, 임시로 수수를 高陽太守로 삼고 참모와 보좌관들 중에 家屬이 북쪽 지역에 있는 자들에게 모두 임시로 그 지역의 관직을 주어서 돌려보내고,注+② ‘趙北’은 趙國의 이북 지역이다. ‘假署’라는 것은 임시로 을 가지고 관직에 임용하고 아직 燕王 慕容垂에게 아뢰지 않은 것이다. 물러나와 장반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소견이 매우 잘못되었다. 지금에 어찌 우리끼리 서로 죽여서야 되겠는가. 내가 북쪽으로 돌아갈 때가 되어 〈돌아가게 되면〉 수수 등이 마땅히 길 왼쪽에서 맞이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目】 慕容溫이 中山에 있을 적에 병력이 매우 약했는데, 예전에 있던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새로 들어오는 자들을 불러 모아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감독하니, 귀의하는 백성들이 서로 이어졌고, 壁壘에서는 앞 다투어 군량을 보내니 창고가 넘쳐났다.
〈丁零의〉 翟眞이 밤에 중산을 기습하자, 모용온이 적진을 격파하고注+① 翟眞은 翟斌의 형의 아들이다. 마침내 慕容垂에게 군대를 보내고 군량을 운반하여 공급하고 또 중산의 宮室을 경영하였다.注+② 〈中山에 궁실을 경영함은〉 慕容垂를 맞이하여 중산에 도읍하고자 한 것이다.
【綱】 여름 4월에 〈晉나라(東晉)의〉 劉牢之가 진군하여 鄴城에 이르니, 燕王(後燕) 慕容垂가 맞이해 싸우다가 패하여 中山으로 달아났다. 유뇌지가 추격하였다가 대패하고 돌아왔다.
【目】 劉牢之가 枋頭에 이르니, 이 누설되어 長樂公 符丕가 이들을 체포하여 죽였다.
유뇌지는 이 말을 듣고 머뭇거리고 전진하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鄴城에 이르니, 燕王 慕容垂가 맞아 싸우다가 패하였다.
모용수가 마침내 포위망을 풀고 북쪽으로 달아나자 유뇌지가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여 200리를 급히 달려가서 五橋澤에 이르러 앞다투어 연나라의 군수품을 빼앗고 있었는데,注+① 五橋澤은 臨漳縣 북쪽에 있었다. 모용수가 맞받아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유뇌지는 한 필의 말을 타고 도망하였는데, 마침 秦나라(前秦)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目】 〈秦나라(前秦)의〉 鄴城이 몹시 굶주리니, 符丕가 병력을 인솔하여 枋頭에 가서 晉나라가 원조한 곡식을 취하였다.
劉牢之가 업성에 들어가 주둔하니, 군대의 사기가 다시 조금 떨쳐졌는데, 얼마 안 되어 군대가 패한 죄에 걸려 유뇌지는 부름을 받아 돌아가고 부비 또한 업성으로 돌아갔다.
燕나라와 秦나라가 1년이 넘게 서로 대치하자, 幽州와 冀州에서는 양식이 떨어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고을과 부락에 인적이 드물었다.
慕容垂가 뽕나무 열매인 오디를 군량으로 삼아서 북쪽의 中山으로 달려갈 적에 慕容農으로 하여금 먼저 가게 하니, 眭邃(수수) 등이 모두 와서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상하 관계가 예전과 같아졌다.
【綱】 〈晉나라(東晉)의〉 太保 謝安이 나가 廣陵에 진주하였다.
【目】 會稽王 司馬道子가 권력을 전횡하고 또 간사한 사람들의 아첨하는 말을 들어 謝安과 틈이 있었는데, 마침 秦나라(前秦)에서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사안이 마침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할 것을 청하여 나가 廣陵에 진주하여 새로 성을 쌓고 거주하였다.
【綱】 〈晉나라(東晉)의〉 蜀郡太守 任權이 成都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다시 益州를 점령하였다.
