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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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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元嘉九年이요 魏延和元年이라
春正月 하고 立子晃爲太子하다
◑三月 宋以王弘爲太保하고 檀道濟爲司空하여 還鎭尋陽하다
◑吐谷渾 送故夏主定于魏어늘 魏人殺之하다
魏既殺赫連定 因進吐谷渾王慕璝官爵이어늘 慕璝上表曰 臣俘擒僭逆하여 獻捷王府어늘 爵秩雖崇이나 而土不増廓하고 車旗既飾이나 而財不周賞하니 願垂鑑察하소서
魏主下共議한대 公卿以爲호되 慕璝所致 唯定而已 塞外之民 皆爲己有로되 而貪求無厭하니 不可許也니이다 自是慕璝貢使至魏者稍簡하더라
魏改代爲萬年이라가 尋復舊號하다
魏方士祁纎 奏改代爲萬年이어늘 崔浩曰 昔太祖應天受命하사 이니
國家積德 이요 不待假名以爲益也 纎之所聞 皆非正義 宜復舊號니이다하니 魏主從之하다
夏五月 宋太保王弘卒하다
弘明敏有思致注+思, 去聲. 而輕率褊隘하여 好折辱人하다 雖貴顯이나 不營財利러니 及卒 家無餘業이러라 宋主聞之하고 特賜錢百萬 米千斛하다
宋遣使如魏하다
◑六月 宋以司徒義康으로 領揚州刺史하다
◑秋七月 宋以殷景仁으로 爲尚書僕射하고 劉湛으로 爲領軍將軍하다
◑吐谷渾 告捷于宋注+告擒赫連定之捷也.하다
◑秋 宋益州人趙廣 作亂하여 圍成都하다
宋益州刺史劉道濟 信任長史費謙 别駕張熙하여 聚斂興利하여 傷政害民하니 商賈失業하여 吁嗟滿路注+道濟, 粹之弟也.어늘
流民許穆之 變姓名하여 稱司馬飛龍하고 自云晉室近親하고 往依氐王楊難當하다 難當因民之怨하여 資飛龍以兵하여 使侵擾益州한대
飛龍招合蜀人하여 得千餘人하여 攻殺巴興令하고 逐陰平太守어늘 道濟遣軍斬之注+晉永和十一年置巴興縣, 西魏改曰長江縣, 唐屬遂州. 晉秦始中, 置陰平郡, 至武帝永初間, 又分爲南陰平․北陰平, 此南陰平也. 隋倂南陰平入雒縣.러니
道濟欲以帛氐奴梁顯으로 爲參軍督護注+帛, 姓也.한대 費謙固執不與하다 氐奴等 與鄉人趙廣으로 構扇縣人하여 詐言호되 司馬殿下 猶在陽泉山中이라하고 聚衆向廣漢注+蜀分緜竹立陽泉縣, 屬廣漢郡.이어늘
參軍程展 會李抗之擊之라가 皆敗死注+通鑑參軍程展會하니 廣等 進攻涪城陷之하다 於是 涪陵江陽遂寧諸郡守 皆棄城走하고 蜀土僑舊俱反注+江陽郡, 劉璋分犍爲立. 沈約曰 “遂寧郡, 永初郡國志有之, 疑晉末分廣漢所立, 唐爲遂州.” 僑, 寄居民. 舊, 土着民.하다
廣等 進攻成都하니 道濟嬰城自守러니 賊屯聚日久호되 不見司馬飛龍이라 欲散去어늘
廣懼하여 將三千人及羽儀하여 詣陽泉寺注+以羽爲儀, 故曰羽儀.하여 謂道人程道養曰 汝但自言是飛龍인댄 則坐享富貴어니와 不則斷頭하리라 道養惶怖許諾한대
廣乃推道養하여 爲蜀王하고 以其弟道助 鎭涪城하고 奉道養하여 還成都하니 衆至十萬餘 四面圍城하고 使人謂道濟曰 但送費謙張熙來 我輩自解去하리라
道濟遣參軍裴方明任浪之出戰이로되 皆敗還하다
魏主攻燕하여 圍和龍하다
