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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8)

자치통감강목(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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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申年(120)
경신년庚申年(120)
永寧元年이라 春三月 北匈奴, 車師後王 共殺漢吏어늘 詔復置都護屯兵하다
나라 효안황제 영녕孝安皇帝 永寧 원년이다. 봄 3월에 북흉노北匈奴차사후왕車師後王이 함께 나라 관리를 살해하였으므로 조령詔令을 내려 다시 도호都護를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시켰다.
北匈奴率車師後王軍就하여 共殺索班하고 擊走前王하고 略有北道注+軍就, 車師後王名.
북흉노北匈奴차사후왕 군취車師後王 軍就를 거느리고 와서 함께 삭반索班을 살해하고 차사전왕車師前王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고는 북도北道를 차지하였다.注+군취軍就차사후왕車師後王의 이름이다.
曹宗 請出兵擊匈奴以報之하고 因復取西域하니 公卿 多以爲宜閉玉門關이어늘 太后聞軍司馬班勇 有父風하고 召問之注+勇, 超之子也.하다
조종曹宗이 군대를 출동하여 흉노를 공격해서 보복하고 인하여 다시 서역西域을 점령할 것을 청하니, 공경公卿들이 대부분 옥문관玉門關을 폐쇄해야 한다고 하였다. 태후太后군사마 반용軍司馬 班勇이 아버지 반초班超의 유풍이 있다는 말을 듣고 불러서 그에게 계책을 물었다.注+반용班勇반초班超의 아들이다.
上議曰 昔 孝武皇帝 開通西域하시니 論者以爲奪匈奴府藏하여 斷其右臂러니
반용班勇이 다음과 같이 의논을 올렸다. “옛날에 효무황제孝武皇帝께서 서역西域을 개통하시자, 이에 대해 의논하는 자들이 흉노匈奴부장府藏(창고)을 빼앗고 그 오른팔을 끊은 것이라고 말했었는데,
光武中興 未遑外事 匈奴驅率諸國하니 河西城門 晝閉注+通鑑 “及至永平, 再攻敦煌ㆍ河西諸郡, 城門晝閉.”하니이다
광무제光武帝중흥中興함에 변방 밖의 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흉노가 여러 나라를 몰아가니, 하서河西의 성문이 낮에도 닫혔습니다.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 “영평永平 연간에 이르러 오랑캐들이 다시 돈황敦煌하서河西의 여러 을 공격해서 성문이 낮에도 닫혔다.” 하였다.
孝明皇帝 深惟廟策하사 命將出征하시니 然後 匈奴遠遁하여 邊境得安注+惟, 思也. 古者遣將必於廟, 先定制勝之策, 故謂之廟策.이러니
효명황제孝明皇帝묘책廟策(조정朝廷의 계책)을 깊이 생각하시어 장수를 명하여 출정하게 하시니, 그런 뒤에야 흉노가 멀리 도망해서 변경이 편안하게 되었습니다.注+는 생각함이다. 옛날에는 장군을 파견할 적에 반드시 묘당廟堂에서 하였는데, 이때에 ‘적을 제압하여 승리할 계책’을 먼저 정하였으므로 이를 일러 묘책廟策이라 한 것이다.
間者羌亂 西域復絶하여 北虜遂遣責諸國逋租호되 高其價直하고 嚴以期會注+西域屬漢之後, 不復以馬畜旃罽輸匈奴, 及與漢絶, 匈奴復遣使, 責其積年所逋. 逋, 欠也.하니
근자에 강족羌族이 반란함에 서역西域의 길이 다시 끊기니, 북흉노北匈奴가 마침내 사신을 여러 나라에 보내어서 그동안 포흠逋欠된 조세를 갚으라고 책망하되 그 값을 높이고 기한을 엄격히 정하니注+〈“간자강란間者羌亂……엄이기회嚴以期會”는〉 서역西域나라에 소속된 뒤에는 다시 말 등의 가축과 모전毛氈흉노匈奴에게 실어다 바치지 않았는데, 나라와 끊기게 되자 흉노가 다시 사신을 보내어 그 동안 포흠逋欠한 것을 갚으라고 책망하였다. (빚, 결손)는 거흠이다.,
鄯善, 車師皆懷憤怨하여 思樂事漢이나 其路無從이라
선선鄯善거사車師가 모두 분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서 기꺼이 나라를 섬기려고 하였으나, 이렇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今曹宗 徒欲報雪匈奴而不尋出兵故事注+報雪, 謂報伊吾之役, 雪索班之恥也하니 要功荒外하면 萬無一成이요 兵連禍結하면 悔無所及注+荒外, 謂荒服之外也.이라
이제 조종曹宗이 한갓 흉노에게 보복하여 설욕하고자 하면서 출병한 고사故事를 찾지 않고 있으니注+보설報雪”은 이오伊吾전역戰役을 보복하고 삭반索班이 죽은 치욕을 씻음을 이른다., 황복荒服 밖의 먼 곳에서 을 구하고자 하면, 만에 하나라도 성공할 리가 없고, 병화兵禍가 이어지면 후회해도 늦을 것입니다.注+황외荒外의 밖을 이른다.
