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燕人이 以太原王恪爲太宰하여 專錄朝政하고 上庸王評爲太傅하고 陽騖爲太保하고 慕輿根爲太師하여 參輔朝政하니
根
이 自恃勳舊
하여 心不服恪
注+① 自皝以來, 根屢有戰功.하고 欲爲亂
하여
乃言於恪曰 主上幼沖하고 母后干政하니 俟畢山陵하여 殿下宜自取之니이다
恪曰 公이 醉邪아 何言之悖也오 吾與公受遺詔하니 云何而遽有此議오 根이 愧謝而退하다
恪以告吳王垂
한대 垂勸恪誅之
하니 恪曰 今新遭大喪
하여 二隣觀釁
이어늘 而宰輔自相誅夷
하면 恐乖遠近之望
이니 且可忍之
注+② 二隣, 謂晉․秦也.니라
根이 又言於可足渾后及燕主暐曰 太宰, 太傅將謀不軌하니 臣請帥禁兵誅之라한대 后將從之러니
暐曰 二公
은 國之親賢
이라 先帝託以孤嫠
하시니 必不肯爾
니 安知非太師欲爲亂也
리오하니 乃止
注+③ 孤嫠, 孤兒․寡婦也.하다
根
이 又思戀舊土
하여 謀欲還東
注+④ 舊土, 謂龍城, 在鄴城東北.이어늘 恪
이 乃密奏根罪狀
하여 誅根幷其黨與
하다
目
【目】 燕나라에서는 太原王 慕容恪을 太宰로 삼아서 朝政의 정사를 모두 관리하게 하고, 上庸王 慕容評을 太傅로 삼고 陽騖를 太保로 삼고 慕輿根을 太師로 삼아서 조정의 정사를 함께 보필하게 하였다.
그런데 모여근은 자신이 前朝에서 功勳이 있는 신하였음을 믿고서 마음속으로 모용각에게 복종하지 않고
注+① 慕容皝 이래로 慕輿根이 여러 번 戰功을 세웠다. 亂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용각에게 말하기를 “主上이 어리고 母后가 정사에 간여하니, 先帝의 喪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전하께서는 마땅히 스스로 존위를 차지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모용각이 말하기를 “공은 취했는가? 무슨 말을 이리도 이치에 어긋나게 하는가. 내가 공과 함께 遺詔를 받았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이런 논의를 한단 말인가.” 하니, 모여근은 부끄러워 사죄하고 물러갔다.
모용각이 이 사실을 吳王 慕容垂에게 고하자, 모용수가 모용각에게 그를 죽일 것을 권하니, 모용각이 말하기를 “지금 새로 큰 喪(國喪)을 만나서 이웃에 있는 두 나라가 틈을 엿보고 있는데, 宰相들이 서로 잔인하게 죽인다면 遠近 人士들의 바람에 어긋날까 두려우니, 우선 참아야 한다.” 하였다.
注+② 두 이웃 나라는 東晉과 前秦을 이른다.
모여근이 또다시 可足渾后(합족혼후)와 燕主 慕容暐에게 말하기를 “太宰 모용각과 太傅 모용평이 장차 반역을 꾀하려 하니, 신은 禁衛兵을 거느리고 이들을 죽일 것을 청합니다.” 하자, 합족혼후가 따르려고 하였는데,
모용위가 말하기를 “두 분은 나라의 친척이요 어진 분입니다. 先帝께서 고아와 과부를 부탁하셨으니, 반드시 배반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태사 모여근이 난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겠습니까.”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
注+③ ‘孤嫠’는 孤兒(慕容暐)와 寡婦(可足渾后)이다.
모여근이 또 옛 땅을 그리워하고 동쪽으로 돌아가려고 모의하자,
注+④ 옛 땅은 龍城을 이르니, 鄴城의 동북쪽에 있었다. 모용각은 마침내 모여근의 죄상을 은밀히 아뢰어 모여근과 그 도당들을 다 죽였다.
目
【目】 이때 새로 큰 상을 만나고 誅戮이 낭자하니, 내외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慕容恪은 행동거지가 평상시와 똑같아서 사람들은 그의 근심하는 기색을 보지 못하였고, 매번 궁정이나 관부를 출입할 적에 수행원을 한 명만 도보로 따르게 하였다.
注+① 從(따르다)은 才用의 이다.
혹자가 그에게 마땅히 엄하게 방비해야 한다고 설득하자, 모용각이 말하기를 “사람들의 마음이 막 두려워하고 있으니, 내가 마땅히 편안하고 진중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하는데, 어찌 다시 스스로 놀라고 동요하겠는가.” 하였다.
