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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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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永明三年이요 魏太和九年이라
春正月 하다
詔曰 圖讖之興 出於三季하니 旣非經國之典이요 徒爲妖邪所憑이라 今皆焚之하고 留者 以大辟論注+三季, 謂三代之末世也하라
又嚴禁諸巫覡及委巷卜筮非經典所載者注+直曰街, 曲曰巷. 委, 即曲也.하다
釋奠先師 用上公禮注+禮記王制 “釋奠于學.” 註云 “釋菜․奠幣禮先師也.”하다
三月 注+禧爲咸陽王, 幹爲河南王, 羽爲廣陵王, 雍爲潁川王, 勰爲始平王, 詳爲北海王.하다
太后置學館選師傅하여 以教諸王하니 始平王勰 於兄弟 最賢하여 敏而好學하고 善屬文하니 魏主尤奇愛之러라 後徙封爲彭城王하다
夏五月 齊以王儉으로 領國子祭酒하다
自宋世祖好文章으로 士大夫無專經者러니 少好禮學及春秋하여 言論造次 必於儒者하니 由是 衣冠翕然하여 更尙儒術이러라
撰次朝儀國典하고 晉宋故事 無不諳憶注+諳, 音庵, 記也.하여 當朝理事 斷決如流하니 博議引證 無能異者이라
令史諮事 常數十人이요 賓客滿席 應接無滯하고 十日一還學하여 監試諸生하니 巾卷在庭하고 劍衛令史儀容甚盛이라 作解散髻斜插簪하니 朝野 多慕效之注+卷, 巨員切, 冠式也. 髻, 綰髮也. 揷, 刺入也. 簪, 首笄也.러라
儉常謂人曰 江左風流宰相 唯有謝安이라 意以自比也이러라 上深委仗之하여 士流選用 奏無不可러라
秋七月 魏以梁彌承으로 爲宕昌王하다
宕昌王梁彌機死하니 子彌博立이러니 爲吐谷渾所逼하여 犇仇池하니 魏仇池鎭將穆亮 以彌承爲衆所附라하여 擊走吐谷渾하고 立之而還注+亮, 崇之曾孫也. 彌承, 彌機兄子.하다
冬十月 하다
魏初 民多蔭附하니 蔭附者 皆無官役이나 而豪彊徵斂倍於公賦注+蔭附者, 自附於豪彊之家以求蔭庇
給事中李安世上言호되 歲飢民流하여 田業 多爲豪右所占奪하니 雖桑井難復이나 宜更均量하여 使力業相稱注+桑井, 謂古者井田之制, 五畝之宅, 樹牆下以桑也.하고 又所爭之田 宜限年斷하고 事久難明이어든 悉歸今主하여 以絕詐妄이라한대 魏主善之하여 由是始議均田注+均, 平也.하다
十月 詔諸男夫十五以上 受露田四十畝하고 婦人 二十畝하고 奴婢 依良丁注+不栽樹者, 謂之露田. 良丁, 謂良人成丁者.하고 牛一頭 受田三十畝호되 限止四牛
所授之田 率倍之호되 三易之田 再倍之하여 以供耕作及還受之盈縮注+倍之者, 合受四十畝, 授以八十畝, 此一易之田也. 三易之田, 三年耕然後復故, 故再倍以授之. 周禮地官 “不易之地家百畮, 一易之地家二百畮, 再易之地家三百畮.” 註 “不易之地, 歲歲可種, 是爲上田. 一易之地, 兩歲一種, 是爲中田. 再易之地, 三歲一種, 是爲下田.”하고 人年及課則受田하고 老免及身沒則還田하고 奴婢牛 隨有無以還受
初受田者 男夫給二十畝하여 課種桑五十株호되 桑田 皆爲世業하여 身終不還이라 恒計見口하여 有盈者 無受無還하고 不足者 受種如法하고 盈者 得賣其盈注+口分․世業之法如此.이라
諸宰民之官 各隨近給公田有差하여 更代相付注+更, 工衡切.하고 賣者坐如律하다
魏以任城王澄으로 都督梁益荊州軍事注+魏高祖, 始置梁․益二州於仇池.하다
