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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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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寅年(258)
景耀元年이라
魏甘露三年이요 吳景帝孫休永安元年이라
春二月 魏司馬昭 拔壽春하고 殺諸葛誕하다
文欽 敎諸葛誕決圍而出한대 不克復還하니 城中食盡하여 降者 日衆이라
欽欲盡出北方人省食하고 與吳人堅守注+省, 所景切, 減省.하니 誕不聽이라 由是爭恨하여 遂殺欽하니
欽子鴦 踰城自歸於魏어늘 軍吏請誅之한대 司馬昭曰 欽子固應就戮이나 然今以窮來歸하고 且城未拔하니 殺之 是堅城內之心也라하고
乃使將數百騎巡城하고 呼曰 文欽之子 猶不見殺하니 其餘何懼 又表爲將軍하고 賜爵關內侯하니 城中皆喜
昭因進軍克之하고 斬誕夷三族하니 誕麾下數百人 皆拱手爲列하여 不降이어늘
毎斬一人 輒降之호되 卒不變하여 以至於盡하다
吳將于詮曰 大丈夫受命其主하여 以兵救人하여 旣不能克하고 又束手於敵 吾弗取也라하고 乃免冑冒陳而死注+冒, 犯也. 陳, 讀曰陣.하다
昭初圍壽春 王基等 欲急攻之어늘 昭曰 城固衆多하니 攻之必力屈이라 若有外寇 表裏受敵이니 此危道也
今三叛 相聚於孤城之中注+三叛, 謂諸葛誕‧文欽及唐咨也. 咨本魏人, 降吳.하니 天其或者使同就戮이니 吾當以全策縻之
但堅守三面하고 若吳賊 陸道而來 軍糧必少 吾以輕騎 絶其轉輸 可不戰而破也 吳賊破 欽等 必成擒矣라하고
乃命諸軍按甲以守之하여 卒不煩攻而破하다 議者又以淮南仍叛하고 吳兵家在江南하니 宜悉坑之注+仍, 相因也.니라
昭曰 古之用兵 全國爲上이니 戮其元惡而已注+言全其國之人民, 止戮其君, 所謂 吳兵 得亡還이면 適可示中國之大度耳라하고
一無所殺하고 分布三河近郡安處之注+河南, 都也. 河東‧河內皆近京師.하다 昭欲遣諸軍하여 因釁擊吳어늘
王基諫曰 昔 諸葛恪 乘東關之勝하여 以圍新城이라가 衆死太半하고 姜維 因洮西之利하여 輕兵深入이라가 軍覆上邽注+謂段谷之敗也.하니
夫大捷之後 上下輕敵이라 輕敵則慮難不深注+難, 去聲.하니 今賊 新敗於外하고 又內患未弭注+謂孫綝君臣相猜.하니 是修備設慮之時也니이다
昭乃止하다 以基爲征東將軍都督揚州諸軍事하다 鍾會謀畫 居多
昭親待日隆하여 委以腹心之任하니 時人 比之子房이러라
維聞諸葛誕死而還하다
◑秋八月 注+記曰 “凡養老, 五帝憲, 三王又乞言.” 注曰 “憲, 法也, 養之爲法其德行, 三王又從之求善言可施行也.”하다
以王祥爲三老하고 鄭小同爲五更注+小同, 玄之孫也.하다
九月 吳孫綝 廢其主亮하여 爲會稽王하고 冬十月 迎立琅邪王休하니
休以綝爲丞相하고 封兄子皓하여 爲烏程侯하다
孫綝 以其主亮親政 多所難問으로 稱疾不朝하고 使弟據入宿衛하고 恩幹闓 分屯諸營以自固注+恩‧幹‧闓, 綝三弟名.하니
亮惡之하여 陰與全公主將軍劉承으로 謀誅之하니 全后父尙 爲衛將軍이라
亮使尙子紀 語尙嚴整兵馬하라 孤當率宿衛臨橋注+橋, 謂朱雀橋. 綝築第橋南.하리라
且曰 勿令卿母知하라 女人不曉大事하고 且綝姊也 邂逅漏泄이면 誤孤非小리라