【綱】 後秦이 秦나라(前秦) 新平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目】 秦나라 新平太守 苟輔가 성을 굳게 지키면서 後秦의 군대를 막았는데, 군량은 떨어지고 화살은 다하였는데도 외부의 구원병이 이르지 않았다.
後秦王 姚萇이 사람을 시켜서 구보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막 의리로써 천하를 취하려 하니, 어찌 충신을 원수로 삼겠는가. 경은 다만 군대를 거느리고 長安으로 돌아가라. 내 다만 新平城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보가 백성들을 거느리고 성을 나가자, 요장이 이들을 포위하여 전부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綱】 5월에 西燕이 長安을 공격하니, 秦王(前秦) 符堅이 나가 五將山으로 달아났다.
【目】 西燕主 慕容沖이 長安을 공격하자, 秦王 符堅이 직접 전투를 지휘하다가 날아온 화살이 온몸에 가득 꽂혔다. 모용충이 군대를 풀어서 사납게 노략질하니, 〈關中의〉 선비와 백성들이 흩어지고 도로에 인적이 끊겼다.
30여 곳이 맹약을 맺고 환란을 피하지 않고서 군대와 군량을 보내어 부견을 돕다가 대부분 西燕의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目】 慕容沖에게 침략당한 三輔 지역 백성들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符堅에게 고하기를 “불을 질러 안에서 응하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부견이 말하기를 “卿들의 충성이 매우 가엾다. 내 용맹한 병사와 예리한 병기를 가지고도 오합지졸의 오랑캐에게 곤궁하니, 어찌 천운이 아니겠는가. 다만 경들로 하여금 죽임을 당하게 할까 두렵다. 내 차마 하지 못하노라.”라고 하였다.
그 지역 사람들이 굳이 청하였는데, 과연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注+① ≪資治通鑑≫에 “그 사람이 그치지 않고 굳이 청하자 마침내 기병 700을 보내어 慕容沖의 진영으로 달려가게 했는데, 불을 놓은 자가 도리어 세차게 타오르는 불에 타 죽고 죽음을 면한 자는 열에 한두 명이었다.”라고 하였다.
【目】 符堅의 용맹한 장수 楊定이 싸우다가 또다시 사로잡히니,注+① 楊定은 符堅의 사위이다. ≪資治通鑑≫에 “양정은 楊佛奴의 손자이다.”라고 하였고, ≪北史≫에는 “양정은 양불노의 아들이고 불노는 楊宋奴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부견이 크게 두려워하여 ‘황제가 五將山으로 나가면 장구한다.’는 圖讖書를 근거로 마침내 태자 符宏을 남겨 장안을 지키게 하고,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서 張夫人과 中山公 符詵(부신)과 함께 오장산으로 달아나면서 州郡에 고하여 10월에 長安을 구원하기로 기약하였다.注+② ≪水經註≫에 “扶風의 杜陽縣에 五將山이 있다.”라고 하였다.
【綱】 6월에 秦나라(前秦) 太子 符宏이 下辨으로 달아나니, 西燕主 慕容沖이 長安에 들어갔다.
【目】 秦나라의 符宏이 長安을 지키지 못하여 달아나자 西燕主 慕容沖이 장안으로 들어가서 군대를 풀어 크게 노략질하니, 죽은 자들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綱】 가을 7월에 〈晉나라(東晉)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우물이 말랐다.
【綱】 後秦이 五將山을 포위하여 秦王(前秦) 符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綱】 秦나라(前秦) 太子 符宏이 달아나 晉나라(東晉)로 오자, 그를 江州에 거처하게 하였다.
【綱】 8월에 太保 建昌公 謝安이 卒하였다.
【目】 謝安이 병이 들어 돌아가기를 청하여 建昌에 이르러 卒하니, 詔令을 내려서 특별한 예를 더하여 장례하게 하고 시호를 文靖이라 하였다.
