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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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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이라
秦建元元이요 燕建熙六年이라
春正月 하다
◑ 劉衛辰 復叛代어늘 代王什翼犍 擊走之하다
代王什翼犍 性寬厚
郞中令許謙 盗絹二匹이어늘 知而匿之하고 謂左長史燕鳳曰 吾不忍視謙之面하노니 卿愼勿泄하라 若謙 慙而自殺이면 是吾以財殺士也니라
嘗討西部叛者할새 流矢中目이러니 旣而獲射者하니 群臣 欲臠割之한대
什翼犍曰 彼各爲其主闘耳 何罪오하고 遂釋之注+① 爲, 去聲.하다
◑ 三月 帝崩注+① 壽, 二十五.하니 琅邪王奕 卽位하다
帝崩하니 無嗣 皇太后 詔以奕承大統하다
陷洛陽하니 將軍沈勁 死之하다
燕太宰恪及吳王垂 共攻洛陽할새 謂諸將曰 卿等 常患吾不攻이러니 今洛陽 城高而兵弱하니 勿畏也하라하고 乃攻克之하여 執沈勁하다
神氣自若이어늘 將宥之러니 將軍慕輿虔曰 勁雖奇士 觀其志度하니 終不爲人用이라하니 遂殺之하다
略地至崤, 澠하니 關中 大震注+① 崤, 崤谷也. 澠, 澠池也.이라
秦王堅 自將屯陝城以備之注+② 漢地志 “弘農有陜縣.”하다
燕以慕容筑鎭金墉하고 吳王垂鎭魯陽注+③ 筑, 燕宗室也. 筑, 音竹.하고
還鄴하여 謂僚屬曰 吾前平廣固 不能濟辟閭蔚이러니 今定洛陽 使沈勁爲戮하니 雖皆非本情이나 實有愧於四海로라
朝廷 嘉勁之忠하여 贈東陽太守하다
司馬公曰 沈勁 恥父之惡하여 致死以滌之하여 變凶逆之族하여 爲忠義之門하니 可謂能爲子矣로다
◑ 恪 爲將 不事威嚴하고 專用恩信하여 撫士卒하며 務綜大要하고 不爲苛令하여 使人人得便安하니
平時 營中 寬縱하여 似若可犯이라 然警備嚴密하여 敵至 莫能近故 未嘗敗러라
葬安平陵하다
◑ 夏四月 燕以陽騖爲太尉하다
騖歴事四朝하여 年耆望重注+① 廆․皝․儁․暐四朝.하니 自太宰恪以下皆拜之로되
而騖謙恭謹厚 過於少時하여 戒束子孫하니 雖朱紫羅列이나 無敢違犯其法度者러라
六月 益州刺史周撫卒하다
撫在益州三十餘年 甚有威惠 詔以其子楚代之注+① 穆帝永和三年, 桓溫平蜀, 留撫鎭之, 至是纔十九年. 蓋晉未得蜀之前, 置益州刺史於巴東, 撫先已爲刺史, 溫旣克蜀, 撫仍爲益州刺史, 鎭彭模. 曰“在益州三十餘年”者, 史通其鎭巴東․鎭彭模之年, 數之也.하다
秋七月 會稽王昱爲琅邪王注+① 元帝自琅邪入繼大統, 自後太子․母弟得封琅邪王. 元帝永昌元年, 以昱爲琅邪王, 奉恭王祀, 成帝咸和元年, 王生母鄭夫人薨, 王號慕請服, 重徙封會稽王. 是後康帝․哀帝及今帝, 皆自琅邪入繼大統.하다
固讓하고 卒自稱會稽王하다
立皇后庾氏하다
冰之女也
匈奴曹轂, 劉衛辰 叛秦이어늘 擊降之하다
◑ 冬十一月 梁州刺史司馬勳하여 圍成都어늘 大司馬溫 遣江夏相朱序하여 救之하다
爲政暴酷하여 治中, 别駕言語忤意어늘 卽於坐斬之하고 常有據蜀之志호되 惮周撫하여 不敢發이러니
及撫卒 遂擧兵反하여 自號成都王하고 引兵入劍閣하여 圍成都어늘 表序爲征討都護하여 以救之하다
以王彪之爲僕射하다


【綱】 晉나라(東晉) 哀皇帝 興寧 3년이다.
【目】 秦나라(前秦) 符堅 建元 元年이고, 燕나라(前燕) 幽帝 慕容暐 建熙 6년이다.