況今府庫未充하고 師無後繼하니 臣愚 以爲不可許也라하노이다
더구나 지금 창고가 아직 채워지지 못하고 뒤이을 만한 군대가 없으니, 어리석은 은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宜於敦煌 復置營兵三百人及護西域副校尉하고 遣長史하여 將五百人하고 屯樓蘭하여
마땅히 돈황敦煌에다가 진영의 병사 300명과 호서역부교위護西域副校尉를 다시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500명을 거느리고 가서 누란樓蘭에 주둔하게 해야 합니다.
西當焉耆, 龜玆徑路하고 南彊鄯善, 于窴心膽하고 北扞匈奴하고 東近敦煌이면 旣爲胡虜節度 又禁漢人侵擾리니 如此誠便이니이다
그리하여 서쪽으로는 언기焉耆구자龜玆의 지름길을 막고 남쪽으로는 선선鄯善우전于窴의 마음과 담력을 강하게 하며 북쪽으로는 흉노를 막고 동쪽으로는 돈황敦煌과 가까이하면 이미 호로胡虜를 통제하게 될 것이고 또 한인漢人들이 침해하고 소요함을 금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진실로 편리합니다.”
公卿 難曰注+難, 去聲. 前所以棄西域者 以其無益而難供也어늘 今欲通之하니 班將 能保北虜不爲邊害乎注+將, 子亮切. 以勇爲軍司馬, 故以將言之.
공경公卿들이 힐난하기를注+(힐난하다)은 거성去聲이다. “예전에 서역西域을 포기한 이유는 유익함이 없고 〈병력과 물자를〉 공급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다시 통하고자 하니, 반장군班將軍이 북쪽 오랑캐가 변방의 해가 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소?”注+(장수)은 자량子亮이니, 반용班勇군사마軍司馬로 삼았으므로 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니,
對曰 今置州牧하여 以禁盜賊이니 若州牧 能保盜賊不起者 臣亦願以要斬으로 保匈奴之不爲邊害也하노이다
반용班勇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지금 주목州牧을 설치하여 도적을 금하고 있는데, 만약 주목州牧이 도적이 일어나지 않음을 보장할 수 있다면 또한 원컨대 요참腰斬으로 흉노匈奴가 변방의 해가 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하겠습니다.
今通西域이면 則虜勢必弱하여 爲患微矣리니 孰與歸其府藏하여 續其斷臂哉리오
이제 서역西域과 통하면 오랑캐의 형세가 반드시 약해져서 우리에게 해를 끼침이 적을 것이니, 어찌 저들에게 부장府藏(창고)을 돌려주고 잘려나간 오른팔을 이어주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若棄而不立이면 則西域望絶하여 屈就北虜하리니 恐河西城門 必須復有晝閉之儆矣
만약 서역을 버리고 관리를 세우지 않는다면 서역이 절망하여 머리를 굽히고 북쪽 오랑캐에게 나아갈 것이니, 하서河西의 성문이 반드시 낮에도 닫히는 경계가 다시 있을까 염려됩니다.
今不廓開朝廷之德하고 而拘屯戍之費하니 豈安邊久長之策哉리잇가
이제 조정의 은덕을 크게 열어 넓히지 않고, 군대를 주둔하여 수자리하는 비용에 구애되니, 이것이 어찌 변경을 안정시키는 장구한 계책이겠습니까.”
