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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20)

자치통감강목(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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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20)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梁大通元年이요 魏孝昌三年이라
魏分定相四郡하여 置殷州하고 以崔楷爲刺史注+① 按魏收志, 殷州止領趙郡․鉅鹿․南鉅鹿三郡, 蓋初置時兼領相州之廣宗郡也. 殷州治廣阿.하니 表乞兵糧不得이라
勸楷單騎之官한대 曰 吾聞食人之祿者 憂人之憂라하니 吾獨往이면 將士 誰肯固志哉리오 遂擧家之官이러니
葛榮 逼城 勸減弱小避之하다 遣幼子及一女夜出이라가
旣而悔之曰 人謂吾心不固하여 虧忠而全愛也라하고 遂追還하니
賊至 將士 爭奮하여 皆曰 崔公 尙不惜百口하니 吾屬 何愛一身이리오하고 連戰不息하여 死者 相枕호되 終無叛志러라
城陷 執節不屈하니 殺之하고 遂圍冀州하다
魏蕭寶寅 討莫折念生이라가 敗績하니 以楊椿爲行臺하다
寶寅 出兵累年이라 將士 疲弊러니 至是大敗於涇州하니 汧城岐州 皆降於賊하고 豳州刺史畢祖暉 戰没하니 關中 大擾어늘 雍州刺史楊椿 募民拒守러니 詔以椿爲行臺하여 節度關西諸將하다
右民郎路思令 上疏曰注+① 右民郞, 謂右民曹之郎官也. 漢成帝置尙書五人, 其三曰民曹, 魏有左民郞曹, 晉兼置右民郞曹. 比年將帥 多寵貴子孫이라 軒眉攘腕하여 以攻戰自許注+② 攘腕, 捋臂也.라가 及臨大敵 銳氣頓盡하여
乃令羸弱居前以當寇하며 彊壯在後以衛身하고 器械不精하며 進止無節하여
以當負險之衆하고 敵數戰之虜하니 欲不敗 可得哉注+③ 數, 音朔. 是以 兵知必敗하여 始集而先逃하고 將帥 畏敵하여 遷延而不進이라
國家 謂官賞尙輕이라하여 屢加寵賚하니 帑藏 空竭하고 民財殫盡하여 遂使賊徒益甚하니 生民彫弊 凡以此也니이다
夫德可感義夫 恩可勸死士 今若明賞罰하며 練士卒하며 修器械하고 先遣辯士曉以禍福하여 如其不悛이어든 以順討逆이면 何異勵蕭斧而伐朝菌하고 鼓洪爐而燎毛髪哉리잇고 弗聽注+④ 蕭, 艾蒿也. 蕭斧, 芟艾之斧也. 菌, 其隕切, 地芝也. 天時滯雨, 於糞堆之上, 熱蒸而生. 朝生暮死, 故曰朝菌.하다
● 莫折天生 寇雍州라가 敗死衆潰하다
天生 寇雍州어늘 蕭寶寅部將羊侃 隱身塹中이라가 射殺之하니 其衆 遂潰注+① 侃, 祉之子也.하다
侵魏하여 圍東豫州及琅邪하여 克三關注+① 三關, 平靜․穆陵․陰山也.하다
魏東淸河郡山賊 群起어늘 詔以房景伯爲太守注+① 宋武帝僑置淸河郡於盤陽, 屬冀州, 後入于魏, 爲東淸河郡, 屬齊州. 景伯, 法壽之族子也.러니 郡民劉簡虎 嘗無禮於景伯이라가 擧家亡去하다
景伯 擒之하고 署其子爲掾하여 令諭山賊하니 以景伯 不念舊惡이라하여 相帥出降하다
景伯 母崔氏 通經有明識이러니 貝丘婦人 列其子不孝注+② 貝丘僑縣, 亦宋武帝置, 屬淸河郡. 列, 陳也.어늘 景伯 白其母한대 曰 民未知禮義어니 何足深責이리오
乃召其母하여 與之對榻共食하고 使其子侍立堂下하고 觀景伯供食이러니 未旬日 悔過求還이라
崔氏曰 此雖面慙이나 其心 未也 且置之하라 凡二十餘日 其子 叩頭流血하고 涕泣乞還이어늘 然後聽之하니 卒以孝聞하니라
胡氏曰 民固多愚 然其良心 終不忘也 爲人上者 不知教化可以善民하고 而專尙刑法하여 見其不服也 則謂民頑이라하여 愈益治之하니 民愈扞格하여 甚者 視如冦讐焉하나니
崔母 一婦人而知教化之原 不繫詞人而在於躬率하고 敎化之効 不取革面而在於心改하여 旬月之間 變頑悖爲孝子하니 孰謂民果頑哉 爲人上而觀此 亦可省己而修德矣로다
二月 莫折念生 據潼關하다
◑ 梁 攻彭城이어늘 魏人 擊却之하다
寶寅之敗也 免爲庶人이러니 至是하여 楊椿有疾求解어늘 復以寶寅代之하다
椿子昱 將適洛陽할새 椿 謂之曰 當今雍州無踰寶寅者 但其上佐 朝廷 應遣心膂重人하니 何得任其牒用注+① 上佐, 別駕從事也. 任其牒用, 言任從寶寅擅以文牒自置上佐也.