魏主伐燕하니 石城太守李崇等十郡 降魏注+石城縣, 前漢屬右北平, 燕分置石城郡. 魏眞君八年, 置建德郡於白狼, 以石城爲縣屬焉. 崇, 績之子也.어늘 魏主發其民三萬穿圍塹하여和龍이러니
八月 燕王使數萬人出戰이어늘 魏擊破之하고 攻羌胡固帯方建德冀陽郡하여 皆拔注+通鑑 “燕尙書高紹帥萬餘家, 保羌胡固. 辛巳, 魏主攻紹, 斬之. 平東將軍賀多羅攻帶方, 撫軍大將軍永昌王健攻建德, 驃騎大將軍樂平王丕攻冀陽, 皆拔之.”하다
九月 魏主引兵西還하여 徙營丘成周遼東樂浪帯方玄莬六郡民三萬家於幽州하다
燕尚書郭淵 勸燕王送款獻女於魏하고 乞爲附庸한대 燕王曰 負舋在前하여 結忿已深하니 降附取死 不如守志更圖也注+舋, 與釁通. 負舋, 猶言負罪也. 更, 平聲.라하다
魏主之圍和龍也 宿衛之士 多在戰陳하니 行宫人少어늘
雲中鎭將朱脩之 謀與南人으로 襲殺魏主하고 因入和龍하여 浮海南歸할새 以告將軍毛脩之한대 不從하여 乃止注+北史毛脩之傳 “劉裕之平關中, 留子義真鎭長安, 以脩之爲司馬. 及義真敗, 脩之沒統萬. 太武平赫連昌, 獲之. 使領吳兵, 以功拜吳兵將軍. 累遷尚書, 賜爵南郡公. 從討和龍, 宋故將朱脩之爲雲中將軍, 欲率吳兵爲逆, 以告脩之, 不聽, 乃止.”러니 既而 事泄하여 朱脩之逃奔燕하다
魏人數伐燕하니 燕王遣脩之南歸求救한대 脩之汎海至東萊하여 遂還建康이어늘 拜黄門侍郎하다
冬十二月 燕長樂公崇 以遼西叛하여 降魏하다
燕王嫡妃王氏 生長樂公崇하니 於兄弟 爲最長하다 及即位 立慕容氏하여 爲王后하니 王氏不得立하고 又黜崇하여 使鎭肥如注+燕以幽州刺史鎭肥如, 遼西之地也.어늘
崇母弟朗邈相謂曰 今國家將亡 王復受譖하니 吾兄弟死無日矣라하고 乃相與亡奔遼西하여 說崇使降魏한대 崇從之하여 使邈如魏하여 請擧郡降이어늘
燕王聞之하고 使其將封羽 圍遼西하다
宋益州參軍裴方明 討趙廣하여 破之하다
裴方明 擊程道養營하여 破之하다 賊楊孟子屯城南한대 參軍梁儁之 說諭邀見道濟하니 板爲主簿하여 克期討賊하다
趙廣知其謀하니 孟子懼하여 將所領奔晉原하니 太守文仲興 與之同守注+李雄分蜀郡爲漢原郡, 晉穆帝更名晉原郡, 治江原縣.어늘 趙廣遣帛氐奴攻晉原하여 破之하니 仲興孟子皆死하다
裴方明復出擊賊하여 屢戰破之하여 賊遂大潰하니 道養收衆하여 還廣漢하고 趙廣還涪城하다
道濟糧儲俱盡이라 方明出城求食이라가 爲賊所敗하여 單馬獨還하니 賊衆復大集이어늘 方明夜縋而上注+縋, 馳僞切, 垂繩也. 上, 時掌切.한대 道濟爲設食하니 涕泣不能食注+爲, 去聲.이어늘
道濟曰 卿非大丈夫로다 小敗何苦리오 賊勢既衰하고 臺兵垂至하니 但令卿還이면 何憂於賊이리오 即減左右以配之하다
賊揚言方明已死하니 城中大恐이라 道濟夜列炬火하고 出方明以示衆하니 衆乃安하다 道濟悉出財物하여 令方明募人하니
時傳道濟已死 莫有應者 梁儁之說道濟하여 遣左右給使三十餘人出外하고 且告之曰 吾病小損하니 聽歸休息이라하니
給使既出 城中乃安하고 應募者日有千餘人이러라
魏遣太常李順如涼하다
魏李順復奉使至涼하니 涼王蒙遜延入庭中하고 箕坐隱几하여 無動起之狀注+箕坐, 謂伸兩脚而坐, 其形如箕. 隱, 凭也, 依也. 几, 案屬. 無動起之狀, 謂不起拜受詔.이어늘 順正色大言曰 不謂此叟無禮 乃至於此케라 今不憂覆亡而敢陵侮天地하니 魂魄逝矣 何用見之리오 握節將出이어늘
