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綱】 한漢나라 효환황제 연희孝桓皇帝 延熹 7년이다. 봄 2월에 항향후邟鄕侯(강향후) 황경黃瓊이 졸卒하였다.注+항邟은 음音이 강亢이니, 항향邟鄕은 성城의 이름으로 양적현陽翟縣에 있다. 뒤에 항현邟縣으로 이름을 고쳐 영천군潁川郡에 소속시켰다.
目
【목目】 황경黃瓊이 죽자 시호를 충忠이라 하였다. 사방의 명사名士 중에 그의 장례에 모인 자가 6, 7천 명이었다.
처음에, 황경이 집에서 생도들을 가르칠 적에 서치徐穉가 그에게 배우면서 대의大義를 물었는데, 황경의 신분이 귀해지자, 서치는 그와의 왕래를 끊고 다시는 사귀지 않았다.
서치가 이때에 이르러 가서 조문하고 술잔을 올리고는 슬피 곡哭하고 떠나가니,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여러 명사名士들이 말하기를 “반드시 서유자徐孺子일 것이다.”注+유자孺子는 서치徐穉의 자字이다. 하였다.
目
【목目】 이에 말을 잘하는 자인 진류陳留 사람 모용茅容을 뽑아서 경무장한 기병으로 쫓아가게 하였다. 모용이 서치徐穉를 위해 술을 받아주고 고기를 사주니, 서치가 그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注+위爲(위하다)는 모두 거성去聲이니, 아래 ‘이위而爲’와 ‘욕위欲爲’, ‘위제爲制’, ‘위진爲陳’의 위爲도 똑같다. 음식飮食은 본음대로 읽는다.
모용이 국가의 일을 묻자 서치는 대답하지 않았고, 다시 농사일을 묻자 서치가 그제야 대답하였다. 모용이 돌아와서 이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자,
하였다. 그러나 태원太原 사람 곽태郭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유자孺子의 사람됨은 청렴하고 고결하여
굶주려도 그에게 밥을 먹게 할 수 없고 추워도 그에게 옷을 입게 할 수가 없는데注+사食(밥)는 사飼로 읽으니 아래 ‘식모食母’의 사食도 같다. 의衣(입히다)는 거성去聲이다., 계위季偉를 위해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으니, 이는 이미 계위의 어짊을 알았기 때문이다.注+계위季偉는 모용茅容의 자字이다.
【목目】 곽태郭泰는 박학博學하여 담론談論을 잘하였다. 처음 낙양雒陽에서 유학遊學할 적에 당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는데, 진류陳留 사람 부융符融이 한 번 보고는 감탄하여 기이하게 여기고 인하여 하남윤 이응河南尹 李膺에게 소개하니, 이응이 그와 더불어 벗이 되었다.注+부符는 성姓이다. 옛날 주인에게는 돕는 빈儐이 있고, 객客에게는 돕는 개介가 있었다. 개介는 인함이니, 남의 도움으로 서로 접견接見함을 말한다.
곽태가 뒤에 향리鄕里로 돌아갈 적에 여러 선비들이 황하黃河 가까지 전송하였는데 수레가 수천 대였다. 이응은 오직 곽태와 한 배를 타고 건너갔다.注+낙양雒陽에서 태원太原으로 돌아가려면 황하를 건너 서북쪽으로 가야 한다.
目
【목目】 곽태郭泰는 성품이 사람을 잘 알아보아서 선비들을 권장하여 가르치기를 좋아하였다.注+장獎은 권함이다.모용茅容은 40세가 넘어 들에서 밭을 갈다가 여러 사람들과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할 적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두 다리를 뻗고 걸터앉았는데, 모용은 홀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注+이夷는 평평함이다. 거踞는 걸터앉음이다. “위좌危坐”는 옷깃을 반듯하게 하고 앞으로 바싹 다가가 앉음(무릎 꿇음)을 이른다.
곽태가 이 모습을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서 인하여 그의 집에 우숙寓宿할 것을 청하였다.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아 어머니에게 올려 드시게 하고 나머지 반을 찬장에 두고는, 자신은 거친 채소를 가지고 손님과 함께 밥을 먹었다.注+기庋는 거기擧綺의 절切이니, 판자로 각閣(찬장)을 만들어 물건을 보관하는 것이다. 〈“여반기치餘半庋置”는〉 남은 반 마리의 닭을 찬장에 둠을 이른다. 초草는 거칢이다. 반飯은 먹음이다.
