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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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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主子業景和元年이요 太宗明帝彧泰始元年이요 魏和平六年이라
宋鑄二銖錢하다
自孝建以來 民間盗鑄濫錢하니 商貨不行이라 更鑄二銖錢하여 形式轉細注+更, 工衡切.하니
民間效之하여 而更薄小하여 無輪郭하고 不磨鑢하니 謂之耒子注+磨, 礪也. 鑢, 錯也. 耒, 盧對切.라하더라
夏五月 魏主濬殂注+壽, 二十六.하니 太子弘立하다
世祖經營四方하여 國頗虛耗하고 重以内難하여 朝野楚楚注+重, 直用切. 內難, 謂宗愛旣弑世祖, 又弑南安王余. 楚楚, 苦楚不安之意.러니 髙宗嗣之하여 與時消息하여 靜以鎭之하고 懐集中外하니 民心復安하다 太子弘 即位하니 時年十二
魏車騎大將軍乙渾 殺司徒陸麗하다
魏車騎大將軍乙渾 専權하여 矯詔殺尙書楊保年等于禁中하고 使司衞監穆多侯 召平原王陸麗於代郡注+魏官有司衛監, 典宿衛. 多侯, 壽之弟也. 時麗治疾於代郡溫泉.한대
多侯謂曰 渾有無君之心하니 今宮車晏駕하고 王德望素重하니 姦臣所忌 宜少淹留以觀之하여 朝廷安靜然後 入未晚也니라
麗曰 安有聞君父之喪하고 慮患而不赴者乎 即馳赴平城이러니 渾所爲 多不法이어늘 麗數爭之하니 渾殺麗及多侯하고 而自爲太尉錄尙書事하다
六月 하다
◑秋七月 魏乙渾 自爲丞相하다
魏乙渾 爲丞相하여 位居諸王上하고 事無大小 皆取决焉하다
子業 幼而狷暴注+狷, 急也. 及即位 始猶難太后大臣及戴法興等하여 未敢自恣러니 太后既殂 子業 欲有所爲 法興輒抑制之하니 不能平이라
所幸閹人華願兒 怨法興裁其賜與하여 言於子業曰 道路皆言法興爲眞天子 官爲贗天子注+官, 猶呼官家. 贗, 音鴈, 僞物也.라하고 且官居深宮하여 與人物不接호되 法興 與太宰顔柳 共爲一體하여 内外畏服하니 深恐此坐 非復官有일까하노이다 子業 遂賜法興死하다
世祖 多猜忌하니 大臣 重足屏息이러니 世祖殂 義恭等相賀曰 今日 始免横死矣注+橫, 戶孟切.와라
甫過山陵 皆聲樂酣飲하여 不捨晝夜러니 及法興死 諸大臣 始復不自安이라
於是 元景師伯 密謀廢子業하고 立義恭하여 日夜聚謀而不能决이러니 元景 以其謀告沈慶之한대 慶之 與義恭으로 素不厚
又恨師伯専斷朝事하여 不與己參懐하여 乃發其事하니 子業 遂自帥羽林兵하여 殺義恭幷其四子하고
하니 元景 知禍至하고 入辭其母하고 整朝服乗車應召하니
弟叔仁 帥左右欲拒命이어늘 元景 苦禁之하고 既出巷 軍士大至하니 元景下車受戮하여 容色恬然이러라
幷其子弟諸姪하고 獲顔師伯於道하여 殺之하고 幷其六子하니 自是公卿以下 皆被捶曳如奴隷矣
子業在東宮 多過失이러니 世祖欲廢之而立新安王子鸞이어늘 侍中袁顗盛稱太子之美하여 乃止 子業 由是德之하여 既誅群公 以爲吏部尙書하다
尙書左丞徐爰 便辟善事人하고 頗涉書傳이라 自元嘉初 入侍左右하여 豫參顧問하니 長於附會하고 飾以典文이라 大明之世 委寄尤重이러니
殿省舊人 多見誅逐호되 唯爰 巧於將迎하여 始終無迕 子業毎出 常與沈慶之及姊山陰公主同輦할새 爰亦預焉이러니
主尤淫恣하니 子業爲置面首左右三十人注+爲, 去聲. 面首左右, 選面首之美者爲左右也. 面, 取其貌美. 首, 取其髮美.하다 吏部郎褚淵 貌美 公主 請以自侍어늘 子業許之하니
侍公主十日 備見逼迫호되 以死自誓하여 乃得免하니 湛之之子也
子業 令太廟 别畫祖考之像注+畫, 讀曰畵.하고 入廟指髙祖像曰 渠大英雄이라 生擒數天子注+大, 讀曰太. 生擒數天子, 謂擒桓玄․慕容超․姚弘也.라하고 指太祖像曰 渠亦不惡이로되 但末年 不免兒斫去頭注+謂爲元凶劭所弑也.라하고
指世祖像曰 渠大齇鼻 如何不齇아하고 立召畫工하여 令齇之注+齇, 壯加切, 鼻上皰也. 嗜酒鼻成齇. 皰, 音礮.하다
九月 宋主殺其弟新安王子鸞하다
新安王子鸞 有寵於世祖하니 子業疾之하여 遣使賜死하고 又殺其母弟南海王子師하고 發殷淑儀墓하고
又欲掘景寧陵이어늘 太史以爲不利於子業이라하여 乃止注+景寧陵, 世祖陵也, 在丹陽秣陵縣巖山. 案帝紀, 廢帝自以昔在東宮, 不爲孝武所愛, 及即位, 將掘景寧陵, 罵孝武爲齇奴.하다 謝莊爲殷淑儀誄曰 賛軌堯門注+誄, 魯水切. 誄丈夫者, 述其功德. 誄婦人者, 述其容德也.이라하니 子業以莊用鉤弋夫人事라하여 欲殺之러니 或爲之言하여 得繫尙方하다
宋義陽王昶出奔魏하다
昶爲徐州刺史注+昶, 文帝子.하니 素爲世祖所惡하여 而民間毎訛言昶反이러니 是歲 尤甚이라
子業 謂左右曰 我即大位하여 未嘗戒嚴하니 使人邑邑注+邑邑, 不得志也.이라하다
會昶遣使하여 上表求朝어늘 詰以反狀한대 使懼逃歸하다 子業 因下詔討昶하여 内外戒嚴하고 自將兵渡江하여 命沈慶之統諸軍이러니
昶聚兵移檄하되 統内皆不受命이라 知事不成하고 棄母妻하고 携愛妾하여 奔魏하니
頗涉學하고 能屬文이라 魏人 重之하여 使尙公主하고 賜爵丹楊王하다
宋以袁顗爲雍州刺史하고 蔡興宗爲吏部尙書하다
顗始爲子業所寵任이러니 俄而失指하여 待遇頓衰 顗懼求出하여 以爲雍州刺史하니
其舅蔡興宗謂曰 襄陽星惡하니 何可往注+蓋以天道言之.이리오
顗曰 白刃交前 不救流矢注+言白刃交乎前, 則流矢之來不暇救. 禍近而急, 故圖出外以求賒死, 後患非所計也. 今唯願生出虎口耳 天道遼遠하니 何必皆驗이리오
時臨海王子頊爲荆州刺史注+頊, 許王切. 朝廷以興宗爲子頊長史하여 行府州事한대 興宗辭不行이어늘
顗曰 朝廷形勢 人所共見이라 在内大臣 朝不保夕하니 舅 今出爲八州行事하고 顗在襄沔하면 地勝兵彊하니 可以共立桓文之勲이라 豈比受制兇狂臨不測之禍乎 今得間不去하면 後復求出인들 豈可得邪注+間, 隙也.
興宗曰 吾素門平進하여 與主上甚疏하니 未容有患注+蔡興宗, 蔡廓之子, 蔡謨之玄孫, 以方嚴自處. 官以序遷, 謂之平進, 可也, 謂之素門, 可乎. 蓋江左以王謝爲高門, 其餘有才望者, 或以姻戚擢用, 或以舊恩. 興宗此言, 蓋亦感切其甥, 指其在世祖之世, 調護昏狂, 階此以見寵任, 寵衰則求出以避禍, 進退皆無所據也.이요 宮省内外 人不自保 會應有變하리니
若内亂 得弭어니와 外釁 未必可量이니 汝欲在外求全하고 我欲居中免禍하노니 各行其志 不亦善乎
鄧琬爲晉安王子勛長史 顗與之欵狎過常하니 顗與琬으로 人地本殊 見者知其有異志注+顗有淸望, 又名門也. 琬性貪鄙, 又寒族也, 故云人地本殊.러라 興宗尋復爲吏部尙書하다
宋聽民私鑄錢하다
沈慶之復啓聽民私鑄錢하니 由是錢貨亂敗하여 千錢長不盈三寸이라 謂之鵝眼錢이라하고 劣於此者 謂之綖環錢注+綖, 與線同, 私箭切. 貫之以綖, 其狀如環, 故曰綖環.이라하고
貫之以縷하여 入水不沈하고 随手破碎하니 斗米一萬이라 商貨不行하더라
冬十月 宋主殺其會稽太守孔靈符하다
靈符所至有政績이러니 以忤犯近臣으로 近臣譛之한대 子業遣使鞭殺하고 竝其二子하다
十一月 宋主殺其寧朔將軍何邁하다
邁尙子業姑新蔡長公主注+主, 文帝女也.러니 子業納公主於後宮하여 謂之謝貴嬪이라하고 詐言主薨이라하고 殺宮婢하여 送邁第殯塟하니
邁素豪俠하고 多養死士러니 謀廢子業하고 立晉安王子勛이라가 事泄見殺하다
沈慶之 既發顔柳之謀 遂自昵於子業하여 數盡言規諫하니 子業浸不悅이라 慶之懼禍하여 杜門不接賓客이러니
嘗遣左右范羨하여 至蔡興宗所하니 興宗使謂曰 公閉門絶客 避悠悠請託者耳 興宗 非有求於公者也 何爲見拒리오 慶之使羨邀興宗한대 興宗往説之曰
主上比者所行 人倫道盡하니 率德改行 無可復望注+人倫道盡, 言內亂也.이라 今所忌憚 唯在於公하고 百姓喁喁所瞻頼者 亦在公一人而已
公威名 素著하여 天下所服이라 今擧朝遑遑하여 人懐危怖하니 指麾之日 誰不響應注+遑遑, 急也.이리오 如猶豫不斷하여 欲坐觀成敗하면 豈惟旦暮及禍리오 四海重責 將有所歸注+言慶之自昵於廢帝, 今忤帝意, 不惟行且及禍, 若他人擧事, 必謂慶之從君於昏, 慶之何所逃其責.리라
僕蒙眷異常이라 故敢盡言하니 願公詳思其計하라
慶之曰 僕 誠知憂危不復自保 但盡忠奉國 始終以之하여 以俟天命耳 加以老退私門하여 兵力頓闕하니 雖欲爲之 事亦無成注+頓, 讀曰鈍, 又讀. 闕, 乏也.이리라
興宗曰 當今懐謀思奮者 正求脫朝夕之死耳 殿中將帥 唯聽外間消息하니 若一人唱首하면 則俯仰可定이요
況公統戎累朝하여 舊日部曲 布在宮省하고 沈攸之輩 皆公家子弟注+攸之, 慶之從父兄子也. 門徒義附 竝三吳勇士
殿中將軍陸攸之 公之鄉人注+陸攸之, 蓋亦吳興人.이니 今入東討賊 大有鎧仗하여 在靑溪未發하니 公取以配衣麾下하여 使攸之帥以前驅注+衣, 於旣切. 攸之, 通鑑作陸攸之.하면 僕在尙書中하여 自當帥百僚하고 案前世故事하여 更簡賢明以奉社稷이니 天下之事 立定矣
又朝廷諸所施爲 民間傳言公悉豫之하니 公今不决이면 當有先公起事者 公亦不免附從之禍리라
聞車駕屢幸貴第하여 酣醉淹留注+貴第, 謂時貴之宅第也.하고 又聞屏左右하고 獨入閤内라하니 此萬世一時 不可失也니라
慶之曰 感君至言이나 然此大事非僕所能行이라 事至 固當抱忠以没耳注+事至, 猶言若事果至如興宗所言, 當抱忠以死也.