且寶寅 不藉刺史爲榮이라 吾觀其得州喜甚하고 至於賞罰 不依常憲하니 恐有異心이라
汝當以此意啓二聖하고 并白宰輔하여 更遣長史司馬防城都督注+② 二聖, 謂胡太后․魏主.하다
欲安關中인댄 正須三人耳 不然이면 必成深憂하리라 如言啓聞하되 不聽하다
秋七月 魏陳郡이어늘 討平之하다
魏陳郡民劉獲鄭辯 反於西華하여 與梁譙州刺史湛僧智 通謀注+① 西華縣, 漢屬汝南郡, 晉屬潁川郡, 元魏屬陳郡. 湛, 姓也. 僧智其名. 時圍魏東豫州.어늘 魏以曹世表爲東南道行臺하여 以討之할새 諸將 以賊彊不敢戰이어늘
世表 方病이라가 轝出하여 呼統軍是云寶하여 謂曰注+② 是云, 虜姓也. 寶, 名也. 湛僧智 敢深入者 以獲辯州民之望으로 爲之内應也일새라
聞獲 引兵迎僧智하니 去此八十里 今出其不意하면 一戰可破이니 獲破 僧智自走矣리라
乃選士馬付寶하여 擊獲等大破殺之하니 僧智聞之遁還하다
魏樂安王鑑 以鄴叛降葛榮注+① 樂安, 當作安樂.하다
魏侍御史髙道穆 奉使相州하여 按前刺史李世哲奢縱不法이러니 至是하여 世哲弟神軌 用事
道穆兄謙之家奴 訴良注+① 律禁壓良爲賤. 謂本是良民, 壓爲奴婢.이어늘 神軌 收謙之繫廷尉러니
會赦將出注+② 是月魏大赦. 神軌 啓太后先賜謙之死하니 朝士 哀之하더라
梁將彭群 圍魏琅邪敗死하다
◑ 八月 魏大都督源子邕 拔鄴城하고 誅元鑑하다
◑ 九月 秦州人 殺莫折念生하여 以州降魏하다
湛僧智圍魏東豫州刺史元慶和於廣陵하니 魏將軍元顯伯 救之注+① 慶和, 天賜之孫也. 此廣陵城在新息縣界.러니 梁司州刺史夏侯夔引兵助僧智注+② 夔, 亶之弟也.하니 慶和 擧城降하다
夔以讓僧智한대 僧智曰 慶和 欲降公이어늘 僧智 今往이면 必乖其意 且僧智所將 應募烏合之人이니 不可以法이요
持軍素嚴하니 必無侵暴 受降納附 深得其宜하리이다
乃登城하여 拔魏幟하고 建梁幟하니 慶和 束兵而出이라 吏民 安堵러라 顯伯 宵遁이어늘 梁軍 追之하여 斬獲萬計
梁主 以僧智鎭廣陵하고 夔屯安陽하고 遣别將屠楚城하니 由是 義陽北道 遂與魏絶注+③ 魏收志, 東豫州汝南郡有安陽縣. 梁置西楚州於楚城.하다
司馬公曰 僧智 忘其積時攻戰之勞하여 以授一朝新至之將하고 知己之短하여 不掩人之長하고 功成不取하여 以濟國事하니 忠且無私 可謂君子矣로다
梁領軍曹仲宗直閤陳慶之 攻魏渦陽하니 尋陽太守韋放 將兵會之러니
魏兵 奄至하니 營未立이요 麾下 纔二百人이라 免胄下馬하여 據胡牀處分注+① 胡牀, 卽交牀.하니 士皆殊死戰하여 莫不一當百이라 魏兵 遂退하다 叡之子也
魏又遣將軍元昭等하여 帥衆五萬하여 救渦陽할새 前軍 未至四十里 慶之欲逆戰이어늘 曰 前鋒 必輕銳 不如勿擊이요 待其來至니라
慶之曰 魏兵 遠來疲倦하고 去我尙遠하니 必不見疑 宜及其未集挫之라하고
乃帥麾下進擊破之하고 還與諸將連營而進하여 背渦陽城하여 與魏軍相持하다
自春至冬 數十百戰 將士疲弊러니 聞魏欲築壘於軍後하고 曹仲宗等하여 議引還이어늘
慶之杖節軍門曰 吾 聞置兵死地라야 乃可求生注+② 兵法 “置之死地而後生.”이라하니 須虜大合 然後與戰하리니
審欲班師인댄 慶之别有密敕하니 犯者 行之라하니 乃止하다
魏作十三城하여 欲以控制梁軍이러니 慶之銜枚夜出하여 陷四城하니 渦陽城主王緯 乞降하니 韋放 簡遣降者三十餘人하여 分報魏諸營하다
陳慶之陳其俘馘하고 鼓譟隨之하니 九城 皆潰 追擊之하여 俘斬略盡하니 尸咽渦水注+③ 咽, 一結切, 塞也.러라
蕭寳寅之敗於涇也 或勸之歸罪洛陽하고 或曰 不若留關中立功自效라하더니
寶寅 自念出師累年 糜費不貲 一旦覆敗하여 内不自安하고 魏朝 亦疑之러라
中尉酈道元 素嚴猛이라 汝南王悅嬖人 弄權이어늘 道元 殺之하고 并劾悅하다 寳寅反狀 已露 乃奏以道元爲關右大使하니 寳寅 聞之하고 謂爲取己라하여 甚懼하니
長安輕薄子弟 復勸使擧兵이어늘 寶寅 以問河東柳楷한대 曰 謠言 鸞生十子九子毈하고 一子不毈關中亂注+① 齊明帝諱鸞, 寶寅之父也. 毈, 徒玩切, 卵壞也.이라하니 治也
大王 當治關中이어늘 何所疑리오 寳寅 遂遣將攻殺道元하니라
行臺郎中蘇湛 以病臥家러니 寳寅 令其姨弟姜儉하여 說之曰 道元之來 事不可測이라 吾不能坐受死亡하여 不復作魏臣矣 生死榮辱 與卿共之하리라
大哭曰 王 本以窮鳥 投人이어늘 朝廷 假王羽翼하여 以至於此하니
屬國歩多虞하여 不能竭忠報德이요 乃欲乘人間隙하여 守關問鼎注+① 屬, 音, 會也. 守關, 謂寶寅欲守潼關之險, 割據關中. 問鼎, 謂欲窺天位.하니
魏德 雖衰 天命未改 不能以百口爲王族滅注+② 爲, 去聲.하리니 願賜骸骨歸鄉里하여 庶得病死하여 下見先人注+③ 湛, 武功人.호리라
寶寅 素重湛이라 且知其不爲己用하여 聽還武功하다
遂自稱齊帝改元하고 置百官하다 長史毛遐 與弟鴻賓으로 帥氐羌起兵拒之注+④ 寶寅都督雍․涇等四州, 又爲西討大都督, 以遐爲府長史.하고 魏以長孫稚爲行臺討寶寅이러니
正平民薛鳳賢薛脩義 亦聚衆河東하여 據鹽池하고 圍蒲阪하여 東西連結하여 以應寳寅注+⑤ 魏收志, “世祖置太平郡於河東聞喜縣, 孝文太和十八年, 改曰正平郡, 屬東雍州, 領聞喜․曲沃縣.” 脩義, 鳳賢宗人.이어늘 都督宗正珍孫하여 討之注+⑥ 宗正, 複姓.하다
胡氏曰 寶寅奔魏之心 本欲假其兵力爲宗國復讐하니 似也
則宜不離淮漢之北하여 伺間南伐하여 死而後已 若夫成功則天也어늘 冀雍二州 豈梁所在邪
而爲之刺史하니 雖曰不利 人不信矣리라 以義始하고 以利終하니 不至於作亂受戮이면 則無能靖之道 此小人之本末也니라
十一月 以蕭淵藻爲北討都督하여 鎭渦陽하다
◑ 葛榮 陷魏冀州하여 殺都督源子邕裴衍하고 遂冦相州라가 不克하다
葛榮 圍信都하여 自春至冬하니 冀州刺史元孚 帥勵將士하여 晝夜拒守호되 糧儲旣竭이요 外無救援이라 城陷 與兄祐 俱執하니
大集將士하여 議其生死할새 孚兄弟 爭相爲死注+① 爲, 去聲.하고 都督潘紹等數百人 皆叩頭請死하여 以活使君하니 榮曰 此皆魏之忠臣義士也라하고 皆免之하다
魏命源子邕討榮할새 裴衍 表請同行이어늘 許之한대 子邕 言衍行臣請留하고 臣行請留衍하노이다
若必同行이면 敗在旦夕이리이다 不許러니 行至漳水하여 擊之하니 果敗俱死하다
相州 聞冀州陷하고 人不自保어늘 刺史李神 志氣自若하여 撫勉將士하고 大小致力하니 盡銳攻之호되 卒不能克하니라


梁나라 高祖 武帝 蕭衍 大通 원년이고 北魏 肅宗 孝明帝 元詡 孝昌 3년이다.
【綱】 봄 정월에 葛榮이 北魏의 殷州를 함락시켰는데 殷州刺史 崔楷가 전사하였다. 갈영이 마침내 冀州를 포위하였다.
