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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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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年(227)
五年이라
魏明帝曹叡太和元年이요 吳黃武六年이라
春正月 吳討彭綺하여 禽之하다
綺自言爲魏討吳注+爲, 去聲.라하니 議者以爲因此伐吳 必克이리이다
魏主以問中書令孫資한대 資曰 番陽宗人 數有擧義者로되 衆弱謀淺하여 旋輒乖敗注+宗人, 猶宗賊也.하니이다
文皇 嘗密論賊形勢하여 言洞浦殺萬人하고 得船千數로되 數日間 船人復會注+殺萬人, 謂魏兵殺吳人.하고
江陵 被圍歷月 裁以千數百兵으로 住東門이로되 而其土地無崩解者 是有法禁하여 上下相維之明驗也注+裁, 與纔同. 崩解, 謂土崩瓦解也. 相維, 相維持也.라하시니이다
以此推綺컨대 未能爲權腹心大疾이라하더니 至是하여 果敗하다
二月 하다
魏司徒王朗 如鄴이라가 見百姓貧困이어늘 而魏主叡方營宮室하고 上疏諫曰 昔 大禹欲拯天下之患故 卑宮儉食하시고
句踐 欲廣禦兒之疆하여 亦約其身以及家하고 儉其家以及國注+國語 “句踐旣獲成於吳, 其地北至于禦兒, 非其身之所種則不食, 非其夫人之所織則不衣, 十年不收於國, 卒以報吳.” 禦兒, 吳‧越分界之所.하며 漢文 欲恢祖業故 罷露臺, 衣弋綈하고
霍去病 中才之將이로되 猶以匈奴未滅이라하여 不治第宅하니 明卹遠者略近하고 事外者簡內也注+卹, 憂也.니이다
今建始之前 足列朝會하고 崇華之後 足序內宮하고 華林, 天淵 足展遊宴注+建始‧崇華二殿, 皆在洛陽北宮. 華林, 園名. 天淵, 池名.하니
宜且先成象魏, 修城池注+象魏, 觀闕也. 象者, 法象也. 魏者, 高巍也. 餘悉罷하고 專以勤耕農, 習戎備爲事하시면 則民充兵強而寇戎賓服矣리이다
率諸軍하여 北駐漢中하고 使長史張裔 參軍蔣琬으로 統留府事하다
臨發 上疏曰 先帝創業未半而中道崩殂하시고 今天下三分 益州疲敝하니 此誠危急存亡之秋也
이나 侍衞之臣 不懈於內하고 忠志之士 忘身於外者 蓋追先帝之殊遇하여 欲報之於陛下也니이다
誠宜開張聖聽하사 以光先帝遺德하고 恢弘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하여 引喩失義하여 以塞忠諫之路也注+菲, 敷尼切. 菲薄, 微薄也.니이다
宮中, 府中 俱爲一體 陟罰臧否 不宜異同注+府中, 蓋丞相府也.이라
若有作姦犯科 及爲忠善者注+科, 律條也.어든 宜付有司하여 論其刑賞하여 以昭陛下平明之理 不宜偏私하여 使內外異法也니이다
侍中侍郞郭攸之, 費褘, 董允等注+時攸之‧褘爲侍中, 允爲黃門侍郞. 褘, 音暉. 此皆良實하여 志慮忠純이라 是以 先帝簡拔하사 以遺陛下하시니
愚以爲宮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然後施行하시면 必能裨補闕漏하여 有所廣益하리이다
將軍向寵 性行淑均하고 曉暢軍事하여 試用於昔日 先帝稱之曰能이라하사
是以 衆議擧寵爲督注+督, 謂大將.하니 愚以爲營中之事 悉以咨之하시면 必能使行陳和睦하고 優劣得所注+行, 胡郞切. 陳, 讀曰陣.리이다