【綱】 〈晉나라(東晉)는〉 琅琊王 司馬道子를 領揚州刺史 錄尙書 都督中外諸軍事로 삼았다.
【綱】 後秦王 姚萇이 秦王(前秦) 符堅을 시해하였다.
【目】 後秦王 姚萇이 秦王 符堅을 별실에 유치하고 사람을 보내어 傳國璽를 요구하자, 부견이 꾸짖기를 “五胡의 차서에 너희 羌族의 이름은 없으니, 옥새를 이미 晉나라(東晉)로 보냈다. 너는 얻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注+① 胡, 羯, 鮮卑, 氐, 羌이 五胡의 차서이다. “너희 강족의 이름이 없다.”는 것은 讖文을 이를 뿐이다. 姚萇이 스스로 자기가 王者의 차례상 曆數(황제의 운수)에 응한다고 하니, 符堅이 일부러 또한 도참의 말로 말한 것이다.
요장이 다시 右司馬 尹緯를 보내어 부견을 설득하자,注+② 〈‘萇復遣右司馬尹緯 說堅’은〉 황위를 姚萇에게 선양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부견이 윤위에게 묻기를 “그대가 짐의 조정에 있을 때 무슨 벼슬을 하였는가?” 하니, 윤위가 대답하기를 “尙書令史였습니다.”라고 하였다.注+③ 後漢 이래로 尙書省에는 令史 18명이 있었으니, 秩이 二百石이다.
부견은 탄식하기를 “경은 王景略(王猛)의 무리인데 짐이 알아보지 못했으니, 내가 망한 것이 당연하다.”라고 하였다.
【目】 符堅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평소 姚萇을 은혜롭게 대우했다 하여 더욱 분노해서 자주 요장을 꾸짖어 죽기를 바라니, 요장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목매 죽이자, 張夫人과 中山公 符詵이 다 자살하였다. 이에 後秦의 장병들이 또한 모두 애통해하였다.
姚萇縊殺前秦王姚萇縊殺前秦王
요장은 부견을 시해한 오명을 숨기고자 하여 부견을 시호하여 壯烈天王이라 하였다.
【目】 司馬溫公(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符堅이 망한 것은 慕容垂와 姚萇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지만 나는 홀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일 부견이 나라를 다스릴 적에 그 道를 잃지 않았다면 모용수와 요장은 모두 秦나라의 유능한 신하였으니, 어찌 반란을 저질렀겠는가.
【綱】 秦나라(前秦) 符丕가 晉陽에서 황제를 칭하였다.
【目】 秦나라 長樂公 符丕가 장차 長安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때 幽州刺史 王永이 薊城에서 壺關으로 달려와 사자를 보내어 부비를 불렀다.
부비는 마침내 鄴城의 남녀 6만여 명을 거느리고 서쪽 潞川으로 가니, 장군 張蚝와 幷州刺史 王騰이 부비를 맞이하여 晉陽으로 들어가고 왕영이 기병을 데리고 와서 회합하였다.
부비는 이때에 부견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喪을 발표하고 즉위하였다.
【綱】 燕나라(後燕)가 南中郞將 慕容和를 보내어 鄴城을 지키게 하였다.注+① 慕容和는 慕容垂의 아우의 아들이다.
【綱】 〈匈奴의〉 劉顯이 그 군주 劉頭眷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目】 劉顯은 劉庫仁의 아들이다. 이미 劉頭眷을 시해하고 또 장차 拓跋珪를 죽이려 하니,注+① 拓跋珪가 劉庫仁에게 의지한 것은 위의 太元 원년(376)에 보인다. 탁발규가 마침내 賀蘭部로 달려가 외숙 賀訥에게 의지하였다.
하눌의 형 賀染干이 탁발규가 대중의 마음을 얻는 것을 시기하여 군대를 일으켜 포위하자, 탁발규의 어머니가 이르기를 “너희들이 어느 곳에 나를 두고자 하여 내 아들을 죽이려 하는가?”라고 하니, 하염간이 부끄러워하며 떠나갔다.