【目】 北魏에서는 定州와 相州의 4郡을 분할하여 殷州를 설치하고 崔楷를 殷州刺史로 삼았다.注+① 魏收의 ≪魏書≫ 〈地形志〉를 살펴보면 殷州는 다만 趙郡ㆍ鉅鹿郡ㆍ南鉅鹿郡 3郡을 관할할 뿐이었으니, 〈定州와 相州의 4郡을 분할하여 은주를 설치했다는 것은〉 대개 처음 은주를 설치하였을 때에 相州의 廣宗郡을 겸하여 관할한 것이다. 은주는 廣阿에 治所를 두었다. 최해가 表를 올려 병사와 양식을 요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혹자가 최해에게 〈가족을 남겨두고〉 單騎로 관직에 부임하기를 권하였는데, 최해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남의 녹을 먹는 자는 남의 근심을 자기의 근심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니, 내가 혼자 부임하면 將士들 중에 누가 〈은주를 지킬〉 뜻을 굳게 가지려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온 집안을 거느리고 관에 부임하였다.
葛榮이 殷州城을 압박하자 혹자가 최해에게 집안사람 중에 약소한 사람들을 빼내어 다른 곳으로 피할 것을 권하였다. 최해가 어린 아들과 딸 한 명을 내보내 밤에 나가게 했다가
얼마 뒤에 후회하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의 마음이 견고하지 못하여 충성심을 훼손하여 父性愛를 온전히 했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뒤쫓아가서 돌아오도록 하였다.
도적이 이르자 將士들이 다투어 분발하여 모두 말하기를 “崔公께서 오히려 온 가족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으시니, 우리들이 어찌 한 몸을 아낄 것인가.”라고 하고, 연이어 싸우기를 그치지 않아 죽은 자가 이어졌지만 〈장사들이〉 끝내 배반할 뜻이 없었다.
은주성이 함락되자 최해는 부절을 쥐고 굴복하지 않았다. 갈영이 최해를 살해하고 마침내 冀州를 포위하였다.
【綱】 北魏의 蕭寶寅이 莫折念生을 토벌하다가 크게 패하니, 北魏가 楊椿을 行臺로 삼았다.
【目】 蕭寶寅이 여러 해 동안 출병하였기 때문에 將士들이 피로하여 지쳤다. 이때에 涇州에서 크게 패배하니 汧城과 岐州가 모두 도적에게 항복하고 豳州刺史 畢祖暉가 싸우다 죽으니 關中이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雍州刺史 楊椿이 백성을 모집하여 방어하니, 조서를 내려 양춘을 行臺로 삼아서 關西의 여러 장수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右民郎 路思令이 上疏하기를注+① 右民郞은 右民曹의 郎官을 말한다. 漢 成帝 때에는 尙書 5인을 두었는데, 그 세 번째를 民曹라고 하였고, 魏나라(曹魏) 때에는 左民郞曹가 있었고, 晉나라 때에는 아울러 右民郞曹를 설치하였다. “근년에 將帥가 대부분 총애 받는 귀족의 子孫이기 때문에 의기양양 눈썹을 추켜올리고 소매를 걷어올리고서 싸움을 잘하는 것으로 자부하다가注+② ‘攘腕’은 소매를 걷어올리는 뜻이다. 강대한 적군을 만나게 되어서는 銳氣가 다 없어집니다.
이에 늙고 나약한 병사들을 앞에 세워서 적을 상대하게 하고 강건한 병사들은 뒤에 두어 자신을 보호하게 하고, 더구나 무기가 정밀하지 못하며 호령에 절도가 없습니다.
이러한 군대로써 험준한 곳에 의지한 적도들을 상대하고 여러 번 전투를 겪어 싸움에 능숙한 도적들과 대적하니, 패배하지 않으려고 한들 가능하겠습니까.注+③ 數(자주)은 음이 朔이다. 이 때문에 병사들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아서 집결하기 시작할 때부터 앞다투어 도망치고 將帥는 적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면서 전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國家는 官爵과 포상이 오히려 가볍다고 하여 자주 하사품을 더해주니, 帑藏(國庫)이 텅 비게 되고 백성의 재물이 다 고갈되어 마침내 도적들을 더욱 많아지게 하니 백성들의 피폐함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德은 의로운 사나이를 감동시킬 수 있고 은혜는 죽음을 각오한 군사를 권면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賞罰을 밝게 하며 士卒을 훈련시키며 무기를 수선하고, 미리 辯士를 보내 〈도적들에게〉 禍福으로 일깨워서, 만약 그들이 고치지 않거든 順(정의의 군사)으로 逆(반역 무리들)을 친다면 도끼를 갈아서 버섯을 베고 큰 화로에 부채질하여 털을 태우는 것과 무에 다르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따르지 않았다.注+④ 蕭는 약쑥이다. ‘蕭斧’는 쑥을 베는 도끼다. 菌은 其隕의 切이니 地芝(靈芝)이다. 비가 계속 오는 날씨에 두엄더미 위에 열이 나서 菌이 생긴다. 아침에 생겼다가 저녁에 죽기 때문에 朝菌이라고 한다.
【綱】 魏主(元詡)가 계엄령을 내려 북쪽을 토벌하려다가 끝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綱】 莫折天生이 雍州를 침략하였다가 싸움에 敗하여 죽고 그의 군대가 궤멸되었다.
【目】 莫折天生이 雍州를 침략하였는데 〈北魏의〉 蕭寶寅의 部將 羊侃이 참호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활을 쏘아 맞춰 죽이니 그의 군대가 마침내 궤멸되었다.注+① 羊侃은 羊祉의 아들이다.
【綱】 梁나라가 北魏를 침략하여 東豫州와 琅邪를 포위하여 三關을 함락시켰다.注+① 三關은 平靜ㆍ穆陵ㆍ陰山이다.
【綱】 北魏는 房景伯을 東淸河太守로 삼았다.
【目】 北魏 東淸河郡의 山賊들이 떼 지어 일어났는데 조서를 내려 房景伯을 동청하군 太守로 삼았다.注+① 宋 武帝 때에는 淸河郡을 盤陽에 하여 冀州에 소속하였고, 뒤에 北魏에 편입되어 東淸河郡이 되어 齊州에 소속하였다. 房景伯은 房法壽의 族子이다. 동청하군의 백성 劉簡虎가 일찍이 방경백에게 무례한 짓을 했다가 온 가족이 도망갔다.
방경백이 유간호를 붙잡고 그의 아들을 임용하여 掾吏로 삼아서 그에게 山賊들에게 가서 유시하게 하였다. 산적들은 방경백이 이전의 악행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여 서로 이끌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방경백의 어머니 崔氏가 經書에 능통하여 밝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貝丘에 사는 婦人이 그의 아들이 불효한다고 진술하였는데,注+② 貝丘는 僑縣(교치한 현)이니, 또한 宋 武帝 때에 설치되고 淸河郡에 소속하였다. 列은 陳述함이다. 방경백이 어머니께 아뢰자 어머니가 말하기를 “백성이 禮義를 알지 못하니 어찌 매우 질책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최씨가〉 불효자의 모친을 불러와서 평상을 마주하여 함께 밥을 먹으며 불효자에게 당 아래에 모시며 서 있게 하고서 방경백이 〈모친(최씨)에게〉 음식을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게 하였다. 채 열흘이 안 되어 〈불효자가〉 잘못을 후회하며 집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하였다.