親賢臣, 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 親小人, 遠賢臣 此後漢所以
先帝在時 每與臣論此事 未嘗不嘆惜痛恨於桓, 靈也니이다 侍中尙書, 長史參軍 此悉端良死節之臣이니
願陛下親之信之하시면 則漢室之隆 可計日而待也注+侍中尙書, 謂陳震. 長史參軍, 謂蔣琬也. 此二人皆亮所進用, 出師後, 恐帝不能用, 故屬之.리이다
臣本布衣 躬耕南陽하여 苟全性命於亂世하고 不求聞達於諸侯러니
先帝不以臣卑鄙하시고 猥自枉屈하사 三顧臣於草廬之中하시고 諮臣以當世之事注+猥, 鄙也, 多也.하시니 由是感激하여 遂許先帝以驅馳러니
後値傾覆하여 受任於敗軍之際하고 奉命於危難之間 爾來二十有一年矣니이다
先帝知臣謹愼이라 臨崩 寄臣以大事也하시니 受命以來 夙夜憂嘆하여 恐託付不效하여 以傷先帝之明이라
五月渡瀘하여 深入不毛注+瀘, 音盧. 賢曰 “瀘水, 一名若水, 出旄牛徼外, 經朱提, 至僰道入江. 在今巂州南, 特有瘴氣. 三月‧四月經之必死, 五月以後, 行者得無害, 故諸葛亮表云 ‘五月渡瀘.’ 言其艱苦也.” 不毛, 言草木不生也.러니 今南方已定하고 兵甲已足하니 當奬率三軍하고 北定中原하여
庶竭駑鈍하여 攘除姦凶하고 興復漢室하여 還于舊都 此臣所以報先帝而忠陛下之職分也니이다
至於斟酌損益하여 進盡忠言 則攸之, 褘, 允之任也 願陛下託臣以討賊興復之效하사
不效則治臣之罪하여 以告先帝之靈하시고 責攸之, 褘, 允等之慢하사 以彰其咎하시며
陛下亦宜自謀하사 以諮諏善道하고 察納雅言하여 深追先帝遺詔注+謀事曰諮, 咨事曰諏. 雅, 正也.하소서
臣不勝受恩感激하오니 今當遠離 臨表涕零하여 不知所言注+離, 力智切.이로소이다
遂行하여 屯于沔北陽平石馬注+水經註 “沔水逕白馬戍南, 謂之白馬城, 一名陽平關. 又有白馬山, 山石似馬, 望之逼眞.”하고 辟廣漢太守姚伷爲掾注+掾, 丞相掾也.하니 伷竝進文武之士한대
稱之曰 忠益 莫大於進人이로되 而進人者 各務其所尙이어늘 今姚掾 竝存剛柔하니 可謂博雅矣로다
魏主叡聞亮在漢中하고 欲大發兵攻之하여 以問孫資한대 資曰 昔武皇 取張魯 危而後濟
數言南鄭 注+言南鄭之地險阸深阻也.이요 斜谷道 爲五百里石穴이라하시니
今若進軍南鄭이면 道旣險阻하니 計用精兵及轉運 鎭守南方하고 遏禦水賊 凡十五六萬人이요 必當更有所興이니 天下騷動이라
此宜深慮 不若但以見(현)兵으로 分命大將하여 據諸要險注+見兵, 見在之兵.이니이다
亦足以鎭靜疆埸(역)이요 百姓無事하리니 數年之間 中國日盛이요 吳, 蜀必自敝矣리이다 乃止하다
夏四月 魏復行五銖錢하다
文帝罷五銖錢而用穀帛하니 人多巧僞하여 競以濕穀薄絹으로 爲市하여 嚴刑不能禁이라 復之하다
冬十二月 魏立貴嬪毛氏爲后하다
初魏主叡 爲平原王 納虞氏爲妃러니 至是하여 不得爲后 卞太后慰勉之한대
虞氏曰 曹氏自好立賤하니 未有能以義擧者注+武帝立卞后, 文帝立郭后, 皆非正室.이나 后職內事하고 君聽外政하여 其道相由而成이라
苟不能以善始하면 未有能令終者也 殆必由此亡國矣리이다 虞氏遂絀還鄴宮하다
太傅鍾繇上言호되 宜如孝景之令하여 其當棄市欲斬右趾者 許之하고 其黥, 劓, 左趾, 宮刑者 自如孝文易以髡笞 可以歲生三千人이니이다
詔公卿以下議하니 司徒朗 以爲 恐所減之文 未彰於百姓之目하고 而肉刑之問 已宣於寇讐之耳하리니 非所以來遠人也注+問, 聞通, 聲名也.