모용각은 비록 큰 임무를 모두 관리하였으나 조정의 禮는 매우 조심하고 엄중히 지켰고, 매사를 반드시 司徒 慕容評과 함께 의논하였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선비를 대우하여 최선의 방도를 자문하고 재능을 헤아려 임무를 맡겨주어 사람들이 지위를 넘지 않았으며 조정의 신하 중에 혹 잘못이 있으면 그의 잘못된 내용을 드러내지 않고 적당히 다른 곳에 敍用하니,
당시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해서 감히 과오를 범하는 자가 없었다.
혹 작은 과실이 있으면 자기들끼리 서로 책망하기를 “당신은 또다시 宰公이 관직을 옮겨주기를 바라는가.” 하였다.
注+② 慕容恪이 太宰가 되었으므로 그를 칭하여 宰公이라 한 것이다.
당초 東晉의 조정에서는 모용준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中原을 수복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桓溫은 말하기를 “모용각이 아직 살아 있으니, 〈우리나라의〉 근심이 크다.” 하였다.
目
【目】 劉衛辰이 使者를 보내어 秦나라에 항복하고는 변경 안의 땅에 들어가 농사짓고 봄에 남쪽으로 왔다가 가을에 북쪽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하자, 秦王 符堅이 이를 허락하였다.
注+① 劉衛辰은 劉虎의 손자이다.
여름에 雲中護軍 賈雍이 기병을 거느리고 유위신을 기습하여 크게 〈사람과 재물을〉 획득하여 돌아오자,
부견이 노하여 말하기를 “朕이 막 은혜로써 戎狄들을 회유하였는데, 네가 작은 이익을 탐하여 나의 大事를 무너트림은 어째서인가.” 하고 가옹을 내쳐 평민의 신분으로 직책을 수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자를 보내어 가옹이 탈취해온 것들을 유위신에게 돌려주어 위로하고 어루만져 달래니, 유위신이 이에 변방 안에 들어와 거주하며 끊임없이 공물을 바쳤다.
目
【目】 謝安은 젊어서부터 큰 명성이 있었다. 조정에서 그동안 禮를 갖추어 불러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고 會稽에 우거하여 아름다운 山水와 文籍을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비록 布衣의 신분이었으나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가 宰相의 임무를 맡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리하여 사대부들은 서로 “安石이 세상에 나오지 않으니, 蒼生들을 어찌한단 말인가.”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注+① 安石은 謝安의 字이다.
사안은 매번 東山에서 놀 적에 항상 妓女를 데리고 갔는데,
注+② 胡三省이 말하였다. “東山은 지금의 紹興府 上虞縣 서남쪽 45리 지점에 있었다.” 會稽王 司馬昱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안석이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므로 반드시 사람들과 함께 근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그를 부르면 반드시 올 것이다.” 하였다.
사안의 아내는 劉惔(유담)의 妹氏였다. 친정 집안과 謝氏의 가문이 귀하고 번성하였으나, 사안이 홀로 조용히 물러나 있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 이르기를 “대장부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였다.
注+③ 劉惔은 淸談을 잘하여 지위가 顯貴해졌고, 謝尙과 謝奕, 謝萬도 모두 方伯이 되어 한때 세력이 盛하였다.謝安
사안은 코를 막고 말하기를 “내가 벼슬하는 일을 면치 못할까 두렵소.” 하였다.
注+④ 〈“恐不免耳”는〉 또한 여러 형제들과 같이 벼슬함을 면치 못할까 두려워함을 말한 것이다.
아우 謝萬이 廢黜당하자, 사안은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가졌으니, 이때 나이가 이미 40여 세였다.
桓溫이 그를 司馬로 삼을 것을 청하자, 사안은 마침내 부름에 응하여 관직에 나아가니, 환온이 매우 예우하고 소중히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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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獨孤部와 没奕干이 數萬의 군대를 거느리고 秦나라에 항복하자, 秦王 符堅이 그들을 변방 안에 거처하게 하였는데,
注+① 獨孤는 烏桓 別部의 칭호이고, 沒奕干은 鮮卑 別部의 칭호이다. 本姓은 沒이고 이름은 奕干이었는데, 뒤에 姓名으로 部落의 칭호를 삼았다. 陽平公 符融이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戎狄은 얼굴은 사람이나 마음은 짐승입니다. 仁義를 알지 못하니, 그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우리에게 항복함은 실로 땅의 이로움을 탐내서요 우리나라의 仁德을 감사하게 여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감히 변경을 침범하지 못함은 실로 우리 군대의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요, 우리 나라의 은혜를 감사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들을 우리 백성들과 뒤섞여 살게 하면, 저들은 郡縣의 虛實을 엿보고서 반드시 변방의 근심거리를 만들 것이니, 그들을 변방 밖으로 옮기는 것만 못합니다.” 부견은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