柔然犯魏塞어늘 魏任城王澄帥衆拒之하니 柔然遁去注+澄, 雲之子也.하다
氐羌反이어늘 詔以澄爲梁州刺史하니 澄至州 討叛柔服하니 氐羌皆平하다
齊富陽民唐寓之作亂하다
太祖命虞玩之等하여 檢定黃籍注+籍, 簿書也. 編户之文, 以黄表之, 故曰黃籍.이러니 齊主即位 別立校藉官하고 置令史하여 限日得數巧注+通鑑 “限一人日得數巧.” 巧, 謂姦僞, 言每人一日, 限其校得姦僞數事也.하니
外監呂文度啓上籍被却者 謫戍緣淮十年하니 民多逃亡避罪注+外監, 屬中領軍, 而親任過之. 上, 時掌切. 被, 去聲, 却, 戶退也. 富陽民唐寓之因以妖術惑衆하니 三吳者犇之하니 衆至三萬注+富陽, 即漢富春縣也, 本屬會稽, 後屬吳. 晉簡文鄭太后諱春, 孝武改曰富陽. 奔之, 走往也.이러라
文度與茹法亮呂文顯으로 皆以姦諂有寵하여 文度專制兵權하니 領軍守虛位而已 法亮權勢尤盛하니 王儉常曰 我雖有大位 權寄豈及茹公耶아하다
柔然部眞可汗死하고 子伏名敦可汗豆崘立注+伏名敦, 魏言恒也.하다


나라 세조世祖 무제武帝 소색蕭賾 영명永明 3년이고, 북위北魏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태화太和 9년이다.
[] 봄 정월에 북위北魏참위讖緯무복巫卜을 금지하였다.
[] 조서를 내리기를 “도참설이 말기부터注+① “三季”는 三代의 말기를 말한다. 출현하였는데, 이미 나라를 다스리는 법이 되지 못하였고 한갓 요망하고 사악한 자들이 그에 의지하고 있다. 지금 모두 불태우도록 하고 남겨놓은 사람은 사형에 처하라.”라고 하였다.
또 여러 무격巫覡이나 백성들이 사는 거리에서 경전에 실려 있지 않은 내용으로 점을 치는 것은 엄하게 금지하였다.注+② 곧은 곳[直]을 街라 하고, 굽은 곳[曲]을 巷이라 하니, 委는 바로 曲이다.
[] 나라가 국학國學을 다시 세웠다.
[] 선사先師에게 석전釋奠을 지낼 적에 상공上公의 예를 사용하도록 하였다.注+① ≪禮記≫ 〈王制〉에 “太學에서 釋奠을 지낸다.”라고 하였는데, 그 註에 “釋菜(입학할 때 先聖․先師에게 올리는 제례)와 奠幣(폐백을 신위 앞에 드리는 것)는 先師를 예우하는 것이다.” 하였다.
[] 3월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여러 아우를 모두 으로 봉하였다.注+① 拓跋禧는 咸陽王, 拓跋幹은 河南王, 拓跋羽는 廣陵王, 拓跋雍은 潁川王, 拓跋勰은 始平王, 拓跋詳은 北海王이 되었다.
[] 풍태후馮太后학관學館을 설치하고 사부師傅를 선발하여 여러 왕들을 교육시켰는데, 시평왕始平王 탁발협拓跋勰이 형제 중에 가장 뛰어나 영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문장을 잘 지었는데, 위주魏主가 더욱 기특하게 여겨 총애하였다. 뒤에 작위를 옮겨 팽성왕彭城王으로 봉해주었다.
[] 여름 5월에 나라가 왕검王儉으로 국자좨주國子祭酒를 겸하게 하였다.
[] 세조世祖(유준劉駿)가 문장을 좋아한 뒤로 사대부 중에 경전經傳을 전공하는 사람이 없었다. 왕검王儉이 어려서부터 예학禮學과 ≪춘추春秋≫를 좋아하여 평상시 말할 때에도 반드시 유학儒學의 규범을 따랐는데, 이로 말미암아 의관을 갖춘 사람들이 기뻐하여 다시 유학을 숭상하였다.