可按繇所欲輕之死罪하여 使減死髡刑이로되 嫌其輕者 可倍其居作之歲數注+魏制, 髡刑, 居作五歲. 內有以生易死之恩이요 外無以刖易釱之駭注+漢文帝除肉刑, 以完易髡, 以笞代劓, 以釱左右趾代刖.니이다
議者多與朗同이라 魏主叡亦以吳, 蜀未平이라하여 且寢하다
魏孟達 以新城來歸하니 魏將軍司馬懿 帥兵攻之하다
爲文帝所寵이러니 至是하여 心不自安하여 數與諸葛亮通書하여 陰謀歸蜀이러라
魏興太守申議 密表告之注+魏興, 蜀之西城郡也, 魏文帝改曰魏 議, 通鑑作儀, 儀, 耽之弟也.한대 惶懼欲叛이러니 司馬懿鎭宛하여 以書慰解之하고 潛軍進討하다
與亮書曰 宛去洛 八百里 去吾一千二百里 聞吾擧事하면 當表上이니 比相反覆 一月間也注+比, 及也.
則吾城已固 諸軍足辦이요 吾所在深險하여 司馬公 必不來하리니 諸將 無足患者라하더니 懿倍道兼行하여 八日而兵至城下하다


丁未年(227)
나라(蜀漢) 後主 建興 5년이다.
나라 明帝 曹叡 太和 원년이고, 나라 大帝 孫權 黃武 6년이다.
】 봄 정월에 나라가 彭綺를 토벌하여 사로잡았다.
】 처음에 彭綺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여 나라를 토벌하겠다.”注+(위하다)는 去聲이다.라고 하니, 의논하는 자들은 “이로 인하여 나라를 토벌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하였다.
魏主中書令 孫資에게 묻자, 손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番陽(파양)의 宗人이 의병을 일으킨 경우가 여러 번 있었으나 병력이 약하고 계책이 부족하여 곧바로 패망하였습니다.注+宗人宗賊(宗人들을 위주로 결성된 도적)과 같다.
옛날 文皇(曹丕)이 일찍이 의 형세를 은밀히 논하여 말씀하기를 ‘우리가 洞浦에서 적군 만 명을 죽이고 선박 천 척을 얻었으나 며칠 사이에 저들의 뱃사람들이 다시 모였고,注+殺萬人”은 나라 군대가 나라 사람을 죽임을 이른다.
江陵이 우리에게 포위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孫權이 겨우 천수백 명의 병력으로 東門에 주둔하였으나 그 영토가 무너지고 와해되지 않았으니, 이는 나라에 法禁이 있어서 上下가 서로 유지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험이다.’注+(겨우)는 와 같다. “崩解”는 흙이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서짐을 이른다. “相維”는 서로 유지함이다. 하셨습니다.
이로써 팽기를 추측하건대, 그는 손권에게 치명적인 근심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과연 팽기가 패하였다.
】 2월에 나라가 크게 宮室을 경영하였다.
나라 司徒 王朗鄴城에 갔다가, 백성들이 빈곤한데 魏主 曹叡가 한창 宮室을 경영하는 것을 보고는, 상소하여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옛날
句踐禦兒의 국경을 넓히고자 하여 또한 자기 몸을 단속하여 그 집안에까지 미쳤고 자기 집안을 단속하여 그 나라에까지 미쳤으며,注+國語≫ 〈越語 〉에 “越王 句踐이 이미 나라와 화평을 하여 그 영토가 북쪽으로 禦兒에 이르렀는데, 구천은 자신이 심은 곡식이 아니면 먹지 않고 자기 부인이 짠 것이 아니면 입지 않아, 10년 동안 나라에서 세금을 거두지 않고 끝내 나라에 보복했다.” 하였다. 禦兒나라와 나라의 경계가 나뉘는 곳이다.
먼 곳을 근심하는 자는 가까운 곳을 소략하게 하고 밖을 일삼는 자는 안을 간략하게 함을 밝힌 것입니다.注+는 근심함이다.