【綱】 9월에 秦나라(前秦) 呂光이 龜兹에서 돌아와 涼州를 공격하여 涼州刺史 梁熙를 죽이고 대신하였다.
【目】 처음에 呂光은 龜兹가 풍요롭고 안락하다 하여 여기에 머물러 거처하려 하였는데,注+① 樂(즐겁다)은 음이 洛이다. 天竺國의 沙門인 鳩摩羅什이 말하기를注+② 鳩摩羅는 성이고 什은 그의 이름이다. 일설에는 “鳩摩는 오랑캐의 복성이고 羅什은 그의 이름이다.”라고 한다. “이곳은 머물 만한 곳이 못 되니, 장군은 다만 동쪽으로 돌아가라. 자연 거처할 만한 복스러운 땅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注+③ 구마라습이 하늘의 운수를 알아 呂光이 틀림없이 涼州 지역을 얻어 점거할 것을 안 것이다.
鳩摩羅什鳩摩羅什
여광은 마침내 낙타 2만여 마리에 외국의 진귀한 보물과 기이한 물건을 싣고 준마 1만 필을 몰고 돌아가서 군대가 宜禾에 이르니,注+④ ≪漢書≫ 〈地理志〉에 “敦煌郡 廣至縣 昆崙障은 宜禾都尉가 있는 치소인데 晉나라 때에 나누어 宜禾縣을 만드니, 晉昌郡에 속하였다.”라고 하였다. 涼州刺史 梁熙가 모의하여 경내를 폐쇄하고 막았다.
高昌太守 楊翰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⑤ 李延壽가 말하였다. “高昌은 車師前王國의 옛 땅이다. 옛날 漢나라 武帝가 군대를 보내어 서쪽을 토벌할 때, 군대가 피폐해지니, 그중에 더욱 곤궁한 자들이 더욱 이곳에 머물렀다. 이 지역은 지세가 높고 평평하고 사람들이 번창하였으므로 인하여 고창이라 이름하였다. 이 땅에 漢나라 때의 高昌壘가 있었고 晉나라 때에 高昌郡을 만들었는데, 뒤에 인하여 國名으로 삼았다.” “여광이 새로 西域을 격파하여 군대가 강성하고 사기가 드높아 중원(秦나라)이 망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딴마음을 품을 것이니, 그가 만약 流沙로 나오면 그 기세를을 대적하기 어렵습니다.
高梧谷口는 매우 험한 요새이니, 마땅히 먼저 지키고서 그 물길을 끊으면注+⑥ 高梧谷口는 마땅히 高昌郡 서쪽 경계에 있었을 것이다. 저들이 이미 물이 고갈되어 앉아서 제재할 수 있고, 만일 이곳이 멀다고 생각된다면 伊吾關 또한 막을 만합니다.注+⑦ 伊吾縣은 晉나라 때에 설치하였다. 晉昌郡에 소속하였으니, 伊吾關이 있었다. 이 두 험한 곳을 지나오면 비록 子房(張良)의 계책이 있더라도 베풀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양희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目】 美水令 張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行唐公 符洛은 上(符堅)의 從弟입니다. 용맹이 當今의 으뜸이니, 만약 그를 받들어 맹주로 삼아서 여러 호걸을 거느리게 하면 呂光이 비록 이곳에 오더라도 감히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할 것이니, 그의 정예 병력을 이용하여 동쪽으로 를 연합해서 흉악한 반역자들을 소탕하고 황실을 편안히 하면 이는 齊 桓公과 晉 文公과 같은 霸者의 일입니다.”注+① ≪資治通鑑≫에 “동쪽으로 毛興을 겸하고 王統과 楊璧을 연합하여 4개 州의 무리를 모은다.”라고 하였고, 그 註에 “모흥은 이때 河州刺史였고, 왕통은 이때 秦州刺史였고, 양벽은 이때 南秦州刺史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梁熙는 또다시 듣지 않고 西海에서 부락을 죽였다.注+② 위의 太元 5년(380)에 符洛이 배반하여 사로잡혔는데, 符堅이 용서하여 죽이지 않고 涼州의 西海郡으로 귀양 보내었다.