왕검이 조정의 의례儀禮와 국가의 전장제도典章制度를 편찬하였고, 나라와 나라의 고사를 모두 외우고 기억하여注+① 諳은 음이 庵이니, 기억한다는 뜻이다. 조정에서 일을 처리할 적에 물 흐르듯이 거침없이 결단하였는데, 널리 논의를 하고 근거를 뒷받침하니,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영사令史 가운데 일을 자문하는 사람이 항상 수십 명이었고 빈객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는데, 그들을 응대하는데 머뭇거림이 없었다. 10일에 한 번씩 학교로 돌아와서 제생諸生들의 시험을 감독하니, 뜰에는 두건과 굽은 관을 쓴 학생들이 있었고, 검을 찬 호위병과 영사令史들의 위용이 아주 볼만했다. 해산계解散髻를 만들어 을 비스듬히 꽂으니注+② 卷(굽다)은 巨員의 切이니, 冠의 형식이다. 髻는 상투를 트는 것이다. 揷은 찔러 넣는 것이다. 簪은 머리에 꽂는 비녀이다., 조정과 재야에서 이를 흠모하여 흉내를 내었다.
왕검이 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강좌江左(동진東晉 이후)에서 풍류가 있는 재상宰相은 오직 사안謝安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마음속으로 자신을 빗댄 것이다. 황제가 깊이 그에게 의지하고 일을 맡겨서 사류士流를 선발할 적에 그가 아뢰면 안 되는 일이 없었다.
[] 가을 7월에 북위北魏양미승梁彌承탕창왕宕昌王으로 삼았다.
[] 처음에 탕창왕宕昌王 양미기梁彌機가 죽자 아들 양미박梁彌博이 왕위에 올랐는데, 토욕혼吐谷渾에게 압박을 받아 구지仇池로 도망쳤다. 북위北魏구지진장仇池鎭將 목량穆亮양미승梁彌承注+① 穆亮은 穆崇의 증손이다. 梁彌承은 梁彌機의 조카이다. 무리들의 추종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토곡혼을 공격하여 몰아내고 양미승을 왕위에 올리고 돌아왔다.
[] 겨울 10월에 북위北魏가 조서를 내려 균전제均田制를 시행하였다.
[] 북위北魏 초기에 백성들 대부분이 음부蔭附注+① 蔭附라는 것은 스스로 호족과 세력 있는 자의 집에 투탁하여 비호를 구하는 것이다. 일삼았으니, 음부蔭附한 자들은 모두 관청에 부역이 없었지만, 호족과 세력 있는 자들이 징수하는 세금이 국가의 세금보다 갑절이나 많았다.
급사중給事中 이안세李安世가 아뢰기를 “거듭된 기근으로 백성들이 유랑하여 전업田業(전지田地)을 호족들이 대부분 점거하고 빼앗았습니다. 비록 상정桑井(정전井田)을注+② 桑井은 옛날의 井田制이니, 5畝의 집에 담장을 따라 뽕나무를 심는 것이다. 회복하는 일이 어려우나 다시 전지田地의 면적을 측정하여 균등하게 하여 인력人力전업田業을 서로 알맞게 하고, 또 다툼이 있는 전지田地연수年數를 제한하여 결단하며, 일이 오래되어 전지田地의 주인이 분명치 않으면 현재의 주인에게 귀속시켜 함부로 속이는 행위를 근절시켜야 합니다.”라고 하니,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좋다고 여기고 이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균전제均田制注+③ 均은 균평하다는 뜻이다. 논의하였다.
10월에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하였다. 15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은 노전露田 40를 받고, 부인은 20를 받으며, 노비는 양정良丁의 기준에 의거하고注+④ 나무를 심지 않은 것을 露田이라고 한다. 良丁은 良人으로서 壯丁이 된 이를 말한다., 소 1전지田地 30를 받되 소로 받는 전지田地는 4마리로 제한하였다.