지금 建始殿의 앞은 朝會하는 신하들을 진열하기에 충분하고 崇華殿의 뒤는 內宮의 여인을 서열하기에 충분하며, 華林園天淵池는 놀고 잔치하는 자리를 펴기에 충분하니,注+建始崇華 두 궁전은 모두 洛陽北宮에 있다. 華林은 동산의 이름이고, 天淵은 연못의 이름이다.
마땅히 먼저 象魏를 만들고 城池(성벽과 해자)를 수리할 것이요,注+象魏觀闕(왕궁 문앞 양쪽에 세운 누대로 여기에 敎令을 내걸었음)이다. 이고, 高巍(높음)이다. 나머지는 모두 접어두고 오로지 밭 갈고 농사짓는 것에 부지런히 힘쓰고 武備를 익히는 것을 일삼으시면, 백성들이 번성해지고 군대가 강해져서 적과 오랑캐가 귀순할 것입니다.”
】 3월에 丞相 諸葛亮諸軍을 거느리고 나가 漢中에 주둔하여 中原을 도모하였다.
諸葛亮諸軍을 이끌고 북쪽으로 漢中에 주둔하고 長史 張裔參軍 蔣琬으로 하여금 남아 丞相府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諸葛亮이 出師表를 올리다諸葛亮이 出師表를 올리다
제갈량은 출발에 앞서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先帝께서 創業을 절반도 이루기 전에 중도에 崩殂(승하)하시고, 이제 천하가 셋으로 나뉘었는데 우리 益州가 피폐하니, 이는 진실로 국가가 위급하여 존재하느냐 멸망하느냐 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侍衛하는 신하들이 안(조정)에서 게을리하지 않고, 충성스러운 마음을 품은 군사들이 밖(외지)에서 자기 몸을 잊고 있는 것은 선제의 특별한 대우를 추모하여 폐하에게 보답하고자 해서입니다.
폐하께서는 진실로 聖聽(군주의 귀)을 열고 펴시어 선제의 遺德을 빛내시고 志士들의 사기를 넓히실 것이요. 망령되이 스스로 菲薄(자신을 하찮게 여김)하여 비유함에 本義를 잃어서 忠諫하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注+(박하다)는 敷尼이니, “菲薄”은 하찮게 여김이다.
宮中府中(丞相府)이 함께 일체가 되어야 하니, 잘하는 사람을 승진시키고 잘못하는 사람을 벌주는 것을 차별하여 달리해서는 안 됩니다.注+府中丞相府이다.
만일 부정한 일을 저질러 법조문을 범한 자와 忠善한 일을 한 자가 있으면,注+는 법조문이다. 마땅히 有司에게 맡겨서 형벌과 상을 논하여 폐하의 공평하고 분명하신 다스림을 밝혀야 할 것이요, 편벽되고 사사로이 하여 內外(宮中府中)로 하여금 법을 달리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侍中侍郞郭攸之, 費褘(비위), 董允 등은注+당시에 郭攸之費褘侍中이 되었고, 董允黃門侍郞이 되었다. 이다. 모두 어질고 성실하여 志慮가 충성스럽고 순수합니다. 이 때문에 先帝께서 선발하시어 폐하에게 물려주셨으니,
어리석은 은 생각하건대 宮中의 일은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이들에게 자문하신 연후에 시행하시면 반드시 폐하의 闕漏(부족한 점)를 보충하여 더욱 유익하게 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장군 向寵(상총)은 성품과 행실이 착하고 공평하며 軍事를 잘 알아서, 예전에 先帝께서 試用하시고는 그를 ‘능하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衆議로 상총을 천거하여 都督으로 삼았으니,注+大將을 이른다. 어리석은 은 생각하건대 營中의 일은 모두 그에게 자문하신다면, 반드시 行陣(항진)이 화목하고 人物優劣이 제자리를 얻을 것입니다.注+(항오)은 胡郞이다. (진영)은 으로 읽는다.
賢臣을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함은 先漢(先代)이 융성했던 이유이고, 소인을 가까이하고 현신을 멀리함은 後漢(後代)이 기울고 패망한 이유입니다.