蒙遜使追止之曰 傳聞朝廷 有不拜之詔 是以敢自安爾니이다
順曰 齊桓公九合諸侯하고 一匡天下하니 周天子賜胙 命無下拜호되 桓公猶不敢失臣禮하여 下拜登受어늘 今王雖功高 未如齊桓이요 朝廷雖相崇重이나 未有不拜之詔而遽自偃蹇하니 此豈社稷之福邪注+偃蹇, 猶言驕傲. 蒙遜乃起拜受詔하다
使還 魏主問以涼事한대 順曰 蒙遜控制河右 踰三十年이라 經渉艱難하여 粗識機變하고 綏集荒裔하여 群下畏服하니 雖不能貽厥孫謀 猶足以終其一世
然禮者 德之輿 敬者 身之基也로되 蒙遜無禮不敬하니 以臣觀之컨대 不復年矣注+謂不再有一年之壽也.리이다
魏主曰 易世之後 何時當滅
順曰 蒙遜諸子 臣略見之하니 皆庸才也 如聞敦煌太守牧犍 器性粗立하니 繼蒙遜者 必此人也 然比之於父하면 皆云不及하니 此殆天之所以資聖明也니이다
魏主曰 朕方有事東方하니 未暇西略注+方有事東方, 謂方圖燕也.이라 如卿所言인댄 不過數年之外 不爲晚也
罽賓沙門曇無讖 自云호되 能使鬼治病하고 且有秘術注+曇, 姓也. 無讖, 其名. 北史曰 “曇無讖自云 ‘能使鬼療病, 令婦人多子.’”이라하니 蒙遜重之하여 謂之聖人이라하고 諸女婦皆往受術이어늘
魏主徴之한대 蒙遜留不遣而殺之하니 魏主由是怒涼하다 蒙遜荒淫猜虐하니 群下苦之하더라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9년이고, 北魏 世祖 太武帝 拓跋燾 延和 원년이다.
[綱] 봄 정월에 北魏는 保太后를 높여 皇太后로 삼고, 아들 拓跋晃을 세워 太子로 삼았다.
[綱] 3월에 宋나라가 王弘으로 太保를 삼고, 檀道濟로 司空을 삼아서 尋陽으로 돌아가 鎭守하게 하였다.
[綱] 吐谷渾이 前 夏主 赫連定을 北魏로 보냈는데 北魏 사람이 혁련정을 죽였다.
[目] 北魏에서 赫連定을 죽이고 나서 이어서 吐谷渾王 慕容慕璝의 官爵을 승진시키자 모용모괴가 표문을 올리기를 “신이 참람한 역적을 포로로 사로잡아 王府에 바쳤는데 작위와 질록은 비록 높아졌으나 영토는 불어나지 않았고 수레와 깃발은 이미 장식하였으나 재물은 충분히 보상받지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살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魏主가 안건을 내려 함께 논의하게 하였다. 공경들이 말하기를 “모용모괴가 바친 것은 단지 혁련정이고, 변방 밖의 백성이 모두 자신의 소유인데도 탐욕스럽게 요구하여 만족함이 없으니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이로부터 모용모괴의 貢使(공물을 진상하는 사신)가 北魏에 오는 것이 점차로 간략해졌다.
[綱] 北魏가 代郡을 改稱하여 萬年이라고 했다가 얼마 후에 옛 호칭을 복구하였다.
[目] 北魏 方士 祁纎(기섬)이 代郡을 改稱하여 萬年으로 삼을 것을 아뢰니, 崔浩가 말하기를 “예전에 太祖(道武帝)께서 하늘에 순응하여 天命을 받으셔서 〈國號로〉 代와 魏를 함께 일컬은 것은 殷과 商을 본받은 것입니다.