紀承詔以告尙하니 尙無遠慮 以語紀母하니 母使人密語綝한대
綝夜襲尙執之하고 殺劉承하고 比明 遂圍宮하니
亮大怒하여 上馬帶鞬執弓欲出注+鞬, 居言切, 戢弓矢器.曰 孤 大皇帝適子 在位已五年이라 誰敢不從者리오 近臣共牽止之하여 不得出하니
綝使光祿勳孟宗으로 告太廟하여 廢亮爲會稽王하고 以其罪班告遠近注+班, 布也. 告者, 宣告也.할새 尙書桓彜 不肯署名이어늘
綝怒殺之하고 遂迎琅邪王休於會稽注+吳建興元年, 休徙丹 旣又徙會稽.하고 遣會稽王亮之國하니 亮時年十六이러라 殺全尙하고 遷全公主於豫章하다
以休未至 欲入居宮中하여 召百官會議하니 皆惶怖唯唯어늘
選曹郞虞汜曰注+汜, 翻之子也. 明公擅廢立之威 誠欲上安宗廟
今迎王未至而欲入宮하니 竊恐衆聽疑惑이라 非所以永終忠孝揚名後世也니이다
不懌而止하다 十月 休至하니 群臣 奉上璽符한대 三讓乃受하고 卽日 御正殿하여 大赦하고 改元하니
綝稱草莽臣하고 詣闕上印綬節銊하여 求避賢路注+草莽, 猶言草茅也.어늘 吳主休 慰諭之하고 以爲丞相荊州牧하다
◑先是 丹陽守李衡 數以事侵休어늘 其妻習氏 諫之不聽하니 休上書得徙會稽러니
至是하여 衡謂妻曰 以不用卿言至此하니 吾欲奔魏하노니 何如
妻曰 逃叛求活이면 何面目見中國人이리오 琅邪素好善慕名이라 方欲自顯於天下하니 終不以私嫌殺君이니
可自詣獄하여 表列前失하여 顯求受罪 如此 當逆見優饒 非但直活而已注+逆, 迎也. 言將優加其官以饒益之.리라
衡從之하니 詔遣還郡하여 加將軍號하고 授以棨戟하다 又封故南陽王和子皓爲烏程侯하다
十二月 吳孫綝 伏誅하다
綝奉牛酒詣休한대 休不受하니 齎詣張布注+綝以布爲吳主所信倚, 故詣之.하여 酒酣 出怨言曰 帝非我不立이어늘 今上禮見拒하니
是與凡臣無異 當復改圖耳注+上, 時掌切.리라 布以告休한대 衘之호되 恐其有變하여 數加賞賜하고
或告綝反이어늘 休執付綝하니 綝殺之하다 由是益懼하여 求出屯武昌이어늘 休許之하고 凡所請求 無一違者러라
將軍魏邈 說休曰 綝居外 必有變하리이다 衛士 又告綝反하니
休將討之하여 密問於張布한대 布曰 左將軍丁奉 雖不能吏書 而計略過人하여 能斷大事라한대 乃召奉問計畫하니
奉曰 丞相兄弟支黨 甚盛하니 不可卒制注+卒, 讀曰猝. 可因臘會有陛兵하여 以誅之注+陛兵, 宿衛之兵夾殿陛者, 所謂陛戟之士.니이다
十二月臘會 綝稱疾이어늘 休強起之한대 不得已而入이어늘
奉布目左右하여 縛而斬之하여 以其首令衆하고 諸同謀者 皆赦之하니 放仗者 五千人注+放, 棄之也. 仗, 兵器也.이라
夷綝三族하고 發孫峻棺하여 取印綬하고 斵而埋之注+古者, 棺槨厚薄皆有度, 斲而薄之以示貶.하고 改葬諸葛恪及胤據等하고 其罹恪等事遠徙者 一切召還하다
有乞爲恪立碑者注+爲, 去聲.어늘 詔曰 盛夏出軍 士卒傷損하여 無尺寸之功하니 不可謂能이요
受託寄之任하여 死於豎子之手하니 不可謂智라하니 遂寢하다
昭烈定漢中 實兵諸圍以禦外敵하여 敵若來攻이면 使不得入케하니 其後 皆承此制러니
及姜維用事 建議以爲호되 諸圍適可禦敵이요 不獲大利
不若斂兵聚穀하고 退守漢樂二城하여 聽敵入平하고 重關頭鎭守以捍之注+聽敵入平, 謂縱敵使入平地也.
敵攻關不克하고 千里運糧 自然疲乏이니 引退之日然後 諸城竝出搏之하면 此殄敵之術也라한대
於是 詔督漢中胡濟却屯漢壽하고 王含守樂城하고 蔣斌守漢城注+斌, 音彬.하다


戊寅年(258)
[] 나라(蜀漢) 後主 景耀 원년이다.