靑州刺史沈文秀 慶之弟子也 將之鎭할새 帥部曲屯白下注+晉․宋都建康. 新亭․白下皆江津要地. 新亭在西, 白下在東.하여 亦説慶之호되 因此衆力圖之라하고 再三言之하여 至於流涕호되 慶之終不從이러니
及子業 誅何邁 量慶之必入諫하고 先閉靑溪諸橋以絶之러니 慶之果往하여 不得進而還하니 子業 乃使沈攸之賜藥한대 慶之不肯飲이어늘 攸之 以被掩殺之하니 時年八十이라
詐言病薨하고 贈恤甚厚注+攸之隨慶之討隨王誕有功, 慶之抑其賞, 由是恨之, 故果於殺.하다
王玄謨 數流涕하여 諫子業以刑殺過差한대 子業 大怒하니 玄謨 宿將有威名이라 道路訛言호대 云已見誅라하니
蔡興宗 謂其典籖包灋榮曰 領軍殊當憂懼注+法榮, 玄謨典籤. 時玄謨爲領軍將軍.리라 法榮曰 領軍比日 殆不復食이라
興宗曰 領軍憂懼인댄 當爲方略이니 那得坐待禍至리오 因使法榮하여 勸玄謨擧事한대 玄謨使謝曰 此亦未易可行이라 期當不泄君言耳라하더라
將軍劉道隆 専典禁兵이러니 興宗嘗與俱從夜出注+通鑑“俱從帝夜出.”하여 謂曰 劉君 比日 思一閑冩하노라 道隆 解其意하여 掐興宗手曰 蔡公 勿多言注+閑寫者, 欲淸閑輸寫所懷也. 掐, 苦洽切, 爪按曰掐.하라하더라
宋主幽其諸父湘東王彧等於殿内하다
子業畏忌諸父하여 恐其在外爲患하여 皆拘於殿内하고 毆捶陵曳하여 無復人理하니 湘東王彧 建安王休仁 山陽王休祐 年長이라 尤惡之하니
以彧尤肥 謂之猪王이라하고 謂休仁爲殺王하고 休祐爲賊王하고 東海王禕 性凡劣이라 謂之驢王이라하여 以木槽盛食하고 裸彧内泥水中하여 使就槽食注+槽, 才勞切, 畜獸之食器. 內, 讀曰納.하다
前後欲殺 以十數 休仁 多智數하여 毎以談笑佞諛 説之 故得推遷注+說, 讀曰悅. 推, 移也, 遷, 轉也, 言以談笑佞諛轉移帝意也. 或曰 推遷, 延緩之意.이러라 少府劉曚妾 孕臨月 迎入後宮하여 俟生男以爲太子注+曚, 音蒙. 將産之月曰臨月.러니
彧嘗忤旨하니 子業裸之하고 縛其手足하여 檐付太官曰 今日屠猪注+檐, 都暗․都甘二切, 負也, 通作擔.하라하니 休仁笑曰 不若待皇太子生하여 殺取肝肺라한대 子業 乃釋之러니
及曚妾 生子 名曰皇子라하고 爲之大赦하다
宋主子業 以太祖世祖在兄弟數皆第三이러니 江州刺史晉安王子勛 亦第三이라 故惡之러니
因何邁之謀하여 使左右朱景雲으로 送藥賜子勛死하니 景雲至湓口하여 停不進이러니 子勛典籖謝道邁聞之하고 馳告長史鄧琬한대
琬曰 身 南土寒士注+琬, 南昌人, 起於寒素. 蒙先帝殊恩하여 以愛子見託하니 豈得惜門户百口리오 期當以死報效 幼主昏暴하여 社稷危殆하니 雖曰天子 事猶獨夫注+猶, 若也, 似也.
今便指帥文武하여 直造京邑하여 與群公卿士 廢昏立明耳라하고 遂稱子勛教하여 令所部戒嚴하니
子勛 戎服出聽事하여 集僚佐하고 使主帥潘欣之 宣旨諭之하니 四座未對 參軍陶亮 首請效死前驅한대 衆皆奉旨하니 乃以亮爲하여 總統軍事하다
子業 使荆州 錄送長史張悅하여 至湓口注+錄, 謂收捕也. 悅, 暢之弟也.어늘 稱子勛命하여 釋其桎梏하고 迎以所乗車하여 以爲司馬하여 共掌内外衆事하니 旬日 得五千人이라 出頓大雷하고 移檄遠近하다
宋主殺其南平王敬猷 廬陵王敬先 安南侯敬淵하다
子業 召諸妃主하여 列於前하고 彊左右使辱之注+彊, 其兩切.하니 南平王鑠妃江氏不從注+妃卽江湛之妹.이라 子業하여 鞭妃一百而殺其三子하다
先是 民間訛言湘中 出天子라하니 子業 將南巡荆湘以厭之호되 欲先誅湘東王彧하고 然後發하다
子業既殺諸公 恐群下謀己하여 以直閤將軍宗越沈攸之等有勇力이라하여 引爲爪牙하고 賞賜充牣注+江左以直閤將軍出入省閤, 總領宿衛.하니 越等皆爲盡力注+爲, 去聲.이라
子業恃之하여 益無所憚하여 恣爲不道하니 中外騷然하고 宿衞之士 皆有異志 而畏越等不敢發이러라
三王久幽하여 不知所爲하니 湘東王彧主衣阮佃夫及子業左右壽寂之王敬則等 陰謀弑子業注+壽, 姓也.이러라
先是 子業遊華林園竹林堂하여 使宮人倮相逐하니 一人 不從命이어늘 斬之注+竹林堂, 華林園後堂也.러니
夜夢在竹林堂 有女子罵曰 悖虐不道하니 明年不及熟矣注+謂不至麥熟時死也.리라 子業 於宮中 求得一人似所夢者하여 斬之하니
又夢所殺者 罵曰 我已訴上帝矣 於是 巫覡 言竹林堂 有鬼라하더라 子業 出華林園할새 休仁休祐竝從하고 彧獨在祕書省하여 不被召하니 益憂懼注+祕書省, 藏圖書之所, 在禁中.러니
以南巡으로 宗越等 竝聽出外裝束하니 子業 悉屏侍衛하고 與群巫綵女 射鬼於竹林堂注+綵女, 倣後漢采女之制.할새 壽寂之等 抽刀前弑之하고 宣令宿衛曰 湘東王 受太皇太后令하여 除狂主하여 今已平定이라하다
休仁 就祕書省하여 見彧即稱臣하고 引升御座하고 召見諸大臣하니 猶著烏帽 休仁 呼主衣하여 以白帽代之注+江南, 天子宴居著白紗帽.하고
凡事 悉稱令書施行하고 宣太皇太后令하여 數子業罪惡하고 命湘東王하여 纂承皇極하고 子業母弟豫章王子尙 頑悖有兄風이라 及會稽公主 皆賜死注+會稽公主, 卽山陰公主.하다
休仁等 始得出居外舍하고 釋謝莊之囚하다 子業 猶横尸太醫閤口
蔡興宗 謂僕射王彧曰 此雖凶悖 要是天下之主 宜使喪禮粗足이라 若直如此 四海必將乗人이리라하고 乃塟之秣陵注+乘人, 言乘此以奉辭伐罪. 王彧, 湘東王妃兄也, 故興宗與之言.하다
論功行賞하여 壽寂之等十四人封爵有差하고 以東海王禕爲中書監太尉하고 晉安王子勛爲車騎將軍開府儀同三司하고 建安王休仁爲司徒尙書令州刺史하고
彧即位大赦하다 子業時昏制謬封 竝皆刊削하고 尊世祖之母路太后爲崇憲太后하고 立妃王氏爲皇后하니 彧之妹也注+初, 湘東王母沈婕妤早卒, 路太后養之.