곽태가 말하기를 “그대는 다른 사람보다 크게 어질다.注+‘현재賢哉’라고 말하고 또 ‘원의遠矣’라고 말했으니, 보통 사람보다 크게 어짊을 말한 것이다. 나 곽림종郭林宗은 오히려 어버이에게 드릴
을 줄여서 손님과 나그네에게 대접하는데, 그대는 이와 같이 하니, 바로 나의 벗이다.”注+임종林宗은 곽태郭泰의 자字이다. “삼생지구三牲之具”는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한 음식(성찬)을 이른다. 하고는 일어나서 그와 마주하여 읍하고 학문에 종사할 것을 권하였다.
茅容
目
【목目】 거록鉅鹿 사람 맹민孟敏이 시루를 메고 가다가 땅에 떨어뜨렸는데 돌아보지 않고 가니注+하荷는 짊어짐이다. 증甑(시루)은 자잉子孕의 절切이다., 곽태郭泰가 보고 물었다. 맹민은 대답하기를 “시루가 이미 깨졌습니다. 돌아본다고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하니, 곽태는 그가 결단력이 있다고 여겨 그에게도 경사京師에서 유학遊學할 것을 권하였다.
目
【목目】 진류陳留 사람 신도반申屠蟠(신도반)은 옻칠하는 공인이었고, 언릉鄢陵 사람 유승庾乘(유승)은 문을 지키는 군사였는데注+반蟠은 박관薄官의 절切이다. 언릉현鄢陵縣은 영천군潁川郡에 속屬하였다. 승乘은 석증石證의 절切이다. “문사門士”는 바로 문을 지키는 병사이다., 곽태郭泰가 그들을 기이하게 여겼는바, 뒤에 모두 명사名士가 되었다.
그 나머지는 혹 가축을 도살하거나 술을 팔거나 군대의 졸병 출신이었으나, 곽태의 장려로 인하여 명성을 이룬 자가 매우 많았다.
혹자가 범방范滂에게 묻기를 “곽림종郭林宗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니, 범방이 대답하기를 “은둔하면서도 어버이를 떠나지 않고 바르면서도 세속을 끊지 않아서, 천자天子가 신하로 삼을 수 없고 제후諸侯가 벗으로 삼을 수 없으니, 나는 그 나머지는 알지 못한다.”注+“은불위친隱不違親”은 개지추介之推(개자추介子推)의 무리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24년에 진 문공晉 文公이 자기를 따라 망명했던 자들에게 상을 줄 적에, 개자추가 녹봉祿俸을 말하지 않았고 녹봉이 또한 그에게 미치지 않았다.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군주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말은 몸의 문채입니다. 이 몸이 장차 은둔하려 하는데, 문채를 내는 것이 어찌 필요하겠습니까. 이는 이름이 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내 너와 함께 은둔하겠다.” 하고는 마침내 은둔하다가 죽었다. 주註에 말하였다.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은둔하여 죽음에 이르러도 나오지 않은 것은, 이른바 어버이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부절속貞不絶俗”은 유하혜柳下惠의 무리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유유由由(유유悠悠)하게 그들과 함께 있어도 스스로 바름을 잃지 않아서 〈떠나가려 하다가도〉 남이 잡아당겨서 떠나가지 못하게 하면 떠나가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르면서도 세속을 끊지 않은 일이다. 하였다.
目
【목目】 곽태郭泰는 도道가 있는 사람으로 천거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니, 혹자가 출사出仕할 것을 권하였다. 곽태가 말하기를 “내 밤에 하늘의 상象(천문)을 보고 낮에 사람의 일을 살펴보니, 하늘이 폐기廢棄하는 바는 지탱할 수가 없다. 내 장차 한가로이 노닐면서 해를 마칠 뿐이다.”注+지支(지탱하다)는 지持와 같다.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경사京師를 오가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유도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서치徐穉가 편지로 경계하기를 “큰 나무가 장차 쓰러지려 할 때에는 끈 하나로 동여맬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 세상을 연연하여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습니까.”注+전顚은 넘어짐이고, 유維는 동여맴이다. 〈“대목장전 비일승소유大木將顚 非一繩所維”는〉 세상이 장차 말세가 되어서 한 사람이 능히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비유한 것이다. 서서栖栖(연연하다)는 의의依依와 같다. 하였다.