[] 魏主 曹髦 甘露 3년이고, 나라 景帝 孫休 永安 원년이다.
[] 봄 2월에 나라 司馬昭壽春을 함락하고 諸葛誕을 죽였다.
司馬昭가 諸葛誕을 격파하다司馬昭가 諸葛誕을 격파하다
[] 文欽諸葛誕으로 하여금 포위를 뚫고 나가게 하였는데 이기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성안에 군량이 다 떨어져서 항복하는 자들이 날로 많아졌다.
문흠이 북방 출신 군사들을 다 내보내어 양식을 절약하고 나라 사람들과 굳게 지키려고 하니,注+(줄이다)은 所景이니, 줄인다는 뜻이다. 제갈탄이 따르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다투고 원망을 하여 마침내 문흠을 죽였다.
문흠의 아들 文鴦이 성을 넘어서 나라에 귀순하니 軍吏가 문앙을 주살하자고 청하였다. 司馬昭가 말하기를 “문흠의 아들은 진실로 죽여야 하지만 지금 곤궁한 처지로 와서 귀순하고 또 성이 아직 함락되지 않았으니, 문앙을 죽이면 성안 적군의 인심을 굳게 해준다.”라고 하고,
문앙에게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성을 순시하도록 하고 외치게 하기를 “문흠의 아들도 오히려 죽임을 당하지 않았으니 그 나머지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라고 하였다. 또 表文을 올려 將軍으로 삼고 關內侯 작위를 하사하니, 壽春城 안의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사마소는 이를 이용하여 진군하여 승리하고 제갈탄을 참수하고는 그의 삼족을 멸하였다. 제갈탄의 휘하 수백 인이 모두 두 손을 맞잡고 줄을 서서 항복하지 않았는데,
한 사람씩 참수할 때마다 번번이 항복하게 하였으나 끝내 변치 않아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나라 장군 于詮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임금에게 명을 받아 병사를 이끌고 사람들을 구원하러 왔다가 이미 승리하지 못했고 또 적에게 사로잡히는 것을 나는 하지 못하겠다.”라고 하고, 마침내 투구를 벗고 적진에 뛰어들어 죽었다.注+는 저촉한다는 뜻이다. (진을 치다)은 으로 읽는다.
[] 司馬昭가 처음 壽春을 포위했을 때에 王基 등이 급히 공격하려 하였는데 사마소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수춘성이 견고하고 군사들이 많으니 공격하면 반드시 힘이 부칠 것이다. 만일 외부에 적군이 있게 되면 안팎으로 적의 공격을 받게 되니 이는 위험한 방법이다.
지금 반란자 3명이 고립된 성안에 서로 모여 있으니,注+三叛”은 諸葛誕, 文欽, 唐咨를 말한다. 하늘이 혹은 함께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마땅히 완전한 책략으로 그들을 모두 사로잡겠다.
다만 세 방면을 견고하게 지키고 만약 나라 적군들이 육로로 오게 되면 군량이 반드시 적을 것이니 내가 경무장 기병으로 그 수송로를 단절시키면 싸우지 않고도 격파할 수 있다. 나라 적군이 격파되면 文欽 등이 반드시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이에 모든 군대에 명하여 병력을 움직이지 말고 지키라고 하여 마침내 번잡하게 공격하지 않고 격파하였다. 건의하는 자들이 또 淮南 지역이 이어서 반란하고 나라 병사들의 가족들이 江南에 있으니 이들을 마땅히 다 파묻어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注+은 서로 잇는다는 뜻이다.
사마소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에 군사를 운용할 적에는 국가를 온전히 하는 것이 최상이었으니 그 원흉을 죽일 뿐이었다.注+〈“全國爲上 戮其元惡而已”는〉 그 나라의 백성들을 온전하게 해주고 그 임금만 죽이는 데에 그침을 말하니, 이른바 그 임금만 죽이고 그 백성을 위로한다는 것이다. 나라 병사들이 도망하여 돌아가게 되면 바로 우리 中原의 큰 도량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고,
한 사람도 죽이는 것이 없었고 三河 지역의 가까운 에 나누어 안치하게 하였다.注+河南은 도읍이 있는 곳이고, 河東, 河內는 모두 서울에 가깝다. 사마소가 여러 군대를 보내어 틈을 타서 나라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대개 크게 승리한 뒤에는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적군을 경시합니다. 적군을 경시하면 환난을 우려함이 깊지 못합니다.注+(환난)은 去聲이다. 지금 적군이 외부에서 막 패하였고 또다시 내부의 우환이 그치지 않으니注+〈“內患未弭”는〉 孫綝이 임금과 신하 사이에 서로 의심함을 말한다. 이는 저들이 대비를 강구하고 계획을 숙고할 때입니다.”라고 하니,
사마소는 마침내 정지하였다. 왕기를 征東將軍 都督揚州諸軍事로 삼았다. 이때에 鍾會가 계책을 낸 것이 많았다.