以劉道隆爲中護軍하니 道隆 暱於子業하여 嘗無禮於建安太妃注+此子業使左右辱妃主時事.러니 至是하여 建安王休仁 求解職注+南史休仁傳, 休仁求解職曰 “臣不得與此人同朝.”한대 宋主 乃賜道隆死하다
宗越等 内不自安이어늘 沈攸之以聞한대 皆伏誅하고 攸之復入直閤하다 王彧避主諱하여 以字行注+彧字景文.하더라
宋罷二銖錢하고 禁鵝眼綖環錢하다
◑宋雍郢荆州會稽郡皆擧兵應尋陽하다
江州佐吏 得宋主所下令書하고 皆喜하여 共造鄧琬曰 暴亂既除하고 殿下又開黄閤하니 實爲大慶注+時加子勛開府儀同三司, 故云開黃閤.이로다
琬取令書投地曰 殿下當開端門이니 黄閤是吾徒事耳라하니 衆皆駭愕注+天子開端門. 宮門正南門曰端門.이러라 琬乃與陶亮等繕治器甲하고 徵兵四方하다
袁顗既至襄陽 即與參軍劉胡 繕修兵械하고 簡集士卒하고 矯太皇太后令起兵하여 奉表勸子勛即大位하니
令子勛建牙於桑尾注+桑尾, 卽桑落洲尾.하고 傳檄建康하고 稱孤志遵前典하여 廢幽陟明이러니 而湘東王彧矯害明茂하여 簒竊天寳注+子勛自稱曰孤. 廢幽陟明, 卽廢昏立明也. 茂, 美也. 明茂, 謂明德茂親, 矯害明茂, 謂矯太皇太后令賜豫章王子尙死也. 天寶, 謂帝位也.하니 藐孤同氣 猶有十三이라 聖靈何辜 而當乏饗注+藐, 妙小․亡角二切, 小也. 同氣, 兄弟也. 世祖二十八子, 時存者子勛․子綏․子房․子頊․子仁․子眞․子元․子輿․子孟․子嗣․子趨․子期․子悅凡十三人. 聖靈, 謂世祖之靈也. 乏饗, 不祀也.
郢州刺史安陸王子綏承子勛初檄하여 欲共攻子業이라가 聞其已隕하고 即解甲下摽注+言初檄者, 以別今此傳建康之檄. 摽當作幖, 牙旗屬也. 凡軍行, 則建立牙于軍門, 此云下幖, 謂軍不果行而解下牙也.러니
既而 聞江雍猶治兵하니 行事茍卞之 大懼하여 即遣參軍鄭景玄師軍馳下하고 幷送軍糧注+江, 謂鄧琬, 雍, 謂袁顗. 郢州居江․雍之間, 懼其夾攻, 以問罷兵之由.하다
荆州行事孔道存 奉刺史臨海王子頊하고 都水使者孔璪 説會稽行事孔顗하여 奉太守尋陽王子房하여 皆擧兵以應子勛注+璪, 子皓切.하다


송주宋主 유자업劉子業 경화景和 원년이고, 태종太宗 명제明帝 유욱劉彧 태시泰始 원년이고, 북위北魏 고종高宗 문성제文成帝 탁발준拓跋濬 화평和平 6년이다.
[] 봄에 나라가 이수전二銖錢을 주조하였다.
[] 효건孝建(454~456) 연간 이래로 민간에서 몰래 동전을 주조하여 열악한 동전이 넘쳐나니, 상업과 무역에 동전이 유통되지 못하였다. 이때 동전을 바꾸어注+① 更(고치다)은 工衡의 切이다. 이수전二銖錢을 주조하였는데 〈기존의 효건사수전孝建四銖錢에 비해〉 동전의 형태가 다시 작아졌다.
[] 여름 5월에 위주魏主(문성제文成帝) 탁발준拓跋濬하니注+① 향년이 26세였다., 태자太子 탁발홍拓跋弘이 즉위하였다.
[] 예전에 북위北魏 세조世祖(태무제太武帝)가 사방에 전쟁을 벌여 국가의 재용이 소모되고 더욱이 국내 환난이 일어나서 조정과 재야가 괴로워하였는데注+① 重(거듭)은 直用의 切이다. “內難”은 宗愛가 世祖를 시해하고 나서 또 南安王 拓跋余를 시해한 것을 말한다. “楚楚”는 괴로워하고 편하지 않은 뜻이다., 고종髙宗(문성제文成帝)이 왕위를 계승하여 시세에 맞게 변화하여 고요함으로 나라를 진정시키고 나라의 안팎을 회유하여 편안케 하니 민심民心이 다시 안정되었다. 태자太子 탁발홍拓跋弘이 즉위하니 이때 나이가 12세였다.
[] 북위北魏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을혼乙渾사도司徒 육려陸麗를 죽였다.
[] 북위北魏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을혼乙渾이 권력을 독점하여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서 상서尙書 양보년楊保年 등을 금중禁中에서 죽이고, 사위감司衞監 목다후穆多侯를 시켜서 대군代郡에 있는 평원왕平原王 육려陸麗를 부르게 하였다.注+① 北魏의 관직에는 司衛監이 있는데 宿衛를 담당한다. 穆多侯는 穆壽의 아우이다. 이때 陸麗는 代郡의 溫泉에서 병을 치료하였다.
목다후가 육려에게 말하기를 “을혼이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지금 황상께서 돌아가시고 평원왕의 덕망이 평소 크니 이는 간신이 싫어하는 바입니다. 마땅히 다소 시간을 끌면서 관망을 하시다가 조정朝廷안정安靜된 뒤에 들어가셔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육려가 말하기를 “어찌 군부君父을 듣고 자기가 환난을 당할 것을 근심하여 달려가지 않는 경우가 있겠는가.”라고 하고, 즉시 평성平城으로 달려갔다. 을혼의 소행에 불법不法이 많자 육려가 자주 그와 다투니 을혼이 육려와 목다후를 죽이고 스스로 태위太尉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다.
[] 6월에 북위北魏금주령禁酒令을 해제하였다.
[] 가을 7월에 북위北魏 을혼乙渾이 스스로 승상丞相이 되었다.
[] 북위北魏 을혼乙渾승상丞相이 되어 지위가 여러 들의 위에 있고 크고 작은 일이 모두 그에게서 결정되었다.
[] 8월에 송주宋主(유자업劉子業)가 태재太宰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 상서령尙書令 유원경柳元景, 복야僕射 안사백顔師伯을 죽였다.
[] 유자업劉子業은 어려서 조급하고注+① 狷은 급함이다. 난폭하였는데, 즉위即位하자 처음에 태후太后대신大臣, 대법흥戴法興 등을 어려워하여 감히 멋대로 굴지 못하였다. 태후가 한 뒤에 유자업이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면 대법흥이 매번 억제하니,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였다.
유자업이 총애하는 엄인閹人(내시) 화원아華願兒는 대법흥이 자신이 하사받을 물품을 줄인 것을 원망하여 유자업에게 말하기를 “길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법흥이 진짜 천자이고 관가官家(임금)는 거짓 천자이다.’라고注+② 官은 官家(임금)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贗은 音이 鴈이니, 가짜 물건이다. 합니다. 또 관가官家는 깊은 궁중에 거처하여 외부의 사람들과 만나지 못하지만, 대법흥은 태재太宰 안사백顔師伯유원경柳元景과 함께 한 몸이 되어서 조정 안팎이 두려워 복종하니, 이 천자의 자리가 다시 관가官家의 소유가 되지 않을까 매우 우려됩니다.”라고 하니, 유자업은 마침내 대법흥에게 죽음을 내렸다.
예전에 세조世祖(효무제孝武帝)가 시기猜忌함이 많자 대신大臣들이 두려워 발자국을 포개어 서고 숨을 죽였는데, 세조가 하자 유의공 등이 서로 경하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비명횡사非命橫死注+③ 橫(억울하다)은 戶孟의 切이다. 면했구나.”라고 하였다.
막 세조를 산릉山陵장사葬事를 지내고 나서 모두 음악을 연주하며 술을 마시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았는데, 대법흥이 죽고 나자 여러 대신大臣들은 비로소 다시 편안하지 못하였다.
[] 이에 유원경柳元景안사백顔師伯이 음밀히 유자업劉子業을 폐위하고 유의공劉義恭을 세울 것을 도모하여 밤낮으로 모여 모의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유원경이 자신들의 모의한 것을 가지고 심경지沈慶之에게 고하였는데 심경지가 유의공과 평소 잘 지내지 못하였다.
게다가 안사백이 조정의 일을 전적으로 결정하고 자기와 함께 상의하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마침내 모의한 일을 고발하였다. 유자업이 마침내 직접 우림병羽林兵을 인솔하여 유의공을 죽이고 그의 네 아들도 함께 죽였다.
또 〈사자를 보내〉 유원경을 부르면서 병사를 딸려 보내니, 유원경이 재앙이 닥친 것을 알고 들어가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조복朝服을 정돈해 입고 수레에 올라 소환에 응하였다.
유원경의 아우 유숙인柳叔仁이 측근을 인솔하여 소환 명령을 거부하려 하였으나, 유원경은 애써 그를 말렸다. 골목에서 나오자 군사軍士들이 크게 이르렀는데, 유원경이 수레에서 내려 죽음을 맞이하면서 얼굴빛이 태연하였다.
그리고 그의 자제子弟들과 여러 조카들도 함께 죽였다. 길에서 안사백顔師伯을 잡아 죽이고 그의 여섯 아들도 함께 죽였다. 이로부터 공경公卿 이하 사람들이 모두 매를 맞고 끌려 다니는 것이 마치 노예와 같았다.
[] 예전에 유자업劉子業동궁東宮으로 있을 적에 과실過失이 많았는데, 세조世祖(효무제孝武帝)가 그를 폐하여 신안왕新安王 유자란劉子鸞을 세우려 하였다. 그러자 시중侍中 원의袁顗태자太子의 아름다움을 크게 칭찬하여 마침내 중지되었다. 유자업이 이로 말미암아 원의에게 은덕을 입었다 여겨서 여러 들을 주살한 뒤에 그를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삼았다.