國家(황제)가 德을 쌓으면 〈역사에 수록되어〉 응당 억만년을 누릴 것이니, 萬年의 명칭을 빌어서 수명을 더하는 것을 바랄 필요가 없습니다. 기섬이 아뢴 것은 모두 바른 도리가 아니니 마땅히 예전 호칭을 회복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魏主가 그것을 따랐다.
[綱] 여름 5월에 宋나라 太保 王弘이 죽었다.
[目] 王弘은 明敏하면서 才思가注+① 思(생각하다)는 去聲이다. 있었으나 경솔하며 편협하여 남을 꺾어 모욕하기를 좋아하였다. 비록 존귀하게 되었으나 財利를 꾀하지는 않았는데, 卒함에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宋主가 이 소식을 듣고 특별히 돈 1백만 전과 쌀 1천 斛을 내려주었다.
[綱] 宋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北魏로 보냈다.
[綱] 6월에 宋나라가 司徒 劉義康에게 揚州刺史를 겸직하게 하였다.
[綱] 가을 7월에 宋나라가 殷景仁을 尚書僕射로 삼고, 劉湛을 領軍將軍으로 삼았다.
[綱] 吐谷渾이 戰勝을 宋나라에 고하였다.注+① 赫連定을 사로잡은 戰勝을 고한 것이다.
[綱] 가을에 宋나라 益州 사람 趙廣이 난리를 일으켜서 成都를 포위하였다.
[目] 宋나라 益州刺史 劉道濟가注+① 劉道濟는 劉粹의 아우이다. 長史 費謙과 别駕 張熙를 신임하여 〈그들이〉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고 이권을 일으켜 정치에 해를 끼치고 백성을 해치니, 상인들이 생업을 잃어서 한탄하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하였다.
유랑민 許穆之가 성명을 바꾸어 司馬飛龍이라고 일컫고 스스로 晉나라 황실의 가까운 친족이라 말하고, 氐王 楊難當에게 가서 의지하였다. 양난당은 백성들의 원망을 이용하여 사마비룡에게 군대를 주어서 益州를 침범해 어지럽히게 하였다.
사마비룡은 蜀 지역 사람들을 불러 모아 1천여 명을 얻어서 巴興縣令을 공격해 죽이고 陰平太守를 축출하니注+② 晉나라 永和 11년(355)에 巴興縣을 설치하고, 西魏 때에 고쳐 長江縣이라 하고, 唐나라 때 遂州에 속하였다. 晉나라 秦始 연간에 陰平郡을 설치하고, 宋나라 武帝 永初 연간에 이르러 또 나누어 南陰平․北陰平으로 하였는데, 여기의 陰平은 南陰平이다. 隋나라는 南陰平을 합병하여 雒縣으로 편입하였다., 유도제가 군대를 보내 사마비룡을 참수하였다.
유도제는 帛氐奴와注+③ 帛은 姓이다. 梁顯을 로 삼으려 하였는데 비겸이 고집을 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백저노 등이 마을 사람 趙廣과 함께 縣의 사람들을 선동하여 속여 말하기를 “사마비룡 殿下께서 여전히 陽泉山 안에 계신다.”라고 하고, 무리를 모아 廣漢으로 향하였다.注+④ 蜀漢에서는 緜竹을 분할하여 陽泉縣을 설립하고 廣漢郡에 소속시켰다.
〈유도제의〉 參軍 程展이 李抗之와 회합하여注+⑤ ≪資治通鑑≫에는 “參軍 程展이 治中 李抗之와 회합하였다.”라고 하였다. 〈백저노 등을〉 공격하다가 모두 패하여 죽으니, 조광 등이 涪城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涪陵․江陽․遂寧 등의 郡守가 모두 성을 버리고서 도주하고, 蜀 지역의 토착민과 僑民들이 모두 배반하였다.注+⑥ 江陽郡은 劉璋이 犍爲를 나누어 설립했다. 沈約이 말하기를 “遂寧郡은 에 나오는데 아마 晉나라 말에 廣漢을 나누어 설립한 것인 듯하고, 唐나라 때에 遂州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僑는 타향살이하는 백성이고, 舊는 토착하는 백성이다.