최씨가 말하기를 “그가 겉으로는 부끄러워하지만 마음속은 아직 아니다. 잠시 그대로 두어라.”라고 하였다. 20여 일이 지나서는 불효자가 머리를 땅에 두드려서 피를 흘리고, 그 모친이 울면서 아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달라고 하자, 그러한 뒤에야 그것을 따랐다. 〈그 불효자는〉 마침내 효자로 이름났다.
【目】 胡氏(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백성은 진실로 어리석은 이가 많지만 그 良心은 끝내 잊지 않는다. 윗사람이 된 자가 教化하여 선한 백성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刑法을 숭상하여 백성이 복종하지 않는 것을 보면 무지한 백성들이라고 하여 더욱더 심하게 다스리니, 백성들이 더욱 완강히 저항하여 심한 자는 〈윗사람을〉 보기를 원수와 같이 한다.
崔母(房景伯의 어머니)는 일개 부인으로서 교화의 근원이 남에게 말해줌에 달려 있지 않고 몸소 솔선수범하는 데에 있고, 敎化의 효과가 겉모습만 바꾸는 것을 취하지 않고 마음을 고치는 데에 있는 것을 알아서, 한 달의 사이에 무지하며 패악한 사람을 변화하여 孝子가 되게 하였으니, 누가 백성을 과연 무지하다고 말하겠는가. 윗사람이 되어 이것을 본다면 또한 자기를 살펴서 덕을 닦을 수 있을 것이다.”
【綱】 2월에 莫折念生이 潼關을 점거하였다.
【綱】 梁나라가 彭城을 공격하자 北魏 사람들이 격퇴하였다.
【綱】 3월에 魏主(元詡)가 戒嚴令을 내려 서쪽을 토벌하려다가 끝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綱】 梁主(蕭衍)가 同泰寺에 捨身하였다.
【綱】 여름 4월에 北魏가 다시 蕭寶寅을 西討大都督으로 삼았다.
【目】 〈北魏는〉 蕭寶寅이 〈涇州에서〉 패배할 때에 그를 면직하여 庶人으로 삼았다. 이때에 이르러 楊椿이 병이 있어 해직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다시 소보인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양춘의 아들 楊昱이 洛陽으로 떠나려고 할 적에 양춘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雍州에는 소보인보다 나은 자가 없지만 그 上佐는 朝廷에서 응당 심복인 重臣을 보내야 할 것인데, 어찌 소보인이 文牒을 내려 임용하는 것을 내버려둔단 말인가.注+① 上佐는 別駕從事이다. ‘任其牒用’은 蕭寶寅이 마음대로 文牒을 내려 직접 上佐를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
또 소보인은 刺史 직책을 맡은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는다. 내가 보건대 그가 옹주를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고 상벌 등을 처리하는 것은 常法에 따르지 않으니 아마 반역하려는 마음이 있는 듯하다.
너는 마땅히 이러한 뜻을 胡太后와 魏主께 계문을 올리고 아울러 宰輔에게 아뢰어서 〈조정에서〉 다시 長史ㆍ司馬ㆍ防城都督을 보내도록 하게 하라.注+② ‘二聖’은 胡太后와 魏主를 말한다.
關中을 편안히 하려고 한다면 바로 〈조정에서〉 이 세 사람을 등용해야 하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보인은〉 반드시 큰 근심이 될 것이다.” 하였다. 양욱이 그의 말대로 啓聞을 올렸으나, 〈조정에서는〉 따르지 않았다.
【綱】 가을 7월에 北魏의 陳郡이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目】 北魏 陳郡의 백성 劉獲ㆍ鄭辯이 西華縣에서 반란을 일으키고서 梁나라 譙州刺史 湛僧智와 내통하여 공모하였는데,注+① 西華縣은 漢나라 때에는 汝南郡에 소속되었고, 晉나라 때에는 潁川郡에 소속되었고, 元魏(北魏) 때에는 陳郡에 소속되었다. 湛은 姓이며, 僧智는 그 이름이다. 당시에 北魏의 東豫州를 포위하였다. 북위는 曹世表를 東南道行臺로 삼아서 〈유획 등을〉 토벌하게 하였다. 여러 장군들은 도적의 세력이 강성하였으므로 감히 교전하기 못하였다.
조세표가 막 병을 앓고 있다가 수레를 타고 나가 統軍 是云寶를 불러서 말하기를注+② 是云은 오랑캐의 複姓이다. 寶는 이름이다. “담승지가 과감하게 內地로 깊이 쳐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유획과 정변이 州의 백성에게 명망을 받는 자로서 담승지를 위해 안에서 호응하였기 때문이다.
소문에 유획이 병사를 이끌고 가서 담승지를 맞이한다고 하니 이곳에서 거리가 80리이다. 지금 그들이 생각하지 못할 때에 출동하면 한 번 싸워서 격파할 수 있다. 유획이 격파되면 담승지는 저절로 달아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병사와 말을 선발하여 시운보에게 주어서 유획 등을 크게 격파하여 죽이니, 담승지가 그 소식을 듣고 도망하여 돌아갔다.
【綱】 北魏 樂安王 元鑑이 鄴城을 가지고 배반하여 葛榮에게 투항하였다.注+① 樂安은 安樂이 되어야 한다.
【綱】 北魏 李神軌가 髙謙之를 죽였다.
【目】 예전에 北魏 侍御史 髙道穆이 相州에 使命을 받들고 가서 前 刺史 李世哲이 교만 방자하여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을 조사하였었다. 이때에 이세철의 동생 李神軌가 권력을 잡았다.
고도목의 형 髙謙之의 家奴가 良民의 신분으로 노비가 되었다고 고소하였는데,注+① 법률에 良民을 억압하여 賤民으로 삼는 것을 금지하였다. 〈‘訴良’은〉 본래 良民인데 억압하여 奴婢로 삼은 것을 말한다. 이신궤가 고겸지를 잡아들여 廷尉에게 보내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마침 사면령을 반포하려고 할 적에注+② 이달에 北魏가 大赦免을 하였다. 이신궤가 胡太后에게 계문을 올려서 그 이전에 고겸지에게 죽음을 내리게 하니, 조정 인사들이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였다.
【綱】 梁나라 將軍 彭群이 北魏 琅邪를 포위하였다가 패하여 죽었다.
【綱】 8월에 北魏의 大都督 源子邕이 鄴城을 함락하고 元鑑을 죽였다.
【綱】 9월에 秦州 사람들이 莫折念生을 죽여서 秦州를 가지고 北魏에 투항하였다.
【綱】 겨울 10월에 梁나라의 將軍 湛僧智와 夏侯夔가 北魏의 廣陵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目】 湛僧智가 北魏의 東豫州刺史 元慶和를 廣陵에서 포위하니 북위의 將軍 元顯伯이 구원하였다.注+① 元慶和는 元天賜의 손자이다. 이 廣陵城은 新息縣의 경계에 있다. 梁나라 司州刺史 夏侯夔가 병사를 인솔하여 담승지를 도우니,注+② 夏侯夔는 夏侯亶의 동생이다. 원경화가 廣陵城을 바쳐 투항하였다.