상서좌승尙書左丞 서원徐爰이 비위를 잘 맞추고 사람을 잘 섬겼으며 글을 상당히 섭렵하였다. 원가元嘉(424~451, 문제文帝 연호) 초기부터 궁중에 들어와 황제를 좌우에서 모시면서 고문顧問(자문諮問)에 참여하였는데 부화뇌동을 잘하고 전고典故문사文辭로 치장을 잘하였다. 대명大明(457~464, 효무제孝武帝 연호) 시기에 그를 신임하는 것이 중하였다.
山陰公主山陰公主
이때에 조정의 원로들이 대부분 주살되거나 쫓겨났는데 오직 서원만은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데에 뛰어나서 시종 임금의 뜻을 거스른 일이 없었다. 유자업이 외출할 때마다 심경지沈慶之와 황제의 누이 산음공주山陰公主와 함께 을 탔는데, 서원 역시 그 가운데 끼었다.
산음공주는 매우 음탕하고 방자하였는데 유자업은 그녀를 위하여 잘생긴 남자 30명을 뽑아서 그녀의 좌우에 두었다.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面首左右”는 面首가 아름다운 사람을 뽑아서 左右로 삼는 것이다. 面은 얼굴이 아름다움을 취한 것이고, 首는 머리칼이 아름다움을 취한 것이다. 이부랑吏部郎 저연褚淵의 모습이 아름다웠으므로 산음공주가 자신을 시중들게 할 것을 청하자 유자업이 허락하였다.
저연이 산음공주를 시중들은 지 열흘 동안에 온통 핍박을 받았으나 죽음으로 맹세하고서야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연은 저담지褚湛之의 아들이다.
유자업이 태묘太廟에 별도로 조고祖考화상畫像을 그려두게注+② 畫(그리다)는 畵로 읽는다. 하고 태묘에 들어가 고조髙祖(유유劉裕)의 화상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분은 위대한 영웅英雄이시다. 몇 명의 천자를 사로잡으셨다.”라고注+③ 大(위대하다)는 太로 읽는다. “生擒數天子”는 桓玄․慕容超․姚弘을 사로잡은 것을 말한다. 하고, 태조太祖(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의 화상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분은 역시 나쁘지는 않았으나 말년에 아들에게 머리가 쪼개지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라고注+④ 元凶 劉劭(宋 文帝의 太子)에게 시해됨을 말한다. 하고,
세조世祖(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의 화상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분은 코에 큰 부스럼이 났는데 어째서 코 위 부스럼이 없는가.”라고 하고, 즉시 화공畫工을 불러서 코 위 부스럼을 그려 넣게 하였다.注+⑤ 齇는 壯加의 切이니, 코 위의 부스럼이다. 술을 마시기를 즐기면 코에 부스럼이 난다. 皰(부스럼)는 音이 礮이다.
鉤弋夫人鉤弋夫人
[] 9월에 송주宋主(유자업劉子業)가 그의 아우 신안왕新安王 유자란劉子鸞을 죽였다.
[] 신안왕新安王 유자란劉子鸞세조世祖(효무제孝武帝)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이에 유자업劉子業이 그를 미워하여 사신을 보내 죽음을 내리고 또 유자란의 동모제同母弟 남해왕南海王 유자사劉子師를 죽였으며 은숙의殷淑儀의 무덤을 파헤쳤다.
경녕릉景寧陵을 파헤치려 하자注+① 景寧陵은 世祖의 陵인데, 丹陽 秣陵縣 巖山에 있다. ≪帝紀≫(≪南史≫ 〈宋本紀〉)를 살펴보면 廢帝는 자신이 과거 東宮으로 있을 적에 孝武帝(世祖)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即位하자 景寧陵을 파헤치고자 하였으며, 孝武帝를 욕하여 齇奴(코 위의 부스럼 난 노예)라 하였다., 태사太史가 유자업에게 불리할 것이라고 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사장謝莊은숙의殷淑儀를 위하여 뇌문誄文注+② 誄(애도하다)는 魯水의 切이다. 남자의 誄文을 짓는 경우는 그 功德을 서술하고, 婦人의 誄文을 짓는 경우는 그 容德을 서술한다. 짓기를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 변호했다가 에서 노역형을 받았다.
[] 나라 의양왕義陽王 유창劉昶북위北魏로 망명하였다.
[] 유창劉昶注+① 劉昶은 文帝의 아들이다. 서주자사徐州刺史가 되었다. 유창이 평소 세조世祖(효무제孝武帝)에게 미움을 받아서 민간民間에서는 늘 유창이 반란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돌았는데, 이해에 더욱 심하였다.
유자업劉子業이 측근에게 말하기를 “내가 황제에 즉위하여 계엄戒嚴을 한 적이 없었는데, 사람을 울적하게注+② “邑邑”은 뜻을 얻지 못함이다. 하는도다.”라고 하였다.
마침 유창이 사신을 보내 표문表文을 올려 입조入朝하기를 청하니, 유자업은 반란의 정상情狀이 있다고 꾸짖었는데 사신이 두려워하여 도주해 돌아갔다. 유자업은 이를 이용하여 조령詔令을 내려 유창을 토벌하게 하고 안팎에 계엄戒嚴을 내렸다. 그리고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장강長江을 건너서, 심경지沈慶之에게 명하여 모든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유창이 병사를 모으고 격문을 돌렸으나 관내管內 지역들이 모두 명을 받지 않았다. 유창은 일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아차리고 모친과 아내를 버리고 애첩愛妾을 데리고서 북위北魏로 도주하였다.
유창은 자못 학문을 익히고 글을 잘 지었으므로, 북위北魏 사람들이 그를 존중하여 공주公主와 혼인시키고 단양왕丹楊王의 작위를 내렸다.
[] 나라가 원의袁顗옹주자사雍州刺史로 삼고, 채흥종蔡興宗이부상서吏部尙書로 삼았다.
[] 원의袁顗가 처음에 유자업劉子業에게 총애와 신임을 받았었는데 얼마 뒤에 유자업의 뜻에 부합치 못하여 대우待遇가 갑자기 줄었다. 원의는 두려워하여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하자 유자업이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삼았다.
원의의 외삼촌 채흥종蔡興宗이 말하기를 “〈옹주雍州치소治所인〉 양양襄陽성상星象의 징조가 불길한데注+① 〈“襄陽星惡”은〉 天道(하늘의 징조)로 말한 것이다. 어찌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원의가 말하기를 “흰 칼날이 앞에서 교차하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겨를이 없습니다.注+② 〈“白刃交前 不救流矢”는〉 흰 칼날이 앞에서 교차하면 날아오는 화살이 닥치는 것을 피할 겨를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재앙이 가깝고 급하므로 외직으로 나가기를 꾀하여 죽음을 늦추려 한 것이요, 후환은 따질 바가 아닌 것이다. 지금은 오직 호랑이 입에서 살아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천도天道요원遼遠하니 어찌 꼭 모두 응험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임해왕臨海王 유자욱劉子頊注+③ 頊은 許王의 切이다. 형주자사荆州刺史로 삼았다. 조정朝廷에서는 채흥종을 유자욱의 장사長史로 삼아 의 일을 대행하게 하였는데 채흥종은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원의가 말하기를 “조정朝廷의 형세는 사람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중앙에 있는 대신大臣들도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보장하지 못하니, 외삼촌께서 지금 외직으로 나와 8행사行事(의 일을 대행하는 직책)가 되고, 제가 양양襄陽면수沔水에 있으면 지리가 유리하고 병력이 강성하니, 환공桓公 문공文公의 업적을 함께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폭군에게 압제를 받으면서 예측할 수 없는 재앙이 닥치는 것과 비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기회를注+④ 間은 틈이다. 얻고서 떠나지 않으면 뒤에 다시 외직으로 나가기를 구한들 어찌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채흥종이 말하기를 “나는 한미한 집안에서 순서대로 승진하여 주상主上과는 매우 소원하니 재난을 받을 것이 없다.注+⑤ 蔡興宗은 蔡廓의 아들이고, 蔡謨의 玄孫인데, 方正하고 嚴肅함으로 自處하였다. 〈채흥종이〉 관직이 순서대로 승진하였으니, 平進이라 한 것은 옳지만 素門(한미한 가문)이라고 한 것은 옳겠는가. 江左(南朝)에서는 王氏․謝氏로 높은 집안을 삼고, 그 나머지 중에 재주와 명망이 있는 이는 혹은 姻戚으로 박탈하거나 혹은 舊恩으로 등용하였다. 蔡興宗의 이 말은 또한 그 甥姪(袁顗)에게 간절하게 감화하려 한 것이니, 世祖(孝武帝)의 시대에 〈효무제가 태자인 劉子業을 폐하고자 하자〉 원의가 어리석고 광포한 자(유자업)를 보호하여서 이를 계제로 〈유자업이 황제가 된 뒤에〉 유자업의 총애와 신임을 받았는데, 〈얼마 후〉 총애가 쇠하자 외직으로 나가 재앙을 피하려고 하니, 원의의 進退에 모두 의거할 바가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궁성宮省 안팎의 사람들이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니 당연히 변란이 있을 것이다.
가령 중앙의 혼란은 그칠 수 있지만 외방의 혼란은 반드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외방에서 온존함을 구하려 하고 나는 중앙에서 재앙을 면하려고 하니 각자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등완鄧琬진안왕晉安王 유자훈劉子勛장사長史였는데, 원의가 그와 허물없이 지냄이 정상을 넘었다. 원의는 등완과 인품人品문지門地가 본래 달랐기 때문에 이를 본 사람들이 그들이 역심逆心을 품고 있는 것을 눈치 챘다.注+⑥ 袁顗는 淸望이 있는데다 또 名門이었다. 鄧琬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비루한데다 또 寒族이었으므로 人品과 門地가 본래 다르다고 한 것이다. 채흥종은 얼마 후 다시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다.