難者又曰 西域遣使하여 求索無猒하니 一旦 爲匈奴所迫하여 當復求救 則爲役大矣리라
】 힐난하는 자가 또 말하기를 “서역西域이 사신을 보내어 요구하고 바라기를 끝없이 하니, 〈만약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가〉 하루아침에 흉노匈奴에게 핍박받아서 마땅히 다시 구원해주기를 바란다면 전역戰役이 클 것이다.” 하니,
勇對曰 今設以西域歸匈奴하여 而使其恩德大漢하여 不爲鈔盜 則可矣어니와 如其不然이면 則是富仇讐之財하고 增暴夷之勢니이다
반용班勇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지금 만일 서역을 흉노에게 돌려주어서 흉노가 대한大漢을 은덕으로 여겨 노략질과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좋지만, 만일 그렇지 않으면 원수의 재물을 풍부하게 해주고 사나운 오랑캐의 형세를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且西域來者 不過稟食注+禀, 給也. 食, 讀曰. 今若拒絶이면 勢歸北屬夷虜하여 幷力以寇幷涼하리니
서역西域에서 오는 자들은 우리가 창고를 열어 먹여주기를 바람에 불과하니注+은 공급함이다. (먹이다)는 로 읽는다., 지금 만약 이것을 거절하면 형세상 서역이 북쪽으로 흉노에게 복속되어서 힘을 합하여 병주幷州양주涼州를 침략할 것입니다.
則中國之費 不止十億이니 置之誠便注+勢歸北屬夷虜, 言其事勢所歸, 必至北屬匈奴.이니이다 於是 從勇議하여 復營兵하고 置副校尉하여 居敦煌하다
이렇게 되면 중국中國의 비용이 10억 에 그치지 않을 것이니, 부교위副校尉를 설치하는 것이 참으로 편리합니다.”注+세귀북속이로勢歸北屬夷虜”는 그 사세(형세)의 귀추가 반드시 북쪽으로 흉노匈奴에게 복속될 상황임을 말한 것이다. 이에 반용의 의논을 따라 진영의 군대를 회복하고 부교위를 배치해서 돈황敦煌에 거주하게 하였다.
雖以羈縻西域이나 然亦未能出屯注+謂未能如勇計, 出屯樓蘭西也.이러니 其後 匈奴果數與車師入寇하니 河西大被其害하니라
비록 이로써 서역을 기미羈縻(기미)하였으나 또한 〈반용의 계책처럼〉 군대를 내어 누란樓蘭에 주둔시키지 못했는데注+〈“미능출둔未能出屯”은〉 능히 반용班勇의 계책처럼 나가 누란樓蘭의 서쪽에 주둔하지 못함을 이른다., 그 뒤에 흉노가 과연 여러 번 거사車師와 함께 침입하여 노략질하니, 하서河西 지역이 그 폐해를 크게 입었다.
沈氐, 當煎, 燒當羌 入寇注+羌在上郡西河者, 號沈氐. 當煎, 東羌種名, 後或作煎當.하다
심저沈氐(심저)와 당전當煎, 소당燒當강족羌族이 들어와 침략하였다.注+강족羌族 중에 상군上郡서하西河에 있는 자들을 심저沈氐라 이름하였다. 당전當煎은 동쪽 강족羌族의 명칭이니, 뒤에 혹 전당煎當이라고도 썼다.
◑夏四月 立子保爲皇太子하다
】 여름 4월에 아들 유보劉保를 세워 황태자皇太子로 삼았다.
◑校尉馬賢 討羌하여 破之하다
교위 마현校尉 馬賢강족羌族을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秋七月朔 日食하다
】 가을 7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大水하다
】 홍수가 졌다.
◑以楊震爲司徒하다
양진楊震사도司徒로 삼았다.
◑遼西鮮卑降하다
요서遼西선비鮮卑가 항복하였다.
하다
】 지진이 있었다.
월기교위 등강越騎校尉 鄧康을 면직하여 봉국封國(봉지封地)으로 내보내었다.
太后從弟康 以太后久臨朝政하고 宗門盛滿이라하여 數上書諫하여 言甚切至注+從弟, 當作從兄.호되 太后不從이라
태후太后종제從弟등강鄧康태후太后가 오랫동안 임조臨朝하고 종문宗門(종족宗族)이 강성하고 가득하다 해서 여러 번 글을 올려 간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였으나注+종제從弟는 마땅히 종형從兄이 되어야 한다. 태후太后가 따르지 않았다.
謝病不朝한대 太后大怒하여 免康官하고 遣歸國하고 絶屬籍注+康, 永初中, 紹封夷安侯.하다
등강鄧康이 병으로 사직하고 조회하지 않자, 태후太后가 크게 노하여 등강을 면직시키고 봉국封國으로 내보내어 돌아가게 하고 注+등강鄧康영초永初 연간(107~113)에 세습하여 이안후夷安侯에 봉해졌다.