분급하는 전지田地는 대략 갑절로 하였는데, 3년에 1번 농사지을 수 있는 전지田地는 다시 갑절로 하여注+⑤ “倍之”는 합쳐서 40畝를 받으면, 80畝를 부과하는 것이니, 이는 한 해 걸러 경작 가능한 토지이다. “三易之田”은 3년을 농사지은 뒤에 예전처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거듭 갑절로 부과한 것이다. ≪周禮≫ 〈地官〉에 “休耕하지 않는 땅은 한 집에 100묘를 주고, 1년을 휴경하는 땅은 한 집에 200묘를 주며, 2년을 휴경하는 땅은 한 집에 300묘를 준다.”라고 하였는데, 그 註에 “‘不易之地’는 해마다 경작할 수 있는 땅이니 上田이고, ‘一易之地’는 2년에 1번 경작할 수 있는 땅이니 中田이며, ‘再易之地’는 3년에 1번 경작할 수 있는 땅이니 下田이다.” 하였다., 경작이나 환수에 있어 남거나 모자라는 경우에 제공하였다. 사람들이 세금을 낼 연령이 되면 전지田地를 받았고, 늙어서 과세를 면제받거나 죽으면 전지田地를 환수하였다. 노비와 소는 유무에 따라 환수하였다.
처음 전지田地를 받는 경우 남자에게는 20를 주어 뽕나무 50그루를 키우도록 부과하되, 뽕나무 밭[상전桑田]은 모두 세습하여 가업으로 삼아 사람이 죽어도 국가에 돌려주지 않았다. 〈상전桑田은〉 늘 현재 인구를 계산하여 지급할 규정 액수를 꽉 채운 경우 받지도 돌려주지도 않았으며, 지급할 규정 액수에 부족한 경우 법대로 경작할 토지를 주었으며, 규정 액수를 초과한 상전桑田은 팔 수 있었다.注+⑥ 口分田과 世業田(永業田)의 법이 이와 같다.
여러 목민관에게는 각각 가까운 곳에 있는 공전公田을 차등 있게 주어서, 관직을 옮기게 되면注+⑦ 更(다시)은 工衡의 切이다. 서로 넘겨주고 매매한 사람은 법대로 처벌하였다.
[] 북위北魏임성왕任城王 탁발징拓跋澄도독양주익주형주군사都督梁州益州荊州軍事로 삼았다.注+① 北魏 高祖(拓跋宏)가 처음에 梁州와 益州 두 州를 仇池에 설치하였다.
[] 유연柔然북위北魏 변방을 침략하자, 북위北魏 임성왕任城王 탁발징拓跋澄注+① 拓跋澄은 拓跋雲의 아들이다. 무리를 이끌고 대항하니 유연이 달아났다.
저족氐族강족羌族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서를 내려 탁발징을 양주자사梁州刺史로 삼았는데, 탁발징이 양주에 도착하여 반란 세력을 토벌하고 회유하여 복종시키자 저족氐族강족羌族이 모두 평정되었다.
[] 나라 부양富陽 사람 당우지唐寓之가 난을 일으켰다.
[] 예전에 태조太祖(소도성蕭道成)가 우완지虞玩之 등에게 명을 내려 호적을注+① 籍은 簿書이다. 戶籍에 편입하는 글은 황색으로 표지를 만들므로 黃籍이라고 한 것이다. 조사하여 확정하게 하였다. 제주齊主(소색蕭賾)가 즉위하자 별도로 교자관校藉官을 세우고 영사令史를 두어 날마다 몇 건씩 교묘히 법을 어기는 일을 적발하도록 하였다.注+② ≪資治通鑑≫에는 “한 사람이 날마다 몇 건을 적발하도록 정해놓았다.”라고 하였다. 巧는 간사함과 거짓이니, 〈“限日得數巧”는〉 각자 날마다 간사한 행위를 적발하는 것을 몇 건으로 한정하는 것을 말한다.