先帝께서 생존해 계실 적에 과 이 일을 논할 때마다 일찍이 桓帝靈帝에 대하여 탄식하고 통한으로 여기지 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侍中尙書陳震長史參軍蔣琬은 모두 곧고 성실하여 충절에 죽을 수 있는 신하들이니,
원컨대 폐하께서 이들을 가까이하시고 신임하시면 漢室의 융성함을 날짜를 꼽아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注+侍中尙書陳震을 이르고, 長史參軍蔣琬을 이른다. 이 두 사람은 모두 諸葛亮進用한 사람인데, 出師한 뒤에 황제가 등용하지 않을까 염려되었으므로 이들을 부탁한 것이다.
은 본래 布衣(평민)로서 몸소 南陽 땅에서 농사를 지어 난세에 구차하게 性命(생명)을 보존하려 하였고, 제후들에게 알려지거나 영달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先帝께서는 신을 비루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이 직접 왕림하시어 草廬 가운데로 세 번이나 을 찾아주시고 에게 당시의 일을 자문하시니,注+는 비루함이고 많음이다. 은 이 때문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께 驅馳(국사에 분주함)할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 후 나라가 傾覆(경복)된 때를 만나 敗軍한 즈음에 임무를 맡고 危亂한 때에 명령을 받든 지가 21년이 되었습니다.
先帝께서는 신의 謹愼함을 아셨기 때문에 임종하실 적에 에게 大事를 맡기시니, 은 명령을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걱정하고 탄식하여, 부탁하신 것에 효험을 내지 못해서 선제의 밝음을 손상시킬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5월에 瀘水(노수)를 건너 깊이 불모지로 쳐들어갔습니다.注+이다. 李賢이 말하기를 “瀘水는 일명 若水이니, 旄牛의 국경 밖에서 발원하여 朱提를 지나 僰道(북도)에 이르러 長江으로 들어간다. 지금 巂州(수주) 남쪽에 있는데 특별히 瘴氣가 있다. 그리하여 3, 4월에 사람들이 이 물을 건너가면 반드시 죽으니, 5월 이후라야 물을 건너는 자들이 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諸葛亮表文에서 5월에 노수를 건넜다고 하였으니, 그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不毛”는 草木이 자라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이제 南方(南蠻)이 이미 평정되었고 병기와 갑옷도 풍족하니, 마땅히 三軍을 장려하여 거느리고 북쪽으로 中原을 평정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거의 저의 노둔한 재주를 다해서 姦兇을 제거하고 漢室을 흥복시켜 옛 도읍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 선제에게 보답하고 폐하에게 충성하는 직분입니다.
】 참작하여 損益(加減)해서 忠言을 다 아뢰는 것으로 말하면 郭攸之, 費褘, 董允 등의 책임이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에게 역적을 토벌하여 漢室興復하는 데 전력을 다하게 하시어,
효험이 없으면 의 죄를 다스려 先帝英靈에게 고하시고, 곽유지‧비위‧동윤 등의 태만함을 책하시어 그들의 허물을 드러내시며,
폐하께서도 또한 스스로 도모하시어 善道를 자문하시고 바른말을 받아들이시어 선제의 遺詔를 깊이 추념하소서.注+일을 도모하는 것을 라고 하고, 일을 자문하는 것을 라고 한다. 는 바름이다.
은 국가에서 받은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멀리 떠나야 하니, 表文을 대함에 눈물이 흘러 아뢸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注+(떠나다)는 力智이다.
諸葛亮이 마침내 출정하여 沔水 북쪽 陽平關石馬山에 군대를 주둔시키고,注+水經註≫에 “沔水白馬戍의 남쪽을 지나가는데, 이곳을 白馬城이라 하고 일명 陽平關이라고도 한다. 또 白馬山이 있는데, 산의 바위가 말[]의 모습과 비슷해서 멀리서 바라보면 말 모습과 거의 같다.” 하였다. 廣漢太守 姚伷(요주)를 辟召하여 丞相掾으로 삼았다.注+丞相掾이다. 요주가 文武를 갖춘 인사들을 아울러 登用하자,
제갈량이 요주를 다음과 같이 칭찬하였다. “나라에 충성하고 국가를 유익하게 함은 인재를 천거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그런데 인재를 추천하는 자들은 각각 자기가 숭상하는 바에 따라 추천하는 데 힘쓰기 마련인데 지금 丞相掾인 요주는 ()과 ()를 함께 보존하니, 박식하고 단아하다고 이를 만하다.”