여광은 楊翰의 계책을 듣고 두려워해서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는데, 杜進이 말하기를 “양희는 文雅에는 충분하나 機智와 鑑識이 부족하니, 끝내 양한의 계책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마땅히 그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이산했을 때에 속히 취하소서.”라고 하였다.
【目】 呂光이 高昌郡에 이르니 楊翰이 고창군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여광이 玉門關에 이르니, 梁熙가 격문을 돌려서 여광이 제멋대로 명령하여 회군한 것을 책망하고 자기 아들 梁㣧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막게 하자, 여광이 격파하여 사로잡았다.
武威太守 彭濟가 양희를 사로잡아 항복하자, 여광이 양희를 죽이고 姑臧에 들어가서 스스로 涼州刺史를 겸하니, 郡縣이 다 항복하였으나 홀로 酒泉의 宋皓와 西郡의 索泮이 항복하지 않았다.注+① 漢나라 때에는 張掖의 日勒縣과 刪丹縣 등을 나누어 西郡을 설치하니, 이 땅은 고개의 요지[嶺要]에 해당한다.
【目】 呂光이 이들을 공격하여 사로잡고는 索泮이 항복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자, 삭반이 말하기를 “장군이 西域을 평정하라는 詔命은 받들었으나 涼州를 혼란하게 하라는 조명은 받들지 않았는데, 梁公(梁熙)이 무슨 죄가 있기에 장군이 죽였습니까. 나는 힘이 부족해서 복수하지 못하니, 군주가 멸망하면 신하가 죽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라고 하니, 여광이 이들을 모두 죽였다.
主簿 尉祐가 간사하고 아첨하고 사벽하고 음험하여 彭濟와 함께 梁熙를 사로잡으니,注+① 尉는 본음대로 읽으니, 姓이다. 여광이 그를 총애하고 신임하였다.
위우가 참언을 퍼트려 名士 10여 명을 죽이니, 양주 사람들이 이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다.
【綱】 乞伏國仁이 스스로 單于를 칭하였다.(西秦의 건국)
【目】 乞伏國仁이 單于를 칭하고는 장수와 정승의 직위를 설치하고 그 지역을 나누어 12개의 郡을 설치하고 勇士城을 쌓고 도읍하였는데, 秦나라(前秦)가 봉하여 苑川王을 삼으니, 이것이 西秦이다.注+① 12개의 郡은 武城, 武陽, 安固, 武始, 漢陽, 天水, 略陽, 漒川, 甘松, 匡朋, 白馬, 苑川이다. 苑은 菀(원)과 통한다. ≪水經註≫에 “苑川水는 勇士縣의 子城 南山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牧師菀을 지나니, 옛 漢나라 목장[牧菀]이 있는 땅이다. 동쪽과 서쪽에 두 菀城이 있으니, 그 성의 거리가 7里이다. 西城은 바로 乞伏國仁이 도읍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綱】 河北의 州郡들이 다시 秦나라(前秦)에 항복하였다.
【目】 符定과 符紹, 符謨와 符亮이 모두 河北에서 사자를 보내어 〈燕나라(後燕)에 항복한 것을〉 사죄하고注+① 符謨는 符堅의 從弟이고 符亮은 부견의 從子이다. 上年(384)에 燕나라(後燕) 慕容麟이 常山을 함락하니, 부모와 부량이 모두 항복하였다. 中山太守 王兗이 博陵을 굳게 지켜 秦나라를 위해 燕나라에게 항거하자,注+② 博陵國은 冀州에 속하였다. 符丕가 부정 등을 모두 河北의 牧守로 삼았다.