사마소가 친하게 대하기를 날로 융숭하게 하여 심복의 임무를 맡기니 당시 사람들이 子房(張良)에 비유하였다.
[] 姜維가 병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 姜維諸葛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 여름 5월에 나라 司馬昭가 스스로 相國이 되고 晉公을 봉하고 九錫을 더하였는데, 다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가을 8월에 魏主 曹髦太學에서 養老禮를 거행하고 〈에게〉 좋은 말을 해주기를 청하였다.注+禮記≫ 〈內則〉에 말하기를 “무릇 養老禮에서 五帝는 그들의 덕행을 법으로 삼았고[], 三王은 또다시 그들이 좋은 말을 해주기를 청하였다.”라고 하고, 〈鄭玄의〉 에 “은 본받는 것이니, 〈五帝가〉 養老禮를 시행한 것은 노인의 덕행을 본받기 위함이고, 三王이 또다시 이를 따라 시행할 만한 좋은 말을 청하였다.”라고 하였다.
[] 王祥三老로 삼고 鄭小同五更으로 삼았다.注+小同鄭玄의 손자이다.
[] 9월에 나라 孫綝吳主 孫亮을 폐위시켜 會稽王으로 삼고, 겨울 10월에 琅邪王 孫休를 맞이하여 황제로 세웠다.
孫綝이 吳主 孫亮을 폐위시키다孫綝이 吳主 孫亮을 폐위시키다
손휴는 손침을 丞相으로 삼고 형의 아들 孫皓를 봉하여 烏程侯로 삼았다.
[] 孫綝이 그의 임금 孫亮親政을 할 적에 힐문한 것이 많은 것으로 인해 병을 핑계하여 조회를 드리지 않고 아우 孫據를 시켜 궁중에 들어가 宿衛하게 하고 孫恩, 孫幹, 孫闓(손개)로 여러 군영에 나누어 주둔하게 하여 자신을 튼튼하게 하였다.注+孫恩, 孫幹, 孫闓孫綝의 세 아우 이름이다.
손량은 손침을 미워하여 은밀하게 全公主將軍 劉承과 함께 손침을 주살할 것을 모의하였다. 全皇后의 아버지 全尙衛將軍이었다.
손량은 전상의 아들 全紀로 하여금 전상에게 말하게 하기를 “兵馬를 엄정하게 정비하라. 내가 마땅히 宿衛 병력을 이끌고 朱雀橋로 가겠다.”注+朱雀橋를 말하니, 孫綝은 집을 주작교 남쪽에 설치하였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전기)의 어머니에게 알리지 말라. 여인은 大事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 손침의 손윗누이이기도 하다. 만나서 누설하게 되면 나를 잘못되게 하는 것이 작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전기가 조칙을 받들어 전상에게 고하니, 전상은 심모원려함이 없어서 그것을 전기의 어머니에게 고하니, 그녀는 사람을 보내어 몰래 손침에게 고하였다.
손침은 밤중에 전상을 습격하여 잡고 유승을 죽이고, 날이 밝을 즈음에 마침내 궁궐을 포위하였다.
손량은 크게 노하여 말에 올라 동개를 차고 활을 잡아 나가려고 하면서 말하기를注+(동개)은 居言이니, 활과 화살을 넣는 기구이다. “나는 大皇帝(孫權)의 適子로서 황위에 있은 지가 이미 5년이다. 누가 감히 따르지 않을 자가 있느냐.”라고 하였으나, 근신들이 함께 붙잡아 저지하여 나갈 수 없었다.