역주
역주1 荒服 : 五服 중의 하나로, 王畿와의 거리가 2,000리에서 2,500리 사이의 먼 지역을 가리킨다.
역주2 (飮)[飤] : 저본에는 ‘飮’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飤’로 바로잡았다.
역주3 地震 : “鄧后가 臨朝함으로부터 지진의 變異를 史書에 끊임없이 썼다. 땅의 道는 고요함을 주장하니 마땅히 고요해야 하는데 진동함은, 또한 부인이 정사를 다스려서 땅의 道에 위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주 진동하여 그 응험을 드러낸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홍수와 우박과 가뭄과 황충과 일식 등의 災異가 간간이 나타나고 층층이 나왔으나 유독 지진이 더욱 많았으니, 天道가 어찌 매우 분명하지 않은가. 비록 두려워하여 행실을 닦고 삼갔다고 말했으나 요컨대 큰 근본이 바르지 못하면 끝내 또한 일에 도움이 없는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이것을 쓸 적에 혹은 한 해에 두 번 나타내어 永初 원년(107)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14년 동안에 모두 15번이나 되니, 이는 모두 징조가 부응하는 형상을 보이고 陰의 道가 잘못됨을 드러내어 후세의 감계로 삼은 것이다.[自鄧后臨朝 地震之異 史不絶筆 夫以地道主靜 宜靜而動 亦由婦人治事 反地之道 故數數震動 以著其應爾 當是之時 大水雨雹旱蝗日食 災異之衆 間見層出 然獨地震尤多 天道豈不甚明 雖曰恐懼修飭 要之大本不正 終亦無補於事 綱目書之 或一歲再見 自永初初元 至是十四年間 凡十有五 皆所以示證應之形 著陰道之失 爲後世鑑也]” ≪發明≫
역주4 免越騎校尉鄧康官 遣就國 : “安帝가 大統을 이었을 적에 春秋가 13세였는데, 鄧太后가 臨朝하여 이때 15년이 지났는바, 합쳐서 말하면 황제의 나이가 또한 30이 다 되었으니, 어린 군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鄧氏가 오랫동안 大權에 연연하여 조금도 정권을 돌려줄 뜻이 없었는데, 온 조정의 신하들이 입을 다물고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鄧康은 태후의 친족으로서 국가가 전복될까 우려해서 자주 간언을 올렸다. 태후가 만일 빨리 잘못을 뉘우치고 깨달을 수 있었다면 오히려 말년에 만회할 수 있었을 터인데, 도리어 위엄과 노여움을 크게 내고 배척해 쫓아내서 封國으로 내보내었다. 등강이 행동을 고상하게 하고 멀리 떠나가서 官爵과 封邑을 받들어 올리고 田里로 물러가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그리고 만일 太后의 노여움을 저촉하고 죽었더라도 얻은 바가 많았을 것이다. 建光 연간(121)에 鄧氏 한 가문이 거의 다 죽임을 당하고 유배되었는데 등강이 화를 벗어남이 겨우 털끝과 같았을 뿐이었으니, 이 또한 다행인 것이다. ‘면직시켰다.’고 쓰고 그의 죄를 말하지 않았으며, ‘봉국으로 내보냈다.’고 쓰고 그 屬籍이 끊어짐을 말하지 않은 것은 또한 등강을 인정하되 다 인정하지 않은 것이니, 아! 그 뜻이 은미하다.[安帝繼統 春秋十三 鄧后臨朝 至是歷十五載 合而言之 蓋亦年垂三十矣 謂之幼君不可也 鄧氏久戀大權 略無還政之意 擧朝噤嘿 莫敢出聲 鄧康以后族之親 慮貽顚覆 數數進諫 太后倘能翻然悔悟 猶可收之桑榆 而乃奮發威怒 斥逐就國 惜乎 康未能高擧遠引 奉還爵邑 退歸田里 政使觸忿而死 所得多矣 建光之際 鄧氏一門 誅竄殆盡 康之得脫 僅若毫芒 蓋亦幸爾 書免官而不言其罪 書就國而不言其絶 亦予之而不盡予者也 嗚呼微矣]” ≪發明≫
역주5 屬籍을 끊었다 : 이는 鄧康의 이름을 屬籍에서 지웠다는 뜻으로, 종실(外戚)의 권한을 박탈한 것이다. ‘屬籍’은 宗室이나 外戚의 계통을 기록한 문서이다.

자치통감강목(8)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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