楊定이 西燕에서 도망하여 隴右로 달아나 옛 무리를 수합하고 竇衝이 玆川을 점거하여 수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였다.
양정과 秦州刺史 王統, 河州刺史 毛興, 益州刺史 王廣, 南秦州刺史 楊璧과 함께 모두 隴右에서 사자를 보내어 부비를 맞이해서 함께 後秦을 공격하자,注+③ 兹川은 바로 霸川이다. 霸水는 옛날에는 滋水라고 하였는데, 秦 穆公이 霸者가 되자 滋水를 霸水로 바꾸어 패자가 된 공을 드러내었다. 지금 玆川이라 한 것은 옛 이름을 따른 것이다. 楊璧은 符堅의 사위이다. 부비는 각각 그들의 지위와 칭호를 올려주었다.
부정이 얼마 후 歴城으로 치소를 옮겨서 스스로 仇池公이라 칭하고 사자를 보내어 晉나라(東晉)에 藩臣을 칭하였는데, 뒤에 또다시 天水와 略陽 지역을 점령하고 스스로 隴西王이라 칭하였다.
【綱】 겨울 11월에 燕나라(後燕)가 慕容農을 幽州牧으로 삼아 龍城을 지키게 하였다.
【目】 燕나라 장군 餘巖이 배반하여 令支를 점거하고 高句麗 또한 遼東의 두 郡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燕王 慕容垂는 慕容農을 보내어 여암을 토벌해서 참수하였으며 고구려로 진격하여 다시 두 군을 점령하고 돌아와 龍城에 이르러서 능과 사당을 수리하였다.注+① 燕나라는 慕容皝 이전에는 모두 遼西에 장례하였으므로 이곳에 능과 사당이 있는 것이다.
모용수가 모용농을 幽州牧으로 삼아서 〈용성에〉 머무르며 진수하게 하자, 모용농은 법제가 너그럽고 간략하여 형벌과 옥사를 공정하게 처리하고 부역을 줄이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였다. 그리하여 거주하는 백성들이 부유해지니, 사방에서 이른 유민들이 수만 명이었다.
【綱】 12월에 燕나라 慕容麟이 秦나라(前秦) 博陵을 공격하니, 이곳을 지키던 장수 王兗이 전사하였다.
【目】 慕容麟이 博陵을 공격하니, 성안에 양식이 떨어지고 화살이 다하였다. 功曹 張猗가 성을 넘어 나가서 무리를 모아 모용린에게 호응하자, 王兗은 성에 임하여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卿은 바로 秦나라 백성이고 나는 경의 군주이다. 경이 군대를 일으켜 적에게 호응하면서 의병이라고 칭하니, 어찌하여 名과 實이 서로 어긋나는가. 옛사람은 충신을 구하기를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하였으니, 경의 어미가 성안에 있는데도 버리고 돌아보지 않으니, 어찌 나를 돌아보겠는가.
지금 사람들이 경의 일시적인 功을 취하는 것은 괜찮지만 不忠과 不孝의 죄를 저지른 경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中州(中原)의 禮義를 지키는 나라에 마침내 경과 같은 자가 있을 줄을 생각지도 못하였다.” 모용린이 박릉을 함락하고 왕연을 사로잡아 죽였다.
【綱】 燕나라(後燕)가 中山에 도읍을 정하였다.
【目】 燕王 慕容垂가 북쪽으로 中山에 가서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樂浪王이 흩어져 떠도는 백성들을 모으고 창고를 채워 밖으로 군량을 공급하고 안으로 궁실을 수리하였으니, 비록 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라고 하고는 마침내 중산으로 도읍을 정하였다.


역주
역주1 [燕元] : 저본에는 ‘燕元’이 없으나, ≪資治通鑑綱目≫의 기술 방식에 따라 추가하였다.