손침은 光祿勳 孟宗을 시켜서 太廟에 고하게 하여 손량을 폐위하여 會稽王으로 삼고 그 죄를 원근에 포고할 적에注+은 펼친다는 뜻이다. 는 선고한다는 뜻이다. 尙書 桓彜(환이)가 署名을 하려고 하지 않자,
손침이 노하여 환이를 죽이고는 마침내 琅邪王 孫休會稽에서 맞이하고,注+나라는 建興 원년(252)에 孫休丹陽으로 옮겼다가 이윽고 또 會稽로 옮겼다. 회계왕 손량을 보내어 封國으로 가게 하니, 손량은 이때 나이가 16세였다. 전상을 죽이고 전공주를 豫章으로 옮겼다.
[] 孫綝孫休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궁중에 들어가 머물면서 백관을 불러 회의를 하려고 하니, 모두 떨면서 ‘네, 네.’ 하였는데,
選曹郞 虞汜(우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虞汜虞翻의 아들이다.明公께서 황제를 폐하고 세우는 위엄을 전적으로 행하는 것은 진실로 위로 宗廟를 편안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琅邪王을 맞이함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궁중에 들어가려 하시니, 여러 사람이 듣고 의혹을 품을까 염려됩니다. 忠孝를 오래 보전하며 명예를 후세에 드날리는 방법이 아닙니다.”
손침이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쳤다. 10월에 손휴가 도착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璽符(옥새)를 바쳐 올렸는데 손휴는 세 번 사양한 뒤에야 받고 그날로 正殿에 나아가 大赦免令을 내리고 연호를 바꾸었다.
손침은 草莽의 신하라고 일컫고 궁궐에 나아가 인장, 인끈과 부절, 斧銊을 올리고서 현명한 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청하자注+草莽”은 草茅(草野)라는 말과 같다. 吳主 손휴가 그를 위로하여 타이르고 丞相 荊州牧으로 삼았다.
[] 이보다 앞서 丹陽太守 李衡이 자주 일로써 孫休를 침해하였는데, 그 아내 習氏가 간언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손휴가 글을 올려 會稽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형이 그의 아내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말을 따르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나라로 도주하려 하니, 어떠한가.”
아내가 말하였다. “배반하고 도망가서 살기를 구하면 무슨 면목으로 中原 사람들을 보겠습니까. 琅邪王께서는 평소 선행을 좋아하고 명예를 흠모하였습니다. 장차 자신을 천하에 드러내려고 하시니 결국 사사로운 혐의로 그대를 죽이지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 감옥으로 가셔서 表文을 올려 과거의 잘못을 열거하여 공개적으로 죄를 받겠다고 청하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당연히 우대를 받을 것이니 살아나는 것뿐만이 아닐 것입니다.”注+은 맞이한다는 뜻이니, 〈“當逆見優饒”는〉 장차 그 관직을 더하여 우대해주는 것을 말한다.
이형이 그 말을 따르니 조칙을 내려서 으로 되돌아가게 하여 將軍 호칭을 더해주고 棨戟(고급 지방 관원의 의장용 창)을 주었다. 또 南陽王 孫和의 아들 孫皓를 봉하여 烏程侯로 삼았다.
[] 12월에 나라 孫綝이 주살되었다.
[] 孫綝이 소고기와 술을 받들고 孫休에게 갔는데 손휴가 받지 않았다. 이를 가지고 張布에게 가서注+孫綝張布吳主에게 신임을 받고 의지하는 바가 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간 것이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적에 원망하는 말을 하기를 “황제께서는 내가 아니면 즉위하지 못하셨는데, 지금 예물을 올려 거절을 당했다.
이는 일반 신하로 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마땅히 다시 바꾸기를 도모해야 하겠다.”注+(올리다)은 時掌이다.라고 하였다. 장포가 이를 손휴에게 고하였는데, 손휴가 앙심을 품었지만 변란이 있을까 우려하여 자주 포상을 더 내렸다.
어떤 이가 손침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고하자, 손휴가 그를 잡아다 손침에게 넘겼는데 손침이 그를 죽였다. 이로 말미암아 손침은 더욱 두려워하여 武昌으로 나가 주둔해 있겠다고 청하니, 손휴는 허락하고 모든 요청을 하나도 어김없이 해주었다.
將軍 魏邈이 손휴를 설득하기를 “손침이 지방에 있게 되면 반드시 변란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衛士가 또다시 손침이 반란하였다고 고하였다.
손휴가 토벌하려 하여 비밀리에 장포에게 묻자, 장포가 말하기를 “左將軍 丁奉이 비록 관부의 문서 작성은 잘하지 못하지만 계략이 남보다 뛰어나서 큰일을 결단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정봉을 불러 계획을 물었다.