魏主 曹叡諸葛亮漢中에 주둔해 있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공격하고자 하여 孫資에게 묻자, 손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에 武皇(武帝 曹操)이 張魯를 취할 적에 위태로운 뒤에야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무황께서 여러 번 말씀하기를 ‘南鄭은 바로 天獄 가운데이고注+〈“南鄭直爲天獄中”은〉 南鄭의 지형이 험준하고 깊이 막혀 있음을 말한 것이다. 斜谷道는 500리의 바위굴이다.’ 하셨습니다.
지금 만약 우리가 남정으로 進軍한다면 길이 이미 험준하니, 정예병과 수송에 필요한 병력, 그리고 南方을 진주하고 水賊을 막는 병사들을 헤아려봄에 모두 15, 6만 명이 필요하며 반드시 또다시 병력을 징발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천하가 진동할 것입니다.
이는 깊이 생각해야 하니, 다만 현재 보유하고 있는 병력을 나누어 大將에게 명해서 요해처를 점거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注+見兵”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병력이다.
이렇게만 해도 疆埸(강역)을 진정시키고 백성들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니, 몇 년 사이에 中國은 날로 강성해지고 蜀漢은 반드시 피폐해질 것입니다.” 曹叡가 이에 중지하였다.
】 여름 4월에 나라가 五銖錢을 다시 시행하였다.
】 처음에 文帝(曹丕)가 五銖錢을 혁파하고 곡식과 비단을 사용하였는데, 사람들이 대부분 속임수를 써서 다투어 젖은 곡식과 얇은 비단으로 유통하여, 엄한 형벌로도 금지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다시 오수전을 시행한 것이다.
】 겨울 12월에 나라가 貴嬪 毛氏를 세워 로 삼았다.
】 처음에 魏主 曹叡平原王이 되었을 적에 虞氏를 들여 로 삼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로 삼지 못하였다. 卞太后가 우씨를 위로하고 면려하자,
우씨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曹氏는 본래 천한 사람을 로 세우기를 좋아하니, 로운 일을 행한 자가 있지 않습니다.注+武帝(曹操)는 卞后를 세우고 文帝郭后를 세웠으니, 모두 正室이 아니다. 그러나 皇后는 안의 일을 담당하고 君主는 밖의 정사를 다스려서 그 가 서로 도와 이루어집니다.
만일 잘 시작하지 못하면 잘 끝맺는 자가 없으니, 거의 반드시 이 때문에 나라를 망칠 것입니다.” 우씨가 마침내 내쳐져 鄴宮으로 돌아갔다.
나라가 肉刑을 회복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결행하지 못하였다.
太傅 鍾繇가 다음과 같이 上言하였다. “마땅히 孝景帝의 법령과 같이 하여, 棄市刑에 해당되는데 오른쪽 발꿈치를 자르기를 원하는 자를 허락하고, 黥刑(얼굴에 刺字하는 형벌), 劓刑(코를 베는 형벌), 左趾刑(왼쪽 발꿈치를 자르는 형벌), 宮刑(去勢刑)을 받을 자에게는 孝文帝髡刑(곤형)과 笞刑으로 바꾼 것처럼 한다면, 한 해에 3천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詔令을 내려 公卿 이하에게 의논하게 하니, 司徒 王朗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형벌을 경감하는 글이 백성들의 눈에 밝게 게시되지 못하고 肉刑을 다시 가한다는 소문이 이미 도적과 원수의 귀에 들어갈 것이니, 먼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회유하여 오게 하는 방법이 아닐 듯합니다.注+과 통하니, 聲名(소문)이다.