역주2 [頗] : 저본에는 ‘頗’가 없으나,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9, 上海古籍出版社)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3 (于)[及] : 저본에는 ‘于’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9, 上海古籍出版社)에 의거하여 ‘及’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白渠는……개천이다 : ≪資治通鑑綱目≫ 제5권 상 漢 武帝 太始 2년(B.C. 95)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5 壘主 : 여기의 壘는 魏晉南北朝 시기에 등장했던 塢壁의 한 종류이다. 이 혼란 시기에 중앙정부의 힘이 약화되면서 각 지역의 백성이나 유민들이 自衛를 위해 세운 작은 성채나 보루로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체 규약에 의해 독자적 활동을 하였다. 塢․壁․堡․營․壘 등으로 불렀으며, 그 우두머리를 塢主․壁主․堡主․壘主 등으로 불렀다.
역주6 韋賢 : 漢나라 때 鄒魯의 大儒로 일컬어진 인물로, 자는 長孺이고 시호는 節侯이다. 인품이 질박하고 욕심이 없었으며, 武帝 때 經學博士를 지냈고, 宣帝 때에 丞相을 지냈다.(≪漢書≫ 권73 〈韋賢列傳〉)
역주7 趙國 : ≪晉書≫ 〈地理志〉에 보면 司州에 속해 있다.
역주8 假板 : 조정의 정식 선포를 거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임시로 임명하는 일이나 그 증서를 말한다. 假版이라고도 한다.
역주9 楊膺과 姜讓의 계책 : 본서 제21권 하 晉 孝武帝 太元 9년(384) 10월 조에 보인다. 符丕가 고립되어 焦逵를 東晉에 사신으로 보내어 길과 양식을 구하여 서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초규가 姜讓과 楊膺과 함께 모의하여 東晉에 귀의하고 동진의 劉牢之의 군대가 이르면 부비를 포박하여 넘겨주고자 하였다.
역주10 (胿)[眭] : 저본에는 ‘胿’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9, 上海古籍出版社)에 의거하여 ‘眭’로 바로잡았다.
역주11 太保安 出鎭廣陵 : “앞서(제18권 상) ‘太傅 司馬越이 나가 許昌에 진주하였다.[大傅越 出鎭許昌]’라고 쓴 것은 전횡함을 죄준 것이었다. 이때 秦나라(前秦)가 와서 구원을 청하자 謝安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구원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것은 황제에게 명을 청한 것인데, 사마월과 똑같이 쓴 것은 어째서인가. 晉나라를 나쁘게 여긴 것이다. 사안이 淮水와 淝水에서 승리한 뒤로부터 上이 그의 공로를 시기하고 司馬道子는 권력을 독점하여 참소와 아첨이 서로 뒤엉키니, 사안이 나가기를 구한 것은 스스로 위태롭게 여겨서이다. ≪資治通鑑綱目≫에 ‘太保安出鎭’이라고 썼으니, 이것은 晉나라의 군주와 신하에게 남은 죄책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出鎭許昌’이라고 썼으니, 사마월이 스스로 전횡한 것을 드러낸 것이요,(懷帝 永嘉 6년(312)이다.) ‘出鎭廣陵’이라고 쓴 것은 사안이 스스로 위태롭게 여긴 것을 드러낸 것이니,(이해(385)이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서술함에 글이 똑같음을 혐의하지 않는다.[前書太傅越出鎭許昌 罪專也 於是秦來求救 安請自將救之 則請命矣 書與越同 何 病晉也 安自淮淝之捷 上忌其功 道子專權 讒諂交構 安之求出 蓋自危也 書曰太保安出鎭 則晉之君臣 有餘責矣 是故書出鎭許昌 所以著越之自專(懷帝永嘉六年) 書出鎭廣陵 所以著安之自危(是年) 美惡不嫌同辭]” ≪書法≫
역주12 堡壁 : 본서 217쪽 역주 5) ‘壘主’ 참조.