외감外監 여문도呂文度가 아뢰어 허위로 호적에서 빠지게 된 사람을注+③ 外監은 中領軍 소속이지만, 황제와 더 가깝고 신임이 있었다. 上(올리다)은 時掌의 切이다. 被(당하다)는 去聲이다. 却은 호적에서 퇴출되었다는 뜻이다. 회수淮水 연변에 10년 동안 보초를 서는 군사로 충당시키자고 하자, 백성들 대부분이 죄를 피해 도망쳤다. 부양富陽 사람 당우지唐寓之가 요망한 술법을 부려 백성들을 현혹시키자, 삼오三吳 지역에 허위로 호적에서 빠져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는데, 무리가 3만 명이나 되었다.注+④ 富陽은 漢나라 때의 富春縣으로, 본래 會稽에 소속되었으나 뒤에 吳에 소속되었다. 晉 簡文帝의 鄭太后의 이름이 春이었기 때문에 晉 孝武帝가 富陽으로 고쳤다. “奔之”는 달아난다는 뜻이다.
여문도가 여법량茹法亮, 여문현呂文顯과 모두 간사하게 아첨하여 황제에게 총애를 받아 여문도가 병권을 전적으로 통제하니, 영군장군領軍將軍은 빈자리만 지킬 뿐이었다. 여법량의 권세가 더욱 커지자, 왕검王儉이 늘 말하기를 “내가 비록 높은 지위에 있으나 지닌 권력이 어찌 여공茹公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 유연柔然부진가한部眞可汗이 죽고 아들 복명돈가한伏名敦可汗注+① 伏名敦은 北魏 말로 ‘항상’이라는 뜻이다. 욱구려두륜郁久閭豆崘이 즉위하였다.


역주
역주1 魏禁讖緯巫卜 : “晉나라 武帝로부터 ‘禁星氣讖緯(星氣, 讖緯를 금지하였다.)’를 기록하여 苻秦에 이르러 ‘禁老莊圖讖(老子, 莊子, 圖讖을 금지하였다.)’을 기록하였고, 이때에 다시 ‘魏禁讖緯巫卜’을 기록한 것은 모두 ≪資治通鑑綱目≫에서 인정해준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圖讖을 금지한 것을 기록한 것이 5번이다(晉나라 丁亥年(387)에 자세하다.).[自晉武書禁星氣讖緯 至苻秦而書禁老莊圖讖 於是復書魏禁讖緯巫卜 皆綱目所予也 終綱目書禁圖讖五(詳晉丁亥年)]” ≪書法≫
역주2 三代 : 중국 고대의 夏․殷․周를 말한다.
역주3 齊復立國學 : “다시 설립했다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전에 폐기했기 때문이다. 이때가 없어진 지 3년 째였다. ≪資治通鑑綱目≫에서 國學에 ‘復(다시)’라고 기록한 것이 2번이다.(唐 代宗 大歴 원년(769))[復立何 嘗罷也 於是喪三年矣 綱目國學書復二(唐代宗大歴元年)]” ≪書法≫
역주4 魏主封諸弟皆爲王 : “이를 기록한 것은 友愛를 드러낸 것이다. 諸舅를 봉하여 列侯를 삼은 것을 기록한 것과는 다르므로 ‘主’라고 기록한 것이다.[書 著友愛也 與書封諸舅皆爲列侯者異矣 故書主]” ≪書法≫
역주5 魏詔均田 : “王莽이 조서를 내려서 백성 중에 일할 수 있는 남자가 8명이 못 되는데 토지가 1井이 넘는 경우는 종족 마을에 나누어주게 하였으나, ≪資治通鑑綱目≫에서 기록하지 않고 토지를 賣買하지 못하게 한 것만 기록했을 뿐이다. 이때에 조서를 내려 均田制를 시행한 것을 기록한 것은 北魏를 인정해준 것이다. 均田을 기록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자치통감강목≫에서 均田을 기록한 것은 3번이다(이해(485), 隋나라 開皇 12년(592), 大業 5년(609)).[王莽詔民男口不盈八 而田過一井者 分予族里 綱目不書 書不得賣買而已 於是魏詔均田則書之 予魏也 書均田始此 綱目書均田三(是年 隋開皇十二年 大業五年)]” ≪書法≫
역주6 却籍 : 南朝 齊나라 때 허위로 작성된 戶籍이다. 본서 241쪽에 호적에 관한 일이 보인다.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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