[目] 趙廣 등이 成都로 진격하니 劉道濟는 성곽을 둘러싸서 직접 수비하였다. 賊徒들은 결집한 지 여러 날이 되었으나 司馬飛龍을 보지 못하여 흩어져 떠나려 하였다.
조광은 두려워하여 3천 명과 의장대를注+① 깃으로 儀仗을 만들었으므로 羽儀라고 하였다. 인솔하여 陽泉寺로 가서 道人 程道養에게 말하기를 “네가 다만 스스로 사마비룡이라고 말한다면 앉아서 부귀를 누릴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머리가 잘릴 것이다.”라고 하니, 정도양은 두려워하면서 허락하였다.
조광은 마침내 정도양을 추대하여 蜀王으로 삼고, 그의 아우 程道助에게 涪城을 수비하게 하고 정도양을 받들어 成都로 돌아가니 무리가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사면에서 성도를 포위하고 사람을 보내 유도제에게 말하기를 “다만 費謙과 張熙를 보내오면 우리들은 스스로 해산하여 떠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유도제는 參軍 裴方明과 任浪之를 보내어 출전하게 하였으나 모두 패하여 돌아왔다.
[綱] 魏主가 北燕을 공격하여 和龍을 포위하였다.
[目] 魏主가 北燕을 정벌하자 石城太守 李崇 등 10개 郡이 北魏에 항복하였다.注+① 石城縣은 前漢 때에 右北平에 속하였는데, 北燕이 나누어 石城郡을 두었다. 北魏 太平眞君 8년(447)에 白狼에 建德郡을 설치하고, 石城을 縣으로 삼아 속하게 하였다. 李崇은 李績의 아들이다. 魏主가 그 백성 3만 명을 동원하여 참호를 파서 성곽을 에워쌓고서 和龍을 빈틈없이 포위하였다.
8월에 燕王 馮弘이 수만 명을 보내서 출전시키자, 北魏에서 그들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羌胡固․帯方․建德․冀陽郡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하였다.注+② ≪資治通鑑≫에 이르기를 “北燕의 尙書 高紹가 1만여 가를 인솔하여 羌胡固를 보전하였다. 신사일에 魏主가 고소를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北魏의〉 平東將軍 賀多羅가 帶方을 공격하고, 撫軍大將軍 永昌王 拓跋健이 建德을 공격하고, 驃騎大將軍 樂平王 拓跋丕가 冀陽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라고 하였다.
9월에 魏主가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還國하여 營丘․成周․遼東․樂浪․帶方․玄菟 여섯 군의 백성 3만 가호를 幽州로 이주시켰다.
北燕의 尙書 郭淵이 北燕王에게 권하여 北魏에 귀순하여 딸을 바치고 附庸國이 되기를 청하라고 하였다. 北燕王이 말하기를 “이전에 죄를 지어서 원한을 맺은 것이 이미 깊으니, 항복하여 귀부해 죽음을 취하는 것은 뜻을 지키면서 다시 도모하는 것만 못하다.”注+③ 舋(죄)은 釁과 통하니, “負舋”은 죄를 짓는다는 말과 같다. 更(고치다)은 平聲이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화룡을 포위하였을 때 宿衛하는 병사들이 대부분 전선에 있으니 行宮에는 사람이 적었다.
雲中鎭將 朱脩之가 모의하여 남방 사람(宋나라)과 함께 魏主를 기습해서 살해하고, 그 기회에 화룡으로 들어가서 바다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돌아가려고 할 적에 이를 장군 毛脩之에게 고하였으나 모수지가 따르지 않아 마침내 중지하였다.注+④ ≪北史≫ 〈毛脩之傳〉에 “劉裕가 關中을 평정할 때 아들 劉義真을 남겨두어 長安을 지키게 하고, 毛修之를 司馬로 삼았다. 유의진이 〈夏나라에〉 패하게 되어서는 모수지가 〈사로잡혀〉 統萬에 갇혔다. 太武帝(拓跋燾)가 赫連昌을 평정하였을 때 모수지를 사로잡았다. 魏主가 그에게 吳 지역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는데 공적으로 吳兵將軍에 임명되었다. 누차 승진하여 尚書가 되고, 南郡公 작위를 하사받았다. 和龍을 토벌하는 데에 따라갔는데, 前 宋나라 장군 朱修之가 雲中將軍이 되어서 吳 지역 군사를 인솔하여 반역을 하려고 하였다. 이에 모수지에게 고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마침내 중지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사건이 누설되어 주수지가 北燕으로 달아났다.