죽을죄를 가볍게 하고자 하는 종요의 의견을 살펴서 사형을 감하여 髡刑에 처하게 하되, 형벌이 너무 가벼운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居作하는 햇수를 곱절로 올린다면注+나라 제도에 髡刑居作(죄수가 노역하는 것)이 5년이었다. 안으로는 죽음을 삶으로 바꾸어주는 은혜가 있고, 밖으로는 차꼬를 채우는 형벌을 刖刑(다리를 자르는 형벌)으로 바꾸는 놀라움이 없을 것입니다.”注+ 文帝肉刑을 없애서 髡刑(머리와 수염을 자르는 형벌)을 完刑(신체를 훼손하지 않고 노역만 시키는 형벌)으로 바꾸고, 劓刑(코를 베는 형벌)을 笞刑(곤장을 치는 형벌)으로 대신하며, 刖刑(다리를 자르는 형벌)을 양쪽 발에 차꼬를 채우는 형벌로 대신하게 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대부분 사도 왕낭의 의견과 같았다. 魏主 曹叡蜀漢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 하여 우선 중지하였다.
나라 孟達新城을 가지고 나라(蜀漢)로 귀순하니, 나라 장군 司馬懿가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였다.
】 처음에 孟達文帝의 총애를 받았었는데, 이때에 내심 스스로 불안해하여 諸葛亮과 자주 편지를 통하여 은밀히 蜀漢으로 귀순할 것을 모의하였다.
魏興太守 申議가 은밀히 表文을 올려 이 일을 아뢰자,注+魏興蜀漢西城郡인데, 나라 文帝魏興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는 ≪資治通鑑≫에는 로 되어 있으니, 申儀申耽의 아우이다. 맹달이 두려워하여 배반하려고 하였는데, 이때에 司馬懿宛縣에 진주하여 맹달에게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여 달래주고는 군대를 은밀히 이동하여 토벌하였다.
】 처음에 孟達諸葛亮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宛縣洛陽과의 거리가 800리이고, 우리와의 거리가 1,200리입니다. 우리가 擧事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응당 表文을 올릴 것이니, 표문을 올려 서로 왕복하게 되면 1개월이 걸립니다.注+는 미침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은 이미 수비가 견고해지고 병사들은 충분히 전쟁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있는 곳은 매우 험준하기 때문에 司馬公(司馬懿)이 반드시 오지 못할 것이니, 딴 장수들은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司馬懿가 행군 속도를 倍加하여 8일 만에 군대가 아래에 이르렀다.


역주
역주1 魏大營宮室 : “曹氏가 나라를 얻은 이후 曹丕가 처음 ‘洛陽에 가서 宮室을 경영하였다.’라고 썼고, 曹叡가 이어서 ‘크게 궁실을 경영하였다.’라고 썼다. 父子의 처음 政事가 이와 같으니, 또한 후손에게 물려준 계책이 잘못되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비록 오랫동안 그 나라를 소유하고자 하나 될 수 있겠는가.[曹氏自得國以來 丕始書如洛陽營宮室 叡繼書大營宮室 父子初政如此 亦足以知詒謀之謬矣 雖欲久有其國 得乎哉]” ≪發明≫
역주2 大禹는……하셨고 : ≪論語≫ 〈泰伯〉에 孔子가 禹王을 찬미한 말씀으로 “禹王은 내 비난할 데가 없으시다. 평소 飮食은 간략하게 하면서도 〈祭祀에는〉 鬼神에게 孝道를 다하시고, 衣服은 검소하게 하면서도 黻‧冕의 祭服에는 아름다움을 다하시고, 宮室은 낮게 하면서도 〈백성을 위한〉 治水 사업에는 힘을 다하셨으니, 우왕은 내 비난할 데가 없으시다.[禹吾無間然矣 菲飮食而致孝乎鬼神 惡衣服而致美乎黻冕 卑宮室而盡力乎溝洫 禹吾無間然矣]”라고 보인다.