정봉이 말하기를 “丞相(손침)의 형제와 파당들이 매우 번성하니, 갑자기 제압할 수 없습니다.注+(갑자기)은 로 읽는다. 臘會(臘祭日의 조정 모임)를 이용하여 陛兵을 써서 주살할 수 있습니다.”注+陛兵”은 殿陛(전각 계단)를 끼고 宿衛하는 병사이니, 이른바 “陛戟之士(전각 계단 곁에 을 잡고 서 있는 병사)”이다.라고 하였다.
[] 12월 臘會孫綝이 병을 핑계 대었는데, 孫休가 억지로 권하여 나오게 하자 할 수 없이 조정으로 들어왔다.
丁奉張布左右 사람들에게 눈짓을 하여 손침을 결박하고 참수하게 하여 그 머리를 들고서 대중들에게 명령하고 함께 도모한 자들을 다 사면하니, 병기를 내려놓는 자가 5천 명이었다.注+은 버린다는 뜻이다. 兵器이다.
손침의 삼족을 멸하고 孫峻(손침의 종형)의 관을 파내어 印綬를 꺼내고 관을 얇게 깎고서 파묻고注+옛날에 의 두께는 모두 법도가 있었는데, 지금 깎아 얇게 하여 강등함을 보인 것이다. 諸葛恪滕胤呂據 등을 개장하고 제갈각 등의 사건에 걸려들어 멀리 귀양 간 사람들을 일체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제갈각을 위하여 비석을 세우자고 청하는 이가 있었는데,注+(위하다)는 去聲이다. 조칙을 내려 말하기를 “한창 여름에 군대를 출동했을 적에 사졸을 손상하여 조금의 공도 없었으니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어린 임금을 보필하는 중임을 받아 소인배의 손에 죽었으니 지혜롭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하니, 마침내 중지되었다.
[] 詔令을 내려 漢中의 군대는 漢壽에 주둔하고 漢城樂城 두 성을 지키게 하였다.
[] 예전에 昭烈帝(劉備)가 漢中을 평정했을 때 외변을 둘러싼 진영들에 병력을 채워서 외적을 방어하여 적군이 만약 공격해오면 들어올 수 없게 하였다. 그 뒤에 모두 이 규칙을 이어받았다.
姜維가 권력을 행사하자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외변을 둘러싼 진영들은 다만 적을 방어할 수 있을 뿐이고 큰 승리를 거두지는 못합니다.
병력을 거두어 곡식을 모으고 물러나 漢城樂城 두 성을 지켜서 적군이 평지에 들어오도록 방치하고 중요한 관문을 지켜서 막는 것만 못합니다.注+聽敵入平”은 적군을 방치하여 평지에 들어오도록 한 것을 말한다.
적군은 관문을 공격하여도 이기지 못할 것이고, 천릿길에 군량을 운송하는 데 자연히 피곤해질 것입니다. 적병이 후퇴한 뒤에 여러 성에서 아울러 출동하여 공격하면 이는 적군을 섬멸하는 방법입니다.”
이에 조칙을 내려 督漢中 胡濟에게 물러나 漢壽에 주둔하게 하고, 王含에게 樂城을 지키게 하고, 蔣斌(장빈)에게 漢城을 지키게 하였다.注+은 음이 이다.


역주
역주1 당자는……항복하였다 : 三國時代 魏 文帝 黃初 6년(225)에 利城郡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군이 唐咨를 主將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魏나라 군사에게 격파되었다. 당자는 吳나라로 도주하여 관직이 左將軍에 이르고 諸侯에 봉해졌다. 뒤에 諸葛誕을 도와 魏나라를 막다가 군사가 패하여 포로가 되자 魏나라에서는 당자를 安遠將軍으로 삼았다.
역주2 옛날에……패하였습니다 : 諸葛恪이 新城에서 패한 일은 본서 99쪽에 보이고 姜維가 段谷에서 패한 일은 본서 131쪽에 보인다.
역주3 誅其君而弔其民也 : ≪孟子≫ 〈梁惠王 下〉에 보인다.