[] 나라가 백성들이 사사로이 동전을 주조鑄造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 심경지沈慶之가 다시 아뢰어 백성들이 사사로이 동전을 주조鑄造하는 것을 허락하니, 이로 말미암아 전화錢貨가 혼란하여 동전 1천 을 꿴 길이가 3이 되지 못했으므로 이를 이라고 불렀고, 이보다 열악한 것을 선환전綖環錢이라고注+① 綖(실)은 線과 같으니, 私箭의 切이다. 〈동전이 얇아서〉 실로 꿰맬 수 있고 그 모양이 고리처럼 가늘기 때문에 綖環이라고 한 것이다. 불렀다.
〈동전이 얇아서 동전들을〉 실로 꿰어 물에 넣어도 가라앉지 않고 손을 대면 부서졌다. 〈동전의 가치가〉 쌀 1에 1만 으로 떨어져서 상업과 무역에 동전이 유통되지 못하였다.
[] 겨울 10월에 송주宋主(유자업劉子業)가 회계태수會稽太守 공영부孔靈符를 죽였다.
[] 공영부孔靈符가 부임한 곳마다 치적治積이 있었다. 근신들이 공영부가 자신들의 뜻을 거스르고 저촉한 것으로 참소하였는데, 유자업劉子業이 사신을 보내 공영부를 채찍으로 쳐서 죽이고 그의 두 아들도 함께 죽였다.
[] 11월에 송주宋主(유자업劉子業)가 영삭장군寧朔將軍 하매何邁를 죽였다.
[] 하매何邁유자업劉子業의 고모 신채장공주新蔡長公主에게 注+① 公主는 宋 文帝의 딸이다.장가들었는데, 유자업이 신채장공주를 후궁後宮으로 들이고 사귀빈謝貴嬪이라 하였다. 그리고 거짓으로 공주가 하였다 말하고 궁비宮婢를 죽여서 하매의 집으로 보내 빈장殯葬을 하게 하였다.
하매가 평소 호협하고 죽음을 각오한 용사들을 많이 양성하였는데, 이에 유자업을 폐위하고 진안왕晉安王 유자훈劉子勛을 세우려고 도모했다가 일이 누설되어 죽임을 당했다.
[] 송주宋主(유자업劉子業)가 태위太尉 심경지沈慶之를 죽였다.
[] 예전에 심경지沈慶之안사백顔師伯유원경柳元景의 모반을 고발하고 나서 마침내 스스로 유자업劉子業을 가까이하면서 할 말을 다하여 규간規諫하니 유자업이 점점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심경지가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빈객賓客을 만나지 않았다.
한번은 심경지가 측근인 범선范羨을 보내어 채흥종蔡興宗의 처소에 가게 하였는데, 채흥종이 범선을 통하여 심경지에게 말을 전하기를 “께서 문을 닫아걸고 빈객을 사절하는 것은 수많은 청탁자請託者들을 피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에게 요구할 것이 없는데 어찌 만나 뵙지 못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심경지는 범선을 보내서 채흥종을 맞이하게 하자, 채흥종이 가서 심경지를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주상主上께서 근래에 하는 짓으로 인륜人倫가 다 없어졌으니注+① “人倫道盡”은 內亂을 말한다. 을 따르고 행실을 고치는 것은 다시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금 주상이 꺼리는 바가 오직 에게 달려 있고 백성들이 우러러 바라보고 의지할 바가 역시 한 사람에게 달려 있을 뿐입니다.
위명威名이 평소 드러나서 천하 사람들이 감복한 바입니다. 이제 온 조정은 어찌할 줄 모르고注+② “遑遑”은 급함이다.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있으니, 께서 지휘하는 날에 누군들 호응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머뭇거리며 결단하지 않고 앉아서 성공할지 실패할지를 관망한다면 어찌 조석간朝夕間에 화를 당할 뿐이겠습니까. 사해四海의 무거운 문책이 장차 에게 돌아갈 것입니다.注+③ 沈慶之가 스스로 廢帝(劉子業)를 가까이하고서 이제 폐제의 뜻을 거슬렀으니, 장차 재앙에 미칠 뿐만이 아니라 만일 다른 사람이 擧事하면 반드시 심경지가 혼우한 군주를 따랐다고 할 것이니 심경지가 어찌 그 책임을 피하겠느냐고 말한 것이다.
제가 공에게 특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감히 다 말씀드립니다. 공께서는 그 계책을 자세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심경지가 말하였다. “내가 진실로 근심스럽고 위태한 상황에서 다시 자신을 보전할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충성을 다하고 국가(황제皇帝)를 받드는 것을 시종일관하여 천명天命을 기다릴 뿐이다. 게다가 늙어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머물고 있어 병력兵力이 모자라니注+④ 頓(결핍되다)은 鈍(둔)으로 읽고, 또 본음대로 읽는다. 缺은 모자람이다., 비록 이를 하려고 해도 역시 성사成事시키지 못할 것이다.”
[] 채흥종蔡興宗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반란을 모의하고 떨쳐 일어날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조석간朝夕間의 죽음에서 벗어나려 할 뿐입니다. 궁중의 장수들은 오직 외방의 소식을 기다릴 뿐이니 만약 한 사람이 창의唱義하면 삽시간에 평정될 것입니다.
더구나 께서는 누조累朝에 걸쳐 군대를 통솔하여 옛적의 부곡部曲들이 궁성宮省에 깔려 있고 심유지沈攸之注+① 沈攸之는 沈慶之의 從父兄子(5촌 從姪)이다. 무리들은 모두 의 집안 자제들입니다. 그리고 공의 문도門徒들과 의부義附(귀족貴族이나 호족豪族에게 의탁한 자)는 모두 삼오三吳 지역의 용사들입니다.
육유지陸攸之동향同鄕 사람인데注+② 陸攸之는 또한 吳興 사람이다. 지금 동쪽으로 가서 도적을 토벌하려 하여 무기를 많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아직 청계靑溪에서 출발하지 않았으니, 께서 그의 무기를 취하여 휘하에 분배하고 육유지에게 이들을 통솔하여 선봉을 서게 하면注+③ 衣(입다)는 於旣의 切이다. 攸之는 ≪資治通鑑≫에 陸攸之로 되어 있다. 제가 상서성尙書省 안에서 직접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전대前代고사故事를 살펴서 다시 현명賢明한 군주를 가려서 사직社稷을 받들 것이니, 천하의 일이 바로 안정될 것입니다.
또 지금 조정朝廷에서 시행하는 여러 정사들에 대해 민간民間에서는 께서 여기에 모두 참여하였다고 떠듭니다. 께서 지금 결단하지 않으면 보다 먼저 거사擧事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은 또한 황제를 따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듣건대 거가車駕(황제)가 자주 권귀權貴의 집안에注+④ “貴第”는 당시 權貴의 저택을 말한다. 가서 술에 취해 머문다고 하고, 또 듣건대 좌우를 물리치고 홀로 각내閣内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는 만세萬世에 한 번 있는 기회이니 잃어서는 안 됩니다.”
심경지沈慶之가 말하기를 “그대의 지극한 말에 감동하였으나, 이러한 큰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 이르면注+⑤ “事至”는 만일 일이 과연 蔡興宗이 말한 것과 같은 지경에 이른다면 충절을 품고 죽을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당연히 충절을 품고 죽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 청주자사靑州刺史 심문수沈文秀심경지沈慶之의 아우의 아들이다. 장차 으로 갈 적에 부곡部曲을 인솔하여 백하白下에 주둔하고서注+① 晉나라와 宋나라는 建康에 도읍하였다. 新亭과 白下는 모두 長江 나루터의 要地이다. 신정은 서쪽에 있고, 백하는 동쪽에 있다. 또한 심경지를 설득하기를 “이 군사들의 힘을 바탕으로 도모하십시오.”라고 하고, 재삼 말하면서 눈물까지 흘렸으나 심경지는 끝내 따르지 않았다.
유자업劉子業하매何邁를 주살할 적에 심경지가 반드시 궁중으로 들어와서 간언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청계靑溪의 여러 다리를 폐쇄하고 끊어놓았다. 심경지가 과연 궁중으로 가다가 나아갈 수 없어 돌아오니, 유자업이 심유지沈攸之를 보내어 사약死藥을 내렸는데, 심경지가 마시려 하지 않자 심유지가 이불로 덮어 죽이니注+② 沈攸之는 沈慶之를 따라서 隨王 劉誕을 토벌하여 공이 있었는데, 심경지가 그 상을 낮추어 이로 말미암아 앙심을 품었으므로 죽이기를 과감하게 한 것이다., 이때 나이가 80세였다.
유자업은 거짓으로 〈심경지가〉 병으로 하였다 하고 그를 증직贈職하고 그 가족을 위로한 것이 매우 융숭하였다.
왕현모王玄謨가 자주 눈물을 흘리면서 유자업에게 형벌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과도하다고 간언하였는데 유자업이 크게 노하였다. 왕현모는 숙장宿將으로 위명威名이 있었기 때문에 거리에 와언訛言이 나돌아 “왕현모가 이미 주살을 당하였다.”라고 하였다.
채흥종蔡興宗이 왕현모의 전첨典籖 포법영包灋榮(포법영)에게 말하기를 “영군장군領軍將軍(왕현모王玄謨)께서 매우 근심하고 두려워할 것이다.”라고 하니注+③ 包灋榮은 王玄謨의 典籤이다. 이때 왕현모는 領軍將軍이었다., 포법영包法榮이 말하기를 “영군장군께서는 근래 거의 음식을 잡수시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채흥종이 말하기를 “영군장군께서 근심하며 두려워하신다면 방책을 세워야 할 것이니 어찌 앉아서 재앙이 오기를 기다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이어서 포법영으로 하여금 왕현모에게 거사를 일으킬 것을 권하게 하였는데, 왕현모가 사람을 보내어 사양하기를 “이것은 또한 쉽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필코 그대의 말을 누설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장군將軍 유도륭劉道隆금병禁兵전담專擔하고 있었는데, 채흥종이 일찍이 그와 함께 유자업을 모시고 밤에 외출하면서注+④ 〈“俱從夜出”이〉 ≪資治通鑑≫에는 “함께 황제를 모시고 밤에 나갔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유군劉君이여, 근래 한번 한가할 적에 회포를 풀까 생각하고 있소.”라고 하니, 유도륭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서 채흥종의 손을 찌르면서 말하기를 “채공蔡公께서는 많은 말을 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注+⑤ “閑寫”는 한가할 적에 회포를 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掐은 苦洽의 切이니, 손톱으로 찌르는 것을 掐이라 한다.