역주13 (誠)[詵] : 저본에는 ‘誠’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9, 上海古籍出版社)에 의거하여 ‘詵’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4 後秦王萇 弑秦王堅 : “姚萇을 ‘起兵’이라고 썼는데 여기서 秦王을 시해했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요장이 符堅의 신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요장과 부견을 똑같이 왕이라고 칭했으나 군신의 분별이 진실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반한 것은 쓰지 않을 수 있으나 시해한 것은 쓰지 않을 수 없으니, 요장이 시해했다고 쓰지 않으면 난신적자의 발자취가 천하에 이어졌을 것이다. 이 때문에 臧荼와 徐廣이 모두 왕이었으나 장도가 일찍이 서광의 신하가 되었으니 그리하여 ‘燕王 장도가 遼東王 서광을 시해했다.’고 쓴 것이요(漢나라 초기 을미년(B.C. 206)이다.) 요장과 부견이 모두 왕이었으나 요장이 일찍이 부견의 신하가 되었으니, 그리하여 ‘후진왕 요장이 진왕 부견을 시해했다.’고 쓴 것이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을 편수한 것은 군주와 신하의 구분을 밝혔을 뿐이다.’라고 하는 것이다.[萇書起兵矣 此以王書弑 何 萇 堅臣也 雖竝稱王 而君臣之分固在也 故叛可不書 弑不可以不書 萇不書弑 則亂臣賊子接跡於天下矣 是故荼廣皆王也 荼嘗臣廣 則書燕王荼弑遼東王廣(漢初乙未年)萇堅皆王也 萇嘗臣堅 則書後秦王萇弑秦王堅 故曰綱目之修 君臣之分而已矣]” ≪書法≫“요장이 전일에 秦나라를 배반했을 적에 ‘起兵’이라고 쓴 것은 요장이 자기 몸을 구원하는 데에 급박하였기 때문에 그 실정을 근원하여 죄를 용서한 것이요, 오늘날 부견을 죽인 것에 대해서는 시해했다고 썼으니, 이는 요장이 실로 부견에게 신하가 되었으므로 명분을 바로잡아 그 죄를 정한 것이다.[萇前日叛秦 書起兵者 迫於自救 故原情而恕其罪也 今日殺堅 則書弑者 己實臣之 故正名而定其罪也]” ≪發明≫
역주15 자주……없다 : 전국시대 魏나라 文侯가 李克에게 제후들 중 누가 먼저 망할지를 묻자, 이극이 吳나라가 가장 먼저 망할 것이라고 답하면서 했던 말이다.(≪韓詩外傳≫ 권10) 이극은 전국시대 魏 文侯를 최초의 패자로 만든 인물로, 平糶法을 창안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刑名學의 비조인 ≪法經≫ 6편을 편찬하였다.
역주16 (復)[複] : 저본에는 ‘復’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을 살펴 ‘複’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7 4개의 州 : 아래의 訓義에 보이는 毛興의 河州, 王統의 秦州, 楊璧의 南秦州에다가 涼州를 더한 것으로 보인다.
역주18 : 저본에는 ‘伏’으로 되어 있으나, ≪水經註≫ 권2에는 ‘佛’로 되어 있다.
역주19 燕慕容麟……死之 : “秦나라가 비록 오랑캐 종족이나 劉聰과 石虎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절개를 지키는 신하가 있어서 서책에 썼으니, 이는 中國으로 나아간 것이다. 후면에 徐嵩과 毛后를 쓴 것도 같은 의리이다.[秦雖夷狄 非劉石比 故其臣有能守節者 得書于冊 此則進于中國者也 後書徐嵩及毛后 其義亦同]” ≪發明≫
역주20 蕭何 : 劉邦을 도와 漢나라를 건국한 개국공신이다. 유방이 沛王으로 函谷關에 들어갔을 때 秦나라 相府의 律令과 圖書를 거두어 한나라의 국가 기반을 정비하였고, 진나라 법률을 정리해 ≪九章律≫을 편찬했다.(≪史記≫ 권53 〈蕭相國世家〉)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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