곽태가 감동하여 깨닫고 말하기를 “삼가 이 말에 절하여 사표師表로 삼겠다.” 하였다.
目
【목目】 제음濟陰 사람 황윤黃允은 준걸스러운 재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는데注+준雋은 자전子悛의 절切이니, 지혜가 1,000명을 뛰어넘는 것을 준雋이라 한다., 곽태郭泰가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높은 재주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니 충분히 큰 그릇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마땅히 스스로 몸을 바르게 지켜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장차 잃게 될 것이다.” 하였다.
뒤에 사도 원외司徒 袁隗(원외)가 종녀從女(조카딸)를 위하여 혼처를 구하고자 하였는데注+원외袁隗는 원안袁安의 증손曾孫이다. 종從(혈통은 같으나 직계直系가 다른 친족)은 재용才用의 절切이다., 황윤을 보고 감탄하기를 “이와 같은 사위를 얻으면 충분하다.” 하였다.
황윤이 이 말을 듣고 자기 아내를 내쳐 보냈는데注+황윤黃允의 처妻는 하후씨夏侯氏였는데, 황윤이 아내를 내치고 원씨袁氏 집안의 사위가 되고자 한 것이다., 아내가 청하여 종친宗親들을 크게 모아놓고는 황윤의 숨겨진 악행을 열거하고 떠나갔다. 황윤은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 버려져 등용되지 못하였다.注+삭數(하나하나 열거하다)는 상성上聲이다. 특慝은 악惡이다.
이에 공경公卿과 대부大夫가 문생門生을 보내어 문병을 하였고, 낭郞의 관리가 그 문 앞에 뒤섞여 앉아 있었다. 또 삼공三公이 선비를 불러 관직을 제수할 때마다 번번이 이들을 방문하여 자문을 구하였다.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낭郞의 관리가 그의 문 앞에 뒤섞여 앉아 있어도 그들을 만날 수가 없었으며, 삼공三公이 선비를 불러 벽소辟召할 때마다 번번이 이들을 방문하여 자문을 구해서 이들이 포폄하는 말을 따라 인정해주기도 하고 인정해주지 않기도 했다.” 하였다.
부융符融이 이응李膺에게 이르기를 “이들 두 사람은 조행操行과 공업功業이 알려진 것이 없는데도 호걸豪傑로 자처하여, 마침내 공경公卿으로 하여금 문병하게 하고 왕의 신하로 하여금 문에 앉아있게 한다.注+항行(행실)은 거성去聲이니, 아래 ‘지행至行’의 항行도 같다.
나는 이들이 작은 도道로 의義를 파하고 헛된 명성이 실제와 어긋날까 두려우니, 특별히 살피시오.” 하니, 이응이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뒤에 두 사람 모두 죄罪로 버려져 등용되지 못하였다.
目
【목目】 진류陳留 사람 구향仇香이 지극한 행실(효행)이 있으나 순수하고 침묵하니, 향당鄕黨에 그를 알아주는 자가 없었다. 40세에 포정蒲亭의 장長이 되어注+구仇는 성姓이다. 포정蒲亭은 진류군 고성현陳留郡 考城縣에 있다. 백성들에게 생업生業을 권장하고, 백성들을 위하여 과령科令(법령)을 만들고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취학就學하게 하였으며 곤궁한 자들을 구휼하니,
1년 만에 크게 교화가 되었다. 백성 중에 진원陳元이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구향에게 찾아와서 진원의 불효를 고발하였다.
구향이 놀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근일近日 진원의 집을 방문했을 적에, 거처하는 집이 정돈되었고 제때에 밭을 갈고 김을 매었으니,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요 마땅히 교화敎化가 지극하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어머니가 과부로 절개를 지키면서 어린 아들을 기르느라 고생하며 늙으셨는데, 어찌 하루아침의 분노로 여러 해의 수고를 버린단 말입니까.
또 어머니가 남편이 남겨둔 어린 고아를 제대로 길러서 성취시키지 못했으니, 만약 죽은 남편이 이것을 안다면 백세百歲의 뒤에 마땅히 어떻게 죽은 남편을 만나겠습니까.” 어머니가 이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일어났다.