北魏 군사들이 자주 북연을 정벌하니 北燕王은 주수지를 파견하여 남쪽으로 가서 〈宋나라에〉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주수지는 바다를 건너가서 東萊에 이르러 마침내 建康으로 돌아오자 黄門侍郎에 임명되었다.
[綱] 겨울 12월에 北燕 長樂公 馮崇이 遼西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켜 北魏에 항복하였다.
[目] 北燕王 馮弘의 嫡妃 王氏가 長樂公 馮崇을 낳았는데, 풍숭이 형제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풍홍이 즉위하게 되자, 慕容氏를 세워서 王后를 삼았다. 왕씨는 책립되지 못하였고 또 풍숭을 축출하여 肥如를 鎭守하게 하였다.注+① 北燕은 幽州刺史를 肥如에 鎭守시켰는데, 遼西 땅이다.
그러자 풍숭의 同母弟 馮朗과 馮邈이 서로 말하기를 “지금 국가가 망하려고 하는데 왕이 다시 참소를 받아들이니, 우리 형제의 죽을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라고 하고, 마침내 서로 함께 요서로 도망쳐서 풍숭을 설득하여 북위에 항복하게 하였는데, 풍숭이 이를 따라 풍막을 시켜서 北魏에 가서 郡을 들어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北燕王이 이 소식을 듣고 그의 부하 장군 封羽를 시켜서 遼西를 포위하도록 하였다.
[綱] 宋나라 益州參軍 裴方明이 趙廣을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目] 裴方明이 程道養의 군영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賊徒 楊孟子가 城의 남쪽에 주둔하였는데 參軍 梁儁之가 설득하고 타일러 劉道濟를 만나보게 하니, 〈유도제가〉 그를 임명하여 主簿를 삼아 적도들을 토벌하기로 기약하였다.
趙廣이 그 모의를 알아차리자 양맹자는 두려워하여 거느린 사람들을 데리고 晉原으로注+① 李雄(成漢 武帝)이 蜀郡을 나누어 漢原郡을 설립하고, 晉 穆帝가 이름을 晉原郡으로 바꾸고 江原縣에 治所를 두었다. 도주하니, 晉原太守 文仲興이 그와 함께 수비하였다. 조광이 帛氐奴를 보내어 晉原을 공격하여 격파하니 문중흥과 양맹자가 모두 죽었다.
배방명이 다시 나와 적도들을 공격하여 누차 싸워 격파하여 적도들이 마침내 크게 무너졌다. 정도양은 무리들을 거두어 廣漢으로 돌아가고 趙廣은 涪城으로 돌아갔다.
[目] 劉道濟는 비축 양식이 모두 고갈되었는데, 裴方明이 성을 나가 양식을 구하다가 적도에게 패배하여 필마로 혼자 돌아오니 적도들이 다시 크게 모여들었다. 배방명이 밤에 줄을 타고 성으로 올라갔는데注+① 縋는 馳僞의 切이니, 줄을 내리는 것이다. 上(올라가다)은 時掌의 切이다. 유도제가 그를 위해注+②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음식을 차려주니 눈물을 흘리며 먹지 못하였다.
유도제가 말하기를 “卿은 大丈夫가 못 된다. 작은 패배를 어찌 괴로워하는가. 적도들의 기세가 이미 쇠퇴했고 臺兵(朝廷의 군대)이 거의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卿만 돌아온다면 어찌 적도들을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대가 돌아왔다.〉”라고 하고, 즉시 자기 측근의 인원을 줄여서 배방명에게 배속시켰다.
적도들이 소리를 높여 배방명이 이미 죽었다고 하니 성안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유도제가 밤에 횃불을 나열하고 배방명을 내보내어 대중들에게 보이자 대중들이 마침내 안정되었다. 유도제는 재물을 모두 내놓아서 배방명에게 군사들을 모집하게 하였다.