【綱】 봄 정월에 〈晉나라(東晉)〉 皇后 王氏가 崩하였다.
【綱】 〈匈奴의〉 劉衛辰이 다시 代나라를 배반하자, 代王 拓跋什翼犍이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目】 代王 拓跋什翼犍은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였다.
郞中令 許謙이 비단 두 필을 도둑질하였는데, 이것을 알고도 숨겨주고 左長史 燕鳳에게 이르기를 “내 허겸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겠으니, 卿은 부디 조심하여 이 사실을 누설하지 말라. 만약 허겸이 부끄러워하여 자살하면 이는 내가 재물 때문에 선비를 죽이는 것이다.” 하였다.
탁발십익건은 일찍이 西部의 배반한 자를 토벌할 적에 눈에 流矢를 맞았는데 이윽고 활을 쏜 자를 사로잡으니, 여러 신하들이 그를 칼로 난도질하여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탁발십익건은 말하기를 “저들은 각각 자기 군주를 위하여 싸웠을 뿐이다. 무슨 죄가 있는가.” 하고, 마침내 석방하였다.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綱】 〈晉나라(東晉)〉 大司馬 桓溫이 진영을 姑孰으로 옮기고 아우 桓豁(환활)에게 荆州․揚州 等의 軍事를 감독하게 하였다.
【綱】 3월에 황제(晉 哀帝)가 崩하니,注+① 향년이 25세이다. 琅邪王 司馬奕이 즉위하였다.
【目】 황제가 崩하였는데 후사가 없었다. 皇太后(褚太后)가 詔命을 내려 司馬奕으로 大統을 잇게 하였다.
【綱】 燕나라(前燕)가 洛陽을 함락하니, 〈晉나라(東晉)의〉 將軍 沈勁이 전사하였다.
【目】 燕나라 太宰 慕容恪과 吳王 慕容垂가 함께 洛陽을 공격할 적에 모용각이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卿 등은 항상 내가 적을 공격하지 않음을 염려하였는데, 지금 낙양은 城이 높지만 敵兵이 약하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는 마침내 성을 공격하여 점령해서 沈勁을 사로잡았다.
심경은 정신과 기운이 태연자약하였는데, 모용각이 장차 그를 용서하려 하였으나, 將軍 慕輿虔이 말하기를 “심경이 비록 기이한 선비이나 그 뜻과 태도를 보니, 끝내 남에게 쓰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마침내 그를 죽였다.
【目】 〈燕나라의〉 慕容恪이 城地를 공략하여 崤谷(효곡)과 澠池(면지)에 이르니, 關中이 크게 진동하였다.注+① 崤는 崤谷이고, 澠은 澠池이다.
秦王 符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陝城에 주둔하여 연나라 군대를 방어하려 하였다.注+② ≪漢書≫ 〈地理志〉에 “弘農에 陜縣이 있다.” 하였다.
연나라에서는 慕容筑(모용축)을 金墉에 진주하게 하고 吳王 慕容垂를 魯陽에 진주하게 하였다.注+③ 慕容筑은 燕나라 宗室이다. 筑은 音이 竹이다.
모용각이 鄴城으로 돌아와서 관속들에게 이르기를 “내 지난번 廣固를 평정할 적에 辟閭蔚(벽려울)을 구조하지 못했는데, 이제 낙양을 평정함에 심경을 죽게 하였다. 비록 모두 나의 本意가 아니었으나, 실로 四海에 부끄러움이 있다.” 하였다.
晉나라 조정에서는 심경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서 東陽太守를 추증하였다.
【目】 司馬溫公(司馬光)이 평하였다. “沈勁은 아버지(沈充)의 악행을 부끄러워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바쳐 아버지의 죄를 씻어 凶逆의 집안을 忠義의 가문으로 변화시켰으니, 능히 훌륭한 자식이 되었다고 이를 만하다.”
【目】 慕容恪이 장수가 되었을 적에 위엄을 앞세우지 않고 오로지 은혜와 信義를 사용하여 士卒들을 어루만졌으며, 되도록 큰 요점을 다스리고 세세하고 까다롭게 명령하지 아니하여 軍中의 모든 병사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평상시에는 營中이 풀어져 있어 침범할 수 있을 듯하였으나, 경비가 삼엄하고 치밀하여 敵이 쳐들어왔을 적에 근접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패한 적이 없었다.
【綱】 황제(晉 哀帝)를 安平陵에 장례하였다.
【綱】 여름 4월에 燕나라(前燕)가 陽騖를 太尉로 삼았다.