구향이 마침내 직접 진원의 집에 찾아가서 진원을 위하여 인륜人倫을 말해주고 화복禍福으로 타이르니, 진원이 감동하고 깨달아서 끝내 효자孝子가 되었다.
目
【목目】 고성현령 왕환考城縣令 王奐이 구향仇香을 주부主簿로 임용하고, 그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포정蒲亭에 있을 적에 진원陳元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고 교화시켰다 하니, 매와 새매의 뜻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注+≪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에 “군주에게 무례無禮한 자를 보면 주벌하기를 매와 새매가 새와 참새를 쫓듯이 한다.” 하였다. 하였다.
구향이 말하기를 “매와 새매가 난새와 봉황만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왕환이 말하기를 “탱자나무와 가시나무는 난새와 봉황이 앉을 곳이 아니요, 100리는 대현大賢이 갈 길이 아니다.”注+지枳(탱자나무)는 장씨掌氏의 절切이니, 나무가 귤나무와 유사하다. 극棘은 작은 대추나무로 총생叢生한다. 이때 왕환王奐이 현령縣令이었으므로 자신을
라 칭하였다. 하고는, 마침내 한 달 봉급을 구향에게 주어서 태학太學에 들어가게 하였다.注+봉奉(봉급)은 봉俸으로 읽는다.
目
【목目】 구향仇香은 부융符融과 집이 나란히 있었는데, 부융은 손님들이 방에 가득하였으나 구향은 항상 자신의 몸가짐을 지켰다.注+“비우比宇”는 집이 나란히 이어져 있는 것이다. 부융이 그에게 이르기를 “지금 영웅이 사방에서 모이니, 뜻 있는 선비와 교제하여 긴밀한 관계를 맺을 시기입니다.” 하자,
구향이 정색하며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태학太學을 설치한 것이 어찌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놀고 이야기하게 하려는 것이겠습니까.” 하고는, 〈두 손을 모아〉 높이 읍하고 떠나갔다.
부융이 이 사실을 곽태郭泰에게 말하자, 곽태가 부융의 소개로 구향의 방房에 찾아가서 그를 만나보고는, 감탄하고 일어나 상床 아래에서 절하며 말하기를 “군君은 나의 스승이지, 나의 벗이 아닙니다.” 하였다.
구향은 비록 편안히 거처할 때에도 반드시 의복을 정제整齊하였고, 처자妻子는 그를 섬기기를 엄군嚴君(아버지)과 같이 하였다.注+“연거宴居”는 한가閑暇하여 일이 없는 때이다. 처자에게 잘못이 있으면 관冠을 벗고 자책하니,
처자는 뜰에서 사죄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생각하다가 구향이 관冠을 써야 비로소 당堂에 올랐는데, 끝내 기뻐하고 노여워하여 목소리와 얼굴빛이 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구향은 조정과 경대부卿大夫들의 징벽徵辟에 응하지 않고 집에서 별세하였다.
【강綱】 형주자사 도상荊州刺史 度尙이 계양桂陽의 애현艾縣에 있는 적賊을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目
【목目】 도상度尙이 여러 만이蠻夷들을 모집하여 애현艾縣의 도적을 공격해서 대파하니, 항복한 자가 수만 명이었다.注+도度는 성姓이다,
예전부터 있던 계양桂陽의 도적인 복양卜陽과 반홍潘鴻 등이 도망하여 깊은 산으로 들어가자注+“숙적宿賊”은 오랫동안 도적질을 한 자를 이른다., 도상이 그들의 주둔지 세 곳을 격파하여 진귀한 보물을 많이 얻었다.
도상은 끝까지 이들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사졸士卒들은 교만하고 부유하여 싸울 뜻이 없었다. 도상은 마침내 선언하기를 “병력이 적어서 전진할 수가 없다. 마땅히 여러 군郡에서 징발한 군대가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힘을 합하여 공격해야 한다.” 하고는,
군중軍中에 거듭 명령하여 마음대로 활을 쏘고 사냥하게 하니注+신申은 거듭함이니, “신령申令”은 이미 명령을 내리고 거듭 말한 것이다., 병사들이 기뻐하여 모두 사냥하러 나갔다. 도상이 이에 은밀히 사람을 시켜서 자신의 진영에 불을 지르니, 사냥을 갔던 자들이 돌아와서 〈창고와 막사가 불에 탄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도상은 한 사람 한 사람 위로하고 자신이 잘못하여 불을 냈다고 깊이 자책하고는注+〈“심자구책深自咎責”은〉 불이 난 것을 스스로 허물하고 책망한 것이다., 이어서 말하기를 “복양 등의 재화와 보물은 충분히 그대들을 몇 대 동안 부유하게 할 수 있는데, 그대들이 다만 힘을 합하여 싸우지 않을 뿐이다. 이번에 화재로 잃은 것이 그리 많지 않으니, 어찌 개의할 것이 있는가.” 하니,
군사들이 모두 분발하여 기세가 등등하였다. 도상은 명령을 내려서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새벽밥을 먹고는, 다음 날 아침 곧바로 적의 주둔지로 달려갔다.