하후기가 〈원경화의 투항을〉 담승지에게 양보하였는데, 담승지가 말하기를 “원경화가 公께 투항하려고 하는데 제가 지금 〈항복을 받으러〉 가면 반드시 그의 뜻을 어기게 될 것입니다. 또 제가 거느린 군사는 오합지졸들을 모집한 것이니 법으로 제어할 수 없습니다.
公께서는 군사를 지휘하는 데 평소 엄격하게 하시니 〈군사들이〉 반드시 침포하게 굴지 않을 것입니다. 항복한 자를 받아주고 귀부하는 자들을 받아들이는 데에 매우 적합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하후기가 이에 성에 올라가서 북위의 깃발을 뽑아내고 梁나라 깃발을 세우니 원경화가 무기를 놓고 나와 항복하므로, 관리와 백성들이 安堵하였다. 원현백이 밤에 달아났는데 양나라 군대가 그를 추격하여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梁主(蕭衍)가 담승지는 廣陵에 진주하게 하고 하후기는 安陽에 주둔하게 하고 别將을 보내 楚城을 屠戮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義陽 북쪽 길이 마침내 북위와 단절되었다.注+③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東豫州의 汝南郡에 安陽縣에 있다. 梁나라 때에는 西楚州를 楚城에 두었다.
【目】 司馬溫公(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湛僧智는 장시간 싸운 노고를 잊고서 하루아침에 새로 부임한 장군에게 〈적장이 투항한 공로를〉 주었고, 자기의 단점을 알면서 남의 장점을 가리지 않았고, 功을 이루고도 취하지 않고서 國事를 성취시켰다. 충성스럽고 또 사사로움이 없으므로 君子라고 말할 만하다.”
【綱】 梁나라 將軍 陳慶之가 北魏의 渦陽(와양)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目】 梁나라 領軍 曹仲宗과 直閤 陳慶之가 北魏의 渦陽을 공격하니, 尋陽太守 韋放이 병사를 거느리고 조중종 등과 회합하였다.
북위 병사들이 갑자기 이르니, 위방이 군영을 아직 세우지 않았고 麾下 병사가 겨우 200명이었기 때문에 위방이 투구를 벗고 말에서 내려서 胡牀에 앉아서 지휘하였다.注+① 胡牀은 바로 交牀이다. 병사들이 모두 죽을힘을 다해 싸워서 一當百의 기세로 싸우지 않는 자가 없었으므로 북위 병사들이 마침내 퇴각하였다. 위방은 韋叡의 아들이다.
북위가 또 將軍 元昭 등을 보내서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서 와양을 구원할 적에 선발대가 〈와양에〉 40리쯤 못 미쳤을 적에 진경지가 맞서 싸우려고 하자 위방이 말하기를 “선봉 부대는 반드시 날래고 정예로울 것이니 공격하지 말고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진경지가 말하기를 “북위 병사는 멀리에서 와서 피곤하고 우리와 거리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으니, 반드시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그들이 아직 결집하지 않았을 때에 그들을 꺾어야 한다.”라고 하고,
이에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進擊하여 격파하였다. 돌아와 諸將들과 군영을 연합하여 전진하여 渦陽城을 등지고 북위 군대와 서로 대치하였다.
봄부터 겨울까지 수십에서 백 번쯤 싸우는 동안 將士들이 피로하여 지쳤다. 북위가 군대의 후미에 보루를 쌓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중종 등이 두려워하여 병사를 이끌고 돌아갈 것을 논의하였는데,
진경지가 부절을 쥐고 軍門에서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군대는 죽을 땅에 놓인 뒤라야 마침내 목숨을 구할 수 있다.’라고 하니,注+② 兵法에 “죽을 땅에 놓인 뒤에야 살아난다.” 하였다. 반드시 오랑캐가 크게 연합한 뒤에 그들과 더불어 싸울 것이다.
반드시 회군하려 한다면 내가 별도로 황제의 密敕을 받았으니, 이를 범하는 자에게는 조칙(처벌)을 시행할 것이다.”라고 하니, 마침내 그쳤다.
북위가 13개의 城을 만들어서 양나라 군사를 제압하려고 하였다. 진경지가 군사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밤중에 출동하여 4개의 城을 무너뜨리니, 渦陽城主 王緯가 항복을 청하였다. 위방이 항복한 자 중에 30여 명을 선발하여 보내 북위의 여러 군영에 나누어 알렸다.
진경지가 포로들을 늘어서게 하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따라 전진하니 〈북위의〉 9개의 城이 모두 궤멸되었다. 양나라 군대가 북위의 군대를 추격하여 포로로 잡고 참수하여 대략 섬멸하니 죽은 시체가 渦水를 가로막았다.注+③ 咽은 一結의 切이니, 가로막는다는 뜻이다.
【綱】 北魏의 蕭寶寅이 關右大使 酈道元을 죽이고 군대를 거느려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북위가 行臺 長孫稚를 보내 그를 토벌하였다.
【目】 蕭寳寅이 涇州에서 패전했을 때에 혹자는 洛陽으로 돌아가 죄를 받으라고 권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關中에 머물러 공을 세워 스스로 贖罪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소보인이 스스로 생각건대 군사를 출동한 지 여러 해 동안 허비한 재화를 셀 수 없고 하루아침에 패배하여 마음속이 절로 편안하지 않고, 北魏 조정도 역시 그를 의심한다고 여겼다.
中尉 酈道元이 평소에 엄격하고 용맹하였다. 汝南王 元悅의 嬖人이 권세를 농락하였는데, 역도원이 그를 죽이고 아울러 원열을 탄핵하였다. 당시에 소보인이 반란한 정황이 이미 드러났으므로 원열이 이에 아뢰어 역도원을 關右大使로 삼았다. 소보인이 그 소식을 듣고 자기를 잡으려 한다고 여겨서 매우 두려워하였다.
長安의 경박한 자제들이 다시 군사를 일으킬 것을 권하였는데, 소보인이 河東의 柳楷에게 묻자 유해가 말하기를 “세속 노랫말에 ‘蕭鸞이 10명의 아들을 낳아 9명의 아들은 곯아버리고 1명의 아들만 곯지 않아 關中을 다스린다[亂].’라고 하였으니,注+① 齊 明帝의 성명이 蕭鸞이니, 蕭寶寅의 아버지이다. 毈은 徒玩의 切이며 알이 곯은 것이다. 亂은 다스림입니다.
大王(소보인)께서 關中을 다스려야 하거늘 어찌 의심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소보인이 마침내 장수를 보내 역도원을 공격하여 죽였다.
【目】 〈蕭寳寅의〉 行臺郎中 蘇湛이 병으로 집에 누워 있었다. 소보인이 그의 姨弟 姜儉에게 명하여 소담을 설득하기를 “酈道元이 오는 것은 일을 예측할 수 없다. 내가 앉아서 죽음을 받을 수 없으므로 다시는 北魏의 신하가 될 수 없다. 生死와 榮辱을 卿과 함께 하고자 하오.”라고 하니,
소담이 크게 곡을 하고 말하기를 “王(소보인)께서는 본래 궁박한 새의 처지로 남에게 歸附하였는데 북위 朝廷에서 왕에게 羽翼(보좌)을 주어서 금일의 영총에 이르렀습니다.