[] 송주宋主(유자업劉子業)가 제부諸父(백숙부伯叔父)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 등을 전내殿内에 감금하였다.
[] 유자업劉子業제부諸父을 꺼리고 두려워하여 그들이 외방에 있으면서 우환이 될까 염려하여 모두 궁중에 가두고서 매질하며 모욕하고 끌고 다녀서 다시 사람의 정리情理가 없었다.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산양왕山陽王 유휴우劉休祐는 나이가 많았으므로 유자업은 그들을 더욱 미워하였다.
유욱이 특히 살찐 것으로 해서 저왕猪王(돼지 왕)이라 부르고, 유휴인을 살왕殺王(살륙 왕)이라 부르고, 유휴우를 적왕賊王(도적 왕)이라 부르고, 동해왕東海王 유의劉禕는 성품이 용렬한 것으로 해서 여왕驢王(노새 왕)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무로 된 말구유에다 음식을 담아놓고 유욱을 벌거벗기고서 흙탕물 속에 넣어 말구유의 음식을 가서 먹게 하였다.注+① 槽는 才勞의 切이니, 가축의 食器이다. 內는 納(납)으로 읽는다.
유자업이 전후前後로 그들을 죽이려고 한 것이 십여 차례였는데, 유휴인은 지모와 술수가 많아 늘 담소와 아첨으로 유자업을 기쁘게 하였으므로 이를 늦추게 할 수 있었다.注+② 說(기쁘다)은 悅로 읽는다. 推는 옮김이고, 遷은 돌림이니, 談笑와 아첨으로 황제(劉子業)의 뜻을 바꿈을 말한다. 혹자가 말하기를 “‘推遷’은 늦추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소부少府 유몽劉曚이 잉태하여 해산달이 되었을 때注+③ 曚은 音이 蒙이다. 출산할 달을 “臨月”이라고 한다. 후궁後宮으로 맞아들여 아들 낳기를 기다려 태자太子를 삼으려 하였다.
유욱이 일찍이 유자업의 뜻을 거슬렸는데 유자업은 유욱을 발가벗기고 그 손발을 묶어서 태관太官(황제의 음식 담당 관청)으로 메어注+④ 檐은 都暗과 都甘의 두 가지 切이니, 멘다는 뜻이고, 擔과 통용한다. 보내게 하고 말하기를 “오늘 돼지를 잡아라.”라고 하니, 유휴인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황태자皇太子가 태어나기를 기다려 돼지를 잡아 간과 허파를 잘라내야 합니다.”라고 하자, 유자업은 마침내 유욱을 석방하였다.
유몽의 첩이 아들을 낳자 황자皇子라고 명명하고 이를 위해 대사면大赦免을 내렸다.
[] 나라 강주자사江州刺史 진안왕晉安王 유자훈劉子勛심양尋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 송주宋主 유자업劉子業태조太祖세조世祖형제兄弟 중에 서열이 모두 세 번째였는데 강주자사江州刺史 진안왕晉安王 유자훈劉子勛도 세 번째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였다.
하매何邁의 모반을 이용하여 측근 주경운朱景雲을 시켜서 사약死藥을 보내 유자훈에게 죽음을 내리게 하였는데, 주경운이 분구湓口에 이르러 멈추고 나아가지 않았다. 유자훈의 전첨典籖 사도매謝道邁가 그 소식을 듣고 장사長史 등완鄧琬에게 달려가 고하였다.
등완이 말하기를 “이 몸은 남쪽 지방의 한미한 선비로서注+① 鄧琬은 南昌 사람인데,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났다. 선제先帝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사랑하시는 아들을 부탁받았으니 어찌 우리 집안 백 명의 목숨을 아까워하겠는가. 기필코 죽음으로 보답해야 한다. 어린 군주가 혼우하고 포악하여 사직社稷이 위태로우니 비록 천자天子라고 하지만 실은 와 같다.注+② 猶는 같음이며, 비슷함이다.
지금 문관과 무관을 통솔하여 곧바로 경읍京邑(건강建康)에 이르러 여러 들과 함께 암군暗君을 폐하고 명군明君을 세울 뿐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유자훈의 교명敎命을 칭하여 부하들에게 계엄戒嚴을 하달하였다.
유자훈은 군복 차림으로 나와서 정사를 다스리고 속관과 보좌를 소집하고 주수主帥 반흔지潘欣之를 시켜서 자신의 뜻을 알려서 유시하게 하니, 사방에 앉아 있는 자들이 대답하기 전에 참군參軍 도량陶亮이 앞장서 목숨을 바쳐 선봉이 될 것을 청하자 무리들이 모두 뜻을 받들었다. 마침내 도량을 자의참군諮議參軍 중병참군中兵參軍으로 삼아서 군대의 일을 통솔하게 하였다.
유자업은 형주荆州에 명하여 장사長史 장열張悅을 체포해 보내도록 하여注+③ 錄은 체포함을 말한다. 張悅은 張暢의 아우이다. 분구湓口에 이르렀는데 등완이 유자훈의 명을 칭하여 그의 형틀을 풀어주고 자신이 타던 수레로 맞이하여 사마司馬로 삼아 함께 안팎의 여러 일을 관장하였다. 열흘 만에 군사 5천 명을 얻게 되었으므로 출동하여 대뢰大雷에 주둔하고 원근에 격문을 돌렸다.
[] 송주宋主(유자업劉子業)는 남평왕南平王 유경유劉敬猷여릉왕廬陵王 유경선劉敬先안남후安南侯 유경연劉敬淵을 죽였다.
[] 유자업劉子業이 여러 공주公主들을 불러서 앞에 늘어세우고 측근들에게 강요하여注+① 彊(강요하다)은 其兩의 切이다. 그들을 욕보이게 하였다. 남평왕南平王 유삭劉鑠 강씨江氏注+② 妃는 바로 江湛의 여동생이다. 따르지 않자 유자업은 노하여 에게 채찍 1백 대를 때리게 하고 그의 세 아들을 죽였다.
[] 나라가 그 임금 유자업劉子業을 시해하고注+① 劉子業은 향년이 17세였다.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을 임금으로 세웠다.
[] 이보다 앞서 민간民間와언訛言에 “상중湘中에서 천자天子가 나온다.”라고 하니, 유자업劉子業이 남쪽으로 형주荆州상주湘州를 순행하여 그것을 억누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먼저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을 주살하고 난 다음에 출발하려고 하였다.
예전에 유자업이 여러 들을 주살하고 나서 아랫사람들이 자신을 도모할까 두려워하여 직합장군直閤將軍注+① 江左(南朝)에서는 直閤將軍으로 宮門을 출입하면서 宿衛를 통솔하게 하였다. 종월宗越, 심유지沈攸之 등이 용력勇力이 있다고 하여 그들을 불러와서 조아爪牙(심복)로 삼고 포상이 가득하니 종월宗越 등이 유자업을 위해注+②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진력을 다하였다.
유자업은 이들을 믿고 더욱 꺼리는 바가 없어서 함부로 부도덕한 짓을 하니, 안팎이 시끄럽고 숙위宿衞하는 군사들이 모두 역심逆心을 품었으나 종월 등을 두려워하여 감히 드러내지 못하였다.
이때에 세 (유욱劉彧유휴인劉休仁유휴우劉休祐)이 오래 구금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상동왕 유욱의 주의主衣(옷 담당 관리) 완전부阮佃夫와 유자업의 측근인 수적지壽寂之注+③ 壽는 姓이다.왕경칙王敬則 등이 유자업을 시해할 것을 음밀히 모의하였다.
이보다 앞서 유자업은 화림원華林園 죽림당竹林堂에서注+④ 竹林堂은 華林園의 後堂이다. 놀면서 궁인宮人들에게 벌거벗고 서로 쫓게 하였는데, 한 사람이 명을 따르지 않자 그를 참수하였다.
밤중의 꿈속에 죽림당에 있게 되었는데 어느 여자女子가 꾸짖기를 “패악하고 부도덕하니 명년 보리가 익을 때까지 못 가리라.”라고注+⑤ 〈“不及熟”은〉 보리가 익을 때에 이르기 전에 죽는다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유자업은 궁중宮中에서 꿈속에서 본 사람과 비슷한 한 사람을 잡아 참수하였다.
다시 꿈속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이 나타나 꾸짖기를 “내가 이미 상제上帝에게 호소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무당들이 죽림당에 귀신이 있다고 하였다. 유자업이 화림원에 나갈 때 유휴인․유휴우가 모두 따라가고 유욱만 홀로 비서성祕書省注+⑥ 祕書省은 圖書를 보관하는 곳이니, 禁中에 있다. 남아 있어 부름을 받지 못하니 더욱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때 남쪽으로 순행하는 것으로 종월宗越 등이 모두 허락을 받고 궁중 밖으로 나가 여장旅裝을 꾸렸다. 유자업은 시위侍衛들을 모두 물리치고 무당과 채녀綵女들과注+⑦ 綵女는 後漢의 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함께 죽림당竹林堂에서 귀신에게 활로 쏘고 있을 적에 수적지 등이 칼을 뽑고 앞으로 나아가 유자업을 시해하고 숙위宿衛에게 명령을 알리기를 “상동왕湘東王태황태후太皇太后의 명령을 받아 미치광이 군주를 제거하여 지금 이미 평정되었다.”라고 하였다.