역주4 姜維 引兵還 : “돌아왔다고 기록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무란 것이다. 어찌하여 나무란 것인가. 魏나라를 정벌한다고 나갔다가 諸葛誕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으니, 이 군대는 다만 남의 위태로운 상황을 틈탔을 뿐이므로, 기록하여 나무란 것이다.[書還 何 譏也 何譏 以伐魏出 聞殺諸葛而還 則斯師也 徒乘人之危而已矣 故書譏之]” ≪書法≫
역주5 魏司馬昭……復辭不受 : “司馬懿는 일찍이 九錫을 사양했을 때 다만 ‘不受(받지 않다)’라고 기록했는데, 여기에서 ‘復(다시)’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司馬昭 자신이 구석을 더하고 다시 자신이 사양했으니, 속임이 너무 심한 것이다. 위에서 ‘自爲’라고 기록하고 아래에서 ‘復辭’라고 기록하고 뒤에 ‘始受(처음 받았다)’라고 기록하였으니, 사마소의 마음을 깊게 誅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로부터는 사마소가 다시 세 번 命을 받고 세 번 사양한 것을 모두 삭제하여 기록하지 않았다. ≪資治通鑑綱目≫에 九錫을 기록한 것이 14번인데, 자신이 행하고 다시 사양했다가 비로소 받은 것을 기록한 것이 2번이니(司馬昭와 劉裕) 晉나라와 宋나라 초기에 똑같은 전철을 밟았다.[懿嘗辭九錫矣 止書不受 此其書復 何 昭自加之 復自辭之 詐已甚矣 上書自爲 下書復辭 後書始受 所以深誅其心也 故自是昭復三命三讓 皆削之不書 綱目書九錫十四 書自爲復辭始受者二(司馬昭劉裕) 晉宋之初 一轍也]” ≪書法≫ ‘始受’는 본서 189쪽 ‘魏司馬昭 始稱相國晉公 受九錫’이라고 한 것을 가리킨 것이다.
“세태의 변화가 나날이 나빠지고 간사한 거짓이 날로 커져 曹操와 曹丕가 漢나라를 찬탈하고 힘써 공허한 말로 세상을 미혹시키더니, 司馬氏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지금 司馬昭는 스스로 相國이 되고 晉公에 봉해지고 九錫을 더하고는 또다시 사양하여 받지 않았으니, 과연 어떠한 마음인가. 亂臣賊子가 글로 천하 사람을 속이려 하였는데, ≪資治通鑑綱目≫에서 그 간사함을 모두 드러내어 올바른 모습으로 그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러한 뒤에야 손발이 실추되어 그 속마음을 보는 것처럼 되었다.[世變日下 姦僞日勝 自操丕簒漢 務爲虛詞以惑世 至司馬氏 又益甚之 今昭旣自爲相國封晉公加九錫矣 又復辭而不受 果何意哉 亂臣賊子 將以文欺天下 綱目盡發其姦 正色書之 然後手足失墜 如見其肺肝矣]” ≪發明≫
역주6 三老와 五更 : ≪禮記≫ 〈文王世子〉에 “三老와 五更의 자리를 설치하였다.[設三老五更]”라고 하였는데 그 鄭玄 註에 “삼로와 오경은 각각 한 사람씩인데, 모두 늙도록 일을 하고 벼슬에서 물러난 사람들이다. 천자가 父兄처럼 봉양하여 천하에 효도와 우애를 본보기로 보인 것이다.[三老五更 各一人也 皆年老更事致仕者也 天子以父母養之 示天下之孝弟也]”라고 하였다.
역주7 魏主髦 養老乞言於太學 : “養老禮를 하여 좋은 말을 해주기를 청하는 것은 성대한 예절이다. 曹髦가 이를 시행하였으나 또한 난리를 구제하지는 못하였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養老를 기록한 것이 네 번인데(明帝 永平 2년(59), 이해(258), 齊나라 壬申年(492) 魏主 拓跋宏, 陳나라 癸未年(563) 周主 宇文邕), 오직 조모는 아름답게 여긴 말이 아니다.[養老乞言 盛典也 髦能行之 然亦無救於亂矣 終綱目 書養老四(明帝永平二年 是年 齊壬申年魏主宏 陳癸未年周主邕) 惟髦非美辭]” ≪書法≫
역주8 (楊)[陽] : 저본에는 ‘楊’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陽’으로 바로잡았다.
역주9 詔漢中兵屯漢壽 守漢樂二城 : “姜維의 잘못된 계책은 蜀漢이 망한 원인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기록한 것이다.[維之失計 漢所以亡者也 故特書之]” ≪書法≫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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