國運에 憂患이 많을 때를 만나서 충성을 다하여 은덕에 보답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남(북위)의 위태로움을 틈타서 潼關을 지키면서 천자의 자리를 엿보려 하십니다.注+① 屬은 음이 燭이며 만나다는 뜻이다. ‘守關’은 蕭寶寅이 潼關의 험준함을 지켜서 關中을 분할 점령하려 함을 말한다. ‘問鼎’은 천자의 자리를 엿보려고 함을 말한다.
북위의 德이 비록 쇠퇴하였지만 天命이 아직 바뀌지 않았습니다. 저는 온 가족이 왕을 위하여 멸족을 당하게 할 수 없습니다.注+②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사직하고 鄉里로 돌아가서 병들어 죽어서 지하에 가서 조상들을 뵙게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注+③ 蘇湛은 武功 사람이다.
소보인은 평소에 소담을 중시하였고, 또 소담이 자기에게 쓰이지 않을 것을 알아서 武功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소보인은〉 마침내 스스로 齊나라 황제를 칭하여 연호를 바꾸고 百官을 설치하였다. 長史 毛遐가 동생 毛鴻賓과 함께 氐人과 羌人을 거느리고 병사를 일으켜 소보인을 막고,注+④ 蕭寶寅이 雍州ㆍ涇州 등 4州의 都督이 되었고, 또 西討大都督이 되어서 毛遐를 府長史로 삼았다. 북위에서 長孫稚를 行臺로 삼아서 소보인을 토벌하였다.
正平의 백성 薛鳳賢과 薛脩義가 역시 河東에서 무리를 모아서 鹽池를 점거하고 蒲阪을 포위하여 동서로 연결하여 소보인에게 호응하였다.注+⑤ 魏收의 ≪魏書≫ 〈地形志〉를 살펴보면 “世祖(拓跋壽) 때에 河東 聞喜縣에 太平郡을 설치하였고, 孝文帝(元宏) 太和 18년(494)에 고쳐서 正平郡이라고 하고 東雍州에 소속하고 聞喜와 曲沃 2縣을 관할하게 하였다.” 하였다. 薛脩義는 薛鳳賢의 宗人이다. 북위에서 都督 宗正珍孫에게 조서를 내려서 설봉현 등을 토벌하게 하였다.注+⑥ 宗正은 複姓이다.
【目】 胡氏(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蕭寶寅이 北魏로 달아날 때의 마음은 본래 그 兵力을 빌려서 宗國(齊나라)을 위해 復讐하려고 하였으니 〈義理에〉 유사하다.
그렇다면 마땅히 淮水ㆍ漢水의 북쪽을 떠나지 않아서 틈을 엿보아 남쪽(梁나라)을 토벌하여 죽은 후에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공을 이루는 일은 하늘의 뜻인데 冀州와 雍州 2州가 어찌 梁나라에 있겠는가.
그런데 그 때문에 刺史가 되었으니, 비록 이익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도 남들이 믿지 않을 것이다. 의리로 시작하여 이익으로 끝을 맺었으니, 환란을 일으켜 죽음을 받는 데에 이르지 않으면 국가를 안정시킬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小人의 本末입니다.”
【綱】 11월에 梁나라가 蕭淵藻를 北討都督으로 삼아서 渦陽에 진수하게 하였다.
【綱】 葛榮이 北魏의 冀州를 함락시켜서 都督 源子邕과 裴衍을 죽이고 마침내 相州를 침략했다가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目】 葛榮이 信都를 포위하여 봄부터 겨울에 이르렀다. 〈北魏의〉 冀州刺史 元孚가 將士들을 이끌고 독려하여 밤낮으로 지켰는데 비축했던 양식이 이미 고갈되었고 외부에서 구원 병력이 오지 않았다. 城이 함락될 때에 원부가 형 元祐와 함께 잡혔다.
갈영이 將士들을 크게 모아 生死를 논의할 때에 원부 형제가 다투어 서로를 위해 죽겠다고 하고,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都督 潘紹 등 수백 명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使君(元孚)을 살려주고 자신들을 대신 죽여달라고 하였다. 갈영이 말하기를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은 北魏의 忠臣이며 義士이다.”라고 하고, 그들을 모두 살려주었다.
북위가 源子邕에게 명하여 갈영을 토벌할 적에 裴衍이 表文을 올려 同行하기를 청하자 허락하였다. 원자옹이 말하기를 “배연이 가면 臣은 남기를 청하고 신이 가면 배연이 남기를 청합니다.
만약 반드시 〈두 사람이〉 同行하게 되면 패배가 아침이나 저녁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이 행군하다가 漳水에 이르러서 갈영이 공격하니 과연 패하여 모두 죽었다.
相州에서는 冀州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相州刺史 李神은 志氣가 태연자약하여 將士들을 어루만지며 면려하고 크고 작은 일에 힘을 기울였다. 갈영이 정예의 군사를 다 동원하여 공격하였으나, 끝내 상주를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역주
역주1 葛榮陷魏殷州……榮遂圍冀州 : “六鎭의 반란으로부터 州郡을 함락한 것이 많았으나, 아직 절개로 죽은 것을 기록한 것은 없었다. 여기에서 崔楷를 기록하였으니 최해와 같은 이는 환난에 임하여 피하지 않을 것을 안 사람이라 이를 만하다. 그러므로 특별히 기록하여 가상히 여긴 것이다.[自六鎭之叛 陷州郡多矣 未有以死節書 於是書崔楷 若楷者 可謂知難不避者矣 故特書以嘉之]” ≪書法≫
“≪資治通鑑綱目≫에서 筆法을 세움이 매우 근엄하였다. 예컨대 葛榮의 일에 ‘北魏의 갈영이 殷州를 함락시켰다.[魏葛榮陷殷州]’라고 말하지 않고, ‘葛榮이 北魏의 殷州를 함락시켰다.[葛榮陷魏殷州]’라고 하였으니, 이때 賊徒들의 세력이 강성하여 북위가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書法이 이와 같아서 마치 하나의 敵國처럼 보인 것이다. 그런데 북위는 破六韓拔陵의 반란으로부터 여기까지 도합 5년이 지났는데 북위의 군대를 격파하고 장군을 죽인 것이 많았다. 그렇지만 유독 한 명의 崔楷만 부절을 쥐고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치통감강목≫에서 특별히 기록하여 인정하였으니, 혼란하고 망하는 세상이라고 해서 그 사실을 묻히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세상이 혼란하면 忠臣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綱目立法極謹嚴 如葛榮之事 不曰魏葛榮陷殷州 而曰葛榮陷魏殷州 則以是時賊勢彊盛 非魏之所得而制 故書法如此 見其若一敵國然者 若夫魏自破六韓拔陵之反 至是凡五載 破軍殺將多矣 獨一崔楷能執節不屈 故綱目特書而予之 不以亂亡之世而沒其實 此亦世亂識忠臣之意也]” ≪發明≫
역주2 魏主戒嚴北討 不果行 : “무릇 征討에 ‘끝내 못하였다[不果]’라고 기록한 것은 나무란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끝내 시행하지 못하였다.[不果行]’라고 기록한 것은 11번이고, 征討에 구원을 기록한 것이 5번인데(정미년(527)에 魏主에게 2번 기록하고, 唐나라 嗣聖 5년(688)에 武氏(則天武后)이고, 上元 원년(760)에 肅宗이고, 五代 신해년(951)에 周主이다.) 武氏와 周主는 나무란 말이 아니다.[凡征討書不果 譏也 綱目書不果行十有一 而於征討救書之者五(丁未年 魏主再書 唐嗣聖五年 武氏 上元元年 肅宗 五代辛亥年 周主) 惟武氏及周主 非譏辭]” ≪書法≫
역주3 魏以房景伯爲東淸河太守 : “北魏는 신미년(431)부터 ‘王慧龍을 滎陽太守로 삼았다.[以王慧龍爲滎陽太守]’라고 기록한 지 지금에 이르러 90여 년이었는데, 이에 비로소 房景伯을 기록하였다. 이때 郡守 중에 방경백만이 거의 德으로 정치를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기록하여 가상히 여긴 것이다.[魏自辛未 書以王慧龍爲滎陽太守 至是九十餘年矣 於是始書景伯 是時郡守 惟景伯庶乎以德爲政者 故書嘉之]” ≪書法≫
역주4 僑置 : 地名을 다른 곳에 그대로 옮겨서 설치한 행정구역이다. 東晉과 南朝 시대에 화북 지역의 백성들이 전란을 피해 남방으로 오자, 남방의 지역을 택하여 군현을 설치하되 화북 지역의 군현의 명칭 그대로 써서 그들을 안주시켰다.