[] 유휴인劉休仁비서성祕書省으로 가서 유욱劉彧을 만나고는 즉시 이라 일컫고 유욱을 인도하여 어좌御座로 오르게 하였다. 대신大臣들을 불러 알현케 하였는데 유욱은 여전히 오모烏帽를 쓰고 있었다. 유휴인劉休仁주의主衣를 불러서 백모白帽注+① 江南에서는 天子가 宴居할 적에 白紗帽를 썼다. 대신하게 하였다.
모든 일을 다 를 칭하여 시행하고 태황태후太皇太后의 명령을 선포하여 유자업劉子業죄악罪惡을 열거하여 꾸짖고 상동왕湘東王에게 명하여 황제의 지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유자업의 동모제同母弟 예장왕豫章王 유자상劉子尙은 패악하기가 형의 풍조를 지녔으므로 회계공주會稽公主注+② 會稽公主는 바로 山陰公主이다. 함께 모두 죽음을 내렸다.
유휴인劉休仁 등은 비로소 궁 밖으로 나가서 외부의 사저私邸에서 거처할 수 있었고, 수감되어 있던 사장謝莊을 풀어주었다. 유자업의 시체가 아직도 태의원太醫院합문閤門 입구에 버려져 있었다.
채흥종蔡興宗복야僕射 왕욱王彧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이 비록 흉악하였으나 아무튼 천하天下의 주인이었으니 그런대로 갖추어서 상례를 치러야 한다. 단지 이대로 두면 사해四海의 사람 중에 반드시 이를 이용하여 반기를 들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注+③ “乘人”은 이를 이용하여 명을 받들어 죄를 지은 자를 토벌함을 말한다. 王彧은 湘東王 妃의 형이므로 蔡興宗이 그와 함께 말을 하였다., 이에 유자업을 말릉秣陵에 장사 지냈다.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여 수적지壽寂之 등 14명에게 작위를 차등 있게 봉해주고, 동해왕東海王 유의劉禕중서감中書監 태위太尉로 삼고, 진안왕晉安王 유자훈劉子勛거기장군車騎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삼고,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사도司徒 상서령尙書令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고
유욱이 즉위即位하여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렸다. 유자업 때의 혼란한 제도와 잘못된 봉작은 모두 제거하였다. 세조世祖(효무제孝武帝)의 모친 노태후路太后를 높여 숭헌태후崇憲太后로 삼고, 왕씨王氏를 세워 황후皇后로 삼으니 왕욱의 여동생이다.注+④ 예전에 湘東王의 어머니 沈婕妤가 일찍 죽어 路太后가 양육하였다.
유도륭劉道隆중호군中護軍으로 삼았는데, 유도륭은 유자업劉子業과 친하여 일찍이 건안태비建安太妃에게 무례하게 대하였다.注+⑤ 이것은 劉子業이 측근을 시켜 妃와 公主들을 욕보인 때의 일이다. 이에 이르러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이 해직을 청하자注+⑥ ≪南史≫ 〈劉休仁傳〉에 劉休仁이 解職을 청하며 말하기를 “臣은 이 사람과 조정에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송주宋主(유욱)는 유도륭에게 죽음을 내렸다.
종월宗越 등이 마음에 스스로 불안해하자 심유지沈攸之가 이를 보고하였는데 모두 복주伏誅시키고, 심유지가 다시 들어와 직합장군直閤將軍이 되었다. 왕욱은 송주宋主의 이름을 피하고 를 사용하였다.注+⑦ 王彧은 字가 景文이다.
[] 나라가 이수전二銖錢을 폐기하고 아안전鵝眼錢선환전綖環錢의 유통을 금지하였다.
[] 나라 옹주雍州영주郢州형주荆州회계군會稽郡이 모두 군사를 일으켜 심양尋陽(유자훈劉子勛)에 호응하였다.
[] 강주江州의 보좌관들이 송주宋主(유욱劉彧)가 내린 영서令書를 보고 모두 기뻐하여 함께 등완鄧琬에게 가서 말하기를 “난폭한 군주(유자업劉子業)가 이미 제거되고 전하殿下(유자훈劉子勛)께서 또 황합黄閤을 여시니注+① 이때 劉子勛에게 開府儀同三司를 더해주었으므로, 黃閤을 열었다고 말한 것이다. 실로 큰 경사입니다.”라고 하였다.
등완은 영서令書를 빼앗아 땅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전하는 당연히 단문端門을 열어야 하니注+② 天子는 端門을 연다. 宮門의 正南門을 端門이라고 한다. 황합黄閤을 여는 것은 우리들의 일일 뿐이다.”라고 하니 무리들이 모두 경악하였다. 등완은 마침내 도량陶亮 등과 병기와 갑옷을 정비하고 병사를 사방에서 모집하였다.
원의袁顗양양襄陽에 이르고 나서 즉시 참군參軍 유호劉胡와 병기와 기계를 정비하고 사졸士卒들을 뽑아 모았다. 그리고 태황태후太皇太后의 명령을 사칭詐稱하고서 표문表文을 올려 유자훈에게 황제에 즉위하도록 권하였다.
등완은 유자훈에게 상미桑尾에서注+③ 桑尾는 바로 桑落洲의 말미이다. 아기牙旗를 세우도록 하고 격문을 건강建康으로 전하고 일컫기를 “(유자훈)의 뜻이 이전의 전례典禮를 준수하여 암군暗君을 폐위하고 명군明君을 즉위시키는 것이었는데, 상동왕湘東王 유욱劉彧이 거짓으로 밝고 덕스러운 종친宗親(유자상劉子尙)을 해치고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였다.注+④ 劉子勛이 自稱을 孤라고 하였다. “廢幽陟明”은 바로 暗君을 폐위하고 明君을 즉위시키는 것이다. 茂는 아름다움이다. 明茂는 밝고 덕 있는 宗親을 말하니, “矯害明茂”는 太皇太后의 令을 위조하여 豫章王 劉子尙에게 죽음을 내린 것을 말한다. “天寶”는 황제 자리를 말한다. 어린 의 형제들이 여전히 13명이나 있는데, 성령聖靈(효무제孝武帝의 신령)께서는 무슨 죄가 있으시기에 제사를 단절해야 하는가.”라고注+⑤ 藐는 妙小와 亡角의 두 가지 切이니, 작다는 뜻이다. “同氣”는 兄弟이다. 世祖(孝武帝)의 28명 아들 중에 이때 생존한 이는 劉子勛․劉子綏․劉子房․劉子頊․劉子仁․劉子眞․劉子元․劉子輿․劉子孟․劉子嗣․劉子趨․劉子期․劉子悅로 모두 13人이다. “聖靈”은 世祖의 신령을 말한다. “乏饗”은 제사 지내지 않음이다. 하였다.
영주자사郢州刺史 안륙왕安陸王 유자수劉子綏는 유자훈의 처음 격문을 받고서 유자업을 함께 공격하려고 하다가 유자업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무장을 해산하게 하고 기치를 내렸다.注+⑥ “初檄”이라고 말한 것은 지금 建康에 전한 격문과 구별한 것이다. 摽는 마땅히 幖로 써야 하니, 牙旗의 부류이다. 무릇 行軍할 적에 牙旗를 軍門에 세우는데 여기에서 “下幖”라고 말한 것은 군대는 실제 가지 않아서 牙旗를 내린 것을 말한다.
이윽고 강주江州옹주雍州에서 여전히 병사를 훈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행사行事 구변지茍卞之는 크게 두려워하여 즉시 참군參軍 정경현鄭景玄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내려가게 하고 아울러 군량을 보냈다.注+⑦ 江州는 鄧琬을 말하고, 雍州는 袁顗를 말한다. 郢州는 江州와 雍州의 사이에 있는데, 夾攻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군대를 해산한 이유를 따진 것이다.
형주행사荆州行事 공도존孔道存자사刺史 임해왕臨海王 유자욱劉子頊을 받들고, 도수사자都水使者 공조孔璪注+⑧ 璪는 子皓의 切이다. 회계행사會稽行事 공의孔顗를 설득하여 태수太守 심양왕尋陽王 유자방劉子房을 받들어 모두 군사를 일으켜 유자훈에게 호응하였다.


역주
역주1 孝建四銖錢에……일렀다 : 이 기사는 ≪宋書≫ 〈顔竣列傳〉에 보인다. ≪宋書≫에서는 四銖錢과 孝建四銖錢을 이야기하면서 특히 효건사수전이 사수전보다 형태가 작고 얇아져서 이 때문에 민간의 私鑄錢이 증대하자 관리들이 다시 二銖錢을 주조하자고 하였는데, 이에 顔竣이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바로 다음 내용에 본 기사가 이어진다. 사수전과 효건사수전의 내용은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26권 상 宋 文帝 元嘉 30년(453)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2 魏開酒禁 : “戊戍(458)에 처음 禁酒令을 내린 뒤로 이때에 7년여가 되었다.[自戊戍始禁 於是七年餘矣]” ≪書法≫
역주3 宋主……僕射顔師伯 : “이때에 顔師伯․柳元景이 劉子業을 폐위하고 劉義恭을 세우려고 하였으니 반역이다. 이를 기록하지 않고 이들이 죄가 없는 것처럼 ‘殺’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유자업을 미워한 것이다. 유자업이 無道하였으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유자업에 대해 이처럼 특별히 기록한 것이 많으니, 안사백․유원경이 임금을 폐위하기를 도모한 것은 기록하지 않고 유자업이 그들을 죽인 것[殺]만을 기록하였고, 義陽王 劉昶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병력을 모으고 檄文을 돌린 것은 기록하지 않고 〈그가 北魏로〉 도주한 것[奔]만을 기록하였고, 何邁가 晉安王 劉子勛을 세울 것을 도모한 것은 기록하지 않고 유자업이 하매를 죽인 것[殺]만을 기록하였다. 이는 모두 특별히 기록한 것이니, 모두 음탕하며 포악한 것을 경계한 것이다.[於是顔柳謀廢子業立義恭 則逆也 不書而以無罪書殺 何 惡子業也 子業無道 故綱目於子業多特筆 顔柳謀廢主不書 書殺 義陽王昶聚兵移檄不書 書奔 何邁謀立晉安不書 書殺 皆特筆也 皆所以戒淫虐也]” ≪書法≫“宋 孝武帝는 방종하고 탐욕스럽고 부도덕하였는데 요행히 천수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죄악이 대번에 드러났으니 또한 天道일 뿐이다. 大臣을 살육한 것은 진실로 꾸짖을 것이 못 된다. 그런데도 ≪資治通鑑綱目≫에서 이를 기록한 것은 우선 宋나라가 어지러이 망한 자취를 드러내어 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적을 조심하게 한 것이니, 유자업에게 무슨 주벌할 것이 있겠는가.[宋孝武縱慾不道 幸而没身 其子嗣之 罪惡暴著 蓋亦天道云爾 殺戮大臣 固無足責 綱目書之 姑以著其亂亡之迹 使後人謹於所積爾 於子業乎何誅]” ≪發明≫
역주4 召元景 以兵随之 : ≪資治通鑑綱目≫에는 “別遣使者稱召柳元景 以兵随之”로 되어 있다.