복양 등은 스스로 성벽이 깊고 견고하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대비책을 세우지 않고 있었는데, 관병官兵이 예기銳氣를 타고서 마침내 격파하여 평정하였다. 도상이 출병出兵한 지 3년 만에 여러 도적이 모두 평정되니, 도상에게 우향후右鄕侯를 봉하였다.
綱
【강綱】 겨울 10월에 황제가 장릉章陵에 행차하였다.
目
【목目】 이때 공경公卿과 귀척貴戚들의 수레와 기병騎兵이 만萬으로 헤아려졌고, 백성들에게 경비와 노역을 징수하고 요구한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호가종사護駕從事인 호등胡騰이 아뢰기를注+호가종사護駕從事는 형주자사荊州刺史가 거가車駕를 호위하라고 보낸 자이다. “천자天子는 밖이 없어서 승여乘輿가 행차하는 곳이 바로 경사京師가 되니注+≪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왕자王者는 밖이 없다.” 하였다., 신臣은 원컨대 형주자사荊州刺史를 사례교위司隷校尉에 견주어주소서.
그리하면 신臣이 스스로 도관종사都官從事와 똑같이 처리하겠습니다.” 하니,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이로부터 〈호종扈從하는 신하들이〉 숙연肅然해져서 백성들을 소요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注+도관종사都官從事는 백관百官 중에 법을 범한 자를 살피고 탄핵하는 일을 주관한다. 형주자사荊州刺史는 자기 부내部內의 군현郡縣을 살피고 탄핵할 수 있으나 호종扈從하는 신하를 살피고 탄핵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사례교위司隷校尉에 견주면 호종하는 신하들의 간악함을 살피고 탄핵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호종하는 신하들이〉 숙연해진 것이다.
目
【목目】 조서詔書를 내려 낭관郞官으로 제수한 사람이 많았는데, 태위 양병太尉 楊秉이 상소上疏하기를 “
낭관郎官은 들어와서는 숙위宿衛를 받들고 나가서는 백성을 다스리니注+자積은 모임이다.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오제좌五帝座 뒤에 15개의 별이 모여 있는 것을 낭위郞位라 한다.” 하였다., 마땅히 차마 하지 못하는(연연해하는) 은혜를 잘라내어 구하고 바라는 길을 끊어야 합니다.” 하니, 이에 마침내 낭관郎官의 제수를 중지하였다.
綱
【강綱】 단경段熲이 당전강當煎羌을 격파하였다.
綱
【강綱】 12월에 황제가 환궁還宮하였다.
역주
역주1(穎)[潁] :
저본에는 ‘穎’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潁’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더불어……잃었구나 :
이 내용은 ≪論語≫ 〈衛靈公〉의 “더불어 말할 만한데 더불어 말하지 않는다면 사람을 잃고,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않은데 더불어 말한다면 말을 잃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도 잃지 않고 또한 말도 잃지 않는다.[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知者 不失人 亦不失言]”라고 한 孔子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역주3그의 지혜로움은……것 :
이 내용은 ≪論語≫ 〈公冶長〉의 “〈甯武子는〉 나라에 道가 있으면 지혜로웠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으니, 그의 지혜로움은 미칠 수 있지만 그의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라고 한 孔子의 말씀으로, 이는 그의 지혜로움은 크게 높지 아니하여 다른 사람들이 따라갈 수 있지만 그의 어리석음은 경지가 매우 높아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음을 말씀한 것인바, 어리석음은 진짜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다고 여김을 이른 것이다.
역주4세 희생 :
원문의 ‘三牲’은 세 가지 가축으로 소와 羊, 돼지를 이르는데, 옛날 이 세 가지를 제사의 희생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三牲’이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