역주5 魏主戒嚴西討 不果行 : “北魏는 여러 鎭이 반란함으로부터 도적들이 蜂起한 것을 ≪資治通鑑綱目≫에서는 다 기록하지 못했으니, 그 사이에 군사들이 궤멸되어 흩어지고 都督과 將帥 중에 전사한 자가 얼마인지 알지 못하겠다. 中外의 사람들이 장차 망할 것을 알았으나 魏主(元詡)는 근심 없이 편안하였다. 이해에 비로소 戒嚴命이 있었으나 또한 끝내 〈토벌이〉 시행되지 않았고 또한 공연한 헛소리뿐이었다. 저 拓跋氏가 拓跋珪 이래로 사방으로 정벌할 때에 모두 자신이 친히 하여 강토를 널리 개척하여 중원에 웅거할 수 있었다. 이제 날마다 백 리씩 줄어드는데도 그 군주는 사치에 빠지고 총애 받는 이들이 조정에 가득하니, 비록 대문 안 뜰에 있는 도적이라도 토벌할 겨를이 없었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책에 두 번 기록하였는데, 하나는 계엄령을 내려 북쪽을 토벌하려다가 끝내 시행하지 못한 것이고, 하나는 계엄령을 내려 서쪽을 토벌하려다가 끝내 시행하지 못한 것이니, 모두 도적을 막는 데에 나태한 실상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북위의 멸망은 도적이 능히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북위가 스스로 망하게 했을 뿐이다.[魏自諸鎭之叛 寇盗蜂起 綱目不勝其書 其間師徒潰散 督將陷没 不知其幾 中外知其將亡 而魏主晏然不恤 是歲始有戒嚴之命 而亦終於不行 亦徒爲是虛聲而已 彼拓跋自珪以來 四方攻伐 皆身親之 用能恢拓疆宇 雄據中夏 今日蹙百里 而其主安於淫侈 嬖倖盈朝 雖門庭之冦 亦弗暇討 綱目兩書于册 一則曰戒嚴北討不果行 一則曰戒嚴西討不果行 皆以著其怠於禦寇之實 然則魏之亡也 非盗賊能亡之也 魏自亡爾]” ≪發明≫
역주6 梁主捨身於同泰寺 : “그 일을 곧바로 기록하였으니 貶下할 필요도 없이 뜻이 드러난다. ‘捨身’을 기록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을 마칠 때까지 ‘捨身’을 기록한 것은 4번이다.(梁 武帝, 陳 髙祖) 4번 중에 梁 武帝가 3번을 차지한다. 陳叔寶의 捨身은 기록하지 않았는데(大建 壬寅年(582)) 사찰에서 하지 않았으므로 생략한 것이다.[直書其事 不待貶而義見矣 書捨身始此 終綱目書捨身四(梁武帝 陳髙祖) 四 梁武帝凡三書焉 陳叔寶捨身不書(大建壬寅) 不於寺 故略之]” ≪書法≫
“심합니다, 梁 武帝의 어리석음이여! 사람이 天地 사이에 태어나서 이 생명이 있으면 이 육신이 있고, 생명이 멸할 수 없으면 육신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梁 武帝가 이른바 ‘버린다[捨]’는 것은 무엇을 ‘捨’라고 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일 富貴를 물리치고 妻子를 버리는 것으로 ‘捨’라고 했다면 이는 육신이 사물을 버린 것이지 ‘육신을 버린다[捨身]’고 말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 육신을 부처에게 맡기는 것을 ‘捨’라고 한다면 佛者는 당연히 그 육신을 취하여 사용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이미 ‘捨’라고 하고서 그 육신이 여전히 존재하니 이는 애당초 버린 적이 없는 것입니다. 육신을 버린 적이 없는데 억지로 ‘捨’라고 명명하니 진실로 그 마음을 진실하지 못한 데에서 미혹시킨 것입니다. 뒷날 여러 신하들이 또 돈으로 贖身하였는데, 捨身할 때에는 양 무제의 육신을 누가 받았으며 贖身할 때에는 양 무제의 육신을 누가 돌려주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梁主의 육신은 노비처럼 捨身하거나 贖身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는 그 백성들과 梁主 자신을 우롱하여 속였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부처를 우롱하여 속인 것입니다. 梁主가 말년에 한탄하며 죽을 때에 다시 연연해하며 생명을 버리지 못하였으니 어째서입니까. 孟子가 말하기를 ‘물고기를 버리고 〈더 맛있는〉 곰 발바닥을 취하며 생명을 버리고 義를 취한다.’ 하였습니다. 대개 물고기와 곰 발바닥은 두 가지 물건이어서 진실로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취할 수 있지만 만일 생명을 버리고 義를 취해야 한다면 반드시 몸을 죽이고 義를 따른 뒤에야 가능하니, 만일 생명이 그대로 있다면 또한 이것을 ‘捨’라 할 수 없습니다. ≪資治通鑑綱目≫에서 梁主의 捨身한 일에 대해 누차 책에 기록하여 마치 폄하한 말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한 국가의 임금으로서 그 육신을 버리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소중한 宗廟와 社稷과 의탁 받은 土地와 人民을 진실로 누가 주관한단 말입니까. 하물며 또한 진실로 버린 적이 없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 폄하한 뜻이 명백합니다. 梁 武帝가 부처에게 빠진 앙화를 先儒들이 매우 상세히 논의하였으니, 臣은 우선 ≪자치통감강목≫의 기록한 것에 따라서 그가 捨身한 한 가지만을 취하여 그 망녕된 것을 極論한 것입니다.[甚哉梁武之愚也 人生天地間 有此生 則有此身 生不可滅 則身不可捨 抑不知梁武之所謂捨者 以何爲捨爾 若以屛富貴 棄妻子爲捨耶 則是身捨物 而非曰捨身也 若以委其身於佛氏爲捨耶 則爲佛者 當取其身而用之 可也 今旣曰捨 而其身猶在 則是初未嘗捨也 身未嘗捨 而強名曰捨 則固已昧其心於不誠矣 他時諸臣 又以金而贖其身 不知當其捨之之時 孰從而受之 而贖之之時 又孰從而歸之也 梁主身非賣僮而可捨可贖 此不惟愚誑其民 愚誑其身 抑且愚誑其所謂佛矣 末年荷荷之時 又復戀戀而不能捨 何哉 孟子有言 舎魚而取熊掌 舎生而取義 夫魚熊掌二物也 固可捨其一而取其一 若捨生取義 則必殺身狥義而後可 萬一其生猶在 則亦不謂之捨矣 綱目於梁主捨身之事 屢書於册 若無貶詞 然以一國之君 而欲捨其身 則宗廟社稷之重 土地人民之託 誰實尸之 況又實未嘗捨乎 其貶之之意明矣 梁武溺佛之禍 先儒論之甚詳 臣姑因綱目所書 而取其捨身之一説 極論其所以妄云]” ≪發明≫