이때 소문에 유도제가 이미 죽었다고 전해져서 응모하는 자가 없었다. 梁儁之가 유도제를 설득하여 측근에 있는 給使 30여 명을 밖으로 내보내게 하고 또 고하게 하기를 “내 병이 조금 나았으니, 너희들은 귀가하여 휴식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給使들이 나가고 나자 성안이 마침내 안정되고 모집에 응하는 자가 날마다 1천여 명이나 되었다.
[綱] 北魏가 太常 李順을 파견하여 北涼에 보냈다.
[目] 北魏의 李順이 다시 使命을 받들어 北涼에 도착하였다. 涼王 沮渠蒙遜이 뜰 안으로 맞아들이고는 다리를 뻗고 앉아 안석에 기대고서 움직여 일어날 모습이 없자注+① “箕坐”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 그 모습이 키와 같은 것을 말한다. 隱은 기대고 의지한다는 뜻이다. 几는 案席의 부류이다. “無動起之狀”은 詔書를 받으려 일어나 절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순이 정색을 하고 큰소리로 말하기를 “뜻밖에 이 늙은이의 무례함이 마침내 이 지경까지 갔구나. 지금 멸망을 우려하지 않고 감히 天地를 능멸하니 혼백이 떠나간 사람을 어찌 만날 필요가 있으랴.”라고 하고 부절을 잡고는 나오려고 하였다.
저거몽손이 사람을 시켜 이순을 쫓아가 만류하기를 “ 그러므로 감히 편안히 있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순이 말하기를 “ 지금 왕께서 비록 공로가 높지만 제 환공만 못하고 朝廷에서 비록 높이 우대해주지만 아직 절하지 말라는 조서가 있은 것도 아닌데 바로 교만하게 하니注+② “偃蹇”은 驕傲(교만하다)라는 말과 같다., 이것이 어찌 社稷의 복이 되시겠습니까.”라고 하니, 저거몽손이 마침내 일어나 절하고 조서를 받았다.
[目] 사신이 돌아오자 魏主가 北涼의 실상을 물었는데, 李順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沮渠蒙遜이 河右(河西) 지역을 다스린 지가 30년이 넘었습니다. 험난함을 겪어서 기지와 권변을 대략 알고 변방 지역을 안정시켜서 아랫사람들이 두려워 복종하니, 비록
그러나 禮는 德을 싣는 수레이고, 敬은 몸을 받쳐주는 터전이지만, 저거몽손은 禮가 없고 공경하지 않으니, 신의 견해로 살펴보면 다시 1년도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注+① 〈“不復年矣”는〉 1년의 수명도 있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魏主가 말하기를 “세대가 바뀐 후에 어느 때 멸망할 것 같은가?”라고 하였다.
이순이 말하기를 “저거몽손의 아들들을 신이 대략 살펴보니 모두 재주가 용렬합니다. 소문으로는 敦煌太守 沮渠牧犍은 기량과 성품이 대략 확립되었으니 저거몽손을 계승할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 부친에 견주면 모두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늘이 聖明한 폐하를 도와주시려는 것 같습니다.” 하니,
魏主가 말하기를 “朕이 한창 동쪽에 군대를 운용하고 있으니注+② “方有事東方”은 한창 燕나라를 도모하고 있음을 말한다. 서쪽을 공략할 겨를이 없다. 卿이 말한 대로 된다면 불과 수년 밖의 일이니 늦을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예전에 罽賓(계빈)의 스님 曇無讖이 스스로 말하기를 “귀신을 부려 병을 치료할 수 있고 또 신비한 술법이 있다.”라고 하니, 저거몽손이 그를 존중하여 聖人이라고 말하고, 여러 딸과 며느리들을 모두 그에게 가서 술법을 전수받게 하였다.
魏主가 담무참을注+③ 曇은 姓이고, 無讖은 그 이름이다. ≪北史≫ 〈北涼列傳〉에 말하기를 “曇無讖이 스스로 말하였다. ‘능히 귀신을 부려 병을 치료하며 부인들에게 아들을 많이 낳게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불렀는데 저거몽손이 억류하고 보내지 않다가 죽이니 魏主가 이로 말미암아 北涼에게 노여움을 품었다. 저거몽손은 거칠며 음탕하고 시기하며 포악하여 아랫사람들이 괴로워하였다.