역주3 漢……입었고 : 漢 文帝가 露臺를 짓기 위해 목수에게 비용을 계산하도록 하였는데, 노대 하나의 비용이 중산층 열 집의 재산과 맞먹는 것을 알고 先帝가 남긴 궁실을 그대로 사용하고 누대를 짓지 않았다. 또한 弋綈로 만든 질박한 옷을 항상 입었고 총애하던 愼夫人에게도 땅에 끌릴 정도로 긴 옷은 입지 못하게 하는 등 늘 검약을 실천하였다.(≪史記≫ 〈孝文本紀〉)
역주4 霍去病은……않았으니 : 霍去病은 漢 武帝 때 匈奴를 여러 차례 정벌하여 큰 공훈을 세웠던 장군인데, 무제가 그를 위해 집을 지어주려 하자, 곽거병이 말하기를 “흉노를 멸망시키지 못했으니, 집을 장만할 수 없습니다.[匈奴不滅 無以家爲也]”라고 하였다.(≪漢書≫ 〈衛靑霍去病傳〉)
역주5 法象 : 죄인을 다스리는 모습의 法을 이른다. ≪周禮≫ 〈天官 太宰〉에 “정월 초하루 날씨가 처음 온화하면 다스리는 법을 여러 諸侯國의 都鄙에 반포하여 죄인을 다스리는 모습의 법을 象魏에 매달아 萬民들로 하여금 이 모습을 보게 했다.[正月之吉 始和 布法于邦國都鄙 乃縣治象之法于象魏 使萬民觀治象]”라고 보인다. 都鄙는 도시와 시골을 이른다.
역주6 丞相亮……以圖中原 : “劉縯이 일어남에 ‘帝室을 흥복시키려 하였다.’라고 쓴 것은 특별히 쓴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中原을 도모하였다.’라고 특별히 썼으니, 諸葛亮이 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회복하려 한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이로부터 제갈량이 魏나라를 다섯 번 정벌함에 반드시 ‘丞相’ 또는 ‘右將軍’이라고 썼으니, 그를 인정한 것이다.[劉縯之起 書曰興復帝室 特筆也 於是特書曰以圖中原 其予亮以討復之義矣 自是亮五伐魏 必書丞相若右將軍 予之也]” ≪書法≫
“諸葛亮은 劉備가 세 번 찾아가 세상에 나온 뒤로부터 험한 일을 겪으면서 昭烈을 좌우에서 모셨는데, 얼마 되지 않아 遺詔를 받아 정사를 보필하였다. 비록 남쪽 오랑캐를 평정했다고 하였으나 漢室의 王業을 회복하지 못하고 나라의 賊을 肅淸하지 못했으니, 진실로 응당 때를 틈타 進取해야 하였다. 지금 大軍을 직접 거느리고서 북쪽으로 漢中에 주둔하여 장차 국경을 關中과 洛陽으로 넓힐 것을 계획해서 예전의 강토를 회복하려고 하였으니, 그 뜻이 어찌 구차하게 한 모퉁이에서 편안하고자 할 뿐이었겠는가. ≪資治通鑑綱目≫에서 ‘丞相 諸葛亮이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 漢中에 주둔하여 中原을 도모하였다.’라고 썼으니, 이를 읽음에 그 正大한 기상이 늠름하여 아직도 생기가 남아 있어 의로운 명성이 천지 사이에 가득하다.[亮自三顧而出之後 間關跋履 左右昭烈 未幾受遺輔政 雖曰平定南夷 然漢業未復 國賊未淸 固當乘時進取 今焉身率大軍 北駐漢中 將以規恢關洛 克復舊物 其志豈肯苟安一隅而已 綱目書丞相亮率諸軍 出屯漢中 以圖中原 其正大氣象 讀之凜凜 猶有生意 義聲充滿於天地之間矣]” ≪發明≫
역주7 (頹傾)[傾頹] : 저본에는 ‘頹傾’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傾頹’로 바로잡았다.
역주8 直爲天獄中 : 天獄은 지형이 전후, 좌우가 모두 막혀 있어서 감옥과 같은 것을 이르는바, ≪資治通鑑≫ 標點本에는 ‘天獄’에서 句를 끊고 ‘中’을 아래로 연결하였다.
역주9 魏議復肉刑 不果行 : “肉刑은 漢나라 文帝 때에 처음으로 없앴다고 썼는데, 이때 거의 400년이 되었다. 그런데 魏나라가 이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니, 또한 잔인하다. ‘不果行’이라고 쓴 것은 다행으로 여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육형을 쓴 것이 2번이다(이해와 漢 文帝 13년(B.C.167)).[肉刑 自漢文帝始書除 於是近四百年矣 而魏欲復之 亦忍矣哉 書不果行 幸之也 終綱目書肉刑二(是年 文帝十三年)]” ≪書法≫
역주10 (與)[興] : 저본에는 ‘與’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興’으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11)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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