역주7 魏復以蕭寶寅爲西討大都督 : “‘復以’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두 번 잘못을 나무란 것이다. 涇州의 패배에 일찍이 파면하여 庶人으로 삼았었는데, 이때에 다시 소보인을 등용하였으나 끝내 酈道元을 죽이고 반란하였으므로 기록하여 나무란 것이다.[書復以 何 譏貳過也 涇州之敗 嘗免爲庶人矣 於是復用寶寅 竟殺酈道元而反 故書譏之]” ≪書法≫
역주8 云爲 : 云云과 같은 말로 等等의 의미이다.(張大可 等 注釋, ≪新譯資治通鑑≫, 三民書局, 2017)
역주9 (復)[複] : 저본에는 ‘復’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므로 ‘複’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0 魏李神軌 殺髙謙之 : “髙謙之가 하인에게 고발을 받아 죽었을 뿐인데 〈≪資治通鑑綱目≫에서〉 李神軌를 죄준 것은 어째서인가. 이신궤가 원한을 갚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에 이신궤가 胡太后에게 총애를 얻어서 사면령에 앞서서 고겸지를 죽였다. 이신궤를 기록한 것은 호태후를 나쁘게 여긴 것이다.[謙之爲奴所告 死耳 罪神軌 何 復怨也 於是神軌得幸太后 先赦殺之 書神軌 所以病太后也]” ≪書法≫
역주11 梁將湛僧智夏侯夔圍魏廣陵 克之 : “이때에 夏侯夔가 도운 공격으로 廣陵城이 하후기에게 항복하였으니 하후기의 공로이다. 그런데 두 명의 장군을 아울러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湛僧智가 양보하였으므로 가상히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鍾離의 승리에 景宗과 韋叡를 아울러 기록하고, 廣陵의 승전에 담승지와 하후기를 아울러 기록하였으니, 모두 그 양보함을 가상히 여긴 것이다.[於是夔助之攻 城降于夔 則夔功也 竝書二將 何 僧智讓也 故嘉之 是故鍾離之勝 景宗與韋叡竝書 廣陵之克 僧智與夏侯竝書 皆嘉其讓也]” ≪書法≫
역주12 (禦)[御] : 저본에는 ‘禦’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10, 上海古籍出版社, 2002)에 의거하여 ‘御’로 바로잡았다.
역주13 梁將陳慶之攻魏渦陽 克之 : “이때에 曹仲宗과 陳慶之는 함께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진경지만 홀로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조중종은 겁을 먹어서이다. 그러므로 沈田子와 傅弘之는 함께 武關에 진입한 자인데, 부홍지는 겁을 먹어서 기록하지 않았고 심전자만 기록하였으며, 진경지와 조중종은 함께 渦陽에서 승리한 자인데 조중종은 겁을 먹어서 기록하지 않고 진경지만 기록하였다. ≪資治通鑑綱目≫이 功과 罪에 대해 확실하니, 그 勸戒함이 분명하다.[於是曹仲宗與慶之共攻克之 則其獨書慶之 何 仲宗怯也 是故沈田子傅弘之 俱入武關者也 弘之怯不書 而書田子 陳慶之曹仲宗 共克渦陽者也 仲宗怯不書 而書慶之 綱目之於功罪審矣 其爲勸戒明矣]” ≪書法≫
역주14 魏蕭寶寅……討之 : “拓跋氏가 다스림을 그르치자 반란자들이 고슴도치 털처럼 일어났다. 鎭兵(六鎭의 군사)․山胡․여러 蠻族들이 여러 郡의 백성들과 함께 서로 맞이하여 소동을 일으키지 않음이 없었고, 심지어 法僧과 같은 寵臣이나 元鑑과 같은 宗臣의 무리들 또한 모두 반란하여 서로 이어졌는데, ≪資治通鑑綱目≫에서는 모두 책에 기록하였다. 지금 소보인이 타향살이하며 寄食하는 도망한 신하로서 또 다시 군사를 일으켜 난동을 조성하여 도적질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魏氏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소보인은 애초에 宗國(齊나라)을 위하여 복수하려 하였다가 끝내 난리를 부려 멸망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원수는 쉽게 갚지 못하고 義擧 또한 쉽게 일으키지 못한 것임을 알겠다. ≪자치통감강목≫에서는 이해에 소보인이 반란했다고 기록하고 이 뒤 3년에 소보인이 주륙을 당하였다고 기록하였으니, 소인이 반복하여 번갈아 어지럽힌 재앙을 특별히 나타내지는 않고, 또한 배반해 도망 온 자를 받아들이는 자의 귀감으로 삼았을 뿐이다. 蕭鸞의 한 자식(소보인)이 겨우 남아 있었는데 스스로 끊김을 취하였으니 하늘이 폐하는 것에 다시 일어날 수 있겠는가.[拓跋失御 反者如蝟毛而起 自鎭兵山胡群蠻 與夫諸郡之民 莫不相延而動 甚至寵臣如法僧 宗臣如元鑑軰 亦皆反叛相屬 綱目悉書于册 今寳寅以覊旅寄食逃竄之臣 且復稱兵造亂 寇盗如此 魏氏烏得不亡 然寶寅始欲爲宗國復讐 而終於作亂亡滅 信知讐固未易復 而義亦未易擧也 綱目於是年 書寶寅反 於後三年 書寶寅誅 不特著小人反覆交亂之禍 亦以爲招納叛亡者之鑑爾 蕭鸞僅有一息 自取殄絶 天之所廢 其可興乎]” ≪發明≫
역주15 (詒)[詔] : 저본에는 ‘詒’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詔’로 바로잡았다.
역주16 (濁)[燭] : 저본에는 ‘濁’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奎 7512)에 의거하여 ‘燭’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7 (三)[二] : 저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의 註에 의거하여 ‘二’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20) 책은 2022.11.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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