역주
역주1 魏尊保太后爲皇太后 : “〈保太后는〉 保母 竇氏이니 太后라 한 것은 잘못된 것인데, 皇을 더한 것은 더욱 심한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높여 保太后로 삼았다.’라고 한 데에서는 지척하여 魏主라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서는 어찌하여 기록하지 않았는가. 그 일의 시작에서 폄하한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癸巳年(453)에 魏主 拓跋濬이 常氏를 높여서 皇太后로 삼았을 때에도 魏主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과 뜻이 같다.).[保母竇氏也 太后非矣 加皇又甚焉 然則前尊爲保太后 則斥書主 此則曷爲不書 貶於其事端足矣(癸巳年 魏主濬尊常氏爲皇太后 不書主 義同)]” ≪書法≫ ‘前尊爲保太后 則斥書主’는 본서 77쪽 참조.
역주2 兼稱代魏 以法殷商 : 北魏를 代라고도 일컫고 魏라고도 일컫는 것은 이전의 商나라를 殷이라고 일컫고 商이라고도 일컬었던 것과 같음을 말한다.
역주3 當享年萬億 : ≪魏書≫ 〈崔浩傳〉에는 “著在圖史 當享萬億(史書에 기록되어 응당 억만년을 향유하다.)”이라 하였다.
역주4 參軍督護 : 東晉 때 설치되었다. 營兵을 거느리고 部曲을 소유하였다. 南北朝 시대에도 三公府, 諸王府, 持節都督府, 將軍府 등에 설치되었으나 營兵을 거느리지 않았으며, 지위가 비교적 낮았다.
역주5 永初郡國志 : 劉宋 때 만든 地理書로 永初는 宋 武帝의 연호이다.
역주6 治中李抗之 : ≪資治通鑑≫에는 이 뒤에 “將五百人擊之(李抗之가 거느린 500명과 회합하여 그들을 공격하였다.)”라 하였다.
역주7 : ≪資治通鑑新註≫(陝西人文出版社, 1998)에 守는 圍困이라 하였는데, 이는 겹겹이 포위하는 것이다. 또한 본문 아래에서 “魏主之圍和龍也”라 하였다.
역주8 전해……합니다 : ≪資治通鑑≫에는 이 기사 바로 앞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沮渠蒙遜이 李順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가 연로하고 병들어 절할 수 없으니 며칠 후에 만나자고 하였는데, 이순이 “왕이 연로하고 병든 것은 조정에서 아는 것이니 어찌 스스로 편안하고자 조칙을 받은 사신을 보지 않는가.” 하자 다음 날 이순을 만났다.
역주9 齊 桓公이……받았습니다 : 齊 桓公이 諸侯들과 葵丘에서 회맹을 할 적에 周 襄王이 宰孔을 보내어 齊侯(齊桓公)에게 胙肉을 下賜하면서 말하기를 “天子가 文王과 武王께 제사를 지냈기에 재공을 보내어 伯舅(齊桓公)에게 胙肉을 내리노라.”라고 하였다. 齊侯가 뜰 아래로 내려가 拜謝하려 하자, 재공이 말하기를 “또 다음 명이 계셨소. 天子께서 나 재공에게 ‘伯舅는 나이가 높은데다가 功勞까지 있으므로 한 等級을 올려주니, 내려가서 배사하지 말게 하라.’라고 하셨소.”라고 하자, 齊侯가 대답하기를 “천자의 위엄이 면전에서 咫尺도 떨어져 있지 않으니, 小白 제가 감히 天子의 命을 탐하여 내려가 배사하지 않겠는가. 아래로 추락시켜 天子께 모욕을 끼칠까 두려우니, 감히 내려가 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뜰로 내려가 절한 뒤에 올라와서 胙肉을 받았다.(≪春秋左氏傳≫ 僖公 9년)
역주10 그 후손에게……충분합니다 : 원문의 ‘貽厥孫謀’는 ≪詩經≫ 〈大雅 文王有聲〉에 “그 후손에게 계책을 남겨주어 공경하는 자손을 편안하게 하니 무왕은 훌륭한 군주로다.[豊水有芑 武王豈不仕 詒厥孫謀 以燕翼子 武王烝哉]”라고 한 것에서 보이니, ≪시경≫에서는 ‘貽’가 ‘詒’로 되어 있다.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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