【目】 陽騖는 네 조정을 차례로 섬기고서 나이가 많고 명망이 높으니,注+① 〈네 조정은〉 慕容廆, 慕容皝, 慕容儁, 慕容暐 네 조정이다. 太宰 慕容恪 이하가 모두 그에게 절하였다.
그러나 양무는 젊었을 때보다 더욱 겸손하고 공손하고 근신하고 후덕하여 자손들을 엄하게 경계하고 단속하니, 비록 〈고관으로서〉 붉은 인끈과 자주색 官服을 입은 자손들이 많았으나 감히 그 법도를 어기거나 범하는 자가 없었다.
【綱】 6월에 〈晉나라(東晉)〉 益州刺史 周撫가 卒하였다.
【目】 周撫는 益州에 있은 지 30여 년에 위엄과 은혜가 매우 많았다. 조령을 내려 그의 아들 周楚에게 주무의 지위를 대신하게 하였다.注+① 晉 穆帝 永和 3년(347)에 桓溫이 蜀 지방(成漢)을 평정하고 周撫를 남겨두어 진무하게 하였는데, 이때 진무한 지 겨우 19년이었다. 晉나라가 촉 지방을 얻기 전에 益州刺史를 巴東에 설치하여 주무가 먼저 이미 刺史가 되었는데, 환온이 촉 지방을 점령한 뒤에 주무가 그대로 익주자사가 되어 彭模에 주둔하였다. 여기에 “익주에 있은 지가 30여 년이다.”라고 말한 것은 史官이 파동에 진주하고 팽모에 진주한 해를 통틀어 계산한 것이다.
【綱】 가을 7월에 〈晉나라(東晉)가〉 會稽王 司馬昱을 琅邪王으로 삼았다.注+① 晉 元帝가 琅邪王으로 있다가 들어와 大統을 이으니, 이후로 황제의 太子와 同母弟만이 낭야왕에 봉해질 수 있었다. 元帝 永昌 元年(322)에 司馬昱을 낭야왕으로 삼고 恭王의 제사를 받들게 했는데, 成帝 咸和 元年(326)에 낭야왕의 生母인 鄭夫人이 薨하자, 낭야왕은 울부짖고 사모하여 정부인의 喪에 중한 服을 입을 것을 청하므로 거듭 옮겨 회계왕에 봉하였다. 이후로 康帝와 哀帝 및 지금의 황제(廢帝)가 모두 낭야왕으로 있다가 들어와 大統을 이었다.
【目】 司馬昱이 琅邪王을 굳이 사양하고 끝내 會稽王이라 칭하였다.
【綱】 〈晉나라(東晉)가〉 皇后 庾氏를 세웠다.
【目】 황후는 庾冰의 딸이다.
【綱】 匈奴 曹轂(조곡)과 劉衛辰이 秦나라(前秦)를 배반하자, 秦나라가 이들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綱】 겨울 11월에 〈晉나라(東晉)〉 梁州刺史 司馬勳이 배반하여 〈益州의〉 成都를 포위하자, 大司馬 桓溫이 江夏相 朱序를 보내어 성도를 구원하게 하였다.
【目】 司馬勳이 정사를 포학하고 가혹하게 하였는데, 治中과 别駕가 그의 뜻에 거슬린 말을 하자, 즉시 앉은 자리에서 그들을 참수하였다. 항상 蜀 지방을 점거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으나, 周撫를 두려워하여 감히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주무가 卒하니,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배반하고서 스스로 成都王이라 칭하고 군대를 이끌고 劍閣으로 쳐들어가 成都를 포위하여 공격하자, 桓溫이 表文을 올려 周序를 征討都護로 삼아 성도를 구원하게 하였다.
【綱】 〈晉나라가〉 王彪之를 僕射로 삼았다.


역주
역주1 皇后王氏崩 : “晉나라 后는 葬禮를 쓰는데, 여기서는 어찌하여 쓰지 않았는가. 이해 봄에 황제가 崩하여 安平陵에 장례하고 인하여 合葬하였기 때문이다.[晉后書葬矣 此則曷爲不書 是春 帝崩 葬安平陵 因以合葬矣]” ≪書法≫
역주2 大司馬溫……監荊揚等州軍事 : “‘移鎭(진영을 옮겼다)’이라고 쓰고 ‘以弟(아우에게)’라고 쓴 것은 〈桓溫이〉 전횡함을 나타낸 말이다.[書移鎭 書以弟 專辭也]” ≪書法≫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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