역주5 堯母門을……하였다 : ‘贊軌堯門’은 ≪文選≫ 〈宋孝武宣貴妃誄〉에 보인다. 이는 謝莊이 宋 孝武帝의 寵姬인 殷淑儀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誄文이다. 은숙의는 사후에 황후 다음의 서열인 貴妃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를 宣이라 하여 宣貴妃라 한다. ‘贊軌堯門’은 堯임금의 모친이 堯를 양육하였듯이 은숙의도 효무제의 자식들을 양육했음을 말한 것이다. ‘贊軌’의 贊은 佐(돕다)의 뜻이며 軌는 跡(자취)의 뜻인데, 인신되어 본받다는 뜻으로 쓰였다.또한 堯母門은 漢나라 鉤弋宮의 문 이름이다. 漢 武帝의 鉤弋夫人 趙婕妤가 鉤弋宮에서 임신 14개월 만에 昭帝를 낳으니, 무제가 말하기를, “듣자니 옛날 堯임금은 14개월 만에 태어났다 하였는데 오늘날 우리 皇子도 14개월 만에 태어났다.”라고 하고, 구익궁의 문을 堯母門이라 명명하였다.(≪漢書≫ 〈外戚傳〉) 이에 劉子業이 ‘贊軌堯門’에 대해 사장이 은숙의의 덕을 漢나라를 중흥시킨 소제의 모친인 구익부인의 비견한 것이라 여긴 것이다.
역주6 尙方 : 帝王의 기물을 만드는 관아이다. 상방의 노역이 심하여 죄인들에게 노역형을 시키기도 하였다.
역주7 鵝眼錢 : 거위의 눈처럼 작고 열악한 동전을 말한다.
역주8 宋主殺其太尉沈慶之 : “劉子業은 사람을 죽인 것이 많았는데 ‘宋主’라고 지척하여 기록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형벌을 남용한 것을 미워해서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형벌을 남용한 것을 미워하여 사람을 죽인 데에 반드시 ‘主’라고 지척하여 기록한 것은 다섯 임금(宋나라 劉子業, 齊나라 蕭寳卷, 北齊 髙洋․髙緯, 陳나라 陳叔寳)이니 모두 음학한 군주이다.[子業殺人多矣 無不斥書宋主者 惡淫刑也 綱目惡淫刑 所殺必斥書主者五君焉(宋子業 齊寳卷 北齊髙洋 髙緯 陳叔寳) 皆淫虐之主也]” ≪書法≫“顔師伯과 柳元景이 죽은 것은 沈慶之의 역할 때문이었다. 심경지가 남을 죽을 곳에 빠뜨리고서 자신은 어리석고 광포한 임금에게 아첨하였다. 이미 임금을 가까이하고서 다시 간언을 하였다가 얼마 후 죽음을 면치 못했으니, 비록 죽을 때까지 절개를 지킬 수 있었으나 채택할 만한 것은 없다. 그러나 ≪資治通鑑綱目≫에서 관직을 기록하고 ‘殺’이라고 기록한 것은 다만 혼우한 임금의 죄를 드러낸 것이고 이것으로 심경지를 허여한 것은 아니니, 보는 이들은 스스로 살펴야 할 것이다.[顔柳之死 沈慶之之力也 慶之陷人死地 以自媚於昏狂之君 既昵之 又諫之 未幾 亦不免於死 雖能終身守節 要無足取 然綱目書官書殺者 特以著狡童之罪 而非以是予慶之也 觀者自當察之]” ≪發明≫
역주9 如字 : 한 글자에 여러 독음이 있는 경우 本音대로 읽으라는 것이다.
역주10 殿中將軍 : 殿中將軍은 二衛에 속하였으니, 晉나라 초기에 설치하였는데 조회하고 연향할 때에는 戎服을 입고 좌우에서 모시고 밤에 여러 城門을 열면 白虎旗를 잡고서 감시하였다.
역주11 宋江州刺史晉安王子勛擧兵尋陽 : “이때에 劉子勛에게 죽음을 내렸는데 鄧琬이 마침내 劉子勛의 명령을 칭하고 戒嚴을 내렸으니 반란이다. 그런데 다만 ‘擧兵’이라고만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劉子業을 미워한 것이다. 유자업의 시대에는 이처럼 특별히 기록한 것이 많으니 세상 임금 된 자를 경계함이 깊은 것이다.[於是賜子勛死 鄧琬遂稱子勛令戒嚴 則反耳 其止書擧兵 何 惡子業也 故子業之世多特筆 其爲世主之戒深矣]” ≪書法≫“劉子勛을 어찌하여 반란이라고 기록하지 않았는가. 劉子業이 無道하고 또 사람을 보내서 유자훈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資治通鑑綱目≫에서는 특별히 ‘擧兵’으로 기록하였으니 이른바 그 실정을 추구하여 그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다.[子勛 何以不書反 子業無道 且又遣人欲殺子勛 故綱目特以擧兵書之 所謂原其情而恕其罪也]” ≪發明≫
역주12 獨夫 : 殘暴無道하여 측근들이 모두 떠나 홀로된 統治者를 말한다.
역주13 諮議中兵 : 諮議는 諮議參軍事를 가리킨 것이다. 西晉 公府에 모두 두었으며, 軍事의 모의와 자문을 담당하였으며, 지위는 參軍의 위에 있었다. 南朝와 北魏, 北齊에도 설치되었다. 中兵은 中兵參軍을 가리킨다. 중병참군은 西晉 말에 설치되었는데, 丞相府 中兵曹의 장관이다. 東晉 때 公과 主要 將軍府에 설치되었다. 南朝 宋나라에서는 諸公의 府에 설치되었으며, 齊․梁․陳에 다시 설치되었다.
역주14 宋弑其君子業而立湘東王彧 : “나라가 시해했다고 일컬은 것은 임금이 無道해서다. 그렇다면 劉彧의 즉위는 누가 즉위시킨 것인가. 宋나라가 즉위시킨 것이다. 劉子業을 시해한 것도 宋나라이고 湘東王을 즉위시킨 것도 역시 宋나라이다. 이는 인심에 함께한 것이기 때문에 ‘宋’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시해에 나라를 일컬은 것이 8번이다(周나라 安王(기원전 396) 6년에 자세하다.).[稱國以弑 君無道也 然則彧之立 孰立之 宋立之也 弑子業者 宋也 立湘東者 亦宋也 以是爲人心之所同 故書宋 終綱目弑稱國者八(詳周安王六年)]” ≪書法≫“옛적에 晉나라 欒書가 厲公을 시해하자 ≪春秋≫에서 특별히 “晉弑其君州蒲(晉나라가 그 임금 州蒲를 시해했다.)”라고 기록하였는데, 穀梁이 傳을 쓰기를 “나라가 그 임금을 시해했다고 일컬은 것은 임금의 악행이 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宋나라 劉子業의 죽음을 ≪資治通鑑綱目≫에서 역시 나라로써 기록한 것은 ≪春秋≫의 취지에 근본하여 그 淫虐하고 不道德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賊으로 여기려 했을 뿐임을 밝힌 것이다. 그렇다면 인정해준 것인가. 湯王이 있은 뒤에야 桀王을 내칠 수 있고, 武王이 있은 뒤에야 紂王을 정벌할 수 있다. 유자업의 악행 중에는 桀王․紂王도 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당시 湯王․武王과 같은 임금이 없으므로 아랫사람들이 그 포악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인하여 유자업을 죽였을 뿐이다. 나라를 기록한 것은 유자업의 악행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시해했다고 기록한 것은 그 명분을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니 어찌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賊으로 삼으려 하는데, 오히려 남의 위에 높이 거처하게 하겠는가. ≪書經≫ 〈商書 湯誓〉에 “이 해가 언제나 없어질 것인가. 내가 너와 함께 망해 버리겠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안다면 ≪資治通鑑綱目≫의 書法의 의미를 알 수 있다.[昔晉欒書弑厲公 春秋特書晉弑其君州蒲 穀梁傳之曰 稱國以弑其君 君惡甚矣 今宋子業之殞 綱目亦以國書之者 蓋本春秋之旨 明其淫虐不道 擧國之人 皆欲賊之爾 然則予之乎 曰有湯而後能放桀 有武而後能伐紂 子業之惡 有桀紂之所不爲者 時無湯武之君 故群下不任其暴 因而斃之爾 書國 所以著其惡 書弑 所以正其名 烏有一國之人皆欲賊之 尙可尊居人上者哉 書曰 時日曷喪 予及汝偕亡 知乎此 則知綱目書法之意矣]” ≪發明≫
역주15 采女 : 원래 漢代 六宮의 일종의 稱號였다. 民家에서 선발하였기 때문에 采女라고 하였다. 뒤에는 宮女의 通稱이 되었다.
역주16 令書 : 황제의 경우 制書나 調書를 칭하는데, 湘東王이 劉彧이 아직 황제로 즉위하지 않아서 太子 이하의 서면상 命令을 가리키는 令書를 쓴 것이다.
역주17 (楊)[揚] : 저본에는 ‘楊’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揚’으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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